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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나비띠 모임 스크랩 광해군의 묘
바위솔 추천 0 조회 1,547 10.06.20 15:39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조선15대 임금이였던 광해군 묘 가는 길은 도농역에서 사능가는 버스를 타고 15분쯤 가면

 나오는 사능정류소(송능2리)에 내려 우측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직진으로 다리를 건너면 사릉이 되어요.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으킨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올랐으나

진성대군 시절 혼인한 신수겸의 딸 단경왕후 신씨를 역적의 딸이라는 신하들의 주청에 8일만에 폐출하고

 

 계비인 대윤파의 장경왕후를 얻어 12대 임금인 인종을 낳았으나 병약한 인종은 재위 8개월만인 31세에

  후사없이 죽고 중종의 두번째 계비인 소윤파의 문정왕후 윤씨의 소생인 명종이 13대 임금으로 등극했습니다.

 

그러나 명종도 독자인 아들 순회세자가 죽자 조선 최초로 방계에서 임금을 뽑았는데 그가 중종의 빈인

  창빈안씨의 소생 덕흥대원군의 세째 아들인 하성군이죠. 14대 임금으로 오른 선조 그 아들이 광해군입니다.

 

 

 

광해군묘는 이 곳에서 길따라 20여분 걸으면 나오는 영락교회 공원묘원으로 들어가 10여분 더 가면 있습니다.

 

 

 

 

 

확장 공사중인 도로를 지나니 상추가 탐스럽게 자라고 있는 밭이 있더군요.

 

 

 

 

 

 

 

 

 

 

 

 

 

 

 

 

 

영락교회 공원묘원으로 들어가면 광해군 묘소가 나오고 우측길로 가면 광해군 엄마와 형의 묘소가 있습니다.

 

 

 

 

 

 

광해군 묘는 언덕길을 10분 정도 올라가면 있습니다.

 

 

 

 

선조임금은 본인도 서자 출신이였지만 정비에게서 일찍 왕자를 두지 못하고 후궁들로부터

많은 왕자를 두었는데 공빈 김씨로부터 첫 아들인 임해군과 둘째 아들인 광해군을 연년생으로 얻었습니다. 

 

 

 

 

그러나 선조는 인빈김씨의 소생인 신성군을 사랑하여 다른 왕자들을 세자로 책봉할 생각이

없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가며 국내에 남아 뒷 일을 수습하기 위해 포악한 성격의

 

 장남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광해군은 의병을 모집하고 전과를 올리는 등 임무를

성실히 수행해 도망친 선조보다 더 백성들의 신망을 받게 되자 전란 후 선조는 광해군을 견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물론 이 때엔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린 인목대비가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아 그를 세자로 삼을

생각도 있었지요. 소북세력은 영창대군을 밀고 대북세력은 광해군을 미는 가운데 선조는 떡을 먹은 게

체하여 갑자기 죽게 되는데 죽기 전 소북의 유경영에게 광해군에게 선위한다는 교서를 내렸으나 이를 감추었고

 

인목대비는 당시 세살 밖에 안된 영창대군을 왕으로 삼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해군이 임금으로 등극했습니다.

 

 

 

광해군은 임금에 오른 후 망해가는 명나라와 떠오르는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펴고

부자에게 세금을 더 거두는 등 참된 정치를 하려했으나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왕위를 빼았겼다는

 

한 살위 형을 귀양 보낸 후 사사했으며 영창대군을 귀양보내 본의는 아닐지라도 죽게 했고 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형제들을 역모로 죽이고 인목대비를 지금의 덕수궁 석어당에 유폐시켰습니다.

 

그래도 신하들의 주청대로 인목대비를 폐서인 하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은 것을 보면 이후 인조반정 성공 후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그의 어머니 공빈김씨까지 폐비 시킨 인목대비보다는  아량이 넓었던 군주였던것 같습니다.

 

 

 

광해군은 1608년 왕위에 올라 재위 15년만인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당시 덕수궁 석어당에

유폐되여 있던 인목대비 앞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36가지의 죄목을 들으며 왕위를 박탈 당한 뒤

 

이 곳에서 즉위식을 하는 인조 임금을 뒤로 하고 유배지인 강화로 향합니다.  광해군은 사실  어머니의

얼굴을 모릅니다.  광해군의 생모 공빈김씨는 광해군을 낳은지 2년만인 1577년에 산후병으로 죽었으니까요.

 

 

참 세상 인연은 묘하죠. 광해군은 어렸을 적 인빈김씨를 어머니처럼 무척 따랐으며 인빈김씨도

 광해군을 남달리 사랑했다는군요.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인빈김씨의 아들 정원군의 아들이예요. 

다시 말해 인조는 인빈김씨의 손자랍니다. 

 

 

 

강화로 유배된지 1년도 안되어 광해군의 아들 내외는 탈출하려다 발각되여

며느리는 자살하였고  아들은 사사되였으며 광해군의 부인은 홧병으로 죽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제주도까지 가서 귀양살이 하며 당시 관리들에게 영감이란 호칭을 듣는

수모를 당하면서도 모든 걸 외면한 채 의연하게 왕위보다 더긴 19년의 세월을 견디다 인조 19년인

 

1641년 6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합니다.

 

 

 

광해군은 죽은 후 제주도에 묻혔다가 후에 부인과 함께 이 곳에 안장되었습니다.

 

 

 

 

 

내가 죽거든 어머니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소원을 들어준거죠. 그러나 이 곳에서 어머니묘는 보이지 않습니다.

 

 

 

 

광해군 그는 과연 폐모살제한 폭군이였을까요 ? 폐모살제는 맞지만 광해군은 당쟁의

희생자란 설이 유력합니다. 기득권자들의 반발에 결국 왕권을 빼았긴 임금이란 평이 대세입니다.

 

예전엔 좀 그랬지만 지금보니 반가운 새마을교를 건너서면

 

 

 

풍향조씨 시조묘로 들어가는 길 이 곳에 광해군의 어머니 공빈김씨의 무덤이 있습니다.

 

 

 

 

 

 

 

 

 

 

 

올라가는 길목 두 채의 낡은 집

 

 

 

 

 

 

그 중 한 채인 이 집은 임해군의 후손집입니다. 이 곳에서 후손들이 공빈과 임해군의 제사를 모신다네요.

 

 

 

 

옛날의 위엄이 조금 남아있긴 해도 너무 낡았습니다. 빨리 수리되었으면 좋겠네요.

 

 

 

 

 

옆집 대문 앞의 지게는 지금도 현역이랍니다. 민속 박물관 같은 집이더라구요.

 

 

 

 

 

 

마당 한가운데 꽃밭, 대문안 사랑채의 부엌에 걸린 무쇠솥과 나무땔감, 헛간 창틀에 걸린 호미 ,

 

 

 

   

 

앞뒤  휑뚤린 대청마루, 무쇠솥과 양은솥이 걸린  쪼그려 앉아 장작때는부엌, 그리고 연탄보일러

지금은 박물관에 가도 보기힘든 우리의 어렸을적 일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이 집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뒷곁에 널어놓은 이불에 기대면 따뜻한 엄마의 체온을 느길수 있을것 같은 생각에  또 울컥 하는군요.

 

 

 

 

 

내년 농사를 위해 파씨를 말리는 이 집 뒤켠에도 

 

 

 

 

 

살아있는 지게가 있었습니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지더이다.

 

 

 

 

 

고려 개국공신 풍향조씨의 시조 조맹의 묘에 있는 비석입니다.

 

 

 

 

 

이 무덤 뒤로 공빈김씨의 무덤이 있더군요. 아! 근데 왕능에나 있는 무인석이 있네요.

 

 

 

 

 

슬픈 표정의 석호도 있고 난간석도 있군요. 

 

 

 

 

 

 

 

 

 

 

 

 아랫 쪽에 조맹의 묘가 가로막고 있긴 하지만 이건 분명 왕능의 형식이지 일반묘나 원이 아닙니다.

 

 

 

 

 

사연이 있더군요.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산후병으로 죽은 어머니를 위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그 묘를 성릉이라 칭하고 이곳에 있던 묘를 능으로 조성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된 후 그녀의 시호도 추탈되었으며 성릉도 성묘로 강등되었으나 석물은 미쳐 철거하지 못했군요.

 

 

성묘 앞을 가로막은 조맹의 묘입니다.

성능으로 조성시 파헤침을 면하고 봉분만 깍아 버렸으나 광해군 폐위 후 상소로 봉분을 다시 했다네요. 

 

 

 

 

 

성묘에서 나와 다시 위로 5분정도 더 올라가면 사슴목장 입구에 임해군 묘소 이정표가 있습니다.

 

 

 

 

 

그런데 계속 올라가면 찾을 수 없습니다. 저 아래 전신주 있는 곳까지만 올라와서 보면

 

 

 

 

 

 이정표가 또 나옵니다. 그 위 밭 돌로 쌓은 뚝길을 따라 우측으로 가야돼요.

 

 

 

 

 

밭 뚝끝엔 이런 다리가 있습니다.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이 다리를 건너 수풀을 헤치고 산으로 들어서면

 

 

 

 

 

 이렇게 길이 나타납니다. 이 길로 조금 오르면

 

 

 

 

 

갑자기 나타나는 임해군묘

 

 

 

 

 

강화에 유배 중 명나라 사신을 만나고 궁궐에서 곧 불러들일 것이니 보약이나 먹으라고 준 약이

사약일 줄이야 피를 토하며 광해군을 부르며 죽었다는 임해군 수원 광교산에 묻혔다 이 곳으로 이장했답니다.

 

  

 

 

임해군은 성질이 포악하여 임진왜란중 피난 길에 함경도에서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는 등 횡포가 심해

반란군인 국경인등에게 생포되어 적장인 가등청정에게 넘겨집니다. 이 후 부산까지 끌려다니며 고생은

 

했지만 정부의 포로교환 협상으로 풀려나죠. 최근 모 방송사에서 임해군과 순화군 외에도 임해군의 4살된

아들과 6살인 딸도 생포되어 일본으로 끌려가 딸은 부하장수의 양녀로 주었다는데 그가 커서 양부인 사무라이에게

 40년이란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성의 노예가 되여 평생을 보냈고

 

아들은 유명한 중이 되었다고 방영했다네요. 조선실록은 물론 일본에도 근거가 별로없는

이야기를 왜 공영방송에서 다뤘는지 논쟁이 뜨겁습니다. 참 이상한 우리 나라 지식인들 좋은 얘기는 안하고

 

 

 

 

 

 

 왜들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요

 

 

 

 

 

 임해군 묘소에 핀 들꽃들입니다

 

 

 

 

 

 

문인석 옆의 이름모를 꽃이 눈길을 사로잡네요. 

 

 

 

 

임해군 묘에서면 사방이 꽉 막혔더군요. 아늑한건지 답답한건지 그렇습니다. 

 

 

 

 

 

내려오는 길에 사슴 목장 암컷들은 다 멀리 가는데

 

 

 

 

 

수컷은 내게 바짝 다가와 한번 해보자는 기세입니다.

 

 

 

 

 

 

 

 

 

 

 

밤꽃이 온 산에 가득합니다.

 

 

 

 

 

 

 

 

 

 

 

전 밤꽃 냄새가 싫거든요.

 

 

 

 

 

 

 

 

 

 

 

 

 

 

 

 

 

그냥 오려다 안빈묘도 찾아 갔더랬습니다. 여길 가려면 알바 많이 해야 합니다.

 

 

 

 

 

 

 

 

 

 

 

고속도로 건너 저길 끝에 있더군요.

 

 

 

 

 

안빈은 17대 효종의 후궁입니다.

인조 15년 병자호란 때 인조의 치욕적인 항복 후 인조의 둘째 아들인 당시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8년만인 인조 23년에 귀국한 인빈이씨의 묘입니다.

 

 

 

 

 

 

 

 

 

 

 

비석엔 조선국 안빈경주이씨지묘라고 새겨져 있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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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6.20 20:13

    첫댓글 광해군을 비롯 사진과 더불어 자세한 설명으로 역사 공부 잘 했습니다 이렇게 해박한 역사 지식을 가지고 곳곳을 찿아 다니는 바위솔 친구 부럽기만 하네요 수고 했습니다

  • 10.06.20 21:48

    사진과 글을 한번에 쭈욱 내려가며 보면서 지루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간결하게 그리고 바위솔님의 느낌도 동감을 하면서 ,,역사적인 일들을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 10.06.20 22:26

    역사가 이긴자의 기록이라지만 광해군이야 말로 철저하게 왜곡된 역사의 희생양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임란을 치르는 동안 세자로서 큰 역할을 했고 전쟁이 끝나고 왕이 된 후에는 명과 청 사이에서 중립외교라는 기막힌 솜씨를 발휘해 외교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광해는 당쟁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가 계모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이복인 영창대군을 즉인 것은, 영창대군을 옹위하려는 파당의 끊임없는 위협에서 비롯된 역모사건 때문이었으며 정작 광해는 영창대군을 살리기 위하여 끝까지 반대했다고 합니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광해는 귀양을 가게 되고 후임인 인조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남긴 임금으로 기록되지요.

  • 10.06.20 22:37

    역사는 그를 폭군으로 기록해 연산군과 동질의 君으로 강등했지만 나라를 사랑했던 영민한 임금으로 재조명 되고 있습니다. 기록에도 나와있지만 임란 동안 탁월한 통치력으로 아버지 선조로부터 끊임없는 견제를 받으면서도 이순신 장군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다고 합니다. 만약 그가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남긴 비운의 왕이기도 하지요. .. 바위솔님의 기록사진을 통하여 생생한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 10.06.21 11:11

    바위솔님 사진만 잘 찍는줄 알았드니.... 역사에도 일가견이...(혹시 국사 선생님?)암튼 너무 재미나게 읽고,,,보고,,, 앞으로도 쭈~욱 많은 글 사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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