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9주일설교 시편45:1-17(사랑의 노래)
본문: 시편45:1-17
제목: 사랑의 노래
오늘은 시편45:1-17의 말씀을 가지고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랑의 노래”
가요를 들어보면
참 많은 사랑의 노래를 들을 수 있습니다.
멜론이라는 음악 서버에서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을 검색을 해 보았더니
수없이 많은 노래가 검색 되었습니다.
미친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도 보였습니다.
슬픈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도 보였습니다.
사랑의 정석 같은 노래 제목도 보였습니다.
그리고 꿈속의 사랑, 사랑의 늘 도망가, 그냥 사랑의 노래
심의에 안 걸린 사랑의 노래도 있었습니다.
참 여러 제목의 사랑 노래가보였습니다.
세상에서 보면 사랑은 참 여러 가지 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렇게 사랑한다고 해놓고
싸우고 헤어지고 난리 법석을 떱니다.
사랑이 문제인 것일까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고 쓸데없는 것일까요?
그저 호르몬의 장난으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은 제목이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이 시편을 가지고 결혼식 주례의 말씀으로
사용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노래는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은 소산님에 맞춘 것이라고 말합니다.
소산님은 관주에 보면 “백합화 곡조”라고 말합니다.
백합화는 가장 아름다운 꽃 중에 하나입니다.
이 시편은 가장 아름다운 백합화 곡조에 따라서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사랑의 노래입니다.
1.왕을 위하여 부르는 노래
오늘 시인이 가장 아름다운 곡조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왕을 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1절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말하리니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도다.”
내 마음이 좋은 말로 왕을 위하여 말 하는데
내 혀는 글 솜씨가 뛰어난
서기관의 붓끝과 같다고 합니다.
시인들의 시를 읽어 보면
참 놀라운 단어를 찾아 노래를 합니다.
그들의 붓끝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랑의 노래가 그렇게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게 한 왕은 누구일까요?
역사 속에서 그런 왕이 있었나요?
뉴스를 보면 새로운 대통령에 대해서
칭찬하는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에 일거수일투족에 대해서 이런 면이 훌륭하다
저런 면이 남다르다 하면서 칭송을 합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그렇게 않습니다.
다른 이들은 그러한 행동에 대해서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도리어 화를 내고 싫어하고 짜증을 내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왕이나 대통령이나 지도자들은
어느 누구는 좋아하지만 어느 누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느 때는 칭송하지만 어느 때는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 왕들은 늘 칭송만 받았습니까?
다윗은 그랬습니까? 솔로몬이 그랬습니까?
참으로 훌륭한 왕이었지만
늘 그렇지 못했습니다.
반대편에 선 사람들에게는
원수와 같은 이들이기도 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유다 지파에겐 칭송의 대상이었지만
사울이 속했던 베냐민 지파 사람들에게
원수 같은 존재였습니다.
물론 이 시편의 대상은 다윗 왕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윗은 고라 자손들에게
성막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고라 자손하면 민수기에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해서
분향하는 자리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은 성막에서 봉사할 기회를 주었고
특별히 찬양하는 자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입은 고라 자손들이
왕을 칭송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편은 역사의 글이 아니고 성경입니다.
사람으로서는 이렇게 칭송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누가 이렇게 칭송하고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요?
그렇기에 다윗으로 상징되는 메시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메시야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이 시편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왕,
다윗 왕일 수 있습니다.
실상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노래한 것이며
그가 부른 사랑의 노래는
바로 예수님을 위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누구에게 사랑의 노래를 부를까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사랑을 많은 받은 사람이
사랑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랑의 노래는 감사의 노래입니다.
사랑이 넘쳐서 나오는 노래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신구약 성경 중에서 유일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유일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 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유행가 가사에 나오는 그런 사랑이 아닌
흔히들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닌 유일한 사랑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왕은 유일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구원자이신 하나님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 시인은 하나뿐인 사랑, 유일한 사랑,
그 어느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어느 것과 대체할 수 없는
사랑의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은 결혼식에 불리어진 노래입니다.
누구를 위한 노래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엄청난 사랑은 받은 자가
부르는 노래입니다.
2.내 마음이 좋은 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 말이
달콤한 말이 아름다운 말이 내 마음에 떠오릅니다.
아름다운 시상이 아름다운 노래가 떠오릅니다.
내가 받은 자격이 없는 데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내가 누릴 수 없는 은혜를 받았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데
도리어 은혜를 받고 사랑을 받았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최고의 말이 최고의 노래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은 요동치고 흥분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쉬지 않고
말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그렇게 할까요?
만군의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스바냐3:1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는 그런 사랑을 받는 자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묵묵부답이면 말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사랑을 받았으면 그 사랑을 되갚아 드려야 합니다.
어리다면 받기만 해도 되지만
성숙했다면 드릴 것이 있다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7:47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왜 사랑하십니까?
많이 용서받았다고 알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라고 여긴 것은
자신은 예수님께 많이 용서 받았다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그토록 사랑의 고백을 하며
칭송하며 종으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이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분이셨습니까?
뛰어나서 뛰어난 왕이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렇게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사야53:2에 말하기를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멸시를 받았습니다. 버림을 받았습니다.
간고를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셨습니다.
왜 그런 일을 당하셨습니까?
우리의 질고를 우리의 멸시를 대신 당하셨습니다.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허물을 징계를 채찍을 받으시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보에 실린 시를 잃어 보셨습니까?
제목이 노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노파는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아내들입니다.
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합니까?
그들이 아름다워서 사랑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이 했던 모든 사랑을 알기에 그렇습니다.
그들이 했던 우리를 위한 수고를 알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박옥례라는 여인 나의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이 그러합니다.
그의 풍채는 아릅답지 않았습니다.
그의 얼굴은 빛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신
놀라운 사랑 앞에 놀라운 헌신 앞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고 앞에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 못된 곳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돈이나 권력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그곳에 사랑이 느껴진다면 우리의 신앙은
우상에 물들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그 어떤 화려한 것보다
세상이 그렇게 추앙하는 그 어떤 것보다
세상이 그렇게 화려한 말로 칭송하는 것보다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추앙하고 칭송하고 찬양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바른 곳에 있습니다.
3.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에게 대한 사랑만 있는 분입니까?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것만 있는 분입니까?
3절에 보니 그분은 용사이십니다.
칼을 허리에 차고 전쟁에 나갈 준비가 되신 분입니다.
그 모습은 영화와 위엄을 입었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의 화살은 날카로워
원수들의 심장을 꿰뚫어 버립니다.
그래서 만민이 그 발 앞에 납작 엎드립니다.
감히 누구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원수도
왕 되신 예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왕 되신 예수님은 정의롭고, 정의를 사랑하시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행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모두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입고 있는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풍겨납니다.
우리가 잘 모르는 향수들입니다.
너무 비싸 우리는 만져 볼 수도 없는 향수들입니다.
과거 최고의 왕들이 쓰는 최고의 향수들입니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께 드렸던 향수가 몰약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향내 뿐 아니라
흥겨운 음악 소리도 넘쳐 납니다.
적을 완전히 제압할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흠모할 만한 향기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분이 예수님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4.그러면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그 아름답고 용맹하고 향기롭고 정의로우시며
최고로 화려한 그분이 바로 우리의 신랑이 되십니다.
그렇다면 신부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10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딸이여 듣고 보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먼저 할 일은 신랑에게 듣고 보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시집을 온 여인은 신랑의 말을
듣고 보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거나 옛날에 들었던 말을 따른 다면
그는 신부로서 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더 나가서 옛날에 살았던 습관이나
옛날에 가졌던 생각이나 행동들은 다 잊어 버려야 합니다.
결혼생활을 어렵게 하는 것은
지금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에 머무는 것이고
지금 남편이나 아내의 말을 따르지 않고
옛날에 들었던 것을 따를 때입니다.
그래서 무엇이라 권면합니까?
“네 백성과 네 아버지의 집을 잊어버릴지어다.”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집중하여
그에게 듣고 그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 남편은 그렇게 행하는
아내의 아름다움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만나기 전의 모든 일을 버리는 일입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 섬기던 것을
더 이상 섬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 따르던 것을
더 이상 따라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 만나기전 좋아하던 것을
더 이상 좋아해서도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 자신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신랑 되신
예수님에 대한 노래가 있습니까?
그분의 멋짐으로 인해
그분의 향기로 인해
그분의 공의로움으로 인해
아름다운 노래를 하며 춤을 추며 글을 쓰고 있습니까?
난 이상하게 여기는 뉴스 중 하나는
누가 입었던 옷이나 장신구가
완판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가 입었던 옷을 입으면 그가 될까요?
그가 걸쳤던 장신구를 걸치면 그가 될까요?
참 이상한 생각이며 헛된 행동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람을 따라 하고 싶고
그 유명한 사람을 흉내 내고 싶겠지만
우리의 노래와 우리의 사모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여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놀라운 사랑을 받았고
놀라운 은혜를 입었고 그 사랑 앞에 있다면
오늘 시인이 불렀던 노래를 불어야 하며
그렇게 푹 빠져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삶이 날마다
그런 사랑의 노래가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