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14
8월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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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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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bJvGTyWOFU (주지환 요한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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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 클라라>
언젠가 아시시에 들렀을 때의 경건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아직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특히 클라라 성녀와 동료 수도자들이 기거했던 다미아노 성당에 들렀을 때, 그 가난하고 소박한 분위기가 눈에 선합니다.
그 좁디좁은 공간에서, 처참할 정도의 청빈한 생활 가운데서도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매들과 함께 찬미가를 불렀던 그녀였습니다. 가난이라고 다 똑같은 가난이 아니라는 것을 그때 느꼈습니다. 웬일인지 그녀의 가난은 우리들의 옹색하고 남루한 가난과는 달리 찬란하고 영롱했습니다.
클라라 성녀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분 계십니다. 가난과 겸손의 성인이자 제2의 예수 그리스도라 불리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십니다. 그가 지녔던 인간적 성품, 그가 추구했던 가치관, 그가 소유했던 신앙과 삶이 얼마나 매력적이었던지 당대 수많은 청년들이 그와 같은 길을 걷고자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녀 역시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 주도한 가난을 통한 영적 쇄신 운동에 흠뻑 매료된 그녀 역시 뭇 남성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세상을 등졌습니다. 귀족 가정 출신 자녀로서의 풍요와 특권도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상속 재산도 자발적으로 포기했습니다.
출가 이후 클라라는 프란치스코가 제시한 영적 여정을 단 한 치 오차도 없이 충실히 따랐습니다. 클라라의 영성은 프란치스코의 영성과 동일합니다. 가난과 겸손과 사랑입니다. 그녀가 자주 강조한 것은 그냥 가난이 아니라 겸손과 함께 하는 가난, 그리고 동시에 가난과 함께 하는 겸손이었습니다. 그녀의 생애 안에서 가난과 겸손은 다정하게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 안에서 이루어진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실천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그리스도의 뜨거운 사랑에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클라라의 삶이 스승 프란치스코와 다른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녀는 봉쇄구역 내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에 따라 관상 수도생활을 해나간 것입니다. 그녀가 평생토록 관상 수녀회 안에서 끊임없이 바라본 것은 프란치스코가 바라본 것과 동일입니다. 곧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동시에 성체 안에 머물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이런 그녀에게 사람들은 ‘복사판 프란치스코’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또는 ‘제2의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의 영혼에서 나온 여인’, ‘프란치스코의 거울’, ‘프란치스코의 여성적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를 일컬어 ‘복되신 스승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즐겨 불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클라라는 지극히 겸손했습니다. 다미아노 성당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한 지 3년째 되던 해, 당시 아시시의 교구장이셨던 귀도 주교님께서는 극구 사양하는 그녀를 수녀원장에 임명하였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 직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수녀원장인 그녀였지만 수녀원의 허드렛일은 당연히 자신의 일이려니 생각하고 언제나 콧노래를 부르며 기쁘게 해나갔습니다. 그녀가 유독 좋아하던 일이 한 가지 있었는데, 동료 수녀들이 식사할 때 ‘서빙’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밭일을 끝내고 흙 먼지투성이의 발로 들어오는 동료 수녀들의 발을 정성껏 씻어주는 일이었습니다. 발을 다 씻긴 그녀는 예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재빨리 수녀들의 발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클라라의 잠자리는 아무것도 깔지 않은 맨바닥이었습니다. 냇가에서 주워온 돌이 베개였습니다. 작디작은 빵 한조각과 물 한잔이 매끼니 식사였습니다. 실내장식이나 난방은 고사하고 아무런 설비도 안 갖춰진 누추한 거처에서 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녀는 가난이 무엇인지, 추위에 떤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고픔이 무엇인지, 피로에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온 몸과 마음으로 깊이 체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모든 것을 더할 나위없는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성 보나벤투라는 그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의 정원에 핀 첫 꽃송이로서 마치 빛나는 별처럼 반짝였으며, 희고도 순수한 봄꽃과도 같이 향기로웠습니다.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프란치스코의 딸이었으며 가난한 클라라회의 창설자였습니다.”
클라라는 한평생 봉쇄구역 안에서의 관상생활에 전념하였지만, 자신의 삶을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의 서한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지금 나는 하늘 아래에서 내가 바랐던 아무도 훔쳐갈 수 없는 그 기쁨을 이미 소유하고 있기에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주님 안에서 늘 즐거워하며, 슬픔이나 우울이 그대를 덮치지 못하게 하십시오. 그대의 마음을 영원의 거울 앞에 놓으십시오. 그대의 영원을 영광의 광채 속에 두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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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jEEcU3X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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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는다>
1980년 '모이자 노래하자' 녹화장으로 선생님 한 분이 어린 제자를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이 말하길 “얘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는데, 아이의 아버지는 천식으로 일을 할 수 없고,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하며 홀로 6남매를 키우고 있다, 수술 안 하면 죽는다, 아이 좀 살려달라”고 하였습니다. 진행자였던 이상용 씨는 두말하지 않고 바로 “그렇게 하자, 알겠다”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서울대병원에 갔는데, 수술비가 1,800만 원이라는 말에 그는 기절할 뻔했습니다. 당시 열 평짜리 아파트값이 1,000만 원이었고, 이상용 씨는 650만 원짜리 전세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전셋값 세 배에 해당하는 수술비를 대겠다고 했으니 기절할 뻔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자신도 어린 시절 병약한 몸으로 태어나 생사를 넘나들었기에 그 아이의 비극이 남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지 관리상 야간업소 출연하지 않았지만, 그 아이를 위해 야간업소 세 군데를 다니고 바자를 하고 돈도 빌려 결국 수술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습니다. 수술받은 아이의 아버지가 감격해 방송에서 뽀빠이 이상용 아저씨가 자기 아들을 무료로 수술해주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자 전국의 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우리 아이도 수술시켜 달라며 이상용의 집으로 몰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수많은 아이를 돕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대신 ‘한국 어린이 보호회’를 만들어 한 명씩 수술해 주기로 합니다. 그렇게 그는 사무실을 내고 16년 동안 567명의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찾아주었습니다.
하지만 1996년 11월 4일 한 시사 프로에서 뽀빠이 이상용 씨의 충격적인 사건이 폭로됩니다. 뽀빠이 이상용 씨가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빌미로 국민의 성금을 가로채 벤츠를 타며 40억 호화주택에 산다는 내용입니다. 이는 국민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심장병 어린이를 돕던 의인에서 국민을 상대로 사기를 친 희대의 파렴치범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그가 이미지가 좋았을 때 국회의원에 출마하면 무조건 당선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체질적으로 정치를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교황님과도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한 터였습니다. 교황님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사흘 동안 이상용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검은 손길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엄청난 힘을 자랑하던 정치인이 그에게 고향 대전에서 출마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상용은 단번에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정치인들이 이상용에게 보복한 것입니다. 어느 날 우정의 무대 녹화를 끝내고 돌아오니 세상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사실 1996년 당시 이상용은 20년 된 지프차를 타고 사는 집은 융자금이 막 상환된 상태였고 당시까지 수술받은 567명의 수술비는 거의 이상용 씨의 돈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이상용 씨는 집 밖을 못 나갔고 우정의 무대는 폐지되었으며 수술을 기다리던 어린이들은 수술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대전역에서 우리 아들은 그렇지 않다고 프린트물을 돌리던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사망하였고 이상용 씨는 왼쪽 눈이 실명되었습니다. 당시 권력 기관들이 총동원되어 ‘심장병 어린이 재단’을 탈탈 털었지만 이상용 씨의 공금횡령은 전혀 없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문제는 이 무혐의 처분에 대해 보도한 언론사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뽀빠이 이상용 씨가 형무소에서 복역하고 나왔기 때문에 활동을 못 했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후에 이상용 씨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대로 수중에 남은 돈 20만 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관광 가이드를 하며 딸을 시집보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당시 그의 일당은 3만 원이었고 가장으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CD를 만들고는 휴게소 화장실 앞에서 직접 팔았으며 즉석 공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가계에 큰 보탬이 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춘천 MBC 사장 유수열 씨가 “상용아, 와라. 나는 너 안다”라며 ‘강원 매거진’을 통해 이상용은 방송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뽀빠이 이상용 거짓 인성 논란?’, 유튜브 채널, ‘트롯 뉴스’]
미움은 죽은 놈이 산 사람을 때리며 자신도 살아있는 것처럼 느끼려는 행위입니다.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이상용 씨가 그렇게 맞은 것은 살았기 때문입니다. 산 사람을 때려서 자신도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기에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라면 용서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에 이상용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집은 20평, 건강은 80평, 행복은 150평에 사는 사람입니다.” 아마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용서했을 것입니다. 그 용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도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것인지 용서하지 않을 것인지는 내 힘으로 살 건지 다른 누군가의 덕으로 살 것인지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내 힘으로 용서하려고 하는 것은 내 힘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빚을 탕감해 준 임금 덕분으로 산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그러니 임금도 더는 그 사람에게 자신 덕분으로 살게 하지 않습니다. 용서는 우리를 용서해주신 하느님 덕분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신부님이 강론하다가 신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보세요.” 순간 성당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런데 뒤에서 한 원로 신자분이 손을 드셨습니다. 신부님은 “여러분, 저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박수를 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모든 이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죠?” 그러자 그분이 대답했습니다. “어, 원래 미운 인간들이 있었는데 먼저 다 죽었어….”
죽음이란 것을 통해 이 신자분은 미운 인간을 묻어버리셨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이것도 안 됩니다. 어떤 신자분이 고해성사를 보셨습니다. “저는 시어머니가 미워 죽겠어요. 시집올 때부터 저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으셨어요.” 사제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용서하시겠지?’라는 생각으로 그 자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시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그 자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이 두 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한 분은 미운 사람을 죽음이라는 것으로 묻어버렸고, 한 사람은 죽음으로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하느님 덕분으로 산다면 이미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미워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덕분으로 부활합니다. 이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는 하느님 자비에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탕감해 준 1만 탈렌트입니다. 이 1만 탈렌트에 100데나리온을 묻어버릴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1만 탈렌트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은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1만 탈렌트로 산 사람은 죽은 개를 걷어차지 않습니다. 1만 탈렌트는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산 사람이 되게 합니다. 같이 구원받은 사람은 나에게 잘못하지 않을 것이니 미워할 이유가 없고, 구원되지 못한 사람은 죽은 개에 불과하니 굳이 걷어찰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말은 아직 1만 탈렌트를 탕감받지 못했음을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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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 용서!>
우리 대부분은 누군가가 나에게 잘못을 하면 ‘용서’는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렇더라도 용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주님께로부터 어떤 죄를 용서받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은혜를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로 용서하려고 하니 용서가 매우 혹독한 고난의 길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내가 주님께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용서할 기회를 찾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묵상하면, 감히 ‘나도 용서할 기회가 좀 더 많았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튜브에 나오는 어느 결혼식 축사의 주요 내용을 약간 각색해 보았습니다. 동업자이며 한 살 어린 나이지만 삼 년 전 결혼한 선배의 결혼식 축사입니다.
“진이 형. 십 년 전 우리는 결혼을 못 하든지, 아니면 축의금도 못 받고 몰래 결혼하든지, 둘 중 하나일 거라 했었지. 그때는 풀리는 일이 없었어. 그런데 결국 나도 삼 년 전에 결혼하게 되었고, 형도 지금 축의금 많이 받고 결혼하네. 앞으로 우리 열심히 일하며 갚아나가자.
형이야 당연히 잘하겠지만, 결혼 선배로서 하나만 얘기할게. 형수랑 싸우면 대체로 형이 잘못한 경우가 많으니까 일단 사과해. 혹시 형이 생각했을 때 형 잘못이 하나도 없는 것 같으면, 그래도 사과해. 그게 남자고 남편이고 가장이며 우리 같은 사람과 결혼해주는 아내에 대한 보답이야. 좋은 기회잖아.
그동안 한 번도 얘기 못 했었는데, 이 자리 빌어 이제야 얘기한다. 십 년 전에 나 오토바이 사고 나서 한 달 병원에 누워있을 때, 병원비 없어서 퇴원 못 하고 간호사들 눈치 보던 그때, 형이 친구니까 도울 수 있으니까 돕는 거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었던 그 봉투, 내가 오늘 다시 가져왔다.
그때의 나는 어리고 철도 없고 자존심만 세서 고맙단 말 못 하고, 그렇다고 안 받겠다는 말도 못 했지. 나중에 열 배, 백 배도 갚겠다고 큰소리만 쳤었는데, 딱 열 배 넣었다. 백 배는 앞으로 같이 벌자. 내가 책임지고 벌게 할게. 진짜로 고마웠다. 그동안 한 번도 잊어버린 적 없다.
형, 형은 참으로 멋있는 사람이다.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이고 그런 형이 선택한 형수라, 형수도 같은 사람인 거 같네. 여태 그래왔듯이, 세상 밝게 비추면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결혼 축하해. 잘 살아.
2020년 5월 30일, 형 덕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00으로부터.” [출처: ‘신랑을 울게 한 친구의 반전 축사’, 유튜브 채널 ‘삼남 2인조’]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은혜를 갚을 기회만을 노릴 것입니다. 축사한 동생은 십 년 전의 자신들의 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에게 시집와 주는 것도 고맙고 그 결혼을 축하해주러 온 분들께도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십 년 전 자존심 때문에 고맙단 말도 못 했던, 그러나 한순간도 잊지 못했던 그 은혜에 대해서 형의 결혼식은 정말 ‘원수 갚을’ 절호의 기회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께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습니까?
당연히 지옥 불이 기다리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의 피로 그 지옥 불을 꺼주셨습니다. 만약 이 죄의 용서의 은혜를 믿기만 한다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제발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 좀 있어라!’ 하면서 기회를 노리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기회가 있으면 주님께 조금이나마 보답하기 위해 기쁘게 용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으면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은 감옥에 집어넣는 사람이 나옵니다. 백 데나리온이 약 천만 원이라고 하면 일만 탈렌트는 육조 원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당연히 이 은혜도 모르는 사람을 주님은 하늘 나라에 사시게 할 수 없으십니다.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자기만 아는 사람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하고 있지 못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자비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유튜브에 보면 하부리그 축구 경기에서 결승 골을 넣은 선수가 하나뿐인 관객 앞으로 달려가 구십 도로 인사하는 감동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4시간 동안 응원하러 왔던 그 관객은 엉엉 웁니다. 바로 고양 시민축구단이 평창에 와서 경기할 때의 모습이었습니다.
일곱 경기 연속 패하기만 하던 고양 시민축구단을 응원하러 혼자 평창까지 오는 것은 누가 봐도 어리석은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라대관 씨는 먼 길을 혼자 달려와 목이 터지라고 북을 치며 응원했습니다. 선수들은 골을 넣자마자 하나뿐인 그 관중에게 달려갈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억지로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도 분명 큰일입니다. 그러나 평소 주님의 은혜에 대해 깊은 묵상을 했다면 용서를 할 기회를 찾는 것은 더 큰 일일 것입니다.
어차피 용서할 것, 주님께 더 보답해드리기 위해 ‘용서를 은혜 갚을 절호의 기회’로 노리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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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산보 중에 인터넷 강의를 듣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일전에 피부질환과 면역체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우리의 피부는 부드럽지만 우리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피부는 바이러스에 의해서 각종 염증이 드러납니다. 단순포진, 대상포진, 지루성 피부염, 아토피, 건선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원숭이 두창도 새롭게 피부 염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피부 염증은 두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과로와 긴장으로 우리 몸의 면역력이 약해질 때입니다. 다른 하나는 과다한 영양 섭취로 인한 비만과 화학 물질에 노출되는 환경의 변화라고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염증을 치료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염증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날의 피로는 그날 푸는 것이 좋고, 적당한 운동으로 몸의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습니다. 걱정과 근심은 하느님께 맡기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얻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염증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나의 행동과 마음에서 생길 때가 많습니다. 원망과 분노는 타인의 행동에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에 염증이 생기면 그것이 우리의 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아도 기쁘지 않습니다.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는 우리의 몸을 병들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걱정과 근심 그리고 원망과 분노를 없애는 방법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영어로 용서를 나타내는 말은 ‘Forgive’입니다. For는 ‘위하여’라는 전치사이고, Give는 ‘주다.’라는 동사입니다. 용서는 ‘위하여 준다.’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목적어는 없습니다. 우리는 목적어를 다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첫째, 나를 위하여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용서해야 하는 실질적인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분노가 가득차면 내가 힘들고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화병’도 어쩌면 용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용서하지 않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이 용서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둘째, 상대방을 위해서 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수오지심’이 있습니다. 이는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도 가슴에 ‘한’이 맺히기 마련입니다. 많은 것을 가졌어도, 삶이 풍족해져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이런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으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하느님을 위해서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우리가 범한 더 큰 잘못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용서를 이야기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루가복음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유명한 ‘돌아온 아들’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용서해 주었고, 아들을 위해 잔치를 마련하였습니다. 복음은 돌아온 동생을 용서하시는 아버지에게 불평하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것도 아닌 동생을 용서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버지의 권한인 ‘용서’에 대해서도 ‘정의’라는 이름으로 불만을 이야기 합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몫이고, 정의는 인간의 몫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질서는 정의가 바로서야 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먼저 자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사랑이, 용서가, 자비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용서하지 못해서 잠을 못 이루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용서받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표어가 있었습니다. ‘자수하여 광명 찾자!’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서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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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21-19,1 : 매정한 종의 비유
베드로가 주님께 형제가 죄를 지으면 일곱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님은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여섯이라는 수는 창조활동을 암시하므로 수고와 노동으로 가득함을 의미하지만, 일곱에는 용서를 가리키는 휴식의 의미가 있다고 오리게네스는 말한다. 일흔 일곱이라는 말은 십자가에서 주어진 용서를 모든 세대가 다 받았음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 주셨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느님께서 인류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용서하라고 하시는 것은 분노할 시간이 없음을 보여 준다. “일흔 일곱 번”이란 무슨 의미인가? 루카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의 족보를 역으로 기록하였다. 루카가 꼽은 세대는 바로 일흔 일곱 세대이다(루카 3,23-38 참조). 하느님께서는 이 세대를 모두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만큼 모두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한 임금이 자기 종들과 셈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이 끌려왔다. 종은 많은 돈을 빌리고 또 빌렸지만 주인에게 이익도 주지 못하고 모두 잃어버린 것 같다.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절) 이 말씀은 종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내와 자식을 판다’는 것은 하느님의 기쁨으로부터 철저히 소외되는 것을 말한다. ‘판다’는 것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종은 “제발 참아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26절). 주인은 종이 청한 것보다 더 많이 베풀었다. 주인은 그 종이 이 일을 통해서 동료 종들에게 관대해지고, 또한 큰 망신을 당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책임을 지도록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용서를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 그런데 이 용서의 조건은 우리 동료들이 우리에게 잘못한 백 데나리온이란 사소한 잘못들을 용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종은 자기 동료 종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형제의 죄를 용서해주지 않으면 우리도 같은 벌을 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자기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자기에게 빚진 백 데나리온을 갚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4절) 이 말은 그 종이 영원한 벌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코 빚을 다 갚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묘사하는 비유이다. 이제 이 사랑을 본받지 않는 사람은 의로운 심판관으로부터 가혹한 벌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35절) 주인이 종에게 자신과 가족을 팔라고 했을 때, 분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자비의 순간이었다. 그때 주인은 화를 내지 않았다. 지금 이 말은 분노와 처벌과 응징이 담긴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너희 아버지”라고 하지 않으시고 “내 아버지”라고 하셨다. 사악하고 악독한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입은 만큼 우리도 우리 형제들에게 자비로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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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용서>
우리가 회개하는 것은 용서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는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잘 받아서 ‘나의 것’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회개를 안 하는 것은, 이미 주신 용서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 자체가 하느님의 용서를 나타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활동을 시작할 때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선포했는데(마태 3,2; 마태 4,17), 이 선포는 “하느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셨다. 그러니 회개하여라. 그리고 이미 시작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주는 일이고, 그것은 신앙인의 의무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용서의 은총’을 주신 것은, 형제에게 다시 나누어주라고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기를 거부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받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내가 거부해도, 하느님의 ‘용서의 은총’은 그 형제에게도 내립니다. 내가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스스로 회개하고 노력해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형제를 용서하지 않은 나는 ‘주신 은총을 거부해서 구원의 자격을 잃어버린 사람’이 되고, 그 형제는 나하고는 상관없이 ‘구원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됩니다. 일이 그렇게 될 때,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하다.”라고 하느님께 항의할 수 없습니다. 은총을 받아 누릴 기회를 거부한 것은 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베드로 사도가 ‘일곱 번’을 말한 것은 자기 나름대로 최대한의 숫자를 말한 것입니다. 그의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일곱 번은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일곱 번까지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뜻으로 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선의’로 한 질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일곱 번’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일곱 번’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라는 예수님 말씀은 ‘무제한으로’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무제한’입니다. 그러나 ‘무기한’은 아닙니다. ‘심판 전까지’입니다. 현실적으로 말하면 ‘임종 전까지’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무제한’이니 우리도 무제한으로 용서해야 하는데, 용서받는 쪽에서 생각하면, 회개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제한으로 용서의 은총을 주시지만, 회개하지 않고서는 그 은총을 받아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사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그렇게 죄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같은 죄를 반복해서 짓고, 죄지을 때마다 회개한다고 말하면, 그 회개가 진짜일까?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것도 큰 죄이고, 회개를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도 큰 죄입니다. 그런 회개는 거짓 회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 뒤에 나오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하느님의 큰 용서’를 설명해 주신 가르침이기도 하고, “너희가 이미 용서받았으니 너희도 용서하여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마태 18,24-27)
여기서 ‘만 탈렌트’ 라는 빚과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라는 말은, ‘주님의 자비’ 외에는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음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의 용서는 곧 구원입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으라는 주인의 명령은, 그 빚을 갚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빚을 갚을 길이 없는 종들을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으로 그 빚을 갚아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라는 종의 말은, 빚을 갚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애원하는 말입니다. (“갚을 수도 없는 큰돈을 왜 빌렸나?”라고 묻는 것은, 주제에서 벗어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은, “인류는 어쩌다가 그렇게 메시아의 구원이 필요할 정도로 큰 죄를 지었는가?”라고 조상들을 탓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인간은 구원이 절실하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 인간의 힘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류를 가엾게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마음이 곧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거액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 아주 적은 금액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이야기는(30절), 인간 세상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자기가 받은 큰 은총은 금방 잊어버리고, 이웃 때문에 생긴 작은 원한은 오래 기억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은 매사에 감사드리는 것입니다.(1테살 5,18)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라는 임금의 말은(33절) 이 비유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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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주께서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여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최민순 역, 시편 129[130],3) 우리는 하느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죄를 잊으십니다. 반면 우리는 형제들의 죄를 용서하지만 잊지는 않습니다. 용서는 신자의 삶에서 가장 중심 기둥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위한 말씀인 마태오 복음 18장은 어린이와 같이 되라는 회개의 명령으로 시작하여 오늘 복음처럼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정점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유일한 기도인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 두 번 나오는데,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식이 서로 약간 다릅니다. 마태오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6,12)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기 앞서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곧 용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 마태오 복음은 주님의 기도 다음에 곧바로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6,14-15) 마치 주님의 기도의 핵심이 형제들에 대한 용서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반면 루카 복음은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11,4)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카 복음은 용서의 범위가 ‘모든’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또한 현재 시제를 통하여 용서의 행위가 순간순간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압니다. 용서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과 본능에 맞서 언제나 용서를 실천할 따름입니다. 그런데 용서하면 할수록 얻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점점 더 너그러운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용서가, 용서받는 이가 아니라 용서하는 나를 위한 것이 됩니다. 용서를 통하여 우리는 점점 하느님을 닮은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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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방주섭 스테파노 신부님]
<용서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
오늘 복음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자신의 형제에게 몇 번이나 용서해주어야 되겠느냐는 질문을 하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선생인 랍비들은 "사람은 잘못한 이웃을 세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문제를 끄집어 내어 자신 넘치는 기분으로 셋의 배가 넘는 일곱 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하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칭찬을 들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흔일곱 번까지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일러주십니다. 이 말씀은 사실상 잘못한 이웃을 용서함에 있어 한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도 용서라는 것이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낍니다. 물론 용서의 기쁨을 누리는 분들도 있지만 잘못한 이웃은 늘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용서의 행위는 늘 자신에게 벅찬 것으로 다가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잘못한 이웃을 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실천하기 어려운 부담으로만 있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치는 크고 작은 많은 불행을 껴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불행의 원인을 찾아보면 대부분 이웃과의 잘못되고 비틀어진 관계 또는 자신과의 비틀어진 관계 즉 자신을 용서못하는 것들에서 그 원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이라는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비틀어진 관계를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회복이 바로 용서라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한없이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단순히 실천하기 어려운 의무만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행복이라는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격려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러한 격려가 단순히 격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실천하지도 못할 것을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즉 그것을 실천할 힘도 주시겠다는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서 그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해소에서 죄의 고백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죄를 고백하고 혼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를 이겨내고 잘못된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라고 할 수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격려와 약속이라는 두가지를 늘 기억하고 마음속에 새겨두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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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과 교회공동체에 내리시는 마지막 일곱 번째 가르침으로써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1-22절)는 규범이다. 물론 이 규범의 참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5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이미 언급하였지만 마르코나 루카복음이 교회의 규범이 될만한 예수님의 말씀들을 이곳저곳에 흩어 기록한데 비하여 마태오는 공동체설교 안에 잘 엮어 놓았다.
루카복음은 ‘잘못한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라’는 규범과 ‘용서하라’는 규범을 한데 묶어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거든 꾸짖고 뉘우치거든 용서해 주어라. 그가 너에게 하루 일곱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 때마다 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고 말한다.
그러니까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우선 꾸짖었을 때, 그가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해 주라는 것이다. 마태오복음은 이 둘을 분리시켜 전자는 전체교회와 관련된 죄를 견책(譴責)하라는 것이고, 후자는 신자들 간에 개별적으로 빚어지는 잘못에 대하여 무조건 용서(容恕)하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루카는 죄인이 뉘우치기만 하면 언제든지 용서를, 마태오는 뉘우침과 관계없이 무조건 용서를 지시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베드로를 보자. 베드로는 스스로를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형제가 나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되겠지요?” 하고 예수께 묻는다. “용서해 주면되겠지요?” 하고 묻는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자기의 권리로 드러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히 용서의 무한정을 의미한다. ‘용서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의도를 따르자면,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즉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그러나 쉽지 않다.
우리들 일상 체험은 무조건적인 용서가 거의 불가능함을 말해 준다. 용서를 놓고 사람들은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내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면서, 용서가 의무임을 강조한다.
마태오복음 18장에 수록된 공동체설교를 꿰뚫는 기본정신을 찾는다면 그것은 단연 겸손과 관심, 자비와 용서일 것이다.
이들 정신은 모두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특히 교회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이 서로를 위해 지녀야 하는 덕목으로 제시되고 있다. 겸손과 관심은 공동체를 건설하는 요소이지만, 교만과 무관심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요소이다. 교만과 무관심은 즉시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조장하기 때문에 여기에 함께 하는 공동체는 건설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잃은 양을 되찾고 기뻐하는 목자의 비유를 들어 이를 잘 설명해 주셨다.(마태 18,12-14)
어느 공동체이든 완전한 공동체는 어느 곳에도 없다. 겉으로는 건강하게 보이지만 안으로는 병들어 있는 공동체가 많다.
겸손이 있다 해도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되어 있고, 관심이 있다 해도 지나친 간섭과 시기와 질투로 상처투성이가 된 공동체가 많다는 말이다. 이런 공동체는 치유되고 회복되어야 한다.
여기에 듣는 약은 자비와 용서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용서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마태 18,23-35)
각양각색의 죄상이 판을 치는 오늘날, 왜 이 세상이 망하지 않느냐고 한탄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망하지 않는 이유는 죄를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하는 만큼 용서하는 자는 용서받는 것이다. 용서는 죄악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선(善)으로 악을 이겨내는 일이다.(로마 12,21)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지만, 용서는 패배가 아니라 승리이며,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요 선행이며, 용기 있는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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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김흥주 베드로 신부님]
전에 한 방송국에서 ‘마음’을 주제로 6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적이 있다. 특히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제목의 마지막 편은 ‘용서’의 문제를 비록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다루긴 했지만 우리 신앙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그 내용은 우선 사랑하는 가족들을 무참히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한 고정원 씨를 비롯해 돈을 빌려주었다가 떼이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국 그 빚진 사람을 용서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어떤 분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용서는 과연 이렇게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용서에 대한 문제를 풀어 나갔다.
결론은 누구나 노력하면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우리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바꿀 수 있는 만큼, 용서는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남을 용서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용서를 생각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상대방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는 것이 용서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일 뿐 아니라 용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상대방에게 동정과 사랑을 주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결국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가 웃을 수 있는 것이 용서의 힘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손해를 입힌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뿐이다. 반면에 마음을 편하게 하고 용서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용서의 대가는 마음의 평화이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용서하는 법’을 가르쳐 온 러스킨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용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삶이 허락해 주지 않았을 때에도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더군다나 오늘 복음 말씀처럼 우리가 형제의 잘못을 용서할 때만이 우리도 하느님의 더 크신 자비와 용서를 받을 수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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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마태오 18,21–19,1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고 용서하여라, 매정한 종의 비유)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들을 마치시고 갈릴래아를 떠나, 요르단 건너편 유다 지방으로 가셨다.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할 수 없어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일흔일곱 번까지의 용서
해야 하지만
하기 싫습니다
사람이기에
하기 싫어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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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은혜를 기억하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은혜를 입으며 삽니다. 부모나 스승의 은혜뿐 아니라 이웃의 은혜도 큽니다. 그리고 자연의 은혜는 더욱 큽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 용서의 은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로움에 대하여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남에게 베푼 것은 새겨 두지 말고 남이 내게 베푼 것은 잊지 말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살 때가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것을 생각하면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하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니 마음이 박해집니다. 은혜를 베풀었으면 그 보답을 바라지 말고, 남에게 주었으면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미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대하게 되면 기대하는 만큼 “네가 그럴 수 있나?” 하는 서운함만 커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베드로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억지로 눈감아 주고 참아 줄 수 있는 한계를 일곱 번으로 표현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넘어 자비심으로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한없이, 기꺼이 용서해 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은혜를 입었고, 앞으로도 입게 될 것이고 죽음에 이르러서도 남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의 허물에 대하여 용서를 베푸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못 박은 원수를 위해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루카 23,34). 하고 기도하시고 용서하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청했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 역시 주님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행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믿음 안에서 용기 있는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탈출기 34,6-7에는 “주님은 자비하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다. 분노에 더디고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한없는 은혜를 기억하며 나도 은혜를 베풀어야 합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핵심입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 사랑받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많은 사랑과 용서를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남에게 관대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생에 있어서도 허물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지녔다는 사실을 안다면 용서 안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옳았다는 말을 듣고 싶고, 아직도 사과와 해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더 나아가 용서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에 대해 칭찬받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용서는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2-13)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 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게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악에게 굴복당하지 않고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런저런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먼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은혜, 받을 은혜를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용서할 사람은 용서해야 합니다. 아니, 용서를 먼저 청하는 날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셨으니 인간이 인간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신의 은혜를 돌 판에 새기렵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에 결코, 지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데에 지쳐 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이들을 ”일흔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시고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기쁨을 되찾아 주시는 온유함으로, 우리가 고개를 들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에서 도망가지 맙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포기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만이 우리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이끕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복음의 기쁨3항)
@@교황께서 선출되고 어느 기자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굽니까? " 교황께서는 "저는 죄인입니다. 하느님의 큰 사랑을 받는 죄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셨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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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가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아주 인상적인 글을 쓰셨습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이다.” 이 문장에서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것에서 계속 감탄하는 사랑은 행복의 시간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커다란 행복만을 꿈꾸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돈이 있어야 행복하다고 말하며, 이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하고, 내 가족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 남부끄럽지 않게 행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쫓아가는 사람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것이 전부는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복의 빈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행복을 자주 느끼고, 또 행복감을 길게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는 엄청난 성취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성취는 순간의 만족에 그치고 말기 때문입니다. 작은 일상도 내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절대로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귀한 시간입니다.
행복의 빈도를 높이는 것은 일상의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크고 대단한 일회적인 것에서 행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동태복수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즉,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가 아닌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적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여 남을 용서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수는 4번을 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하는지를 정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번을 생각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기대와 달리,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용서에는 한도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빚진 것을 처리하는 한 왕의 처사를 하늘나라에서 죄를 용서하는 하느님과 비교 설명하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커다란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뜻대로 행동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기에, 계속된 용서를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만이 하느님의 용서 역시 계속해서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인 것처럼, 우리가 용서의 횟수가 많아질수록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행복도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행복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오늘도 주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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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혁명의 삶>
-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답이다 -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빛나게 하시고,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쳐 주소서.”(시편119,135)
계속 내린 폭우로 불암산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우렁찹니다. 바위산이라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산사태는 없고 물은 맑은 편입니다. 흐르는 물소리에 떠오른 좌우명시 “하루하루살았습니다” 셋째 연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끊임없이 바다 향해 흐른 강이 상징하는 바, 끊임없는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기도처럼 회개 역시 결코 끊어지거나 중단되어선 안될 겁니다. 바로 영적혁명가의 삶이기도 합니다. 강이 끊임없이 흘러야 살 듯 사람도 내적으로 끊임없이 흘러야, 새로워져야 삽니다.
이것이 진정 영적혁명의 삶입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삶도 고이면 썩습니다. 끊임없이 흘러야 맑은 물이듯 삶도 그러합니다. 예전에도 나눴던 21년전 써놨던 “혁명”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이런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
바짝 마른 바닥에
잡초와 오물들
대책없이 썩어 악취를 발하던 시내
폭우내리니
말끔히 씻겨 정리되고
하얀 모래에 맑게 흐르는 물
살아 노래하는 시내가 되었다.
이런 게 혁명이라면
가끔은 있었으면 좋겠다.”-2001.7.19.
하늘비가 많이 내려야 맑게 흐르는 계곡물이지만, 참 깊은 산은 가뭄에도 흐르는 맑은 물입니다. 정말 끊임없이 회개하는, 깊은 영적혁명가의 삶은 하루하루 평생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일 것입니다. 제가 매일 평생 쓰기로 작정한 강론 역시 쓸 때 마다 하루하루 흐르는 강같은 삶을 염두에 둡니다. 정말 끊기거나 중단됨이 없이 한결같은 삶에, 강론이 소원입니다. 어제 20대 후반 자매와의 면담성사 시 뜻밖의 말이 고마웠습니다.
“존함이 ‘이’자 ‘수’자 ‘철’자 신부님입니까?”
“예,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입니다.”
“아, 신부님 묵상글 봤습니다. 명료하고 심오했습니다.”
명료(明瞭;뚜렷하고 분명함)하고 심오(深奧;깊고 오묘함)하다는 두 말마디가 고맙고 고무적이라 사전을 찾아봤습니다. 강론은 물론이고 삶도 마음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참으로 회개한 맑고 투명한 영혼에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이 명료함과 심오함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 어느 평신도 신학자의 “1.깊이가 남다르다, 2.쉽다, 3.아름답다, 4.울림(감동)을 준다”라는 평을 읽고 삶도, 마음도 그랬으면 하는 생각도 간절했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은총이라 생각됩니다. 예전 로마에서 세계 베네딕도회, 시토회, 트라피스트회 수도자 모임시 호주 출신 수녀의 “1.좋은 메시지(good messages)를 준다, 2.다채롭다(colorful), 3.실천적(practical)이다. 4.단순하다(simple)” 제 강론 평에 고무된 일이 생각납니다.
이런 평을 다시 확인하면서 삶도 마음도 영성도 한결같이 그랬으면 하는 간절한 소원이요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은총이 이를 가능하게 해주리라 믿습니다. 좌우간 살아 있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에 강론이 되길 소원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를 아는 겸손과 사랑과 지혜입니다. 바로 무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맑은 영혼의 소유자가, 진정한 영적혁명가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요 제1독서의 에제키엘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무수한 교회의 성인들입니다.
우선 복음에서 우리는 “형제의 죄에 대한 용서”와 “매정한 종의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얼마나 무지한 인간의 실상에 정통한지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닮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한두번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할 것이며, 예수님 또한 무한한 용서를 명하십니다. 회개해서 용서가 순서이지만 용서의 사랑이 상대방을 감동시켜 회개에로 이끌기도 합니다.
만탈렌트 빚을 탕감받은 자의 백 데나리온 빚진 자에 대한 무자비한 모습에서 우리는 인간 무지의 절정을 체험합니다. 이렇게 자기를 모를 수 있을까 믿어지지 않지만 자주 겪는 무지의 현실입니다. 만탈렌트 빚진자는 바로 하느님께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을 상징합니다. 살아있음이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은총인데 이걸 까맣게 잊고 무지한, 잔혹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래서 진정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참 자기를 보고 아는 회개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사랑, 지혜의 선물입니다. 다음 주인의 무지한 이에 대한 질책은 그대로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처럼 들립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은 주님의 예표를 보여주면서 무지한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별무소득입니다. 얼마나 완고하고 완강한 무지의 이스라엘 백성들인지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입증합니다. 참으로 무지한 이들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는 고독한 예언자, 하느님의 전사 에제키엘입니다.
“사람이 아들아, 너는 반항의 집안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않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않는다. 그들이 반항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무지의 사람들! 회개가 불가능한 사람들! 바로 인간의 정의같다는 부정적 생각도 듭니다. 어려서부터 죄에 대해 회개하는 습관을, 마음의 민감성을 키워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마음이 굳어져 무디어 지기전 어려서부터 역시 회개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가 절실하다는 확신입니다.
회개의 달인이자 진정한 영적혁명가가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성녀 글라라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회개를 통해 영적혁명의 순결한 삶을 살았기에 평생 성 프란치스코와 깊은 영적우정을 나눌 수 있었음을 봅니다.
성녀 클라라는 42년의 수도생활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내야 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봉쇄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여 이 모든 일을 이루어 냈습니다. 1253년 8월11일, 성녀 클라라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성녀는 선종 2년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고 다음처럼 클라라의 덕을 기립니다.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해 영적혁명의 삶을 살았던 성녀 클라라를 비롯한 교회의 참 보물들인 성인들입니다. 새삼 인간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를 통한 영적혁명의 겸손과 사랑, 지혜의 삶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를 통해 무지에서 해방되어 영적혁명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무지의 치유에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습니다.
“보라, 신랑이 오신다. 주 그리스도를 맞으러 나가라.”(마태2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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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조건 없는 용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주님, 제 형제가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일흔일곱 번의 의미'는 '조건 없는 용서'를 말합니다. 와~ 어떻게 이런 용서가 가능할까?
예수님께서 조건 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 '매정한 종의 비유'(마태18,23-35)를 들려주십니다. 이 비유는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매순간 하느님께 빚진 많은 것들을 탕감받고 있기 때문에, 나도 그렇게 너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태 18,32-33)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5)
오늘은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성녀 클라라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많은 자매님들과 성 클라라 수도회와 클라라를 사모로 모시고 있는 모든 프란치스칸 가족들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성녀 글라라는 직접 쓴 회칙에서 자신을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당한 여종이고 지극히 복된 사부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인 클라라는..."(회칙 1,3)
'클라라(Clara)'는 '빛'(Lumen)이라는 뜻입니다. 클라라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모범을 따라 '철저한 가난과 겸손의 삶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듯이, 우리도 세상에 '가난과 겸손의 빛', '화해와 용서의 빛'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이신 성녀 클라라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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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sB-c7aR8et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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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2)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용서에서 다시
깨닫게됩니다.
우리의 현실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용서에
빚진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빚진 것을
다 갚을 수 없는
우리들의 짧은
시간입니다.
십자가와
가까워지지 않고서는
용서에 근접할 수 없는
우리들의 관계입니다.
용서의 대상이
바로 우리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것이
용서를 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에도
끊임없는 배움이
필요합니다.
용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용서를 통해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음을
믿는 용서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자신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은총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끊임없는 용서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용서와 자비는
결국 하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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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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