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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don't know: <12명의 성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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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만이 감도는 미국의 한 법정. 스페인계 18세 소년의 직계존속 살인 사건에 관한 재판은 이제 배심원들의 투표 후 최종 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길고 복잡한 1급 살인죄에 대한 심리가 끝났습니다…한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피고인의 유죄를 의심할만한 근거가 있다면 여러분은 유죄 평결을 내려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에게 무죄 평결을 내려주십시오. 어떤 결정이든 만장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일단 유죄로 평결될 경우 사형선고가 불가피합니다. 여러분은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빈민가 고아원에서 생활한 소년은 차량 절도 등 전과 5범의 전력이 있고 현재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잭나이프로 잔인하게 살해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소년은 자신의 알리바이를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고 있으며 정황증거 모두 소년의 유죄판결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범행 당시를 목격했다는 소년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증언도 나온 상황이다.
배심 절차만을 남겨두고 12명의 배심원들은 최종 결정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옮겨간다. 찜통 같은 더위 속에 선풍기조차 돌아가지 않는 비좁은 배심원실 안에서 회의를 해야 하는 배심원들은 짜증스럽기만 하다. 누가 봐도 소년이 범인임이 확실한 상황에서 대부분의 배심원은 논의를 생략하고 먼저 투표를 하기로 한다. 하나 둘 씩 유죄 쪽에 손을 들기 시작했고 쉽게 만장일치가 나오고 판결은 일찍 끝나는 듯했으나 마지막 남은 8번 배심원은 반대의견을 낸다.
“꼭 누군가 한 명은 반대하지.”
“정말 무죄라고 생각하는 거요?”
“모르겠어요.”
나머지 배심원들은 8번 배심원에게 아니꼬운 눈길을 보낸다. 그도 그럴 것이 유죄 증거도 확실하니 여기서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할 바엔 차라리 야구장에 가서 야구를 보는 것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1명만 동의하면 쉽게 끝날 일이건만 만장일치가 나오지 않으니 답답한 배심원들은 그를 힐난한다. 하지만 8번 그는 여전히 모르겠다는 말로 일관한다. 그는 자신도 소년이 무죄라고 장담할 수 없지만,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있는지만 확인하자고 마지막으로 제안한다. 아마 8번 배심원 그는 판사의 “한 사람이 죽었고 한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는 말을 속으로 곱씹었으리라. 이에 몇몇 눈치 빠른 배심원들은 긴 싸움이 되겠구나 – 혹은 야구 경기는 물 건너 갔구나 – 하고 생각하며 담뱃불을 붙인다. 유죄를 확신하는 자들과 8번 배심원의 설전은 계속되고 이들은 사건을 재구성해보며 사건의 진위를 조금씩 밝혀나가게 된다. 배심원들은 검찰이 제공한 증거에 대해 다시 한 번 짚어보고 사건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사건의 진실은 직접 영화를 보고 확인하는 것을 추천한다.
“모르겠어요.”
어찌 보면 무책임한 말 같아 보이지만 영화와 같은 상황 속에서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한 것만큼 진실에 가까운 말은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만족을 느끼고,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호기심 혹은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적 영역을 벗어나는 부분은 어떨까. 이에 대해 언어와 앎의 관계를 연구한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탈 논리적인 존재를 논리의 언어로 논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계산도 틀릴 때가 있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초월적 본질이야.
우린 결국엔 인식적 한계와 언어적 한계를 지닌 인간이며, 오만을 버리고 자신의 무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다. 그리고 그 무지를 인정하는 과정은 큰 용기가 필요하며 때때로 어쩔 수 없는 무기력함에 사로잡히기도 한다.하지만 사람이란 본디 자신의 지적 허영심을 채우려 하는 존재이며,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의 알고 있는 것 – 안다고 하기보단 자신이 옳다고 믿고 있다는 게 더 정확할까 – 을 다른 이들에게 끝없이 강요하며, 자신이 남들보다 높은 지적 혹은 도덕적 위치에서 계몽하고 있음에 우월감을 느끼곤 한다. 혹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예수와 대면한 대심문관처럼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의 방식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다.
아는 것이 곧 힘이라고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힘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가치가 절대적 가치라 여기며 기존 가치의 수호자 혹은 파괴자를 자처한다. 그들은 마치 정의의 사도가 된 것 마냥 확신에 차서 집행관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들은 무려 썩어빠진 세상을 바로잡을 유일한 구원자인 것이다. <즐거운 학문> 중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헤매는 광인을 비웃는 행인들처럼 그들은 이미 빛을 찾았다고 믿는 것이다. 그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일, 그것이 바로 그들의 위대한 사명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겨우 1시간 반 남짓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 가지 인간군상을 엿볼 수 있었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영화였다. 이 영화는 배심원실이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서 12명 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생동하고 박진감 있게 담아낸다. 영화의 연출 자체도 훌륭하지만,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배심원들의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 포커스를 맞추고 영화를 관람하는 것도 꽤 흥미롭다.
확신으로 가득 찬 이들을 향한 8번 배심원의 담담한 “모르겠어요.” 한 마디에 필자는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자신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기본값으로 설정하여 타인의 선택의 범주를 좁히는 이들에게 당신은 8번 배심원처럼 당당히 “I don’t know”를 외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