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마치고 병실로 들어가니 툭 실장과 의식이 깬 날에 나의 건강 상태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어본 그 제복 입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한다.
'많이 좋아보입니다'라고 베트남어로 말한다.
쿡 실장이 재빨리 와잉 공군 참모차장이라고 인사를 한다.
'네. 걱정해 주셔서'라고 하면서 가볍게 인사를 했다.
쿡 실장은 사고 난 이후에 와잉 장군이 여러 가지 배려를 해 주었고 이 병실에 입원하는 것도 가능했다고 한다. 이 병실은 당고급 간부 이외에는 거의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장군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음주 화요일 공군 남부 사령부로 방문해 주던지 아니면 자기가 회사로 오겠다고 한다.
그리고 빨리 건강을 찾으라는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선다.
나는 직감적으로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껴졌기에 나도 모르게 병실 밖까지 따라 나서니까. 장군은 뒤를 돌아보면서 다시 들어가라고 하면서 총총히 걸어가고 그 뒤를 쿡 실장이 따라 나선다.
한참 후에 쿡 실장이 돌아왔다.
쿡 실장은 와이프에게 나가 있으라고 양해를 구한 후에 아무래도 다음주에는 와잉 장군과 일본으로 출장을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을 꺼낸다.
'VFX와 관련하여 일본 국방성에서 극비리 방문해 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마지막 조율을 하자고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가시면 미쯔비시 중공업에서 핵심 기술을 공개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줄기차게 요구한 항공 부품의 30% 수입안도 수락하겠다고 합니다. 자식들이 몸이 달은 모양입니다.'
'VFX는 뭔가'
쿡 실장은 VFX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베트남 정부는 2010년부터 차기 전투기 사업(VFX)을 진행해 왔고, 그 책임자는 도이 모이 장군이었다. 최초의 계획은 150억 달러를 들여서 200~220대 정도의 수호이 전투기를 2014년부터 7년에 걸쳐서 도입하여 베트남 공군을 완전히 현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은 지지부진하여 2년을 허비했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올해를 넘기면 안 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참고로 올해 베트남 국방비는 98조 동(약135억 달러)입니다.
도입방식은 50대는 직접 도입하고 나머지 150~170대는 라이센스 생산 방식을 검토하고 시행하려고 했으나 그 보다 2년 전인 2008년에 말레이시아 국영항공사와 수호이사 간의 계약 시에 향후 10년 동안 아세안의 다른 나라와 라이센스 계약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기에 도입 자체가 불가능해 졌다.
따라서 새롭게 외국 파트너를 찾아야 했다.
그 다음 접촉한 나라가 한국과 일본, 프랑스, 러시아의 MIG설계국이었다.
프랑스의 닷소사의 라팔D는 이미 구형에 가깝고 라팔F는 지나치게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검토 도중에 포기했다.
와잉 장군은 개인적으로 한국이 2009년에 개발하여 테스트 중인 한국산 전투기에 관심이 많았다.
2011년 한국과 첫 협상을 했는데 세 가지 이유에서 때문에 포기했다. 첫째는 개발한지 얼마되지 않았기에 그 신뢰성이 문제가 있었고, 둘째는 최근에 몇 년간 원화가 강세를 보여서 경쟁국보다 가격이 많이 상승하여 가격 경쟁력 없었고, 셋째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잠재적 적국인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데 미국 전투기 기술을 많이 응용한 한국 전투기 제조 기술이 베트남을 경유해서 중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탐탁치 않았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줄기차게 압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MIG설계국에서 제조한 MIG – 43도 유력한 후보였다. 러시아 전투기들의 특징인 저렴한 가격과 뛰어난 성능에도 불구하고 전자전에 대한 대항력이 약하다는 기술적인 문제와 베트남산 항공 부품 구매에 난색을 표함으로써 마지막에 탈락하였다.
일본은 처음에는 적극적이었으나 미국의 압력이 있은 후부터는 소극적으로 바뀌었다가. 재작년 정권이 바뀐 후에 다시 적극적으로 나왔고 현재로는 계약이 확실하다고 한다.
베트남에서 관심을 보이는 것은 2011년 개발 완료되었고 작년부터 실전 배치된 F3 다목적 전투기이다. 성능은 미국의 F-22나 프랑스의 라팔F, 수호이사의 SU-41보다는 못하지만 아시아의 대부분의 나라가 보유한 F-15계열보다는 탁월하고 중국의 최신 기종인 F-11기와 성능이 비슷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반해서 가격은 F-15보다 훨씬 저렴한 7500만 달러 정도인 점이 매력적이었다. (참고로 각국이 제안 가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한국산 전투기는 대당 가격이 8300만 달러, MIG-43은 7000만 달러, 라팔F는 1억8천만 달러, 미국의 F-22는 2억 4천만 달러, 중국의 F-11은 7100만 달러이다)
그리고 일본에서 기술 이전에 대하여 파격적인 조건과 더불어 향후 5년 내에 항공부품의 25%를 베트남에서 수입하겠다고 약속했다. 베트남 정부에서는 이를 35%까지 확대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 점이 협상의 최대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베트남 정부도 35%를 관철 시키는 것은 무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다만 협상카드로 이렇게 제안하고 가격을 대폭 깎던지 아니면 30%만 일본측에서 수락하면 협상을 마무리 한다는 전략을 수립해 놓고 있다.
외국 회사와 라이센스 계약을 한다고 해도 베트남 국내에서 생산할 능력이 있는 회사는 우리 회사밖에 없었지만 우리 회사는 베트남 토종회사가 아니기에 처음에는 검토 대상에서 빠졌다. 이것이 베트남 정부의 고민이었다.
VFX 사업은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의 존망과 관련이 있는 군수산업이다. 그리고 그 금액이 150억 달러가 넘고 2022년부터 아세안 공동방위군이 창설되면 아세안에서 제작된 항공기가 주력 전투기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납품에 대한 우선권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난 이권 사업이기 하다. 그래서 외국회사에 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점이 군부 내부뿐만 아니라 정계와 경제계에서 우리 회사에 맡기는 것에 대한 반대 여론이 형성된 이유이다.
그러나 와잉 장군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서 VFX사업을 맡긴다면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될지 의문이거니와 VFX사업의 시급성을 고려할 때 더 이상 늦추어지면 항공 방어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기에 사업을 강행해야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에어로 아시아는 베트남 증권에 상장되어 있기 때문에 베트남 기업으로 봐야 하고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에어로 아시아가 베트남에서 철수하더라도 어차피 공장과 베트남 엔지니어들은 데리고 갈 수 없기 때문에 그 후에는 자체적으로 충분히 꾸려갈 수 있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고 군부를 설득함으로써 우리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정부가 강하게 중국산 F-11을 VFX사업에 채택해 주기를 강력히 희망했고 가격을 10%나 깎아주겠으며, 부품 구매도 30%까지 확대하겠다 정부 차원에서 공식 제안했다. 이런 제안은 베트남 정부도 거절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한 것이다.
중국의 영향력 행사는 친 중국파가 많은 정치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 결과 정치권에서 중국 F-11전투기를 도입을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에 빨리 일본과 계약을 하지 못하면 원점에서 다시 검토해야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점이 우리회사와 일본쪽을 상당히 긴장하게 만들었고, 일본쪽에서 비밀리에 방문을 요청한 이유'라고 한다
'왜 처음부터 중국 전투기는 검토대상에서 제외되었지'
'VFX 사업의 가상적은 중국입니다.'
'최근에 관계를 보니까 중국과의 관계는 아주 좋던데. 왜 가상적인지 궁금하네'
'군부 지도자들은 70년대 말에 중국과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입니다.. 베트남의 인구가 곧 1억이 되고 아세안에서 전통적인 군사 강국입니다. 아세안 내부의 결속력은 갈수록 강해져서 이제는 한나라나 마찬가지죠. 중국과 정치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베트남을 군사적으로 위협할 나라는 베트남 주위에는 중국밖에 없다고 다들 생각하지요 '
나는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럼 우리는 일본에 언제 가야하나'
'다음주 금요일부터 3일간 잡았습니다'
‘토.일요일은 정상적인 만남을 갖기는 좀 그렇지 않냐.
‘좀 그렇습니다만 미쯔비시 중공업에서 이번 주 넘기지 말고 오라고해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일정을 잡았습니다.’
‘그런가
‘보안 측면에서도 주말에 움직이는 것이 평일보다 더 낫고 10월 8일 도이모이 장군이 의회 청문회에서 답해야 하기 때문에 금요일에 출국할 수 없습니다’
‘방문 일정은 어떻게 되지’
‘아직 구체적인 일정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총리대신과 국방대신, 미쯔비시 공장 견학 등이 잡혀 있다고 합니다.’
'알았네. 준비하겠네'
‘일본쪽 은행과의 면담은 어디로 주선할까요’
‘글쎄 우리가 거래하는 은행은 있나’
‘후지은행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만, 토쿄 은행에서 지난번 방문해 달라고 했는데. 사고로 갈 수 없었기에…’
‘자네는 어디를 방문했음 좋겠나’
‘시간이 허락하면 후지은행과 토쿄은행을 방문하고 시간이 없으면 토쿄은행만 방문하시죠. 이번 방문시에 300억 엔에 대한 대출도 양해각서를 체결 하시구요.’
‘그럼 그렇게 주선을 해 놓게’
그 때 누가 노크를 한다.
들어오라고 하니까. 웬 녀석이 아빠하면서 반갑게 뛰어와 품에 안긴다.
아들인 모양이다.
'아빠 괜찮아.'
'응 괜찮아'
'그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데'
'그랬어'
'아빠 보여줄게 있어'
'뭔데'
'응 그 동안 아빠한테 멜 썼거던'
'그래 한번 보여줘 봐'
아들은 가방 속에서 노트만한 물체를 꺼낸다.
그것을 열자 바탕화면이 보인다.
아이콘을 터치하니까.
파일이 열린다.
노트북 pc가 엄청 얇아진 것을 보니 화면은 유기 EL이 분명했다.
'지용아 이것은 윈도우 뭐니' 그 동안 윈도우가 얼마나 버전 업이 되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아빠. 이것은 리눅스3인데, 요즘은 윈도우 안 쓴다.'
'그래.'
'누가 부팅할 때까지 기다려.... 윈도는 부팅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리눅스3은 켜면 바로 바탕화면이 뜨니까 바로 쓸 수 있지.''아빠 그것도 몰라... 아빠가 가르쳐 줘 놓고'
아들은 내가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아들은 자기가 쓴 멜을 내게 보여준다.
멜을 읽고 있는데 와이프가 들어와 말을 건넨다.
'여보. 지난번 말했던 은영이 남편 상훈씨 문제 어떻게 하시기로 했어요.' '어제도 은영이한테서 전화가 왔거던요'
나는 와이프가 뭔 말을 하는지 알수가 없다. 그래서 좀 짜증스럽다. '내가 기억을 잃어버린 것 당신도 알면서 뭔 일인지 설명을 해 주어야 알지'라고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니까.
와이프는 은영이네가 두달전에 개인파산을 신청한 것이며, 남편 상훈씨는 새로운 일자리를 한국 내에서 구하기 어렵기에 우리회사에서 일하도록 내가 배려한다고 했는데. 그만 내가 교통사고로 인해서 더 이상 이야기가 없자. 은영씨한테서 전화가 계속 온다고 한다.
'당신은 어떻게 했음 좋겠소' 내가 물어봤다.
'이곳에서 같이 살았음 좋겠는데. 나 요즘 너무 외롭단 말이야'
'알았어. 그 동안 우리 회사에서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 쿡실장에게 물어
보고 내 권한으로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합시다'
'여보. 당신 회사인데 당신 맘대로 못하고, 맨 날 쿡 실장과 상의해요'
와이프는 이상하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다.
난 이틀 전 저녁에 와이프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그런데 은영이네는 어떻게 해서 망한 것이요.'
'그저께 말했죠. 당신이 은마 아파트 산다는 것 말렸다고. 그런데 그 아파트를 은영이 아버지가 31평을 6억5천만원에 계약을 했지 뭐예요. 그때가 2004년 2월인가 되었던 것 같아요. 시세보다 이천만원 싸게 샀다고 좋아했죠.'
'그럼 잘 되었네.'
'들어봐요. 은영이 아빠가 그 아파트를 산 이유는 재건축 입주권의 전매 제한이 위헌 결정이 난다는 소문과 재건축 조합들의 끊임없는 민원으로 인해서 그 전해에 발표한 9-5 부동산 대책이 철회될 가능성이 강하게 제기 되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9-5대책으로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어서 앞으로 2년 내에 공급 부족현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부동산 사이트이 여론을 조작하고 있었구요'
'그 전해 11월부터 전세금이 본격적으로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4월이 되니까 수도권의 전세금 많이 하락을 했죠. 우리도 집 뺀다고 고생을 좀 했죠. 기억하시죠 우리가 이사할 때 주변시세보다 싸게 들어갔다는 것을 그랬기 망정이지..... 수원 집에서 나와서 안산으로 이사를 갔는데. 24평으로 늘려갔으니까요.'
'그랬어' 난 듣기만 했다.
'그 영향으로 서울의 집값도 내려가기 시작하더군요.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해 가을에 입주권 전매 제한이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은마 아파트는 재건축보다 리모델링하기로 하고 값도 많이 떨어졌죠.' ' 몇 년을 그렇게 끌다가 2007년에 리모델링을 했는데 개인부담이 매우 컸지요'
'평당 260만원이라고 하던가 270만원이라고 하던가....하여튼 구천만원 정도 들었데요. 그리고 그 이듬해(2008년) 봄에 다시 입주를 했는데. 그 때부터 부동산 폭락이 시작된 것이죠.'
'그럼 다시 입주했을 때 시세가 얼마인데'
'6억 정도로 떨어졌죠' '그런데 지금은 얼마인 줄 아세요'
'얼마인데'
'4억 2천 정도'
나는 대충 계산을 해 보았다.
매입비 6억5천에 리모델링비 9천만원을 더하면 7억4천이고. 리모델링을 할 때 이주비를 대략 천만원으로 계산하면 7억 5천이고, 그 이자를 10년동안 5%를 복리를 계산하면 4억7천이다. 그럼 손실은 거의 손실은 8억에 이른다는 단순 계산이 나온다.
충격이다.
'은영이 아빠가 집 살 때 부동산 담보대출을 받았거던요. 무려 3억을 받았죠. 처음 몇 개월은 잘 버티었는데 이자 부담이 너무 커서 어쩔 수 없이 은평구에 있던 단독 주택을 팔아서 그 빚의 일부를 갚았죠. 그 때 남은 대출금이 1억 정도 되었는데 그것이 계속 발목을 잡은 것이죠. 은영이 엄마는 손해 보고 팔자고 했으나 은영이 아빠는 손해보고 팔 수 없고. 언젠가는 다시 오를 것이란 희망으로 버틴 결과가 오늘에 이른 것이죠. 참 안되었어서요.'
와이프가 피곤해 보여서 자라고 하고 나는 인터넷을 검색했다.
그 동안 우리나라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기에 잠도 오지 않았다.
검색 창에 부동산을 치니까. 관련 기사가 100만개가 넘었다. 다시 세부 검색을 했다.
그 중에서 김호석 박사의 10년간 한국 부동산 시장을 분석한 논문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논문의 내용은 대충 다음과 같다.
"한국 역사상 부동산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은 2003년 9월 5일에 발표한 9-5대책과 그 이듬해 6월5일 입법 예고한 6-5조치이다. 그 대책 이후로 작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자산 가치가 하락하였고. 올해에는 진정 기미가 곳곳에 포착되고 있다.
그 당시에 만일 부동산을 잡지 못했다고 하면 정말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 것이란 것은 모든 경제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고. 좀 더 빨리 그런 대책을 세우지 못한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본 논문도 그런 견해에 부분적으로 공감을 하나 9-5대책과 6-5 조치가 나오지 않았어도 우리나라의 부동산의 가치는 하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고 보고 다만 9-5대책이 부동산 가치 하락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
본 논문은 2002년과 2003년의 아파트 가격의 폭등의 1차적인 책임은 한은의 금리 정책의 실패에 기인한다고 본다. 2001년의 줄기차게 실시한 한은의 저금리 정책이 그 당시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하는 400조에 이르는 유동성 자금을 방치한 결과이다.
그 당시 한은의 저금리 정책으로 인하여 은행의 예대금리가 지나치게 낮게 형성됨으로써 은행에 돈을 넣어두는 것은 바보로 인식되었다. 그렇다고 투자자들이 그 전에 실패한 주식에 투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라서 돈이 갈 곳은 부동산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러했는데 한은의 박승 총재는 주택 보급률 100% 운운하던가 입시제도를 바꾸면 강남의 아파트 가격을 잡을 수 있다고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했다. 한은의 박승총재는 부동산에 대한 안이한 생각과 무지로 인하여 시중의 유동자금이 부동산 특히 아파트 투기로 흘려가는 것을 방지하지 못했다.
박승 총재는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은 것에 너무 고무되어 있었고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의 집값이 다른 곳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적게 올랐기 때문에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이 2002년과 2003년 부동산 폭등하고 있는데 대하여 한은이 고집스럽게 저금리정책을 취한 근본 원인이었고. 그 결과도 끔찍했다.
2003년 9월초에는 요즘으로써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파트 가격이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그 당시 중소기업의 연봉에 거의 해당하는 평당 2천5백 만짜리 재건축 아파트도 등장하였던 것이다.
9-5대책은 이런 살인적인 아파트 투기를 봉쇄하려고 시도했다. 초기에는 이런 의도는 성공하는 듯 보였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9-5대책이 나온 후 가격이 급락했고. 영원히 최고가를 회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면을 보면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에 대한 투기붐은 잠재웠지만 투기심리를 뿌리 뽑은 것은 아니었다. 투기꾼들은 주상복합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였고. 개발의 이슈가 있는 곳은 늘 술렁거렸다.
부동산 가격의 본격적인 안정은 2004년 6월 5일 입법 예고된 분양가 공개 의무화의 시행으로 비로소 잠재울 수 있었다. 그 전까지 아파트 분양가는 건설회사의 자율에 맡김으로써 분양가 인상 경쟁을 유발하였고 이는 다시 기존의 아파트 가격을 끌어 올렸으며 이는 다시 분양가를 인상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어서 어떤 부동산 대책도 아파트 가격 인상을 막지 못했다.
분양가 공개 의무화가 시행되면 그 당시 분양가가 최소 15%에서 최대 25%정도 부풀려 있었던 점에 미루어 아파트 가격이 내려갈 것을 염려한 아파트 투기꾼들이 대량으로 매물을 내어 놓음으로써 비로소 아파트 가격이 하락하였다.
분양가 공개 의무화가 시행된 후부터 실제로 분양가는 20%정도 하락하였다.
솔직히 주택 보급률이 2002년에 100% 넘었다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주택보급률 통계의 허점을 이해하지 못 한데서 비롯된 결과이다.
2002년에 이미 주택보급률이 100.6%에 도달하여 사실상 집이 남아돌고 있다고 통계청에서 발표했지만 이는 통계 기법상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주택보급률을 계산할 때 1인 가구를 제외함으로써 가구수를 실제보다 적게 계상함으로써 주택보급률을 올리고 있었다. 그 당시 1인 가구는 전체 가구수의 10%를 넘고 있었다. 특히 서울은 15%정도에 달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발표한 주택보급률 100%는 실제로는 91%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서울의 주택 보급률을 82%로 발표하였기에 실제로 71%에 불과하였기에 주택부족분은 더 많은 것이었다.
서울에 특히 1인가구가 많았던 것은 대학생과 그 취업 준비생, 사회초년생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직접적인 주택수요에 영향을 주지 않았지만 임대수익을 노리는 투자자들에 의해서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집값 하락은 지방은 2004년 여름부터 시작되었고 이는 수도권까지 영향을 주어서 서울의 집값 하락은 2005년 봄부터 본격화 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물론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는 2003년 9월5일부터 하락했다가 그 이듬해 봄에 일시적으로 반등하였다가 가을에 다시 떨어졌지만)
집값 하락의 근본원인은 유동성 자금이 주식시장과 은행으로 흘려 들어가면서 투기 수요가 소멸한 것과 서울 인구의 감소였다고 보여진다.
2003년 급증한 중국 수출이 2004년에도 계속되었다. 중국 수출의 과열로 인하여 경기는 급격히 호전되었고 경기 과열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한은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선제적 조치로 2004년 초부터 콜금리를 계속 인상하기 시작하였다.
콜금리 인상은 은행 대출 이자의 인상으로 이어졌고. 시차를 두고 예금 금리도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그 해 가을에는 400조에 달하는 유동성 자금의 절반이 주식 및 그 간접 상품으로 흘려 들어가 주가 지수를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는 유동성 장세를 연출할 때 부동산에 재미를 못 보던 자금들이 은행으로 돌아오기 시작함으로써 부동산 경기가 급랭하였다.
서울지역의 부동산 가격 하락의 원인을 유동성 자금이 주식이나 은행으로 이동으로 인해서 발생하였다고 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수요만 충분히 있다면 서울의 특성상 공급 부족이란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다시 오를 수 밖에 없는 것이 아파트 가격이다. 그런데 한번 하락하기 시작한 아파트 가격이 아직도 하락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는 유동성 자금의 문제만은 아닌 것이다.
서울 지역의 부동산 가격 하락의 근본원인은 수요 층의 감소에 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서울 인구는 1992년 1097만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2004년 가을의 서울의 인구가 다시 천만 이하로 줄어들었고 행정수도 이전으로 인해서 더욱 줄었다. 서울 인구의 감소는 2013까지 계속되었다가 920만을 끝으로 작년에 소폭 증가하였다가 올해에 증가 폭이 더욱 커졌다.
최근에 부동산이 다시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보여진다.
<중략>"
김호석 박사의 논문은 매우 길었다. 이것을 다 읽으려면 날을 새야 할 것 같아서 중간에서 포기하고 눈을 부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상쾌한 느낌이다.
퇴원한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한다.
의사는 간단하게 진료를 하고 퇴원해도 좋다고 한다. 쿡 실장이 나를 주차장까지 안내한다.
운전사는 나를 보자 새로 왔다고 인사를 하면서 잘 부탁한다고 한다.
나도 가볍게 인사를 했다.
차를 타고 병원을 나서자 본격적인 정체가 시작된다.
운전사는 요즘 국민차가 너무 늘어서 호치민시 중에 안 막히는 곳이 없다고 투덜거린다.
'여보, 정말 호치민에는 못 살 것 같아요'라고 옆에 앉은 와이프가 말한다.
'여기는 대형 쇼핑몰이 없냐 봐' 나는 와이프가 대형 쇼핑몰을 좋아한다는 사실과 그것이 없으면 대단히 갑갑해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여기는 너무 많아서 탈이죠'
'그래 아빠 여기는 없는 것이 없어.. 엄마가 좋아하는 롯테도 있고. 까르푸도 있고, 이마트도 있고...' 아들이 나서서 말한다.
'당신 좋아하는 것 다 있네'
'그것은 캄란에도 다 있어요'
'그래. 그럼 왜 호치민이 싫어'
'사람이 너무 많잖아요'
'당신 사람 많은 것 좋아 했잖아'
'어느 정도 많아야 좋아하지'
'당신 바뀌었네'
'뭐가 바뀌었다고 그래요'
'아냐' 나는 얼버무렸다. 내가 아는 와이프는 서울과 같은 대도시를 좋아하고 시골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세월이 사람도 바꾼다는 생각이.......
몇 시간의 정체 후에 차는 고속도로를 진입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해도 별로 나아진 것이 없었다.
'언제나 이렇게 밀리나' 갑갑한 마음에 운전사에 물었다.
'아뇨. 오늘따라 이상하게 막히네요. 옆에 만들고 있는 새 고속도로 보이죠. 내년에 개통입니다. 저것 뚫리면 30분이면 호치민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허허 ' 운전사는 자랑스럽게 말하고 웃는다.
'2년 동안 차가 너무 늘었죠. 요즘 차 없는 집이 없으니...'
'그런가 자네는 뭔 차를 가지고 있냐'
'국민차를 주문은 했는데 앞으로 두 달은 더 기다려야 한다고 하네요. 요즘 주문이 넉 달이나 밀렸다고 하네요'
'그래 차 값이 얼마지'
'3천5백만 동이죠'
'자네 월급은 얼마지'
'3백만 동 조금 넘죠'
'그래' 나는 운전수가 주제파악을 못하고 너무 무리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제 월급으로 구입하기는 좀 힘들죠. 요즘 와이프가 다시 일을 시작해서 가능하죠'
'와이프는 뭐 하는데'
'학원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베트남어를 가르치고 있어요. 요즘 어학 연수생들이 너무 많아서 밤늦게 돌아와요'
'국민차는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했나'
'2년 반전에 나왔죠. 베트남 자동차 공사와 BAIC간의 합작으로 나왔고.
1000cc로 제한되어 있죠. 첫해는 5만대를 생산했고. 요즘은 생산량이 늘어서 년간 30만대 정도인데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요. 시장 점유율은 50%정도일 것입니다. 대단한 인기죠'
'BAIC는 어떤 회사지'
'BAIC는 베이징자동차 회사로 중국에서 가장 큰 자동차 회사죠'
'그런가'
'아빠 여기 봐. BAIC 내가 찾아서' 아들은 자신의 서치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노트북PC를 보여준다.
"BAIC는 베이징자동차회사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중국내의 자동차 붐을 바탕으로 연간 30%씩 고성장하는 회사이다. 작년에 535만대를 생산하여 532만대를 생산한 현대 자동차를 누르고 처음으로 세계 빅5에 들어간 회사이다. 올해의 생산 목표는 580만대이며 세계 120개국에 수출을 하고 있으며 생산 거점은 베트남과 북한 이란 등 5개국 32개 공장이다. 종업원은 25만 명으로 연간 매출 규모는 2500억 위안(2015년 환율로 계산하면 750억 달러 정도이다)이다.
생산대수에서 현대를 추월했지만 매출은 아직도 현대의 70% 수준으로 차량 고급화가 시급하다고 한다.
BAIC의 발전 전략은 고급 차종에서 출발하여 소형차로 차종을 다양화한 것과 다른 나라 국민차 시장을 지원하면서 성장한 특이한 경우이다. BAIC가 본격적인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2003년 다임러크라이슬러와 합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최초의 해외 투자는 2008년 이란의 국민차 사업을 주관한 테헤란 자동차 컨소시엄에 다임러 크라이슬러와 함께 참여함으로써 이루어졌다. 현재 이란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30만대이며 이란 시장 점유율은 58%에 달한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이란 및 그 주변국의 자동차 시장을 겨냥하여 100만대 규모의 제 3공장을 증설하고 있으며 이의 완공 목표는 2016년이다.
북한 진출은 2011년 승리자동차와 합작으로 시작하였으며 생산능력은 60만대에 이르며 생산제품의 절반은 해외 수출품이며, 주요 시장은 중국과 일본이다. 올해부터 남한의 GM대우에 소형차 공급 계약을 맺음으로써 20만대 규모의 생산라인 증설을 추진하고 있으며 완료되면 80만대 규모가 될 것이다.
베트남 진출도 2010년에 르노사와 공동으로 베트남 자동차 공사와 합작으로 진출하였다가 최근의 르노사의 지분을 전부 인수하면서 사업에 탄력이 붙었다. 연간 30만대 생산능력을 올해 안에 배증하고 내년에 신규로 30만대 생산 공장을 신설하여 동남아 전체 시장을 공략하는 교두보를 삼겠다고 한다
중국내 생산라인도 증설하고 있으며 향후 2년 내에 160만대의 추가 생산 라인을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이런 계획들이 완성되는 2017년이며 전체 생산량은 895만대에 이를 것으로 보여 포드를 제치고 빅4의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보여진다."
그다지 유쾌한 내용은 아니다. 중국 기업들의 성장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현대가 빅5에서 탈락했다는 것은 기분을 상하게 하는 내용임에는 분명했다.
아들은 다시 노트북 PC를 가져가 게임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그만 창을 열어 동영상을 본다. 녀석이 나 닮아서 동시에 두가지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화질과 그래픽 수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 저 정도의 그래픽과 동영상을 동시에 받으려면 초당 200Mb의 데이터 통신이 가능해야만 될 것 같다. 그 동안 정체도 풀려서 차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계기판을 보니 지금은 110km로 가리킨다. 100km 이상 고속주행 중인데도 동영상의 끊김 현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이 정도의 무선데이터 송신 시스템을 갖추려면 4G 서비스가 아니면 곤란하다. 12년 전에 이론적으로만 존재했던 4G 서비스가 이 나라도 실현 된 것 같다.
집에 도착하자 거의 파김치가 되었다. 정말 징그럽게 막힌 하루였다.
집은 프랑스풍의 저택이었다. 집에서 바로 캄란만이 보였다. 참 아름다운 항구였다. 곳곳에 보이는 컨테이너크레인만 빼면 경관은 더 없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집에서 이틀을 쉬고 화요일 출근을 했다. 와잉 장군이 오후에 직접 회사로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회사는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출근하자 그 동안 밀린 내용에 대한 서류들이 많았고. 회의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4시에 와잉 장군과 미팅을 했다. 이번 일본 방문 시에 베트남 정부의 요구 사항들을 다시 한번 더 설명해 주었고. 자신의 협상안도 설명해주었다....
“이번 방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일본쪽에 관철 시켜야 하는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전투기 제작의 핵심 기술의 이전이고, 둘째는 가격을 대당 7천200만달러 이하로 확정하는 것이고, 셋째는 향후 5년 내에 미쯔비시 중공업에서 베트남산 항공기 부품을 30%이상을 구입토록 하는 것입니다.
협상카드는 지난번 김사장님이 제안한 중국산 F-11과 국내 여론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중국산 F-11의 가격을 이번에 OPEN하여 일본쪽을 압박할 생각입니다. 미쯔비시 중공업도 매출 하락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등”
설명을 듣는 내내 참 치밀하면서 애국심이 철철 흘려 넘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신문을 펼쳤다.
“비엔호아시 외곽에 ‘신비엔호아’라는 신도시 건설의 기공식이 어제 열렸다고 한다. 이 사업은 국내 8개 건설업체 컨소시엄이 사업에 참여하며 건설규모가 4400㏊(약 1320만평)에 22만 가구로 100만명을 수용할 예정이다. 어제 기공식으로 신도시 건설은 본격화되어 오는 2017년 시범단지가 완공되고 전체적으로 2020년 말까지는 완료될 수 있을 것이고 한다. 이것이 완성되면 호치민시의 만성적인 주택부족과 교통난을 어느 정도 완화시켜줄 것으로 분석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많은데 인구를 외곽으로 분산시켜서 오히려 호치민시 권역만 확대시켜는 결과로 장기적으로 호치민시로의 집중화 현상을 더 부축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도시 학자들도 있다.
이 사업에 소요되는 금액은 136조동(210억달러)에 이르고 그 충당방법은 국고 20%와 민간업체 부담이 80%이다. 민간업체는 아파트를 선분양해서 자금을 조달한다고 한다.”
6일 건설성의 발표에 의하며 2030년까지 신비엔호아 이외에 2개의 신도시를 더 건설하여 호치민시의 주택난을 완전히 해결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신도시간의 고속도로와 전철로 연결하여 만성적인 교통난도 해소하겠다고 발표했다”
‘비엔호아는 어디에 위치하나’ 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운전사에게 물었다.
‘호치민시 북쪽에 위치하죠’
‘호치민시와 얼마나 가깝지’
‘1번 고속도로로 가면 금방이죠. 참 사장님 사고 난 곳 부근이겠네요. 신문에서 봤거던요. 사장님 사고 나신 것’
‘그런가’
이런 저런 잡담을 하다가 집에 도착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서재로 가서 컴퓨터를 켰고 이메일을 열어봤다. 싱할리에게서 보고서가 첨부 동영상 파일로 도착했다. 메일 내용은 스리랑카 공장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빨리 건강을 찾으라는 내용이었다.
첨부 파일을 열어봤다. 공사 진행 사항이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공사는 예정보다 1개월 정도 일찍 끝날 것 같다고 한다. 이 친구는 얼굴이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다. 12년의 세월이 흘렸는데 도쿄에서 본 그 이미지 그대로였다.
12년 전 8월에 나는 도쿄에 갈 일이 있었다. 그 때 납품해야 할 제품이 납기가 늦어서 급하게 일본에 가서 핸드 캐리어를 해 와야 했다. 토요일 오전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그날도 나리타 공항은 비에 젖어 있었다. 호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 친구도 버스를 타기 위해서 나 옆에 줄어 섰다. 첫 인상은 매우 강해 보였다.
우리는 같은 호텔에 묵게 되었기에 내가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명함도 주고 받았는데 명함에는 스리랑카 공군의 그룹 캡틴으로 되어 있었다. 짧은 영어로 내가 이것 저것 물어봤는데, 자기는 미국으로 3개월 연수를 가는 길인데 일본에서 1박을 한 후에 내일 출발한다고 했던 기억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난다.
또 메일을 검색했다. 사적인 메일이 생각보다 많다. 내일 베트남 방문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열어봤다. 발신자가 안 회장이라는 사람이다.
“내일 오전 9시 호치민으로 출발 예정이며 시간이 허락하면 내일이나 모레 저녁을 같이 먹고 싶다는 내용이다.” 안회장이 누군지 궁금했다. 혹시 해서 주소록을 클릭해 봤다. 안회장의 프로필과 동영상이 나왔다.
일전에 같이 일했던 안상무님이다. 그 때보다 많이 늙은 것 같다. 안상무님과는 2003년 6월말에 HOT DI SYSTEM 개발을 의뢰함으로써 알게 되었고 개인적으로 상당히 호감이 가는 분이었다. 나는 그 장비를 개발하는데 2주일 정도 걸렸고 제작하는데 2주가 걸렸다. 셋업 하는 과정에서 약간은 문제도 있었지만 고객들은 만족했고 다른 회사에서 관심을 많이 가졌다. 특히 삼성전자에서 관심이 많아서 그 곳 장비 담당자가 현장까지 방문하여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가기 까지 했다.
그 이후에 안상무님이 일렉트로나이저사 수소발생기에 대하여 수리를 의뢰한 것 까지 기억이 난다. 수리가 순조롭게 되면 그 장비를 베트남에 판매할 것이라고 했다.”
동영상을 보니 뵙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일 저녁에 만나겠다고 답장을 보내고 설레이는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호치민시의 저녁은 매우 붐비었다. 약속한 시간이 6시인데 벌써 5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다. 마음이 편치 못하다 약속시간에 대한 강박 관념은 여전한 것 같다.
나는 자꾸 기사에게 좀더 빠른 길 없냐고 물어보지만 기사의 대답은 한결같다. 저도 호치민시는 잘 모른다 말뿐이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안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 김사장 벌써 도착했어. 미안하네, 가고 있는데 길이 너무 막힌다’ 안회장님이 밝은 목소리로 먼저 양해를 구한다.
‘ 네 알겠습니다. 얼마정도 걸릴 것 같습니까’
‘한 30분 늦을 것 같네. 기다려 주게’
‘천천히 오십시오. 그럼 좀 있다가 뵙겠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었다.
통화 후 20분 만에 도착하였고. 웨이트의 안내를 받아 예약석에 앉았다.
15분 정도 있다가 안회장님이 들어오면서 ‘오랜만이네 잘 지내나 김사장’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정말 오랜만입니다’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12년 만이니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흐른 후에 만나는 것이다.
‘벌써 1년 다 되어가지. 작년 10월에 만나고 처음이니까.’
‘아~ 네’ 라고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아 내가 요즘 정신이 없다니까. 김사장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니까 기억 못하겠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왔습니까. 어제 메일 보니까. 플랜트 계약건 때문에 방문이라고 적혀 있던데..’ 메일 내용을 생각하면서 물어 봤다.
‘아! 초고순 암모니아 플랜트 내일 계약하거던……. 그래서 왔지’
‘그래요. 여전히 가스쪽으로 하시는 모양이네요. 잘 됩니까’
‘그저 그렇지 뭐. 이제 우리나라는 한물 갔고, 베트남에 일이 많지, 나도 김사장처럼 베트남으로 회사를 옮길까 하고 생각중이네’
‘어떻게 베트남하고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김사장인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10년 전에 수소 발생기 중고 수리한 것 기억나’
‘일렉트로라이저 것 말씀하시죠. 셀이 5개인가 6개던가, 삼성전자에서 아웃 시켰던 것 말씀하시죠’
‘맞네’
‘그럼 12년전이네요’
‘그런가. 이 사람 기억 하나도 안 잊어 먹었네’
‘이상하게도 그 해 9월 추석이전은 어제 같이 기억이 나고 그 이후부터 기억이 하나도 안 납니다.’
‘그래’ 안 회장은 신기하게 나를 쳐다본다.
‘의사가 뭐래’
‘드문 경우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건 그렇고 그 수소발생기 어떻게 진행했죠’
‘말도 말게, 그것 엄청 아카지(적자) 났잖아.’
‘김사장도 고생 엄청했지. 그 고생을 밑천으로 이렇게 베트남에 자리 잡았으니 보상은 된 것이네’
안회장은 저녁을 먹으면서 그 때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 해준다
‘그런데 암모니아 플랜트는 어떤 회사와 계약을 맺습니까’
‘럭스피아 비나란 회사인데. 한국계야’
‘럭스피아라면 혹 전주에서 LED(발광다이오드) 패키징하던 회사 아닌가요’
‘맞네. 그 회사 엄청 돈 벌었지.’
‘자네가 말했지 앞으로 10년 이내에 조명의 절반은 LED로 바뀔 것이라고… 그때는 뭔 소린가 했네’ 잠시 숨을 쉰 후 ‘위를 보게 전부 LED등이지’
위를 보니까 아주 밝은 전구가 빛을 발하고 있다. 휘도가 삼파장등보다 더 높은 것 같다.
‘저것 전부 럭스피아 비나 제품이네’
‘기술이 많이 발전했네요. 저 정도 휘도를 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인데’
‘그렇지 저것 만드는데 초고순도 암모니아가 들어가잖아’
‘그렇죠, 7N정도의 암모니아가 들어가죠’
‘요즘은 9N의 NH3가 들어가지’
‘김사장인 PURIFIER의 대가이니까. 잘 알겠지만 NH3를 9N까지 정제하기
가 쉽지가 않지’
‘그렇죠’
‘이번 플랜트가3차 공사로 생산부터 정제까지 일괄수주를 했다. 금액은 80억원이지’
‘그럼 럭스피아 비나의 LED생산량은 엄청 나겠네요.’
‘그렇지 연간 4조원은 될 것 같은데, 여기서는 웨이퍼부터 패키징까지 전부 생산하지 세계 LED의 1/10을 공급하지’
‘그런가요. 형광등까지 다 대체되었나요’
‘아직 형광등까지는 안되었지, 아직도 형광등이 생산 단가가 저렴하잖아. 곧 형광등도 대체되겠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2차로 호프집에 갔고 그곳에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헤어졌다. 술이 예전보다 많이 세진 것 같다.
며칠 후 나는 일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쿡 실장과 함께 호치민 국제공항에 갔다.
공항 주변은 거의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
공항 확장과 더불어 배후 도로 건설과 신도시 건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거대한 공사장을 이루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규모로 인해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쿡 실장 호치민 국제공항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글쎄요. 지금은 인천공항과 비슷할 것 같네요. 저기 하는 공사가 끝나면 세계 최대라고 하던데....'
'호치민 국제 공항이 언제 생겼지...'
'글쎄요. 공항이 생긴지는 무척 오래되었죠. 1차 확장 공사는 2010년에 시작해서 작년에 끝났고. 올해부터 2차 확장 공사를 시작해서 2019년에 완공할 예정이죠. 신도시도 그 때쯤 완공 될 것이라고 합니다.’
거대한 건물이 옆을 지나가면서 보니까. 물류 단지처럼 보인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화물차와 트레일러가 줄지어 서 있고, 열차도 보인다.
아마 복합 물류 단지인 것 같다.
공항에 도착하자 공군 관계자들이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았기에 출국과 관련해서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공항 VIP룸에는 와잉 장군의 일행이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 옆에 있는 탁 대령은 이번 프로젝트의 실물 책임자이고, 옆에 있는 부관은 장군의 수행비서로 지난 화요일 인사를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우리쪽에서는 나와 쿡 실장이 동행하는 것이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오전 9시반 이었기에 시간이 있어서 차를 한잔 마시면 이것 저것 이야기를 했다.
탑승시간이 되어서 항공기에 탔다.
항공기의 내부는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VIP석은 상당히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비행기는 이륙을 했고, 곧 베트남 해안과 남지나해가 눈에 들어왔다.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안전벨트 샤인 등이 꺼졌다.
나는 이코노미스트석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항공기 뒤쪽으로 가 봤다.
이코노미스트석은 좌석간 간격이 예전보다 훨씬 넓어보였다.
전화와 흡연이 가능한 공간이 따로 있었고 좌석의 폭도 많이 넓어진 것 같다.
그 때 한 사람이 옆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히 전화 부스로 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핸드폰을 받는다.
그러고 보니까. 이륙 전에 핸드폰을 꺼놓으라는 방송이 없었던 것 같다.
12년전에는 비행기 안에서 핸드폰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기술적인 어려움 보다 항공 계기의 오작동이 염려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내세워 핸드폰을 꺼놓도록 강제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핸드폰이 항공계기의 오작동을 일으킨다는 것은 항공회사들의 사기였다고 믿고 있었다. 항공기내에 설치되어 있었던 비싼 전화기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유포하여 핸드폰을 못 쓰
게 했다는 사실이 나중에 판명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