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해피레그 50km 후기
1. 감동의 시효
세상사 모두 시효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 기억이 흐려지고, 읽는 이의 감동도 준다.
후기도 같다.
잊히고, 식기 전에 짧더라도 빨리 몇 줄 적자.
집행부가 상품을 제시하기 전에,
상품욕의 후기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Enjoy the meal, while it is warm.
2. 친절
7시 반 남짓, 아주 일찍 현장에 갔다.
배번 주세요.
그러나 아직 배번 정렬도 안 된 시각.
그 후로 두 번 더 찾아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 아름다운 여성분이 다가와 조용히 손에 쥐어준다.
초로의 뚱뚱이가 안쓰러웠나 보다.
‘쉿! 비밀이에요.’
출전자 명단이 있는 장막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자봉 한 분이 도와 주셨다.
‘오늘 첫 번째 분이십니다.’
3. 반달
잠수대교를 지나 한남대교, 동호대교, 성수대교, 청담대교... 여기가 어딘가.
나는 2000년도부터 반달(반포달리기)에서 달리기 맛을 들였다.
때로는 주자로 달리고, 어느 날은 준비요원으로 준비물품을 나르곤 했다.
지금도 당시 서울마라톤 분들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마치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포근하다.
다만 몸이 23년 전과 다를 뿐.
4. 수박화채
과거 후기에서 ‘화채 다섯 잔을 마신 사람입니다.‘ 라는 글을 읽었다.
이 사람 많이도 마셨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내가 막상 현장을 보니 스무(20)잔은 마셔야 성이 찰까 말까?
다음에는 용기가 좀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쓰는 물 컵으로는, 눈치가 보여서 솔직히 석 잔 마시면서도 힘들었다.
물론 봉사자님께서는 얼마든지 드세요, 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5. 편의점과 여유
일행 몇몇과 갈 때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맥주 마시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오면서 기록이 좋으면 한 캔 하자’로 정리했다.
어차피 우리는 행복한 한 여름 밤을 기대했으니까.
그런데 정작 올 때는 다 뿔뿔이 흩어져서,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입상을 노리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유롭고, 아름다운 대회가 어디 있을까?
6. 종아리의 땀과 디톡스
태어나서, 기억하는 한 가장 많은 땀을 흘린 것 같다.
어제 밤 일기예보는 한 밤중에 29도, 새벽에 26-7도였다.
울트라 가방에 물통과 비상 잡품 넣고 달리는 내내 비처럼 땀이 흘렀다.
바지에서도 뚝뚝 물이 떨어졌다.
머리에 수건을 묶고, 목에 스포츠타월을 두르고 수시로 닦았다.
우연히 앞에 달리는 여성 주자 종아리를 보았다.
거짓말처럼 ‘물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 몸 안의 모든 물을 교체하면서,
노폐물 배출은 덤, 디톡스 제대로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7. 코스 길이의 오차
‘어, 형!’
돌아오는 어느 지점에서, 머리에 물을 받고 쉬고 있는데, 누가 소리쳤다.
‘누구야?’
혼미한 정신으로 잘 보이지도 않았는데, 이 대회 몇 번째 참가한 후배다.
그녀 덕분에 중꺽마 정신으로 완주했다.
거의 한 시간이나 먼저 골인한 후배의 앱 기록은 49.65km
내 앱을 보니 51.42...
반달시절 숱하게 달려본 한강변은, 군데군데 우회로와 직선구간 차이가 있다.
비몽사몽 여러 길을 헤맨 것 같다.
살아온 인생처럼.
8. 고백
지금쯤은 고백을 해야겠다.
같이 달린 우리 몇몇은 58 개띠로서, 11시보다 일찍 출발했다.
건타임 대회에서 순위를 욕심냈다면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료시간 내에 들어오지 못하면 봉사진이 고생할까 봐 그랬다는 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모두 시간 내에 들어올 수 있었다.
9. 내년
다시 뛰어야지...
10. 감사
녹록치 않은 세상에 이만한 호사가 없었습니다.
모든 준비를 두 번 하면서 온갖 고민을 하셨을 주최 측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참가한 주자님들도...
첫댓글 그저 감사 하지요
여보게 수고가많았네 ㅎㅎ
간결하면서도 솔직한 수기가 너무도 마음에 와 닿았읍니다
무더운날 너무도 수고많으셨읍니다
봉사하는 사람들의 시간까지 계산해 주셨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희는 무조건 많이 드시면 기분이 좋답니다
반환점에서의 컵 준비는 한번 검토해 보겠읍니다
축하드립니다
"7.코스 길이의 오차 "
후기에 제가 등장하고
ㅎㅎㅎ
내년에
다시 뛰신다고요?
당분간은
생각하고싶지 않네요 ㅎ
더위에 고생많으셨어요^^
저는 그날봉사를했는데 선생님의후기를읽어보니 제가뛴것처럼 너무나생생한
후기 너무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