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3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초대 황제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인 프란츠 2세의 손자이며, 나폴레옹 2세의 외사촌이기도 하지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1세는 어려서부터 심각한 신체적 정신적 장애가 있었고 정신적 성불구자였습니다.
때문에 바로 아래 동생인 프란츠 카를 대공의 장남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미 일찌감치 추정 상속자로 취급받았고 오스트리아 궁정에서는 이 장남에게 제왕학을 가르쳤습니다. 이후 서기 1848년 혁명으로 인해 페르디난트 1세가 퇴위하자 원래대로라면 동생 프란츠 카를 대공이 제위 계승 순위에 따라 황제로 즉위해야 했지요.
그러나 마리아 안나 황후와 조피 대공비는 프란츠 카를 대공에게도 페르디난트 1세와 마찬가지로 정신 지체 증상이 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아들에게 양보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다행인 것은 이를 프란츠 카를 대공이 선선히 수락하면서 장남이 프란츠 요제프란 이름으로 즉위했지요.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누지 못한다는데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선선히 양보한 것입니다.
프란츠 요제프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6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근면성실한 국정 수행과 엄격함, 그리고 가족사의 비극으로 인해 생전과 사망 이후 모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 국민의 사랑과 존경, 그리고 두려움을 받았습니다. 그야말로 백발의 노황제 이미지에 딱 맞는 인물이었지요.
당대 오스트리아 남자들은 대부분이 황제의 수염과 구레나룻을 모방했습니다. 심지어 오스트리아에서 제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넘어간 시절에도 빈 시내 곳곳과 가장 호화로운 호텔인 자허 호텔에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하지요. 제국 호텔에는 아직까지도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체코에는 프란츠 요제프 카이저라는 통조림 브랜드도 있다지요.
이렇듯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처럼 존재 자체가 국가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으레 그렇듯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프란츠 요제프라는 인물 자체의 카리스마와 그에 의한 결집력에 의해 유지되는 불안한 상태였지요. 1차 세계 대전 중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사망한 후 급속도로 제국이 붕괴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파란만장한 사건을 겪은 황제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서기 1848년 유럽을 뒤흔든 거대한 혁명을 겪고 그 격동의 와중에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백부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양위로 즉위했지요. 서기 1850년, 러시아 제국이 오스트리아를 강력히 지지해준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왕국과 담판을 지어 올뮈츠 협약으로 독일 연방에서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확인, 프로이센에 일대 굴욕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때부터 자신감이 생겼는지 검열과 경찰국가 체제를 동원한 강력한 신(新) 절대주의 체제로 나라를 다스렸지요. 문제는 이것이 시대에 완전히 뒤떨어진 발상이었다는 점입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은 황제가 수행할 중요 지상과제로 외교와 국방을 고려해 외교 문제에 많이 간섭했습니다. 하지만 서기 1853년부터 1856년까지 일어났던 크림 전쟁 중에 러시아가 점령했다가,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반환한 도나우 공국을 점령하며 제정 러시아를 크게 자극해버리고 말았지요.
이 행동은 서기 1849년에 대군(약 16만 명)을 보내 혁명을 진압하도록 도와준 러시아에 대한 배신으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의 얌체짓에 영국과 프랑스까지 등을 돌려 크림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당했지요.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었습니다. 결국 오스트리아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지요.
프로이센과는 올뮈츠 협약으로 냉전에 들어갔고, 이탈리아 반도는 원래부터 반(反) 오스트리아 지역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 통일 3걸과 훗날의 이탈리아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공통점이 모두 ‘반(反) 오스트리아 정서’를 가졌다는 점에 있지요. 그야말로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오스트리아가 ‘공공의 적’이라는 말이 됩니다.
결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통일 이후인 서기 1872년 삼제동맹 체결 이전까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원점으로 돌아가 서기 1859년에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사르데냐-피에몬테(훗날의 이탈리아) 왕국이 군비를 증강해 도발해오자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가 원하던 대로 먼저 선전포고를 해버리는 대실수를 저지르지요.
그 결과 오스트리아는 마젠타 전투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잇따라 패배하여 롬바르디아를 상실했습니다. 참고로 롬바르디아는 이탈리아 북부에 있는 주이지요. 그나마 상당한 희생자(7,000명 이상)에 깜짝 놀란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배신하고 단독으로 강화를 맺은 덕분에 베네치아는 간수했지요. 하지만 7년 뒤에는 결국 베네치아를 빼앗기고 맙니다.
서기 1866년 오스트리아는 독일 통일을 두고 벌어진 보오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7주 전쟁)에서 프로이센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동안 자타가 인정하는 독일 내 최강의 나라였던 오스트리아의 위신은 무너졌으며, 통일 독일문제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최종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에 패배해 독일 연방에서 강제로 배제당했지요. 현대적 언어로는 강퇴당한 것입니다.
이때 빌헬름 1세와 헬무트 폰 몰트케 등 프로이센 장군들은 오스트리아 땅을 갈라먹기를 원했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를 억지로 가라앉히면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영토를 보전했지요. 빌헬름 1세는 최소 보헤미아 왕국은 가져와야 한다 생각했지만 비스마르크 재상은 전쟁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자 이를 말린 것입니다.
합스부르크 왕조는 비슷한 시기에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결과로 사르데냐 왕국에게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중심도시는 베네치아) 지역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거기에다가 분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도 멸망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도 사실상 상실했지요. 뿐만 아니라 패배의 여파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이 동요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서기 1866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과의 7주 전쟁에서 패배해 베네토 지역까지 상실하며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서기 1815년부터 1866년까지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존재한 오스트리아 제국의 구성국 중 하나였지요. 쉽게 말해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서기 1866년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좀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한자로는 보오전쟁(普墺戰爭)이라 하는데 이것은 한자로 프로이센이 보로서(普魯西), 오스트리아가 오지리(墺地利)이므로 앞 글자를 따서 보오전쟁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앞에서도 보오전쟁 이야기는 했지만 주로 이탈리아와 관련된 이야기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전쟁은 서기 1866년 6월에서 7월, 7주간에 걸쳐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을 중심으로 이탈리아 및 군소 독일 국가들이 참전한 전쟁입니다. 독일 연방 내에서 '오스트리아 위주의 대독일주의냐, 프로이센 위주의 소독일주의냐'의 주도권 다툼의 '마지막 과정'으로, 최종적인 독일 통일을 위한 한 과정이었지요.
독일 지역 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주도권 경쟁은 멀리 서기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 시기에 북독일 개신교 제후들의 성장과 서기 17세기 30년 전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의 신성로마 황제가 북독일 내 영향력을 대부분 상실하였지요. 이 부분은 앞에서 살펴보신 대로입니다.
이후 서기 18세기 중반 마리아 테레지아,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간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됩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북독일에서 성장한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점유하며 북독일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완전히 없애다시피 했지요.
7년 전쟁에서는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프란츠 1세가 서기 1757년 제국 의회에서 평화 유지 의무를 저버린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상대로 제국전쟁을 선포하나 결과는 또 다시 프로이센이 승리하며 황제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심각하게 손상되었습니다. 물론 결정적인 패배 원인은 러시아 표트르 3세 때문이었지만요.
이후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는 등 합스부르크 왕조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빈 회의에서 승전국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나란히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지요.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견제에만 치중하고 독일권 내 역외 영토를 전부 포기하고 북이탈리아에서 실리를 챙기면서 향후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분이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마찰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로이센과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오스트리아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선전포고했으나 전쟁 준비는 커녕 누적된 재정난과 군대 손실, 헝가리 진압 등 전쟁 수행 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일 연방국에 기대했지요. 하지만 프란츠 요제프 1세가 군무에 능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오스트리아 위주의 독일 연방이 북독일 군소 제후국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나라가 오스트리아를 편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상당 기간 전쟁을 준비해온 프로이센의 공세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보수주의적인 습성이 있음을 감안 해도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변화는 필요했는데 말이지요. 그런 변화조차 거부했습니다.
국제정세도 변했는데 이미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남북에서 오스트리아를 협공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합스부르크 왕조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하지 못한 전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크림 전쟁 때 오스트리아에 뒷통수를 크게 맞은 러시아가 과거 전통적 우방이던 오스트리아를 버리고 친프로이센 정책을 펴기로 해서 프로이센이 매우 유리해졌지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신생 이탈리아가 크려면 오스트리아의 기세를 꺾어 놓야야 한다고 오판하고 있었습니다. 이미지 상 합스부르크 왕조의 그늘은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중립의 대가로 팔츠 지방 란다우, 프로이센령 자를란트, 독일 연방 요새인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지역 일부 또는 전부를 원한다는 협상안을 내놓았습니다.
이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았고 나폴레옹 3세는 이를 묵시적 동의로 착각했습니다. 여하간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프로이센군은 철도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병력을 전선으로 전개해 오스트리아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오스트리아는 병력 동원에도 시간이 걸리고 철도 총연장도 형편없이 부족해 병력 전개에 어려움을 겪었지요.
프로이센은 전쟁 전 철도 5개를 완공하여 엄청난 통신과 수송 효율성을 보여 준 반면 오스트리아는 전쟁 도중 프로이센군을 상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철도가 단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이미 프로이센 군부는 철도의 유용성에 주목하여 철도 통제권을 군이 보유하고 있었기에 평시에도 원활한 작전 수행과 훈련이 가능했지요.
이탈리아의 선전포고는 사실 몇 달 전에 이미 비스마르크와 약속된 것으로,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비밀리에 공수동맹을 맺고 대신 오스트리아령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을 이탈리아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비스마르크의 현란한 외교에 비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굼뜬 행동을 보였지요.
오스트리아도 중립의 대가로 이탈리아에게 같은 제안을 했으나 오스트리아는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 통일을 두고 맞선 적국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탈리아는 미수복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인 우세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 우호적 중립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지요.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탈리아 통일 3걸과 국왕은 반(反) 오스트리아 정신이 강했습니다.
독일 지역에서는 프로이센이 예상대로 오스트리아의 동맹국들을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쉽게 제압했습니다. 사실 전쟁 초기 하노버군이 프로이센군을 소규모 전투에서 격퇴한 적도 있지만 승전 이후 바로 항복해야 했지요. 그 이유는 병력과 탄약이 떨어져서였습니다. 오스트리아조차 전쟁준비가 미비했고 보면 이런 전개는 당연한 귀결이었지요.
프로이센을 제외하면 다른 중소국가들은 전시도 아니고 대병력을 유지하지도 않고 장비 가동도 형편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합스부르크 왕조가 맥없이 진 것은 아니었지요. 보헤미아의 쾨니히그레츠(Königgrätz)에서 벌어진 전투 초반에는 프로이센군이 엄청나게 고전했습니다.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잘 들어맞지요.
당시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인 베네데크 장군은 프로이센의 몰트케 장군에 비해 전략적 능력은 떨어졌지만 그와는 별도로 전술적 능력은 훌륭했습니다. 스스로의 능력을 잘 아는 그는 자신의 능력을 살리기 위해 쾨니히그레츠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희망을 걸었지요. 이대로만 진행되었다면 오스트리아가 이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혹은 프로이센이 이기더라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끝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양군이 맞선 가운데 프로이센 왕태자가 이끄는 프로이센 2군이 전선 측면에서 나타나자 오스트리아군은 혼비백산해서 전투를 중지할 수밖에 없었지요. 소총의 경우 프로이센이 확실히 우월했지만 포병에서는 오히려 오스트리아보다 뒤떨어졌고 이것도 초반 고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종합하자면 프로이센군이 우월해서 진 것이라기보다는 오스트리아군이 스스로 화를 자초한 것이 패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오스트리아군의 실책은 같은 전제 군주국임에도 나름대로의 혁신을 추구했던 프로이센과 최소한의 혁신조차 추진하지 않았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차이라고 보아야 하겠지요.
여전히 신분제 및 비효율적인 통신체계에 기초한 전근대적인 지휘체계를 가진 오스트리아군과 참모본부를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의 혁신을 달성하고 근대적인 통신망을 갖춘 프로이센군의 차이를 보여 준 전쟁이 보오전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전선에서는 나름대로 선전하며 방어전을 수행했지요.
특히 리사 해전에선 양적 열세인 해군력으로 이탈리아 함대를 격파하는 등 선전했습니다. 이 리사 해전은 이탈리아군의 삽질이라는 인식이 강하지요.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는 통일국가를 이룬지 10년도 안 된 신생국이었지만 오스트리아는 내륙강국이라 할지라도 수백 년 동안 해군을 운용해 본 경험이 있고 따라서 그 질이 상당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그 우세를 잘 이용해서 충각 돌격을 절묘하게 활용한 것입니다. 이런 선전에도 불구하고 주적인 프로이센군이 파죽지세로 보헤미아를 석권할 기세를 보이자 7월 26일에 황급히 휴전조약을 체결했지요. 7주 만의 일이었습니다. 이로 인한 전쟁의 결과는 독일 연방 해체, 북독일 연방 승인,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완전 해체 등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의장으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며 30여 개 독일계 국가들의 연맹으로 결성된 독일 연방은 해체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프로이센이 점령한 영토는 프로이센이 병합했지요. 북독일의 모든 제후국들을 가입 회원으로 한 북독일 연방이 오스트리아에서 승인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쟁배상금 4천만 탈러(Thaler)를 부과받았지요.
프로이센 군부에서 오스트리아로부터 영토 할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습니다. 몰트케 장군도 여기에 찬동했지요. 빈에 입성하는 것은 단순 영토 할양의 대가를 구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을 일소하여 재기불능 상태에 두려는 욕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재상은 여기에 대해 반대의 의사를 분명히 했지요.
비스마르크는 어차피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축출한 마당에 프로이센의 영토적 이익은 독일 연방 제후국으로부터 얻는 것이 옳다 여겼습니다. 하여 프로이센군이 빈 근처에서 진격을 멈추면 오스트리아가 고마워할 것이라며 말렸지요. 그럼에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왕태자 또한 비스마르크 편을 들자 결국 빌헬름 1세는 뜻을 꺾었습니다. 이때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1세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도 했었지요. 그로서는 오스트리아를 완전히 몰락시키기보다 적당한 선에서 우위만을 인정받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프로이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 생각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길게 공유한데다가 프로이센의 독일 내 우세권이 특히 남부 영방국에서 인정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에게 가혹한 조건을 제시하면 궁극적으로 독일 내 국가들에게 거부감을 줄 우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를 장기적으로 최소한 우호적인 중립국으로 묶어둘 필요성이 있었지요.
이제 프로이센은 독일 통일을 방해하는 더 큰 강적 즉 프랑스 제2제국을 격파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비스마르크가 오스트리아군을 철저하게 격파하는 것을 반대한 이유이기도 했지요. 결국 오스트리아는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던 반면 프랑스 제2제국은 보불전쟁(普佛戰爭)의 패배로 체제가 바뀌고 맙니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강제로나마 변화를 시도하게 되지요.
다음 글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