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12
8월9일 [연중 제1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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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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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vsZDHRimkMU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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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마디 말이 꽃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이박삼일 동안의 여름 신앙학교를 끝내고 돌아가는 청소년들이 인사를 하며 한 마디 하는데, 어찌 그리 예쁜 말만 골라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부모님인지 가정 교육 참 잘 시켰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여기 너무너무 좋아요.” “이박삼일 내내 밥이 너무 맛있었어요. 급식도 여기 같았으면 좋겠어요.”
꽃 같은 아이들이 남기고 간 짧은 한 마디 말이 뒷바라지하느라 녹초가 된 저희에게 큰 위로요 기쁨이 되었습니다.
무심코 던진 한 마디 말이 누군가에게는 비수가 되고 화살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말은 생명이 되고 구원이 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말 한 마디가 향기로운 꽃이 되고, 꿀보다 더 달콤할 수 있음을 굳게 믿습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명령에 따라 주님 말씀이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받아먹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키엘 예언서 3장 2절)
오늘 화답송을 통해 전해지는 시편작가의 말씀도 일맥상통합니다.
“주님, 당신 말씀 제 혀에 달콤하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진꿀보다도 더 달고 그 어떤 향유보다도 향기롭습니다. 그 말씀에 깊이 매료되고 빠져든다면 더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좋은 것도 말씀 앞에 빛을 바래며, 의미가 사라집니다.
힘겨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주님 말씀으로 살아갈 힘과 활력을 얻습니다.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말씀으로 희망을 지니고, 또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결국 말씀은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의미요 전부입니다.
사실 제가 그랬습니다. 수십 년간 주님 말씀의 끈을 꼭 붙들고 놓지 않으려고 매일 발버둥쳐 왔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시는 은총과 축복이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말씀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제 안으로 걸어 들어오셨습니다. 말씀은 주저앉아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고, 앞으로 계속 나아가도록 재촉하였습니다.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갈 때도, 까마득히 높은 언덕을 올라갈 때도, 매일의 말씀은 제게 견뎌내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매일 우리에게 선포되고 건네지는 말씀들은 그 자체로 기쁨이요 위로입니까? 그 말씀이 내게 살이 되고 피가 되고 있습니까? 말씀은 지친 나를 일으켜 세웁니까? 말씀은 매일 나를 양육시키고 성장시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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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XHM4Fo9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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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 길을 잃기 때문!>
영화 ‘트렌센던스’(2014)는 한 인간에게 신적인 능력이 주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은 해소해줍니다. 윌과 애블린은 과학자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절친인 맥스와 함께 인간의 뇌와 의식을 컴퓨터에 옮기는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연설하던 도중 윌은 신의 능력에 도달하려는 인간을 반대하는 세력에 총상을 입습니다. 총상은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총알에 독이 묻어있어서 과학의 힘으로는 손을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애블린은 남편을 보낼 수 없다며 맥스와 함께 윌의 의식을 컴퓨터에 저장해보자고 합니다. 죽어가는 남편의 의식을 컴퓨터에 다 저장했을 즈음 남편은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컴퓨터 속에서 말하는 남편을 만납니다. 성공한 것입니다. 그런데 윌은 컴퓨터 안에서 사는 것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더 많은 지식과 힘을 원합니다. 은행 계좌까지도 다 뒤져서 자신들에게 돈을 쏟아부으려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에 자신이 접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맥스는 반대했지만 애블린은 찬성합니다. 그래서 윌은 인터넷에 접속하여 세상 모든 지식을 다 갖게 됩니다.
윌은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앉은뱅이도 걷게 하고 태생 소경도 다시 볼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친 사람도 고칩니다. 그런데 윌은 육체를 가지고 아내를 다시 안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뇌를 다친 사람의 의식 안으로 들어가서 아내를 만져봐도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내는 점점 윌이 낯설어집니다.
그래서 윌은 이번엔 작은 입자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예전의 모습을 복원하여 애블린에게 다가갑니다. 애블린은 망설입니다. 그러던 중 포탄이 떨어져 애블린이 죽습니다. 이에 분개한 윌은 자신들을 향해 포를 쏘는 이들을 다 죽입니다. 그리고 죽어가는 애블린을 안고 자신도 잠이 듭니다.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생각해볼 만한 것이 많습니다. ‘만약 인간에게 신의 능력이 주어지면 그 능력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인간이 되려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늑대에게 자라서 자신을 늑대라고 여기는 사람에게 인간의 능력을 주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의 생존을 위해 인간을 죽이는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능력은 그 능력을 주는 이의 순종하는 자녀에게만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능력을 주는 부모가 그 능력을 조절할 수 있는 길이 되어줍니다. 만약 늑대에게 자라 자신이 늑대라고 믿는 아이와 자신이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가 있다면 이 둘 중에 누구를 학교에 보내고 싶습니까? 당연히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는 아이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어린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신적인 능력을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쓸 줄 아셔서 인간을 구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인간이라고 믿으며 능력을 달라고 하면 절대 주실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능력을 조절할 능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이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어린이임을 고백해야만 하느님의 능력이 주어져서 이웃도 구원하고 천국에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2) 그리고 잃어버린 어린 양의 비유를 말씀해주시며 그 하느님의 능력이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쓰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우영우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린양들을 많이도 구합니다. 그 이유는 고래에게 영감을 받기 때문입니다. 고래는 여기서 신을 상징하고 우영우는 그 신의 자녀입니다. 고래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간의 능력 이상의 아이디어를 선물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우영우에게만 선물합니다. 왜냐하면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신에게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종하는 마음이 없다면 능력이 주어질 수 없음을 잊지 맙시다. 그런데 그 어린이란 같은 본성의 자녀가 되었음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능력을 지니고 살다가 하느님 나라에 가려면 내가 그리스도라 믿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라 믿기 위해서는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때문에 성체가 아니면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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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북미주 ME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첫날은 ‘사제의 날’이었습니다. 사제들만의 모임인 줄 알았는데 많은 교우가 함께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우들이 없는 사제의 날은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사제의 날은 미사로 시작되었습니다. 주례 사제는 영어와 스페인어로 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 성가도 영어와 스페인어로 불렀습니다. 모임에 참석한 사제와 교우 중에는 스페인어가 편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영어도, 스페인어도 편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영어가 조금은 귀에 익었습니다. 발표자들은 이민자들의 고충과 가난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 고충과 가난을 극복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들의 대화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새는 두 개의 날개로 하늘을 자유롭게 날 수 있듯이 교회는 성직자와 교우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하늘나라를 향해 여정을 떠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나자렛의 성가정도 많은 고충과 가난이 있었습니다. 이집트로 피난을 하여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이 고충과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사라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도록 용기와 인내를 주시도록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정확하게 입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운전을 잘해도, 교통법규를 잘 지켜도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가장 큰 것, 가장 좋은 것, 가장 비싼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공, 명예, 권력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도 당연히 세상의 기준이 적용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는 주님의 오른편에, 동생은 주님의 왼편에 있게 해 주십시오.” 역시 세상의 기준으로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기준을 새롭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는 우리에 있는 건강한 양 99마리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돌아오는 것을 더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어린 양,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청한다면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서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가 생각납니다.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입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형제는 서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이제 막 신혼살림을 차린 동생에게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자신의 논에서 볏단을 동생의 논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동생도 형님은 아이들도 많아서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하고 형님의 논으로 볏단을 옮겨 놓았습니다. 그렇게 하던 어느 달 밝은 밤에 형과 동생은 함께 만나게 됩니다.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을 확인한 형제는 서로 깊은 포옹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깁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배려하고, 나의 것을 챙기기 전에 남의 것을 신경 써 주는 것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신학적인 지식을 쌓아야만 신앙심이 깊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맹자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부끄러움을 알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한 마음을 가지고, 성공했을 때 좀 더 겸손해지며, 옳고 그른 것을 가릴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양심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잘 가꾸는 사람은 신앙심이 깊어질 것입니다. 물질, 경제, 자본, 성공, 과학이라는 잣대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시와 문학, 음악과 미술, 철학과 신학, 신화와 문화가 있습니다. 감성 없는 이성은 너무나 삭막할 것입니다. 영혼 없는 육체는 사랑이 없는 집과 같습니다.
요즘, 원망과 미움이 생기는지요? 아니면 분노와 질투가 생기는지요? 그렇다면 내가 세상을 내 욕심과 세상의 잣대로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내 마음에 감사와 찬미가 가득하다면 우리는 이미 신앙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십자가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여겨진다면 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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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12-14: 보잘것없는 사람들이라도
제자들은 주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1절) 물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3절) 예수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셨다. 그 어린이는 성령을 지닌 어린이이다. 성령을 지닌 그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어린이는 부모를 따르고 사랑한다. 이웃에게 해를 입힐 생각도 못 하고, 재산에도 관심이 없다. 교만하지도 않고 미워하지 않으며, 거짓말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말만 믿고 진실이라고 들은 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4절) 누구든지 당신을 본받고 당신처럼 자신을 낮추면, 즉 당신이 종의 모습을 취함으로써 당신을 낮추었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5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겸손과 순결을 본받으며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사신다.
순결하시고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께서는 우리도 거룩하게 살면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어린이를 본보기로 세우셨다. 어린이와 같은 모습은 어떤 것인가? 어린아이는 말을 들으면 믿는다. 무엇을 가르치면 따지지 않는다. 아이는 온 마음으로 부모님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어린아이가 가진 순수함을 되찾아야 한다. 이렇게 죄 없는 어린이가 된 사람은 당연히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누구든지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10절) 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10절) 하셨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바로 이러한 작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고 인류를 죽음에서 삶으로 구원하셨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인간이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이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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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작은 이>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1-5)
제자들의 질문은, 하늘나라에서의 ‘서열’을 묻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는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하는 ‘착하고 순수하고 겸손한 사람’을 상징하는 말이 아니라, ‘작은 이들’을, 즉 가난하고 힘없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작은 이’가 되어라.”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작은 이’가 되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입니다. 권력도 재물도 명예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보다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도 당연히 버려야 합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는 ‘작은 이들’ 밖에 없다.”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낮추어서 ‘작은 이’가 된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니, 그 나라에는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만 있고, 남보다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는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에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낮은 사람이고, 모두가 다 높은 사람입니다. 전부 다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행복과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니 그 나라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서열’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서열 같은 것은 따지지 마라. 남보다 더 높아지려고 하지 마라. 오직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만 생각하여라. 그 나라는 ‘작은 이’만 들어갈 수 있다.”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을 섬기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나를 섬기려면 작은 이들을 섬겨라.”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는 말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상대적으로 더 작은 이들’입니다. (‘작은 이들’ 안에서도 ‘더 작은 이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이고, 천사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하느님께 곧바로 말씀드리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보다 더 작은 이를 업신여기는 일은, 그 작은 이를 보살피시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큰 죄’입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2-14)
12절의 ‘길을 잃으면’이라는 말은, 어떤 이유로 목자에게서 떨어져 있지만, 양이 목자에게 되돌아가려고 애쓰는 상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끊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14절의 ‘잃어버리는 것은’이라는 말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버린, 즉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해버린’ 상황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라는 말씀은,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 속에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잃은 양을 애타게 찾는 목자의 심정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일 뿐입니다. <루카복음 15장을 보면,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99대1’의 비율인데, ‘되찾은 은전의 비유’에서는 그 비율이 ‘9대1’입니다. 그리고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그 비율이 ‘1대1’입니다. (‘잃지 않은 양’과 ‘잃은 양’의 비율이 ‘99대1’이라는 것 자체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실제 인간 세상에서는 그 비율이 어떻게 될까? ‘몇 명 대 칠십억 명’이라고 말해도 과장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라는 말씀은, 잃은 양을 되찾았을 때의 기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아흔아홉 마리에 대해서는 덜 기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항상 하느님의 ‘큰 기쁨’이신 분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큰 기쁨인 사람들입니다.> 잃은 양을 찾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는 말씀은, 그 양을 찾는 동안에는 크게 슬퍼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는(우리는) 지금, 하느님께 기쁨인가? 슬픔인가?” 우리는 ‘잃은 양’을 ‘남’으로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은 ‘잃지 않은 양’으로만 생각하는 교만과 위선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구원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누구나 예외 없이 ‘잃은 양’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작은 이’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런 교만과 위선에 빠지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시면서, 동시에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것 자체가, 또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 자체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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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곧 유다인이면서 그리스도인이 된 신자들을 염두에 두고 복음서를 썼다고 알려진 마태오 복음사가는, 구약의 모세 오경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 설교(5,1-7,29 참조)를 필두로, 선교에 관한 말씀(10,1-42 참조), 비유로 전하신 말씀(13,1-52 참조),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18,1-35 참조),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미래에 관한 말씀(24,1─25,46 참조)으로, 이렇게 모세 오경의 가르침에 대응하려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를 위한 예수님 말씀의 첫 부분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맨 먼저 다룹니다. 말씀의 첫 부분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이 질문에는 세상에서와 같이 교회에서도 큰 사람, 높은 사람, 더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제자들의 본능적인 욕망이 담겨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 자리를 탐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낮추어 스스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은 이들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두 말씀의 연결성을 생각해 보면 모든 회개의 종착점은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는 데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우리가 마치 아버지의 품 안에 있는 갓난아기처럼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며 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교회를 유지하고 성장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믿는 이들의 겸손한 마음과 태도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이 우리를 참된 신자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비결이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 죽음에 이르시기까지 온갖 유혹을 떨쳐 내시며 하느님을 신뢰하신 원동력입니다. 이른바 ‘어른들’과 ‘주인들’만 가득한 공동체는 미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겸손을 묵상하며 하느님과 형제들 앞에서 가장 작은 이가 되기를 주님께 청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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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황태웅 요셉 신부님]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
꽤 오래전에 유행했던 농담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베드로를 만나자마자 “나 어떠냐?” 하셨답니다. 부활하셨으니 대단하신 분 아닙니까?
또 다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뵙는다면 물어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말씀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따르던 많은 사람 가운데 12명을 사도로 선임하였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는 주님을 더 가까이 모실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 앞에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사람 아닙니까. 그러면 12명 중에서 누가 제일 큰사람입니까? 베드로였습니다. 그 나머지 사도들의 서열은 어떻습니까? 확실하지 않습니다.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군대에는 계급순이고 또 다른 모임에는 나이순이던 직위 순이든 간에 어떤 서열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 사회에서는 이것이 아주 뚜렷했고, 성전 내에서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승대우를 받기를 좋아했고 모임이나 잔칫집에서는 윗자리에 앉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그냥 말씀으로 대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늘나라에서 높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거기 가면 무엇으로 서열을 정합니까? 하고 물었는데 예수님은 하늘나라 들어가는 조건부터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회개하고 어린이와 같이 되는 일”을 예수님께 제시하십니다. 여기서 회개는 무엇입니까? 생각이나 행동의, 한마디로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유다인들이 추구해왔던 것처럼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우받고 자만하면서 살아가던 삶의 방향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그 방향을 돌리라는 말입니까? 그 대답은 확실합니다.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어린이 중에도 착한 어린이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아니한 어린이도 있고, 또 어린이들도 다투고 속이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런 신체적 어린이를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왜 그냥 “어린이와 같이 되어라”하지 않으시고 먼저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어린이처럼 되어라”하신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상상해봅시다. 어른들 가운데 한 어린이가 서 있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이 특별히 선택하여 뽑아놓고 가까이 하시던 제자들 가운데 서 있는 이름도 없고 몸집도 작은 어린이 하나가 서 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의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선택되고, 내로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서 있던 신체적으로 또 어떤 면으로 보나 보잘것없는 어린이, 뛰어나고 지혜로운 성숙한 남자들 가운데 서 있는,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도 없고 자신만만하지도 않은 작은 어린이, 이런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성장한 사람이 다시 유아가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는 신체적인 어린이가 아니라 정신적인 어린이입니다. 이러한 어린이가 되라고 하신 것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서야 누가 현명하고, 뛰어나고, 자신만만하고, 성숙된 사람으로 자처하겠습니까. 보잘것없고 도움이 필요하고 보호를 받아야 할 자신을 잘 알면서 높은 자리다툼을 하고, 큰사람 작은 사람 따지겠습니까?
어린이는 어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또 그 도움을 잘 받아들입니다. 겸손해 질것입니다. 하느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에 의지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작은 사람은 하느님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 도우심을 잘 받아들입니다. 오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 항상 작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여럿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중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하는 질문에 예수님이 당신을 받아들이는 사람, 당신의 이름으로 어린이를 받아들이는데 앞선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11, 29) 하시면서 스스로 겸손한 분, 어린이와 같은 분임을 말씀하십니다.
또 병들거나 감옥에 갇히거나,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고통받고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모든 사람이 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이고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분들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교회의 근본법칙으로 주신 “작은 사람이 큰사람이 되고, 큰사람이 작은 사람이 되는 법칙”은 세상 종말에도 적용이 됩니다.
또 결코 지키기 쉬운 법칙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고 또 저기서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해서 꼭 지켜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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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옵션(option)이 아니라 기본(Basics)>
마태오복음사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업적을 논리적으로 정리하여 "산상설교"(5-7장), "파견 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 설교"(18장), "종말설교"(25장)로 엮었다는 것은 이미 누차 밝혀두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공동체설교의 첫 부분이다. 공동체 설교는 교회 안에서 신자들 간에 지켜져야 할 규범을 담고 있어 "교회규범"이라고도 한다.
이는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작은 교회로 통하는 가정교회의 규범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으로 시작되는 공동체 설교는 당장 예수님 주위의 제자들에게 향하기보다는 마태오 복음공동체를 포함한 초대교회를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마태오의 편집 의도가 많이 첨가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복음의 공동체설교는 세 가지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는 것"(1-5절)이고, 둘째는 "보잘것없는 이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10절)이며, 셋째는 "율법상의 죄인들과 윤리상의 죄인들을 소외시키지 말라"(12-14절)는 것이다.
물론 오늘 복음에서 제외된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6-9절)는 규범도 있다.
첫 번째 규범의 도입부에 마태오는 제자들이 예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하고 물었다고 하지만, 마르코는 제자들이 도상(途上)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하고, 루카는 제자들이 서열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마르 9,33-34; 루카 9,46)
잃은 양 한 마리를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는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온정과 죄인의 회개를 기뻐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예수 어록집에서 따온 것이다.
루카는 이 비유와 함께 다른 비유들을 한데 모아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루카 15장)
마태오복음 공동체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교회공동체 안에도 똑같은 일들이 벌어진다. 성직자와 수도자들 사이에 권위주의와 서열 다툼이 팽배하고, 형제적 사랑이 부족하여 후임자가 전임자를 마구 흠집 내는 일도 많다.
"미사예물 단가가 비싸서 미사봉헌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신자들은 소외당하고, 혼인법상 조당(阻 )에 처한 신자들을 마치 중죄인 취급하며, 조그만 잘못도 부풀려 입에 담아 회자하고, 나서서 단죄하기를 즐기는 신자들도 종종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남을 죄짓게 만들고, 자신도 죄지을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일도 있다. 오늘 예수께서 내리시는 공동체 내규는 옵션(option)이 아니다. 여러 개를 놓고 여건을 고려하여 마음 가는 대로 고르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기본(basics)에 속한다는 것이다. 기본은 곧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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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그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어떻게든 피하고만 싶은 죽음의 길입니다.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생각하며, 수난에 대처할 각오를 다지며 한 발 한 발 힘들게 걸으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공동체 내의 서열 문제로 옥신각신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더 인정을 받느냐?’ ‘누가 실세냐?’ 이런 다툼입니다. 이토록 세상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에 당신이 떠나신 뒤를 염려하신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질서를 확립하셔야만 했습니다. 사랑과 봉사가 밑바탕이 되는 공동체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바라면서 오늘 복음 첫머리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우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의 특징은 순수하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때가 묻지 않았기에 주님 말씀을 그대로 들을 수 있지요. 또한, 약한 존재입니다.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고, 그 뜻을 진솔하게 따르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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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은이 보기>
마태오 18,1-5.10.12-14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되찾은 양의 비유)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작은이 보기>
작은이는
잘 보이지 않아요
작은이를
잘 보지 않으니까요
작은이는
잘 보아야만 해요
작은이가
잘 보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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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가장 큰 사람>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가운데 세우시고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18,4) 하시고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결국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과 순수한 마음을 지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설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미아발생으로 부모의 애간장을 태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보면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는 어중간한 아이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니 주님께 전적으로 의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많이 소유한 것이 위대하게 보이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 없는 사람, 자신을 낮추어 비우는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애당초부터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사람은 자꾸만 더해서 많이 갖고, 현명한 사람은 자꾸만 덜어서 많이 갖습니다.”(이규경) 노자도 “성인은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므로 밝고, 자기를 옳다고 하지 않으므로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공이 있고 자기를 뽐내지 않으므로 윗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루카 18,17)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할 때 우리는 하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많이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지니고 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사랑이 담긴 일을 보시고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생각하는 데는 어린아이가 되지 마십시오. 악한 일에는 어린 아이가 되고 생각하는 데는 어른이 되십시오.”(1고린14,20) 주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천국에서 위대한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큰 사람은 키가 커서 큰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커서 큰 사람입니다. 하루를 허물로 누벼놓았어도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주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시는 주님 품에 안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서 큰 사람이 되길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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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제게 “할아버지 신부님!”이라고 부르는 손자가 있습니다. 조카의 큰아들입니다. 이 손주 생일이라서 장난감을 사서, 선물이라며 주니 너무나 좋아합니다. 밥도 먹지 않고 장난감 가지고 놀 생각만 합니다. 솔직히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별로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데도 너무나도 재미있어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장난감끼리 부딪치는 것뿐인데 뭐가 재미있을까요? 이 장난감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부딪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집중하는 것에는 재미와 흥미를 느끼게 됩니다. 집중하지 못할 때, 지루하게 생각하면서 하기 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많은 이가 기도를 지루해하고 또 시간 낭비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도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집중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기도 안에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쓸데없는 집중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세상일에 몰입하면서 행복하지 않은 자신에 관한 불평불만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하늘 나라에서의 서열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어린이 하나를 가운데 세우고는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어린이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로 취급하여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긴 옛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어른들의 말참견을 할 수 없었고, “조그만 게 까불어”라는 말을 듣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이처럼 미숙하고 유치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린이가 보여주는 순수한 집중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 순수한 집중이 성 이냐시오의 해석대로 순진, 순박, 겸손의 모형이 됩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집중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뜻이 담긴 사랑의 실천에 집중해서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로부터는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 너무나도 좋아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절대로 손해 보는 우리의 행동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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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여정>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기-
답은 회개뿐임을, 강력하고 항구한 “더불어(together)” 회개의 여정뿐임을 깨닫습니다. 도대체 회개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입니다. 무지의 사람에 대한 답은 부단한 회개를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는 길뿐입니다. 이렇게 지난 저녁부터 지금까지 단 시간에 물폭탄이 떨어지기는 난생 처음입니다. 사납게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소리를 들어보기도 처음입니다. 뉴스를 보니 80년만의 대폭우라 하는데 기후위기 현상을 통해 중병이 든 지구의 실상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용서하고, 사람은 때때로 용서하지만, 자연은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스페인 격언이 생각납니다. 제아무리 제4차 첨단문명을 자랑한다해도 지구를 배려하지 않은 무지하고 무분별한 발전이라면 지구의 수명을 단축시킬뿐 사상누각, 모래위의 집같은 참 허망한 헛수고의 발전일 것입니다.
사람의 인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이 또한 참된 회개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어제 돌아가신 고모님 가족을 문상차 강남의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으로 확신하고 도착하여 확인하니 그런분이 없다는 것이며, 인터넷을 확인해준 결과 서울은평성모병원이었습니다.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사실이었고 제가 “은평”을 못봤던 것입니다. 다시 즉시 3호선을 타고 은평성모병원에 도착하니 1시간이상 지체되어 있었지만 이만해도 다행이었습니다. 분명한 약속 시간이었다 하면 참 낭패였을 것입니다.
이어 조문 화환중 유난히 “침례교회” 명칭이 많기에 아차 싶어 목사인 사촌 형님께 물으니 고모님과 가족은 성결교회가 아니라 침례교회라 했습니다. 오랫동안 교류해왔으면서도 제 부주의로 성결교회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잘 보고, 잘 듣는 것이 참된 회개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참 깊이 깨달은 날입니다.
젊음은, 어린이같은 마음의 순수는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마음에, 정신에, 영혼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고모님 영정사진도 고왔고 그 앞에 70대 후반부터 90대 초반까지 필사했다는 신구약 15권의 대학노트의 글씨도 어린이 글씨처럼 정성과 더불어 한결같고 반듯했습니다. 평생 꼿꼿이 반듯하게 순수와 열정을 사셨던 영원한 하느님의 어린이같은 고모님이셨습니다. 영정사진 밑에는 성구대신 ‘안수집사 이순임’고모님에 대한 자녀들의 마음이 담긴 말마디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당신의 고귀한 삶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
새삼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에 대한 답은 강력하고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되찾은 양의 비유인데 모두 회개와 관련됩니다.
1.“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부단히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겸손하고 순수하고 지혜로운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영성생활의 성패에 결정적 요소임을 깨닫습니다.
2.“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하나도 생략할 수 없는 참 엄중한 말씀입니다. 자포자기의 절망과 더불어 이웃을 업신여겨 무시하고 차별하는 일이 대죄입니다. 절망의 끝은 자살이요, 무시의 끝은 타살입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를 사랑했던 부모가 있고, 또 한 가정의 자녀들을 책임진 부모라면 도저히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하나 그들을 지키는 수호천사들은 동시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합니다. 이런 수호천사 신심도 부단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3.“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는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기뻐한다. 이와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2천년전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작은 이들 하나하나가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또 존재감 없어 보이는 잃은 양 하나를 찾았을 때의 하느님의 기쁨을 생각한다면 정말 하나하나 하느님을 대하듯 귀히 대할 것입니다. 이런 사실 또한 우리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답은 끊임없는, 한결같은 회개의 실행입니다. 이런 항구한 회개의 여정을 통해 말씀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되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임을 깨닫습니다. 무지의 치유에 회개와 더불어 말씀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제1독서의 ‘말씀의 사람’ 에제키엘 예언자입니다. 거듭 4회 반복되는 “너 사람의 아들아!”라는 호칭이 참 정답게 들립니다.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같습니다.
1.“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 먹어라.”
2.“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 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3.“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저에겐 매일 이른 새벽 말씀을 묵상 정리하여 강론을 쓰는 시간이 말씀의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우는 시간이요, 그리하여 배고픔도 잊게 됩니다. 세상맛이나 돈맛이 아닌 말씀맛, 하느님맛으로 살아가는 이탈의 초연한 삶이면 좋겠습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오늘 시편 119장중 다음 화답송 말씀이 그대로 여러분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를 도와 주실 것입니다.
“온갖 재산 다 얻은 듯, 당신 법의 길 걸으며 기뻐하나이다.”(14)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 수천 냥 금은보다 제게는 값지옵니다.”(72)
“당신 말씀 제혀에 얼마나 달콤한지! 그 말씀 제 입에 꿀보다 다옵니다.”(103)
“당신 계명을 열망하기에, 저는 입을 벌리고 헐떡이나이다.”(131).
말씀의 사랑이, 열망이, 기쁨이, 달콤함이 영혼 건강의 비결입니다. 영혼의 밥을 먹듯이 말씀을 먹고 독서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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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예수님께 물은 제자들의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 18,10)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회개하는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큰 것을 좋아하는 우리들! '크냐? 작으냐?'를 놓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우리들! 신부님들이 '큰 본당에 계시는가? 작은 본당에 계시는가?' 또는 '높은 지위에 있었나? 낮은 지위에 있었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들!
그런 우리들에게 전해지는 오늘 복음은 우리의 마음을 꿰찔리게 합니다. 왠지 부끄럽고 죄송스러운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작아지기를, 모든 덕의 큰 장애물인 '교만의 옷'을 벗어 버리고 겸손해지기를, 작은 것에 관심을 갖고 충실하기를, 작은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공동체인 교회 안에 함께하지 못하고 있는 작은 이들이 우리 주위에 많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큰 아픔과 상처는, 바로 '그들만의 잔치', '끼리끼리의 잔치'입니다.
'소외는 곧 지옥의 상태'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말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립시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을 낮추고, 길 잃은 양들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 작은 이들, 길 잃은 양들이 보입니다.
'가장 값진 선물인 오늘'이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오늘도 작은 이들, 길 잃은 양들을 찾아 나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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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H44Yf7cU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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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 1)
여기에
사람이 있다.
사랑도 없고
회개도 없다.
지극한 사랑
지극한 회개를
우리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신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놓치며
길을 찾고 있다.
하늘 나라의
이정표는
다름아닌
우리들의
회개이다.
회개는
회개다워야 한다.
그만큼 절박한
복음의 외침이다.
이제 실천만이
남았다.
하늘 나라와
실천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실천이 깊어지면
마음도 깊어진다.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깊은 회개는
어린이처럼
주님과 함께하는
하늘 나라의
행복이 된다.
사랑하고
회개해야 할
우리가 있다.
회개에는
예외가 없다.
맑고 깨끗한
하늘 나라는
우리의 회개로
더욱 기뻐할 것이다.
가장 큰 죄인이
회개를 통해
가장 큰 사람이
되는 회개의
기쁨이다.
회개의 사람으로
다시 살겠다는
이 다짐을
다시 봉헌하는
새로운 일상의
눈물겨운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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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 4)
다시 낮아지는
시간입니다.
낮아지고
작아져야 할 대상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예수님의
하늘 나라입니다.
그 하늘 나라를
믿습니다.
더 낮아지시며
우리를 어린이같은
회개로 이끄십니다.
회개는 욕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내려와야
하늘 나라를
만납니다.
작아지고 작아져야
하늘 나라와
하나가 됩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함께하시는
하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어린이처럼
모든 것을 맡기고
기쁘게 따르는
회개와 믿음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를 위한
하늘 나라는
어린이처럼
작아지고
낮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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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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