사천당가 1
“하하하! 그래서 제가 단칼에 그들을 베며, 외쳤죠. ‘감히 나 청아흑랑 앞에서 여인을 희롱하는 자 누구냐?’ 그러자 그 불한당들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쳤다는 거 아닙니까. 하하하하.”
곽명신은 쾌활한 성격을 자랑이라도 하듯 일행의 분위기를 주도해 나갔다. 다만 단 한사람. 남궁상욱만이 뚱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몸으로 유이리를 가려, 곽명신의 시선을 막았다. 곽명신은 그런 남궁상욱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또 다른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유이리는 곽명신의 영웅담이 싫지 않았다. 어린시절 유이리는 수많은 영웅들과 용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전설과도 같은 그들의 대 서사시는 유이리의 어린 마음을 자극하며, 꿈을 키워주었다.
그래서일까? 유이리는 다른 사람들의 영웅담을 듣는 것을 좋아했다. 수많은 난관과 위기가 닥칠 때 마른침을 삼키며 함께 긴장을 하고, 위기를 벗어날 때 함께 안도를 하며, 악의 심장에 검을 꽂을 때 함께 환호를 하여왔다. 물론 터무니없는 자기 자랑의 경우는 지극히 경멸했지만 곽명신은 영웅담처럼 포장된 순수한 자기자랑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풀어 흥미를 유발시켜 거부감이 들지 않게 하였다.
유이리의 눈에는 곽명신이라는 남자가 꽤 흥미롭게 다가왔다. 남궁상욱과는 전혀 다른 느낌. 남궁상욱이 잘 단련된 예리한 얼음검이라면, 곽명신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이미지다. 경박한 듯 하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모습과 주변의 분위기를 밝게 하기위한 노력은 높은 평가를 주게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정도를 걷는 백도 협사로 보이지만 그의 주변에 흐르는 기류는 남궁형제나 이형진과는 이질적이었다. 그러나 적대감이 없고, 살의가 없는 기운인데다 천성이 밝게 행동하는 지라 유이리는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다.
곽명신과 만난후로 삼일을 더 말을 달려온 지금, 드디어 성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야~~. 드디어 성도가 보이는군. 힘들었죠? 유소저. 조금만 더 참으세요. 오늘은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구고, 푹신한 침상에서 주무실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당세보는 유이리를 돌아보며 웃는 말을 했으나 얼굴에는 그보다는 미안함이 더 많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다. 기실 낙양에서 이곳 사천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평소의 삼분지 이에 불과할 정도로 강행군을 했다. 따라서 먹을 것도 변변치 못했고, 잠자리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평범한 여성이 견디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유이리가 범상하지 않은 신비 내력을 사용한다고는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어려서부터 내외공을 익혀온 자신들 역시 힘이 들어 입에서 단내가 나는 상황인데 연약한 유이리를 말해 무엇 하랴.
그러나 당세보나 남궁형제들이 모르는 것이 하나가 있다. 유이리의 신성력. 피로의 회복(Recover from Fatigue)의 권능을 사용하면 여행을 하며 쌓인 피로를 조금씩이나마 풀어줄수 있다. 다만 피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상당량의 피로는 이후에 다시 중첩하여 발생하지만, 야간 보초를 서는 것도 아니기에 사용하는데 문제는 없었다. 물론 유이리의 앞에 함께 타고 간 연에게도 틈틈이 걸어주는 것을 잊지 않았기에 강행군에 의한 피로를 줄여줄 수 있었다.
다만 곽명신이 합류한 다음에는 유이리는 상욱과 연은 상민과 함께 말을 탔기에 피로 회복의 권능을 사용하지 못했고, 삼 일간 쌓인 피로가 유이리와 연의 얼굴위를 비집고 올라왔다. 당세보는 그간 유이리가 강한 척을 하며 무리를 했다고 스스로 자책을 하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유이리는 별일 아니라는 뜻으로 얼굴에 미소를 지었으나 그런 유이리의 모습이 당세보는 더욱 부담스럽고 미안했다. 자신의 사정만 아니었다면 천천히 여유를 두고 천하절경을 구경하며 왔을 텐데.
당세보는 본가에서는 최상의 대접을 준비하리라 다짐했다. 그런 당세보의 눈에 드디어 본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당세보의 얼굴이 굳어졌다. 사진(死陣)이 당가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펼쳐져 있다. 다른 문파들이나 세가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천당가는 본가를 중심으로 방진(防陣)을 펼쳐놓는다. 그러나 사천당가는 그들보다 그런 방진에 더욱 신경을 쓴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에 능통해 있다. 그 이외에도 편법(鞭法)이나 금나수(擒拿手)에도 능숙하고, 검술이나 기타 권각술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아무래도 독과 암기를 배제하고 배교해보면 타 문파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불의의 기습을 받았을 경우 대처가 어렵다는 약점을 안고 있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방법이 연구되어온 결과가 바로 철저한 기문독진(機門毒陣)이다.
사천당가의 본가에 펼쳐진 기문독진과 동급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제갈세가의 본가에 있는 기관진식(機關陣式)정도. 그 정도로 당문의 기문독진은 높은 평가와 확실한 살상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사천당가와 같은 거대 세가에는 언제나 외부손님이 드나들기에 이런 방진을 늘상 펴놓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정문으로 들어올 수는 있게 정면에 생문(生門)을 열어 놓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런 사진(死陣)은 전시(戰時)나 세가에 위기가 닥쳤을 경우에나 펼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 사진이 지금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당세보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기문독진은 사천당가의 모든 용독술과 암기술에 기관진식을 첨가하여 만든 것으로 한번 발동이 되면 내부에서 생문을 열 때까지 그 누구도 나가거나 들어갈 수가 없는 완벽을 자랑하는 기관진식이다. 당세보는 세가의 오리(五里) 밖에서 멈춰 섰다.
“잠시 멈춰 서게. 방진이 펼쳐져 있네.”
당세보의 말에 일행은 그 자리에 멈춰서 당세보의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무림에서 칼밥을 먹는 사람이라면 사천당가의 방진에 대한 풍문은 한두 가지 듣게 마련이고, 설사 그 풍문이 허풍이라 할지라도 말려들면 재미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모두들 주의를 기울였다.
“잠시만 기다리게.”
당세보는 품에서 긴 막대를 몇 개 꺼내 바닥에 박은 뒤 심지에 불을 붙였다. 심지가 타들어 가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하늘로 쏘아지자 청명한 하늘에는 노랗고 빨간 연기가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가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세가의 내부에서도 파랗고 붉은 연기가 쏘아 올라지자 당세보는 그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다 다시 몇 개의 연기를 쏘아 올렸다.
“휴~~ 이제 되었네. 곧 열릴 거야.”
당세보는 일이 잘 풀렸는지 표정이 밝았다. 유이리는 당세보의 행동에 밀려오는 호기심을 감출 수 없었다.
“당 오라버니. 방금 전에는 무엇을 하신 거에요?”
“유매.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니야.”
남궁상욱은 유이리를 말렸다. 각 문파마다 신호체계는 다르며 그것은 기밀에 속하기에 각각의 문파 내에서도 특정지위 이상의 인물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당세보는 그런 남궁상욱에게 웃어 보였다.
“괜찮아. 에~~ 저건 신호야. ‘내가 이곳에 왔으니 문 좀 열어줘~’ 라고 하니까 ‘너 진짜냐?’ 하고 물어본 거고, ‘그럼 가짜냐?’ 하고 내가 대답했지. 그러니 곧 문을 열어 줄 거야.”
당세보는 연기 속에 있는 복잡한 암호체계를 완전히 무시한 다음에 간단하게 자신이 한 행동을 알려 주었다. 남궁형제만 있었다면 좀 더 자세히 알려줄 수도 있지만 이현진은 세가와는 다른 구파의 일원이고, 곽명신은 육룡 중 일인이라고는 하나 아직 그 정체나 내력을 알 수가 없는 인물이다. 함부로 세가의 비밀을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잠시 후 일행과 당문세가와의 사이에 흐르고 있던 기묘한 기류가 변하고 당세보는 흙과 공기의 흐름을 재더니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방진을 완전히 열지는 않은 듯 하다. 그러니 내 뒤를 바싹 따라와라. 상욱이하고 상민이는 유소저하고 연이 잘 챙기고.”
말을 마친 당세보는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이리는 남궁상욱의 옆에 붙었고, 연은 상민이 들쳐 안은 채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에는 심상치 않은 기류와 옅은 안개가 끼어 있었으나 그저 단순한 길이었다.
유이리는 호기심에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단지 느낌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틀린 것이 없다. 예전에 대마법사 케이님의 결계 안에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마기(魔氣)가 뿜어져 나왔으나 이곳은 너무도 평온했다.
한참을 걷자 거대한 문이 보였다. 문 위의 현판에는 필사극독(必死劇毒)이라는 글이 써져 있어 위압감을 주었다. 남궁세가의 현판에 써있는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라는 글이 경외심과 위압감을 주었다면 당문세가에 쓰여 있는 글은 공포감과 위압감을 주었다.
문에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나무의 마찰음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당세보는 가장 앞에 서서 휘적휘적 안으로 들어갔다.
문안 연무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무장의 끝의 정자로 통하는 계단에는 작달막한 풍채좋은 노인이 당세보와 같은 정도로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과 서 있었다. 당세보를 비롯한 일행은 그 앞으로가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조부님. 여행을 마치고 이제 돌아왔습니다.”
노인은 잘 보이지도 않는 목을 힘겹게 끄덕이며 인자로이 웃었다.
“그래. 수고했다. 상욱이 상민이도 어서 오너라. 그리고 유소저도 자기 집이다 생각하고 편히 쉬시구려. 노부는 당철이라고 하오. 남궁영 그 영감과는 의형제를 맺고 있어 내 유소저를 손녀처럼 대하고자 하니 유소저도 노부를 친할애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시구려.”
당철의 말에 유이리는 더욱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당철은 뭐가 좋은지 얼굴에 미소를 지울지 몰랐다. 그때 저 멀리서 힘차게 땅을 박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 욱! 오! 라! 버! 니!!!!”
그곳에는 연 정도로 어려보이는 소녀가 상욱에게 우아하게 몸을 날려 그의 목에 매달리고 있었다.
“너무하셨사와요, 상욱 오라버니~~. 제가 그리 서신을 보냈는데 답장 한 번 안 해 주시다니. 그러나 이렇게 저를 만나기 위해 그 먼 길을 오셨으니 모두 용서해 드리겠사와요~~.”
10살을 조금 넘겼을 나이에 젖살이 아직 다 빠지지 않아 통통하고 당세보의 가족과 같지 않게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귀여운 소녀는 남궁상욱에게 매달려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이리는 속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매우 기분이 언짢다는 것이다.
소녀는 그런 유이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어 주었다. 상욱을 바라보던 유이리는 그걸 보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래그래. 내 며칠 이곳에 머물러야 하니 잘 부탁한다.”
상욱은 유이리에게나 보였을법한 밝은 표정으로 소녀를 대했다. 소녀는 상욱의 말에 심통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되옵니다.”
“엥?”
소녀의 의외의 말에 상욱보다는 당세보가 더욱 놀라며 당황해 했다. 소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작 며칠이라니요. 적어도 보름이상 푹 쉬셔야 하옵니다.”
소녀가 고목나무에 매미 매달리듯 달라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남궁상욱은 크게 괘념치 않았다. 어려서부터 잘 알고 지냈고, 동생마냥 친하게 지내왔기에 오랜만에 만난 오라버니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것으로 인식했다.
남궁상욱은 유이리에게 소녀를 소개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내려앉았다.
쿵!
유이리는 심통이 가득한 얼굴로 상욱을 외면하고 있었다. 남궁상욱은 조급해 졌다.
‘오해다!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어!!’
그러나 너무 성급하게 서두르다 보면 실수를 발생하는 법. 상욱은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고 소녀를 안아 내렸다. 그리고 소녀를 유이리에게 소개했다.
“유매? 저기 이쪽은 당세보 형님의 동생인 당화연(唐花漣)이라고 한다. 화연이도 인사를 하렴. 이번에 이 오빠네 가족이 된 유이리 언니란다.”
화연은 꼭 쥐고 있던 상욱의 손을 놓고 유이리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시와요. 당화연이라 하옵니다. 잘 부탁드리겠사와요.”
소녀의 앙증맞은 말과 인사에 유이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하였다. 심통은 어디 갔는지 이미 그 자취를 감추었고, 눈앞에 있는 화연이의 귀여움만이 유이리의 마음에 자리했다. 유이리는 쪼그려 앉아 두 팔을 벌려 화연이를 끌어안았다.
“꺄~~ 너무 귀여워~~~. 너도 내 동생해라~~~~.”
“에? 에?”
화연은 느닷없는 유이리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에? 라니. 자~ 따라 해봐. 언!니!”
“언……. 니.”
당화연은 힘겹게 유이리가 하는 말을 따라했다. 유이리는 그런 화연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다시 푹 끌어안았다.
“허허. 저 낮가람이 심한 아이가 저렇듯 쉽게 사람을 대하다니 대단하구려. 그럼 화연이는 유소저를 안내해 주고, 나머지는 나와 이야기를 좀 하세나.”
당철은 허허 웃으며 내당으로 들어갔고, 남궁형제와 당세보는 물론 이현진과 곽명신까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당철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유이리의 품에 안긴 채 그 광경을 바라보던 화연은 자신에게 살기를 뿜어내는 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당화연은 힘겹게 유이리의 품에서 벗어나 그녀의 옷소매를 잡아 당겼다.
“일단 제 방으로 가시와요. 제가 차를 한잔 대접해 드리겠사와요.”
유이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화연이가 잡아당기는 대로 따라갔다.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연은 한달음에 달려와 유이리의 자유로운 팔에 있는 옷소매를 잡으며 매달렸다. 그리고 화연을 바라보며 유이리 몰래 혀를 낼름 내보였다. 모른 척 그 광경을 바라있는 유이리는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당철을 따라 상욱 일행이 들어간 곳은 당가의 내당 깊숙한 곳에 위치한 회의실이다. 이곳에서 당가의 모든 진로가 논의되며 대소사의 결정이 내려지는 곳이다. 당철이 탁자의 끝에 있는 상석에 앉자 모두들 적당한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당철과 상욱일행 이외에도 당세보의 부친 당명원과 총관 주대를 비롯하여 몇몇 장로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르고 당철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간 별일 없었느냐?”
당철의 말에 당세보는 남궁형제와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자객의 기습을 받아 죽을 뻔 한 일을 남궁형제와 유이리가 도와준 일, 좌장군 조장군가의 결혼식의 참석, 무림맹주 고청천과 했던 대화, 남경상단 엄백령이 벌인 사건과 그 일을 유이리의 구출작전 때 만났던 독고평의 일, 이곳까지 오면서 만난 곽명신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히 늘어놓았다.
“그리고 이것이 곽대협의 상처에서 채취해 낸 조직입니다. 이것을 조사 연구하면 당가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당세보는 품안 깊숙이 간직하고 있던 소자기(小瓷器)를 꺼내 탁자의 위에 올려놨다. 순간 몇몇 장로들의 눈에서 기괴한 안광을 뿜어냈다. 주총관은 장로들의 부담스러운 눈빛을 한몸에 받으며 자기(瓷器)를 조심스럽게 들고 밖으로 나가 무엇인가를 지시한 후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 있습니까?”
상민은 당철을 바라보며 거두절미 하고 직접적으로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방진을 펼쳐놓는다 해도 생문까지 없앨 정도로 완벽하게 설치했다는 점은 외부로부터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겠다는 의도다. 언제나 외부인 들이 드나드는 거대 세가의 일반적인 대처법과는 다르다.
상민이의 질문에 당명원의 얼굴에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당명원이 당철을 바라보자 당철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얼마 전에 외당의 제자 하나가 습격을 받았다. 이상한 점은 상처를 아무리 치료를 해도 상처가 전혀 아물지 않아 끝내 숨졌다. 그래서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신을 부검실로 옮겼는데 그 시신이 사라졌다.”
“사라지다니……. 그럼 누가 와서 시신을 훔쳐가기라도 한 것인가요?”
당세보의 경악에 찬 음성에 주총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차라리 다행이겠습니다만…….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그 시체가 스스로 일어나 움직였습니다.”
“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남궁형제는 경악의 차원을 넘어가게 하는 주총관의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당철은 그런 남궁형제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하지. 나도 내 두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다면 미친놈 헛소리로 치부했을 테니.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그런…….”
시체가 살아 움직이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당철의 사회적 위치와 권위는 말도 안 되는 이 헛소리에 진실이라는 증표를 부여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곽명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당철을 바라보았다.
“혹시 그 시체에는 도검이 통하지 않지 않았습니까?”
곽명신의 말에 당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도검은 물론이요, 우리 당가가 자랑하는 독과 암기도 그놈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지. 그래서 초반에 수많은 제자들이 피해를 입었고, 이후 검기를 사용할 줄 아는 각 당주 급들의 인물들이 와서 겨우 진압할 수 있었다네.”
“역시.”
“혹시 곽대협이 말하던 그 야구자일지 모른다는 괴수와 같다고 보시는 것입니까?”
이현진이 자리에 앉아 턱으로 손을 가져가는 곽명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곽명신은 고개를 끄덕여 현진의 말을 긍정해 주었다.
“십중팔구는 그럴 거요. 그놈들 역시 내 청랑도로 베어내도 전혀 고통을 못 느끼더이다. 게다가 피부는 얼마나 두꺼운지 검기로 덮지 않으면 베기도 쉽지 않더군요.”
회의장의 분위기는 순간 침울해 졌다. 검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대 문파라면 모를까 중소 군파에서는 파마다 한두 명이 있을까 말까한 것이 검기를 사용하는 무사이다. 그런 수준이 되어야 한번 겨뤄볼까 말까한 괴물이라니.
“그럼 교전 중에 희생된 제자들은 어떻게......”
상욱은 당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런 괴물이라면 아무런 희생없이 제압했을 리가 없다. 뒤에 이어졌을 말은 ‘처리했습니까?’ 였겠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다. 생각대로 당철의 인상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런 당철을 대신해서 주총관이 대신 대답했다.
“전투중 상처를 입은 제자들은 몇몇을 빼고는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상처가 아물지 않으니 대다수가 출혈과다로 숨졌지요. 그리고 전사한 제자들의 시체는 모두 화장(火葬)시켰습니다. 설사 우리의 예상이 틀렸다 치더라도 그와 같은 상황을 또다시 발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살아남은 제자들 역시 격리 시켰습니다.”
주총관은 죄지은 사람처럼 대답했다. 말이 격리지 사실상 감금이나 다름이 없다. 일반적으로 세가를 위해 싸우다 죽은 제자들은 당문세가의 공동묘지에 안착되는 것이 관행이다. 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제자들의 시신을 모아 일괄적으로 화장시킨 것은 그렇다 쳐도, 그 시신을 해부(解剖)한 것과 부상을 입은 제자들을 격리, 감금 했다는 것은 세상에 알려지면 천하군웅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문세가는 그러한 대외적인 이미지보다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리를 추구하는 가문이다. 그렇기에 그 효과가 확실하고 강하지만 비겁하다는 이미지가 강한 암기와 용독술(用毒術)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하나의 거대 세가를 이루어 낸 것이다.
남궁상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보면 비정하지만 정확한 판단이다.
“이 방진은 외부로부터 세가를 지키는 의미도 있지만 만에 하나 잘못되어도 세가 외로 피해를 확산시키지 않기 위함이다. 이미 부상을 입은 제자들이 있는 곳에는 2중의 기관진식을 깔이 놨다. 아직 이곳은 안전하지만 확실치 않으니 이리 처리를 한 것이다. 물론 이 내용을 알고 있는 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선의 결정이셨습니다.”
남궁상욱은 당명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시체가 살아 움직이며 사람을 습격했다. 이 상황에서 외부에서의 습격을 받는다면 큰 피해를 볼 수도 있다. 또한 세가 내에서 큰 문제가 발생해도 그 피해를 세가 내에서만 잡아두고 그 피해를 외부로 유출시키지 않겠다는 큰 결심이다. 물론 세가 내 핵심인물은 이곳을 빠져나가 다시 재건을 노리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결정이다.
뭔가를 잠시 생각하던 곽명신은 남궁상욱을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말이오. 내 상처 역시 당문세가의 제자들이 입은 상처와 대동소이하지 않소? 그런데 내 상처는 어떻게 고친 것이오?”
그 말에 당세보의 고개가 곽명신을 향했다.
“확실히 내가 뿌린 금창약은 듣지 않았었소. 그런데 유소저가 손을 쓰니 상처가 아물었지.”
“그게 사실이냐?”
당명원은 당세보를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습니다. 유소저는 의술에 대단한 조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해독하지 못한 독을 단번에 해독했을 뿐더러 생사를 넘나들게 하는 상처를 치료하여 제게 구명지은의 은혜를 입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천당가제 금창약으로도 치료가 되지 않던 곽대협의 상처 역시 쉽사리 치료를 해냈습니다.”
당세보의 말에 당문세가의 인물들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천하제일독가로 평가되는 것이 당문세가다. 그리고 당세보는 그 당가의 소가주다.
당세보보다 더 많은 독을 알고 해독할 수 있는 인물은 당가는 물론이고 천하를 통틀어도 열손으로 꼽아야 한다. 물론 천하에 알려진 인물로는 단 한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당가와 독문의 인물이다. 그런데 고작 갓 20을 넘긴 여인이 독으로 당세보를 능가하다니 정녕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각종약물 역시 천하에 손꼽히는 효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효능의 약으로도 치료를 하지 못한 것을 쉽사리 치료를 하다니.
“뭐하느냐. 어서 가서 유소저를 모셔오지 않고, 아니 아니다. 명원이하고 세보가 직접 가라. 가서 정중히 유소저를 모셔와라.”
당명원과 세보가 자리를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회의실에는 침울한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밝은 희망이 대신했다. 외부로부터 아름다운 희망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