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휴가를 나와서 아침 밥상에서
깜짝 놀랐다.
아버지가 머리를 빡빡 깍고 심지어 눈썹까지 밀고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나를 향해 눈을 꿈뻑이셨다. 나중에 말해 준다는 표시 같았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나와 두발 자유화 데모를 하면서 교문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아버지가 머리를 깍고 학생들 앞에 섰다는 것이다.
교장을 비롯해 지도과장이 나와서도 제지가 되지 않던 학생들이 아버지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자 멈칫하고 교실 안으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산림청 고위 공무원으로 진급 할 수 있었던 아버지가 10 월 유신으로 퇴직 당하시고 농고 교사가 되셨다.
임학과 교사 였던 아버지는, 실습이 있는 날이면. 맨발에 장화를 신고 출근을 하셨다.
그리고 실습 시간이면, 막걸리를 가지고 와서 학생들과 같이 마셨다.
그 막걸리는 아버지가 학교 숙직실에서 손수 담근 술이었다.
지금 같으면 학생들과 술을 마신다는 것은, 교사로서 무책임하고 쫒겨 날 일지만, 아버지는 그런 행동이 당연하듯 했다.
아버지의 막걸리는 農酒였다.
할아버지는 아침에 일어나시면 머리 맡에 둔 막걸리 한 사발을 마시고 농사 일을 나가셨다.
할아버지에게 막걸리란 영양식이고 노동을 위한 양식이었다.
그 당시 농촌에는 막걸리를 밀주로 단속을 했다.
박정희가 새마을 운동을 한다면서 집집 마다 담그어 먹던 농주 막걸리를 밀주로 단속을 한 것이다.
할아버지 아버지를 닮아서 나도 막걸리를 좋아한다.
아버지의 奇行은 수도 없이 많았다. 학업을 포기하고 시험을 백지로 낸 학생을 위하여 100 점을 주었다. 물론 그 점수는 실제로 성적표에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학생으로서는 대단히 기분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퇴학 당할 지경이 된 학생을 위해서는 교장실을 엎어 버리고, 학생 당사자를 교무실로 데려와서 모든 선생님들이 보는 앞에서 매질을 하기도 했다.
물론 그 학생은 퇴학 대신에 무기 정학으로 감형이 되었으며, 그후 성실한 학생이 되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장 먼저 찾아왔다.
나는 아버지의 교사로서의 행동이 정당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아버지는 진정으로 학생들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 마음을 학생들이 알기에 돌아가시고 수 많은 졸업생들이 문상을 왔다.
그 중에는 내친구도 있었다.
그 친구는 집이 가난해서 인문고에 입학을 못하고, 농고로 갔는데 아버지가 그 친구를 산림청에 특채로 취직을 시켜주었다.
아버지가 산림청 고위직에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면, 그런 일은 취업 부정 청탁으로 범법 행위 일 것이다.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고, 고향 옥계면 낙풍리로 낙향을 하시고, 한 동안 상실감에 술을 드시다가, 어느 날 나와 같이 한잔 하면서 교사시절의 시험지를 불 태우시면서 우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아버지로서의 아버지 보다, 선생님으로서의 아버지가 더 보고 싶다.
나도 아버지 대를 이어 농고 교사가 되려다 말았다.
교생실습까지 나갔다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