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을 살아내며, 6월의 일기, 범사에 감사하며/the GREAT pretender
펑 펑 울었었다.
영화 한 편 보고 그랬었다.
23년쯤 전으로 거슬러, 내가 서울남부지방검찰청 총무과장 겸 공안과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그때 대학생이던 맏이가 내게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라면서 추천했었던 영화였다.
맏이의 그 같은 추천이 있었으니 당연히 봐야했었고, 쇠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그날로 아내와 함께 그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을 일부러 찾아서 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가슴을 울리는 너무나 큰 감동에 끝내 펑펑 울고 말았다.
손수건 한 장을 다 적실 정도였다.
제시 넬슨 감독에, 숀 펜, 다코타 패닝, 미셀 파이퍼가 주연으로 출연한, 2001년 미국 제작의 ‘아이 엠 샘’(I am Sam)이라는 바로 그 영화였다.
내가 그 영화를 보면서 펑 펑 운 이유는, ‘척’이라는 그 한 글자 때문이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7살 정도의 나이에서 지능발달이 정지된 아버지 샘 도슨(숀 펜 扮)이, 나날이 성장해가는 이제 일곱 살짜리인 자신의 딸 루시(다코다 패닝 扮)를 더 이상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복지단체에 빼앗겼다가, 비슷한 처지의 정신지체 장애가 있는 친구들과 여변호사 리타(미셸 파이퍼 扮)의 도움으로 딸 루시를 되찾아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줄거리다.
핵심은 법정에서 벌어진 눈물겨운 다툼이었다.
샘의 양육능력에 대하여 숱한 질문이 쏟아질 때, 샘의 순수한 답변이 내 가슴을 뭉클한 감동으로 몰아갔었다.
“당신은 겨우 일곱 살의 지능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일곱 살, 아니 열 살, 열세 살로 자라가는 딸아이를 양육하며, 도대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단 말이요?”
그렇게 법관이 물었을 때, 샘이 머뭇머뭇 거리다가 결국 더듬거리면서 꺼낸 그 답이, 나로 하여금 그만 펑 펑 울어버리게 한 것이다.
그 답, 곧 이랬었다.
“전... 많은 시간을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생각을 했었죠. 그것은 항상 딸아이의 곁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딸아이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고요. 음... 그리고 딸아이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적어도 들어주는 척이라도 하면서 옆에 있어주는 거였어요.”
그 답 중에서, 나는 ‘척’이라는 한 글자에 특별히 필이 꽂혔다.
정신지체의 아버지인 샘이 딸아이 루시를 위해 그러한 헌신적 역할을 생각하고 있을 때, 도대체 나는 가족을 위해, 주변에 관계를 가졌던 이들을 위해, 아니 내가 소속된 나의 직장, 나의 민족, 우리 국가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생각을 아니 할 도리가 없었다.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콧등이 시큰하고 두 눈에서 눈물이 배어나오는 것을 감출수가 없었다.
나로서는 숀 펜이라고 하면 벌거벗어 던져서 잘 나가는 어느 여가수의 1회용 반창고적 남편감 정도로 생각해왔을 뿐이고, 미셸 파이퍼 하면 배트맨인가 하는 영화에서 연기력 없는 웃기는 여 전사 역할정도만 하는 값싼 여배우로 생각해왔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 둘에 대한 편견을 완전히 깨뜨려 버렸다.
‘척’하는 그 훌륭한 연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벤허’, ‘대장 부리바’, ‘아이반호’, ‘애수’, ‘작은 아씨들’, ‘형제는 용감하였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내 모든 것을 다 주어도’, ‘하이 눈’ 같은 영화들을 접하면서 감성을 키워 왔었다.
그리고 꿈과 희망의 미래를 내다봤었다.
그 후 너무나 말초적으로 변해버린 영화계 현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이시대의 영화와는 담을 쌓고 살아왔었는데, 맏이 덕분에 모처럼 정말 좋은 영화 한 편을 감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 그때 다짐했었다.
나도 이제는 ‘척’하는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만식이 금순이 그 두 친구와 함께, 내가 고향땅 문경에서 400리 길의 대구까지 걸어가는 그 길목인 의성 다인까지 달려온 휘덕이 친구가, 내게 그렇게 제안을 했다.
경주에서 중학교 동기동창인 종태 친구까지 온다 했다.
“어디로 가는데?”
내 그렇게 물었다.
“그냥 따라 오기만 해.”
휘덕이 친구의 답이 그랬다.
“알았어.”
내 그렇게 수긍하고 말았다.
점심 한 그릇 하는 것으로 다툴 일이 없다 싶어서였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여기서 가까운 곳이겠지 했다.
아니었다.
거기서부터 거의 반 100리길이나 되는 군위 부계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중국요리를 잘한다는 ‘송림반점’이었다.
이날 우리들 점심 값을 덮어써주기로 했다는 종태 친구는 이미 경주에서 먼 길을 달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덕분에 간짜장 곱빼기로 배를 두둑이 채웠다.
식사 끝에 기념사진 한 장 찍어야 했다.
“사진 한 장 찍어 주이소.”
그 중국집 문을 나서면서, 내 그렇게 주인에게 부탁을 했다.
내 그 부탁에, 그 집 주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우리를 따라 나와서는, 방금 내게 넘겨받은 핸드폰으로, 막 자세를 잡는 우리들 사진을 한 장 찍었다.
“한 장 더...”
성의 없어 보이게 찍는 그 분위기로 봐서 아무래도 잘못 찍었겠다 싶어서, 한 장 더 찍어달라고 그렇게 부탁을 하려고 했는데, 그 주인은 이미 내 핸드폰을 내게 되돌려주고 있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랬다.
“잘 찍었씸더. 함 보이소.”
말이 그런데, 더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혹 잘못 찍혔다 해도 다시 찍어달라고 할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저 확인해 본 척 하면서, 이렇게 먼저 대꾸했다.
“아, 예. 잘 찍었네예.”
그러면서 그 찍은 사진을 실제로 확인해봤다.
삐딱하게 찍어놓고 있었다.
홧김에, 입에 욕이 실리고 있었다.
그 주인 귀에는 안 들릴 정도의 낮은 음성으로 내뱉었다.
곧 이 욕이었다.
“에잇! 씨발놈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