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규 교수의 Historia Managementa>를 시작하며-
[편집자 주] ‘역사 속의 경영’(Historia Managementa) 시리즈는 “역사를 읽지 않는 사람들은 그 역사를 되풀이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의 금언에 부응하여 오늘날 경영자들이 해결해야 할 경영문제를 역사에서 그 대답을 모색하려는 의도를 가진 기획이다. 물론 과거의 역사가 오늘과 내일의 문제에 대해 모든 해답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첫째, 사용할 수 있는 수레가 있는데 또 수레를 만들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예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잘 수행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으니까. 둘째,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경영기법과 경영이론 뒤에 깔려 있는 역사적 아이디어는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기업이 언제 변신해야 할지를 알게 해 준다. 셋째,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경영기법들은 최고의 기법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혁신을 추구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李在奎
⊙ 1948년 출생.
⊙ 서울대 상학과 졸업. 경북대 경영학 박사.
⊙ 영진약품 이사, 대구대 경영학과 교수, 대구대 총장, 대구은행·한국전기초자·영원무역
사외이사 역임.
⊙ 저서: <역사에서 경영을 만나다> <한 권으로 읽는 피터 드러커 명저 39권>
<무엇이 당신을 만드는가> <모차르트 읽는 CEO> <발칸, 시간이 멈춘 곳> 등.
<프로페셔널의 조건> <경영의 실제> <경제인의 종말> 등 피터 드러커의 저서 22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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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스에서 발견된 미라를 바탕으로 복원한 외치의 모습. |
1991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국경 외츠탈 알프스(Oetztal Alps)에서 5300년이나 된 남자 미라 한 구가 발견되었다. 미라를 처음 발견한 오스트리아 사람은 그 이름을, 지역명 외츠탈과 전설적인 눈사람 예티(yeti)를 합성하여 외치(Oetzi)로 명명했다. 외치의 유해를 분석한 결과, 그는 싸움 중에 죽은 청동기(靑銅器)시대의 인간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외치가 신고 있는 신발을 재현한 체코의 토머스 바타 대학 교수진은, 거친 지형과 뜨겁고 찬 날씨에서도 발을 완벽히 보호해 주는, 외치의 신발에 감탄했다.
하지만 외치의 신발이 아무리 우수하다 해도 그는 ‘일용할 양식을 찾아’ 하루 종일 헤맸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류의 조상들은 잠자는 8시간을 빼고 하루 16시간 근무했다.
1833년 영국의 공장법(The Factory Act)은 하루 노동시간을 12시간으로 정했다. 1847년 개정된 공장법은 근무시간을 1일 10시간으로 규정하였다. 하루 근무시간 2시간을 단축하는데 14년이 걸린 것이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난 1914년 헨리 포드는 종업원의 하루 근무시간을 8시간, 주 5일 근무를 규칙으로 삼았다.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란 없다. 오직 있는 것은 인간의 삶의 모든 국면마다 무수한 역사들이 있을 뿐이다. 1846년부터 1886년까지 영국역사를 집대성해 놓은 720쪽 분량의 역사책 에는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인 ‘법인’(法人, Corporate)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없다.
하지만 경영학 차원에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려고, 그래서 좀 더 잘살기 위해 노력했던 기업과 경영자들의 역사이다. 달리 말해 인류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이다.
20세기의 마지막 30년간 등장한 컴퓨터, 복사기, 팩스, 휴대용전화, 그리고 인터넷은 거래비용과 관리비용을 대폭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시간단축에도 크게 공헌했다. 필자는 30여년 전 한 고등학교 교실에서 입사(入社)시험을 보았다. 지금 기업은 인터넷으로 채용한다. 20세기 말부터 대부분 회사들은 물품 공급업자들로부터 온라인으로 입찰을 받는다. 이베이(eBay)는 전(全) 세계에 5000만명의 고객을 갖고 있다. 문자 그대로 실시간이다.
인류의 조상은 의식주를 해결하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첫째 먹을 것을 찾아 나선 굶주린 동물의 기록이다. 그 다음 인류의 역사는 노동시간을 단축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이다. 마지막으로 인류의 역사는 좀 더 잘살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이런 과정에 정부도 큰 역할을 했지만 주로 개인이 주도권을 쥐고 수행했다. 인간의 삶의 질(質)을 높이고, 또 일을 쉽고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기계장치와 제도를 발명한 사람들의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돈을 벌기 위해서? 사명감 때문에? 그저 취미 삼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성공과 실패를 거듭했다는 점이다. 수많은 사람이 성공하기도 전에 좌절하고 말았다. 일부는 성공에 안주하다가 실패했다. 그중 일부는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섰다.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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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슨이 발명한 최초의 증기기관차 로켓호. |
1829년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 enson)이 철도를 발명했다. 1830년 세계 최초로 영국의 리버풀과 맨체스터 사이에 철도가 놓였고 13톤 무게의 로켓호가 시속(時速) 12마일로 달렸다. 최고 시속은 30마일이었고, 왕복 50마일을 별 무리 없이 달렸다. 그것은 영국의 경제, 사회, 정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후 증기기관차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운행되었다. 철도가 등장한 후 5년 안에, 서구(西歐) 세계는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누렸다. 철도건설 붐 때문이었다. 1830년대부터 시작된 유럽의 철도 붐은 경제 역사상 가장 끔찍한 불황이 닥쳤던 185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미국에서는 1830년 볼티모어와 오하이오 철도가 개통되었고, 미국의 철도건설 붐은 그 후 3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4년 후인 1869년 미국 대륙횡단철도가 7년간의 공사를 마감하고 완성되자, 한때는 수개월이 걸리고 고되기만 했던 미국의 동서부 이동이 단 6일 만에 가능해졌다. 철도 덕분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이동수단을 갖게 되었다. 역사상 왕족이나 귀족 또는 무역상인이 아닌 일반인들의 시야를 처음으로 세계로까지 확대시켰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프랑스의 정체성>(The Identity of France, 1986)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프랑스를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문화로 만든 것은 철도였다. 철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프랑스는 서로 고립된 지역의 집합으로서, 오직 정치적으로만 통합되어 있었다.”
철도는 산업혁명을 기정사실화했다. 처음에는 ‘혁명’이었던 것이 ‘일상생활’이 된 것이다. 산업혁명이 일으킨 호황은 거의 100년 동안이나 지속됐다. 증기기관 기술은 철도산업을 창출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증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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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대서양 횡단에 성공한 증기선 그레이트 웨스턴호. |
해운의 역사는 기원전 3000년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근대 해운업은 바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범선(帆船) 대신 증기선이 출현한 19세기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 등장한 증기선이 범선을 제치고 해상운송의 주역으로 떠올랐는데, 증기선의 선구자는 역시 영국이었다.
증기선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국제무역 상인들은 자신의 선박을 운영하면서 자신의 화물을 운송하는 머천트 캐리어(merchant carrier), 즉 무역업과 운송업 겸업자였다. 그러나 증기선의 발달에 따라 오직 수송만 전문으로 하는 운송전문업자(public carrier)가 등장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의 진행에 따른 해상화물 증가와 신대륙으로의 이민 증가는 전문 운송업의 발전을 재촉했다. 19세기 후반 무역항로의 주축은 화물선을 겸한 여객선이었다. 따라서 당시 순수한 화물선은 부정기적으로 운항되다가 19세기 말경에야 정기선 운항이 시작되었다.
제임스 와트가 제작한 초기의 증기기관은 마력 수가 낮아서 선박용으로는 거의 이용되지 못했다. 1802년 최초로 실질적인 증기선이 제작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운하 관리자였던 토머스 던다스(Thomas Dundas)가 주문해 만든 목조선 ‘샤롯 던다스 호’는 몇 주 동안 승객과 견학자들을 태웠다. 그 가운데 미국의 청년 발명가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이 있었다. 풀턴은 미국으로 돌아가 자본가들의 투자를 받아 와트의 개량엔진을 탑재할 수 있는 선박을 제작했다. 1808년 ‘클레먼트’(Clermont)호로 명명된 이 선박은 처녀항해에서 평균 4노트(시속 7.4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허드슨강을 390킬로미터나 항해했다. 이것을 계기로 강에서의 증기선 운항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그러나 초기의 증기선들은 바다에서는 범선과 여전히 경쟁이 안되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선주(船主)들의 부정적인 태도였다. ‘바람은 아무리 이용해도 공짜인데 무엇 때문에 추진력을 얻기 위해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공간에 대형엔진을 탑재하여 선박의 운송능력을 저하시키는가?’라는 것이 증기선을 도입하지 않는 이유였다.
사실 당시의 단일 실린더 엔진은 대형인 데다가 연료소모도 많았다. 근해에서는 문제가 안되었으나, 운항시간이 많이 걸리는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석탄을 적재해야 했으므로 승객과 화물을 실을 공간이 그만큼 좁아져서 채산성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러나 증기선은 당연히 정부의 지원대상 산업이어서 각국은 증기선의 개발과 시험운항을 위해 거액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1835년경까지는 아직도 증기선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것은, 지금 우주선으로 화성에 가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1838년 1340톤의 그레이트 웨스턴(Great Western)호를 필두로 4척의 영국 증기선이 대서양 횡단에 성공하자 세계는 열광했다. 그레이트 웨스턴호는 브리스톨을 출항한 지 15일 만에 뉴욕에 도착했고, 돌아올 때에는 하루를 더 단축시켰다. 그때까지 가장 빠른 배가 평균 23일이 걸렸고, 되돌아올 때는 풍향(風向)과 조류(潮流) 때문에 43일 이상 걸려야 했던 것과 비교할 때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컴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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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BM을 세계적인 사무기기 및 컴퓨터 회사로 일으켜 세운 토머스 왓슨1세. |
근로시간의 단축이라는 차원에서 컴퓨터의 등장만큼 획기적인 사건도 없다. 1884년 독일 출신 발명가 홀레리스(Herman Hollerith)는 천공카드(punch card)를 이용한 계산기를 발명하여 몇 년이 걸릴 통계작성 및 회계 관련 일을 단 몇 달 만에 해결했다. 홀레리스는 1896년 CTR(Computing Tabulating Recording Co.)을 설립하고, 1911년 시간기록계 제작회사와 저울 제작사를 합병했다. 그러나 경영은 부진했다.
1914년 어느 날 금전등록기회사 NCR에서 영업업무를 담당했다는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r.)이 CTR의 사장 찰스 플린트(Charles Flint)를 찾아왔다. 왓슨은 자신이 NCR에서 배운 판매기법을 이용하여 판매원에게 동기부여하면 사무기기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당돌하게도 자신을 CTR의 최고경영자로 임명해 주고 순이익에서 5%의 배당을 줄 것을 제안했다. “사람은 그 자격에 따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교섭 결과에 따라 대접받는다”는 말이 있다. 왓슨은 자기 자신을 판 것이었다.
1924년 왓슨이 회사명을 CTR에서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으로 바꾸자 사내외에서는 회사의 실체를 모르겠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비즈니스 머신’이라는 새로운 이름은 컴퓨터와 첨단기술 제품의 개념을 포함시킨 사업 비전으로 이어져 세계 컴퓨터시장을 장악하는 기업으로 발돋움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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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IBM이 내놓은 컴퓨터 IBM701. |
1946년 1만8000개의 진공관을 사용한 최초의 컴퓨터 에니악(ENIAC)이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탄생했고, 1951년 상업용 컴퓨터 유니백(UNIVAC) 이 탄생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지금은 컴퓨터의 대명사인 IBM이 당시에는 컴퓨터 분야 진출에 소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당시 경영에 참여하고 있던 왓슨 2세(Thomas Watson, Jr.)는 에니악과 같은 기능을 가진 기계를 IBM에서도 생산해 달라는 고객들의 요구와 사내(社內) 간부의 설득으로 컴퓨터 분야 진출을 결심했다. 처음에 왓슨 1세는 “내 생각에, 전 세계적으로 대형 컴퓨터 시장은 아마 연간 5대면 충분할 것”이라면서 이를 거부했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미국민들의 애국심을 유발했다. 유달리 애국심이 강했던 왓슨 1세는 회사 내에 군수(軍需) 부문을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왓슨 2세는 군수담당 부서에 컴퓨터 개발을 지시한 뒤, 아버지에게는 컴퓨터를 ‘국방계산기’라 이름 붙여 설득하고는 대대적으로 개발 프로젝트를 전개했다. IBM은 1953년 상업용 컴퓨터 IBM701을 선보였다.
1956년 왓슨 2세가 42세의 나이로 최고경영자에 오르면서 이들은 부자(父子) 경영자로 명성을 떨쳤다. IBM은 1962년 매출액 10억 달러를 기록하면서 컴퓨터 시장의 점유율 50%를 넘어섰고, 컴퓨터 산업의 왕자로 군림하게 된다.
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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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연구 끝에 1959년에 나온 복사기 제록스 914. |
작업장에서 우리는 매일 맡겨진 일을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쉽게 해 내려고 노력한다. 그런 점에서 복사기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수레의 발명에 버금간다. 적어도 사무실에서는 그렇다.
지금은 복사기가 필수적이지만, 필자가 기업에서 근무하던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사정은 달랐다. 같은 서류 몇 장을 만들려면 우선 타자기에 백지를 여러 장 넣고 그 사이 사이에 먹지를 대고 치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나 타자기가 비싸서 사무실에 타자기는 몇 안되었고, 타이피스트를 고용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웬만한 사무실에서는 사원들이 깨끗한 기안용지 밑에 먹지를 대고, 그 아래 용지를 한 장 놓고 또 그 아래 먹지를, 그런 식으로 적게는 두 장, 많게는 대여섯 장까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썼다. 같은 서류 몇 장을 만들려면 손목이 아프고 와이셔츠 끝을 보호하기 위해 검정 토시를 꼈다. 브리핑용 차트를 만들기 위해 필적(筆跡)이 좋은 직원을 특별히 채용하는 회사도 많았다.
더 많은 복사는 잉크를 묻힌 롤러를 밀어서 쓰는 등사기로 복사했는데, 등사만을 전담하는 필경사를 별도로 두는 회사도 있었다. 등사기는 1887년부터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 1930년대 이미 깨끗하게 복사할 수 있는 오프셋인쇄기가 대형 사무실에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용이 덜 든다는 점 때문에 기름종이에 잉크로 찍어 내는 조잡한 등사방식이 1970년대까지도 사용되었다.
오프셋인쇄는 기술적인 면에서 요즘의 복사기에 근접하는 것이었으나, 복사작업을 하기에 앞서 마스터 페이지를 만들어야 했고, 가격도 비싸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제록스의 등장으로 이러한 풍경은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제록스의 전신인 핼로이드사(Haloid Company)는 1906년부터 미국 뉴욕주 북부 로체스터에서 인화지를 소규모로 생산 판매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美)공군이 정찰사진을 사용하면서 핼로이드는 급속히 성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면서 인화지 수요가 줄어들자, 축소된 인화지 시장에서 핼로이드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여야만 했다.
한편 1938년 체스터 칼슨(Chester Carlson)이 최초로 전기사진(electrophotography)이라는 이름으로 복사기를 만들고 특허를 획득했다. 칼슨은 이 기술을 팔려고 IBM, GE, Kodak, RCA, 레밍턴 등 당대의 대기업들 24곳과 접촉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칼슨이 복사한 이미지(像)는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고, 종이가 열로 부풀어 오르거나 변색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핼로이드 창업자의 손자 조지프 윌슨(Joseph Wilson)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명문 로체스터 대학과 하버드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윌슨은 핼로이드 같은 작은 회사에 근무할 마음이 없었지만 부친은 오히려 핼로이드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도전해 볼 가치가 있고, 또한 가업은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고 설득했다. 윌슨은 회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찾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6년 윌슨은 칼슨의 특허권을 갖고 있는 바텔연구소에 매년 2만5000달러의 연구비를 지급하고, 전기사진술로 인해 생기는 수입의 8%를 로열티로 내놓겠다는 조건으로 칼슨의 기술을 개발할 권리를 사들였다. 1947년부터 1960년 사이 핼로이드는 제로그래피 연구에 7500만 달러를 쏟아 부었다. 영업수익의 2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연구개발비를 마련하기 위해 회사 간부들의 집까지도 모두 저당 잡혔다.
윌슨은 곧 복사기에 대해 ‘전기사진’이라는 용어 대신 새로운 이름을 구상했다. 1948년 윌슨은 오하이오 주립대학의 고전언어 전공 교수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 결과 그리스어 두 단어 ‘xeros’(건조한)와 ‘graphein’(문서)을 합하여, 건식문서라는 뜻의 ‘제로그래피’(xeropraphy)라는 조어를 만들어냈다. 1958년 핼로이드는 상호를 핼로이드 제록스(Haloid Xerox)로 바꾸었고, 사활을 건 10여년의 연구결과 건식 복사기 제록스914 모델을 개발했다.
1959년, 제록스914 모델이 출시되자 <포천>지는 ‘미국에서 시판된 제품 중 가장 성공적인 상품’이라고 극찬했다. 1961년 핼로이드 제록스는 회사명을 아예 제록스(Xerox Corporation)로 바꾼 뒤 뉴욕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上場)했다.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은 무엇인가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은 무엇인가? 중세 가톨릭 성직자들은 교구(敎區)로 보았고, 영주와 귀족은 장원(莊園)이라고 주장했다. 헤겔은 근대사회의 핵심적인 단위조직은 국가라고 했고, 마르크스는 지역공동사회(commune)를 내세웠고, 레닌과 히틀러는 정당(政黨)이라고 주장했다.
외치가 아무리 좋은 신발을 신었다 해도 그는 ‘일용할 양식을 찾아’ 잠자는 8시간을 빼고 하루 16시간 일을 했다. 인류가 지금처럼 하루 8시간만 일하고도 살 수 있기까지는 무려 5300년이나 걸린 셈이다. 철도, 증기선, 컴퓨터, 복사기와 같은 기계장치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고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기업은 인류 번성의 기틀이었고, 경영자는 인간이 좀 더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 주었다.
요컨대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물질적으로 잘살도록 한 주체는 기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