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번역서 > 문곡집 > 문곡집 제2권 > 시 > 최종정보
바다 안개는 아침에 비가 되고 / 海霧朝成雨
변경 바람은 낮에 모래 일으키네 / 邊風晝起沙
관산은 험준한 길로 통하고 / 關山通鳥道
황폐한 촌락엔 민가가 드물구나 / 墟落少人家
사막 드넓어 하늘 다했나 싶더니 / 磧遠天疑盡
성곽이 높아 해가 쉬이 지는구려 / 城高日易斜
천하 경영하려는 남아의 뜻에 / 男兒弧矢志
장쾌한 유람이야 과시할 만하지 / 壯觀儘堪誇
조일헌에서 앞을 바라보니 / 朝日軒前望
부상이 책상 앞에 펼쳐지네 / 扶桑几案間
높다란 성은 삼면이 바다이고 / 危城三面海
드넓은 사막엔 한쪽이 산이라 / 大漠一邊山
고래는 층층 파도 헤쳐 나가고 / 鯨蹴層濤裂
수리는 낙조 곁을 날다 돌아오네 / 鵰翻落照還
좋은 시절에 장사는 늙어 가는데 / 淸時壯士老
창날에 이끼 무늬 아롱지는구나 / 苔繡戟花斑
변새의 천리 길 지나가는데 / 障塞通千里
거주하는 민가는 몇 채뿐일세 / 民居只數家
전쟁터엔 흰 풀만이 남아 있고 / 戰場餘白草
농지라곤 온통 황사뿐이로다 / 耕地盡黃沙
한 해 내내 늘 갈옷 입었고 / 卒歲常衣葛
가을 지나서야 오이를 먹었지 / 經秋始食瓜
듣노라니 오랑캐 피리 소리 / 唯聞羌笛裏
밤마다 낙매화곡이로다 / 夜夜落梅花
여덟째 수〔其八〕
산세는 곤륜산을 앞지르고 / 山勢軼崑崙
여름에도 빙설이 가득하구나 / 炎天氷雪繁
별자리는 북방 현무로 나뉘고 / 星分玄武影
강물은 흑룡강에서 발원하네 / 江發黑龍源
옛날 변새는 변한국이요 / 古塞弁韓國
황폐한 성은 궁한촌이로다 / 荒城弓漢村
평생 긴 칼 한 자루 지니고 / 平生一長劍
북쪽 바라보며 군문에 기대네 / 北望倚轅門
길주의 옛 지명이 궁한촌이다. 북도는 바로 옛 변한의 땅이다.
아홉째 수〔其九〕
중국 땅은 강에 이르러 끝나고 / 漢地臨江盡
오랑캐 하늘은 변새에 나지막하네 / 胡天入塞低
공로 새긴 비석 헛되이 전해지건만 / 空傳勒銘石
관문 닫고 요새로 사용하지 못했지 / 未借閉關泥
물은 요하의 발원지 북쪽에 접했고 / 水接河源北
산은 설령의 서쪽에 서려 있다 / 山蟠雪嶺西
어이 견디랴 수루의 깊은 밤에 / 那堪戍樓夜
휘영청 달 밝은 중추의 북소리를 / 明月殷秋鼙
열째 수〔其十〕
만고의 선춘령이여 / 萬古先春嶺
말갈 하늘 가로 막았네 / 橫遮靺鞨天
지금 비석만 홀로 서 있고 / 至今碑獨立
당시 화살은 전하지 않구나 / 當日箭無傳
한나라 장수 행군했던 보루요 / 漢將行軍壘
오랑캐 말 물 먹이던 샘이로다 / 胡兒飮馬泉
맘 아파라 문숙공 사당이여 / 傷心文肅廟
잡초 우거진 두만강 가에 있구나 / 蕪沒豆江邊
열한째 수〔其十一〕
휘하 칠천여 명의 군사들 / 帳下七千士
북방이라 전투력 강성하구나 / 北方金革强
활이 관산의 달 따라 잔뜩 휘어 / 弓隨關月滿
화살은 변방 구름 너머 사라졌지 / 箭沒塞雲長
바람 타고 나는 새매 보이고 / 風翮看鷹隼
서리 밟는 준마가 내달린다 / 霜蹄騁驌驦
용정은 곁눈길에 들어오는데 / 龍庭入睥睨
만리 변경의 하늘은 아득하여라 / 萬里莽蒼蒼
올해 설날 우연히 꿈속에서 ‘멀리 온 길손은 천리 꿈에 절로 놀랐는데 몇 가구 촌집들 그저 문 닫아걸구나.’라는 시구를 얻었다. 객지에서 지은 것 같은데 무슨 조짐인 줄은 알아내지 못한 채 그저 그런가 보다고 여겼다. 지금 북관에 도착하니 길가 좌우에 있는 민가가 모두 몇 채밖에 되지 않았다. 홀연히 예전의 꿈을 기억해 보니, 또렷이 오늘의 정경이었다. 비로소 세간의 출세와 은둔이 죄다 이미 정해져 있음을 깨달았으니, 어찌 사람의 힘이 그 사이에 개입할 수 있겠는가. 드디어 율시 한 수를 채워서 완성하여 기록한다〔今歲新元 偶於夢中得句云 遠客自驚千里夢 居人空掩數家村 似是客中之作 而未卜其何兆 付之適然 今到北關 沿路民居 皆不過數家 忽憶前夢 宛是今日情境 始覺世間行藏 皆有前定 豈容人力於其間耶 遂足成一律以志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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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찬 눈발 날려 북쪽 구름 자욱한데 / 獰風吹雪朔雲屯
장백산 앞 옛 변방의 성벽이로다 / 長白山前古塞垣
멀리 온 길손은 천리 꿈에 절로 놀랐는데 / 遠客自驚千里夢
몇 가구 촌집들 그저 문 닫아걸구나 / 居人空掩數家村
덧없는 인생이 괴안국과 같음 깨달으니 / 浮生已悟同槐國
두려운 길이 귀문 가깝다고 뭐 걱정하리오 / 畏道寧愁近鬼門
백 년 평생 출처를 스스로 헤아리기 어려워 / 行止百年難自料
그저 분수에 따라 건곤에 맡겨 두노라 / 直須隨分任乾坤
괴안국(槐安國) : 인생사 한바탕의 헛꿈이라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의 고사에 나오는 나라이다. 당나라 때 순우분(淳于棼)이 술에 취하여 회화나무 아래에서 잠을 잤는데 꿈에 대괴안국(大槐安國)의 남가군(南柯郡)을 다스리면서 20년간이나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깨어나서 보니, 남가군은 바로 회화나무 남쪽 가지 아래에 있는 개미굴이었다고 한다. 《南柯太守傳》
두려운 길 : 원문의 ‘외도(畏道)’는 한나라 때 왕양(王陽)이 익주 자사(益州刺史)가 되어 구절판(九折坂)의 험한 길을 가다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의 유체(遺體)를 받들고 어찌 이런 험한 길을 자주 다닐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뒤에 왕존(王尊)이 그곳 자사로 와 그 구절판에 이르러 아전에게 묻기를 “이곳이 바로 왕양이 두려워한 길〔畏道〕이 아닌가.”라고 하니, 아전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왕존이 말을 빨리 몰도록 재촉하면서 “왕양은 효자이고 나는 충신이다.”라고 하였다. 《漢書 卷76 王尊傳》
건곤(乾坤)에 맡겨 두노라 : 세상에 명리(名利)를 구하는 마음 없이 천지 사이에서 유유자적 하는 것을 뜻한다. 두보(杜甫)의 〈비부 낭중 소 십형에게 주다〔贈比部蕭郞中十兄〕〉에 “어찌 장자의 수레가 오리오. 산림에 돌아가 늙으며 건곤에 맡겨 두리.〔寧紆長者轍? 歸老任乾坤.〕”라고 하였다.
북평사 홍국경 주국 을 전송하며 지어 주다〔贈別北評事洪國卿 柱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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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천령은 백두산 마주하고 우뚝해서 / 磨天嶺對白山高
동해의 만리 물결 굽어보나니 / 俯壓東溟萬里濤
그대가 이 가운데서 멀리 바라보면 / 君向此中聊騁望
세간 영욕이 가을날 한 터럭 같으리라 / 世間榮辱一秋毫
홍국경(洪國卿) : 홍주국(洪柱國, 1623~1680)으로, 자는 국경(國卿)이고, 호는 범옹(泛翁) 또는 죽리(竹里)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홍영(洪靈)의 아들이며 홍주원(洪柱元)의 동생이다. 홍주국은 1667년(현종8) 9월 13일 원만리(元萬里) 대신 북평사에 제수되었다. 《承政院日記 8年 9月 13日》
통군정에 오르다〔登統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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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은 만 번 꺾이며 큰 바다로 달리고 / 江流萬折赴滄溟
송골산 우뚝해서 한 점의 푸름이라 / 鶻岫依然一點靑
북으로 중원을 바라보면 무한한 느낌 일어 / 北望中原無限感
석양에 홀로 통군정에 기댄다오 / 斜陽獨倚統軍亭
통군정(統軍亭) : 의주(義州)의 객관(客館) 북쪽 산 위에 있던 정자로, 관서 팔경(關西八景)의 하나이다
송골산(松鶻山) : 의주에 있는 산이다.
요양에서 나그네로 밤을 보내며 감회를 적다〔遼陽客夜書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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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치며 〈행로난〉 슬피 부르니 / 擊劍悲歌行路難
하늘가에서 또 한 해 저무는 걸 보누나 / 天涯又見歲時闌
경세할 재주 없이 한갓 세상 걱정하며 / 才非濟世徒憂世
벼슬 그만두자면서 외려 관직에 매어 있으니 / 志在休官尙繫官
궁벽한 사막 눈바람이 근심 속에 지나가고 / 窮磧雪風愁裏度
고향의 안개 낀 달 꿈속에서 보누나 / 故山煙月夢中看
외로운 마음 쓸쓸하니 누구와 말을 할까 / 孤懷悄悄憑誰說
삼경의 나그네 침상에 촛불만 차갑구나 / 旅枕三更燭影寒
행로난(行路難) : 이백(李白)이 지은 시 제목으로, 인생의 험난함을 길을 갈 때의 어려움에 비유하였다.
▶요양(遼陽)이사막에!
삼차하〔三叉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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콸콸 흐르는 삼차하 / 混混三叉河
천리의 들판 가로지르니 / 橫截千里野
멀리 큰 사막을 뚫고 와 / 遙穿大漠來
곧장 큰 바다 향해 쏟아지누나 / 直向滄溟瀉
요동 땅 전체를 동서로 쪼개며 / 全遼割東西
천혜의 보루라 하이를 나눴는데 / 天塹別夷夏
세상일은 몇 번이나 변했던가 / 世事幾回變
하수의 흐름 그친 적이 없구나 / 河流不曾舍
한장석(韓章錫, 1832~1894)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치수(稚綏)ㆍ치유(稚由), 호는 미산(眉山)ㆍ경향(經香)ㆍ삼관자(三觀子)이다. 경향은 젊었을 때의 호이고 미산은 만년 이후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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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산집 제1권 / 시(詩)
두 객과 함께 배를 띄우고 선유봉에 이르러 배안에서 짓다〔與二客泛舟至仙遊峯舟中有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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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누대에서 세 밤 자니 꿈이 온통 맑고 / 水樓三宿夢全淸
서풍에 배를 풀어놓으니 원대한 마음 생기네 / 放槳西風遠意生
무더위를 모르겠으니 어디에 있는가 / 朱熱不知何處有
은하수에 오르고자 하니 이 몸이 가볍네 / 銀河欲上此身輕
계양산엔 외로운 돛 그림자가 작고 / 桂陽山細孤帆影
양자강엔 한 피리소리가 기네 / 楊子江長一笛聲
봉우리 아래 닻줄 매고 술 사러 가니 / 繫纜峯根沽酒去
석양이 숲으로 들어가고 많은 매미들 울어대네 / 斜暉入樹萬蟬鳴
선유봉 : 서울 양화대교에 걸쳐있는 선유도를 말한다.
계양산(桂陽山) : 인천광역시 계양구에 있는 높이 394m의 산이다.
숭령전〔崇靈殿〕 단군(檀君)과 동명왕(東明王)을 함께 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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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한의 왕업을 창시하였고 / 草昧東韓業
활을 쏘며 단수 아래 내려와 계승하였네 / 彎弧繼降檀
서도는 풍수가 좋기도 하니 / 西都風水好
주나라 한나라도 차례로 장안에 도읍했지 / 周漢遞長安
대동강〔大同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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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진 세월 백겁에 방패와 창을 씻고 / 風塵百刦洗干戈
화려했던 천년에 비단옷을 비추었네 / 繁麗千年照綺羅
하늘이 긴 강의 맑은 한 줄기를 만드니 / 天作長江淸一帶
지금껏 마치도 황하를 보는 듯하네 / 至今猶似見黃河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환도성(丸都城)에서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봉상왕(烽上王) 5년(296)에 모용외(慕容廆)가 내침하였다. 고국원왕(故國原王) 41년(371)에 백제왕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였는데 왕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서거하였다. 광개토왕(廣開土王) 2년(392)에 백제와 패수(浿水) 가에서 전투를 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영양왕(嬰陽王) 24년(613)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병사 30만을 격파하였다. 보장왕(寶藏王) 20년(661)에 당(唐)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패강(浿江)에서 우리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27년(668)에 이르러 당나라 장수 이적(李勣)과 계필하력(契苾何力)이 우리 군대를 크게 격파하니 고구려가 마침내 망하였다. 고려 인종(仁宗) 13년(1135)에 묘청(妙淸)과 조광(趙匡)이 서경(西京)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김부식(金富軾)이 정벌하여 3년 만에 멸망시켰다. 명종(明宗) 때 조위총(趙位寵)의 반란이 있었는데 두경승(杜景升)이 격파하였다. 고종(高宗) 때는 거란(契丹)과 몽고(蒙古)의 침략이 있었다. 원종(元宗) 때는 최탄(崔坦)의 난리가 있었고 평양은 원(元)나라에 내속(內屬)되었다. 공민왕(恭愍王) 8년(1359)에 홍두적(紅頭賊) 모거헌(毛居獻)에게 함락 당하자 김진(金縉)이 격파하였다. 우리 조선으로 들어와서 임진년(1592)에 왜구(倭寇)가 성 안으로 들어와 점거하니,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화공(火攻)으로 승리하였다. 또 정묘년(1627)과 병자년(1637)의 오랑캐 난리 때 평양이 먼저 그 칼날을 받았다. 대개 천연적으로 험하여 군사의 요충지가 되는 땅으로서 대강(大江)이 그 견고한 차폐물이 된다. 지금 태평 시절이 수백 년이어서 아득히 산이 높고 물이 맑으며 풍악 소리가 번화하고 화려함을 보게 되는데, 예로부터 그러했다.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여 예악(禮樂)을 일으키게 하니, 조야(朝野)가 일이 없고 백성들이 즐거워하여서,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비유하고 영명령(永明嶺)을 숭산(嵩山)에 비유하여 노래를 지어 그 임금을 송도(頌禱)하였다.
동천왕(東川王)은 …… 옮겼는데 : 246년 위나라 유주 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이 환도성(丸都城)에 쳐들어와 성이 함락되었고, 후에 장군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활약으로 국토를 회복했으나 환도성이 파괴되었으므로 247년 서울을 평양 근교 동황성(東黃城)으로 옮겼다.
모용외(慕容廆) : 중국 5호 16국시대 전연(前燕)의 시조이다. 선비(鮮卑)의 단부(段部)ㆍ우문부(宇文部) 및 고구려를 격파하여 뒤에 전연을 건국하는 기초를 이룩하였다.
소정방(蘇定方) : 591~667. 당나라의 장군으로 본명은 소열(蘇烈), 자는 정방(定方)이다. 보통 본명보다는 자로 불린다. 661년(고구려 보장왕20)에 나ㆍ당 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
이적(李勣) : 594~669. 원명은 서세적(徐世勣), 자는 무공(懋功)이다. 당 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이 이(李)씨를 하사했고, 나중에 당 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 휘(諱)하여 이적으로 개명하였다. 당나라 명장으로 돌궐과 고구려를 격파하는 데 공을 세웠다.
계필하력(契苾何力) : ?~677. 본래 철륵족(鐵勒族) 계필부(契苾部) 출신인데 나중에 당나라에 귀순하여, 용장으로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조위총(趙位寵)의 반란 : 조위총(?~ 1176)은 1170년(의종24) 이의방(李義方)ㆍ정중부(鄭仲夫) 등이 무인정변을 일으켜 의종과 문신들을 죽이고 집권하자, 1174년(명종4) 이의방과 정중부의 토벌을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으나 결국 실패하고 윤인첨(尹麟瞻)이 이끄는 관군의 총공격으로 진압되었으며 그는 붙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두경승(杜景升) : ?~1197. 고려 무신란 시절에 장군이 되어,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1176년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서경을 공격하여 조위총을 사로잡아 죽임으로써 난을 진압하였다.
최탄(崔坦)의 난리 : 최탄은 1269년(원종10) 서북면병마사영(西北面兵馬使營) 기관(記官) 때 임연(林衍)이 원종을 폐하고 원종의 동생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우자, 임연의 목을 벤다는 구실로 한신(韓愼)ㆍ이연령(李延齡)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무왕(武王)이 …… 송도(頌禱)하였다 : 여기서 언급한 노래는 〈대동강곡〉을 말하는데, 〈대동강곡〉은 작자와 제작 연대 미상의 고려 속악가사(俗樂歌詞)로서 그 가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사》 권71 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에,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殷)나라의 태사(太師)였던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는데, 기자는 8조목의 가르침을 베풀어 예의를 숭상하는 풍속을 일으키니 조정과 민간이 무사태평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기뻐하여 대동강을 황하(黃河)에, 영명령(永明嶺)을 숭산(嵩山)에 각각 비유해서 임금의 덕을 칭송하고 안녕을 빌었다.” 하였다.
승벽정〔乘碧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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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주렴 붉은 현판에 달 밝을 때에 / 靑簾紅榜月明時
땅에 가득한 강과 호수에 기약 안 정했으니 / 滿地江湖不定期
푸른 은하수의 성사는 어느 날 돌아오려나 / 碧漢星槎何日返
남포에서 임 보내는 시만 부질없이 남겨놓았네 / 空留南浦送君詩
명나라 사신 오희맹(吳希孟)은 큰 누선(樓船)에 적기를 승벽정(乘碧亭)이라고 하였고, 명나라 사신 허국(許國)은 ‘벽한부사(碧漢浮槎)’라고 편액을 적었다. 옛날에 한 호사가(好事家)가 누선(樓船)을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서 영귀루(咏歸樓)에 정박했다가 사간(司諫) 정지상(鄭知常)의 시를 보고서 현판을 가져다가 그 누선에 걸고 돌아갔는데 지금까지도 늘 걸려 있다. 어떤 사람이 장난삼아 짓기를 “채색 배로 석양에 강물 타고 내려가서, 남호(南湖) 정자(鄭子)의 시를 훔쳐갔다네.”라고 하였다.
푸른 은하수의 성사(星槎) : 어떤 사람이 바닷가에 살면서 해마다 가을 음력 8월이 되면 어김없이 뗏목이 떠오는 것을 보고 그 뗏목에 양식을 가득 싣고 수십 일 동안 갔더니, 멀리 궁실(宮室)에는 베 짜는 아낙들이 많고 물가에는 소를 끌고와 물을 먹이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돌아와서 점술(占術)로 유명한 엄군평(嚴君平)에게 물어보았더니 “모년 모월 모일에 객성(客星)이 견우성(牽牛星)을 범하였다.” 하였다. 소를 끌고 있던 사내가 견우였던 것이다. 이 고사로 인하여 사행(使行)을 성사(星槎)라고 한다. 《張華 博物志 卷10》 한(漢)나라 때 장건(張騫)이 뗏목을 타고 먼 외국인 대하(大夏)로 사신 갔던 데서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남포에서 …… 시 : 고려 정지상(鄭知常)의 〈대동강(大同江)〉시를 말한다. 그 시에서 “남포에서 임 보내니 슬픈 노래 울려나네〔送君南浦動悲歌〕”라고 하였다.
오희맹(吳希孟) : 호는 용진(龍津)이다. 명나라 무진(武進) 사람으로 호부급사중(戶部給事中)을 지냈다. 가정(嘉靖) 연간에 한림학사(翰林學士) 공용경(龔用卿)과 함께 조선으로 사신을 와서 귀국할 때 요동(遼東)을 경유하여 천산(千山)을 유람하였다.
허국(許國) : 1527~1596. 자는 유정(維楨), 안휘(安徽) 흡현(歙縣) 사람이다. 가정(嘉靖) 44년(1565)에 진사가 되고, 검토(檢討)ㆍ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ㆍ예부 상서(禮部尚書)ㆍ동각대학사(東閣大學士) 등을 지냈다. 조선 선조 때 위시량(魏時亮)과 함께 조선으로 사신 왔었다.
영귀루(咏歸樓) : 평양부의 남포(南浦) 가에 있는 누각이다. 《東國輿地勝覽 卷51 平安道》
남호(南湖) 정자(鄭子) : 남호는 정지상의 호이고, 정자는 정지상을 지칭한 것이다.
두미에서 점심을 먹고 삿대를 저어 내려가다〔午飯斗尾蕩槳而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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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산들 어렴풋한 바닷가의 고을에서 / 隱約群山海上州
한 척 배가 맑은 안개를 다 말아 거두고 / 孤篷捲盡淡煙收
붉은 구름은 점차 삼각산에 가까워지는데 / 紅雲漸近峯三角
뱃사공은 두물머리를 유독히도 근심하네 / 黃帽偏愁水二頭
학을 만나고 바람 부르니 참으로 도에 들겠고 / 遇鶴招風眞入道
지닌 책이 배에 가득하니 봉후와 같아라 / 携書滿舫等封侯
물결 높고 달빛 어두운데 그래도 배는 가고 / 浪高月黑舟猶去
적삼에 바람 썰렁하니 춥기가 가을 같네 / 蕭颯衣衫冷似秋
저녁 먹고 돛을 펼쳐 광주를 지나자니 / 晩飯開帆度廣州
풍랑과 맞바람이 완전히 걷히지 않았네 / 浪花風逆未全收
긴 물가에 신선굴은 완연히 보았는데 / 長洲宛見神仙窟
작은 배라 오와 촉의 지점을 분별할 수 없네 / 小艇不分吳楚頭
내 부채가 어찌 병예를 지휘할 수 있으랴만 / 我扇何能揮屛翳
그대 시는 또한 양후를 복종시킬 만하리 / 君詩且可伏陽侯
무너지는 파도에 단지 키 잡는 힘만 믿나니 頹波只信操柁力
지주가 만고 세월 속에 우뚝함을 마침내 보네 / 砥柱終看屹萬秋
두미(斗尾) :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의 경계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상팔당과 봉안마을 사이에 있고 옛날부터 두미나루가 있었다. 지금은 와부읍에 속해 있으며 남양주시 두미마을 앞의 두미천을 끼고 흐르는 강을 두미강이라고 한다.
두물머리 : 경기도 양평군(楊平郡) 양서면(楊西面) 양수리(兩水里) 일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해지는 곳이다.
병예(屛翳) : 고대 전설에 나오는 신으로, 출전마다 각각 가리키는 바가 다르다. 대체로 구름의 신인 풍륭(豊隆), 비의 신인 우사(雨師), 우레의 신인 뇌사(雷師), 바람의 신인 풍사(風師)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바람의 신을 가리킨다.
양후(陽侯) : 풍파(風波)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킨다는 파도의 신을 가리키는데, 파도 자체를 뜻하기도 한다
무너지는 파도 : 아래 지주(砥柱)과 연관해서 쇠퇴한 세상 풍조를 비유하기도 한다.
지주(砥柱) : 중국 하남성(河南省) 삼문협시(三門峽市)를 흐르는 황하(黃河)의 중류에 위치하여 거센 물살 가운데 우뚝이 서 있던 바위산으로, 혼탁한 세속에 휩쓸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절조를 지키는 군자에 곧잘 비유된다. 댐 건설로 인하여 폭파되어 지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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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집》 서문〔南行集小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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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년(1868, 고종5) 겨울에 가대인(家大人)께서 익산군(益山郡)에 유배되셨는데, 해를 넘겨 다음해인 기사년 가을에 비로소 가서 뵐 수 있었다. 8월 병진(丙辰) 어머니께 하직 인사를 드리고 남쪽으로 숭례문을 나서 동작진(銅雀津)을 건넜다. 과천읍(果川邑) 객점에서 점심밥을 먹고 저녁 무렵 광주(廣州) 부곡(富谷)에 도착하여 선영을 살펴보고 분암(墳菴)에서 묵었다. 이날 50리를 걸었다.
정사(丁巳), 일찍 출발해서 화성(華城)의 이목동(梨木洞)에 있는 백부(伯父)와 중부(仲父)의 묘를 두루 참배하고, 만석거(萬石渠)를 지나 장안문(長安門)을 거쳐 팔달문(八達門)을 나섰다. 진포(眞浦)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칠원(七院)에서 묵었다. 이 날 90리를 걸었다.
무오(戊午), 아침에 소낙비가 내리다가 곧 그쳤다. 소사천(素沙川)을 건너 천안(天安) 신점(新店)에서 점심밥을 지었다. 도리치(桃李峙)를 지나서 길을 돌아 산곡(山谷)의 박영래(朴永來) 군 집을 방문하여 유숙하였다. 이 날 95리를 걸었다.
기미(己未), 새벽에 출발하여 정오에 궁원(弓院)에서 쉬었다. 배로 금강(錦江)을 건너 저녁에 거수막(巨水幕)에서 묵었다. 이 날 95리를 걸었다.
경신(庚申), 새벽에 출발하여 경천역(敬天驛)에서 아침을 먹고 정오에 올목점(兀木店)에서 쉬었다. 황화정(皇華亭)을 찾았는데 정자는 호남(湖南), 호서(湖西)의 경계에 있으니, 옛날 바다를 건너 명나라로 가는 길이었는데. 지금 다만 비문만 있다. 저녁에 여산(礪山) 탄현(炭峴)을 지났다. 이 날은 빠르게 110리를 달려 한 밤중에 익산군(益山君)에 다다라서 거정소(居停所)에서 가대인을 배알하였는데, 곧 이방 임윤수(林允秀)의 집이었다. 그 자리에서 지주(地主 군수(郡守))인 이풍재(李豐在) 어른께 인사 드렸다.
신유(辛酉), 훈지당(塤箎堂)으로 벗 이성보(李聖寶)를 방문하였는데 아헌(衙軒)의 부속건물이었다. 송우암(宋尤菴) 선생께서 동생 분들을 데리고 연달아 이 고을의 군수가 되어 장구(杖屨)로 이곳에서 유연(留連)하였으니, 훈지당의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훈지당은 연못에 가까운데 수죽(脩竹) 천 그루가 둘러싸고 있다. 작은 섬에 가을꽃이 밝게 활짝 피어 붉은 노을과 같았으니 이른바 백일홍이라는 것인데, 그 경계가 그윽하고 맑아서 감상할만하였다. 남쪽으로 백여 걸음을 나서 정덕정(正德亭)에 올랐는데, 황종석(黃鍾奭)이 창건한 곳으로 습사(習射)하는 곳이다. 또한 죽림과 부거(芙蕖 연꽃)의 승경이 있다.
임술(壬戌), 동북쪽 산에 올라서 죽림을 두루 살펴보니 대개 소씨(蘇氏)의 정원이었다. 소씨는 익산의 망족(望族)으로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과 월주(月洲) 소두산(蘇斗山)은 모두 널리 알려진 분들이다. 대대로 여기에 거주하였는데 월주의 후예가 더욱 번성하고 뛰어났다. 소씨로서 읍에 거주하는 자는 매우 많았는데, 모두 산을 따라 대나무 길을 뚫고, 이로 인하여 울타리를 만들어 서로 인접하였다. 멀리 바라보면 온통 푸른빛이고, 점유하고 있는 원지(園池)나 정대(亭臺)도 각각 그윽한 풍취가 극진하였다. 익산은 마한(馬韓)의 옛 도읍으로 동쪽으로는 마이산(馬耳山)의 두 봉우리가 있어서 뛰어오르는 듯 웅크려 있는 듯하기 때문에 옛날에는 금마군(金馬郡)이라 불렀다. 북쪽에는 용화산(龍華山)이 넓고 웅장하게 자리 잡았고, 남쪽으로는 큰 들판에 통하고 춘포(春浦)의 물이 그 앞을 적시며 지나서 해문(海門)이 된다. 대개 그 산천이 광원(曠遠)하고 요조(窈窕)하기 때문에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우며, 인재와 물산이 성대하고 부유하면서 우아하고 세련되어 기자(箕子)의 유풍이 있다.
갑자(甲子), 가대인(家大人)을 모시고 남고산(南固山)을 유람했는데, 소송여(蘇松汝)가 뒤를 따랐다. 읍의 남쪽을 따라 몇 리 길을 걸어 기자궁의 옛터를 찾으니 두개의 석상(石像)이 전야(田野) 사이에 마주 서 있고, 오층 부도탑이 그 왼쪽에 우뚝 서 있었다. 그 옛 자취는 자세하지 않으나 아마 2000년 전의 물건일 것이다. 40리를 걸어 승금정(勝金亭)에 올랐는데, 정자는 전주(全州) 북쪽 덕진구(德眞溝) 가에 있고 이시재(李時在)가 지은 것이다. 긴 제방이 놓인 평호(平湖)에 연꽃과 어선이 있어 의연히 오(吳)나라와 월(越)나라를 상상케 한다. 또 10리를 지나 공북루(拱北樓)에 올랐는데 계증조(季曾祖)이신 익정공(翼貞公)께서 세우신 것으로, 편액의 글씨가 아직도 새롭다. 공북문으로 들어가 전주의 성시(城市)를 두루 보고 풍남문(豐南門)을 나서 5리를 지나 남고 산성(南固山城)에 올랐다. 그 높이가 구름에 닿고 별을 잡을 듯하였으며, 그 험준함은 수레를 걸고 말을 묶을만하였다. 본디 견훤(甄萱)의 근거지인데, 지금은 호남의 중요한 관방(關防)이 되었다. 만억문(萬億門)에 들어가 절집에 투숙하였다.
을축(乙丑), 서장대(西將臺)에 올랐는데 수십 걸음 앞에 돌연히 솟구쳐서 암석이 우뚝하고 멀리 바라봄에 확 트여서, 아래로 완성(完城)이 한 폭의 그림처럼 굽어 보여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정포은(鄭圃隱) 선생의 만경대(萬景臺)라는 세 글자가 있고 또 새겨진 시가 있는데 은은히 분별할 수 있었다. 별장(別將) 최한풍(崔漢豐)이 와서 만났고, 막부의 손님인 홍영석(洪永錫) 군이 얼마 후에 또 이르렀다. 자사(刺史) 서상정(徐相鼎) 공이 주전(廚傳 음식물)과 성기(聲伎)를 보내주어서 저녁 술자리를 기약하여 성안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병인(丙寅), 초저녁에 북문으로 들어가서 최한풍 집에 머무르며 약속대로 하였다.
정묘(丁卯), 패서문(沛西門)을 나서 20리를 걸어서 상림(桑林)으로 정언(正言) 한석권(韓錫權)을 방문했으나 만나지 못하였고, 길을 돌아 30리를 걸어서 김제(金堤) 임상리(林上里) 한진석(韓晋錫)의 집에 머물렀으니 모두 옛날부터 익히 알고 지낸 친척들이었다.
9월 초하루 기사(己巳), 20리를 걷고 배로 쌍강(雙江)을 건넜다. 또 30리를 걸어서 익산의 교거(僑居)로 돌아왔다.
신미(辛未), 다시 죽림에서 노닐었고, 행정(杏亭)과 서강(西岡)을 두루 다녔다.
임신(壬申), 미륵산(彌勒山) 아래에 이르러 화산서원(華山書院)을 참배. 빠른 걸음으로 북쪽 미륵산 정상에 올라서 마한의 옛 성을 보았다. 바닷가의 여러 산을 바라보니 총총한 것이 개미 둑과 같았다. 미륵산은 대개 용화산의 일맥으로 호서와 호남사이에 돌출되어 높이 솟아 읍과는 겨우 10여 리 정도 떨어져 있다. 점심은 사자암(獅子庵)에서 지었고 해가 저물자 돌아왔다.
을해(乙亥), 가친(家親)을 하직하고 돌아오는 길을 출발 저녁 무렵 은진(恩津)에 도착해서 친구를 방문하려고 다른 길을 취하여 유산점(游山店)에서 묵었다.
병자(丙子), 저녁에 공주(公州) 검상동(檢詳洞)에 도착 이틀 동안 120리를 걸었다.
정축(丁丑), 배를 타고 금성진(錦城津)을 건너 30리를 걸어서 모로원(毛老院)을 나서니 처음으로 큰길과 합쳐졌다. 깊은 밤에 달빛을 받으며 산곡(山谷)에 있는 박군의 집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무인(戊寅), 정오에 직산(稷山) 삼거리에 도착해서 상서(尙書) 박환재 규수(朴瓛齋珪壽)를 만나 풀 자리를 깔고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였다. 안성포(安城浦)에서 묵었다.
기묘(己卯), 저녁에 화성(華城)을 지났다.
경진(庚辰), 새벽에 출발해서 날이 포시(晡時 오후 4시 전후)가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다녀온 지 무릇 25일이고 여행길은 1060리였다.
소세양(蘇世讓) : 1486~156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언겸(彦謙), 호는 양곡(陽谷)ㆍ겸재(謙齋)ㆍ퇴휴당(退休堂),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저서에 《양곡집》이 있다.
소두산(蘇斗山) : 1627~1693.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진주, 자는 망여(望如), 호는 월주이다. 송시열의 문인이다.
저녁 술자리 : 원문은 복야(卜夜)로, 약속을 정해서 밤에 술을 마시는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 장공(莊公) 22년에 “진공자 완(陳公子完)이 주연을 베풀어 제 환공(齊桓公)을 대접하니 환공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환공이 ‘불을 밝히고 계속 마시자.’고 하니 진공자 완이 사양하기를 ‘신은 낮에 모시는 일만 점을 쳤지 밤까지 모실 것은 점을 치지 않았으니 감히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飮桓公酒, 樂. 公曰 : 以火繼之. 辭曰 : 臣卜其晝, 未卜其夜, 不敢.〕”라고 하였다.
박환재 규수(朴瓛齋珪壽) : 1807~1876. 본관은 반남(潘南), 호는 환재(瓛齋)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개화사상가이다. 박지원의 손자로 개화파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875년 최익현 등의 척화 주장을 물리치고,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 강화도조약을 맺게 하였다. 문집으로 《환재집》과 《환재수계》가 있다.
단성현 수령으로 가는 이경춘(李景春)을 보내는 서문〔送李景春宰丹城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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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이경춘(李景春)은 큰 그릇을 품고 독서한 지 30년이 되었는데, 벼슬하여 단성현의 관리가 되었다. 단성은 대령(大嶺) 이남 800리에 있어 궁벽진 곳에 위치하고 작은 읍
단성현(丹城縣) : 경상남도 산청 지역의 옛 지명이다.
영춘현의 수령으로 가는 서여심을 보내는 서문〔送徐汝心宰永春縣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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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벗 서여심(徐汝心)은 오랫동안 독서하여 당세에 뜻을 둔 사람이지 봉록만을 마음에 두고 벼슬하는 사람은 아니다. 지난번 내가 처음 벼슬할 때, 함께 산택(山澤)간을 유람하였는데 개연히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일을 언급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선비가 조금이라도 그 뜻을 펼치고자 한다면, 하나의 군현만을 다스려도 괜찮다.”라고 하였는데, 여심은 분연(奮然)히 달갑게 여기지 않는 뜻이 있었다. 얼마 후에 내가 처음 벼슬하여 관각(館閣)의 직책에 나아갔으나 무능하여 하는 일이 없었는데, 여심은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벼슬하여 호조(戶曹) 관원이 된 지 이미 수년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관복을 입은 채로 미진(米塵)을 모자 깃에 가득 채운 것이 세속의 선비와 다를 것이 없었으나, 그 기개를 살펴보면 성대하여 여전히 꺾이지 아니하였다. 오래지 않아 외직으로 나가 영춘현을 다스리게 되었는데 영춘현은 험준한 읍이요, 궁벽한 곳이라 일이 적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백리의 현을 다스림은 현인의 길이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영춘현의 백성을 위해서는 축하할 만한 일이지만 여심을 위해서는 축하할 일이 아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 말에 대해서 나는 일찍이 의심하였다.
자유(子游)가 예악으로 무성(武城)을 다스리는 것을 공자께서 허여하셨고, 정백자(程伯子 정호(程顥))가 부구(扶溝)를 다스릴 때 논밭의 수로를 파는 일에 마음을 다하였으니, 옛 군자는 관리의 일을 낮게 여기지 아니하여 처지를 따라 직책을 다함이 이와 같았다. 정사(政事)에는 진실로 작은 일이 없어서, 일현(一縣)의 다스림을 천하에 넓혀 갈 수도 있으니 여심은 힘쓸지어다.
영춘현(永春縣) : 충청북도 단양 지역의 옛 지명이다.
경행(經行) : 경명행수(經明行修)의 약칭. 경서에 밝고 행실이 바르다는 뜻으로, 과거(科擧)에 의하지 않고 학문과 덕행이 높은 이를 천용(薦用)하는 인재 등용 방법의 하나이다
공자께서 허여하셨고 : “공자가 무성에 가서 현가(弦歌) 소리를 듣고 빙그레 웃으며 말하기를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하니, 자유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들으니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하셨습니다.’하였다. 공자가 말하기를 ‘제자들아, 자유의 말이 옳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다.’〔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 割雞焉用牛刀?, 子游對曰 :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라고 하였다. 《論語 陽貨》
봉사로 연경에 가는 이봉조를 보내는 서문〔送李鳳藻奉使赴燕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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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연경으로 가는 사람을 전송한 경우가 많았는데, 한마디의 말도 준 적이 없었던 것은 해줄 만한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람을 서술하면 비루하고 이별을 말하면 천박하며, 자문의 일을 말하면 상투적이고 역사를 말하면 슬프니, 여기에 하나도 해당됨이 없는데 억지로 말하면 위선에 가깝다. 우리나라 선비가 옥백(玉帛)을 지니고 연계(燕薊 북경지방)땅으로 가는 자들이 해마다 길에 자취가 이어져서, 황화(皇華)와 청풍(淸風)의 노래가 거의 천 마리의 소를 땀 흘리게 할 만큼 많은 종이에 인쇄되었으니, 또 따라서 말한다면 너무 췌언(贅言 군더더기 말)이 아니겠는가? 췌언과 위선은 군자가 하지 않는다.
내가 일찍이 《춘추전》을 읽으니 현대부(賢大夫)의 일을 칭하여 서술할 때는, 반드시 조근(朝覲)과 빙문(聘問)을 수행하고 사령(辭令)을 익숙히 함을 능력으로 삼았는데, 그 말이 외울만하고 의문(儀文)이 볼 만하였다.《예기》에 〈소아(小雅)〉의 시(詩) 3편을 익히게 하는 것은 처음에 벼슬길을 가르치는 것임을 밝혔고, 공자 또한 ‘전대(專對)가 사신의 일’이라 하였다. 옛날에 사신의 일을 중히 여겼음이 이와 같았는데 오늘날에는 이처럼 어려운 점을 볼 수 없다. 매년 겨울에 사자(使者)의 전거(傳車 수레)를 타고 국서(國書)와 방물(方物)을 지니고 요동의 들판을 건너 옥하(玉河)에 머무르다 반년도 되지 않아 돌아오니, 비록 정교(鄭僑)와 오찰(吳札)이 아니더라도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다. 또 연도(燕都)는 천하의 북쪽에 자리한 옛날 변방의 요새로 큰 사막의 접경에 있는 고을이라 일컬어지던 곳인데, 사람들은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풍속이 드물고, 그 지역엔 숭산(嵩山)과 낙양(洛陽)의 승경도 없어 다만 궁실과 성시로 그 부유하고 화려함을 과시한다. 우리나라와 땅이 가장 가까워서 다만 작은 강 하나를 떨어졌을 뿐으로, 사신의 수레가 조석(朝夕)으로 왕복하니 유람의 장엄함과 이별의 괴로움이야 어찌 말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회동(會同)하고 연향(燕享)에 참가하는 의례(儀禮)는 연례(年例)를 참고하여 한 역관(譯官)에게 물어보면 충분하다. 외교는 심히 엄하고 출입에 제한이 있어 간간히 몇몇 호저(縞紵)의 우호가 있어도 술을 마시거나 글과 서찰로 잠깐의 기쁨을 접할 뿐이니 자문에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 국가가 천도에 순응하여 대국을 섬겨, 폐백(幣帛)을 받들고 이적(夷狄)의 군장(君長)에게 바친 것이 거의 300년이다. 지금 공허한 몇 줄의 말로 비풍(匪風)의 감회를 의탁하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내가 이 때문에 “해 줄만한 말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학사(學士) 이봉조(李鳳藻 이건창)가 젊은 나이에 두각을 드러내어, 재주가 높고 학문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빛낼 솜씨를 지녔다고 추천하였다. 갑술년(1874, 고종11) 겨울에 왕명을 지니고 강역을 나섬에 매우 은근하게 내게 말을 구하니, 내가 평생 말하지 않던 것을 시험 삼아 그대를 위하여 발언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대는 옛것을 익히고 경전에 통달하며 지기(志氣)가 뛰어나니, 이 사신가는 일이 일반사람의 유람과는 다를 것이라 생각하여 가만히 한번 이점에 대해 논해 보겠네. 나라를 잘 엿보는 자는 먼저 그 풍속을 보고, 풍속을 잘 보는 자는 먼저 유술(儒術)이 숭상하는 바를 살피니, 유술이 순수하고 혼탁한가에 따라 천하대세의 분리와 통합이 연계되기 때문이네. 이단과 정학(正學)의 관계는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이 서로 변하는 것과 같으니, 소아(小雅)가 다 폐해진 후로 중국이 점차 미약해져,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이 횡행하여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다투게 되었고 불교가 발흥하여 오호(五胡)가 어지러웠으며, 육상산(陸象山)과 왕양명(王陽明)의 설이 번창하자 변방의 오랑캐가 번갈아 중원의 주인이 되었네. 무릇 음양성쇠는 그 기미가 먼저 드러나니, 혼란해질 때에는 분리하려는 경향이 있고 다스려질 때에는 하나가 되려는 경향이 있네. 지금 여러 오랑캐가 천하에 두루 퍼지고 금수의 자취가 중국에 교차하며 학술이 여러 문파로 나뉘고 이단의 말이 사방에서 유입되어, 백성이 치세(治世)를 희구한 지가 오래되었네. 궁하면 반드시 변하는 것이 또한 떳떳한 이치이니, 그대는 해내(海內)의 선비를 방문하여 길흉을 점쳐보게나.
且夫燕都處天下北。古所稱荒塞絶徼窮朔大漠之鄕也。人鮮齊魯之俗。地無嵩洛之勝。徒以宮室城市。夸耀其富麗。而於我國壤地最近。只隔一衣帶水耳。
이봉조(李鳳藻) : 이건창(李建昌, 1852~1898)으로, 봉조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영재(寧齋)로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1866년(고종3)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5년 충청 우도 암행 어사, 1880년에는 경기도 암행 어사로 나갔는데, 천성이 강직해 부정ㆍ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ㆍ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여 명성이 높았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 《당의통략》 등이 있다.
황화(皇華)와 청풍(淸風)의 노래 : 모두 사신으로 멀리 떠나는 이에게 주는 전별의 말이나 시를 말한다. 황화는 《시경》 〈황황자화(皇皇者華)〉의 시를 말한 것으로 이 시의 내용은 사명을 받고 떠난 신하가 행여나 임금의 뜻에 미치지 못할까 매양 염려하는 뜻을 노래한 것이다. 청풍은 주나라 선왕(宣王) 때에 동방에 축성하러 떠나는 중산보(仲山甫)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윤길보(尹吉甫)가 지은 송시(誦詩)를 말한다.
소아(小雅)의 …… 것 : 《예기》 〈학기(學記)〉에 이르기를 “소아의 3편을 익히게 하는 것은 그 처음에 벼슬길을 가르치는 것이다.〔宵雅肄三, 官其始也.〕” 하였다.
전대(專對)가 사신의 일 : 전대는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서 독자적으로 응대하며 일을 잘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시경 300편을 외우면서도 정치를 맡겼을 때에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授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 亦奚以爲?〕”라고 하였다.《論語 子路》
정교(鄭僑)와 오찰(吳札) : 정교는 춘추 시대 정나라 재상인 공손교(公孫僑)로 자가 자산(子産)이다. 오찰은 춘추 시대 오나라 공자 계찰(季札)을 말한다. 모두 어진 대부였다.
제나라와 노나라의 풍속 : 아름다운 풍속을 말한다. 춘추 시대에 두 나라의 풍속이 비교적 아름다웠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제나라가 한 번 변하면 노나라에 이르고, 노나라가 한 번 변하면 도에 이른다.〔齊一變, 至於魯, 魯一變, 至於道.〕”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호저(縞紵) : 친구 사이의 선물이나 교제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다. 춘추 시대 오(吳)나라 계찰(季札)이 정(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자산(子産)을 만나보고는 오랜 친구처럼 여기어 그에게 흰 명주 띠〔縞帶〕를 선사하자, 자산은 그 답례로 모시옷〔紵衣〕을 기증하였다. 《春秋左傳 襄公29》
천도에 순응하여 : 맹자가 말하기를 “천하가 유도할 때는 소덕(小德)이 대덕(大德)에게 부려지고 소현(小賢)이 대현(大賢)에게 부림을 당하며, 천하가 무도할 땐 작은 자가 큰 자에게 부려지고 약자가 강자에게 부림을 당한다. 이 둘은 하늘이니,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보존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天下有道, 小德役大德, 小賢役大賢. 天下無道, 小役大, 弱役强. 斯二者天也, 順天者存, 逆天者亡.〕” 하였다. 《孟子 離婁上》
대국을 섬겨 : 맹자가 말하기를 “오직 인자(仁者)만이 대국으로 소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탕왕이 갈(葛)나라를 섬기고, 문왕이 곤이(昆夷)를 섬겼습니다. 오직 지자(智者)만이 소국으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태왕이 훈육(獯鬻)을 섬기고,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섬겼습니다.〔惟仁者爲能以大事小. 是故湯事葛, 文王事昆夷. 惟智者爲能以小事大, 故大王事獯鬻, 句踐事吳.〕” 하였다. 《孟子 梁惠王下》
비풍(匪風) : 《시경》 〈회풍(檜風)〉의 편명으로 현인이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해져 감을 근심하여 다시금 주나라 왕업을 일으킬 수 있기를 기원한 것이다.
흥양 현감으로 가는 김경능을 보내는 서문〔送金敬能宰興陽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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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 초가을에 경능이 성상(聖上)의 선택을 받아 흥양현(興陽縣) 수령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수레가 출발하기 전 나는 용강(龍岡 평안남도 용강군) 현령이 되어 앞서거니 뒷서거니 나가게 되었다. 흥양은 남해에 있고 용강은 서해에 있으니 서로의 거리가 1500여 리라, 앞으로 수년 동안 이별을 하게 되었다. 만나고 헤어짐이 무상한데 마음에 느낀 것이 많으니 한마디 말을 주고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용강은 예로부터 명읍(名邑)으로 일컬어졌고 기자(箕子)의 옛 도읍에 인접하여 땅이 맑고 일이 간결하며, 아전과 백성이 법을 두려워 하니 누워서도 다스릴 수 있다. 경능은 영기(英氣)를 뛰어나게 발현하고 화려한 명성이 날로 드러나서 바야흐로 교화에 대한 의론을 임금께 아뢰어 조정의 규장(圭璋 예식 때 사용하는 옥(玉))과 보불(黼黻)같은 인물인데, 도리어 하읍(下邑)에 몸을 낮추고 오두미(五斗米) 때문에 바닷가에 몸을 굽혔다. 아득히 멀고 장기(瘴氣)가 많으며 물이 짜고 풍속은 교활하며 일은 많아서 다스리기 심히 어려우니, 이 어찌 경능을 위하여 기뻐하겠는가? 그러나 군자가 벼슬에 나아가 배운 것을 시험할 때는 목민(牧民)이 우선이기 때문에 부유한 녹을 마다하고 낮은 벼슬에 처한 자도 있고 백성의 병고를 급하게 여겨 편안함을 사양한 자도 있다.....
을해년(1875, 고종12) 9월 기망(旣望)에 패수(浿水)가에서 쓰다.
흥양(興陽) : 전라남도 고흥지역의 옛 지명이다.
김경능(金敬能) : 김홍집(金弘集, 1842~1896)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능이다. 박규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67년(고종4)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흥양 현감(興陽縣監)이 되었다. 1880년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왔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후 총리대신이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이 세력을 잡자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발표하여 갑오개혁(甲午改革)을 단행하였다. 이후 일본의 세력 확장에 제동을 건 삼국간섭으로 친러파가 기용되자 이에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제4차 김홍집내각을 세웠다. 내각은 일본의 압력을 받아 단발령(斷髮令) 등 과격한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전국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규탄을 받았으며, 1896년 친러파 내각의 탄생과 함께 김홍집내각은 붕괴되었다. 그때 많은 대신들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김홍집도 광화문에서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
보불(黼黻) : 임금의 대례복(大禮服) 치마에 꾸며 놓은 수로, 보(黼)는 흑백색으로 도끼의 모양을 수놓은 것이며, 불(黻)은 검정과 파랑으로 아(亞)자 모양을 수놓은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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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령폭포 관람기〔東泠觀瀑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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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에 있은 지 오래여서 아프고 우울하여 자득하지 못하였다. 6월 병인일에 큰 비가 그쳤다. 예전에 삼각산 아래 동령폭포(東泠瀑布)가 볼만하다고 들었기에 즉시 속히 일어나서 성곽 북문에 이르렀는데 매미소리가 들을 만하였다. 이에 경당자(絅堂子)에게 편지를 보내 함께 가자고 청하니, 심부름꾼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경당자는 이미 먼저 가서 금선사(金仙寺)에서 독서하고 있다고 하므로 빨리 달려갔다.
절은 삼각산 발치에 있는데 맑은 바람과 깨끗한 바위가 그윽하고도 가팔라서 감상할 만하였다. 경당자는 뜻밖에 내가 온 것을 보고 놀라 기뻐하며 신발을 거꾸로 신고 나와 나를 이끌고 바위 위에 앉아 술을 따르고 시를 짓게 하며 종횡무진 고금을 이야기하느라 해가 장차 지려는 것도 몰랐다. 다음날 아침에 함께 더불어 깊은 골짜기를 나와서 아름다운 나무를 그늘 삼고 맑은 계곡물을 끼고 징검다리를 건너 방향을 돌려 동쪽으로 6, 7리를 가서 벽로수정(碧老水亭)에서 쉬었다. 봉우리를 돌고 시내를 구비 돌아 또 5, 6리를 가서 이른바 동령폭포라는 곳을 찾아가니 발이 이미 삼각산의 배에 닿아 있었다.
양쪽 벼랑은 후미지고 큰 바위는 바닥을 이루었다. 벼랑이 높이 선 것은 마치 큰 새가 날개를 펴는 것 같았으니 높이가 여러 장(丈)이 될 만했다. 들쑥날쑥한 산봉우리엔 눈이 흰데 물이 그 속에서 흘러나와 높은 곳에 머물다 쏟아져 내리며 바위를 만나 맑아지고 비를 만나 풍성해지고 줄어들었다가 많아졌다가 낮아졌다가 높아졌다가 하며 그 만나는 곳에 따라 그 기이함을 이루었다. 그런데다가 삼각산 한 모서리가 의젓하게 그 뒤를 감싸니 더욱 사랑스러웠다. 이에 바위에서 술을 마시며 어린애가 불렀던 〈창랑가(滄浪歌)〉를 노래하고 갈치천(葛稚川)의 〈세약지(洗藥池)〉 시를 노래했는데 그곳이 너무 서늘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물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바위틈에 동령폭포(東嶺瀑布)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었다. 내가 경당자와 폭포에 이르러보니 맑은 기운이 좋았으므로 일부러 동령(東泠)이라고 고쳐 썼다. 미타사(彌陀寺)에 이르러 비를 만났으므로 그곳에서 자고, 다음날 세검정에 이르렀다.....
지 못하는 곳이 없고, 바위는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지만 있는 곳에서 편안하다. 이는 자네와 얘기하며 노닐 만한 것이리라. 이에 동령폭포 관람기를 쓴다.
동령폭포(東泠瀑布) : 동령폭포(東嶺瀑布)를 가리킨다. 북한산 평창동 길로 보현봉 방향으로 가다보면 산중턱에 위치해 있다.
경당자(絅堂子) : 서응순(徐應淳, 1824~1880)으로,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여심(汝心)이다. 유신환(兪莘煥)의 문하에서 심기택(沈琦澤), 민태호(閔台鎬), 김윤식(金允植)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1870년(고종7) 음보(蔭補)로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 영춘 현감(永春縣監)을 역임하고, 간성 군수(杆城郡守)로 부임하여 임지에서 죽었다. 이이(李珥)를 존경하여 학행을 닦았고 경서와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대학》과 《중용》에 주력하였다. 저서로는 《경당유고(絅堂遺稿)》 4권 2책이 있다.
금선사(金仙寺) : 지금의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 위치한 사찰로 여말선초(麗末鮮初)때 고승 무학(無學) 대사가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는 목정굴(木精窟)이 관음기도성지로 알려지며, 금선사 농산(聾山)스님과 순조대왕의 탄생설화가 전해지는데, 이를 계기로 1791년 정조의 명으로 기복(祈福)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벽로수정(碧老水亭) : 김난순(金蘭淳, 1781~1851)의 거처에 있었던 정자이다. 벽로는 그의 호이며, 벽곡(碧谷)이라고 사용하기도 했다. 본관은 안동, 자는 사의(士猗)이다. 1804년(순조4)에 진사가 되고, 1813년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검열ㆍ어사 등의 여러 관직을 거쳐 1841년(헌종7)에는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1848년 판돈녕으로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수원부 유수ㆍ형조 판서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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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언 제35권 원집 외편 / 동사(東事)
지승(地乘) 처음에는 지림(誌林)이라 했다가 지승으로 고쳤다. 글의 체재는 대체로 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에 바탕하였으며, 예의와 선속(善俗)을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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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구역(九域)의 땅은 연(燕)ㆍ제(齊) 밖에 있는데 동ㆍ남ㆍ서는 대해(大海)에 접하였고 북은 말갈(靺鞨)에 연하였다.
고구려 말기에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의 땅 7백 리를 잃어 패수(浿水)로 경계를 삼으니, 남북으로 3천 리이며 동서로 1천 리이다. 풍기(風氣)가 다르고 성음(聲音)ㆍ복식(服食)ㆍ기욕(嗜欲)이 중국의 풍속과 같지 않으니 대개 방외(方外)에 있는 별개의 나라이다.
상고 시대 단군(檀君)으로부터 기자(箕子)와 삼한(三韓)ㆍ사군(四郡)ㆍ이부(二府)를 거치면서, 삼국 시대에 이르러 변한(弁韓)ㆍ마한(馬韓)은 백제에 병합되었고, 진번(眞番)에서는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 임둔(臨屯)과 이맥(夷貊)의 땅을 모두 신라에 병합하였으며, 낙랑(樂浪)은 고구려에, 현도는 요동에 각각 병합되었다.
고려가 삼한의 땅을 전부 차지하여 관내(關內)ㆍ중원(中原)ㆍ하남(河南)ㆍ강남(江南)ㆍ영남(嶺南)ㆍ영동(嶺東)ㆍ산남(山南)ㆍ해양(海陽)ㆍ삭방(朔方)ㆍ패서(浿西)의 10도(道)로 나누었다. 뒤에 이를 고쳐 양광(楊廣)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교주(交州)ㆍ서해(西海)ㆍ동계(東界)ㆍ북계(北界)라 하였다.
우리 태종(太宗) 13년(1413)에 경기(京畿)ㆍ경상(慶尙)ㆍ전라(全羅)ㆍ충청(忠淸)ㆍ강원(江原)ㆍ함길(咸吉)ㆍ평안(平安)ㆍ황해(黃海)의 8도로 정하니, 주(州)ㆍ군(郡)ㆍ현(縣)도 이에 의하여 달리 바뀌었으며, 산천의 경계를 달리하고 읍(邑)ㆍ리(里)를 구분하여 백리에 풍속이 같지 않고 천리에 가요가 다르게 되었다.
남방에는 조류(鳥類)가 많고 북방에는 짐승이 많은데 이는 풍기 때문이며, 산협(山峽)은 습속이 순박하고, 이득을 노리는 백성들이 약삭빠른 것은 습성이 그러하여서인 것이다. 동방은 기(氣)가 편박(偏薄)하여 조급하고 경솔하니 변치 않는 마음이 없음도 대체가 모두 그러한 풍기 때문이다.
왕성(王城)은 기내(畿內) 땅으로 본래 마한의 지역이다. 동북은 옛 맥(貊) 땅이며 서쪽으로는 대해(大海)에 닿아 있다. 남양(南陽 지금의 화성(華城) 수원(水原) 지방)에서는 경석(磬石)이 나왔고 해변으로는 염분이 많은 땅이며, 토질(土質)은 벼를 심기에 적당하다. 맥서(貊西 강원도 서북 지방)에서는 콩과 조가 3할이나 산출된다. 왕성이 임금의 손으로 세워졌는데 실제 백제 때에는 남평양(南平壤)이었고, 고려 때에는 남경(南京)이었으며, 왕이 번갈아 살기를 다섯 번 하면서 백성들이 모여든 곳이다.
백성들의 습속은 꼼꼼하고 인색하며 여자들의 길쌈 솜씨가 훌륭하여 옷ㆍ신발ㆍ관디를 잘 만들었다. 사방에서 몰려와 만융(蠻戎)들이 복종하였다. 나라의 제도로 유술(儒術)과 시서(詩書)를 존중하여 선비를 가르치니, 예악(禮樂)의 풍이 있었다.
개경(開京)은 선비와 여자들이 흰옷을 입었으며 성률(聲律)을 숭상하니, 이는 고국(古國)의 풍이었다.
태조가 도읍을 한양(漢陽)에 정하고 호걸(豪傑)과 대족(大族)들을 이사시켰다. 따르지 않아 금고된 자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여 세공(世工)과 세상(世商)이 있어, 중개인이 교역을 하였다. 예부터 풍속이 부처를 섬겨 성품이 인유(仁柔)하고 살생을 싫어하였다. 오강(烏江) 서쪽 앙암(仰碞 장단(長湍) 부근에 있음)에 고려 왕의 사당이 있다. 덕진(德津)은 신라의 북독(北瀆)이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삼각산(三角山)은 화산(華山)이라 하고 중악(中嶽)의 제사를 지냈다.
인조(仁祖) 14년(1636) 남한산(南漢山)에 온조(溫祚)의 사당을 세웠다.
패서(浿西 평안도의 옛 이름)는 조선의 고지(古地)로 그 별[星]은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분야(分野)이며 그 자리[次]는 석목(析木)이다. 예맥(獩貊)과 고구려와 현도가 모두 여기에 속한다. 서쪽으로는 대해에 닿았고 북쪽의 여연(閭延 평북 구성(龜城))과 우예(虞芮 평북 강계(江界))는 말갈에 연하였다. 산출되는 곡물(穀物)로는 굵은 기장과 잔 기장이 있으며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삼(蔘)ㆍ칠(潻)ㆍ동(銅)ㆍ철(鐵)ㆍ피혁(皮革) 등이 있다. 바닷가에서는 벼를 식량으로 하였고 생선과 소금을 팔았다. 용만(龍灣 평북 의주(義州))은 중국으로 가는 길목이며 물화(物貨)가 많이 유통되는 곳이다.
평양은 단군이 나라를 세운 곳으로, 주(周) 나라 때에 기자를 봉한 곳이다. 기자의 가르침이 예속(禮俗)을 중히 여겨 귀신을 공경하고 그릇은 조두(俎豆)를 사용하였다. 부인들은 정신(貞信)하고 음란하지 않았으며, 백성들은 모두 자기가 종사하는 업에 안락하였다. 고구려는 말타기와 활쏘기를 숭상하여 풍속이 굳세고 날래게 되니, 힘자랑하기를 좋아하고 궁시(弓矢)와 도모(刀矛)를 익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평양에는 단군과 동명왕(東明王)의 사당이 있고 기자의 사당이 있는데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토산(兔山)에는 기자총이 있으며 강동(江東)에는 단군총이 있다. 패강(浿江 대동강)은 나라의 서독(西瀆)이어서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영변(寧邊)은 우발수(優渤水) 가의 가섭원(迦葉原)에 있으니, 북부여(北扶餘) 해부루(解夫婁)의 땅이었다. 성천(成川)은 옛 비류(沸流)의 나라로 동부여라고도 하였다. 단군세가에 보인다.
서해(西海 황해도의 옛 이름)는 고조선의 남쪽 경계였다. 지금은 왕기(王畿) 밖의 무(武)를 숭상하는 땅으로, 동쪽은 맥 땅에 연하였고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사(絲)ㆍ마(麻)ㆍ염(鹽)ㆍ철(鐵)과 해산물이 있고 곡물로는 벼 2종과 숙속(菽粟) 5종이 난다.
우리 세종(世宗) 때 해주(海州)에서 기장[秬黍]이 나왔는데, 한 알의 크기가 1푼(分)이었다. 9촌(寸)이 황종(黃鍾)의 길이여서 3푼씩을 덜고 더하여 12율(律)을 완성하였다.
고려 때에는 태사(太師) 최충(崔冲)이 구재(九齋)를 두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는데 그 구재는, 낙성재(樂聖齋)ㆍ대중재(大中齋)ㆍ성명재(誠明齋)ㆍ경업재(敬業齋)ㆍ조도재(造道齋)ㆍ솔성재(率性齋)ㆍ진덕재(進德齋)ㆍ대화재(大和齋)ㆍ대빙재(待聘齋)이다.
염주(鹽州)ㆍ남지(南池)ㆍ장연(長淵)ㆍ사정(沙汀)ㆍ장산(長山) 등의 고을이 있는데 장산은 나라에 소용되는 목재가 산출되는 곳이다. 도서(島嶼)로는 백령(白翎)ㆍ대청(大靑)ㆍ소청(小靑)이 있다. 유주(儒州)와 아사달(阿斯達 구월산 부근)에서는 환인씨(桓因氏)와 신시(神市)와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 당장경(唐藏京)이라는 곳이 있는데, 《고려사》에 단군씨의 국도라 하였다.
중원(中原 충청도 지방)과 하남(河南)은 마한(馬韓)의 땅으로, 백제 온조(溫祚)에 의해 병합되었는데, 서쪽은 대해에 접하였고 동쪽은 높은 산맥에 막혀 있다.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으며, 이 지방 특산물로는 해산물과 임(林)ㆍ칠ㆍ대추ㆍ감ㆍ목면(木綿)ㆍ모시[苧布]ㆍ구리[銅]ㆍ철(鐵) 등이 산출되고, 태원(太原)에서는 유황(琉黃)이, 서주(西州 서천(舒川))와 소태(蘇泰 태안(泰安))에서는 죽전(竹箭)이 산출된다. 풍속은 검색(儉嗇)하며 부인(富人)들이 많았고, 산협의 습속은 화전(火田)을 일구어 조를 심었다. 백성들은 순박하고 바탕이 거개가 좋다.
상당(上黨 청주(淸州))에서는 호걸 준재들이 나왔고, 웅주(熊州) 공주목(公州牧) 에서는 옛 풍속으로 남자는 쟁(箏)과 피리를 연주하고 여자는 노래하며 북을 쳤는데, 백제의 유풍으로 부강하였던 여속(餘俗)들이다. 대체로 강하고 날랜 것을 숭상하여 싸움을 잘하였다.
하남(河南) 위례(慰禮)는 온조의 고도(古都)인데 여기에 온조의 사당이 있다. 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때에 이르러 남평양(南平壤 즉 한산(漢山)을 말함)에서 웅주(熊州)로 천도하였고 명농(明禯 백제 26대 성왕(聖王))이 즉위하여 또 사비(泗沘)로 도읍을 옮겨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라 하였다. 웅진(熊津)에는 나라의 남독(南瀆)이 있어, 중사(中祀)에 실려 있다. 소태(蘇泰) 지금의 태안군이다. 서쪽에 있는 도서로 상산도(上山島)와 북파도(北波島)가 있으며 그 밖으로 전횡도(田橫島)가 있다.
강남(江南)과 해양(海陽) 강남은 지금의 전주이고, 해양은 지금의 광주이다. 은 본래 마한의 땅으로 서남쪽이 바다에 접하였다. 소금ㆍ철ㆍ해산물ㆍ귤ㆍ유자ㆍ치자ㆍ비자(榧子)ㆍ죽전(竹箭) 등의 특산물이 산출된다. 해안 습속이 농사에는 힘쓰지 않고 고기 잡는 것으로 업을 삼았으며, 쌓아 두는 법이 없다. 강남에서는 닥나무ㆍ칠(潻)ㆍ매실ㆍ석류(石榴)ㆍ왕골ㆍ모시ㆍ파초ㆍ생강ㆍ짚ㆍ연[荷]ㆍ울금(鬱金) 등이 산출된다.
금마(金馬 익산(益山))에서는 순후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니, 고국(古國)의 유풍이며, 김제(金堤)에는 5개의 거독(渠瀆)이 있어 논 9800결(結)이 모두 기름진 땅으로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전주(全州)는 강해(江海)의 도회(都會)이고 화물을 실어 나르는 통로로 상인들이 모여드는 곳이므로, 이해에 밝아 백성들이 순박하지 못하다. 대방(帶方 남원)은 사람들이 날래며 말 타고 활쏘기를 숭상하였다.
청거(淸渠) 지금의 용담현(龍潭縣)이다. 의 동쪽 지방은 백성들이 질박하여 꾸밈이 적었으며, 도토리와 상수리를 길렀다. 승라(昇羅) 승평(昇平)과 나주(羅州) 는 풍속이 부려(富麗)한 것을 숭상하였고 남자답게 씩씩한 것과 특출나게 기운 쓰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담주(潭州) 담양부(潭陽府) 에는 준재(俊才)가 많다고 한다.
용안(龍安 지금의 익산군)에서는 옛 풍속으로 해마다 봄과 가을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는데, 거기서 서약하기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 형제간에 우애 없는 자, 친구 간에 신용이 없는 자, 나라의 정사를 헐뜯는 자, 관리에게 불손한 자는 모두 내쫓고, 덕업(德業)에 힘쓰고 잘못을 바로잡으며, 환난(患難)을 구휼하여 예속(禮俗)을 이루어, 두터운 데로 함께 돌아가자.”
하고는, 모두 재배(再拜)하고 나이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술을 마신다. 대체로 금마(金馬) 이남에서는 무당, 광대, 요사스러운 기예[淫技]와 여러 가지 놀이를 좋아하였다.
군산(群山 만경현(萬頃縣) 서쪽 바다에 있는 섬)은 바다 가운데 있는, 주위가 60리 되는 섬이며 후미진 곳이 있다. 변산(卞山)에서는 궁실(宮室)과 주거(舟車)를 만드는 데에 소용되는 목재들이 산출되고, 나주(羅州)에는 남해신사(南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대방(帶方) 남원부(南原府) 에는 남악사(南嶽祠)가 있다. 《상서(尙書)》 대전(大傳)에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제사(祭祀) 지낼 때, 오악(五嶽)은 삼공(三公)에, 사독(四瀆)은 제후(諸侯)에, 그 나머지는 백(伯)ㆍ자(子)ㆍ남(男)에 준하는 예로 한다.”
하였다. 이는 그 희생(犧牲)과 폐백(幣帛), 그리고 변두(籩豆 제기)와 작헌(爵獻)의 수를 말함이다. 제후는 자기가 통치하는 지역 안에 있는 명산대천에 제사 지낸다.
《예기(禮記)》에 “삼왕(三王)이 내[川]에 제사할 때 모두 하(河)에 먼저 하고 뒤에 해(海)에 한다.” 하였다. 그래서 진인(晉人)은 하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호지(惡池)에 먼저 하였으며, 제인(齊人)은 태산(泰山)에 제사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배림(配林)에 먼저 하였다. 종사(從祀 덧붙여 지내는 제사)에 먼저 고하는 것은 대신(大神)을 높이고자 해서이다. 산천(山川)에 제사할 때 해악(海嶽)을 가장 높이는데, 지금 사독(四瀆)에는 중사(中祀)를 하면서 해악에는 소사(小祀)를 함은 예를 잃은 처사라 하겠다.
탁라(乇羅)는 남해(南海) 가운데의 나라로 폭이 4백 리인데, 곡식으로는 보리ㆍ기장ㆍ차조가 잘 된다. 땅이 척박하여 백성들이 가난하며, 사람들은 미련하고 순박하며 습속은 검소하다. 3대 2의 비율로 여자가 많고 대부분 오래 산다. 좋은 말이 나고 감귤(柑橘)ㆍ대모(玳瑁)ㆍ진주[蠙珠]ㆍ치자나무ㆍ박달나무가 산출된다. 신라 때 고후(高厚)라는 자가 내조(來朝)하여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받았다. 고려 초에 와서 제주(濟州)를 설치하였다.
대령(大嶺 대관령)의 남쪽은 옛 진한(辰韓)의 땅으로 예맥(獩貊) 남쪽에 있는데 신라가 나라를 천 년 동안 이어오면서, 정전법(井田法)을 개시하고 국학(國學)을 세우며 사전(祀典)을 찬수(撰修)하고 설총(薛聰)이 구경(九經)의 구결을 지었다. 풍속이 순후하고 예양(禮讓)을 알아, 군자의 나라로 불려졌다. 동남쪽은 바다에 접하였고 서북쪽은 산으로 막혀 있으며, 땅이 비옥하여 오곡이 안 되는 것이 없다. 이 지방의 특산물로는 생선ㆍ소금ㆍ동ㆍ철ㆍ은ㆍ돌ㆍ닥나무ㆍ칠ㆍ죽전ㆍ매실ㆍ귤ㆍ석류 등이 있다. 장산(萇山 지금의 동래(東萊))에서는 일본과 통상하여 만이(蠻夷)의 여러 가지 물화(物貨)를 사들였다.
낙랑(樂浪 경주의 옛 이름)은 오래된 나라의 옛터다. 토양(土壤)이 기름져 수확이 다른 데에 비하여 배나 되며 부자들이 많다. 검소함을 숭상하며 물자가 많고 풍요하여 상점들이 즐비하게 시장이 섰다. 패서(浿西)의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한 것에 비견하여 낙랑을 동경(東京)이라 칭하였다.
진양(晉陽 진주)은 사치와 부를 숭상하였고 경산(京山 성주)은 여공(女工)이 우수하였으며 영해(寧海)는 명주실과 오동나무가 유명하였으니, 이 모두가 부유하였던 낙랑의 여속(餘俗)이다. 왕왕 현인(賢人)들의 교화(敎化)가 있어 인(仁)과 의(義)를 흠모하며 선속(善俗)을 편히 여기고 나쁜 짓 하는 것을 어렵게 여겼다. 산협 가까이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힘써 밭갈이하고 절약하여 종자와 식량을 쌓아 두었다. 바닷가 풍속은 거칠며 염치가 적었고 무당의 저주하는 일을 숭상하였다. 북악(北嶽)ㆍ송얼(松孽)ㆍ빙혈(氷穴)ㆍ조천(潮泉)ㆍ합포(合浦)ㆍ월영(月影)이 있는데, 그 거리는 9072만 8천 척 남짓하다. 낙랑에는 혁거세(赫居世)와 사소(娑蘇 혁거세의 모)의 사당이 있으며 섬으로는 염전도(鹽田島)와 절영도(絶影島)가 있는데, 거기에서는 좋은 말이 나왔다. 그 밖으로 대마도(對馬島)가 7백 리 거리에 있다.
교주(交州) 회양부(淮陽府) 의 동쪽 경계는 옛 예맥의 땅인데, 옥저에서 고구려까지이고 남쪽은 모래바다[沙海] 천 리에 접하였으며, 서쪽은 맥 땅인데 산이 많고 땅이 척박하다. 나는 곡식은 콩ㆍ보리ㆍ굵은 기장ㆍ잔 기장이며, 평원에서는 벼를 심어 축적하였고, 해변에서는 물고기와 소금을 팔았다. 큰 못이 많아 고둥[螺]과 대합[蛤]을 먹었다. 해안 지방에서는 죽전(竹箭)이 많이 났고 산협(山峽) 가운데에서는 사(絲)ㆍ마(麻)ㆍ임(林)ㆍ칠(漆)ㆍ삼(蔘)ㆍ당귀[歸]와 여러 가지 약재(樂材) 및 자단(紫檀)이 산출되었다. 맥 땅의 풍속은 어리석고 기욕(嗜欲)이 적으며 염치를 알아,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하지 않았다.
정선(旌善)은 효제(孝弟)의 고을이라 불렸고, 명주(溟州)는 예국, 수춘(壽春 춘천)은 맥국의 땅이다. 양양(襄陽)에는 해상(海上)에 동해신사(東海神祠)가 있어 소사(小祀)를 지냈으며, 평원(平原 원주) 치악산(雉嶽山)에는 동악사(東嶽祠)가 있다. 동주(東州 철원) 풍천원(楓泉原)은 궁예(弓裔)가 웅거하던 곳으로, 넓은 들이 3백 리에 사방이 막혀 험조가 많고 탁천(濁川)이 있다. 울진(蔚珍)에서 동쪽으로 바다 가운데에는 울릉(鬱陵)과 우산(于山)이 있다.
삭방(朔方 함경도)은 옥저 땅으로,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한다. 개마(盖馬)에 있는데 동으로는 발해(渤海)에 닿아 있고, 북으로 읍루(挹婁)에서 남으로 예맥까지 천여 리가 된다. 백성들의 습속은 질박하나 강건하고 날래며 이해(利害)에 밝고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특산물로는 어염(魚鹽)ㆍ사(絲)ㆍ마(麻)ㆍ피혁ㆍ은(銀)ㆍ석(石)ㆍ유황(琉黃)이 있다. 북방에는 좋은 말이 많다. 옥저는 셋이 있는데, 동옥저ㆍ북옥저ㆍ남옥저이다.
읍루(挹婁)는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의 별칭) 북쪽에 있는 옛 숙신(肅愼)의 땅이다. 땅이 비옥하여 밭곡식이 잘되었으며, 용력(勇力)을 숭상하였다. 추운 지대여서 굴속에서 살았다. 활의 길이가 5척이며 호시(楛矢)와 석촉(石鏃)은 8촌이다. 옥저와 풍속이 같다.
말갈 지역에 있는 삭방(朔方)ㆍ함관(咸關) 이북은 고려 때 동여진(東女眞)이 웅거하던 곳이었는데, 이를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이 토벌하여 쫓아냈다. 뒤에 화주(和州) 이북이 배반하여 원(元) 나라로 들어가자, 유인우(柳仁雨)가 쳐서 평정하고 다시 화주(和州)ㆍ등주(登州)ㆍ정주(定州)ㆍ장주(長州)ㆍ예주(預州)ㆍ고주(高州)ㆍ문주(文州)ㆍ의주(宜州)의 8주(州)를 두었다. 또 뒤에 이들은 원 나라에 몰락되었다.
우리 태조(太祖)가 북쪽 변경을 정할 때 두만강(豆滿江)으로 경계를 삼아 공주(孔州)ㆍ경주(鏡州)ㆍ길주(吉州)ㆍ단주(端州)ㆍ청주(靑州)ㆍ홍주(洪州)ㆍ함주(咸州)의 7주를 두었다.
지원(地員)과 화식전(貨殖傳) : 지원은 《관자(管子)》의 편명이고, 화식전은 《사기(史記)》의 편명이다. 모두 인문 및 경제의 지리서이다.
북독(北瀆) : 나라에 4독이 있다. 남독은 웅진(熊津)이니 지금의 공주(公州)이며, 중독은 한강(漢江)이며, 서독은 덕진(德津)이니 장단(長湍)에 있는데 이것이 신라 때의 북독이었다. 《東國輿地勝覽》
중사(中祀) : 풍운뇌우악해독(風雲雷雨岳海瀆) 및 공자(孔子) 사당(祠堂), 역대 시조(歷代始祖) 등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를 대사(大祀)ㆍ중사(中祀)ㆍ소사(小祀)로 구분하여 사전(祀典)에 실어 놓았는데, 대사는 종묘(宗廟)ㆍ영녕전(永寧殿)ㆍ사직(社稷)에 지내는 것이고 소사는 마조(馬祖 천사성(天駟星)의 별칭)ㆍ선목(先牧 처음 말을 먹인 사람)ㆍ마사(馬社 처음으로 말을 탄 사람을 배향한 곳)ㆍ마보(馬步 마신(馬神)의 이름)ㆍ영성(靈星)ㆍ노인성(老人星)ㆍ명산(名山)ㆍ대천(大川) 등에 지내는 제사이다. 《大典會通 禮典》
중악(中嶽) : 나라에 4악이 있었는데, 남악은 지리산, 중악은 삼각산, 서악은 송악산, 북악은 비백산(鼻白山)이다. 《東國輿地勝覽》황종(黃鍾) : 음률(音律)의 이름으로 12율의 하나이며 육률 육려(六律六呂)의 기본음이다.
온조의 3대인 문주(文周) : 온조는 백제의 시조이고 문주는 백제의 22대 왕이다. 그 상거가 5백여 년인데 ‘온조의 3대인 문주’라 함은, 원문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5개의 거독(渠瀆) : 논에 물을 대기 위한 5개의 봇도랑으로, 수여(水餘)ㆍ장생(長生)ㆍ중심(中心)ㆍ경장(經藏)ㆍ유통(流通)이다. 《東國輿地勝覽》
흑치열전(黑齒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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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치란 동해의 오랑캐 나라다. 창해(滄海) 동쪽 발해(渤海)의 밖에 있으며, 일본왜(日本倭)라고도 한다. 진 시황(秦始皇) 때 서불(徐巿)이라는 자가 동남동녀(童男童女) 5천 명을 데리고 바다로 가서 삼신산(三神山)의 불사약을 구하겠다고 청하였는데, 이들이 흑치의 별종이 되었다.
상고(上古)에 환무(桓武)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가 환무 천황이다. 그는 맏아들과 맏손자에게 대를 전하였다. 매달 15일 이전에 재계하고 하늘에 예(禮)를 드렸으며 조빙(朝聘)에 참여하지 않으면 토벌하였다. 모든 명령을 내는 일은 관백(關白)을 두어 주관하게 하였다. 나라 안에 영(令)이 내리면 이를 ‘명교(明敎)’라 칭하였고 임금이나 마찬가지로 두려워하였다. 관백이란 귀한 신하로서 국령(國令)을 쥐고 있는 자이다.
흑치에는 예로부터 성씨(姓氏)가 없었는데, 제(齊)ㆍ양(梁) 때에 와서 산성주주(山城州主) 윤공(允恭)이라는 자가 처음으로 성씨를 칭하였다. 등씨(藤氏)가 가장 먼저였고 평씨(平氏)와 원씨(源氏)가 다음이었으며, 환무의 자손은 평씨와 원씨로 되었다 한다. 이 삼성(三姓)이 모두 대성(大姓)인데, 원씨가 가장 성하였다. 원뇌조(源賴朝)의 부조(父祖) 이상에 귀신(貴臣)ㆍ관백(關白)ㆍ장군(將軍)이 많았다. 원씨에 6족(族)이 있는데, 청화(淸和) 원씨ㆍ태화(太和) 원씨ㆍ본원(本源) 원씨ㆍ겸창(鎌倉) 원씨ㆍ신전(新田) 원씨ㆍ족리(足利) 원씨로 모두 정순친왕(貞純親王)을 근본으로 한다.
태화족의 무리는 뇌신(賴信)으로 조상을 삼고, 본원족의 무리는 뇌친(賴親)으로 조상을 삼았는데, 이 2족은 귀인이 많기 때문에 이름이 났다. 뇌친은 뇌광(賴光)과 뇌의(賴義)를 낳고, 뇌광은 의가(義家)를 낳고, 의가는 위의(爲義)를 낳고, 위의는 의조(義朝)를 낳고, 의조는 뇌조(賴朝)를 낳고, 뇌조는 뇌가(賴家)와 실조(實朝)를 낳았다. 실조의 13세에 도의(道義)가 있으니, 호를 녹송원(鹿松院)이라 하는 자다. 도의의 3세손에 의성(義成)이 있고, 의성이 의정(義政)을 낳으니, 명 나라 성화(成化) 연간에 국왕이라 칭한 자이다.
가강(家康)이란 자는 의정의 11세손으로 차분한 성격에 의지가 굳으며 지혜가 많고 용병(用兵)을 잘하였다. 평행장(平行長)과 관원(關原)에서 서로 대치하였을 때 행장의 군사는 70만이고 가강의 군사는 20만이었다. 가강은 행장에게 항복을 청하면서,
“결박을 짓든지, 사로잡든지, 유배시키든지 명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행장은 본시 가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렇게 되니 더욱 교만해져 마침내 나태해졌다. 이에 가강이 자기의 군사를 나누어, 1군은 급히 강을 건너 상류를 먼저 점거하게 하고, 자신은 다른 1군을 거느리고 행장의 군사가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하류에서 곧장 그들에게 충돌하니, 행장의 군사가 어지럽게 되었다. 이때 강 상류에 있던 군사와 합세하여 그들을 크게 격파하니 행장이 죽었다.
가강이 수뢰(秀賴)를 공략하려 하였으나, 대판(大板)은 성이 험하고 군사가 강하여 수뢰와 강화(講和)할 것을 약속하고 몰래 기묘한 계략을 써서, 그 성을 불태워 마침내 멸하고 그를 대신하였다.
처음에 평씨와 원씨가 군사를 일으켜 강대함을 다투었는데, 뇌조 때에 이르러서 원씨의 군사가 더욱 강대하여졌다. 만력(萬曆) 연간 수길(秀吉)에 이르렀는데, 수길은 생김새가 개[狗]를 닮아, 자기의 생김새가 도참(圖讖)에 응한다 하여 강대함을 뽐내어 천하를 전부 차지하리라 생각하였다.
길을 빌릴 터이니 경내(境內)를 치워 달라 하고는, 조선(朝鮮)을 쳐 잇달아 승리하였으나, 평양(平壤)에 이르러 요동군(遼東軍)에게 격파당했고 또 직산(稷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그때 명 나라는 황제가 군사를 크게 출동시켜 왜를 정벌하였는데, 이를 전후하여 남북에서 관병(官兵) 20여 만을 징발하니, 수길의 형세가 이미 궁하여졌다. 또 조선의 군사와 바다에서 크게 접전하여 두 번 싸워 두 번 다 패하였다. 이해에 수길이 죽고 수뢰가 새로 섰다. 그런데 국인들이 내반(內叛)하므로 가강이 이를 이용하여 수뢰를 격멸하였다.
흑치는 7도(道) 61주(州) 611현(縣)이다. 동쪽으로는 육오(陸奧)에 이르렀고 서쪽으로는 비전(肥前)에 닿아, 그 거리가 4150리이며, 남쪽으로는 기이(紀伊)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약협(若挾)에 이르러, 그 거리가 880리이다.
3보(步)가 1간(間)이며 60간은 1정(町)이 되는데, 정(町)마다에 관리를 배치하였고 정으로 전(田)을 계산하면, 전은 128만 1940정이 된다. 정(町)을 단위로 하여 군사를 뽑는다.
그들의 풍속은 귀신을 믿고 부도(浮屠)를 섬겼으며, 남자는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고 부인(婦人)은 머리를 늘어뜨렸으며, 남녀 모두 긴 겉옷을 입는다. 귀인(貴人)은 이빨에 검은 칠을 하며 부인도 그랬다. 그래서 검은 이빨[黑齒]의 오랑캐라 하였다. 맨발과 민둥머리에 무릎으로 걸어 배를 땅에 대고 기는 것이 공손한 것이며, 배례하는 법이 없다.
성품은 음교(淫巧)와 기기(奇技)와 재물을 좋아하였으며 남쪽의 오랑캐 잡종들과 통상하여 이(利)를 취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죽음을 가볍게 여겨 치고받고 칼 휘두르기를 좋아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살마(薩摩)의 풍속이 가장 강포(強暴)하고 살생(殺生)을 좋아하였다.
육오(陸奧)에서는 금(金)이 생산되고 번마(幡摩)에서는 동(銅)과 철(鐵)이 생산된다. 비전에서는 창, 명호(鳴護)와 미장(尾張)에서는 칼, 이풍(二豊)에서는 갑옷, 북륙(北陸)과 산음(山陰)에서는 피혁(皮革)들이 생산된다. 좋은 나무와 이상한 풀 그리고 노귤(盧橘)ㆍ종려(棕櫚)ㆍ비파(枇杷)ㆍ소철(蘇鐵) 등이 생산되고 호랑이와 표범은 없다.
육오의 밖은 하이(蝦夷)이며 하이의 밖은 야인(野人)인데, 진흙 땅 4백 리로 경계되었다. 일기(一岐)에서 동쪽은 모두 동산(童山)으로 초목이 없으며 백산(白山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산)이어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1400리이다.
마도(馬島)에서 적관(赤關)까지 사이에는 삼대해(三大海)가 있다. 담로도(淡路島), 동해도(東海道), 남해도(南海道), 대륙 여러 주는 모두 작은 바다에 둘러싸여 있다. 적관에서 5백 리에 대판(大板)이 있고 대판에서 동쪽으로 7백 리 떨어져 강기(岡崎)가 있다. 그곳에 금절하(金絶河)가 있는데, 너비는 10리나 된다. 그 북쪽에 부사산(富士山)이 있는데, 이 산이 흑치의 진산(鎭山)이다. 정상(頂上)까지 80리이고 그 위에 깊은 못[泓]이 있으며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다.
준하주(駿河州)는 가강의 구도(舊都)로, 암조(巖阻)가 절험(絶險)한 곳에 의지하여 있으며 해안(海岸)에는 모두 잔도(棧道)를 만들어 놓았다. 부사산 남쪽 산기슭에는 국령(菊嶺)ㆍ석령(石嶺)ㆍ금곡(金谷)이 있는데, 그 물이 급히 흘러 이곳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상근령(箱根嶺)은 험조하고 1백 리를 떨어져 소전원(小田原)이 있다. 북조(北條)가 웅거하던 곳으로, 지세의 견고함을 믿고 불복하였으나 수길이 토벌하여 병합하였다. 여기서 2백 리 떨어져 강호(江戶)가 있는데, 그 암조함을 의지하여 육향(六鄕)의 흑전(黑田)이 모인다. 가강은 처음 준하에 도읍하였다가 뒤에 무장(武藏)으로 옮겼고, 원씨는 세 번 천도(遷都)하여 강호로 왔다. 조선에서 국경을 나서서 수륙으로 4천 리를 가면 강호에 이른다.
흑치에는 3대 도읍지가 있다. 그 첫째는 산성주(山城州)로, 가장 오래되어 멀리는 윤공(允恭) 때부터이며 그전은 알 수가 없다. 땅은 비옥하며 하해(河海)의 요충지에 있어 주거(舟車)가 폭주하며 거리가 통달되었다. 둘째는 대판으로, 하해(河海)를 의지하고 있어 일명 난파(難波)라 한다. 성의 치첩(雉堞)이 산과 같았고 큰 강물을 끌어 호(壕)를 만들었으니, 금성탕지(金城湯池)라 할 만하다. 이곳을 수길의 서도(西都)라고 한다. 셋째는 강호(江戶)로, 기름진 땅이 천 리이며 사방이 험조하니, 참으로 천부(天府)의 땅이다. 북쪽으로 육오와 서쪽으로 산성주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여 리가 되며, 3도(都) 중에 가장 토지가 비옥하다.
나라 안의 여러 추장(酋長)들이 무력으로 강대함을 다투어 서로 병탄하다 멸망하였는데, 원씨(源氏)만이 수백 년을 장구하게 이어온 것은 특별히 지모가 뛰어나서 그러한 것이 아니고 지리(地利)가 견고해서인 것이다.
중국 구주(九州)의 사방도 풍기(風氣)가 각기 다르고 성음(聲音)ㆍ요속(謠俗)ㆍ기욕(嗜欲)이 같지 않은데 하물며 해외에 떨어져 성교(聲敎)가 미치지 못하는 구호격설(狗嘷鴂舌 개나 새가 짖는 것 같은 야만인의 말)의 지역이겠는가? 그러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싫어하는 인성(人性)은 같다. 이제 일본의 왜가 유서(儒書)를 구하고 조두(俎豆)와 예속(禮俗)을 알려고 하니, 오랑캐로서 장한 일이라 하겠다.
하이(蝦夷) : 인종명으로 옛날 관동(關東)에서부터 오우(奧羽) 및 북해도(北海道)에 걸쳐 살았다. 지금도 북해도와 화태(樺太)의 일부에 살고 있다.
삼대해(三大海) : 명호해(鳴戶海)ㆍ기담해(紀淡海)ㆍ명석해(明石海)이다.
육향(六鄕) : 왕기(王畿)의 교내(郊內)인데, 대사도(大司徒)가 장악하고 있는 행정 구획이다. 즉 향(鄕)ㆍ주(州)ㆍ당(黨)ㆍ족(族)ㆍ여(閭)ㆍ비(比)를 말한다
기언 별집 제8권 / 서(序)
동명(東溟) 《해사록(海槎錄)》의 서 정유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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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중흥(中興)이 되자 흑한(黑漢)과 절교하고 일본과 통하였다. 공이 조정에 선발되어 절월(節鉞)을 받들어 해외의 먼 나라에 사신 갔는데, 금상(인조) 14년 8월 11일(임오)이었다. 그해 12월 12일(임오)에 일본의 국도(國都)이 도착하니 그들의 우두머리가 인도하여 당(堂)에 올라서 전명(傳命)하는 예를 거행하였는데 예절이 공손하였다. 일본 국경에 들어갈 때부터 길을 쓸고 관사(館舍)를 수리하였으니, 존대하는 예의가 매우 융숭하여 연회로 말미암아 날마다 수만 금을 소비하였다. 집정(執政) 이하가 문에 들어오면 칼을 풀고 신을 벗은 다음 공경하게 예를 행했으며, 관제(官制)와 복색(服色)에 대한 일을 물었다. 일본 사람이 시ㆍ서ㆍ예ㆍ의에 대한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해외 사람이 지금에야 군자의 말을 들었다.”
하였다. 그때에 조흥(調興)이 날로 반간(反間)하여 우리에게 백단으로 원망을 얽어 일이 급해졌는데, 이때에 와서는 우리를 감히 다시 엿보지 못하였다. 돌아올 때에 그 우두머리가 수천 금을 선물하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또 객관의 연회에 썼던 온갖 수용의 나머지로 황금 170덩이를 노자라는 명목으로 주므로 받기는 했으나 금절하(金絶河)에 와서는 옅은 물에 던지면서,
“쓸 수 있는 것을 쓸 수 없게 하고 싶지 않고, 재물로 취함이 없음을 보일 따름이다.”
하였다. 또 일기에 기재된 것은 지리(地理)의 험함과 멀고 가까움, 백성의 많고 적음과 풍속ㆍ물산의 다름에 대한 것들인데, 대강만 들어본다.
일기(壹岐)에서 동쪽은 모두 초목이 생장하지 않은 민둥산이고, 백산(白山)이어서 1천 4백 리까지는 민가(民家)가 없다. 마도(馬島)에서 적간관(赤間關)까지가 3백 리인데 그 사이에 큰 바다가 셋이다. 적관에서부터 비로소 육지이고, 배는 모두 바닷가로 다닌다. 하진(下津)을 지나면 평수길(平秀吉)이 관방(關防)을 만든 곳으로 큰 성(城)이 세 개가 있는데, 두 개는 가강(家康)이 빈터로 만들어 버렸다. 실진(室津) 앞바다에서는 번마(幡摩 파마(播磨))의 민가가 바라보이며 누첩(樓堞)이 1백 리나 되었다. 담로(淡路)와 동남 해도(東南海道)의 대륙(大陸) 여러 주에도 각각 작은 바다가 둘러 있다. 구주(九州)ㆍ사주(四州)ㆍ산양(山陽)ㆍ산음(山陰)ㆍ장문(長門)ㆍ주방(周防)이 멀리 또는 가까이 서로 마주했는데 박다(博多)와 적관(赤關)이 가장 가깝다. 대판(大阪)이 5백 리인데 지세가 강과 바다의 요충(要衝)을 차지하였고 산성주(山城州)라 이르는데 실로 사방으로 통한 도회이다. 수길이 복견(伏見)과 대판을 동서도(東西都)로 만들었다 한다.
그 나라 선대에 환무(桓武)란 임금이 있어 여기에 도읍했는데 그를 환무천황(桓武天皇)이라 이르며, 맏자손이 전승(傳承)한다. 매월 15일 전에 재계(齋戒)한 다음, 하늘에 절하고 조빙(朝聘)과 토벌(討伐)하는 일에는 간예하지 않는다. 모든 정령을 내는 일은 관백(關白)이 실상 주장하는데, 관백이란 것은 국명(國命)을 집행하는 대신으로서 감히 왕이라 일컫지 못하며, 그 문서에도 ‘명교(明敎)’라 일컫고 ‘어(御)’라 일컬을 뿐이다. 옛날에 천황의 자손이 원씨(源氏)와 평씨(平氏) 두 성(姓)을 받았는데, 두 성의 조상은 실상 한 사람이라 한다.
산성주 3백 리에 두 영(嶺)이 있는데, 절통(絶通)과 마침(磨針)이라 한다. 영을 넘으면 비파호(琵琶湖)인데 둘레가 수백 리이고, 그 밖의 큰 들이 근강(近江)ㆍ대화(大和) 지역이다. 또 2백 리를 가면 명호(鳴護)인데 땅이 비옥하고 인호가 6만이며 좋은 칼이 산출(産出)된다. 대판 동쪽에서 강기(岡崎)까지 7백 리인데 그사이에 작은 영이 셋이 있고, 적판(赤板)에 이르면 비로소 산과 시내, 언덕과 골짜기가 있다. 50리를 더 가면 금절하(金絶河)를 건너게 되는데, 물의 너비가 10리이고,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부사산(富士山)은 맨 꼭대기까지 80리이다. 그 위에는 깊은 못이 있고 사철 눈이 있다. 괘천(掛川)을 건너면 큰 영이 셋이 있어, 석령(石嶺)ㆍ국령(菊嶺)ㆍ금곡(金谷)이라 하는데 모두 부사산 남쪽 기슭이다. 부사산 줄기는 육오(陸奧)에서 온 것인데, 육오 너머 하이(蝦蛦)는 우리나라 아주 북쪽 야인(野人)의 경계이며 진흙 수렁이 4백 리이다.
준하주(駿河州)는 관동(關東) 지방의 큰 도회지로 가강(家康)의 옛 도읍인데 깊은 골짜기로서 바위가 많으며 해안(海岸)은 모두 잔도(棧道)이다. 부사산의 물이 급히 흐르다가 여기에 와서 바다에 들어가는데 이를 부사천이라 한다. 삼도(三島)를 지나서 상근령(箱根嶺) 40리를 올라가면 위에 10리 호수가 있고, 영을 내려가는 데가 또 40리이니 관방(關防)의 견고함은 천연으로 강호(江戶)를 보호한 것이었다. 상근호(箱根湖)에서 40리를 가면 소전원(小田原)에 이르는데 상모주(相模州) 지역이다. 그전에 북조(北條)가 여기에 웅거하여 견고함을 믿고 복종하지 않으므로 수길이 정벌하여 합병(合倂)하였다. 여기서 강호까지는 2백 리이며 바닷가에 비옥한 들이 6백 리이다. 사방이 험고하게 막혔고 바닷물이 통해서 이 중 해자[壕]를 만들었는데, 아주 굉장하고 매우 화려한 시가가 15리나 되고, 일광산(日光山)과 거리가 3백 리이다.
우리 부산포(釜山浦)에서 강호까지는 수로(水路)와 육로의 정(町)이 4천 리이니, 일본 사람은 직로(直路)를 정이라 이른다. 일본은 발해(渤海) 동쪽에 있어, 7도(道) 66주(州) 6백 11현(縣)이다. 동쪽 끝은 육오(陸奧)이고 서쪽 끝은 비전(肥前)인데 4150리이고, 남쪽 끝은 기이(紀伊)이고 북쪽 끝은 약협(若狹)인데 880리이며, 육오 밖의 하이는 3백 리이다. 3보(步)가 간(間)이고 60간이 정(町)이다. 정에 이(里)를 두며, 정으로써 병정(兵丁)을 계산하는데 전지가 1백 28만 1천 9백 40정이고 병정은 20만 6천 8백이다.
귀신을 믿는 풍속이 있고, 부도(浮屠)를 섬겨서 청정(淸淨)한 것을 좋아하고, 경학(經學 불경)을 변론(辯論)하며 돈오(頓悟)를 종지(宗旨)로 삼는다. 남자는 머리털을 깎고 여자는 머리털을 틀어 올리며 남녀가 모두 오자(襖子)를 입는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이[齒]에 옻칠을 하며 부인도 이를 옻칠하므로 ‘흑치(黑齒) 오랑캐’라 부른다. 맨발에다 머리를 빨갛게 내놓고, 무릎으로 엉금엉금 기는 것을 공경하는 예절로 삼고, 배례(拜禮)는 없다. 남의 말을 가볍게 믿고 쉽게 성질을 내며, 치고 찌르기를 좋아하는데, 그중에 살마(薩摩)의 풍속이 가장 강포하여 죽이기를 좋아한다. 마도(馬島)는 간사하고 거짓이 많아서 그 나라 사람도 천하게 여긴다. 육오에는 금이 생산되고, 번마(幡摩)에는 동(銅)과 철(鐵)이 산출되며, 비전에는 창[矛], 미장(尾長)에는 칼, 이풍(二豊)에는 갑옷, 북륙(北陸)ㆍ산음(山陰)에는 피혁(皮革)이 생산된다. 그 다음 좋은 나무와 기이한 풀로는 노귤(盧橘)ㆍ종려(椶櫚)ㆍ비파(枇杷)이고, 범이나 표범은 없다.
이것은 모두 사해 밖을 박람(博覽)한 것이니, 어찌 사신 일만 엄하게 하였을 뿐이겠는가. 먼 나라에 사신 가는 자가 알아둘 만한 것이기에 적어서 ‘동명학사 해사록 서문’으로 한다.
금상(효종(孝宗)을 말함) 8년 현월(玄月 음력 9월의 별칭) 상순(上旬).
종려(椶櫚) 온대성 야자수. 원산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대략 중국 대륙 남동부, 일본 규슈 지역, 동남아시아 일부(미얀마 남부, 베트남, 부탄), 네팔, 인도 북부 중 하나로 추정되며 겨울에 한파를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는 수종인지라 한반도의 남해안 지역인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창원시, 통영시+거제시, 사천시, 진주시, 전라남도 완도군, 여수시, 순천시 일대와 동해남부인 경상북도 포항시[1] 및 울산광역시, 서해남부인 전라남도 목포시, 신안군과 그 주변인 광주광역시 그리고 제주도에서도 당종려, 혹은 왜종려를 들여와 가로수나 학교 같은 곳의 정원수로 심어 놓은 것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인용 나무위키)
비파(枇杷)중국의 호북성(湖北)과 사천성(泗川) 남부가 원산지 상업적 품종은 대부분 일본에서 개발
기언 제37권 원집 / 척주기사(陟州記事)
배를 만들어서 곡식을 수송하는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장계[鑿舟漕粟不便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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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東海)는 바람과 파도가 사나워 배와 노의 제도가 서해나 남해 같지 않습니다. 몇 아름드리 통나무를 파서 반으로 쪼개 이 두 쪽을 합하여 배를 만들며, 높은 돛이나 큰 노를 사용하지 않고 파도를 타고 들락날락하면서 고기잡이를 합니다. 동해에는 언제나 거센 바람이 많이 불고 때로는 바람이 없는데도 물결이 일곤 하는데, 이런 것을 ‘해악(海惡)’이라 합니다. 해악이 되면 고기잡이를 할 수 없습니다. 동해는 동ㆍ남ㆍ북쪽이 끝이 없으며 언제나 풍랑(風浪)이 언덕에 들이쳐 열 길씩이나 솟아오릅니다. 서풍이 불 때만 바다가 조용해지나 바다가 동요할 때는 서풍이라도 아주 사납습니다. 북풍은 더욱 두려운데 이따금 고기잡이하는 자가 갑자기 그 바람을 만나게 되면 배가 표류하거나 침몰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만약 서해나 남해의 배를 동해에 갖다 놓는다면 배가 아무리 완벽하고 크더라도 여지없이 파손되어 배가 크면 클수록 더 빨리 뒤집히거나 파손될 것입니다.
큰 바다에 배나 노를 사용하는 것이 동해와 서해가 이렇게 큰 차이가 있는데, 사실상 동해는 보통의 배나 노는 없습니다. 이른바 동해의 배라는 것은 앞은 높고 뒤는 낮으며 윗부분이 고기 머리같이 뾰족한데, 한 길 남짓한 돗자리를 달고 파도와 함께 떠다닙니다. 그러나 튼튼하고 큰 통나무를 합하여 만든 것은 길이가 대여섯 길이나 되며, 그 다음 것은 서너 길로 아주 무겁고 견고합니다. 어부들은 7, 8월에 장마가 끝나거나 2, 3월에 눈이 녹고 날씨가 따뜻해지면 모두 농한기(農閑期)를 이용하여 여러 날을 두고 양식 준비를 해 가지고 산중에 들어가 소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배를 만들고, 그것을 끌어내릴 때는 소를 이용하는데 큰 것은 30마리나 동원합니다. 소를 몰 때는 소 한 마리에 사람이 좌우에서 부축하며 굴러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자도 수십 명이 넘습니다.
산이 워낙 높고 험하여 먼 곳은 5, 60리나 되는데 배가 클수록 더욱 깊은 산중에서 만들어져 10개월씩이나 노력이 걸리오며, 계곡으로 끌어내릴 때는 반드시 오뉴월의 장마를 기다려 계곡 물이 불어난 다음이라야 비로소 바다까지 띄워 내리게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가뭄이 들어 계곡 물이 마르게 되면 해가 바뀌어도 끌어내리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고기잡이 배로는 큰 것이라야 적재량이 기껏 50석이고 다음은 40석 혹은 30석이오니, 작은 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 곡식을 급히 수송해야 할 때를 당하여 곡식은 1만 섬이나 되는데, 고깃배로 백 번 수송해 봐야 겨우 몇천 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지금 호조(戶曹) 및 여러 군현(郡縣)에 소속된 것과 영동(嶺東) 지역의 배 수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영동의 9읍(邑)은 큰 읍과 작은 읍에 재물과 인력이 같지 않아 기한부로 9읍에다 배정하여 혹은 3, 4척, 혹은 7, 8척, 혹 10여 척의 배를 만들게 하여 1백여 척을 준비토록 하나, 가령 관청에서 10척의 배를 만든다 하더라도 끌어내리는 노력이 10배나 될 것이며, 동원되는 소가 3백 마리에 장정 5백 명이 따르게 되어 한 읍의 10개월 소요되는 인력이 소모될 것이니, 배는 비록 준비되었다 하더라도 장맛비를 얻지 못하면 바다까지 운반할 계획이 막연합니다. 이렇게 되면 봄이 오기 전에 곡식을 수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형편이며, 본부(本府) 이남에서는 황정(荒政) 대책이 시급한 처지인데, 큰 노역이 시행되면 원망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남쪽을 구제하기 전에 본부의 백성이 먼저 흩어질까 걱정이옵니다.
기언 제47권 속집 / 사방(四方) 1
이 시랑(李侍郞)이 사명(使命)을 띠고 연경(燕京)에 갈 때 주는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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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남(漠南 내몽고에 있는 고비사막 남쪽의 땅)의 여러 나라는 옛 북융(北戎)의 유족(遺族)이다. 주(周) 나라 때에는 험윤(獫狁)ㆍ훈육(葷粥)ㆍ견융(犬戎)이라 하였고, 진한(秦漢) 시대에 와서는 흉노(凶奴)라 하였다. 그들은 활쏘기와 사냥을 잘하여 고기를 주식으로 삼고 가죽옷을 입었으며 공격과 침벌(侵伐)을 능사로 삼았다.
그 지방은 매우 추워서 오곡(五穀)이 자라지 못하므로 농사를 짓는 일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서 옮겨 가며 사는 것이 그들의 천성이었다.
적적(赤翟)의 종족도 있고 백적(白翟)의 종족도 있으며, 동호(東胡)ㆍ산융(山戎)ㆍ구연(胊衍)이라는 종족도 있었다. 그 밖에 돌궐(突厥)의 종족이 계곡(溪谷)을 따라 흩어져 있었으니 이들을 견적(堅敵)이라 불렀다.
진 시황제(秦始皇帝)가 몽염(蒙恬)을 파견하여 44현(縣)의 성을 쌓되, 구원(九原 산서성(山西省) 흔현(忻縣) 서쪽에 있음)과 운양(雲陽 산동성(山東省) 곡부현(曲阜縣))으로부터 요동(遼東)까지 1만여 리였으며 오랑캐를 막는 요새로 삼았다. 그리고 요동 밖의 숙신(肅愼 만주 목단강 유역과 연해주(沿海州) 방면에 살던 민족)과 조선(朝鮮)은 그 뒤 고구려(高句麗)와 말갈(靺鞨)이 되었다. 《주례(周禮)》 직방(職方)에,
“동북이 유주(幽州)의 땅이 되는데 그곳 산진(山鎭)은 의무려(醫巫閭)이다.”
라고 하였다. 현도(玄菟)는 의무려산 아래에 있으며 조선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통치한 곳으로 아직도 평양에 기자견(箕子畎)이 있다.
관문(關門)에서 150리쯤 들어가면 고죽허(孤竹墟)에 이르는데 그곳에는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사당이 있으며, 거기서 580리 정도의 거리에 연경(燕京)이 있으니 제왕(帝王)이 사는 곳이다. 왕궁(王宮)과 국도(國都)를 둘러싸고 있는 도로에는 삼문(三門)과 9경(經)과 9위(緯)가 차례로 있는데 그 경과 위의 너비는 아홉 대의 수레가 함께 지나갈 수 있다.
천자(天子)는 다섯 문과 관부(官府)와 차사(次舍)가 있고 성우(城隅)는 9치(雉)이며 명당(明堂 천자가 정사를 보는 궁전)과 벽옹(辟廱 천자의 도성에 설립한 태학(太學))이 있으니, 여기에서 정치와 교육에 관한 시정 방침이 수립된다. 그러나 지금은 망국의 땅이 되었고 중원(中原)에 올바른 통치자가 없어 천하가 크게 어지럽다.
국가의 일로 사명을 띤 대부(大夫)가 폐백을 가지고 절국(絶國)에 사신으로 가는데 이 또한 길이 머니, 슬프지 않은가.
청강(靑江) 북쪽은 현도와 요동 땅으로 고구려 말기에 패강(浿江) 서북쪽 7백 리를 잃었다. 진대(秦代)ㆍ한대(漢代)로 내려오면서 대륙의 5천 리 지역을 모두 차지하여 사방이 만 리나 되었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유복(綏服)에 해당하는 지역 5백 리 중에서 안으로 3백 리는 문치(文治)의 교화(敎化)를 실시하고 밖으로 2백 리는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니 덕이 넓고 위엄이 퍼져 천하가 외복(畏服)하였다.
명(明) 나라가 일어나자 호원(胡元)을 격퇴하고 천하를 위력으로 굴복시키려고 하여 몸소 북쪽 변방에 주둔하면서 호(胡)를 위협하였으나, 겨우 6대(代)에 와서 경황제(景皇帝)가 호에게 함락을 당하였고, 10대가 못 되어 호가 다시 들어와 천하를 망하게 하였다. 그렇게 되고 난 뒤에 성인(聖人)의 제도가 끊어진 줄 알게 되었다.
기자견(箕子畎) : 고대 은(殷) 나라 기자(箕子)가 평양에 와서 도읍을 정하고 정전을 구획하였다는 것으로, 9백 묘(畝)의 땅을 ‘정(井)’ 자 모양으로 1백 묘씩 9등분하여 바깥의 8백 묘는 사전(私田)으로 여덟 농가에서 나누어 경작하여 자기들이 가지고, 나머지 중앙의 1백 묘는 공전(公田)인데 이것은 공동으로 경작하여 나라에 바치도록 만들어진 농지를 말한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1》
9경(經)과 9위(緯) : 주(周) 나라 때 국도(國都) 중에 설치한 아홉 개의 도로로 남북으로 통한 도로를 경(經)이라 하고 동서로 통한 도로를 위(緯)라고 한다. 《周禮 考工記 匠人》
9치(雉) : 치란 성의 담장을 재는 단위로서 높이 1장(丈), 길이 3장을 말하는데, 주대(周代) 성우(城隅)의 제도가 9치였다. 《周禮 考工記 匠人》
유복(綏服)에 …… 5백 리 : 유복은 5복(服)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지역을 말한다. 우(禹)임금이 9주(州)를 정할 때 왕기(王畿)를 중심으로 하여 전 지역을 전복(甸服)ㆍ후복(侯服)ㆍ유복(綏服)ㆍ요복(要服)ㆍ황복(荒服)의 다섯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한 구간이 5백 리씩이다. 《書經 禹貢》
탐라지(耽羅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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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라(乇羅 제주도)는 남해 가운데 있는 조그마한 나라로서 너비가 4백 리쯤 되며 해로(海路)로 970리 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다.
본래 구이(九夷) 중의 하나로 상고 시대에 고을나(高乙那)ㆍ양을나(良乙那)ㆍ부을나(夫乙那) 세 사람이 있었는데 이들이 화생(化生)하여 사람이 되므로 비로소 생민들의 시조가 되었다. 이 세 사람이 기반을 닦은 곳을 상도(上都)ㆍ중도(中都)ㆍ하도(下都)라 하였다.
고을나의 15대 손자인 고후(高厚)와 고청(高淸)이 처음으로 신라와 국교를 맺었다. 그때 신라에 객성(客星)이 나타났으므로, 신라의 임금이 고후를 성주(星主), 고청을 왕자(王子)라고 이름하였는데 왕자라는 것은 총애(寵愛)한다는 명칭이다.
처음에 고후와 고청이 배를 타고 탐진(耽津 강진(康津))에 도착하였으므로 탐라(耽羅)라는 국호를 명명(命名) 받았다. 그 후세에 백제에 항복하여 탐탁라(耽乇羅)라고 하였으며 은솔(恩率)이라는 벼슬을 하사받았는데 뒤에 좌평(佐平)이 되었다.
고려 태조 20년에 탐탁라에서 태자 말로(末老)를 파견하여 조회하였다.
숙종(肅宗)이 즉위하여 그들을 격멸시켜 군현으로 삼았다. 원종(元宗) 때 와서 탐탁라가 모반하므로 김방경(金方慶)을 파견하여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원 나라가 탐라총관(耽羅摠管)을 설치하여 소ㆍ말ㆍ낙타ㆍ나귀ㆍ양 등을 방목하다가 20년에 총관을 없애고 고려에 귀속시켰다.
고려가 제주목(濟州牧)을 설치하였는데 그 뒤 6년에 원 나라가 다시 군민 만호(軍民萬戶)를 설치하여 말을 방목하다가 곧 폐기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1년에 원 나라가 다시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였다가, 원 나라가 망하자 다시 고려에 예속되었다.
홍무(洪武) 7년 원 나라의 목자(牧子)가 난을 일으켜 자칭 동서하치(東西哈赤)라 하면서 장관을 죽이므로 고려에서 최영(崔瑩)을 파견하여 그들을 토벌하여 모두 죽였고, 우리 태조 5년에 주(州)ㆍ목(牧)에 판관(判官)을 설치하였다.
태종(太宗) 2년에 성주와 왕자를 고쳐서 좌우도지관(左右都知管)을 삼고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두 고을을 설치하였다.
세종 27년에 좌우도지관을 없애고 읍에서 준수한 인물을 뽑아 상진무(上鎭撫)를 두었다.
주(州)는 두무악(頭無嶽) 북쪽에 있는데 북쪽 지역은 늘 북풍이 심하게 불어 나무를 심어 놓으면 모두 남쪽을 향하여 쓰러진다. 정의ㆍ대정 두 고을은 두무악의 남쪽에 있는데 그곳에는 심한 바람은 불지 않으나, 장기(瘴氣)를 품은 안개가 많아 낮에도 어두울 정도이다.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명이며 부악(釜嶽)이라고도 한다. 주의 남쪽 20리에는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있으며 봉 위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지세가 넓고 평평하다. 그래서 두무악이라 한 것이다. 그곳 꼭대기에 백록홍(白鹿泓)이 있는데 춘분과 추분의 초저녁에 남극 노인성(南極老人星)이 보인다.
부악의 동쪽이 장올악(長兀嶽)인데 그 높이는 부악과 같다. 그 위에는 깊은 못이 있어 장마가 지거나 가뭄이 들 때 거기서 기도를 올렸다. 또한 산이 높아서 5월에도 눈이 쌓여 있으며 8월에는 털옷을 입어야 한다. 주의 동쪽으로 50리에는 장사퇴(長沙堆)가 있다.
주ㆍ현의 거주지가 모두 산기슭과 바닷가이다. 그러므로 그곳의 토지는 모두 모래와 자갈뿐이지만, 주의 곁에 있는 광양(廣壤) 땅만은 붉은 진흙이다.
장수(長壽)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곳의 풍속을 고찰하여 보면 부정한 귀신 모시기를 좋아하였고, 남자는 적고 여자는 많아 여자가 남자의 사역(使役)을 맡아서 하므로 ‘여자장정’이라고 하였다.
섬 사람들은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고 바닷가 아낙네들은 치마를 입지 않고 한 자쯤되는 천으로 몸을 가렸다.
그곳의 곡식으로 알맞는 것은 기장ㆍ피ㆍ콩ㆍ보리이며 재화로는 빈주(璸珠)ㆍ대모(玳瑁)ㆍ나패(螺貝)이고 고기는 복어(鰒魚)ㆍ교어(鮫魚)ㆍ망어(望魚)인데 태생(胎生)이고 알에서 부화(孵化)된 것은 없다. 과일은 귤(橘)ㆍ유자(柚子)ㆍ등자(橙子)ㆍ감자(柑子)ㆍ치자(梔子)ㆍ비자(榧子)이며 좋은 말이 생산된다.
산이 높고 바다가 험하므로 그곳 사람들은 사냥하고 낚시하는 것을 생업으로 여겼으며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다.
산기슭의 토지는 돌이 많고 흙이 적어서 경작을 할 때 씨를 뿌린 이는 그 밭을 밟아 놓아야 된다. 벌레와 뱀이 많고 지네[蝍蛆]는 1자 넘는 것이 있으며, 향서(香鼠)도 그곳의 특산물이다.
산에는 호표(虎豹)ㆍ웅비(熊羆)ㆍ시랑(豺狼) 등 사나운 짐승과 여우ㆍ토끼ㆍ새가 없으며, 까마귀ㆍ까치ㆍ부엉이ㆍ올빼미도 없다. 그러나 산중에는 기이하고 괴상한 새와 짐승들이 보이며 공물로 바치는 새 짐승에는 사슴과 돼지와 해달이 있다.
탁라ㆍ화탈(火脫)ㆍ여서(餘鼠) 사이에는 바다가 깊고 검푸르며 매서운 바람과 높은 파도가 많다. 매양 봄과 여름에 남쪽 수종(水宗) 밖을 바라보면 높은 돛을 단 큰 선박들이 무수히 지나간다.
여기는 흑치(黑齒)의 오랑캐들이 중국과 통상하는 길목이며 또한 해외 여러 만이(蠻夷)들의 물화가 유통되는 곳이다. 서남쪽으로는 백해(白海)와 마주하고 있는데 최부(崔溥)가 바다에서 표류(漂流)하다 동풍을 타고 7일 만에 백해에 도착하였다 한다. 그 밖으로 대유구(大琉球)가 있다.
◆◇대모(玳瑁'매부리바다거북 열대·아열대의 바다에 삶
기언 별집 제1권 / 시(詩)
의춘(宜春)에 우거(寓居)하면서 자범(子範)에게 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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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에 날마다 비가 많으니 / 山峽日多雨
살랑살랑 바람 불어 앙상한 나무 가을이 왔네 / 颯颯寒木秋
깊은 산골 우거함이 뜻에 맞으니 / 寓居適深僻
우뚝우뚝 솟은 봉우리 그윽하여라 / 崒嵂亂峯幽
낮은 곳 웅크린 집 쑥대밭에 가려 있고 / 濕蟄掩蓬蒿
답답한 마음은 온갖 근심 안고 있네 / 鬱悒抱百憂
반갑게도 수의 어사 만나고 보니 / 忻逢繡衣史
엊그제 한마을 놀던 벗이라 / 昔日同里遊
사막 밖에 여러 해를 지내왔으니 / 經年沙漠外
반가운 사람 대할 줄을 어이 알았으랴 / 豈料對靑眸
날 보자 춥고 굶주림 위로해 주니 / 相對慰寒飢
정과 뜻 아울러 알뜰하구려 / 情意兩綢繆
사나운 짐승 날마다 핍박하는데 / 猛獸日逼人
슬프다 뉘라서 물리쳐 주랴 / 咄咄誰能驅
바다제비 가을 하늘 하직하고 떠나니 / 海燕辭天霜
총총히 한 해도 다해 가누나 / 蒼茫歲欲遒
두어라 다시금 말하지 말고 / 已矣勿復道
술 마셔 애써 시름이나 달래리 / 得酒強寬愁
서생이 늙어 집 안이 텅 비었으니 / 書生老嵺廓
크게 탄식하고 길게 노래하리 / 大吒仍長謳
죽령(竹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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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 태백 높다고 사람들 떠들더니 / 人喧小白太白高
겹친 고개 겹친 관문 천하에 웅장하네 / 複嶺重關天下壯
첩첩이 가파른 산 육백 리를 뻗쳐 있어 / 積翠巃嵸六百里
안개 속 아스라이 푸른 봉우리 잇닿았네 / 烟霞縹緲連靑嶂
사다리 길 구불구불 그지없이 위험하니 / 石棧盤回危且險
걸음마다 숨 죽이고 곁눈질 자주 하네 / 行行脅息頻側望
삼월에도 고개 위엔 쌓인 눈 보이고 / 三月嶺上見積雪
높은 곳 한기 어려 따스하지 않구나 / 高處寒凝未暄暢
촉 나라 험한 길 이보다 어려울까 / 蜀道不得難於此
나그네 길 오래도록 슬프게 하네 / 使我覊旅久惆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1513년(중종8) 12월 4일에 전라도 해남에서 태어났다.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眉巖), 본관은 선산(善山). 대윤과 소윤의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을사사화가 일어나고, 급기야 1547년(명종2)에는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良才驛)의 비방 벽서를 조정에 고함으로써 을사년(1545)에 저항한 인사들에게 죄가 가중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제주도는 고향 해남과 멀지 않다 하여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를 옮겼다. 1548년 2월에 종성 유배지에 도착해 닥친 곤경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사색과 저술에 몰두하였다. 무려 19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67년(선조1) 55세가 되어서야 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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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집 제1권 / 시(詩)○칠언고시(七言古詩)
경술년(1550, 명종5) 윤6월 보름 밤에 일을 기록하여 세 문생에게 보이다〔庚戌閏六月十五夜記事示三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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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은 어떤 밤인데 오동잎 떨어지는가 / 今夕何夕桐葉落
가을 신이 절서 살펴 모진 더위 거두니 / 蓐收按節暑歛虐
나의 친구 두세 사람과 함께 / 連翩吾友二三子
바퀴 같은 둥근달을 구경하네 / 與我共翫滿輪魄
하늘은 그대 위해 실구름조차 걷고 / 上穹爲君卷纎雲
담담히 맑은 곳에 둥근달 떠올라 / 湛湛淸地騰一璧
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간담을 깨우니 / 淸寒瑩骨肝膽醒
수정궁 속에 몸을 의탁한 듯하여라 / 水精宮裏身如託
술 한잔으로 너에게 노래 권한 적 없지만 / 雖無一盃勸爾歌
크게 부른 노래마다 금석 소리 나오고 / 高唱聲聲出金石
노래 마치고 옛사람의 시 낭랑히 읊조리니 / 歌闋朗吟古人詩
단산의 외로운 봉황이요 구고의 학이로다 / 丹山孤鳳九臯鶴
한유의 용용함 어찌 좋지 않으리오 / 昌黎舂容豈不好
주자의 청묘 음악 다시 울려 퍼지네 / 紫陽更有淸廟樂
상쾌한 바람과 가을 달 모두 가없어 / 光風秋月共無邊
무릎 치며 세 번 탄식하니 귀신도 놀라네 / 三嘆擊節神鬼愕
글귀 모아 서로 읽으며 빼어남 비교하고 / 集句競誦較輸贏
흠 지적하고 머리 치며 마음껏 해학하니 / 指瑕叩頭恣諧謔
밤 깊어 누고 소리 지나도 흥은 더욱 넘쳐 / 侵更歷漏興悠然
나그네 가슴에 만 섬 시름 풀어지누나 / 羈愁萬斛消胸膈
아, 나는 남쪽 바닷가에서 자유롭게 지내다 / 嗟我飮啄南海濱
삼천 리 밖 사막에 던져져 / 三千里外投沙漠
흙집에서 목 움츠린 지 어언 삼 년 / 縮頸土屋已三秋
구름 보고 달 대하며 공연히 가슴을 치네 / 望雲對月空撫擗
신선같은 아름다운 문생들 없었다면 / 不有蹮蹮媚學子
누가 초가집 찾아주어 위로하겠나 / 誰遣跫音慰蓬藋
인생에서 뜻과 기개 맞음이 귀하니 / 人生意氣貴契合
백두나 경개에 어찌 손익이 있을까 / 白頭傾蓋奚減益
훗날 산수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 他年迢遞山水隔
그리워하다가 하늘의 흰 달 보리라 / 相思應看天心白
누고 소리 : ‘누고(漏鼓)’는 옛날 시각을 알리기 위하여 치던 북이다
자유롭게 지내다 : 원문의 ‘음탁(飮啄)’은 식탁(食啄)과 비슷한 말로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을 뜻하며, 《장자(莊子)》 〈양생주(養生主)〉의 공문헌(公文軒)과 우사(右師)의 대화 가운데 나온다. 우사가 발이 하나 잘려나가는 형벌을 받은 후에 외발로 나타나자 공문헌이 깜짝 놀라며 누가 그렇게 만든 것인지를 묻자 우사는 사람이 아닌 하늘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하며, “못 가의 꿩은 열 걸음 만에 한 입 쪼아 먹으며, 백 걸음 만에 한 모금 마시지만, 새장 속에서 길러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신태(神態)는 비록 왕성해지겠지만, 새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食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라고 하였다. 즉, 우사는 인간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해 사는 것이야말로 참 자유임을 강조하였다.
구름 보고 : 본문의 ‘망운(望雲)’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뜻한다.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이 병주(幷州)의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임명되어 부임하였을 때 태행산(太行山)에 올라 주위를 돌아보니 한 조각 흰 구름이 떠 있었다. 그때 옆 사람에게 “우리 부모님은 저 구름 아래 살고 계시겠지.”라고 하며, 흰 구름을 쳐다보면서 하양(河陽)의 별장에 머물러 계시는 부모님을 그리워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唐書》
찾아주어 : 본문의 ‘공음(跫音)’은 반가움을 나타낸다. 《장자(莊子)》 〈서무귀(徐無鬼)〉에 “혼자 빈 골짜기에 도망쳐 살 때에 인기척만 들려도 반가울 텐데, 더구나 형제와 친척의 기침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면 어떻겠는가.〔夫逃虛空者 聞人足音跫然而喜 又況乎昆弟親戚之謦欬其側者乎〕”라고 하였다.
백두나 경계 : ‘백두(白頭)’는 ‘백두여신(白頭如新)’의 준말이고, ‘경개(傾蓋)는 ‘경개여고(傾蓋如故)’의 준말이다. 《사기(史記)》 권83 〈추양열전(鄒陽列傳)〉에 “흰머리가 되도록 오래 사귀었어도 처음 본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수레 덮개를 기울이고 잠깐 이야기했지만 오랜 벗처럼 느껴지는 경우도 있다.〔白頭如新 傾蓋如故〕”라는 말이 나온다
산수와 …… 있으면 : 작자가 유배에 풀려 나게 될 때를 이른다.
문인들이 시를 지어 내 병이 나음을 축하하니 시로써 사례하다〔門人作詩賀余病愈謝以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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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보지 못하였나, 배협이 공부 대부 되어 / 君不見裵俠工部大夫官
오경의 북소리 듣고 병이 절로 나음을 / 五更鼓聲病自㦨
또 보지 못하였나, 장서가 강릉부 참군일 때 학질에 걸려 / 又不見張署痁作椽江陵
스스로 죽을 날 기약하며 눈물 줄줄 흘렸음을 / 自期殞命淚潸潸
남아의 형세는 막힘과 통함이 있는 것 / 男兒氣候有否泰
어찌 빈궁과 영달 따라 강하고 약해지겠나 / 豈隨窮達爲强孱
나는 먼 변방 사막으로 귀양 왔으니 / 我來沙漠禦魑魅
마치 흘간산에 있는 참새 같구나 / 有如雀寄紇干山
.......
호연지기로 천지를 가득 채울 수 있다면 / 浩氣苟能塞天地
병마가 어찌 다시 내 몸을 엿보겠는가 / 二豎寧復窺吾關
배협(裵俠)이 …… 나음을 : 배협은 북주(北周) 하동(河東) 사람으로 자는 숭화(崇和)이다. 《북사(北史)》 〈열전(列傳)〉에 “배협이 일찍이 병을 얻어 온통 기운이 빠지니 사우들이 걱정했다. 그런데 홀연히 오경의 북소리를 듣고서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좌우를 둘러보며 말하기를 ‘아팠던 것이 이제 다 나았으니 관아로 갈 수 있겠소.’ 하였다. 진호가 그 말을 듣고 이르기를 ‘배협이 이렇듯이 위독했으나 공들이 근심을 그치지 않으니 그로 인하여 북소리를 듣고서 질병이 마침내 나았소. 이 어찌 정성을 다해 힘쓴 것을 하늘이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俠嘗遇疾沈頓 士友憂之 忽聞五鼓 便卽驚起 顧左右曰 可向府耶 所苦因此而瘳 晉公護聞之曰 裴俠危篤若此 而不廢憂公 因聞鼓聲 疾病遂愈 此豈非天祐其勤恪也〕 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서(張署)가 …… 흘렸음을 : 장서는 당나라 때 시인이자 정치가이다. 한유(韓愈)가 한때 조정에 쫓겨나 강릉부(江陵府)에서 법조참군(法曹參軍)으로 있을 적에 장서는 공조참군(功曹參軍)으로 있으면서 둘은 항상 어울렸다. 이때 한유가 장서에게 지어준 시가 〈이화증장십일서(李花贈張十一署)〉이다.
나는 …… 왔으니 : 본문의 이매(魑魅)는 원래 도깨비와 같은 귀신의 뜻인데, 여기에서는 작자가 종성으로 유배 간 것을 말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문공 18년에 “순(舜) 임금이 사흉(四凶)을 사방의 변방으로 유배 보내어 이매를 막게 했다.”라고 한 내용이 있다.
흘간산(紇干山)에 있는 참새 : 떠도는 신세를 뜻한다. 흘간산은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흘건산(紇乾山) 또는 흘진산(紇眞山) 등으로 불린다. 이 산 정상은 여름에도 눈이 쌓여 있을 정도로 늘 춥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45 紇乾山》 이 때문에 흘간산과 관련하여 “흘간산 꼭대기 얼어 죽는 참새들, 어찌하여 좋은 곳에 날아가 살지 않나.〔紇干山頭凍殺雀 何不飛去生樂處〕”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당나라 말 소종(昭宗) 때 주전충(朱全忠)이 난을 일으켜 황제가 화주(華州)로 파천하였는데, 곁에 있는 신하에게 유행어를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시월의 즉흥시〔十月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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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 겨울 깊어 음기가 모이니 / 沙漠冬深陰氣屯
회오리바람 흑룡강가에서 불어오네 / 凶飈來自黑龍濱
강가의 나비들 허공에 튀는 돌이요 / 江邊蝴蝶騰空石
굴속의 자라 거북 목 움츠린 사람이라 / 窩裏黿龜縮頸人
땅에 물어 매번 경이라 부름에 놀라고 / 詢地每驚呼子慶
하늘을 즐겨 길이 춘이라 불러줌을 탄식하네 / 樂天長嘆錫名春
어느 때에 다시 남쪽의 기러기 좇아 / 何時郤逐南賓鴈
어머니께 돌아가 절하고 힘들다 말할까 / 歸拜萱堂說苦辛
땅에 …… 탄식하네 : ‘경(慶)’은 유희춘의 아명(兒名)이거나 인중(仁仲) 이전의 자일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춘(春)’은 본인의 휘(諱)인 ‘희춘(希春)’의 한 부분을 뜻한 것으로 보인다. 즉, 부모님은 봄처럼 경사스럽게 살기를 바랐는데, 북풍한설에 겨울처럼 고생하고 있음을 은유적으로 나타내었다.
남쪽으로 돌아가는 행 스님을 전송하며〔送釋行南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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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눈 흩날리는 두만강가에서 / 揚沙飛雪豆江湄
곧바로 한양까지 백 사 넘는 길 / 直去長安百舍奇
친구 방문 위해 이제 북녘 끝에 왔으니 / 爲訪故人今北極
어찌 뜰 나무에 봄 가지 돋음 알았으리 / 寧懷庭樹已東枝
나잔의 흘리는 눈물 누가 알아주겠나 / 懶殘涕淚誰能識
혜원의 기쁜 웃음 스스로 알 뿐이라네 / 惠遠歡咍只自知
돌아가는 길에 식량 없음 원망말지니 / 歸路無粮非所慍
곳곳의 솔샘이 허기짐을 채우리라 / 松泉隨處足充飢
백 사 : 먼 길을 뜻한다. 사(舍)는 30리의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로 백 사는 3000리를 이른다.
나잔(懶殘)의 …… 알아주겠나 : 나잔은 당(唐)나라 때 형악사(衡岳寺)의 고승(高僧)인 명찬(明瓚)의 별호이다. 명찬은 성격이 게으르고 남은 밥이나 채소를 먹기 좋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나잔’이라 칭하였다.
혜원(惠遠)의 …… 뿐이라네 : 불가인(佛家人)과 유가인(儒家人)의 만남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혜원은 진(晉)나라의 스님으로 여산(盧山) 동림사(東林寺)에 있으면서 손님을 전송할 때에 호계(虎溪)라는 시내를 넘어가지 않았는데, 하루는 도연명(陶淵明)과 육수정(陸修靜)을 전송하다가 모르는 사이에 시내를 지나고는 세 사람이 함께 한번 웃었다고 한다.
소암강변의 즉흥시〔嘯巖江邊卽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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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기운에 서쪽 변방 산이 맑게 개니 / 爽氣曾收西塞山
북쪽 호수의 안개 경치 다시 함께 보네 / 北湖煙景更同觀
헤엄치는 피라미 출몰하여 금슬 소리 듣고 / 游鯈出沒聆琴瑟
오랑캐 여인 춤추니 패옥 소리 울리누나 / 胡女蹁躚響珮環
밝은 달빛은 원소의 술잔에 머무르고 / 皓月留連袁紹酒
맑은 바람은 복파의 안장을 가벼이 흔드네 / 淸風輕拂伏波鞍
사람들아, 태수의 즐거움 의심치 말지니 / 傍人莫訝遨頭樂
태수님은 강가에서 벌단시 읊조린다네 / 太守江干詠伐檀
원소(袁紹)의 술잔 : 여름에 피서하면서 술을 마시는 흥취를 뜻한다. 삼국 시대 위(魏)나라 광록대부(光祿大夫) 유송(劉松)이 원소의 군대를 진압하러 가서 하삭(河朔), 즉 하북(河北)에서 원소의 자제들과 삼복(三伏) 더위에 밤낮으로 술을 마셔서 흠뻑 취했다고 한다. 《典論》
복파(伏波)의 안장 : 나이는 많아도 젊은이다운 기상이 있음을 말한다. 동한(東漢)의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62세의 나이임에도 말에 뛰어올라 용맹을 보이자, 광무제(光武帝)가 “이 노인네가 참으로 씩씩하기도 하다.〔矍鑠哉是翁也〕”라고 찬탄했다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卷24 馬援列傳》
태수 : 오두(遨頭)는 송대(宋代) 태수(太守)의 별칭이다.
벌단시 : 벌단(伐檀)은 《시경》 〈위풍(魏風)〉의 편명(篇名)으로 벼슬아치가 직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봉록(俸祿)만 타먹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는 태수가 잠시 업무를 쉬고 강가에서 노니는 것을 의미한다.
한창 남쪽의 하인을 기다리는데 등심붓꽃이 기쁜 소식을 전하여〔方待南奴燈花報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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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심붓꽃 좋은 시를 위해 핀 게 아닌데 / 燈花非爲好詩開
금속은 참으로 좋은 말에서 유래하였지 / 金粟良由吉語來
일흔 나이 어머니 만 리 밖에 계시니 / 七十慈親身萬里
하루에도 이 간장 몇 번이나 뒤틀렸던가 / 寸腸一日幾番廻
등심붓꽃 : 외떡잎식물 백합목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5~6월에 청자색 또는 백자색 꽃이 핀다. 꽃말은 ‘기쁜 소식’이다.
금속(金粟) : 황금 색깔의 곡식 낱알과 같은 등화(燈火)의 모습을 시적으로 표현하였다. 한유(韓愈)의 〈영등화(詠燈花)〉에 “황색의 중간엔 금속을 늘어놓은 듯, 비녀 머리엔 옥충을 장식한 듯하네.〔黃裏排金粟 釵頭綴玉蟲〕”라는 내용이 있다.
미암집 제2권 / 시(詩)○오언절구보유(五言絶句補遺)
박화숙에게 주다〔贈朴公和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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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전의 옛 친구가 / 三十年前舊
사천 리 밖에서 왔네 / 四千里外來
오늘 아침 천지가 개어 / 今朝天地霽
함께 쾌심대에 올랐네 / 同上快心臺
박화숙(朴和叔) : 박순(朴淳, 1523~1589)을 가리킨다. 화숙은 그의 자이고, 호는 사암(思菴),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유희춘이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박순과 매우 도타운 친분을 나누었다.
미암집 제3권 / 서(書)
김후지 인후에게 쓴 편지 종성 귀양살이 중에 〔與金厚之 麟厚 書 鐘城謫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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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하늘 끝에 던져진지 이제 이미 10년이라 옛 친구의 소식이 바다처럼 막히니 그리운 생각이 꿈속에 나타나 괴롭습니다. 이 속에 쌓인 회포는 한 줄의 글로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 연이어 부모의 상(喪)을 당하여 기체가 강건하지 못하다는 소식을 늦게 듣고 걱정과 한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조용히 조리하시니 마침내 회복되실 겁니다.
저는 모래바람 불고 추위가 매서운 곳에서 비록 잔천(殘喘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연명하고 있지만, 제 어머님 연세가 76세로 서산에 지는 해와 같아 항상 끝없는 두려움을 안고 있습니다. 근래에 누이와 조카가 서로 이어 죽었다는 소식을 만 리 밖에서 늦게 듣고 간장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김후지 인후 : 1510~1560. 후지(厚之)는 김인후(金麟厚)의 자이다.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이다. 1540년(중종35)에 문과에 급제하고, 설서ㆍ부수찬을 거쳐 옥과 현령을 지냈으나,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유희춘과는 사돈간이다. 저서에 《하서집》ㆍ《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등이 있다.
미암집 제3권 / 잡저(雜著)
입춘날 옷을 벗고 밭갈이 하는 일을 의론하다〔立春裸耕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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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멀리 변방의 비루(鄙陋)한 풍속에서 나와 백성들에게 고통(苦痛)이 되니 식자(識者)는 놀라고 보통 사람들은 편안히 여긴다.
옛날에 태원(太原)의 백성들은 개자추(介子推)로 인하여 중춘(仲春 음력 2월) 한 달을 불에 익힌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초거(焦擧)가 병주 목사(幷州牧使)가 되어 백성을 깨우쳐 이 풍속을 고쳤다.
위나라 업(鄴)에 사는 사람들은 귀신을 좋아하여 해마다 하백(河伯 물을 맡은 신)에게 아내를 맞도록 빌므로, 서문표(西門豹)가 수령(守令)이 되어 강력히 그 풍속을 고쳤다. 이것은 모두 마음이 어진 군자가 우리에게 인의(仁義)의 마음을 채워주고, 세상 모든 사람의 어둡고 나약함을 구제한 것이다.
이 나라 사람들도 왕도(王都)와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사리(事理)에 어둡고 귀신과 괴상한 것에 현혹되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그 가장 말할 것도 없이 해로운 것은 새해에 옷을 벗고 밭갈이 하는 것이다.
매년 입춘(立春) 날 아침에 도할사(都轄司)의 토관(土官)이 관청(官廳)의 문 노상(路上)에서 사람을 시켜 나무로 만든 소를 몰아 밭 갈고 씨앗을 뿌리며 농사를 짓는 형상을 짓게 하여 한해의 농사를 점치는 데에 사용하고, 풍작 되기를 비는 데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밭 갈고 씨 뿌린 사람에게 나체로 추위를 무릅쓰게 하니, 이것이 무슨 뜻인가?
옛날 노인들이 서로 전하기를, “추위를 견디는 씩씩함을 보여주고, 그 해 따뜻한 상서로움을 이룬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지의 조화를 아이들의 장난으로 빼앗을 수 있겠는가. 사막의 얼고 추운 곳에서 손발을 한번 드러내면 금방 손발이 얼어 터지는데, 더구나 옷을 다 벗고 알몸으로 길거리에 서 있음에 오죽하겠는가. 바람과 서리가 뼈를 쑤시고 몸이 벌벌 떨려서 기침과 고질적인 냉병을 백에 하나도 면하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는 것과 다르겠는가. 인자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이것을 본다면, 어찌 섬뜩하게 두려워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관원에게 물으면, “백성들의 풍속이다.”라고 하고, 백성에게 물으면, “관원이 시켜서 한다.”라고 한다. 대개 이것은 처음부터 사리를 깨닫지 못한 데에서 생기어 마침내 편안히 여겨 이루진 풍속이 되었다.
육진(六鎭)이 설치된 지 백여 년 이래로 마음이 어진 문관과 무관이 백성의 부모가 된 사례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 괴이(怪異)함을 알지 못하여 초거(焦擧)와 서문표(西門豹)처럼 용기 있는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아, 한탄스럽다. 또 더욱이 궁벽하고 추운 땅에 인구가 늘어나지 못하고 겨울에는 풍상(風霜)에 넘어지고 여름에는 강을 건너다 떨어지며 상한병(傷寒病)과 전염병이 또 좇아 병사(病死)하는지라 인가(人家)의 적막함이 새벽별처럼 드문드문하니 그 다행히 남아서 죽지 않은 사람은 마땅히 어루만져 살게 하기를 어린아이 돌보듯이 해야 할 것인데, 또한 어찌 그들을 차마 몰아서 고황(膏肓)과 폐질(廢疾)의 땅으로 몰아넣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목민관(牧民官)들이 허수아비를 짓는 자의 큰 잘못을 깨닫지 못해서이다. 참으로 하루아침에 깨닫는다면, 그 잘못을 고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쳐야 할 것인가? 그들이 옷 벗는 것을 금할 뿐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그대가 그 직위에 있지 않으면 그 정사를 논하지 말아야 하고, 시골에서 유배 생활하는 도리나 확실히 지켜야 할 일인데, 지금 이러한 일을 논하여 장차 관직에 있는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하니, 이것은 평일에 한가히 지내는 것에서 벗어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마땅히 간섭하지 않아야 할 것은 관직에 있는 사람들의 정치요, 차마 묵과(默過)하지 못할 것은 무지한 백성들의 풍속이니, 이것이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개자추(介子推) : 춘추 시대의 은인(隱人)이다. 진(晉)나라 문공(文公)이 공자(公子)일 때 19년 동안 함께 망명 생활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문공이 귀국하여 왕이 된 후 자신을 멀리하자 면산에 들어가 숨어 살았다. 문공이 잘못을 뉘우치고 개자추가 나오도록 하기 위하여 그 산에 불을 질렀으나, 나오지 않고 타 죽었다고 한다.
도할사(都轄司)의 토관(土官) : 조선 시대 때 도할사(都轄司)의 종6품(從六品) 토관(土官) 벼슬이다.
서문표(西門豹) : 전국 시대 위나라 사람이다. 성질이 급하여 항상 가죽을 차고 다니며 누그러뜨렸다. 업의 수령이 되었을 때 업인들은 무속을 좋아해 해마다 돈을 거두어 백성들 고통이 날로 심하였다. 이에 서문표가 무당을 하수에 던져버려 그 풍속을 고쳤다. 도랑을 파서 백성의 논에 물을 대어 후세에까지도 그 이익을 보게 하였다.
어린아이 돌보듯이 : 《서경(書經)》 〈강고〉에 “어린아이 돌보듯 하면 백성들이 편안할 것이다.〔若保赤子 惟民其康〕”라고 하였다.
미암집 제7권 / 일기(日記) 축약함 ○경오년(1570) 융경(隆慶) 4년 우리 선조대왕 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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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진시(辰時) 말에 옥당의 전체 회의에 참석했다. 첫 번째 차자는 유성룡의 것을 쓰고 두 번째 차자는 윤탁연의 것을 썼는데 윤탁연이 지은 것이 매우 좋았다.
○ 부인(夫人 송덕봉(宋德峰))이 장문의 편지를 지어 광문(光雯 유희춘의 종손자)에게 써서 보내도록 했는데, 그 내용은
“삼가 편지 내용을 보니, 갚기 어려운 은혜를 저에게 베푼 듯이 스스로 자랑했는데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만 군자는 행실을 닦고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성현의 밝은 가르침이니, 어찌 나 같은 아녀자를 위해 억지로 힘쓸 일이겠습니까. 만일 속마음이 이미 확고해져서 물욕(物欲)이 가리기 어려우면 저절로 마음의 찌꺼기도 없어질 것인데, 어찌하여 안방 아녀자의 보은을 바라십니까. 서너 달 동안 홀로 잤다고 해서 고결한 척 은덕을 베푼 기색이 있다면, 결코 담담하게 무심한 사람은 아닙니다. 편안하고 결백한 마음을 지녀 밖으로 화사한 미색을 끊고 안으로 사사로운 생각을 없앤다면, 어찌 굳이 편지를 보내 공(功)을 자랑한 뒤에야 알겠습니까. 곁에 친한 벗이 있고 아래로 가족과 종들이 있어 뭇사람이 눈으로 보아 저절로 공론(公論)이 퍼질 것이니, 굳이 애써 편지를 보낼 것도 없습니다. 이로써 본다면, 당신은 아마도 겉으로 인의(仁義)를 베푸는 척하는 폐단과 남이 알아주기를 서두르는 병폐가 있는 듯합니다. 제가 애틋한 마음으로 가만히 살펴보니 의심스럽고 걱정스러움이 한량이 없습니다. 저 또한 당신에게 잊지 못할 공이 있으니 가볍게 여기지 마세요. 당신은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일을 두고 붓을 들어 편지를 쓸 때마다 글자 가득 공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순에 가까운 나이로 이처럼 혼자 잔다면 당신의 기운을 보양하는 데 매우 이로운 것이니, 이는 결코 제게 갚기 어려운 은혜를 베푼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은 귀한 관직에 올라 도성의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처지이니, 비록 몇 달 동안 홀로 잤다 할지라도 또한 사람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저는 옛날 당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사방에 돌봐주는 사람이 없고 당신은 만 리 밖에 있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슬퍼하기만 했지요. 그래도 지성으로 예법에 따라 장례를 치러 남에게 부끄럽지 않게 했는데, 곁에 있던 어떤 사람은 ‘묘를 쓰고 제사를 지냄이 비록 친자식이라도 이보다 더할 순 없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삼년상을 마치고 또 만 리 길에 올라 험난한 곳을 고생스레 찾아간 일은 누군들 모를까요. 제가 당신에게 이처럼 지성스럽게 대한 일을 두고 잊기 어려운 일이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몇 달 동안 홀로 잤던 공과 제가 했던 몇 가지 일을 서로 비교하면 어느 것이 가볍고 어느 것이 무겁겠습니까. 바라건대 당신은 영원히 잡념을 끊고 기운을 보양하여 수명을 늘리도록 하세요. 이것이 제가 밤낮으로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제 뜻을 이해하고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송씨(宋氏)가 아룁니다.”
하였다. 부인의 말과 뜻이 다 좋아 탄복을 금할 수 없다.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축약함 ○신미년(1571) 융경(隆慶) 5년 우리 선조대왕 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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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영암(靈巖)ㆍ강진(康津)ㆍ해남(海南) 세 고을은 양영(兩營 우수영과 좌수영) 사이에 끼여 있는 데다가 제주도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여서 공부(貢賦)가 다른 고을보다 열 배나 된다. 을묘년(1555, 명종10)에 왜변(倭變)을 겪은 뒤로는 방비에 대한 여러 가지 일이 너무 많아 백성들이 심한 고초를 겪고 있다. 세 고을에는 녹미(鹿尾)ㆍ녹설(鹿舌)ㆍ쾌포(快脯)가 생산되지 않으니 노루와 사슴이 많이 생산되는 제주도로 정하기를 청하고, 교서관의 책지(冊紙)와 장흥고(長興庫)의 견양지(見樣紙)를 내지(內地) 중에 일이 한가한 고을로 정하기를 청하려고 한다. 오늘 계본(啓本)을 작성하여 올려 보냈는데 아마도 정공도감(正供都監)에 명하여 옮겨 정할 곳을 마련토록 할 것이다.
제주도지역에 호랑이ㆍ표범ㆍ늑대와 같은 맹수가 없어서 사슴과 노루가 번성하고, 그 섬은 큰 바다의 가운데에 있으나 물이 소금을 굽는 데 알맞지 않아 토인(土人 지방민)들이 소금을 귀중하게 생각
미암집 제10권 / 일기(日記) 축약함 ○계유년(1573) 만력(萬曆) 원년 우리 선조대왕 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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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중원지도(中原地圖)》가 어제 옥당에서 왔다. 동정호(洞庭湖)의 물이 장강(長江) 중류에서 넓어짐이 과연 내 말과 같았는데 화공(畵工)이 끊어진 것으로 그렸음이 분명했다.
十八日。中原地圖。昨日來從玉堂。洞庭之水。自長江中流而廣。果如余言。而畫工之間斷明甚。
인용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북으로 중원을 바라보면 무한한 느낌 일어 / 北望中原無限感-----이 글의 '북으로' 라는 말은 '북쪽에서 중원을 바라보니' 가 정확한 해석인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