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5: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2.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심은 것마다 내 하늘 아버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14.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15.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옵소서 16.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17.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장로들의 전통’이란 제목으로 말씀증거 하겠습니다.
얼마 전 국내에서 꽤 비중이 큰 역사적 논쟁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일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었죠.
진보주의 인사들은 1919년 4월13일 상해임시정부가 창립된 날을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고, 올해가 대한민국 정부수립 100주년임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국제법에 입각한 주권과 망명정부 소재지에 대한 국가의 승인과 또한, 실질적인 국가행위를 갖추었기 때문에 상해임시정부는 엄연히 합법적인 정부다’고 했습니다.
반면, 보수주의 인사들은 새로운 독립국가가 탄생했음을 전 세계에 선포했고, 또, 다른 나라와 수교함으로써 국가승인을 받았으며, 제3차 유엔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던 1948년 8월15일이 대한민국 건국일로 보았고요.
‘올해가 대한민국정부수립 70년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이 논쟁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국가 간의 해묵은 논쟁도 있습니다. 독도영유권 논쟁입니다.
일본은 아이들의 교과서에까지 독도가 자국의 영토라며, 거짓 교육을 시키고 있고요.
대한민국은 ‘본래부터 자국영토였던 독도를 반드시 수호하겠다’며 논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종교계의 논쟁도 빼놓을 수 없죠? 소위 안식일 논쟁입니다.
기독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제정해서 지키고 있고요.
제7일 안식교는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구원받고, 일요일에 예배하면 666표를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홈플러스 건너편에 있는 센텀교회가 제7일 안식교 아닙니까?
거의 매주, 제7일 안식교 홍보물을 건물 우편함과 참소망교회 우편함에 꽂고 갑니다.
제7일 안식교는 19세기에 미국의 ‘엘렌 G 화이트’라는 여자가 창시한 교단입니다.
여호와증인의 모태이므로, 제7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의 교리가 거의 같은 겁니다.
그 외에도 많은 논쟁거리가 있고, 지금 이 시간에도 논쟁으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실로 이 세상은 논쟁하다 해가 뜨고 지고를 반복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에도 논쟁이 있습니다.
본문 1-11절까지가 예수님과 유대교 지도자들 간의 논쟁입니다.
무엇에 관한 논쟁입니까? 장로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입니다.
본문2절을 보니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따지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지?’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이죠? 떡 먹을 때에 손을 씻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었습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들의 선조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전통이나 가르침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다가 3세기에 문자로 기록되었는데 ‘미슈나’라고 불렀습니다.
이 미슈나는 영어로 무려 600페이지나 되는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 미슈나를 해설한 것이 우리가 잘 아는 탈무드입니다.
어떻게 해서 미슈나가 이렇게 방대한 양으로 늘어났을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본질은 잊어버리고, 불필요한 규정에 목을 매달았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8-9을 보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을 그들은 24개장으로 세분화했고요.
일에 대한 세칙을 39가지로 정리했습니다.
안식일에 4km이상 걷는 것, 웅덩이에 빠진 양을 구하는 것, 짐을 운반하는 것 등등을 일로 봤습니다. 누가복음 6:1에도 나오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그 때 어떤 바리새인이 뭐라고 질책합니까?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삭을 자르는 것을 낫으로 곡식 베는 일로 판단했고요.
이삭을 손으로 비비어 먹는 것을 탈곡기에 벼를 넣어 쌀을 생산하는 일로 봤던 것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짐에 관한 규정도 십 수가지였습니다.
그러니 600p나 되는 장로들의 전통이 기록된 것입니다.
그들은 미슈나 곧, 장로들의 전통에다가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부여했습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사고가 왜 그렇게 됐죠?
그들이 성경말씀인 율법을 신봉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사람들 맞습니까?
근데 어찌하여 법률문서의 형식을 갖추지 않은 전통에다가 성문율법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 더 큰 권위를 부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야 지금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왜 합니까?
손이 세균에 잘 오염될 뿐 무엇을 잡고, 만지므로 각종 균에 감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들은 한 술 더 떴습니다. ‘손이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부정해진다’고 믿었고요.
그 부정한 것을 차단하기 위해 바깥에서 들어오거나, 식사를 하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규정했던 겁니다. 그것을 전통으로 묶고, 거기에 권위를 부여했던 것이죠.
그런 그들을 보시는 예수님은 그들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매우 한심해 하시고, 한편으론 불쌍해 하셨을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본질은 이해하거나 알려 하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에 매달려, 그것으로 뭇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개탄을 금치 못하셨을까요?
본문3-1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그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된 네 권의 복음서를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본문 3-11절처럼 한 가지 이슈에 대해 이렇게 길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나요?
각종 비유나 산상수훈처럼 예수님이 친히 가르치신 내용 말고는 흔하지 않을 겁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그들의 작태가 너무 한심하여, 그처럼 길게 설명하시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먼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통을 지킨다는 명분 때문에 정작 하나님의 명령은 깨뜨려버리는 그들의 과오와 죄를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을 중시하는 것을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본문5-6절을 보세요. 그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느라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도론, 또는 막7:11에서는 코르반이라고 하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뜻 아닙니까?
그럼, 그들은 ‘부모께 드리지 않아도 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습니다.
즉, 자식으로서 마땅히 부모에게 드리는 물질을 ‘하나님께는 바치고, 부모에게는 주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런 불신앙적인 행위를 두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으로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지키는 자로 자부하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실지로는,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들이 만든 전통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대로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8절 말씀처럼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으로는 관중을 의식하여 연기하는 배우처럼, 진심으로 우러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행동은 본문9절의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장로들의 전통으로 뭇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온전한 자가 될 리 없고, 온전한 사람들을 배출할 리가 없었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a 말씀이 잘 증거 하지 않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또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한다”고 말입니다.
장로들의 전통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하고, 불신앙적인 규례인지 이해하시겠죠?
예수님은 또 본문10-20절 말씀을 통해 맨 먼저 언급하신 장로들의 전통의 오류와 죄에 대해 지적하시고, ‘그 지적을 듣고, 깨달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지적의 내용이 무엇이죠?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게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게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는 겁니다. 과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깨달았을까요?
그들은 물론, 본문15절을 보니까 베드로를 위시하여 예수님의 제자들도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에 대해서는 ‘부정하느니 그렇지 않느니’라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배로 들어가는 음식은 모두 뒤로 내버려지므로 다 더러운데, 뭐 그리 부정할 게 있고, 깨끗할 게 있느냐”는 겁니다.
따라서 본문20b절 말씀처럼, “설령 씻지 않는 손으로 먹더라도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은 진정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에 대해 소상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본문18-20a절에 그 내용이 있죠?
“뒤로 내버려지는 것도 더럽지만 더 더러운 것은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다”고요.
그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등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더 중시하는 장로들의 전통과 그리고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고 하면서 정작 자기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는 장로들의 전통은 다 잘못된 것입니다. 모두 다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장로교회 가운데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은 없을까요?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장로들의 전통과도 같은 것이 있음에도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하고, 계속 고수하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과거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 중에 예배 때, 남자 여자를 따로 앉혔습니다.
어떤 교회들은 남자와 여자 좌석 사이에 커튼을 쳐서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혹, 남녀가 섞여 앉기라도 하면, 뒤에 있는 성도들이 키들키들 웃기까지 했습니다.
그것을 무너뜨리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장로들의 전통은 제거돼야 합니다.
이제는 헌금주머니로 헌금거두는 일이 없어져야 합니다.
그것 또한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인데도, 다수의 교회들이 여전히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재정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은 아닌지요?
‘다른 이유도 있다’고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솔직해져야 합니다.
각종 헌금의 종류를 만들어 헌금하게 하는 것도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들이 만들어서 거두는 헌금의 종류가 얼마나 될까요?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월정헌금, 생일헌금, 심방헌금, 부흥사경회헌금, 특별헌금, 성서주일헌금, 총회주일헌금, 세례교인헌금, 구역헌금, 은급헌금, 구제헌금, 선교헌금, 헌신예배헌금, 건축헌금, 부서별 헌금 등, 모두 18가지입니다. 절기헌금까지 하면 더 됩니다.
부활절헌금, 맥추감사헌금, 추수감사헌금, 성탄절헌금 등을 합하면 무려 22가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 외의 다른 모든 헌금은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것입니다.
모든 헌물은 자발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전통으로 여겨, 강조할 부분은 아닙니다. 우리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오히려 드리지 않는 것이 현명하고요.
그런 믿음의 고백이 될 때에 드려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기뻐하며, 받으십니다.
혹여, 복이나,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기 위한 목적이라면 드리는 일을 보류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면서 부모로부터 반대급부를 받을 것이란 생각을 합니까?
그런 마음으로 드린다면,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물며,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더 받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헌물을 불쾌하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일전에 모 교회 안수집사님이 오셔서 식사하는 도중에 제게 질문을 하더군요.
‘목사님! 왜 예배 중에 헌금한 사람을 호명하고, 일일이 기도해 주지 않습니까?’
‘누구누구 집사님 생일헌금 드렸네요. 축복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지적한 것 같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런 전통에 젖어 있는 그에게 설명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성경적으로 설명한다 해도 그 사람이 자신의 전통을 버리겠습니까?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에 ‘생각이 다릅니다’라며, 웃어넘겼습니다.
개척초기에 심신이 너무 지치고, 목회가 어려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경기도 소재 어떤 교회에 며칠 간 다녀온 일이 있습니다.
후배목사님이 ‘그 곳에 가서 며칠 간 집회에 참석하면 해결될 것이다’는 말을 따른 거죠.
‘3-4일을 있겠다’고 작정하고 갔으나, 당일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아까 안수집사님이 제게 요구했던 그대로 그날 집회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하더라고요.
게다가, 그 분의 신학마저 이상했습니다.
후배목사님의 성의는 고마웠으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에게 권면했습니다.
‘목사님! 이런 집회는 다니지 마세요.’
만 10년간의 개척목회에 지우고 싶은 오점입니다.
일전에 잠시 설명을 드렸습니다만 맥추절, 추수감사절, 월삭예배, 성령강림절 등과 같은 절기를 지키는 문제도 이제는 한국교회가 고민해봐야 합니다.
맥추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가운데 초실절, 칠칠절, 오순절과 같은 거고요.
추수감사절은 수장절, 초막절, 장막절과 같은 겁니다.
한국교회가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은 지키면서 유월절 곧, 무교절은 지키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월절은 어린 양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인해 구원받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3대절기 중 가장 중요한 절기이므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가장 중요한 유월절만 쏙 빼 놓고 왜 지키지 않는 걸까요?
일전에 ‘복음증거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하나님의 교회의 성도가 있다’고 했죠?
그가 저를 만날 때마다 늘 건네는 말이 ‘목사님! 유월절을 지키십니까? 왜 안 지키죠?’였습니다. 그 사람이 볼 때도 교회들이 이상했던 겁니다.
초실절과 수장절과 같은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은 지키면서 정작 유월절은 지키지 않으니, 이상할 수밖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제가 그랬습니다. ‘이사야 1장을 잘 읽어보고, 말씀하세요.’
우리 모두 이사야 1:11-14을 읽어볼까요?(구약성경 967P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창조주시므로 이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필요하고 가지고 싶으신 게 뭐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따라서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 외식적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물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지키는 월삭 곧, 이스라엘에서 매달 음력 초하루에 종교 행사를 갖는 것과 정한 절기도 싫어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왜 월삭과 절기를 싫어하실까요?
오늘날 예배와 절기는 매일 아니, 호합하는 순간마다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와 헌물은 무엇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죄 사함 받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물입니다.
여러분!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른 종교들은 모두 상향식인데, 기독교만이 하향식이란 게 큰 차이점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종교는 ‘자신들이 소유한 재물을 자신이 믿는 신께 드려야 신의 노여움을 풀 수 있고, 그 신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아무 상관 않습니다.
그들은 ‘값비싸고, 가치 있는 제물을 드리면, 신의 분노까지 달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헌물은 그러한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거룩하고, 공의로운 마음과 삶으로 드리려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와 헌물을 하나님은 기뻐하며,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것이 또 있습니다.
예배 중에 일어나고 서는 것도 장로들의 유전과 같은 전통이 아닐까요?
각 교회들이 거의 같음을 보면 장로들의 유전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일어서서 예배드리다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 후에 앉고요.
축도하기 전 마지막 찬송할 때 일어섭니다.
모든 예배순서를 앉아서 드리면 안 되는 걸까요?
가만히 앉아서 드리면 더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릴 것 같지 않습니까?
예배에 익숙하지 못한 새 신자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장점도 있고요.
정 일어서서 예배드리고 싶으면 성경적으로 해야 합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에스라가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읽을 때에 백성들이 모두 일어섰습니다. 그렇다면 성경봉독 할 때, 성도들을 일어서게 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믿음의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교회 전통이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닌지요?
개인에게 속하는 장로들의 전통은 어떻고요?
본문말씀에서 지적하시듯, 혹 하나님께는 잘 바치면서 자기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는 경우는 없는지 잘 살펴봐야 합니다. 레슨으로 떼돈을 번 사람이 있습니다.
성업일 때는 불과 몇 년 만에 아파트와 상가를 현금으로 사들일 정도로 많이 벌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늘 재고처분 하는 매장을 선호했고요. 한 번에 몇 벌을 사곤 했습니다.
‘왜 그리도 많이 사느냐’고 물었더니, ‘자기 부모님 갖다 드리려고 한다’ 하더군요.
다 합쳐봐야 10만원도 되지 않는 싸구려 옷들이었습니다.
그가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바치는 헌금은 얼마나 많았을까요?
불신자와 같은 그에게는 서리집사도 과분한데, 몇 년 전에 시무집사가 됐습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께 대한 본질적인 믿음보다 헌물 하는 정도를 가지고 시무집사 되는 조건으로 내세우다 보니, 그런 직분자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며, 정작 자기 ‘부모에게는 드릴 것이 없다’고 여겨, 물질을 잘 드리지 않는 성도들이 다수이지 않겠습니까?
무엇을 드림보다 먼저 ‘도론 혹은 고르반’이란 의식부터 고쳐야 하고요.
나아가 자신 안에 있는 더러운 것 곧, 거짓말하는 입술, 의롭지 못한 언행심사, 비방하는 말들, 남을 모해하는 언사, 불신적인 행동 등을 제거해야 합니다.
그것이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게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맺죠.
본문14절을 보면 장로들의 유전을 따르는 것을 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맹인이 되어, 맹인들을 인도함으로써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하여, 영육이 다 죽게 하는, 아주 위험한 것이다”고요.
그런대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계속 전통을 고수하며, 행하도록 강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진정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을 고수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경외하려면 너희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을 버리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깨끗이 씻음 받고, 내게 나아와 예배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물을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드린다’고 해서 ‘믿음이 좋다’ 하시고, ‘드리지 않는다’고 해서 ‘믿음이 좋지 않다’고 하시지 않습니다.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고, 드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외식주의 형식주의를 버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건, 몸이건, 물질이건, 그 무엇이든지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우리 모두는 우리가 섬기는 교회와 가정과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있는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것을 다 버립시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것도 다 버립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깨끗함 받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드립시다. 그리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받으시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런 생각과 믿음과 삶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가정, 참소망교회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
[출처] 장로들의 전통(마15:1-20)|작성자 시골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