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9
#요한계시록 #Revelation 21:8(2)
살인자들이란 거짓 복음과 위선적 행위와 까닭없는 증오심 등으로 연약한 교인들을 실족시켜서 교회를 떠나게 만드는 자들을 의미한다. 거짓 복음에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바라보게 하지 않고 땅의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게 하는 것, 자기 이익과 합리화를 위해 성경을 왜곡하는 것, 정치 이념 같은 가치중립적인 것을 성경의 진리로 위장하는 것, 목사의 지시라면 속옷을 내려보라는 부당한 것도 절대적으로 따라야 된다고 하는 것, 자기한테 까불면 하나님도 자기 손에 죽는다는 신성모독을 하나님과의 깊은 친분이라 변명하는 것, 교회의 명성과 존립을 위해서라면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는 잠잠히 덮고 가야 된다고 하는 것, 하나님께만 회개하면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것, 회개하면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으므로 스스럼없이 가볍게 죄를 짓는 것 등이 있다. 위선적 행위로는 머리와 입으로는 성경의 진리를 줄줄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위로는 자기가 아는 진리대로 행하지 않는 것, 이 사람 앞에서는 이 사람을 칭찬하고 저 사람을 헐뜯으면서 저 사람 앞에서는 저 사람을 칭찬하고 이 사람을 비방하는 것, 겉으로는 상대방을 위하는 척 하면서도 실상은 상대방을 파멸로 이끄는 것, 남들에게는 성경적인 신앙을 요구하면서 정작 자기는 세속적인 유익을 추구하는 것 등이 있다.
음행하는 자들이란 교회를 다니면서도 자기 음욕대로 간음을 저지르는 자들을 의미한다. 음행의 유혹이 왔을 때 신자로서 단호하게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두번다시 오지않을 천재일우의 기회로 여기면서 간음을 저지르는 것이다. 음행하는 교인들은 음행의 관계가 부적절 할수록 자기들의 간음을 애절한 사랑으로 그럴듯하게 위장한다. 교회 다니는 부부가 사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사유로 이혼하는 것도 음행하는 것이다. 결혼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지기 싫어서 동거하는 것도 음행이다. 여자에게 위험한 곳인줄 알면서도 클럽을 전전하다가 강간을 당하는 것도 음행이다. 술을 절제하지 않고 과음하다가 부지불식간에 간음을 저지르는 것도 음행이다.
점술가들이란 성경과 성령으로써가 아니라 세속적인 기법으로 교회의 미래를 예측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는 목사와 장로들을 의미한다. 대체로 점술가들이 휘황찬란한 의상과 장식으로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듯이 교회의 점술가들도 말쑥한 외모와 점잖은 태도와 화려한 언변으로 그럴듯하게 교인들을 미혹한다. 교회의 점술가들은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복을 받고 자기 말을 안들으면 벌을 받는다고 회유하고 겁박함으로써 교인들을 세뇌시킨다. 교회의 점술가들은 마치 무당이 신내림을 받고 정신사납게 굿판을 벌이듯이 설교 시간에 특정 용어나 박수를 지나치게 반복하거나, 예수님을 흉내낸답시고 흰 옷을 입고 십자가를 져 나르거나, 온갖 휘황찬란하고 웅장한 무대장치를 선보이는 등의 퍼포먼스를 치른다. 어떤 교회의 점술가들은 자기가 성령의 은사와 계시를 받았다면서 언제 무슨 일이나 사건이 반드시 벌어질 것이라고 선동하며 떠벌이기도 한다.
우상 숭배자들이란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목을 매고 담임목사를 맹종하거나, 점이나 타로나 사주팔자를 보러 가거나, 오늘의 운세나 별자리 운세나 혈액형별 성격이나 MBTI 같은 성격유형지표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심취하는 교인들을 말한다. 담임목사가 교회 재정을 횡령하건, 아들 목사에게 교회를 세습시키건, 성범죄를 저지르건, 대통령과 정부를 비방하고 저주하고 악담하건, 하나님을 죽인다고 하건, 북한주민 2천만명을 하나씩 끌어안고 죽자고 하건, 불미스러운 사건사고를 쉬쉬하자고 하건 성경으로 검증해보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별다른 갈등이나 문제가 없는 평온한 때에는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으면서도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중요하게 결정해야 할 사안이 생기면 성경과 성령이 아니라 지금 당장 무언가 해결책을 내놓을만한 점집 등을 아무 거리낌없이 드나드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딱히 어떤 긴박한 문제가 없어도 호기심이나 심심풀이로 타로나 사주풀이를 보러 가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매일매일 시시때때로 오늘의 운세나 별자리 운세나 생년월일 운세 등을 보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기법이라 하여 MBTI 같은 성격유형지표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20210829
#예레미야 4:3-4
3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여호와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범죄하는 예루살렘이 이방족속에게 철저히 파멸될 것을 경고하시는 중에 그나마 그들에게서 진심어린 회개를 기대하시며 마음의 묵은 땅을 갈아엎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며 마음에 할례를 행할 것을 촉구하신다. 그들의 심령이 묵은 땅과 같다는 것은 오랫동안 율법과 순종으로써 마음밭을 기경하지 않아서 여호와께서 은혜의 씨를 뿌리기에 적합하지 않게 황폐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시덤불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땅이 저주를 받자마자 저절로 생겨난 것이므로 죄의 삯 또는 결과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들의 심령에 가시덤불이 생겼다는 것은 율법과 순종으로 기경하지 않은 자기들의 마음밭에는 저절로 죄의 덤불이 무성하게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신의 할례는 며칠동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극심한 통증을 유발시키며 해당 부위의 특성상 남자는 할례 전보다 성적인 쾌감이 둔감해진다. 그러므로 심령에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은 육신이 느끼는 격통과 같이 자기들의 추악한 죄악들에 대해서 극심한 심적 고통을 가질 정도로 통렬히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죄악의 뿌리를 완전히 없앨수는 없더라도 남자의 성적 쾌감이 반감되듯이 통렬한 회개 후에는 죄악으로 이끌리는 경향이 반감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이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면 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 보시기에 얼마나 극악무도한 죄악을 저질러왔는지를 먼저 살펴보고서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촛대를 그 교회에서 옮기실 날이 멀지 않았음을 명확하게 인지해야만 한다. 그런 후에 그동안 저질렀던 교회적인 죄악들을 교회 전체에 공유함으로써 온 교회 구성원들이 교회적 죄악의 주범들이었음을 한 마음으로 가져야 한다. 그래야만이 교회 차원의 회개를 할 수가 있는데, 파악 된 죄악들 하나하나를 열거하면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심적 고통이 수반 된 구체적인 회개를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울부짖으며 회개하였다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저지른 죄악으로 인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피해를 본 모든 사람들을 찾아가서 뒤늦게나마 용서를 구하고 실질적 배상을 해줘야 한다. 아울러 회개를 했으니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며 안일하게 대처해서는 안되고 그런 죄악이 재발하지 않도록 실질적인 방지책을 마련해야만 한다. 행함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듯이, 행함 없는 회개는 죽은 회개이다.
범죄하는 교회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작정과 선택에 달려있다. 따라서 교회 전체가 불현듯 지난 날의 죄악들을 회개하고자 하여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사탄의 회당이 되도록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영광을 위해 보존하신다는 명확한 증거가 된다. 반대로 교회가 지난 날 추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여전히 회개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역사와 전통이 유구하더라도 적어도 그 때만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선택하신 교회가 아님을 스스로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범죄하는 교회에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사탄의 회당이 되어 파멸되는 책임은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 교회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앞에서는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20200829
#레위기 #Leviticus 19:29
29 네 딸을 더럽혀 창녀가 되게 하지 말라 음행이 전국에 퍼져 죄악이 가득할까 하노라
처음부터 스스로 창녀가 되고자 하는 여자는 없을 것이다. 백이면 백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그런 쪽으로 발을 들이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경우일 것이다. 더군다나 여자가 스스로 창녀가 되는 것보다 더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부모가 스스로 자기 딸을 창녀가 되게 하는 일일 것이다. 큰 빚을 지게 돼서 자기 딸을 채주에게 종으로 넘기는 경우는 있더라도 창녀만큼은 죽더라도 시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는 어찌 된 영문인지 마치 백성들이 부모로서 천륜을 저버리는 죄를 지을 상황을 상정하여 금하시는 규례를 내신다. 아마도 이방 족속에는 이런 참람한 풍속이 만연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고대 이방 종교들에는 '크데샤'라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종교 의식을 행하면서 제물을 바치러 온 남자들과 성매매를 하였다. 야곱의 넷째 아들 유다가 아내가 죽은 후에 크데샤로 변장한 며느리 다말에게 증표를 주고 성매매를 했다. 바알과 아세라의 종교 의식도 이런 난잡한 성행위가 동반되었다. 고대 사회에서 종교는 최상위에 있기 때문에 아마도 부모들은 자기 딸이 종교와 관련된 상류층으로 들어가기를 원해서 몸을 내어주는 크데샤를 시켰을 수도 있다. 어떤 이망 족속은 이 크데샤를 국가 위기를 피해가기 위해 활용하기도 하였다. 미디안 족속의 왕 발락은 술사 발람의 계략대로 상류층의 딸들을 크데샤로 활용하여 이스라엘 남자들을 유혹하여 영으로나 육으로나 간음을 저지르게 하였다.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의 창에 찔려죽은 고스비는 미디안 족장의 딸이었다. 이로 미루어볼때 고대 이방 족속의 창녀 크데샤는 그저 오늘날 윤락녀처럼 단순히 돈만 받고 몸을 파는 것이 아니라 이방 종교의 사제이기도 하였고 국가를 위해 충성하고 희생하는 그런 자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크데샤들은 어쩌면 여자들에게나 딸가진 부모들에게나 선망의 대상이었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비천한 창녀로 만들지 말라는 것 뿐만 아니라 창녀를 선망의 대상이 되게 하는 문화를 만들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이는 당시에는 우상숭배와 결합된 크데샤가 성행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고 오늘날에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선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자기 몸을 선정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금지하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요즘 인스타를 보면 상당한 미모를 갖춘 여성들이 자기의 외모를 선정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수많은 인기와 수익을 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는 헬스, 요가, 필라테스 등의 운동이 널리 퍼져 있어서 레깅스 등의 여성들을 위한 운동복이 급성장 하고 있다. 그런데 여성 운동복은 전부 실루엣만 본다면 나체를 방불케 할 정도로 여성의 몸에 밀착된 것들이다. 그래서 전문 강사들이건 취미로 운동을 하건간에 상관없이 여성들은 자기들의 신체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운동복을 입고 운동을 가르치기도 하고 훈련하기도 한다. 그런데 백이면 백 그런 컨텐츠를 올리는 여성들은 되도록 많은 구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몸에 붙는 운동복을 입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이 몸이 드러나지 않는 운동복을 입고 운동하는 컨텐츠를 올린다먼 구독 수는 현저하게 감소할 것이다. 미스코리아 등의 미인대회나 여성 아이돌 그룹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 위해 여성의 몸을 드러내어 이용하는 것에 속한다. 물론 이는 성매매처럼 직접적으로 자기 몸을 파는 것은 아니더라도 선정적인 컨텐츠를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성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것으로 인기와 수익을 얻으려 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여자가 애정으로가 아니라 어떤 자기만의 목적을 위해서 조건을 갖춘 남자를 성적으로 유혹하거나 결혼 대상으로 삼는 것은 간접적인 성매매에 해당된다. 여성 연예인들이 재력가 남성을 스폰서로 두는 것이나 부모가 자기 딸을 가급적 재력을 갖춘 남자에게 결혼시키려는 것이 그러하다. 물론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남자는 아내 된 여자와 가정을 부양할 경제적 책임이 일차적으로 있기 때문에 연애를 하건 결혼을 하건 충분한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으로 갖춰야 한다. 그런데 이런 적절한 수준이 아니라 여자나 딸 가진 부모들이 남자를 볼 때 사람 됨됨이를 살펴보지 않고 무조건 재력 등의 세속적 가치만을 따지는 것은 결국 여성이 자기 자신을, 부모가 자기 딸을 많은 돈을 받고 팔아버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사사 시대에 유다 지파의 어떤 사람이 자기 딸을 레위인 남성에게 첩으로 준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레위인의 첩이 된 여인은 원하지 않았어도 부친이 신분 상승이나 집안의 유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결혼을 결정했을 것이고, 그 여인은 그에 대한 반발심으로 다른 남자와 간음을 저질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아버지의 욕심과, 비록 원치 않은 결혼이었어도 간음을 저지른 여인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여인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윤간을 당해 죽는 비극을 맞게 된다.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은 다윗이 자기 지위를 이용한 것도 있지만 밧세바도 그에 상응해서 신분상승을 위해 동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만약 그런게 아니었다면 마태는 예수님의 계보를 기록할 때 밧세바보다 못한 기생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의 이름을 명시한 것처럼 밧세바의 이름도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유독 밧세바의 이름만은 기록하지 않고 단지 우리야의 아내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성과 딸 가진 부모들은 배우자 될 남성을 찾을 때 재력 등의 세속적 가치만을 절대적으로 따지려 해서는 안된다.
국가의 비밀 첩보 요원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여성 요원이 소위 미인계를 활용하는 것도 여성 그리스도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미인계를 활용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모종의 남성에게 내줘야 하는 상황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은 미디안 족속이 이스라엘 민족을 타락시키려고 활용한 방법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에게서는 자기 민족 여인들을 주변국에 미인계로 사용한 적은 없다.
여성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자기의 몸은 오로지 한 남자의 돕는 배필인 아내인 경우에만 남편 앞에서 드러낼 수 있다. 그 외에는 어떠한 목적에서건 전체건 일부건 몸을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미혹
내 생각에 미혹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버림받은 자들에게 이 땅에서 내리시는 가장 큰 형벌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많은 나날들을 교회 안에 있다 하여 주여주여 하면서도 결국 자기들이 받은 미혹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뿐이다. 자기들은 구원받은줄 알고 수십년을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바쳐 헌신했는데 돌아오는 것이라곤 영원한 불못인 것을 알게 되는 그 때에는 얼마나 억울하고 허무할 것인가. 그러나 그 때에는 돌이킬 기회가 없으므로 절망만 남을 뿐이다.
미혹당한 자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으로 비참한 자들은 성경과 복음을 지식적으로는 아주 잘 알고 받아들였다고는 하면서도 정작 삶에서는 선한 열매를 맺지 않는 자들이다. 성경은 잘 알면서도 정작 산악을 분별하지 못하여 의인을 악하다 하고 악인을 의롭다 한다. 성경이 최고 최상의 삶의 기준이라 입으로는 고백하면서도 정작 모든 판단은 자기 이념과 사상에 의거한다. 하나님 나라는 보이게 임하는 것이 아닌데도 자꾸만 보이는 기독교 국가를 만드려 한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고난을 감당할 생각은 하지 않고 편하게 신앙생활을 할 궁리만 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어도 상관없다 여긴다. 그런 자들에게서 도대체 복음의 어떤 선한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날 교회는 이런 수많은 미혹된 자들이 판치고 있어서 도저히 회생이 불가하게 되었다. 소금이 맛을 잃기만 해도 버려져 밟힌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부패하여 악취를 내고 오염시킨다면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클 것인가. 주인이 허락항 3년의 유예기간은 이미 끝났고 밑둥에 놓인 도끼로 찍힐 일만 남았다. 더이상 교회의 희망을 얘기하는 것은 근거없는 정신승리일 뿐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주님께서 내리실 징벌을 잠잠히 맞고 견디는 것 뿐이다.
#20190829
#에스겔 37:1-28
에스겔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정도로 하나님의 환상을 많이 체험한 선지자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을 호위하는 무시무시한 천사 그룹의 형상을 보았고, 예루살렘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를 마치 천리안으로 보듯이 하였으며 성소에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예언이 임할 때는 언제나 유체이탈 상태에 빠져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여기저기 두루돌아오곤 하였다. 그래서 아직 어린 신앙을 가진 초보 신자들은 에스겔의 이런 특별한 환상체험을 부러워해서 자기도 그런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강하게 가지기도 한다. 여기서 좀 더 지나치게 신령한 체험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들은 그런 신비한 체험의 정도에 따라 소위 신앙의 수준을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비롯한 선지자들에게 그런 특별한 체험을 허락하신 이유는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을 비롯한 피조세계는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을 저버리게 되었다. 피조세계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속한 피조세계를 거스를 수 밖에 없는 매우 고달픈 행위인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선포하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든 일이겠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돌이키시려고 선택하신 선지자들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감당하게 하시려고 일반인은 체험할 수 없는 특별하고 신비한 환상들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선지자들도 너무나 연약한 죄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만약에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붙들어주시지 않으시면 그 사역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즉, 환상체험의 정도에 따라 신앙수준이 차이 나는 것이 아니라, 사역의 고된 수준이 차이 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에스겔이 누구보다도 더 환상을 많이 보고 체험했다는 것은 그의 선지자 사역이 그만큼 더 힘들고 고달픈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에스겔은 선지자 사역을 하면서 유일하게 위로를 얻었던 사랑하는 아내를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했다. 또한 매튜헨리의 에스겔 주석에 따르면 에스겔은 자기 동족에 의해 말에 묶여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나올 때까지 질질 끌려다녀 순교했다고 한다. 예수님의 사도들 중에서는 아마도 사도 바울이 에스겔만큼 환상체험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사도로서의 삶은 어떠하였는가.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을 맞고, 한 번 태장을 맞고, 동족에게 돌에 맞아 죽을 뻔 하고, 강도를 당하고, 배가 파선되었고, 춥고 배고픈 등등의 고된 사역을 해야만 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다른 이의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쳐줄 수는 있었어도 정작 자기 육체의 가시만큼은 세 번을 기도해도 없애지를 못하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받은 환상과 은사로 인해서 교만하지 못하도록 심어 놓으신 것이었다. 그 환상과 성령의 은사들은 사도 바울이 받고 싶어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으로 주신 것이었다. 그러면서 육체의 가시를 같이 주신 것이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어린 신자들과 극단적인 신비주의자들은 그 무시무시한 대가는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환상과 성령의 은사들을 열광적으로 바라는 우를 저지른다. 그런 것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자들에게 임의로 주실 것이며, 설령 이를 원하는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고난도 함께 받을 것을 각오해야만 한다. 그저 우리처럼 지극히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교회와 내주하시는 성령으로만 우리의 신앙을 지켜주시는 것에 감사하는 것이 낫다. 우리 연약함을 보시고 차라리 아무런 환상도, 기적도 주시지 않으신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말라버린 사람 뼈가 가득한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신다. 이 골짜기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서 많은 살륙이 발생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이스라엘이 모든 왕조 시대에 걸쳐 이방의 우상을 숭배하면서 자기 자녀를 잡아 죽이는 인신제사 때문에 그렇게 뼈가 많은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의 의문대로 하나님께서 살리신 군대 같은 마른 뼈들이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진찌로 생기를 얻어 새생명을 찾은건지, 그렇다면 그들이 어디에서 살았는지를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임하셨을 때 에스겔은 종종 유체이탈 상태였기 때문에, 이 마른 뼈 골짜기도 하나님의 환상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설령 하나님께서 그 마른 뼈들을 실제로 살리셨다고 해도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주권이므로 우리가 알 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예수님의 별명인 인자라고 부르시며, 이 마른 뼈들이 살아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이에 에스겔은 주 여호와께서 아실 것이라며 아주 지혜롭고 믿음 가득한 대답을 한다. 통상적으로는 절대 불가한 일이나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한 일임을 고백하는 것이고, 그 일을 행하시든지 안하시든지 주권은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인 것이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능력 및 주권과 내가 원하는 것을 교묘히 결합시켜 간구하는 우를 범한다. 즉, 참으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반드시 이뤄달라는 식이다. 그래서 기도한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설령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내 기도대로 이뤄주셔도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미명하에 내 교만한 신앙을 간증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떤 절망적인, 또는 절대불가한 상황이 닥쳤을 때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을 고백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이 낫다. 그래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느부갓네살 앞에서 그의 신상에 절하기를 거부하며 설령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저 풀무불에서 구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우상에 절하지 않겠다고 결의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마른 뼈들을 살리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인자 에스겔에게 그 일을 위임하신다. 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아마도 매우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마른 뼈들에게 살아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생기를 명하여 마른 뼈에 들어가라고 위임하신다.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이 생기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에스겔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기는 하지만서도 감히 창조주이신 성령 하나님께 명령을 내리는 황송한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명령이 비록 인자 에스겔의 입에서 나왔더라도 이는 성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성령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인자의 입에서 나온 성부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하신다. 이는 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원리를 예표한다. 참 인자이시자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말을 전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며 오로지 아버지께 받은 말씀만 전하신다고 하셨다. 성부 하나님의 뜻이 성자 하나님께 전달되고, 이는 성자 하나님께서 연합하신 그리스도의 인성에 전달되어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은 결국 성령 하나님의 능력인데, 성령께서는 예수님이 선포하지 않으시면 아무 일도 스스로 행하지 않으신다. 심지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기도 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이후에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우리에게 보혜사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이신 성령께서 인자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피조물인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과 같이 높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맏아들 그리스도께 주신 그런 존귀함을 양자로 삼으신 우리에게도 허락하셨다. 물론 비록 그리스도와 동등한 수준의 존귀함은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성령을 보혜사로 보내주셔서 감히 죄에 물든 우리를 하나님 당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삼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이 죄악된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본받아 어떤 때는 마른 뼈와 같이 도저히 소생 불가능해 보이는 어려움에 처해있더라도 이 모든 것이 주 여호와께서 아신다는 믿음으로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통해서 조금씩 거룩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고, 마지막 날에는 우리에게 주신 육체를 버리지 않으시고 그대로 새롭게 변화시키셔서 온전히 새롭게 된 영혼과 재결합 시키신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 새 예루살렘에서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눈으로 직접 봄으로써 영원무궁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매순간 영원히 절대 지루하지 않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찬송하게 될 것이다. 이 땅의 육신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런 부활신앙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볼 때 마치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 유체이탈 상태에 빠진 에스겔 보듯이 취급하여 조롱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저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육적인 것들에 초연해질 수 있는 것이다.
골짜기의 마른 뼈들은 이스라엘 족속의 절망적인 회생불가 상태를, 두동강 난 나무 막대기는 분열된 이스라엘의 두 왕국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행할수도 이룰수도 기대할수도 없는 큰 일을 행하신다고 하신다. 그것은 마른 뼈를 살리시듯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이와 더불어 두동강 난 나무 막대기를 하나로 이어 붙이시듯이 분열된 왕국을 하나로 합치시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예루살렘 멸망 후 70년의 포로기간을 지내고 나서 성취되었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원사역을 이루심으로 확장되어 성취되었으며, 예수님 승천 후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오셔서 복음이 만방에 퍼짐으로써 그 성취가 확장되었다. 하나님의 이 예언은 최종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주로 오실 때에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그 때에는 아담부터 마지막 때까지의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모든 백성들이 한 자리에 모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