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바로 보이는 해안가인
한강 하구에
자리한 울 할아버님 송덕비!
묵묵히 여기에
길이길이 빛을 발하시며
우리고향을 지키고 계심이다.()
◇ 功 德 碑 ♧
옛 성현의 말씀에
虎死留皮(호사유피)
人死留名(인사유명)
이라 했읍니다,,
즉*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이름을 남긴
작은 영웅 한분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蓮花 : 朴 時 應 公이며
峰蓮 : 朴 允 培
교장 선생의 先親이
되시는 분입니다.
봄비 내리는 들창밖
너머로 60여년전 매말라버린
^대산리^벌판이 오버랩 되여
잊어져가는 기억을
되살려 보려합니다.
1950년대 6,25를
前後하여 7년동안
가뭄이 극심하여
드넓은^대산리^벌판
에 모 한포기 못꼽고
하늘을 원망하든 시절
가난한 나라에 돈이없으니
焉敢生心(언감생심)
저수지가 가당키나 한일인가?
늦게라도 雨를 주면
마냥모나 乾播(건파)를심고
이도 저도 안되면 구황작물인
메밀을 심는 것이
天水沓(천수답)의
비애가 아니겠는가?
내생각에^옥깨^방죽을 제외한
어느벌판도 7년가뭄의 고통에 자유롭지 못하지
않았을까?
메밀 이라는 작물이
매마르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자라는 곡식이라 보리고개에 허덕이는 우리에게
매밀수제비 빵 매밀전병 등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해 준
구황작물이며
추석대보름 달빛에 끝없이
펼쳐진 하이얀 매밀꽃밭의
은빛고운 꽃물결을 보라/
2)天上의 세상이
어디 따로있겠는가?
^이 효석^선생의
*메밀꽃 필 무렵*
이라는 단편소설
작품의 무대가된
봉평 메밀밭 풍경은
드넓은^대산리^벌판
의 메밀꽃 물결에 비하면
^鳥足之血^ 이라/
이넓은 들판에 언제
까지 메밀농사에 목을 멜수만은 없고,
天水沓의 비애와
갈증해소를 위해
발벗고 나선분이
바로*朴 時應^선생이며
동네 어른들은
아호인*박 광주*로
호칭하고
이분의 별호는^빈가방^으로
통했으니
그때 당시
유일하게 ^오리가방^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서류가방 을
들고 다니시는 바람에 부쳐진
별호가
아닌가 생각이 들고
그때 당시 소가죽은
너무 비싸서 대부분의 소품들은 돼지가죽 으로 만들어 사용하던
시절에 삼일이 멀다
하고 그 가방을 들고
경기도청(도청이없어
중앙청 일부를씀)
수자원공사 를 찾아
다니시며 갯고랑에
水門을 만들어 오늘까지도
유용하게 쓰이는 저수지가
이분의 노력으로
만들어져 가뭄해갈에
큰 도움이 되었고,
그때 당시 물은 내가족의 生死가
걸린문제니 어느 누가
^박 광주^선생의 功德을 칭송치
안으리오/
금보다 쌀 한톨이 더
귀하든 시절이 있는가 하면
지금은
쌀이 넘처나 보관료만 일년에
수백억원이 든다고 하니,
이 또한 歷史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오늘날 우리가 풍요의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은 다 이런
先覺者들의 희생과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비록 육체는
썩어 없어지더라도
그 사람의 이름이 많은
사람들에게
膾炙(회자)될 때 이름을
남긴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번 고향방문 길에서
^朴 時 應^선생의 生家도
방문하고 頌德碑 앞에서
아들 친구들이 함께하는
묵념이였으니
하늘나라에 계시는
선생님께서도 마음이
흡족 하리라 믿습니다,
가난으로 찌든 5천년
역사의 배곱픔을 집권 18년만에 경제대국 11위 까지
끌어올린 ^朴 正 熙^
대통령의 慧眼(혜안),
100년 200년 앞을
내다보고 이끌어
주신 領導力(영도력)
과 殺身成人 정신으로
이 나라를 구한 덕분에
우리 후손들이 풍요의 세상을
살고 있으니
^朴 正 熙^^ 大統領은 이 나라를
求한 큰 영웅 이시고,
※가뭄에 목말라 가는
大山里 벌판에 생명수를
불어넣기 위해 不撤晝夜로
노력하신 결과
대산리 벌판의 유일한
갯고랑(水路)에 水門을 만들어 달고 저수시설이 완성되니
불볕더위에
타들어가던 大山里 벌판에
生命水가 아니겠는가?
오랜 가뭄끝에 얻은
물 한 바가지 의 소중함을
젊은 세대들이 어찌알겠는가?
타들어가는 벌판을
바라보며 자식 거느린
부모님들의 타들어가는
마음을 어찌 알겠는가?
이런 마음을 알기에
발벗고 나서서 마을
주민들의 숙원사업을 이룩하신 작은영웅^朴 時 應^선생은
江華面 과 松海面 주민들의
작은 영웅이니,,
이런 先覺者들의 희생정신이
밑거름이 되여
오늘날 우리가 풍요의 世上을
살고 있으니
^朴允培^君의 先親이신^
蓮 花^선생님의 頌德碑 곁을
떠나면서 다시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내기억이 다소 틀린
부분이 있을수 있으나 좀 틀리면
어떻읍니까?
大山里 마을에서
태어난 내 마음속에 자리잡은
영웅의 이메이지는 옛날
그대로 인것을~
< 淸 山 >
간데아버지(교장선생님 퇴임)
^淸山^
당신은 고향에 향수를
어찌 그리도 잘 그리고 있오!
기억력도 대단하고 문장력은
더욱 뛰어나 그옛날
선친(朴時應翁)의 활약상을
낱낱이 들어 높이 평가해 주는
당신이야 말로 보배로운 대재요!
늦게나마 당신과 같은 훌륭한 친구가 있어 마음 든든하고
우정이 더욱 깊어만 가고 있오.
친구가 상기시킨
시인 이효석 선생에
^메밀꽃 필무렵^ 을 떠올리며
하는 말인데
그 시절 수리시설이 안되
그 넓은 벌판에 벼 한 포기
꽂지 못하고 雨 오기만을
기다리다가 벼이양 시기가 늦어 대체작물을 선택한 것이
늦게 파종해도 서리 오기전
수확할 수 있는 대채작물이
메밀이었지!
우리는 그때 2,400평짜리
큰논에 메밀을 다 심었으니
대산리 그 넓은평야가 온통
하얀 메밀꽃으로 뒤덮혔을 때
그 파도는 장관이었겠지!
아마도 이러한 농민들에 애환을 경험한 선친께서는
강화군청에 해수방지 수리갑문 설치공사 요청 반대에도
불구하고
경기도청 도지사를 상대로
수차레 농민들에 애환을
면담끝에 우여곡절 다 해결하고 수리안전 시설공사를 완성시킨.
功勞를 目理區域 농민들이
인정하여
^송덕비^를 세우게 되었고
지난번 친구들이 고향 방문차
碑文을 接하고
魯昌旭 친구가 널리 높이
評價해 주어
너무나 고맙소이다.
감사합니다.
~~~~~~~
◇ 역시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때에
"人死留名 인사유명.하니
그 자손들 까지
先祖의 후광을 입게 되는군요.
朴 允培君 兄弟외에
손자.손녀등 14명의 자손들이
祖父의 頌德碑 뒷면에
새겨져 있다니 이런 영광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원래 碑石 이라는것이
生命力이 없는 하나의 돌덩이에
불과하지만
그 비석에 누구의 이름이
새겨지는냐에 따라서
正二品벼슬 도 되고
從三品벼슬 도 되니 어찌
생명력 없는 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잘다듬어진 烏石에
*蓮花:朴時 應 先生 頌德碑는 자손만대 까지 칭송을
받을 수 있는 살아있는
碑石이 아니겠는가?
마태25장:15ㅡ28절
♡하 나 님♡깨서는
사람이 태여나면
각각의 개인에게 부여하는
^Talent^(달란트)재능.
능력을 주신다고 하니
先生께서는 주신
달란트 보다 훨씬 많은
功德을 이루시어 頌德碑 까지 세우게 되니
이는♡하 나 님♡의
역사 하심이요 은혜로다,
靈岩 朴氏家門에
先親의 維持(유지)를 받들어
모실 많은 인재가 輩出(배출)
되기를 바랍니다.
※ 智 山의 慧眼(혜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소 頌德碑
앞 뒤면을 다기억하고 썼으니
朴 允培君 족보가 다
들어난셈이요,
先親 後光에 힘입어
드러난 사실이니
영광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先親의 功德을 생각해서라도
후손들은 법도를 지키며
正道를 걸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朴 時 應^ 이름
석자가 들어가 있는
살아있는 碑石이기
때문 입니다.
비석에 관한좋은글
머리속에 담고 갑니다.
** 峰 蓮 **
糟糠之妻(조강지처)
를 제외한 어느 女人이 그리
호락호락 하겠는가?
옛말에 어느 활량이
中船에 소금 한배를 싣고
평양기생집에 가서
닐리아 닐리아를 부르면서
금보다 소금이 더 귀하던 시절에 소금 한배 판돈을 그 구멍에
다쑤셔 넣었는데도
짜다말이 없었다는
우스게 소리가있을 정도로
女子는 다루기가 힘들다는
말일세.
너무 편한 생각만 하면 뇌가
빨리 늙는 다고하니
靑春사업은 계속하시게
궁상막게 獨居老人
이란말 앞으로는
쓰지 마시게
썩어도 준치란 말처럼
^朴 允培^는
품위있는 校長先生으로
남아야지
독거노인 이 무언가?
< 淸 山 >
대학동창들 江華 탐방중 祖父님 碑文을 보고있는 장면.
(이 사진을 보니 더욱 감사충만해 집니다.)
고등학교시절 때 마니산 참성단
간데아부지 성화봉송 모습과
그 훌륭하신 내 할아버지
명함이..
다행이 요래
남아있음에 또 감사합니다.()
2003년 4월!
1979년에 할부지 송덕비를
1차로 세웠다가
2차로 다시 업그레이드 하여
모신날에 남동생(둘).
사촌형제들과..^
뒤편 강건너는 바로 북한이라
철책이 둘려진
최전방 지역의 수문장 역할도
하시고 계심이어라..!^
왼쪽옆에 보이는 것이 바로
바닷물을 통제하는.
넓디 넓은 대산리 벌판을 살린
그 대단한 수문이다.
저 수리시설을 만들기 위해
할아버지께서는 그렇게
무던히도 애쓰셨다지..!()
☆그러고 언젠가 큰고모님께
한소절 들었는데..
저 공사를 할때
일꾼들 밥을 우리집에서 다
지어 내시고..숙소제공도
하시었다고...()
2017년 5월 .잠깐 둘러
자랑스런 할아버지의
장손녀임을 인증샷! ^^
나를 그렇게 이뻐 하셨다는데.
난 기억에도 없음이니..ㅠ
☆. 첨언
난..이런 울 할아버지의
손녀이니..너무나 조상님들께
고맙고 감사가 무량한
지극함을 느끼고
오래전에..내마음의 선향?이라
의미를 부여하고. ^^
금강반야바라밀경을 사경하여
바치어 올렸다.^()^
나무청정법신 비로자나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