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의 여왕 5월,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은 부부를 중심으로 혈연관계자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의 가장 작은 집단입니다. 가정의 중심은 가족입니다.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부부의날(21일)에다 입양의날(11일)과 성년의날(16일)이 오롯이 몰려있는 5월은 그래서 가정과 가족을 새삼 반추하고 반성하게 하는 달입니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좇던 어린 시절…’ 그런 어릴 때의 기억은 오래된 동요나 문학작품에서 겨우 찾을 수 있는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낳아 놓으면 제 밥벌이는 하게 마련이라며 한 지붕 아래 생팔촌(生八寸: 8촌까지 한 집에서 태어남)하던 대가족 제도는 이미 전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움찔하고 할머니의 ‘약손’에 새록새록 잠들던 조손간의 사랑, 군사부(君師父)가 동렬이던 아버지의 권위는 세태에 따라 적잖이 변했습니다. 아내는 직장에 나가고 남편이 전업주부 역할을 하는 역할교체 가정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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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담배 피우면 이렇게 되잖아요. 담배 피우면 미워요.” 며칠 전 네 살 박이 손자가 썩어 문드러진 이빨 사진이 인쇄된 담뱃갑을 들이대며 잔소리 하는 통에 고소를 지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 너도 양치질 열심히 안하면 이빨이 이렇게 된다. 알았지?”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도 철도 안 든 어린놈의 추궁에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아이들은 영악해졌습니다. 자연 대신 인공에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장난감, 동요, 동화책,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에다 조기 교육으로 말도 글도 논리도 수위가 높아졌습니다. 만혼과 출산율 저하로 아기가 귀하다 보니 중국의 소왕자(小王子)처럼 귀하신 몸으로 가족의 중심에 위치합니다. 발언권도 높아졌습니다.
법무부가 2009년 시작한 ‘가정 헌법 만들기’ 운동에 참여한 가정의 가훈(家訓)들은 기발합니다. ‘아빠는 리모컨을 뺏지 않는다’ ‘엄마는 아빠에게 잔소리를 자제한다’ ‘아빠·엄마는 카드 명세서를 서로 공개한다’... 모두 자녀들의 소망이 반영된 것입니다. 정직·진실·성실·인내 같은 가훈은 지난 세대의 유물이 된 것 같습니다.
반면 생부·생모를 떠나 남의 손에서 자라는 어린이가 10만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친부모의 이혼·가출·사망·학대·빈곤과 미혼모의 양육 포기 등으로 다른 가정이나 시설에서 자라는 ‘뻐꾸기 아이들’입니다. 부모와의 소통부재는 이 경우만은 아니지만 자폐증 어린이나 온라인에만 갇혀 지내는 Q세대(Quiet:조용한)를 양산할 수도 있습니다. | |
“아버지·어머니, 이제부터는 제 방식으로 살도록 해 주세요. 지금까지는 좋은 학교 나와 좋은 직장 얻어야 한다는 부모님 기대에 저를 맡겼지만, 앞으로는 과거의 인습과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되겠어요.” 고등학교와 대학은 외국에서 나와 외국의 직장을 구한 둘째 아들의 당돌한 말에 적지않이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어떤 일자리가 좋은지 어떤 회사가 장래성이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세대차에 괘씸한 마음도 끌어 오르지 않았습니다.
청년. 그것은 인생의 꽃입니다. 꿈이 있고 사랑이 있고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랑스럽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직장에 다니며, ‘필(feel)이 꽂히는’ 배우자를 얻고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기량을 한껏 펼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은 젊은이의 특권입니다. 명품으로 몸을 휘감아도 보고, 분위기 짜릿한 레스토랑을 찾고, 미지의 나라를 여행도 해보고, 남부럽지 않은 집도 꾸미고 싶고.
보릿고개에 나물죽으로 연명하며, 먼 산에 가서 땔감 구해오고, 옆구리 터진 워커 신고, 책가방 대신 밀가루 포대에 책을 담아 학교를 다녔던 부모들. 그래도 밥벌이가 안 돼 월남 파병을 자원하거나 열사의 나라 중동의 건설현장에서 몇 년간 땀을 판 덕분에 자녀들 교육시키고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었던 전 세대의 추억담은 젊은이들에겐 굳이 듣고 싶지 않은 푸념들입니다.
내 아이들 만은 반듯한 어린이집 유치원에 보내고, 일등 인생을 살도록 조기유학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것이 안 되면 단기간이라도 해외 홈스테이나 어학연수를 시켜 기를 살리고 싶습니다. 좀 더 자라면 염라대왕도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얼짱’을 만들어 주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아인슈타인 우유를 먹여 천재로 키우고, 가능하다면 외국 MBA 자격도 갖도록 지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은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쓴 맛으로 돌아옵니다. 300번이 넘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내도 퇴짜를 맞기 일쑤이고, 천신만고 끝에 오라는 일자리는 월급이 150만원도 안 되는 곳입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거나 의사·한의사 자격을 얻어도 열쇠꾸러미를 들고 오는 신랑·신부감은 별로 없습니다. 외국 대학의 박사학위를 받아도 국내 대학의 시간강사 자리를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그러다 보니 결혼연령도 높아져 통계청의 2009년 혼인통계를 보면 초혼 연령이 남자 31.6세, 여자 28.7세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 결혼비용도 1억 7,542만원(집장만 1억 2,714만원 포함)이나 되니 선뜻 엄두를 못 냅니다. 유치원 교육비가 고등학교 학비를 웃돌고, 대학 등록금이 1,000만 원대에 육박하니 자녀 낳기도 두렵습니다.
“월남 여성,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고 써 붙인 현수막을 보고 외국인 아내를 맞아들인 농촌에서는 한때 국제결혼이 전체 혼인 건수의 20%를 넘기도 했지만 시름은 깊기만 합니다. 언어 장벽·국적 취득·자녀 교육·사회적 백안시 등 난제가 수두룩합니다. 위장 결혼한 아내의 가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녀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회 소식지에 실린 기별 회원 동정란을 보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나이 70이 넘은 선배들의 자녀 혼사가 수두룩한가 하면, 본인 사망 수도 비슷했습니다. 40세를 전후한 미혼 자녀 때문에 속을 썩이는 노인이 많다는 것이 확인 된 것입니다. 직장을 갖고 원룸을 얻어 독립한 자녀도 있지만 대학 6,7학년이거나 해외 유학으로 노부모에 마냥 기대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동물 세계에는 없는 현상입니다.
친·외손자 뒷바라지에 삭신이 녹아내리는 중늙은이도 허다합니다. 아들·며느리가 맞벌이하는 바람에 손자들 기저귀 갈고 밥 먹이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거기다 어린이집·유치원·학교 데려가고 데려오는 데 매달리다 보면 여행은커녕 월례 모임에도 못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입니다. 그것도 자기 돈 들여 손자 공양을 해야 체면치레를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자녀와 손자가 있어 돌보는 것은 행복입니다. 힘은 들어도 ‘내 자식’에 대한 애착과 다치거나 아프면 안 된다는 긴장이 있고, 어린 것들의 재롱에 재미를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딸이 있어도 한두 달에 한 번 올까말까 한, 혼자 살아야 하는 노인이 100만 명이 넘습니다. 언제부턴가 용돈을 끊거나 줄여도 싫은 소리를 못합니다.
100세 시대가 곧잘 운위되지만 노인들은 은퇴자금이 턱없이 부족하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고, 외롭고 힘겨운 삶에 막막하기만 합니다. “그래도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자식들과 함께 살기는 싫어” “죽으면 화장해야지 누가 산소를 찾겠어”…. 시속에 맞춰 한 마디씩 해보지만 옛 말처럼 ‘오래 사는 게 죄’라는 통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고령화 사회의 노인들입니다.
그래도 가슴 속에 사랑의 불씨가 남아 있는 잔소리꾼 아내의 정성에 다소 위안을 삼고 행복을 자처합니다. 담배라면 질색을 하고 질책하던 아내가 잠시 친구들과 타이완 여행을 다녀오면서 썩은 이빨 사진이 붙은 담배를 세 보루나 사다 주었으니까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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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 |
김홍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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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고,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대구방송 이사로 24년간 언론계종사. ㈜청구상무,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사무총장, ㈜화진 전무 역임. | | | |
첫댓글 자식들이 부모가 함께하는 가정의 참 맛과 소중함을 알기엔 아직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되겠지요 나또한 그랬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