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자유(自由)로 이르는 길
오십여 명 가량의 탈혼사들은 한곳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먹는 음식은 죄수들의 음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최상의 것이었다.
구운 오리와 갖가지 소채, 삶은 감자와 하얀 쌀밥, 거기다가 술까지 곁들어 있었다.
죄수들은 그 광경을 멀건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들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다른 세계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노인은 그곳을 힐끗 쳐다본 후에 입을 열었다.
"노부가 죽음을 피해 유악계까지 도주해 왔다가 너를 만났던 것은 행운이었다. 유린, 너는 노부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너는 무림사상 가장 완벽한 무인(武人)이 될 것이다."
완벽한 무인,
무유린은 반응없이 마지막 국물을 입 안으로 흘려 넣었다.
그때,
땡땡땡땡……
식사시간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죄수들은 무기력하게 몸을 일으켰다.
지금부터 다시 어두컴컴한 동굴로 돌아가 광석을 캐야한다.
광장 둘레에는 수십 개의 동굴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죄수들은 그곳으로 철컹거리며 걸어갔다.
대계곡에는 이런 소광장이 수백 개나 산재해 있었다.
유악계의 오만여 죄수들은 그곳에 흩어져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무유린이 속한 쇠사슬의 사람들은 빈수레를 밀며 느릿하게 동굴로 향했다.
헌데 돌연,
"이 게을러 빠진 놈!"
짜악!
광장 한 구석에서 욕설과 채찍의 격타음이 동시에 터졌다.
무유린은 그곳을 힐끗 돌아보았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한명의 소년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말랐으나 매우 잘 생긴 소년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이천육십삼(二千六十三)이란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헌데 그는 아직까지도 음식그릇을 들고 있었다.
그릇에는 약간의 국이 남아 있었으며, 그는 식사시간이 끝났음에도 주저앉아 있었기 때문에 탈혼사에게 채찍을 얻어 맞은 듯했다.
그와 같은 쇠사슬에 묶인 죄수들은 한 옆으로 물러서 그가 좀더 채찍을 잘 맞도록 피해있었다.
한 명의 탈혼사가 음산한 흉소를 흘리며 소년을 쏘아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검은 채찍이 흐느적거렸다.
"흐흐…… 일어나라. 지저분한 놈아, 요절을 내줄 테다."
쐐애…… 액!
다시 채찍이 허공을 찢었다.
헌데 다음 순간,
꽉!
탈혼사의 채찍은 소년의 손에 굳게 움켜잡혔다.
탈혼사의 안면근육이 일그러졌다.
"이 씹어먹을 놈이……"
그는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채찍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채찍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탈혼사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이, 찢어죽일 놈…… 어서 놔라!"
소년의 힘은 대단했다.
평범한 체격이었지만 그는 한 손에는 그릇을 들었고 다른 손으로 채찍을 잡고 있었다.
한 손으로 잡았음에도 그는 여유있게 잡고 있었다.
소년은 그릇을 입으로 가져갔다.
이어 그릇에 남아 있는 국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여러 명의 탈혼사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광장은 일시간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탈혼사들은 그 광경을 쳐다보았으며, 죄수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소년은 국을 모두 마시고 그릇을 아무렇게나 집어던졌다.
이어 무표정한 얼굴로 채찍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탈혼사를 쓸어보았다.
소년의 눈빛은 투명했다.
아무런 느낌도 감정도 없는 듯 투명한 눈빛이었다.
그의 눈빛을 접한 탈혼사는 움찔했다.
마치 알 수 없는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드는 듯한 착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순간 탈혼사는 정신을 수습했다.
"이런 빌어먹을……"
그는 자신이 하찮은 죄수의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는 성큼성큼 소년에게 다가갔다.
다른 탈혼사들은 흥미있는 표정으로 그것을 주시했다.
그 순간,
팍!
탈혼사는 자신의 수중에서 채찍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어……?"
그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추는 사이에,
핏!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한 부분이었던 채찍이 자신을 향해 덮쳐 드는 것을 발견했다.
탈혼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고 여긴 순간,
착착!
채찍이 그의 얼굴을 뱀처럼 휘감았다.
"으악!"
탈혼사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처절한 비명을 터뜨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선혈이 흘러나왔다.
찰나간에 광장에는 짧은 정지상태가 이어졌다.
경악, 탈혼사들이나 죄수들이나 할것없이 만면에 극도의 대경지색이 가득 떠올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쉬익!
두 번째 채찍이 허공을 가르는 음향이 터졌을 때야 사람들은 정신을 수습했다.
쫘…… 악!
이번에는 탈혼사의 어깨죽지에 격중했다.
소년의 채찍질은 능숙했다.
세 번 네 번의 채찍질이 탈혼사의 몸에 가해졌다.
"으으…… 사, 살려줘…… 으으……"
탈혼사는 데굴데굴 구르며 애원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망각했다.
채찍질을 가하는 것이 죄수이며, 자신이 탈혼사라는 것을 추호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다만 이 극심한 고통에서 속히 벗어나고만 싶을 뿐이었다.
문득, 소년의 입가에 득의한 미소가 스쳐갔다.
전율을 금치못할 사악한 미소였다.
그는 자신의 발 밑에서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는 탈혼사를 벌레를 보듯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길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그는 죄수였으며, 쓰러져 있는 자는 탈혼사였으므로……
그제서야 탈혼사들이 우르르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한 듯 쓰러진 탈혼사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버러지 같은 놈! 죽어랏!"
"감히 탈혼사를 매질하다니……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탈혼사들의 채찍이 소년의 한몸에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쐐애애…… 액!
슈파아…… 앗!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할 일을 끝마친 사람처럼,
파파팍!
촤촤촥!
살이 찢어졋고 피가 튀었다.
소년의 신형이 크게 비틀거렸다.
짜짜짝!
털썩!
순식간에 소년의 몸은 피투성이로 변했다.
털썩!
소년의 무릎이 꺾였다.
그 위로 가차없는 채찍질이 쏟아졌지만, 소년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만 무릎을 꿇은 채 우박 같은 채찍질을 고스란히 맞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죄수들의 눈에 경이의 기색이 떠올랐다.
보통죄수들은 서너 대의 채찍질이면 쓰러져서 대여섯 대의 채찍질을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러나 소년은 이미 수십 대의 채찍질을 당하고서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의 옷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의 전신에는 빨랫줄처럼 수많은 줄이 그어졌고,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러나 소년은 무표정하게 맞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입매가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후후…… 이 정도라면 인렵제전의 일백제물로서 충분한 죄를 지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아…… 인렵제전,
그는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약 일각의 시간이 흘렀을 때 탈혼사들은 극도로 지쳐 있었다.
소년은 완전히 혈인으로 돌변해 있었지만, 탈혼자들은 그를 끝내 쓰러뜨리지 못했다.
쓰러진 자는 죽은 것으로 취급했다.
죽은 자로 취급된다면 소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 이유 때문에 그는 쓰러질 수 없는 것이다.
"허헉…… 지독한 놈이다……!"
"흐으…… 이런 놈은 인렵제전의 제물로 내보내야 한다……! 그 살인축제에서 처참히 죽음을 당해야 한다……!"
탈혼사들은 채찍을 거두며 물러났다.
인렵제전이라는 말에 죄수들은 얼굴에 두려운 빛을 떠올렸다.
그러나 소년은 내심 득의의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후후…… 나는 마침내 자유로 이르는 길목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 죽어도 자유롭고 싶은 상황에서 죽고 싶었었다……! 후후…… 사흘 후, 나는 드디어 자유인(自由人)이 되는 것이다…… 자유인이…… 크흐흐……'
그것은 차라리 절박한 몸부림이었다.
인렵제전은 죽음의 축제이다.
그곳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운명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곳 유악계에 남아 있는다면 최소한 죽음만을 면할 수 있다.
비록 짐승처럼 생존하더라도 말이다.
허나, 소년은 짐승 같은 생존보다는, 인간다운 죽음을 택한 것이다.
소년은 자신이 흘린 피가 지면에 고이는 것을 내려다보며 키득거렸다.
'쿡쿡…… 인렵제전에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있다. 만분지 일(萬分之一)의 확률인 탈출…… 나 혈우(血羽)는 그 만분지 일의 확률에 목숨을 걸고 싶은 것이다……'
소년 혈우,
두 명의 탈혼사가 그를 철갑족쇄에서 풀어 어디론가 끌고 갔다.
아마 사흘 후에 그는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라는 이름의 괴물 뒤에는 죽음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을 것이다.
"어서 움직여라!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탈혼사가 채찍으로 동굴벽을 때리며 외치는 바람에 무유린이 속해있는 죄수들의 무리는 일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유린은 끌려가는 소년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회색으로 침잠되어 있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전의 소년이 왜 발작했는지를……
무유린은 어둡게 내심으로 중얼거렸다.
'인렵제전……'
* * *
무유린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 끝은 습습한 토굴벽에 닿아 있었다.
토굴 안의 죄수들은 잠들어 있었다.
도합 십일 인의 죄수, 오늘 한 명이 재수없게 죽었지만 어쨌든 다시 십일인이 되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오면서 부족한 나머지 한 명이 채워지기 마련인 것이다.
툭!
무유린이 손댄 벽이 둘레 반자 정도의 크기로 떼어졌다.
긜고 그 안쪽에는 조그만 공간이 나타났다.
사람 머리통 하나 숨길 수 있는 공간, 그곳에는 반쪽의 거무튀튀한 떡과 작게 접은 한 장의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무유린은 떡과 종이를 집었다.
이어 떼어 냈던 돌조각을 다시 그곳에 붙였다.
그곳에 그런 비밀장소가 있다는 것은 무유린과 사천사백사십삼 번 노인, 그리고 한 명의 소녀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무유린은 옥수수로 만든 떡을 묵묵히 반으로 잘랐다.
이어 그것을 곁에 누워 있는 노인에게 건네 주었다.
노인은 눈을 뜨고 있다가 그것을 초점없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내밀어 떡을 받았다.
그는 기실 허기를 몰랐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곧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곧 죽을 자신에게 떡은 소용없었다.
대신 사흘 후면 인렵제전에 나갈 무유린이나 그걸 더 먹고 힘을 축적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러나 노인은 무유린의 성격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떡을 먹지 않으면 그 역시 먹지 않았다.
그 떡을 그는 버리기까지 하였던 적이 있었다.
노인은 무유린이 반의 떡을 먹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가 주는 떡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떡조각을 입 안에 밀어넣고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씹으며 노인은 나직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유라가 보내 주는 마지막 옥수수 떡이 될 것이다."
무유린은 역시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너는 지난 이 년 간 그 아이가 친계주에게 몸을 팔아 얻은 떡으로 다른 죄수드로가는 다른 건강한 몸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사냥꾼들은 너를 여전히 평범한 죄수들처럼 여길 것이다. 너는 그것을 이용해야 한다."
유라,
십 사 세의 나이에 칠계주에게 순결을 잃었던 소녀, 그날 이후 그에게 육체를 제공하는 대신 그녀는 한 덩이씩의 옥수수 떡을 대가로 받아 왔었다.
그리고 그 떡은 이년 동안 절반씩 무유린에게 보내져 왔었다.
무수한 의미와 고통을 함축하고 있는 반쪽의 옥수수떡,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무유린에게 먹여졌던 것이다.
무유린은 무감각한 동작으로 쪽지를 펼쳤다.
유라는 칠계주에게 몸을 제공하는 대신 일을 하지 않는 특전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최소한 광장 내에서만큼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고, 떡과 쪽지는 낮동안 비어있는 토굴에 그녀가 갖다놓은 것이었다.
무유린은 천천히 쪽지에 적힌 글을 읽었다.
<유린, 너는 내일 아침에 백 명의 제물로 끌려갈 거야.
나는 모든 준비를 끝냈어.
오늘밤에 돼지 같은 칠계주의 귀를 물어뜯어 버릴 거야.
유린, 귀가 찢어진 돼지를 생각해 봐.
그놈은 나를 틀림없이 인렵제전의 제물이 되게 할 거야.
그렇게 되면 너와 나는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거야. 자유를……
유린……! 자유란 어떻게 생겼을까……? 대체 자유를 누리는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
왜 우리는 벌레들조차 누리고 있는 자유를 갖지 못하는 걸까?
유린! 네 어머님께선 건강하셔.
그분께선 내가 네 소식을 전해드릴 때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시지.
어머님께선 너무도 착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야…… 마치 유라의 어머님 같은 기분이 들어,
그분 역시 나를 딸처럼 귀여워 해주시고……
유린, 우리는 이제 사흘 후에 만나게 될 거야.
지금의 내 심정은 아무도 모를꺼야…… 아무도……>
그렇다.
뉘라서 과연 유라와 무유린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자유를 찾기 위해 목숨을 내건 도박을 앞둔 사람의 심정을……
무유린의 눈빛이 약간 푸르스름한 빛을 발했다.
그것은 모친에 대한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손에서 노인이 종이쪽지를 가져가 읽기 시작했다.
무유린은 애써 한 여인의 영상을 떠올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모습은 안개 속에 가려진 듯 생각하려고 애쓸수록 흐려지기만 했다.
무유린의 짙은 검미가 꿈틀거렸다.
'어머님……'
그래, 이곳에는 무유린의 모친도 죄수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을 한 몸으로 유악계로 끌려왔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쩔수 없이 이곳에서 아기를 낳아야만 했었다.
그 아이는 아들이었고, 그가 곧 무유린이었다.
유악계의 여인들은 다른 곳에 감금되어 있었다.
그녀들 역시 대계곡에서 광석을 캐는 일을 했다.
그러나 더러운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할당받은 여인들도 있었다.
무유린이 모친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모친을 마지막으로 봤던 것이 이미 십 년 전이었으므로……
그는 여섯 살 때까지 모친과 함께 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허락되지 않았다.
일곱 살이 되던 해부터 그는 그만한 또래의 아이들과 함께 용광로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모친은 밤마다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슬피도 울었었다.
그리고 모친은 아들과 헤어지기 전날밤에 아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이야기는 아직도 무유린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으며, 오직 그것만이 무유린이 살아가는 목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노인은 쪽지를 다 읽고나서 그것을 잆속에 넣고 씹어 삼켰다.
이어 그는 눈을 감고 있는 무유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일순간, 노인의 눈가에 어떤 회한 같은 것이 아련히 떠올랐다.
그가 무유린을 만났던 것은 삼 년 전의 일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유악계의 죄수가 아닌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날 불쑥 유악계로 스며들어와 무유린과 만나게 된 것이다.
노인은 석고처럼 차가운 무유린의 옆얼굴을 주시하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지난 삼 년…… 노부는 모든 심혈을 이 아이에게 쏟았었다……! 흐흐…… 노부의 안목은 정확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기대 이상의 성취를 보여 주었었다. 이제 이 아이에게 내공만 주어진다면…… 이백 년의 내공만 갖춰진다면…… 노부의 뒤를 이어 만겁문주(萬劫門主)가 될 수 있다!'
만겁문주,
그렇다면……?
노인 그가 우내삼비 중의 하나인 만겁문의 지존(至尊)이라는 말인가?
아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 동안 천하무림의 전설처럼 내려오던 우내삼비의 만겁문주가 이처럼 초라한 몰골이라니……
노인, 그는 이가 시린 원한을 짓씹었다.
'만겁사혼…… 피로써 노부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그놈들이 노부를 배신하고 도리어 암습을 가하다니…… 으으…… 그놈들에게 입은 상처가 치명적이었다. 네 자루의 냉혈독검(冷血毒劍), 본문을 위해 하사한 검으로 노부를 찌를 줄이야……'
노인의 가슴과 등에는 각각 네 곳에 검상이 아직도 있었다.
그는 알고 있다.
냉혈독검에 일단 찔리게 되면 설사 대라신선(大羅神仙)이 온다 해도 살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는 이미 삼 년이나 이렇게 죽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죽을 수 없었기에……
만겁문에서 만겁사혼에게 암습을 당한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엄중한 중상을 입은 채 처절한 도주를 해야만 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릴 정도로 악몽 같았던 혈로(血路)의 연속이었다.
쫓기는 자와 쫓는 자들, 노인의 눈에 곤혹스런 기색이 일렁였다.
'그런데…… 대체 누구라는 말인가? 그토록 완벽한 천라지망(天羅之網)을 쳐놓고 노부를 죽이려 했던 그 암중인(暗中人)들은……'
그가 필사의 도주를 할 때, 만겁문이 아닌 전혀 다른 신비인들이 그를 주살하려 했었던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그들이 노부를 죽이려 했었다는 말인가? 그들이 누구기에……'
그러나 그것은 이미 삼 년 째 풀리지 않는 신비였다.
노인, 만겁문주는 스르륵 눈을 감으로 느릿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노부는 단 한시도 노부를 죽이려 했던 자들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완벽했다. 완벽한 천라지망과 완벽한 살수들…… 마침내 노부는 한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었다."
무유린은 초점없는 시선으로 전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겁문주의 말이 이어졌다.
"중원천하에서 노부의 한몸을 숨길만한 곳은 결코 없다는 사실을……"
눈을 감은 그의 눈꼬리가 격하게 떨렸다.
헌데,
아아…… 가공하지 않은가?
만겁문주가 아무리 냉혈독검에 격중당했다 해도 그의 무공수준은 절정에 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드넓은 천하에서 단 한 곳도 숨을 곳을 찾지 못했다니……
그것은 그가 무력해서가 아니었다.
신비의 추적자들, 그들의 추격이 너무도 완벽했던 것이다.
만겁문주 정도의 절정고수를 천하에서 한 군데도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만든 추격자들, 아연 소름이 끼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노부는 결심해야만 했다. 처절한 원한의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이곳 유악계에 은둔할 것을 말이다. 제아무리 완벽한 그놈들이라 해도 사해림(四海林)에서만큼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을 것이므로…… 끝내 노부는 천신만고 끝에 사해림으로 들어섰으며…… 그들은 추격을 포기했다."
무유린은 무색(無色)의 눈빛으로 전면만을 주시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를 아는 것은 오직 그 자신 뿐이었으므로……
만겁문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늘이 너와의 마지막 밤이다."
마지막 밤,
"노부는 네게 복수를 부탁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네 의사에 맡길 뿐이다. 다만…… 노부는 훌륭한 만겁문주의 후계자를 노부 스스로 길러내고 싶었다."
문득, 그는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왼손을 단전(丹田)에 대고 오른손을 가슴에 대는 자세를 취했다.
"본문의 심법을 운기하여 진기를 구궁뢰부(九宮雷府)로 모으라."
무유린은 느릿하게 정좌의 자세를 취했다.
이어 만겁문의 비전심법인 만겁극혈공(萬劫極血功)의 요결을 외웠다.
만겁극혈공, 그것은 절대독공(絶代毒功)이었다.
천하독공의 조종(祖宗)이라고 할 수 있는 극독공,
한 순간,
츠츠츠츠……
츠으으……
만겁문주와 무유린의 전신에서 흐릿한 흑무(黑舞)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은 자욱한 흑무에 둘러 싸였다.
다른 죄수들은 철갑족쇄에 묶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스스스……
만겁문주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무유린의 뒤쪽으로 이동했다.
이어 그는 서서히 쌍장을 뻗었다.
그의 장심은 시커먼 먹빛이었다.
그는 쌍장을 느릿하게 무유린의 명문대혈(命門大穴)에 밀착시켰다.
순간,
움찔,
무유린의 전신이 짧게 진동했다.
그의 눈이 번쩍 떠졌으며, 그의 입술이 미미하게 달싹였다.
"무슨 짓이오……?"
만겁문주는 자신의 본원진기를 무유린의 체내로 서서히 주입시키며 담담하게 전음을 흘렸다.
"유린, 어차피 노부는 죽는다. 노부에게 남아있는 일백 년의 공력을 지닌 채 죽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의 쌍장을 통해 노도 같은 공력이 무유린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욱…… 바보 같은 놈, 거부하다니…… 둘다 개죽음 당하려고 그러느냐? 어서 주입되는 진기를 유도하여 본신의 진기와 융합시켜라. 어서……"
만겁문주는 전신을 크게 떨며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그의 전신에서 땀이 비오듯 흘러내렸다.
"그럴 수는 없소이다."
무유린은 완강히 거절했다.
만겁문주의 몸과 이마에 지렁이 같은 핏줄이 툭툭 불거졌다.
무유린이 만겁문주가 주입시키고 있는 공력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멍청한 놈, 네놈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느냐……? 네놈은 모든 것을 버리고 있단 말이다. 네놈의 야망(野望)과 네 모친의 한(恨)마저도……"
순간 무유린의 안색이 차갑게 굳었다.
만겁문주의 얼굴에 극도의 초조한 기색이 어렸다.
"네놈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노부에게 말했었다. 헌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어차피 죽을 늙은이로 인해 그 모든 것을 포기하겠다는 말이냐……? 네 모친마저도?"
무유린의 검미가 잔뜩 찌푸러졌다.
"……"
"노부는 이미 삼년 전에 죽었어야 했을 몸이다. 지금까지 살아 있은 이유는 바로 너 하나 때문이었다. 네놈에게 노부의 공력을 남겨주기 위해서…… 그런데 네놈은……"
만겁문주의 어조가 격하게 떨려 나왔다.
그와 무유린의 전신은 더욱 격력히 진동하고 있었다.
전신의 혈맥이 툭툭 불거져올랐으며 두 눈이 금시라도 튀어나올 듯이 부릅떠졌다.
무유린은 안다.
이대로 잠시만 계속된다면 자신과 만겁문주는 전신혈맥이 터져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 당신은……'
무유린은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어떤 말을 꿀꺽 삼켰다.
이어 묵묵히 만겁문주의 공력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만겁문주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떠올랐다.
……
약 반 시진의 시간이 흘렀다.
만겁문주는 비로소 무유린의 등에서 쌍장을 떼어냈다.
순간,
스르르…… 쿵!
그는 고목처럼 뒤로 넘어갔다.
무유린은 몸을 돌렸다.
만겁문주는 뒤로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불과 반시진 만에 수십 년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입가에는 온화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모든 것을 끝마친 듯한 미소였다.
무유린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심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당신은……"
그때 만겁문주는 힘겹게 앉으며 그를 꾸짖었다.
"못난 놈! 노부는 네놈에게 누누이 일렀었다. 어느 누구에게라도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고…… 철저하게 자신을 은폐시켜야 한다. 아무도 믿지 마라. 오직 너 스스로만을 믿어라. 아니, 어떨 때는 스스로도 믿지 말아야 할 경우가 있다. 노부의 말을 명심해라……"
"……"
"이곳에서처럼 너는 세인들의 눈에 결코 특출한 구석이라곤 없는 인간으로 보여야 한다…… 상대에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 그것은 절반의 승리를 일컫는 것이다."
만겁문주는 지난 삼 년 동안 골백 번도 더 말했던 것을 다시 반복했다.
그의 가르침 때문에 무유린은 이곳에 있는 동안 단 한 번의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었다.
그 역시 남의 눈에 두드러져서 이로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절실히 느껴 왔었다.
만겁문주는 약간 호흡을 고른 다음에 입을 열었다.
"너는 지난 삼 년 동안 닥치느 대로 독물들을 잡아 먹었기 때문에 삼십 년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노부의 일백 년 내공까지 합친다면 일백 삼십 년 공력이다. 그것은 결코 하잘 것 없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뛰어나지도 않다."
"……"
삼 년 전, 만겁문주는 유악계에 잠입하여 귀신도 모르게 암약했었다.
그는 유악계의 오만여 죄수들을 샅샅이 살폈다.
자신의 후계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는 후계자로 적당한 인재를 찾아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신이 상상했던 것보다 십 배 완벽한 후계자감을 찾았으며, 그가 곧 무유린이었다.
무유린은 잠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의 옆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묵인했었으며, 그렇게 두 사람은 숙명적으로 만났었다.
만겁문주는 무유린을 원했었고,무유린 역시 그가 필요했다.
짐승의 굴레를 벋기 위해서……
그날 이후 무유린은 만겁문주에게서 많은 것을 전수받았다.
우선 마겁문의 비전독공인 만겁극혈공, 그것을 연성하게 되면 만독(萬毒)을 마음대로 다룰 수가 있다.
무유린은 유악계에 서식하는 무수한 독물들을 잡아 먹었으며,독물들의 독을 체내에서 용해하여 본원진기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만독불침지신(萬毒不侵之身)은 아니더라도 웬만한 독쯤에는 끄덕없는 신체가 되었었다.
헌데, 이제 만겁문주의 일백 년 내공을 모조리 받았으므로 그는 바야흐로 만독불침지신이 된 것이다.
만겁문주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로 중얼거렸다.
"노부가 네게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
"그것은 모든 것을 네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짐승이나 죄수가 아닌 인간으로서……"
꿈틀!
무유린의 검미가 전율했다.
만겁문주는 토굴벽에 기대어 앉으며 말을 이었다.
"현재 천하무림은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평온한 듯하지만 기실 속으로는곪아 있다…… 천하무림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어떤 가공할 음모가 벌어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림사(武林史)의 그 어떤 피바람보다 더 가공할 것이다. 노부 역시 그 음모에 의해 당했다."
그는 품에서 하나의 작은 물체를 꺼냈다.
그것은 반월형(半月型)의 손가락 반만한 푸른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만겁문주는 그것을 무유린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삼 년 전에 노부를 추격했던 암중인물들이 사용했던 암기이다. 소리도 없으며 빠르기가 섬전과도 같은 공포스러운 것이다. 노부는 그것을 어깨에 맞은 후 뽑아서 간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그들에 관한 유일한 단서이다."
무유린은 반월형의 암기를 묵묵히 살피다가 품에 넣었다.
만겁문주는 범인들과 다름없는 흐릿한 시선으로 무유린을 쳐다보았다.
"노부는 네게 천하무림에 대해서 되도록 자세히 설명해 주었었다. 너는 명심해야 한다. 결코 너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
"아무리 절친한 사이라 해도 내심의 삼푼만은 감추어라. 언젠가 그것이 너를 살려 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만겁문주는 입을 다물었다.
무유린은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온갖 상념들이 그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러나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유악계에서의 일뿐이었다.
모친과 함께 지냈던 어린 시절, 모친이 해주던 이야기들……
나이가 들어 조무라기들과 용광로에서 일하던 일, 그리고 만겁문주를 만나 만겁문의 진전을 전수받았던 일 등……
그러나 그것들 가운데 간직하고 싶은 과거는 하나도 없었다.
한시 바삐 잊고 싶은 추억들뿐이었다.
무유린은 가슴이 저며 왔다.
'어머님……'
그 가련한 여인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열아홉의 나이로 아들을 낳은 여인, 기구한 운명에게 농락당해 이런 지옥 같은 곳에서 아름다운 청춘을 보내야 했던 여인……
꽉!
무유린의 이빨이 입술을 파고들었다.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천천히 뜨여진 무유린의 두 눈에는 이글이글 화산 같은 증오가 타올랐다.
'죽여 버리겠다……! 모조리……'
누구에겐지 모를 살심(殺心)이 심장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가장 사랑하는 모친을 짐승우리에 처넣은 모든 인간들을 저주했다.
악다문 무유린의 이빨 사이로 소름끼치는 으르렁거림이 새어 나왔다.
"담도연(潭道然)…… 당신을 처참하게 죽일 것이다……"
……담도연!……
그는 누구인가?
무유린은 곧 본래의 무심한 표정을 되찾았다.
그에게서 어떤 표정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방금 전에는 그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무유린은 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잠을 청하지 않았다.
그는 여태까지 만겁문주가 전수해 주었던 모든 것들을 머릿속으로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만겁문의 비전무공들……
자린도류(刺鱗刀流), 오직 인명을 살상하기 위한 도법(刀法)이었다.
변화도 없고 초식도 없다.
다만 시전되는 순간 한줄기 비늘과도 같은 도기(刀氣)가 상대의 몸에 콩알만한 구멍을 내어 꿰뚫어 버리는 극쾌도법(極快刀法)이었다.
그러나 무유린은 그것을 단 한 번도 시전해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는 칼(刀)도 없었을 뿐더러 칼이 있었다 해도 그것을 연마할 장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형은풍비(潛形隱風飛).
전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바람 속에 묻혀 신형을 날리는 경신술이었다.
한 줌의 진기로도 백 리를 날아갈 수 있으며,
그 어떤 장소에서도 스스로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은둔술(隱遁術)과 경신술의 복합무학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무유린은 시전해 보지 못했다.
용독(用毒)과 해독술(解毒術),
만겁문은 독문이었다.
천하에서 독으로 만겁문을 능가하는 문파는 전무후무했다.
무유린은 그런 만겁문의 개세적인 독술을 완벽히 섭렵했다.
만겁삼마수(萬劫三魔手),
오직 만겁문주만이 연성할 수 있는 만겁문 비전지공(秘傳之功), 제일초 철혈수(鐵血手)는 백 장 밖의 철판에 세 치 깊이의 장인(掌印)을 찍으며, 제이초 마환수(魔幻手)는 한꺼번에 일흔두 개의 장영(掌影)이 난무하는 가운데 목표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제삼초 천멸수(天滅手)는 글자 그대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멸한다.
천밀수가 일단 시전되면 주위 오십 장 이내가 초토로 돌변하고 만다.
물론 오십 장 이내의 모든 생명체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만겁삼마수의 삼초식 각각에는 절독(絶毒)을 섞어 시전할 수 있는 가공할 장공(掌功)이었다.
만겁극혈공(萬劫極血功).
그것을 십이 성까지 연성하게 되면 전신이 도검불침(刀劍不侵)에 만독불침이 된다.
그야말로 독중지성(毒中之聖)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독중지성이 된 인물의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모든 사물들은 한줌의 독수(毒水)로 녹아 버리고 만다.
뿐인가?
그가 펼쳐 내는 모든 무공에 극독을 가미시킬 수 있으며,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독강(毒 )을 발출하여 상대를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릴 수 있는 절대 독황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겁문이 새워진 이래 절대독황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그만큼 절대독황의 경지는 요원한 것이었으며, 만겁문의 독공은 개세적인 것이었다.
그랬기에 만겁문은 우내삼비(宇內三秘)로서 오늘날까지도 천하인들에게 전설처럼 외경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유린은 숱한 무공구결들을 다시 한 번 반추하며 잠을 청했다.
"……!"
무유린이 지금과 같은 경악지색을 떠올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스스로의 감정이 메말라 있다고 여겼었고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헌데 지금, 그의 얼굴빛은 핼쑥했으며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의 시선이 머문 곳,
아아!
거기에는 다름 아닌 만겁문주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입가에 평화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는데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유린은 그를 마져보지 않아도 그가 죽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전신이 부르르 전율했다.
죽었다.
만겁문주는 저기에 허무하게 죽어 있는 것이다.
지난 삼 년 동안 모든 것을 함께했던 그가……
무유린은 단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했던 슬픔과 울분이 폐부를 갈가리 찢는 것을 절감했다.
만겁문주는 그에게 조부(祖父)와도 같은 존재였었다.
무유린은 그로 인해 새롭게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폭풍 같은 회한과 격동이 무유린의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다른 죄수들은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곧 아침이 될 것이다.
무유린은 일 각 동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의 가슴으로 만감(萬感)이 교차되며 스쳐 갔다.
이윽고 그는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을 되찾으며 묵직하게 중얼거렸다.
"나 무유린의 천하대계(天下大計)에 당신의 복수도 포함시키겠소."
천하대계,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러나 알 수 없다.
무유린 그 스스로만이 알고 있을 뿐.
무유린은 몸을 굽혔다.
이어 만겁문주의 몸을 살피기 시작했다.
역시 그의 예측대로 만겁문주는 기력이 탈진되어 죽은 것이었다.
문득, 무유린의 시선이 만겁문주의 오른손에 머물렀다.
그의 손에는 하나의 둥금 물체가 쥐여져 있었다.
무유린은 손을 뻗어 그것을 취했다.
그것은 하나의 흑옥패(黑玉牌)였다.
앞면에는 아수라상(阿修蘿像)이 뒷면에는 만겁존(萬劫尊)이란 글이 음각(陰刻)되어 있었다.
무유린은 그것이 만겁문주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물(信物)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 이외에 만겁문주가 지니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과 한속에서 허덕이다가 쓸쓸히 죽어간 고독한 무인,
무유린은 그의 별호도 이름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우내삼비의 문주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무유린은 손을 칼처럼 세워 만겁문주의 헝클어진 흰 머리카락을 한 웅큼 잘라냈다.
이어 그것을 조심스럽게 품 안에 갈무리했다.
생각 같아서는 만겁문주의 시신을 안고 천하로 나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때,
저벅…… 저벅……
쇠창살 밖의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순간 무유린은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손으로 벽의 한곳을 더듬었다.
찰나,
툭!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움켜잡고 천천히 빼냈다.
그것은 흙이 묻어 있는 기다란 물체였다.
무유린은 빠르게 물체에 묻어 있는 흙을 털었다.
흙이 떨어지자 그 물체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것은 기다란 쇠[鐵)]였다.
오싹한 느낌마저 들게 하며 붉은빛을 은은히 발하는 쇠였다.
무유린은 그것을 힘있게 움켜잡은 수 신속히 품 안에 갈무리했다.
묵혈신강(墨血神綱), 그 특이한 쇠가 전설의 쇠인 묵혈신강이라고 가르쳐 준 사람은 만겁문주였다.
무유린은 광석을 채굴하다가 우연히 한 토막의 묵혈신강을 발견했었던 것이다.
묵혈신강은 우주간(宇宙間)의 물체 가운데 가장 강한 쇠붙이였다.
그것으로 병기를 만든다면 무적신병(無敵神兵)이 될 것이라고 고서(古書)에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도대체 묵혈신강이 어떤 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림사 이래로 묵혈신강을 소유했던 무림인은 한 명도 없었으므로……
그때,
철컹!
쇠창살이 열렸고, 한 명의 탈혼사가 무유린을 턱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사천사백사십사 번, 나와라……!"
쇠창살 열리는 소리에 다른 죄수들은 부스스 몸을 일으키다가 일제히 무유린을 주시했다.
그들의 눈길에는 연민과 동정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안다.
이틀 후면 인렵제전이 벌어질 것이며, 지금 불려나가는 인물은 인렵제전의 제물로 쓰여지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무유린은 무표정했다.
탈혼사가 그의 발목에서 철갑족쇄를 떼어 냈다.
철컥!
무유린은 태어나서 최초의 육체적인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었다.
"가자."
탈혼사의 말에 그는 느릿하게 걸어나갔다.
그가 복도로 나섰을 때, 다른 탈혼사의 음성이 방금까지 무유린이 있던 토굴 안에서 터졌다.
"아니, 이 늙은이는 간밤에 죽은 모양이군. 잘 뒈졌다. 이런 늙은 놈은 음식만 축낼 뿐이지."
무유린은 그 소리를 뒤로하며 천천히 광장으로 걸어나갔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재미있습니다.
잼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