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 최예슬
이곳 아테네는 혼란스러운 도시입니다
시민들 사이로 회의주의가 유행하고
음유시인 마을은 감수성 과잉입니다
예언가의 말처럼,
고귀한 사람들이 비극적 공동체로
몰락하는 것입니다
나는 살찐 돼지입니다 철학은 모르고 예술은 조금 할 줄 압니다
벽에 윤곽선 그리는 일로 근근이 먹고 살지요 이것은
하늘의 색깔과 우리들의 관계, 공간과 느낌 따위를 붙잡는 일입니다
관공서에 그려진 온갖 윤곽들은 내가 붙여놓은 것이에요
쇠약한 빛, 풍만한 언어, 공간의 명암
알고 싶은 부분만 도려내어 스티커처럼 붙여놓을게요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식사시간을 경멸합니다
겨울과 여름 내내 먼지투성이 외투를 걸치고 광장을 떠도는데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없으면 먹지 않고를 반복합니다
야위어가는 영혼을 간신히 붙들고는
네 자신을 알라며 호통을 치던 광경,
도대체 얼마나 헐벗어야 만족할는지요
그의 고집을 못 이긴 예언가들은 광장을 떠나기 시작하고
여벌의 외투와 무도회에서 남겨진 음식을 조금 얻어와도
소크라테스는 설득시키지 못합니다
신들을 노래하던 자리에 벌거벗은 조각상만 남아 있습니다
아테네 청년들은 나날이 타락하고
시민들의 식사시간은 여전히 즐겁습니다,
불법체류자 마을에는 병을 악화시킨다는 약이 떠돌고
닭 모가지 비틀어오던 주술사들은 신전 앞에서 유령이 되었습니다
신전을 걸어잠근 주정뱅이 문지기는 며칠째 소식이 없어요
사실은 말입니다
우리 돼지들은 아테네에서 가장 회화적이고 음악적입니다
눈을 감아도 뜬눈처럼 밤을 지새우는 예민한 무리
사랑하는 사람에게 화첩을 꺼내 보이는 감각적인 종족,
우리는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는 동안 눈과 코와 귀를 열렬하게 감각하는 것임을
광장 한가운데서 고백하려 하는데
마침내 소크라테스는 병이 들었습니다
그는 나에게 배고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배고픈 것보다 죄악인 것은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것이라며 고집을 부립니다
자신의 우리에서 기르던 돼지에게 병을 의탁하는 인간이라니,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아니 부끄러운 건 내 마음일까요
그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서 웅크린 채 한 달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소크라테스로 불리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은 단지 정기적인 소문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 2011년 <문학동네> 신인상 당선작
■ 최예슬 시인
- 1987년 서울 출생
-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 이화여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학부 수료
《심사평》
2011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549명이 3,284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이를 삼등분해서 세 명의 심사위원이 각자 1차 심사를 진행했다. 세 심사위원들은 각각 세 명에서 여섯 명까지의 응모자를 2차 심사에 올렸고 그 결과 총 열네 명의 작품을 7월 29일에 개최된 최종심에서 검토하게 되었다. 먼저 여섯 명의 작품을 어렵지 않게 추려낼 수 있었다. 그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으로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공백기」외 7편을 투고한 안희연씨, 「금수회의록」외 6편을 투고 한 공현진씨,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 「아름다운 기형」외 7편을 투고한 황은화씨, 「자폐」외 7편을 투고한 임현씨, 「주머니 이야기」외 5편을 투고한 류진씨. 이 중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인 세 사람은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 「아름다운 기형」외 7편을 투고한 황은화씨, 「자폐」외 7편을 투고한 임현씨,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이 셋을 놓고 한 명의 당선자를 가려내는 데 긴 시간이 걸렸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변명」외 4편을 투고한 최예슬씨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소중한 작품들을 기꺼이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신형철(문학평론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도달해 있는 작품들 중에서도 기성 시인의 발성법을 은연중에 따라가고 만 사례들이 적지 않았다. 예컨대 ‘우리는 조금씩 사소해지고’와 같은 식의 문형이 시시때때로 출몰하고 ‘이것은 00에 관한 이야기’와 같은 식의 문구가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특정 기성 시인들의 화법이 당대의 공유 자산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 이문재(시인)
예컨대 응모작 다섯 편을 묶을 때, 작품 순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맨 뒤나 중간에 있는 응모작이 더 뛰어난 경우가 없지 않다(자기 작품에 대해 스스로 점수를 매길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시인이다).
시쓰기의 알고리즘(절차)은 세 단계다. 생각하기-쓰기-고치기. 모든 시가 창의성의 자장(磁場)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모든 시쓰기는 이 세 개의 터널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시의 나라에 입국할 수 없다. 내가 문예창작 강의실에서 확인한 바로는, 대부분의 습작기 학생들(일반 시민들도 결코 다르지 않다)이 생각하지 않고 쓴다는 것이다. 또 생각하고 썼다고 하더라도 고치지 않는다. 오로지 쓰기만 있다. 한 편의 시를 쓴 다음,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라. 아주 냉정하게. “나는 이 시를 쓰기 위해 얼마만큼이나 생각했는가. 이 시를 쓰고 나서 몇 번이나 고쳤는가.” 나는 늘 이렇게 주문한다. 새로운 의미와 표현을 생각해내지 못했다면 쓰지 마라. 쓰고 나서, 최소한 열 번 이상 소리내어 읽으며 고치지 않았다면 발표하지 마라. 쓰는 단계가 가장 쉽다. 생각하기가 어렵고, 고치기는 더더욱 어렵다.
* 진은영(시인)
시를 쓰는 이들에 대해서는 덮어놓고 애정을 느끼는 나쁜 버릇을 감안한다고 해도, 아쉽고 아깝다. 주머니에 담아오지 못한 매우 아까운 당신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단점에 대한 조언들에 귀 기울이긴 해야겠지만, 단점을 고치는 데에만 전력투구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단점이 있다는 게 아니라 당신들의 놀라운 장점이 모든 작품에서 흘러넘치지 못했다는 것. 그러니까 자신들의 매력에 더 지독하게 매달리는 것이 좋겠다. 위대한 장점으로 여행자들의 혼을 빼놓으라. 그러면 단점은 조각의 음각처럼 필연적인 게 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