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악귀숭배
조선인들 사이에서 그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연장되어 있는 것,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은 고상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어떤 그림으로라도 표현하는 믿음을 보면 알 수 있다. 평범한 이유 이상으로 그것은 한편으로는 관습과 다른 한편으로는 덜 필수적인 원리로 나눌 수 있다. 관습에 관한 한, 악령에 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영혼숭배라고 부르는 것은 불필요하게 사교를 확장하는 것이다.
미신의 이 갈래에서, 가장 멀고 무한히 먼 방법을 제외하면, 누구도 어떤 선한 영혼을 듣지 못한다. 선령은 항상 우주생성론에서 해야 할 일을 하기 때문에, 어떤 관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실제로 변함없이 은혜로운 신은 - 옛날 이교도적 의미에서, 창조자가 아니라 단지 창조에 따른 부산물인 - 어떤 나라에도 쓸모없는 하나의 허구다. 그것은, 그러한 감정이 절망적인 공포와 더불어, 뛰어난 능력을 가진 요정으로 구체화시켰어야만 했다고 치부하기 보다는, 초기 종족들 사이에서는 더 높고 고귀한 감정 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악귀숭배는 남쪽의 태국에서 북쪽의 캄차카까지 아시아의 동부 해안 전체에 걸쳐, 세부적으로는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공통적 인 미신의 여러 형태 중하나다. 그것은 질병과 함께 태어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인간의 첫 시도다. 그것은 본능적인 추론이라기보다는 설명에 가깝다.
폭풍, 지진, 천둥, 번개는 인간이 알 수 없는 힘의 표시다. 그런 자연 현상들은 겁을 주고 인간을 죽인다. 인간은 앞일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나쁜 것은 음흉한 질병이다. 인간은 아침에는 건강하며, 인생은 그의 앞에 긴 행복의 경치가 펼쳐진다. 하지만 저녁때에 죽음의 문턱에서 있는데도 인간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불행은 마치 어떤 커다란 자유의지의 행동처럼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다가오는 것 같고, 평범하고 질서정연한 자연의 흐름과는 다르게 보인다. 자신과 비슷하지만 훨씬 막강한 그 무엇들만이 그러한 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그 무엇들과 같은 공간에서 살므로 온갖 수단을 다해 그 무엇들에 대해 스스로를 방어한다.
오늘날 조선에서 그러한 신앙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는 믿음으로서, 우선 그자체로 흥미롭다. 조선인은 야만적인 부족이 아니다. 우리가 그랬듯이, 오래 전에, 조선인들은 도깨비와 악몽의 어린 시절로부터 상식이 통하는 성인으로 옮겨갔다. 공포의 환상 대신 이성의 법칙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종교는 미신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다른 곳과 거의 유사하지 않다는 점에서 종교의 경력은 특이했다. 종교의 경력은 갑자기 온 것처럼 갑자기 사라졌고, 그들에게는 옛 미신만이 남게 되었다.
종교가 사라진 이유를 우리는 앞 장에서 보았고, 그것의 소실은 피할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종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합리적 이고 순수한 믿음이 사라지면, 공동체 내의 강한 마음은 허무에 대한 믿음으로 변하고, 더 약한 자는 절망적으로 아무 거라도 믿게 된다. 이런 일이 여기서 일어났다. 이 사건에서 아무 거란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오래된 토속적인 악귀승배였다.
악귀숭배는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조선 특유의 것이었다. 그것은 눈에 띄지 않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그들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다수의 악귀에 대한 믿음이 대부분이다. 독자들에게 이 악귀들을 소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나 자신이 그것들을 알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확실히 인상적 이었다.
궁전이든 정자든, 왕실 건물 앞에 서 있다면 아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추녀마루에 일렬종대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청동조각들일 것이다. 얼핏 보면, 지붕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장난꾸러기 패거리들이 생각난다. 두 번째 눈길은 그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위치가 너무 불안정하고, 그것들의 태도는 너무 실물 같아서, 그럴 수 없을 거라는 감각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움직일 거라고 예상할 정도다.
그것들을 단순히 괴이하다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을 너무 보잘것없는 칭찬으로 비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추악한 자들의 사칭인 만큼 바로 부조리의 화신이다. 고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적절해 보이는 단어인 '행렬'에서 손오공이라고 불리는 원숭이를 닮은 동물이 앞장서며, 마치 안전지대에서 무심코 지나가는 사람들을 추궁하듯 팔을 걸치고 엉덩이로 앉아있다. 그의 뒤에는 돼지를 연상케 하는 조각이 쪼그리고 있는데, 첫 번째 조각보다 오히려 더 단단하고 무관심하며, 잘 봐줘도 더 못생겼다. 그의 뒤에는 또 다른 돼지가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지붕마루를 따라 올라간다. 날씨는 짐승들에게 지나치게 온화하지 않았고, 원래의 혐오감을 높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날씨는 짐승들을 영혼을 쫓아내는 허수아비로 여기는 인간의 의도를 더욱 증진시켰다. 짐승들은 귀신과 불행, 질병의 영혼을 겁주어 쫓아버리기 위해 보호자 위치에 놓여졌다. 옥상에 있는 이런 역겨움으로 인해 질병과 불행이 감히 문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악귀들은 일종의 의인화(凝人化)된 액운이다. 그것들은 영원히 떠돌며 허약한 죽음과 해로운 방향으로 친해지려고 한다. 그것들은 공기를 채우며, 집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고대의 숲의 요정들, 숲의 신들, 요정들이 그랬던 것처럼 육지 생명을 좋아하지 않는다. 집 밖에서는 무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호받지 못하는 집 안에서는 자유로워, 그것들은 어떠한 해악도 끼칠 수 있게 된다. 그것들이 가장 흔하게 추구하는 유해성 중 하나는 질병 전파다.
사실, 사람들은 악귀 추종자들을 세균 숭배자라고 부르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즉 마음, 몸, 그리고 건강상태의 세균 말이다. 또한 그것들은 크기도 비슷비슷하다. 왜소하다. 사람보다 상당히 작다. 실제로 그것들이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는 그것들이 인류와 벌여 왔던 싸움을 그린 그림을 보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것들의 크기를 알고 있다. 인간은 때때로 그것들을 공격할 만큼 대담하며, 그러한 싸움에서 도깨비의 크기는 이치에 맞게끔 항상 최소한으로 작아진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도깨비를 그림으로 보여 주었다.
특히 악귀와의 싸움으로 유명한 중국의 늙은 장군이 한 명 있었는데, 사실 그의 사후 명성은 이러한 전쟁에서 변함없는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하는 후세들의 바램에 따라, 어둠의 힘에 대항하여 전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역사 전체로 보아 중간 지점에 살았고, 사람들은 용맹하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서로 죽이는 일에만 내몰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상이 되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초상화 중 하나는 그가 싸움에서 승리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도깨비에 목줄을 채워 끌고 가고 있다.
마치, 경찰이 어린 소년을 경찰서로 데려가는 모습 같다. 가엾은 꼬마 도깨비는 너무 순진해 보여서,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법의 하수인들이 엉뚱한 소년을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깨비가 뛰어난 것은 분명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활함과 독성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또한, 희생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놀랍도록 소심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분명 이주해야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달갑지 않게 수가 많기 때문이다. 성격은 악랄하지만, 그러나 정신적으로는 영리하지 않다. 사실 그들은 단순함 그 자체다. 가장 서투른 장치에게조차 그것들은 겁먹는다. 그것들이 겁내는 물건으로 미루어 볼 때, 보통의 새들이 그것들보다 훨씬 더 영민함이 틀림없다. 꽤 똑똑한 까마귀는 허수아비가 엉터리라는 것을 하루 이틀 만에 알게 되지만, 도깨비들은 지붕 위의 짐승이 허깨비에 불과하다는 것을 수세기 동안 알아차리지 못했다.
도깨비들은 집에 접근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것들을 그런대로 완벽한 세균설로 분류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신선한 공기는 그것들이 제대로 일하는 데 좋지 않다. 그것들은 방의 불순한 분위기 속에서만 위험해진다. 집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때가 사람을 공격하기 가장 좋다. 고대 히브리인들 사이에 통용되었듯이, 악귀가 들었다는 믿음이 단정적이라기보다는 짐작일지라도 아마 여기서도 사람들의 행동은 그 믿음과 관계가 있다.
일단, 귀신이 집에 들어오면 그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들의 거주지 진입을 막는 수단을 독창적으로 고안하게 되는데, 이는 도깨비들의 소심함과 속임수 덕분에 어려운문제가 아니다. 가장효과적인 수단은 지붕 위의 괴물들인 것 같다. 도둑이 도둑을 잡게 하는 원리에 입각해, 상상 속의 괴물들의 표상은 아마도 상상속의 적들에 대한 최고의 보호책이 되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도 그것들 이 전혀 눈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방어는 완벽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건물들에 비품이 전혀 없는 것처럼 나에게는 악귀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 효율성에 약간의 단점이 있다. 그런 수호자들은 오로지 왕의 특권일 뿐이다. 평범한 집들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그 이유는 무엇에서나 왕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범죄이기 때문이며, 왕이 모든 발명품이나 발견에서 첫 번째 선택을 하기 때문에, 나머지 조선 세계는 두 번째와 최대한 잘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지붕 위의 짐승들만이 부랑자 도깨비를 막아주는 술수가 아니다. 다행히도 사회의 안녕을 위해, 다른 술수들은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왕실의 취향에 맞지 않는 관행은 쓰이지 않게 되어 국민들의 소유가 되었다. 상류층 조선 주택의 외부 정문 쪽에는 이중문의 길가 쪽 문짝에 극장의 걸개그림 같은 것이 붙어 있다. 그것은 색종이 그림으로 조선 장군 한 사람과 중국 장군 한 사람의 고대 장군 두 사람을 상징한다. 우리 눈에는 그들이 곧 시작할 연극에서 보여질 재능을 암시하지만, 연극적인 의도는 전혀 없다. 그들은 사람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악귀에게 향한다. 그들의 목적은 유혹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물리치기 위한 것이다. 둘 중 하나는 위에서 언급한 장군이다.
이런 고안은 다소 귀족의 전유물이다. 서민들은 볏짚이나 천 조각으로 된 보풀을 문에 붙이는데 만족한다. 상류층이 테러를 보호 수단으로 삼는 반면, 서민층은 도깨비가 실패하면 그때 잡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 볏짚은 도깨비의 탐욕을 이용하는 것이고, 천 조각은 사람이 그곳에 있다고 믿도록 도깨비를 속이는 것이다. 천 조각이 사람옷의 일부이기에, 도깨비는 여전히 그렇다고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해야 한다.
대문에 걸린 그림과 보풀은 모두 서울에서 매우 흔하며, 여러 개를 보지 않고는 수도의 어느 길도 지나칠 수 없다.
악귀를 쫓는 것과 관련된 또 다른 풍습이 있는데, 대부분의 다른 악귀들은 기괴한데 반해, 그 악귀는 귀엽게 그려진다. 그 악귀에 대한보호책은 다른 악귀들과 달리 영구적이지 않다. 그것은 특정한 경우에 행해지는, 그리고 일 년에 한 번만 행해지는 의식이다. 어느 날 오후 우연히 목격했는데, 그것의 목적을 알기도 전에 그 우아함에 감탄했다. 때는 우리보다 한 달 늦은 섣달 그믐날이었다. 눈보라가 몰아칠 황혼 무렵, 나는 도시를 가로질러 걷기 시작했었다. 하루 종일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날이 저물어가는 지금, 날씨는 이별의 미소로 시무룩한 기분을 잊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뉘우침은 너무 늦게 찾아왔다. 석양빛은 갓 내린 눈에 반사되어 회색 하늘을 엷지만 섬뜩한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그것은 깊어가는 어둠과 씨름하는 비현실적인 빛이고 잔광이었다. 집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여기저기서 험담하는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조차 내리는 눈에 가려 귓가에 슬쩍 다가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길을 덮은 두껍고 부드러운 카펫에서 내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침울하고 조용한 분위기 가운데, 집 문 앞의 거리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작은 혀를 날름거리는 불꽃이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비추었다. 불꽃들은 눈 한가운데 작은 모닥불에서 튀어 올랐고, 시간자체만큼이나 고요하게, 사람들이 지켜보며 서있었다. 사람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그 광경에 압도되어 비현실적으로 조용했다. 더 먼 쪽에는 한 무리의 아이들이 불꽃을 중심으로 동그랗게 모여, 깜박이는 불꽃을 보며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고, 불꽃은 그들의 화려한 옷을 더 붉게 물들였고, 열망하는 어린 얼굴들을 화려하게 빛내면서 어루만졌다. 마치 로마가톨릭 성당의 중심부에 있는 홍염처럼, 하나의 거대한 어둠 속에 유일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보였다.
약간의 지식은 항상 진기한 것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집에 돌아와서, 내가 본 것에 대한 나의 첫 번째 질문에 대해 진부한 것보다 더 진부한 머리카락 태우기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는 매년 가정에서의 머리카락 태우기를 목격한 적이 있고, 누군가 그렇다고 나에게 알려 주기도 했다. 한 해 동안 각 가구에서 빗은 머리카락과 자른 머리카락을 정성 들여 보관하고, 어느 날 밤에 한 번에 모조리 태운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이 신체의 일부였던 것을 필요 이상으로 더 자주 불태운 타는 것에 대한 미신적인 혐오감인지, 혹은 다른 사람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너무 불쾌해서 자주 반복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인지는 불확실하다. 어쨌든, 이 조선의 빈약한화장실에 버려질 쓰레기는 12개월 내내 꼼꼼하게 보존되어 있다가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그날 엄숙하게 태워 진다.
이것은 내가 원한 설명이 아니었기에, 나의 공식 방문자이자 토속 민속에 조예가 깊은 비서에게 더 물어 보았다. 역시 실망스럽지 않았다. 그 의식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다워서 악귀가 끼어들 수 없었다. 다음이 그가 나에게 한말이다.
지상의 관습 중 일부는 하늘에서의 관습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그곳에도 여기처럼 새해가 있다. 둘 다 마찬가지로 동이 튼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땅의 왕에게 기도하듯이, 모든 선한 영혼들도 하늘의 왕에게 기도한다. 그리고 선령들이 이 연례 연회에 시간에 맞춰 참석하는 것은 선한 무형물들에 대한 몇 안 되는 언급들 중 하나다. 선령들이 그렇게 참석하고 있는 동안, 질병과 불행의 악귀들은, 연회에 초대받지 못하므로 달리 갈 곳이 없는 터라,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을 치근대고 괴롭힌다. 사람들이 그들 집 앞에서 작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은 악귀가 그들의 거처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이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악귀들은 '떠다니고 들러붙는 악귀’이라는 도발적 인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수가 너무나 많고 활동적인 신들은 어떤 사당의 봉헌을 받을 가치가 있어 보이지만, 있을 자리가 감옥이 아닌 한, 그 신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이 감옥들 중하나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조선 도로에서도 멀리 여행 할 수 없다. 그것은 고목의 밑동에 돌무더기를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나무는 신성하다. 미신이 그것을 보존해 왔지만, 주위에 있던 나무들은 땔감으로 쓰여졌다. 보통 크지도 않고, 숭상할만해 보이지도 않기 때문에, 그 신성함이 참나무에서 도토리로 또는 소나무에서 솔방울로 전락한 영광이라는 의심이 들 정도다. 그러나 나무와 견주어 볼 수 있는 다른 것들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나무끼리 비교해 공정하게 선택된다. 신성한 나무가 아니라면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다. 나무가 잘려나가 소등에 업혀 도시로 실려가 연기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나뭇가지에는 흔히 몇 개의 낡은 헝겊이 걸려 있는데, 한때는 화려했던 색깔의 천으로 보였다. 아주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매우 부주의한 여행자들의 옷 조각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들은 계획적으로 묶여 있는 것이었다. 나무 밑동을 중심으로 쌓은 작은 돌무더기는 도로가 보수되기 직전에 그 목적을 위해 모아 놓은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조선의 도로는 한번도 수리되지 않았다.
그곳 이름은 서낭당 혹은 "서낭신의 집”이다. 이 돌무덤은 한때는 선령(善靈) 사당이었다가 지금은 악귀의 감옥이 되었으며, 천 조각들은 자신이 악귀에 홀렸다고 믿거나, 악귀가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옷 조각들이다. 악귀에게 붙잡힌 사람은 옷의 일부를 이 나뭇가지로 유배시킴으로써, 악귀를 속여 나무에 붙게 한다.
관습의 기원은 다음과 같이 신화에 의해 전해진다. 옛날 중국과의 많은 전쟁 중 한 때, 어떤 조선의 장군은 전투 전날에 화살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산꼭대기에 잘 배치되어 있었다. 이 힘든 상황에서 그는 꿈을 꾸었다. 그의 시야에 한 여신이 나타나 나무 아래 돌무더기를 보여주었고, 그녀는 그에게 공격자들의 머리 위에 던질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아침에 그는 꿈꿔왔던 곳을 찾을 수 있었고, 그러고 나서 그의 군대에게 그들이 찾을 수 있는 한 많은 돌을 모으게 했다.
그 후 그들은 적에게 돌멩이를 퍼부어 전투에서 승리하게 했고, 그래서 그는 꿈에서 보았던 돌멩이처럼 땅 전체에 쌓이게 하고, 미래에 닥칠 위급상황에 대비하도록 명령했다. 돌무덤은 여신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그것은 그녀의 사당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그녀의 선한 의지로 인해, 그것은 악귀를 가두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 정해졌다. 그래서 그것은 악귀의 감옥으로 발전했다.
전설, 즉 설화는 여신의 현몽이 승리의 백일몽이었으며, 현몽의 초자연적인 부분은 장군이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미신은 일단 시작하면, 그 추진력으로 여러 시대를 거쳐 굴러간다. 이상이 믿음의 절반을 관습의 측면에서 본 견해이며, 결과적으로 미신이며, 천상의 존재의 절반인 악령에 대한 할애다.
선령은 전적으로 물질이론에 있다. 그들은 조금 승배되지만, 이 작은 것조차도 악귀에 대항하여 그것들의 도움을 얻기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그것들은 간청은 받지만, 결코 사랑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숫자상으로 그것들은 엄청나다. 많은 수가 땅에 속해 있지만, 대부분은 천국에 있다. 악귀와 비교했을 때, 그것들이 구현한 사상은 그리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은 분명히 규정되지 않는다.
누구나 번개를 두려워하지만, 추상적인 선령의 특별한 효력은 거의 볼 수 없다. 내가 알기로는, 선령은 어둠의 힘과 싸우는 것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하늘에서는 지상의 법이 뒤바뀌는 것이 분명하며,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것들은 가끔 악당 인간들을 공격하지만, 악귀들과의 실제 싸움은 고대 중국 장군에게 맡긴다. 그것들은 참을 만하게 게으르다.
그것들은 특별히 강요되지 않는 한, 악의 존재를 묵인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비를 제때에 뿌리지 않으면 땅을 떠나야 하는 의무도 여태껏 잊고 있다. 이것은 그것들 입장에서 가장 심각한 직무유기다. 왜냐하면 인류에게 가장 큰 재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쌀농사는 적절한 양의 물에 달려 있고, 인간의 존재는 쌀농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뭄의 계절에 나라 전체가신앙심이 깊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관리들이 기도를 올린다. 그리고 아무 소용이 없을 경우, 왕은 마침내 직접 나서 중재자가 되어 그의 국민들을 대신해 간청한다. 그는 편안한 궁전을 떠나 시골 어딘가에 세워진 건물로 가서 밤낮으로 땅바닥에 애원하며 지낸다. 다행히도, 사물의 특성상, 가뭄 끝에 비는 결국 오게 마련이기 때문에, 마침내 그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그의 자리를 성공적으로 떠날 수 있게 된다. 그러는 동안 쌀농사는 종종 망한다.
선령과 악령 사이의 중간은 정신의 세 번째 부류로 중립적 영혼이다. 중립적이라 함은 그들의 도덕적 자질에 관한 것이다. 그것들은 땅에 거주하며, 악의가 없다. 그것들은 존재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인간 또한 그렇다. 조선인들의 생각으로는,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많은 존재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것들은 밥벌이 할 필요 없이, 쉬고 싶은 만큼 쉰다.
그것들은 모든 종류의 장소를 자주 방문하지만 산을 선호한다. 그것들이 살아 있는 기간은 조선의 긴 휴일 중 하나다.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철학적이고, 다음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들은 매우 좋은 친구다. 일반적인 정보와는 별개로 이 이야기는 특별한 관심을 끄는데, 립 밴 윙클과 그와 유사한 민간전승 신화의 또 다른 형태로서, 멀리 떨어져 있고 은둔적인 조선에서 유래한 것이다.
우리가 캐츠킬의 전설을 많이 즐기기는 하지만, 알다시피 그것은 과거의 다른 담에서 가져온 담쟁이덩굴일 뿐이다. 미국에 있는 우리 유럽 문명은 훌륭한 결과물을 얻을 만큼 충분히 오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벽돌 지붕이 풀로 뒤덮인 곳에서 그것을 본다 해도 별로 놀랍지 않다. 그러므로 조선 역시, 우연히 땅의 주기를 영혼의 주기로 바꾼 떠돌이가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 우리는 해가 뜨는 시간부터 지는 시간까지를 헤아린다. 어둠을 모르는 신들에게는 낮 대신 여름이, 밤 대신 겨울이 있다. 이 세상의 1년은 천국에서 하루다.
옛날에 부유한 시골 사람이 살았는데, 숲이 그의 사업장이었다. 그는 벌채꾼이었고, 사업상 종종 깊은 산으로 갔다. 모든 조선인들이 자연을 좋아하고, 이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사업은 핑계로 그의 숲 사랑은 덤으로 그는 처녀림으로 걸어갔다. 어느 날 그는 평소보다 더 깊은 산속을 헤매다가 마침내 산등성이를 타고 얼마간의 거리를 올라갔다. 그의 앞에 산 정상이 나타났고 거리도 가까워 보였다.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더 나은 판단력과 거듭된 경험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리석게도 충동에 이끌려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마침내 정상에 올랐을 때, 그는 네 명의 노인들이 열심히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바둑판을 가운데 두고 둥그렇게 둘러 웅크리고 앉았다.
그들 주위로 풀 위에 술병들이 놓여 있었고, 시동 하나가 옆에 앉아서 술잔이 비워질 때마다 술을 따랐다. 그가 다가서자 네 사람은 고개를 들어 예의 바르게 절을 하고, 그가 피곤한 것을 보고 시동에게 술잔을 따르라고 명령했다. 그는 앉아서 술잔을 홀짝이며 시합을 구경했다. 그는 그렇게 단기간에 유쾌한 동무에 끼어든 후 떠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그를 환영한 만큼 정중하게 작별인사를 했고, 그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무사히 내려갔고, 올라가는 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산 아래에 도달했다. 아내와 아이들을 의식한 그는 집으로 떠났고 해가 지기 전에 무사히 그곳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면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사는 것을 알고 다소 놀랐다. 더 고약한 건, 침입자이므로 집에서 나가라고 했다. 그는 이렇게 자기 집에서 쫓겨난 것에 대해 항의했고, 뒤이은 논쟁에서 그곳의 주인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보기 위해 안쪽 방에서 나왔다. 그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지만, 벌채꾼은 전에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잡으려고 주인에게 따지자, 주인은 벌채꾼의 성이 무엇이냐고 물어 왔다. 성을 대자, 주인은 자기 성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조사하듯 더 물어 보니, 주인은 벌채꾼의 친손자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방랑자는 다른 세계로 돌아왔다. 그의 아내는 죽은 지 오래되었고, 그의 자녀들은 모두 매장되었다. 손자들 역시 대부분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증손자들은 성인이 되었다. 그는 100년 전에 떠나 있었다.
영혼이 좋든 나쁘든 무관하든, 그것들은 불행하게도 모두 평범하다. 모든 신화에서 신들은 숭배자들로부터 존엄하다. 숭배자와 숭배 받는 자 사이의 간격은 민족의 문명에 따라 넓어진다. 하지만 여전히 아리아 신화의 산물에는 어느 정도의 고귀함과 웅장함이 있다. 반면에 극동 신들의 구성에는 놀라울 정도로 보편적인 인간성이 있으며, 이는 성숙된 문명과 유치한 신앙이 대조되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조선의 악귀숭배는 일본의 신도 신앙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세세한 점에서 두 가지가 상당히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도 둘 다, 원주민의 일반적인 미신의 형태일 것이다. 추측하건대, 아주 먼 옛날에 두 미신이 하나인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지상의 통치자를 신성한 존재로 숭배한다. 그러나 조선에는 육체와 천상의 것 사이에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다. 반도에서 천상의 영혼에 대한 숭배는 왕족의 특권이다. 왕은 영혼들을 숭배하고, 서민들은 그를 숭배한다. 이것은 그들이 신에게 접근하기에 충분히 가까운 것으로 여겨진다. 징검다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신앙은 그것만이 아니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 그의 ”터주신”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순수한 조선 신이다. 그 개념은 정체성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조선의 관념에 따르면 땅의 모든 부분에는 그 신이 있지만, 그 자리에 사람이 살지 않는 한 그 신은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사람이 그 장소에 정착하는 순간, 영혼은 일종의 가신이 되어 인정받고 숭배되어야한다. 비록 영혼이 흙에 토착하고, 말 그대로 본질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신은 공간적으로 정의된 존재는 아니다.
즉, 그 신은 땅 전체에 속하지 않고, 차라리 작은 땅에 속한다. 그 신은 공간 그 자체처럼 무한하다. 그 신은 여럿이지만 하나다. 그것은 미묘한 착상이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10에이커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는 10에이커의 땅에 대해 신을 숭배한다. 하지만 그 이후에 같은 땅을 두 사람이 소유한다면, 각각은 이전 사람의 수호신의 절반이 아닌 자신의 신을 숭배하기 시작한다.
왕은 온 땅을 관리하는 터주신을 숭배한다. 백성은 이 신에게 기도하지만, 그 신이 꼭 한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신을 위해 제단을 세우지 않는다.
백성들의 숭배를 보장 받는 또 다른 신이 있다. 그 신은 "아이들의 축복 자"로 알려져 있다. 그 신은조선의 최고신에 의해 모든 가정에 보내져, 어린아이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 유인하려는 악귀들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한다. 이렇게 악귀 무리를 이용하면 그 신들의 단순함을 설명하기 더 쉽다.
가장 기발한 신 중 하나는 "호랑이 혼의 수호자”다. 그 신은 산에 자주 간다. 왜냐하면 호랑이도 그러기 때문이다. 한 마리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은 후, 먹힌 자의 영혼을 또 다른 식사거리로 이용한다. 호랑이는 육체를 동화시켰기 때문에 당분간은 영혼을 소유한다. 그래서 그 길을 지나가는 사람과 마주칠 때까지 산길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보낸다. 그리고 은밀한 정신적 주문으로 그를 숲 속으로 유인한다. 사람은 갑자기 갈증을 느끼고, 물소리를 듣는다고 상상하고, 혹은 피곤함을 느끼고, 나무들 사이에서 그 가 누울 수 있기 알맞은 장소를 찾는다. 그는 왕래가 드문 숲 속을 헤매다가 호랑이에 의해 놀라 죽임을 당하고 잡아먹힌다. 첫 번째 희생자의 영혼은 속박에서 풀려나고, 두 번째 희생자의 영혼은 그 자리를 대신한다.
특별한 관심을 끄는 두 부류의 영혼이 있다. 그것들은 역사적 영혼이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들은 나라의 역사와 관련이 있고, 통치자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조선에 관한 초기 신화는 장생의 신과 그의 동료들의 고향인 요정의 나라로 묘사한다. 현 주민들이 말하길 그 신들은 아름다운 산과 호수가 있어 조선에 살았다고 한다. 그 신들은 주로 세 개의 높은 봉우리, 즉 제주도의 한라산, "귀한 돌”인 금강산, 그리고 "큰 흰 산"인 태백산에 살았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중국의 한 고대 황제는, 그들이 여전히 중세 왕국에 살고 있을 때, 이 장수 요정들 중 하나를 잡으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다.
만약 그들로부터 삶의 영생을 얻고, 비록 죽을지라도,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다. 그는 혼령을 사로잡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모두 겁먹게 하여 동쪽으로 도망쳐 세 산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그들의 지상의 집이었지만, 그들의 집 또한 하늘에 있었다. 그들은 숲속에서 흥청거리며 놀기 위해 땅으로 내려왔고, 잠시 동안 즐거움이 가득하면 다시 하늘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그 땅은 이름이 없었다. 다음 신화와 함께 이름 지어졌다. 오래 전 - 조선 사람은 삼천년이라 하지만 다른 때라도 상관없다 - '단군' 또는 ‘박달나무 임금'이라는 어떤 영혼이 태백산에서 내려와 스스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조선, 즉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불렀다. 영혼이 조선어를 썼다면, ”고은 아침”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나중에 중국어가 문학의 언어가 되었을 때, 그 이름이 한자어로 조선이 되었다는 것이다.
장생의 정령과는 대조적으로 단군은 진실한 또는 진정한 영혼으로 묘사된다. 그는 오늘날 대중들 사이에서 사람다운 정신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인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평민들은 그가 이 땅에 살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원래 그의 특징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 선조들보다 더 가시적인 존재로서 역사의 아버지로 선택되었다. 극동에서 이러한 역사적 주장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인격을 배제할수록 역사적 인물로서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증거의 유무는 고려 사항이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반도에 거주했던 종족들의 이주를 통해, 우리는 이 소설의 거미줄을 통해 진실의 실마리를 추적할 수 있다. 이 종족들은 산맥을 넘어 북쪽과 서쪽으로 뻗어 나왔고, 백두산, 즉 ”영백산“으로 정점을 찍은 후 남쪽과 동쪽으로 이동했다.
신권에 의한 통치뿐만 아니라 신에 의한 통치권이라는 개념은 극동 왕족의 기본교리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에 접하는 신화들은 왕조의 조상들과 관련이 있다. 왕조의 조상들은 그들의 시대에 이 땅을 지배해왔다.
수없이 많은 사소한 왕자(대략 3 천 명)의 통치 이후, 이 나라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세 집이 나머지를 모두 삼켜버렸다. 어느 날 이들 중 한 명의 왕이 숲 속을 걷고 있었는데, 그 때 그의 관심은, 마치 자신이 무슨 대단한 흥분의 대변인 같은 까치 울음소리에 이끌렸다. 새를 따라 그는 덤불 속에서 황금송아지 같은 것을 보았다. 그는 나뭇가지들을 옆으로 밀치고 들여다보다가 상자를 발견했고, 그것을 궁전으로 가져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왕비를 불러 이야기를 했고, 두 사람은 함께 상자를 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그 안에서 순금 알 하나를 발견했다. 미신을 믿는 왕은 그것을 두려워했고, 상자를 흐르는 물에 버리거나 태워 없애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좀 더 이성적인 영혼인 왕비는 호기심으로 알을 간직하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물건을 옆으로 치웠고, 다음날 몰래 그것을 보기위해 갔는데, 한 소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조숙했고, 이미 말을 할 줄 알았다. 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는 그에게 자신이 영신의 아들이며, 영의 부모로부터 왕의 후계자로 보내졌다고 알려주었다. 이것이 왕을 짜증나고 성가시게 했고, 왕은 즉시 악귀가 그로 변장했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왕비는 다시 구하러 와서 아이를 위해 중재했다. 따라서 그는 고통 속에서 성장했는데, 이는 그가 매우 성공적으로 이룬 업적으로 그 사이 그가 엄청 영민해져 왕은 그를 점차 사랑하게 되었고, 그가 죽자 그의 왕국이 예언한 대로 그를 신라의 왕위 계승자로 임명했다. 그의 이름은 김(金, "금”이라는 뜻)이 되었고, 오늘날 조선의 가장 유명한 가문 중 하나인 현재의 김씨의 조상이다. 그들은 그 나라가 이웃 고려에 의해 정복될 때까지 신라의 왕으로 남아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왕족은 아니지만, 그 이후로 강력한 귀족들이었다.
그런 설화들은 많다. 그것들은 일종의 왕실의 민간전승 설화다. 오늘 날 고귀한 가문들이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태고적 가문의 문장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왕실은 그들의 혈통을 영혼까지 추적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매우 까다롭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그들의 지위에 대한 제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한번 얻으면 매우 질투 날 정도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지킨다. 그들의 딸들은 결코 평민들과 혼인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은 혈통에 영혼의 피가 흐르는 자들과만 동맹을 맺을 수 있다.
고려왕국의 기원과 관련하여 비슷한 건국 설화가 있다. 이 왕국은 처음에는 다른 두 왕국과 공존하다가 결국 두 왕국을 모두 삼켜버리고 반도 전체에 이름을 알렸다. 이 이야기는 지난 이야기와 달리, 왕조를 대체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독창적인 이야기다. 첫 번째 왕은용의 후손이었다. 용인 것에 지친 늙은 용이, 변화를 주기 위하여 자신을 아주 잘생긴 남자로 바꾸고 하늘나라로 올라갔고 거기서 신의 딸과 혼인했다. 혼인 후 그는 그의 신부를 고려로 데려갔고, 그들은 고려 사람들의 방식을 따라 함께 살았다. 신혼여행의 이 유쾌한 땅에서 어느덧 부부에게 아들이 탄생했다. 둘 다 그 아들을 머릿속에 담고 죽게 되자 아이를 이웃에게 맡겼다.
죽기 직전에 용은 아들에게 왕을 뜻하는 ‘방이라는 이름을 주었고, 동시에 이웃에게는 소년의 이름도 그의 혈통도 귀신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간청했다. 만약 그가 비밀을 지킨다면 그는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반드시 벌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는, 용과 그의 아내 모두 다른 모습으로 변하기 위해 사라졌다. 아마도 사람으로 사는 것이 그들이 상상했던 것만큼 실제로 좋지 않은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비밀이 충분히 지켜진 아들은 운명을 관철 시켰다. 개인적으로는 별 볼일 없었지만, 때마침 그의 아들이 자신을 추종하는 무리들을 모아 고려를 정복하고 마침 내 온 땅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