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보들아!
발표자 : 성명순
엄마는 늙지 않는 줄 알았다. 1934년생인 엄마는 올해 88세의 알츠하이머치매를 9년째 친구처럼 달고 산다. 엄마는 하얀 피부의 고운 얼굴과 달리 고된 삶을 사셨다. 가난한 농부 집에서 3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나 동생들 돌보느라 고생하시고 열여덟에 4살 많은 아빠를 만나 결혼하여 열아홉에 첫아들을 시작으로 4남 3녀를 낳았다. 엄마의 가슴에는 세 개의 무덤이 있다. 둘째딸은 돌 무렵 원인 모를 지병으로, 막내아들은 세 살 무렵 홍역으로 죽었다. 그 아픔이 10년을 넘기기도 전에 자식 중에서 엄마가 가장 의지했던 셋째 아들마저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군 복무 중 순직하여 동작동 국립현중원에 잠들어 있다. 지금 엄마는 치매가 심화되어 가슴에 묻은 자식도 살아있는 자식도 기억 속에 흐릿한지 우리를 볼 때마다 “너는 누구냐?” 도돌이표처럼 반복한다.
내 나이 서른 살 결혼식장에서도 예순 살 엄마의 한복 입은 모습이 어찌나 고왔던지 입담 좋은 친척들이 “신부 엄마가 이렇게 고와도 되는 겨!” “하동댁, 다시 시집가도 되겠어!” 라고 입을 모았다. 그토록 고운 엄마도 긴 세월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였다. 윤기 하나 없는 도드라진 얼굴의 검버섯, 솟아오른 광대뼈, 움푹 들어간 눈가와 입 주변의 깊은 팔자주름, 손등의 얇은 표피 위로 힘없이 뻗어 있는 혈관 정맥들이 무질서하게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집사람은 가끔 침대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농담 삼아 “장모님! 왜! 거기 누워 계세요?” 라며 놀리곤 했다. 그때는 몰랐다. 내 모습과 행동이 엄마를 닮아가고 있다는 것을. 엄마의 모습 속에서 30년 후의 내 모습이 클로즈업되었다.
엄마 나이 71세 때 아빠는 대장암으로 투병하시다가 2005년 75세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아빠가 떠나시고 9년이란 긴 세월 동안 엄마는 혼자서 얼마나 힘드셨을까? 예순 살 문턱에 성큼 다가와서야 엄마의 외로운 마음을 겨우 알아차리게 되었다. 엄마는 평소에도 말수가 적고 누구에게 의지하는 편이 아니셨다. 몸이 아파도 아픈 내색하는 법이 없고 약을 먹는 것도 병원에 가는 것도 싫어하셔서 “나이 들수록 몸을 움직여야 산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본인 스스로 건강을 위해 운동 삼아 아파트 주변 빈 공터에 텃밭을 일구며 몸을 한시도 가만두지 않았다. 가을철이 되면 고구마, 참깨. 들깨, 고춧가루, 늙은 호박까지 수확하여 자식들에게 보내 주셨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마다 일어나 박수치기를 2~3,000번을 10년 가까이 하셨다. 또한 집 근처 노인복지관을 다니면서 요가, 게이트볼, 탁구를 배우고 어르신 에어로빅 대회까지 나갈 정도로 열심히 사셨다.
아무리 강직한 사람도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에서 대화상대 없이 365일을 10년 가까이 지낸다고 상상해보라. 엄마 자신도 모르게 외로움과 우울증이 찾아오고 이것들이 모여 치매를 유발하였을 것이다. 엄마는 가끔 언니와 나에게 “너희들도 자식 낳아서 길러봐야 내 마음을 안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는 그 말이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았고 썰물처럼 휙 빠져나갔다. 지금이야 책을 보거나 유트브 등 볼거리가 많지만 엄마는 TV에도 취미가 없고 학교를 다닌적도 없으니 책읽기는 당연히 그림의 떡이였다. 다행히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3년 동안 밤마다 한글을 가르쳐 드리고 엄마의 지극 정성의 노력으로 떠듬떠듬 자주 타는 버스 번호, 상호 간판을 읽었다. 당신 이름과 자식들 전화번호를 공책에 쓰면서 내딸이 까막눈을 뜨게 해줬다며 두고두고 고마워했다.
엄마의 치매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였다. 일 년에 1~2번 정도 가족 행사나 친인척 자녀들의 결혼식으로 서울에 올라오시면 우리 집에서 시어머니와 하루 주무시고 가시곤 했다. 어느 날 밤새 엄마와 함께 하셨던 시어머니께서 다음 날 아침 식탁에서 “사부인도 이제 깜박깜박하는 것을 보니 치매 증세가 있는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던 순간 엄마는 언짢은 표정을 내비쳤고 극구 부인하며 시어머니에게 서운하다며 이후로는 우리 집에 발길을 끊으셨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시골 엄마 집에 다녀온 언니가 “엄마가 이상해, 깔끔한 양반이 걸레를 부엌 행주로 쓰고, 방바닥도 하루에 수십 번 쓸고 닦는 분이 누워만 계신다.”며 걱정했다. 엄마랑 자주 통화하는 큰이모는 내게 전화하시어 “기분 나빠하지 말고 엄마 병원 한 번 모시고 가봐라”하셨다. 결국은 언니와 함께 엄마를 설득하여 한양대학교병원에서 치매 전문의 김희진 교수에게 진료를 받고 각종 검사결과 2014년 78세의 나이에 알츠하이머병 초기진단을 받았다.
알츠하이머병은 진행 과정에서 인지기능 저하뿐만 아니라 성격 변화, 초조행동, 우울증, 수면 장애 등의 정신행동 증상과 보행 이상, 대소변 가리기 등 신체적 증세까지 치매를 일으키는 가장 흔한 퇴행성 뇌질환으로 서서히 발병하여 기억력을 포함한 인지기능의 악화가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병이다. 엄마도 처음에는 일상생활이 가능했지만 증세가 서서히 진행되면서 초기진단 8년 만인 2022년 알츠하이머치매 4등급까지 상향 조정되었다. 엄마는 평소 마른 편이고 골다공증이 심하여 살짝 부딪치기만 해도 쉽게 멍이 들고 갈비뼈에 금이 갔다. 이후 안정을 위해 요양원에서 침상 생활을 의무화하게 되면서 혼자 걷는 것도 기억력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졌다. 치매 환자라도 최대한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무거운 기저귀를 갈아드릴 때마다 안타깝고 죄스러운 마음이 크다.
처음 치매 진단을 받았을 때 엄마는 스스로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를 내면서 약 투여와 병원 진료까지도 거부하셨다. 겨우 설득하여 진단 직후 3~4년은 치매 전문의에게 통원치료를 통해 약물 처방을 받고 시골집에서 혼자 계시니 약 복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 식사도 부실하여 체중이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혼자서 생활이 어려워졌다. 엄마를 겨우 설득하여 서울로 모시고, 병원이 가까운 언니 집에서 지내며 낮 동안은 치매 데이케어센터에서 평일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서비스를 받았다. 하지만 주말에 언니가 집을 잠깐 비우기라도 하면 현관문을 열고 나가시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여 더 이상 언니 집에서도 돌봄이 어려워졌다.
엄마는 평소에 “나는 죽어도 집에서 죽는다. 요양원은 절대 안 간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어쩔 수 없이 오빠, 언니와 상의하여 지인이 직접 운영하는 평택시 요양원에 모셨다. 치매를 처음 겪는 우리는 생판 모르는 남보다는 아는 사람이 있으면 낫겠다 싶어서 지인을 믿고 입소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인이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주셨다. 부산에서 오빠가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고 언니와 나도 직장이 쉬는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에서 평택시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장기화가 되면서 모두가 지치고 코로나 19까지 겹쳐 엄마의 대면 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엄마의 증세가 몰라보게 나빠졌다.
알츠하이머치매는 다른 장애와 달리 장애진단을 받기 위해 1년마다 한 번은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여 전문의 진료와 치매 관련 검사를 받아야 한다. 치매 장애진단 검사 결과를 보는 날 전문의는 우리 형제를 보며 “아무리 좋은 시설보다 자식들이 가까이에서 자주 찾아뵙고 얼굴 보여 주는 것이 환자에게 최고의 입니다” 라며 엄마를 가까이 모시도록 권유하였다. 그 즉시 언니와 우리 집에서 도보 20~30거리인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에 접수하고 대기등록 1년 만인 2023년 3월에 입주하게 되었다. 코로나 19 때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코로나가 어느 정도 풀리고 주 1회 정도 찾아가 외출을 신청하여 점심을 함께 먹고 차도 마시며 산책을 꾸준히 하다 보니 2024년 3월 진료 때에는 몰라보게 인지검사 수치가 회복되고 기억력도 되살아나 우리를 곧잘 알아보셨다. 역시 사람에게는 사람이 최고의 보약이였다.
엄마가 계신 시립동부노인전문요양센터는 서울특별시에서 위탁을 받아 사회복지법인에서 운영하여 규모가 크고 어르신들을 위한 요양서비스, 재활서비스, 간호서비스, 복지서비스 및 특화프로그램 등 다양한 서비스와 넓은 휴식 공간 그리고 실내의 작은 정원 산책로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2024년 5월부터 코로나 19 감염사태가 해제되어 6월 초 언니와 함께 병동을 방문했다. 엄마가 계신 곳은 치매 병동으로 4인실에 배정되어 병실을 들어서는 순간 두 분은 거의 침상에 누운 ‘와상 상태’였고, 엄마의 맞은편 침상의 어르신은 엄마처럼 휠체어 이동이 가능했다. 그나마 그중에 엄마의 상태가 가장 양호해 보였다. 지금 엄마는 기저귀와 휠체어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하지만 여전히 염색 없이도 머리카락 80%가 까맣고 머리숱도 많아 빗질하기가 좋다. 얼굴, 목, 손등, 팔에 주름은 많지만 사이사이 드러나는 피부가 어찌나 하얀지 까만 피부의 언니가 제일 부러워한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볼 때마다 “너는 누구냐?” 잠시 멈칫하고는 “큰딸 외순이, 작은딸 미숙이 우리 딸들 이쁘지”라며 요양보호사들에게 자랑하듯 말한다. 요양보호사가 엄마에게 장난스레 아기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할머니! 큰딸이 이뻐? 작은딸이 이뻐?” 엄마는 머뭇거리다가 “똑같이 이쁘지, 내 강아지들인데, 그려 안 그려, 이 바보들아!” 엄마의 대답에 우리는 박장대소를 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