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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탄가〔上灘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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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거슬러 오르기 어찌 이리 힘들고 / 上灘何太勞
여울 따라 내려가기 어찌 이리 편한고 / 下灘何太便
서쪽 물살 급기야 소용돌이 이르러선 / 西灧及盤渦
긴 여울 짧은 여울 줄줄이 이어지네 / 長灘短灘何連連
한가운데 큰바위들 삐죽삐죽 솟아 있어 / 中有大石白齒齒
은 물결 흰 파랑 요란하게 뒤집어지네 / 銀濤雪浪相喧顚
동쪽 배는 출발하자 쏜살같이 달리는데 / 東船一發如飛箭
서쪽 배는 힘 모아 당겨도 꿈쩍 않네 / 西船百夫挽不前
사공이여 사공이여 손 놓지 마시게 / 篙師篙師莫放手
자칫하면 밀려나니 조심해야 하리다 / 失勢一落須愼旃
지척의 잔잔한 곳까지 잘만 가 준다면 / 好得咫尺平湖水
봄바람에 돛대 달고 너른 물길 떠가리니 / 春風一帆掛浩然
여강 언덕 바라보며〔望驪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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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물결 넘실넘실 끝도 없이 망망해라 / 滄波渺不極
청산은 어느 순간 사라져 없어진 듯 / 靑山忽若無
강물에 배 띄워 가는 대로 놓아둔 채 / 中流縱所如
사방을 바라보니 외로워라 이 배 한 척 / 四眺覺船孤
저 멀리 섬들은 점점이 떠 있고 / 點點島嶼遠
구불구불 모래사장 줄지어 늘어섰네 / 歷歷沙岸紆
이릉을 뒤덮은 짙푸른 숲에서는 / 蒼然二陵樹
뻗어나는 서기가 어찌 이리 빼어난지 / 佳氣一何殊
물가 새들 오락가락 목란배를 희롱하고 / 渚禽戱蘭橈
물가 꽃들 알록달록 금술잔에 비치누나 / 汀花映金壺
저 위로 붉은 누각 아스라이 솟았는데 / 朱樓已縹緲
바라보니 마치도 부르면 대답할 듯 / 相望若可呼
우리집 어디인지 알아보기 쉽구나 / 吾家亦易知
길 양쪽 수양버들 그늘을 드리운 곳 / 垂柳蔭兩衢
어쩔거나 이내 몸 떠도는 데 사로잡혀 / 嗟余滯浪跡
명승지 오래도록 나 몰라라 하였다네 / 久負名勝區
내일 아침 날 밝으면 일엽편주 구하여서 / 明朝買扁舟
갓 벗고 맨머리로 강호에서 늙으리라 / 散髮老江湖
이릉(二陵) :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世宗)의 능인 영릉(英陵)과 효종(孝宗)의 능인 영릉(寧陵)을 가리킨다.
어쩔거나 …… 하였다네 : 미호 자신이 먼 곳을 유람하다 보니 가까이 있는 여강 유역을 오래도록 찾지 못했다는 의미로 쓴 것이다.
구봉령(具鳳齡, 1526~1586) 기대승(奇大升)과 쌍벽 .스승인 이황에게 학문으로 인정을 받았고, 조정에서는 인품과 문장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학자, 관료로서 입신한 그는 동서(東西) 분당(分黨)의 당쟁 속에서 때때로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하여 우거하며 독서와 강학(講學)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고급 관리로 있으면서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
고전번역서 > 백담집 > 백담집 제1권 > 칠언절구 > 최종정보
백담집 제1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조양 수남현〔兆陽水南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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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호남에서 가장 어려웠던 걸 헤어보니 / 曾數湖南第一艱
하늘 가운데 마현의 굽이진 길이라네 / 中天馬峴路回盤
어찌 알았겠나, 바닷가 변방이 험준하여 / 豈知海右關山峻
정녕 삼성 어루만지는 〈촉도난〉과 같음을 / 正似捫參蜀道難
조양(兆陽) : 전남 보성(寶城) 조양현(兆陽縣)이다
삼성(參星) …… 같음을 : 이백(李白)의 〈촉도난(蜀道難)〉에 “삼성 만지고 정성 지나 우러러 숨 헐떡거리고, 손으로 가슴 쓸어내리며 앉아서 길이 탄식하네.〔捫參歷井仰脅息 以手拊膺坐長歎〕”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이는 곧 세로(世路)의 험난함을 비유한 말이다.
백담집 제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오천에서 김돈서가 형 길주 목사에게 보낸 시에 차운하다〔烏川次金惇敍寄其兄吉州牧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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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새 향해 만 리 멀리로 막 달려가니 / 玉塞方驅萬里車
평생의 영광과 총애 다시 남음이 없네 / 一生榮寵更無餘
목사 되어 호랑이 굴을 다 소탕할지니 / 班侯虎穴應探盡
변방에서 머리 다 희어도 한이 없으리 / 莫恨天涯鬢髮疏
김돈서(金惇敍) : 김부륜(金富倫, 1531~1598)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돈서, 호는 설월당(雪月堂)이다. 1555년(명종10) 사마시에 합격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경릉 참봉ㆍ돈녕부 봉사 등을 제수 받았다. 1585년 전라도 동복 현감(同福縣監)에 부임하였다. 만년에 향리에 설월당(雪月堂)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저서에《설월당집(雪月堂集)》이 있다.
옥새(玉塞) :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에 있는 옥문관(玉門關)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관북(關北) 즉 함경도 지방의 요새(要塞)를 비유한 말이다.
돈서가 그의 형 백영에게 보낸 시운을 다시 써서 짓다〔復用惇敍寄其兄伯榮韻〕 돈서가 그 형을 생각하는 것이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생각을 털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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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보낸 세월 삼 년이 다 되었는데 / 天涯歲月三年近
변방의 산천은 만 리나 멀기만 하네 / 塞上關河萬里餘
유람객 오지 않고 가을이 또 저무는데 / 遊子不來秋又晩
고향 땅은 단풍잎 떨어져 쓸쓸하겠네 / 故山黃葉落蕭疏
홍주 동헌에서 차운하다〔洪州東軒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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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타고 먼 길 떠도는 우스운 나의 인생 / 長程鞍馬笑吾生
변방에서 온갖 병에 시달려 목숨도 가벼웠네 / 百病關河性命輕
나그네 행차 서쪽 고개에서 다시 눈을 만나니 / 征斾復衝西嶺雪
지난해는 빗속에 이 길을 지나갔었지 / 去年曾作雨中行
천 리의 홍주 땅 아득히 먼 길 / 千里洪陽道路長
객창의 광경은 계절이 바뀌어 가네 / 客窓光景換炎涼
밤 세도록 외로운 등불아래 생각에 젖다가 / 夜闌孤燭心中事
《주서》 두세 장을 다 읽었네 / 讀罷朱書三兩章
- 공은 틈나면《주서(朱書)》를 읽었다. -
홍주(洪州) :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이다.
고전번역서 > 백담집 > 백담집 제4권 > 칠언율시 > 최종정보
백담집 제4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만경의 큰 방죽〔萬頃大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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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골짜기 가로막아 큰 둑을 쌓으니 / 兩谷橫遮築巨塘
웅장한 방죽 구불구불 긴 토룡이라네 / 雄堤盤屈土龍長
일천 겹 물결 일어 거친 파도의 형세이고 / 千層浪作鯨濤勢
일만 이랑 물결 머금어 하늘처럼 푸르네 / 萬頃波涵玉宇蒼
가을 달 아래 연꽃은 붉은빛이 일렁이고 / 秋月芙蕖紅蕩漾
봄바람 맞은 물풀은 푸른빛이 아득하리 / 春風藻荇綠微茫
내가 와서 겨울 경치를 만났는데 / 我來正値玄冬景
눈 가득한 마른 연이 밤 서리에 부서지네 / 滿目枯荷敗夜霜
호남 관찰사로 나가는 이사문 중호 을 전송하다〔送李士文 仲虎 出按湖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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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히 임금의 명을 받들고 궁궐을 나오니 / 恭奉綸言出建章
아득히 보이는 깃발 곧게 나부끼네 / 望中旂旐正央央
남쪽 하늘 안개비 맑은 상수 밖에 내리고 / 楚天煙雨淸湘外
형산의 구름과 노을 바다 곁에 자욱하네 / 衡岳雲霞漲海傍
들 숲의 누런 귤빛 두건과 소매에 젖어들고 / 林野橘黃巾袂潤
관청 누각의 밝은 달빛에 꿈속마저 시원하네 / 官樓月白夢魂凉
관풍루에서 부월 짚는 건 남아의 일인데 / 觀風杖鉞男兒事
고향에 은혜 입었으니 특별한 영광이라네 / 桑榟恩榮別有光
이사문(李士文) : 이중호(李仲虎)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사문이다. 1552(명종7) 문과에 급제하였고, 대사간을 지냈다.
태안 청해루에 잠시 앉았다가〔泰安淸海樓小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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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해를 오고 가서 풍류가 넉넉한데 / 二年來往足風流
청해루 가운데 두 번째 유람이라네 / 淸海樓中再度遊
매화 흰 날 동산 숲은 눈처럼 희고 / 雪白園林梅縞日
귤로 단장한 가을 울타리는 금처럼 누렇네 / 金黃籬落橘粧秋
맑은 날에 지리 파악으로 나누어짐을 보겠고 / 晴看地理分巴岳
밤에 별자리 두우성에 비치는 것을 알겠네 / 夜覺星文照斗牛
베개에 기대니 맑은 조수 소리 귀에 가득하여 / 欹枕潮聲淸滿耳
인간세상 고금의 시름을 씻어주네 / 人間要蕩古今愁
파악(巴岳) :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파주(巴州)와 호남성(湖南省) 북쪽에 있는 악양(岳陽)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백담집 제5권 / 오언고시(五言古詩)
의정부에서 강 시중의 관복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서 지음〔議政府見姜侍中冠服感而有作〕 시중(侍中)은 이름이 감찬(邯贊)이다. 고려 강조(康兆)가 목종(穆宗)을 시해하자 거란이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켜 그를 토벌하여 죽이자, 현종(顯宗)은 완산(完山)으로 달아났고 궁궐은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감찬이 귀주(龜州)에서 크게 패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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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뚝한 중서당은 / 巖巖中書堂
천 년 세월을 지났네 / 千古閱年時
젊은 시절에 과거에 급제하여 / 髦碩迭登進
혁혁한 공은 백성이 우러러 보았네 / 赫赫民瞻之
지난 자취 끝내 증명할 수 없고 / 陳迹了無憑
바람에 휩쓸리듯 모두 사라졌네 / 蕩似風埃吹
인헌이 어떤 사람이었기에 / 仁憲獨何人
관복이 여기에 남아있나 / 冠服留在玆
빛나는 자줏빛 난삼은 / 輝輝紫襴衫
새벽노을 드리운 듯 찬란하네 / 爛若晨霞垂
빛나는 수창옥으로 만든 패옥 / 英英水蒼佩
뱀이 휘감은 듯 아름답구나 / 璁瑀繽委蛇
더구나 해계서로 만든 각띠는 / 矧彼駭鷄珍
눈빛을 빼앗을 만큼 기이했네 / 奪眼光生奇
고려조에서 지금에 이르도록 / 麗朝及今日
아득히 몇 세대가 흘렀는데 / 世代邈難追
어찌하여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서 / 如何尙鮮明
완연하게 당시의 모습 그대로인가 / 宛爾當年儀
벌레와 좀 달아나 가까이 못하고 / 蟲蠹竄莫近
먼지와 티도 날려 물들이지 못하네 / 埃壒飄難緇
아마도 귀물이 보호하여 / 豈非鬼物護
조석으로 자주 꾸짖어 몰아낸 게 아니랴 / 朝暮煩呵麾
이에 감동하여 홀연히 일어나 무릎 꿇고 / 感此忽起跪
한숨 쉬다가 탄식하였네 / 喟焉興嗟咨
고려의 운세가 막히기 시작하여 / 麗運始中否
음란한 태후가 근심을 싹 티웠네 / 淫后胎憂危
어찌 알았으랴, 대나무 통에 담긴 서찰이 / 那知竹筒書
간신의 비장을 격앙시킬 줄을 / 激却奸臣脾
피를 뿌려 대궐이 처참하였고 / 濺血慘宸極
임금 바꾸기를 장기 두듯 하였네 / 置君眞奕碁
누가 근심하는 마음 함께 가지고 / 誰將共懟心
같은 하늘에 사는 슬픔을 풀겠나 / 洩得同天悲
오랑캐가 이것을 명분 삼아 / 獠虜假爲名
백만 군사를 몰고 왔는데 / 百萬驅熊羆
역적 강조가 이미 머리 내주어도 / 逆孼已授首
늑대는 여전히 턱을 늘어 뜨렸네 / 豺狼猶朶頤
종묘사직은 일거에 잿더미 되고 / 廟社一炬塵
궁궐은 폐허가 되어 버렸네 / 宮闕虛爲基
수만 리 강남으로 몽진하는 / 江南幾萬里
황옥에 바람이 몰아치네 / 黃屋風披披
천운이 매우 험난하여 / 天步屬艱難
천 발 낚싯대에 한 치 실만 매달렸네 / 千釣持寸絲
이때 공이 대의를 떨쳐 / 維時奮大義
천지에 맹세하며 마음을 기약하고 / 宇宙誓心期
한 번 귀주성에서 소탕하니 / 一掃龜州城
쌓인 갑옷이 언덕과 같았네 / 積甲齊陵陂
나라를 되살린 웅대한 공적을 / 雄雄再造功
어찌 종묘 제기에만 새기리오 / 豈但銘鼎彝
예전에 없는 은총이 융성하여 / 曠古寵渥隆
금화잠 여덟 개를 하사하였네 / 金花簪八枝
등우나 가복은 나란할 수 없고 / 鄧賈不足齒
곽자의나 이광필이 명성 같았네 / 郭李聲同馳
지주석처럼 우뚝하게 흔들리지 않으니 / 柱石屹不動
나라에서 원로로 의지하였네 / 邦家倚蓍龜
남은 생에 다시 벼슬 그만두고 / 殘年更休致
산수 간에 한가롭게 노닐었네 / 山水閑遨嬉
나가고 물러남이 걸맞았으니 / 進退旣可稱
끝과 시작이 모두 이지러짐 없네 / 終始俱無虧
남긴 은택이 사람에게 깊이 들어가 / 遺澤入人深
오래갈수록 사모하는 마음 간직하네 / 愈久有餘思
그래서 상자에 고이 간직하여 / 所以篋笥藏
지금까지 전해온 것이라네 / 流傳迄于斯
호사가인 봉래공이 / 蓬萊好事公
소중하게 싸서 봉해두었네 / 十襲緘縢宜
이제부터 더욱 무궁하도록 / 從今益無窮
후손에게 영원히 알리리라 / 以永來者知
아 내가 늦게 태어나 / 嗟余生苦晩
문곡성의 비밀을 엿보지 못했네 / 文星秘莫窺
언제쯤 면양을 찾아가서 / 何時沔陽路
영령을 모신 사당에 참배하려나 / 一拜英靈祠
강 시중(姜侍中) : 강감찬(姜邯贊, 948~1031)으로, 본관은 금주(衿州), 초명은 은천(殷川)이다. 검교태위 문하시랑에 이르렀다. 무관으로 알려졌으나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 장군으로 요나라의 침입을 세 번 격퇴하였다.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강조(康兆) : ?~1010. 고려 시대의 무신으로, 목종 때 중추사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다. 1009년(목종12) 정변을 일으켜 대량군(大良君) 순(詢)을 옹립하고 목종을 시해하였다. 현종 즉위 후 중대사(中臺使)가 되었다.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데 대한 문죄라는 명목으로 40만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30만의 군사로 통주(通州)에서 싸우다 사로잡혀 살해되었다.
중서당(中書堂) :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된 강감찬을 가리킨다. 강감찬이 사후에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인헌(仁憲) : 강감찬(姜邯贊)의 시호이다.
수창옥으로 만든 패옥 : 대부가 차는 물의 푸른 빛을 띠는 옥을 말한다.
해계서(駭鷄犀) : 통천서(通天犀)의 뿔을 말한다. 통천서는 무소의 일종으로 뿔 한가운데 구멍이 하나 길게 뚫린 것을 말하는데, 이를 아주 보배로운 물건으로 친다. 해계서는 뿔에 백색 혹은 붉은색의 무늬가 나 있는데, 닭들이 이를 보고는 놀라므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이 무소의 불을 잘라 각띠를 만든 것을 이르는 듯하다. 《拘朴子 登涉》
고려의 …… 하였네 : 고려 목종(穆宗, 980~1009)의 모후 천추태후(千秋太后)의 간악함과 이를 저지하라는 왕명을 받은 강조가 도리어 왕을 죽인 것을 말한다. 천추태후는 외족(外族)인 김치양(金致陽)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 그를 왕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후계자인 왕의 당숙 대량군(大良君) 순(詢 현종)을 승려로 만들어 해치려 하였다. 왕이 그것을 알아차리고 대량군을 보호하고자 강조(康兆)에게 그 호위를 명하였으나,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킨 후 대량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김치양 일당을 살해하였다. 왕은 쫓겨나 충주로 가는 도중 살해되었다.
오랑캐가 …… 왔는데 : 거란의 성종(聖宗)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면 명분으로 40만 대군으로 쳐들어 온 것을 말한다.
늑대는 …… 뜨렸네 : 거란이 이미 강조의 목을 베고도 고려를 차지할 욕심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다.《주역》〈이괘(頤卦) 초구(初九)〉에 “너의 신령스러운 거북을 버리고 나를 보고서 턱을 늘어뜨리니, 흉하다.〔舍爾靈龜, 觀我, 朶頤, 凶.〕”라고 하였고, 그 주에 “이(頤)는 물건을 씹는 턱을 이르는데, 사람이 제가 갖고 있는 좋은 것을 버리고 물건을 씹어 먹는 남의 턱만 쳐다보며 부러워하는 격이어서 흉하다.”라고 하였다.
황옥(黃屋)에 바람이 몰아치네 :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 현종이 완산(完山)으로 도망간 것을 말한다. 황옥은 황색 비단으로 만든 임금의 수레 덮개이다.
등우(鄧禹)나 가복(賈復) : 중국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때의 장군으로 후한 건국의 대표적인 공신이었다.
곽자의(郭子儀)나 이광필(李光弼) : 당나라의 명장으로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을 평정하였다.
문곡성(文曲星)의 …… 못했네 : 문곡성은 문운(文運)을 주관하는 별로, 문성(文星)이라고도 칭한다. 강감찬(姜邯贊)이 이 별의 기운을 받아서 탄생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면양(沔陽) : 조선 시대의 면천군(沔川郡)으로, 지금의 당진시(唐津市) 면천면(沔川面) 일대를 말한다. 당시 강씨의 집성촌이었다.
백담집 속집 제1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부사 최현숙이 남수암을 지나기에〔南水庵過崔城伯顯叔〕 남수암은 일직(一直)에 있는데 최공(崔公)이 먼저 도착하여 맞이했기 때문에 지나다가 방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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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암 구름 골짝 속에 있어 / 招提雲壑裏
가파른 절벽 더위잡고 올랐네 / 崖壁絶攀登
흰 물은 절터를 둘렀고 / 白水圍高座
붉은 노을은 하늘을 가렸네 / 紅霞掩上層
한가한 부백을 만나고 보니 / 相逢閒府伯
병든 중승이 절로 우습네 / 自笑病中丞
모임 마치니 부질없이 달만 머물고 / 會罷空留月
원숭이 붉은 등나무에서 울부짖네 / 淸猿叫紫藤
남수암(南水庵) :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 위치한 고운사(孤雲寺)의 말사(末寺)로 일제 때 폐지되었다.
일직(一直) : 경북 안동시 일직면을 말한다.
중승(中丞) : 사헌부 집의이다. 구봉령이 사헌부 집의로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고전번역서 > 백담집 > 백담집 속집 제2권 > 칠언절구 > 최종정보
백담집 속집 제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달밤에 객지 집으로 수찬 유이현이 찾아왔기에〔客居月夜 柳修撰而見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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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종은 한밤에 온 거리에 울리고 / 霜鐘吼夜徹天街
장안 백만 집에 달빛이 가득하네 / 月滿長安百萬家
오랜만에 벗을 만나 정담 끝없이 쏟아지고 / 邂逅故人談落屑
종이 창문에 붉은 등불이 꽃을 피우네 / 紙窓紅燭熖生花
달밤에 …… 찾아왔기에 : 이현은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의 자이다
상종(霜鐘) : 중국 풍산(豐山)에 있는 천연의 옛 종(鐘)을 말하는데, 당(唐)나라 교담(喬潭)의 〈상종부(霜鐘賦)〉에 보면, 가을이 되어 하늘이 맑게 개고 선선한 바람이 불면 상종은 치지 않아도 저절로 운다고 하였다.
정담이 끝없이 쏟아지고 : 원문의 낙설(落屑)은 가루가 떨어진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정담이 넘쳐 난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때 왕징(王澄)이 어떤 이에게 보낸 편지에 “호언국(胡彦國)은 훌륭한 언론을 뱉는 것이 마치 끊임없이 쏟아지는 톱밥과 같으니, 참으로 후진(後進)들의 영수(領袖)가 될 만하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백담집 속집 제3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홍주에서 차운하다〔洪州次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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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 먼 관령 호수로 막혀 있으니 / 迢迢關嶺隔湖天
타관에서 만남이 어찌 우연이겠나 / 客裏相逢豈偶然
천 리 밖 객수 시 지어 함께 풀고 / 千里羈愁吟共豁
십 년 떠돈 자취 웃으며 이야기하네 / 十年遊跡笑相傳
달 밝아 바다기운 주렴 밖에 불고 / 月明海氣吹簾外
비 개자 산 빛은 난간에 들어오네 / 雨霽山光落檻前
흐뭇하게 흥에 겨워 피곤함을 잊으니 / 乘興陶陶更忘倦
맑은 담소 참으로 책속의 현자보다 낫구나 / 淸談眞勝卷中賢
백담집 속집 제3권 / 칠언율시(七言律詩)
회령포에 묵으며〔宿會寧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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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방(남만) 안개 장맛비에 앞이 흐릿한데 / 蠻煙蜒雨竝冥濛
치솟은 성 하나 바다 요충에 자리했네 / 斗絶孤城控海衝
밤을 경계한 깃발에 새벽이슬 맺혔고 / 警夜旗幢凝曉露
시각 알리는 북소리 추풍 속에 들리네 / 嚴更鍾鼓和秋風
몸은 초나라 변방 삼 천 리를 따라가고 / 身隨楚塞三千里
꿈속에 진나라 백이중으로 들어가네 / 夢入秦關百二重
들으니, 북방의 소요 진정되지 않아서 / 聞道北塵猶未靜
감천의 봉화 밤에도 여전히 붉다하네 / 甘泉烽火夜猶紅
백이중(百二重) 백이관(百二關)과 같은 말로,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지를 가리킨다. 《사기》고조기(高祖紀)에, “진나라는 지세가 뛰어난 나라로, 산하의 험고함을 띠고 천 리 멀리 떨어져 있어 제후의 창 가진 백만을 대적함에 있어 진나라는 백분의 이로 당할 수 있다.[秦形勝之國, 帶河山之險, 縣隔千里, 持戟百萬, 秦得百二焉.]”라고 하였다
감천(甘泉) : 황해도에 있는 지명이다.
강진의 마도에 묵으며〔宿康津馬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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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히 감싸는 성상의 교화 남방(남만)에 끼쳤고 / 懷綏聖化被南蠻
순의 뜰에서 간우 춤을 추었다고 들었네 / 聽說虞階舞羽干
가을날 개자 무지개 골짜기 밖으로 걷히고 / 秋霽虹蜺收峽外
밤이 맑아 북두성은 처마 끝에 자는구나 / 夜晴星斗宿簷端
어룡이 조용하니 바다 물결 거세고 / 魚龍寂寞溟波闊
고각 소리 울려 퍼지니 달빛이 차구나 / 鼓角轟騰月色寒
일이 없어서 성루에서 자다가 깨어나 / 睡覺城樓無一事
역졸 불러 말안장을 얹으라 하네 / 且呼郵吏戒征鞍
순(舜)의 …… 추었다 : 우순(虞舜)이 유묘(有苗)를 토벌하다가 항복받지 못하고 돌아와서 덕을 닦으며 궁중 뜰에서 간우(干羽) 춤을 추니 70일 만에 유묘가 와서 항복하였다고 한다. 간우는 간척무(干戚舞)와 우모무(羽旄舞)를 말한다. 간척무는 방패와 도끼를 손에 쥐고 추는 춤으로 무무(武舞)이고, 우모무는 꿩깃과 쇠꼬리를 손에 쥐고 추는 춤으로 문무(文舞)이다.
강원 도사 김계순 복일 을 전송하며〔送江原都事金季純 復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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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지 며칠 만에 다시 아득히 멀어지니 / 逢君幾日復悠悠
어지러운 이별 심사 말머리를 따라가네 / 離思紛紛逐馬頭
세상 일 북으로 가는 구름 같아 견딜 수 없고 / 世事那堪雲北去
화려한 시절 동으로 흐르는 물 같으니 어찌하랴 / 年華無奈水東流
풍악에 원숭이 학 울고 온 봉우리 달뜨며 / 楓岡猿鶴萬峯月
백뢰에 안개와 물결, 온 골짝은 가을빛 / 栢瀨煙波千頃秋
아마도 선경에서 흉금을 씻어 버릴 것이니 / 想得仙區盪胸臆
인간세상에서 벗과 놀던 일 기억을 하겠나 / 人寰能記舊遊不
김계순(金季純) : 김복일(金復一, 1541~1591)로, 계순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남악(南嶽)이다.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어사와 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장흥 부사 이가의 기 의 편지에 답하다〔答長興李府使可依 墍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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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과 띠풀로 우거진 (강변)촌락 장기도 많은데 / 篁茅籬落瘴江邊
동호부 차고 남쪽 나누어 몇 천 리 길 떠나네 / 銅虎南分路幾千
꿈속에 오운이 떠 있는 하늘이 완연하고 / 夢裏五雲天宛爾
거울 속의 두 귀밑머리 눈발처럼 희끗하네 / 鏡中雙鬢雪飄然
고래 내뿜는 푸른 바다 물결이 천 층이고 / 鯨噴碧海千層浪
사자 울부짖는 푸른 봉우리 안개가 만 겹이네 / 獅吼蒼峯萬疊煙
어젯밤 봄바람에 매화 가지에 소식 오더니 / 昨夜東風一枝信
객창에 매화에 걸린 달 사람 보며 둥글겠구나 / 客窓梅月向人圓
고을의 지경 안에 사자산(獅子山)이 있다.
이가의(李可依) : 이기(李墍, 1522~1600)로, 가의는 그의 자이다. 본관은 한산(韓山), 호는 송와(松窩)이다. 1555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우참찬에 이르렀다. 1583년에 장흥 부사가 되었다.
동호부(銅虎符) …… 나누어 : 지방관으로 부임한 것을 말한다. 동호는 구리로 만든 병부(兵符)로 관인(官印)을 가리키고, 나누었다는 것은 ‘임금의 근심을 나눈다[分憂]’는 뜻으로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다.
오운(五雲) : 오색구름이 서려 있는 전각으로, 왕이 기거하는 곳, 또는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용문산을 지나며〔過龍門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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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뜬 푸른 산이 용문산이니 / 浮空積翠是龍門
눈 씻고 보니 아득히 짝할 산이 없네 / 洗眼看來逈不羣
산허리 신기한 빛은 맑은 날도 일렁이고 / 半腹神光晴蕩漾
산 전체 빼어난 기운 대낮에도 엉겨있네 / 全身秀氣晝氳氛
맑은 날 온 골짝엔 바위 벼랑 확 트이고 / 日晴萬壑巖崖豁
가을빛 물든 온 봉우리 금수처럼 선명하네 / 秋染千峯錦繡分
어찌하면 긴 바람으로 한적한 피리 불어서 / 那得長風一閒笛
몇 가닥 소리로 온 산의 구름 걷어 낼까 / 數聲吹破滿山雲
순무 어사로 함경도에 가는 교리 김응순을 전송하며〔送金校理應順以巡撫御使赴咸鏡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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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왕명에 숙배하고 자미궁을 나서니 / 祗肅綸言出紫宮
변방에서 돌아갈 생각 기러기와 짝하네 / 塞天歸思伴征鴻
늦은 봄 개울 길에 얼음 아직 미끄럽고 / 殘春澗道氷猶滑
긴 여름 구름 언덕에 눈이 녹지 않았네 / 長夏雲崖雪未瀜
몸은 낭연 따라 모래벌판으로 가는데 / 身逐狼煙沙磧外
꿈은 달빛 따라 두성으로 가는구나 / 夢隨花月斗城中
부모 봉양과 나라에 헌신을 마음먹으니 / 懷親許國俱心事
진중한 앞길이 만 리를 통하는구나 / 珍重前途萬里通
김응순(金應順) : 김명원(金命元, 1534~1602)으로, 응순은 그의 자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주은(酒隱)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6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돌발하자 도원수로 발탁되어 서울 방위에 힘썼으며 여러 곳에서 무공을 세웠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뒤 우의정에 오르고 전란 때의 공적으로 경림부원군(慶林府院君)에 봉해졌다.
자미궁(紫微宮) : 자미는 별 이름인데, 상제(上帝)가 거처하는 곳으로, 전하여 제왕의 궁전을 의미한다.
낭연(狼煙) : 옛날 전쟁 때에 신호로 쓰던 연기로, 이리의 똥을 나무 속에 섞어서 불을 피우면 바람이 불어도 연기가 똑바로 위로 올라간다고 한다.
두성(斗城) : 도성을 가리킨다. 장안성(長安城)이 말[斗]처럼 생겼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백담집 속집 제2권 / 칠언절구(七言絶句)
권장중의 시에 차운하다〔次權章仲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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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안봉 앞에는 섣달 눈 남았는데 / 回雁峯前臘雪殘
산천이 가로 막혀 만날 길 없네 / 關河無路得相看
매화 소식 거듭 보내면 좋으리니 / 不妨重寄梅花信
한강 맑은 하늘 아래 눈이 시리다네 / 江漢晴天眼正寒
회안봉(回雁峯) : 형산(衡山)의 남쪽에 있는 봉우리가 있다. 봉우리가 너무 높아 기러기가 더 이상 넘어가지 못하고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여기서는 서울에서 바라보이는 남쪽 산을 말하는 듯하다.
태평관은 한성에 있는데 명나라 사신이 쉬는 곳이다. 이는 사해가 한 집안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백담집 속집 제3권 / 칠언배율(七言排律)
석장군가에 차운하다〔石將軍歌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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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양 동쪽 귀퉁이에 오래된 역참이 있고 / 德陽東隅古郵館
송산의 서쪽에는 층층 봉우리 우뚝하구나 / 松山西望層峯斷
봉우리 위에 헌걸찬 두 대장부 서 있는데 / 峯上頎然兩丈人
일 좋아하는 누군가 도끼로 깎아 다듬었나 / 好事斤斧誰斲判
큰 키는 우뚝하게 백여 길은 족히 되고 / 長身屹立百丈餘
안개 노을 삼키어서 곳에 경계를 이루었네 / 呑吸煙霞成界畔
푸른 이끼에 오랜 세월 묻혀 / 蒼苔沒歲年
만들게 된 시기를 모르겠네 / 創始迷後前
후세에 남긴 공업은 없고 / 曾無勳業照來世
부질없이 이름만 남았구나 / 但有名號空昭懸
진인가 한인가, 위인지 오인지 모르겠고 / 秦耶漢耶不知魏曺與吳孫
천년만년 넋만 남았구나 / 千古萬古留遺魂
하늘 위 난봉의 짝이 되려고 / 能敎天上鸞鳳侶
붓을 들어 조화 부리느라 얼마나 분주했나 / 筆驅造化何繽紛
문득 생각하니, 나누어지고 찢어지던 때에 / 却憶瓜分幅裂秋
백성은 도탄에 빠져 화염에 휩싸였지 / 民墜塗炭遭熬焚
이때에 장군이 기이한 계책 내어 / 將軍於焉奮奇策
북쪽 호로와 서쪽 융적을 정벌했네 / 北伐胡盧西戎狄
구멍 속의 개미는 본래 달아나지 못하고 / 穴蟻由來不得逃
솥에 갇힌 물고기 어찌 쉴 수 있으랴 / 鼎魚何曾容假息
공업 이루자 음산한 안개 맑게 걷히고 / 功成淫霧捲塞淸
전쟁 끝내자 무지개 하늘에 붉게 뻗었네 / 戰罷長虹射天赤
군영에는 푸른 창이 누워 있고 / 轅門間臥綠沈槍
피비린내는 금 화살촉을 더럽히지 않았네 / 腥血未汚金瓜鏑
그래서 큰 공적을 돌에 새기니 / 所以鐫石表駿功
고금의 군자들이 모두 혀를 차네 / 今古博雅咸嗟惜
아니면 몸이 난리를 만나서 바로 무너지고 / 不然身丁離亂正分崩
앞의 무리 모두 창을 돌려 잡고 맞서리라 / 前徒倒戈皆勍敵
나라와 집안이 망해 마침내 수치를 안고 / 國破家亡竟包羞
장성이 절로 무너져 울분만 가득하리라 / 自毁長城慷慨懷
위엄이 지금도 남아 천하에 진동하고 풍우도 여전히 울분을 띠고 있고 / 餘威至今轟雷震電風雨猶鬱怒
그 옛날 시름에 원통함이 치솟네 / 冤憤烈烈當時愁
특이한 행적 전해서 우리 군 사기 떨치니 / 奇蹤永播張吾軍
모사하여 수없이 전해졌네 / 模寫幾許驚傳聞
웃으며 진위는 묻지 않고 버려두고 / 聊將一笑付諸眞贋間
남겨서 이 산문을 지키게 하였네 / 庶使留鎭玆山門
여우와 범이 어찌 넘보겠는가 / 狐狸豺虎安得敢越厥
부월을 휘두르지 않아도 달아나네 / 攝竄不待揮旄銊
신이한 공적 태산 바위에 새길만하고 / 神功應似泰山石
구름일고 큰비 내려 하국을 소생시켰네 / 膚寸霶沱蘇下國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신선 같은 두 사신 금작인을 팔에 차고 / 君不見兩使仙姿肘繫金鵲印
불꽃 튀기는 서릿발 같은 칼을 들었네 / 手中紫燄霜磨刃
청천을 한 번 가리키니 천만 조각 찢어져 바람 따라 시단에 널리 알려지니 / 晴天一指萬片碎裂隨風飛詩壇
높이 쌓은 시문이 삼천 척이로다 / 築壘高峙三千仞
석장군가(石將軍歌) : 돌장승을 노래한 것이다. 1539년(중종34)에 황태자공상조사(皇太子恭上詔使) 겸 황천상제태호조사(皇天上帝泰號詔使) 정사(正使) 화찰(華察)과 부사(副使) 설정룡(薛廷龍)이 조선에 왔을 때, 최연(崔演, 1503~1549)이 원접사 소세양(蘇世讓)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명나라 사신이 낸 운자에 소세양을 대신해 지은 것이다.
덕양(德陽) : 경기도 고양의 옛 이름이다.
송산(松山) : 경기도 고양 고봉산(高峯山)에 연결된 야산이다.
푸른 …… 있고 : 무력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두보(杜甫)가 하 장군(何將軍)의 정원에서 놀며 지은 〈중과하씨(重過何氏)〉 시에, “금쇄갑은 빗속에 버려졌고 푸른 창은 이끼에 누워 있네.[雨抛金鍞甲, 苔臥綠沈槍.]”에서 나온 말이다.
이항복(李恒福 1556~1618) 경주 이씨로 자는 자상(子常)이며, 권율(權慄) 장군의 사위가 되어 처가 인 필운대(弼雲臺 인왕산 기슭) 근처에서 살아 젊은 시절엔 필운이란 호를 썼고 만년에는 서울 근교 망우리쪽에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짓고 은퇴하여 동강이란 호를 쓰기도 하였다. 따로 또 청화진인(淸化眞人)으로 자호한 바 있으나 백사로 널리 일컬어져 왔다. 그리고 ‘오성’이란 칭호는 그가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의 봉작을 받은 데서 유래
25세 때 문과에 급제, 국정에 참여했던 바 임진왜란 당시는 나이 37세로서 도승지라는 요직을 맡고 있었다. 전황이 아주 심상치 않음을 느끼게 되자 그는 자기 한 몸을 나라에 던지기로 각오한 나머지 가족들과의 접촉도 일체 끊고 오직 국사에만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국운이 걸린 사안에서 전략적 판단을 기민하게 하여, 큰 방향을 옳게 잡도록 하고 급박한 사태를 무사히 넘긴 일이 누차 있었다. 뿐만 아니라, 명군과 아군의 협조 관계, 군수 지원 등 착잡하고 곤란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도 그가 업무를 관장하면 민활하고도 무리 없이 처리되었다. 그래서 전쟁을 수행하는 주무 장관인 병조 판서를 무려 다섯 차례에 걸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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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 제1권 / 시(詩)
양산(梁山)에서 회포를 쓰면서 앞의 운을 재차 사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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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외에서 해를 지나매 귀밑이 희끗희끗하여라 / 嶺外經年鬢欲斑
집사람은 응당 벼슬 쉬지 않는 걸 괴이케 여기리 / 家人應怪不休官
천시는 전쟁 속에 언뜻언뜻 교대하고 / 天時易謝干戈裏
남자는 우주 사이에 헛되이 사는구나 / 男子虛生宇宙間
눈물은 석양을 따라 소매에 흘러내리는데 / 袖有淚隨西日下
서신은 북풍에 부쳐 돌아올 기러기가 없구려 / 雁無書寄北風還
이 몸이 만일 천억 개로 변화할 수만 있다면 / 身如可化爲千億
흩어서 양산을 오르고 한산에도 오를 것을 / 散上梁山達漢山
남민의 의복은 절반쯤 알록달록해졌는데 / 南民衣服半成斑
때때로 나를 불러 상관이라 하는구나 / 呼我時時作上官
일본(日本)의 풍속은 존자(尊者)를 상관(上官)이라 부른다.
서벌의 거위와 매는 바다 밖으로 돌아가고 / 徐伐鵝鷹歸海外
일본에서는 거위와 매를 사 가는 것을 귀히 여긴다. 경주(慶州)의 구호(舊號)가 서벌나(徐伐那)이다.
일본국의 연화는 하수 사이로 들어오네 / 扶桑煙火入河間
황성의 달빛 아래선 수졸들이 얘기 나누고 / 荒城月照戍人語
언 모래벌의 바람 속엔 순찰 기병이 돌아오네 / 凍磧風鳴巡騎還
고향 꿈은 집이 만리나 떨어진 줄을 모르고 / 鄕夢不知家萬里
기꺼이 나비를 따라 일천 산을 지나가누나 / 喜隨蝴蝶度千山
사월 초이튿날 서리가 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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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와 천시를 그 누가 주장하는고 / 人事天時孰主張
가는 도중 창랑수에 귀밑머리 긁어 다하네 / 征途搔盡鬢滄浪
군왕께서 억조 창생의 일을 아시려거든 / 君王欲識蒼生事
사월 하늘 광주 지방에 서리가 내렸다오 / 四月光州有殞霜
응제(應製)하여 진 제독(陳提督)의 운에 차하여 부채에 써서 기증하다. 전교(傳敎)하기를 “제독(提督)이 이 시(詩)를 가지고 나에게 차운을 하라고 하였는데, 나는 할 수가 없다. 영상(領相)은 문장(文章)을 잘하고 필찰(筆札)도 좋으니, 친히 지어 써서 들여오면 내가 의당 이 뜻으로 게첩(揭帖)하여 보낼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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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의 높은 깃발로 동주를 진압하니 / 高牙大旆鎭東州
동방 만 리에 나는 요기가 걷히었네 / 日域飛氛萬里收
기쁜 기분은 곧장 강한을 따라 흐르고 / 喜氣直隨江漢轉
위엄의 명성은 멀리 해운을 눌러 떴도다 / 威聲遠壓海雲浮
압록강으로 올 적엔 더위먹는 걸 걱정했는데 / 來時鴨水人愁暍
요하로 가는 길엔 눈이 갖옷에 가득하구나 / 歸路遼河雪滿裘
부끄러워라 가는 이에게 좋은 선물은 줄 게 없고 / 深愧贈行無長物
작별의 정으로 오직 술 한 사발을 나눌 뿐이네 / 離情唯有酒盈甌
유릉(裕陵)에 대한 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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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 인화문 밖 어느 날 밤에 / 伊昔仁和夜
허둥지둥 새가 둥지를 찾듯 하였네 / 蒼黃鳥擇棲
난계에는 등불이 매우 희미하고 / 蘭階燈影少 궁전(宮殿)의 미칭(美稱)
수놓은 장막엔 빗소리가 처량했는데 / 繡幄雨聲凄
나 홀로 금련촉 잡아 밝히니 / 獨秉金蓮照
친히 옥로에 올라 서쪽으로 향하면서 / 親扶玉輅西
두 번 세 번 간곡하게 위로해 주시니 / 再三天語慰
지척 사이에 촌심이 아득하였네 / 只尺寸心迷
국운은 천년의 경사를 회복했건만 / 運復千春慶
재앙은 만백성의 울음을 자아내도다 / 生萬姓啼
은혜를 입고 겸하여 덕을 앙모하오나 / 銜恩兼仰德
문장이 졸렬하니 어떻게 쓴단 말인가 / 詞拙若爲題
임진년(壬辰年)의 변이 일어나서 충주(忠州)의 패보(敗報)가 이르자, 상(上)께서 서쪽으로 몽진(蒙塵)하겠다는 전교를 내렸는데, 이때 백관(百官)은 모두 사제(私第)로 돌아가 있었고, 위사(衛士)들도 일시에 흩어져 돌아가 버려서, 대궐 안이 적막하기가 마치 텅 빈 궁전 같았다. 새벽에 이르러서는 하늘이 흐리고 비가 내려서 캄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고, 거가(車駕)는 이미 준비되었으나 인화문(仁和門) 밖에는 전혀 인적이 없었다. 그러자 내전(內殿)께서 홀로 시녀(侍女) 10여 인과 함께 인화문까지 걸어 나왔다. 이때 나는 도승지(都承旨)로서 촛불을 잡고 문 밖에서 기다렸다가 앞에서 인도하여 나왔는데, 내전께서 돌아보고 촛불 잡은 사람이 어느 관원이냐고 묻자, 시녀가 도승지 이모(李某)라고 아뢰니, 내전께서 감탄하고 위로하여 타이르면서 충의(忠義)를 면려하였으므로 여기에 언급한 것이다.
답청일(踏靑日)에 느낌이 있어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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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서울 입구 작은 산 모퉁이에 있어 / 家當京口小山隈
매양 좋은 때마다 옛 슬픔을 느끼어라 / 每到佳辰感舊哀
외로운 꿈은 몸이 영락한 것을 알지 못하고 / 孤夢不知身落托
장난 삼아 나비 따라서 답청을 하고 돌아오네 / 戲隨胡蝶踏靑廻
지붕 위에 임한 아사달산에는 / 屋上阿斯達
봄이 오매 풀이 비탈에 가득한데 / 春來草滿坡
멀리 어여뻐라 삼삼오오 짝을 지어 / 遙憐三五伴
웃고 노래하며 꽃 향기 좇는 것이 / 歌笑趁芳華
춘천부(春川府)에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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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이 가려 길이 없는가 했더니 / 崖擁疑無路
산이 열리매 별촌이 보이는구나 / 山開別有村
강으로는 도성의 물화를 통하고 / 江通漢都貨
땅은 영남과 같이 따뜻하여라 / 地比嶺南暄
들이 텅 비니 범을 만나기 드물고 / 野曠稀逢虎
백성이 순박하니 문을 닫지 않도다 / 民淳不閉門
소양대 위에 올라 바라다보니 / 昭陽臺上望
요해처가 웅대한 번진 같구려 / 襟帶似雄藩
초연대(超然臺)에 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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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따라 구름 잔도는 꼬불꼬불 가늘게 나 있고 / 沿崖雲棧細逶迤
화려한 돌에 맑은 물은 그림자가 눈부시도다 / 錦石淸流影陸離
먼 데서 불어오는 바람에 강빛이 움직이어라 / 風自遠來江動色
한 조각 외로운 돛에 물결무늬가 춤을 추네 / 孤帆一片舞文漪
춘천(春川)의 큰선비 이씨ㆍ안씨ㆍ최씨 세 군자가 청평사에서 내가 노닌다는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찾아와 반석(盤石) 위에 나란히 앉았는데, 나는 그 곳으로 셋집을 얻어 이사하여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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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의 계획은 소양강 아래 와서 / 晩計昭陽下
그대와 함께 한 낚대에 늙는 거로세 / 同君老一竿
생업이 빈한함은 걱정하지 말라 / 勿憂生事薄
본디 부래산이 있지를 않는가 / 自有浮來山
주(州)의 북쪽에 외로운 섬이 있어 부래산(浮來山)이라 호칭하는데, 세속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산이 낭천(狼川)에서 흘러왔기 때문에 토착민들은 가난하고, 우거하는 백성들이 부자가 된다고 한다.
무임강(無任江) 가에 땅을 가려 집을 지었는데, 들은 넓고 강은 낮아서 집에서 물이 보이지 않으므로 장난 삼아 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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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맑은 강물을 푸른 들이 가리어라 / 澄江媚嫵靑蕪隔
보인 곳이 어찌 숨은 곳의 기이함만 하리오 / 見處何如隱處奇
세간의 명승지가 그 어디가 이만하랴 / 形勝世間誰得似
푸른 등라 장막 속에 서시를 숨겨놓은 격일세 / 綠蘿帷帳匿西施
돌아가는 길에 아차령(峨嵯嶺)에 올라 한양을 바라보고 슬픈 생각에 이 시를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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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하늘 저문 빛은 이미 어둑어둑한데 / 西天暮色已蒼然
눈물 흘리며 고향 산 석양 가에 들어왔네 / 淚入鄕山落日邊
읊조리며 진암에 기대 멀리 눈 놀리어 / 嘯倚震巖遊遠目
삼각산 아래 만 가호의 연기를 기꺼이 보노라 / 欣瞻華下萬家煙
맹인 점장이가 와서 나의 운수 사나운 해에 대하여 말하기에 “운수 사나운 해를 좋게 넘길 수 있는가? 그렇게 하려면 비용이 얼마나 드는가?” 하고 물으니, “메조 한 말에 삼베 두어 자만 가지면 충분합니다.” 하므로, 나도 모르게 봉복절도(捧腹絶倒)하면서 장난 삼아 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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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새해 들어 점 파는 사람이 있는데 / 門外新年賣卜人
모두들 때로는 신처럼 맞히기도 한다고 하네 / 多言時或中如神
가련하도다 남자의 당당한 운명이 / 可憐男子堂堂命
고작 거친 삼베 한 조각과 맞먹는단 말인가 / 只直粗麻一布巾
섣달 이십이일에 창성(昌城)으로 유배시키라는 명이 있어 처음으로 망우령(忘憂嶺)을 지나는데 이 날 매우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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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센 바람도 철석 같은 간장은 뚫기 어렵고 / 獰風難透鐵心肝
서관의 만겹 산도 두려울 것 없도다 / 不怕西關萬疊山
진암의 천길 고개에서 말을 쉬게 하고 / 歇馬震巖千丈嶺
석양 아래 차가운 목릉을 돌아보노라 / 夕陽回望穆陵寒
청파(靑坡)에 이르니, 경원(慶源)으로 이배시켰다가 또 삼수(三水)로 옮기었고, 정월 구일에는 북청(北靑)으로 고쳐 이배시켰는데, 연릉(延陵) 등 제군이 술을 가지고 와서 산단(山壇)의 길 아래에서 전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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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일은 쓸쓸하고 한낮이 어두컴컴한데 / 雲日蕭蕭晝晦微
북풍은 원정인의 옷을 불어서 찢누나 / 北風吹裂遠征衣
요동의 성곽은 응당 예전 그대로이겠으나 / 遼東城郭應依舊
다만 영위가 가서 돌아오지 않을까 염려되도다 / 只恐令威去不歸
함원역(咸原驛)에서 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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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산 꼭대기에 쌓인 눈이 / 玄石山頭雪
불어와서 역로를 하얗게 만들고 / 吹來驛路霜
바람 따라 대륙을 흐리게 하니 / 隨風迷大陸
찬 햇빛 희미하여 광채가 없구나 / 寒日淡無光
북쪽 풍속은 말달리기를 좋아하여 남녀가 모두 전립(氈笠)을 쓰고 손으로 재갈을 잡고 달리는데, 이 때 관기 경선(慶仙)이 나를 만나보러 왔기에 내가 너도 말달리기를 잘 하느냐고 물으니, 경선이 즉시 안장에 올라앉아 말을 돌린 다음 말을 몰아 질주하므로, 내가 기뻐하며 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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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드러지고 예쁜 날씬한 몸매의 소녀가 / 裊裊娉娉蔻荳長
가벼운 제비처럼 용을 타고 날아가네 / 翩然輕燕踏龍翔
봄놀이 하는 아가씨들 다투어 와서 구경하니 / 女郞拾翠爭來看
물 건너의 동풍이 좋은 향기를 보내 주누나 / 隔水東風送異香
백사집 제2권 / 서(書)
최 정자(崔正字) 유해(有海) 에게 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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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농경(農耕)에 종사하는 일에 대하여 충분히 토론하지 못하고, 물러와서 고론(高論)을 자세히 완미하면서 서서히 병근(病根)의 소유래를 연구해 보니, 마치 세속을 좇아 밖으로 내달아서 실지(實地)를 밝히지 못하는 듯한 것이 있었네. 만일 그렇다면 일을 해치는 것이 사소하지 않기 때문에 글 한 장을 작성하여 그 설(說)을 남김없이 피력하고 싶었으나, 내가 조정으로부터 버려진 이후로는 필연(筆硯)의 일에 더욱 게을러져서 실천을 하지 못하다가, 지금 찾아온 사자(使者)를 인하여 감히 지난번의 말을 거듭 되풀이하는 바일세.
일찍이 듣건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시니, 물(物)이 있으면 법칙[則]이 있도다.” 하였으니, 물(物)은 곧 일[事]이고 보면, 사람이 천지 사이에 생존하면서 일이 없을 리가 없는 것일세. 더구나 배고파서 밥 먹고 추워서 옷 입는 것은 일상 생활 속에 가장 큰 것이니, 모든 생명이 있는 인간들은 모두 의당 스스로 힘써야 할 일이네. 그런데 비록 스스로 힘써야 하기는 하나, 옳은 도리를 벗어나서 그것을 얻는다면 이는 이른바 법칙이 아닌 것일세. 오직 천도(天道)를 사용하고 지리(地利)에 의지하여 절제하고 예법을 신중히 지켜서, 감히 의리 아니게 취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바람이 있지 않은 다음에야 이것이 이른바 사물의 법칙이라는 것이네.
이미 생명을 타고난 것들은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데, 군주(君主)가 혼자 이 일을 해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현자(賢者)를 구하여 함께 다스리고 또는 친히 농사를 짓거나 백공(百工)의 일을 할 겨를이 없는 것이네. 그러므로 마음을 수고롭게 쓰는 사람은 백성들로부터 먹여줌을 받기 때문에 녹(祿)을 제정하는 법이 생기었네. 그래서 농작의 수확을 대신하여 받는 녹봉이 이미 여유가 있는데도 오히려 잗달게 백성들과 이끗을 다투는 것을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일세. 옛날 장문중(藏文仲)의 첩이 부들자리를 짠 데 대하여 공자는 장문중을 불인(不仁)하다고 하였고, 공의휴(公儀休)가 채마밭의 아욱을 뽑아 내버린 데 대하여 사씨(史氏)가 그의 청렴 결백함을 칭찬한 것이 대체로 이 때문이요, 이것을 비속(鄙俗)하다고 여기어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네.
그런데 우리 나라의 풍속은 중국과 달라서, 백성이 막 태어나면서부터 귀천(貴賤)에 미리 정해진 분수가 있으므로, 천한 자는 아무리 총명하고 특수하더라도 사(士)가 되지 못하고, 귀한 자는 아무리 둔하고 어리석을지라도 농(農)ㆍ공(工)을 업으로 삼으려 하지 않는 것이 그 유래가 오래되었네. 그래서 스스로 일하여 먹거나 남묘(南畝)에 나가 농사짓지를 않으므로, 하는 짓이란 곧 일년 내내 즐겁게 노니는 것뿐이네. 그러나 맹자가 이르기를, “사지(四肢)를 게을리 하여 부모의 봉양을 돌보지 않는 것이 첫째 가는 불효(不孝)이다.”고 하였으니, 가령 이런 무리들이 그 말을 본다면 어떻다고 하겠는가? 하늘이 물(物)을 생(生)하는 뜻과 성인(聖人)이 법칙을 세운 의리로써 바로잡는다면 이들은 성문(聖門)의 한 죄(罪)의 우두머리가 되기에 꼭 알맞을 것이네.
순자(荀子)가 이르기를, “사민(四民)의 업(業)에 종사하지 않는 자를 간민(姦民)이라 하는 것이니, 간민이 생기지 않아야만 왕도(王道)가 이에 이루어진다.” 하였네. 그러므로 주공(周公)의 법에는, 흰 관에 검은 테를 두르고 다섯 치의 끈을 드리운 것은 게을리 노는 자의 차림으로 삼아서, 끝내 향당(鄕黨)에 끼지 못하게 하였으니, 지금의 풍습으로 본다면 어떻다고 하겠는가?
세상의 태만한 자들은 농지거리나 하며 노는 것을 고상한 운치로 여기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비속한 것으로 여기는데, 만일 농사짓는 일을 비속한 업(業)이라고 말한다면,우순(虞舜)ㆍ장저(長沮)ㆍ걸닉(桀溺)ㆍ동소남(董邵南) 같은 이들이 먼저 그 일을 하였고,공업(工業)을 천한 일이라고 한다면 윤편(輪扁)이 먼저 하였으며, 상업(商業)을 천박한 기예라고 한다면 관중(管仲)ㆍ교격(膠鬲) 같은 이들이 먼저 하였다. 그러니 가령 순 임금을 본받을 것이 없다면 그만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지금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은 무슨 도(道)를 따른단 말인가? 다만 그 가운데서 의리(義利)의 관계를 세심하게 대처하여 중도를 헤아려서 잃지 않는 사람이 바로 군자인 것이네. 옛날에 어찌 일찍이 놀고 먹는 자들을 귀하게 여긴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그 가운데는 또 사이비(似而非)한 자들도 있었으니, 성문(聖門)에 종유하면서 농사짓는 일 배우기를 청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농단(隴斷)에 올라가서 시장의 이익을 그물질한 것도 부끄러운 일이네. 그러므로 한번이라도 사업(四業)에 마음을 두면서 가릴 바를 모른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급진적으로 세속에 점염(漸染)되어 날로 천리(天理)를 등지고 인욕(人欲)을 좇는 데로 치닫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네.
근세(近世)에 모재 선생(慕齋先生 김안국(金安國)의 호)이 폐해져 여주(驪州)에서 살 적에 친히 나가서 곡식 수확하는 것을 감독하여 쌀 한 톨이라도 타작마당에 버리지 못하게 하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다.”고 하였네. 그리고 율곡 선생은 해주(海州)에서 살 적에 대장간을 일으켜 호미[鋤]를 만들어 내다 팔아서 스스로 생활을 영위하였네. 그러나 감히 이것을 고상한 행위로 여긴 것은 아니요, 의리상 당연히 해야 할 경우에는 대인(大人)들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했던 것이라네.
그런데 지금은 세속의 폐단이 도도히 번져서 온 세상이 바람에 쓸리듯 하고 있네. 시험 삼아 내가 일찍이 겪어본 일을 가지고 말하겠네. 내가 소년 시절에 고향에서 집상(執喪)을 하고 있으면서 보았는데, 그 마을의 한 어른이 7세 된 종아이를 얻어서 그를 데리고 밭으로 가더니, 쟁기를 들어서 아이에게 가리켜 보이면서 이리이리하라고 말해 주고는, 아이가 그대로 해내지 못하면 또 스스로 쟁기질을 하곤 하여, 종일토록 십수(十數) 차례나 이렇게 하는 동안에 밭은 이미 다 갈아졌네. 그러니 그의 뜻은 겉으로 종아이를 가르친다는 명분을 칭탁하여 몸소 밭을 가는 수치스러움을 가리고자 했던 것일 뿐이네.
그리고 지난해에는 내가 귀종(龜宗)에 살 집을 정하였는데, 그 곳의 땅은 저습(低濕)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쪽[藍]을 심기에 알맞으니, 염료(染料)를 채취하여 팔면 충분히 호구(餬口)를 할 수 있겠다.”
고 했더니, 옆에 한 무인(武人)이 있다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어찌 이런 잗단 일을 한단 말입니까?”
하였네. 나는 처음에 그 사람의 생각이 이토록 심하게 잘못된 줄은 헤아리지 못했었네. 그래서 내가 대답하기를,
“이미 영록(榮祿)을 하직했으니, 농사를 짓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니, 그 사람이 말하기를,
“어찌 계산(溪山)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 애써 쪽을 심어 가꾸지 않더라도 사람은 절로 생생(生生)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였네. 그러나 내가 뜻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자, 그는 다시 강경한 말로 은밀히 나를 꺾고자 하여 말하기를,
“완평 상공(完平相公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을 이름)을 보지 않았습니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앉아 있으니, 세상에서 그를 청고(淸高)하다고 말합니다. 어찌 그 분처럼 하지 않고 도리어 이런 일을 하려 합니까?”
하기에, 내가 그제서야 말로 그를 깨우치기 어려움을 알고, 서서히 말하기를,
“도(道)가 같지 않으면 서로 일을 꾀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고는, 즉시 그만두고 말하지 않았었네.
그 후 노원(蘆原)에 있을 적에는 이웃의 한 사람이 무슨 일 때문에 큰 소리로 하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비록 못났지만 일찍이 호미를 메고 친히 밭에 나가 본 적이 없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논밭 다스리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기 때문이었네.
이상의 세 사람이 하나는 무부(武夫)이고 둘은 향인(鄕人)이었는데, 말은 비록 비루하고 어리석으나, 유속(流俗)에 물든 것은 과연 갑자기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니, 아무리 말솜씨가 좋아도 아무 유익함이 없는 것일세.
그러나 족하(足下)의 경우는 평생에 고인(古人)의 글을 읽고 걸핏하면 고인으로써 스스로 기대하는 처지이니, 후일에 반드시 입언(立言)하는 군자가 되어 후세에 교훈을 남길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네. 그런데도 오히려 이렇게 말을 하고 있으니, 그 흐름의 폐단은 지금 이러한 정도뿐만이 아니게 될 것이 속으로 염려되기 때문에, 감히 여러 말을 길게 늘어놓아서, 우리 무리의 지금 한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게 하려는 바이네.
나는 소싯적에 향방(向方)에 어두워서 오직 읊조리는 것으로 일을 삼다가 늦게야 조금 뉘우칠 줄을 알아서, 10년 동안 글을 읽고 나서야 천지(天地)의 생물(生物)하는 마음과 성인(聖人)의 본말(本末)에 대한 교훈을 조금 엿보게 되었네. 그래서 일상 우리 나라 유속(流俗)의 폐단에 대하여 슬프게 여겨왔으나, 불행히도 늙어버렸는지라, 나는 몸소 농사짓지 못하고 아내는 길쌈도 하지 못하네. 또한 학문에 스스로 힘쓰지 못하여 평소의 뜻을 저버렸으니, 평생 걸어온 실상을 공정하게 생각해 보면, 문(文)도 아니요, 무(武)도 아니요, 농(農)도 아니요, 상(商)도 아니어서 천지 사이에 어리석은 하나의 큰 좀벌레에 지나지 않을 뿐이네.
그러나 내가 평생에 종사해 온 것은 물칙(物則)에 대한 교훈인데, 어찌 내가 능히 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남을 위해 분명히 말해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은 능히 하지 못하면서 세속의 폐단만 애써 공격하고 있으니, 또 어떻게 잘못된 세속을 깨우칠 수 있겠는가. 말이 아무리 훌륭하여도 실행되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않은 것만 못할 것이네. 아, 다 말하지 못하네.
장문중(藏文仲)의 …… 하였고 : 장문중은 노(魯)나라 대부(大夫)였는데, 자기 첩(妾)에게 부들자리를 짜게 하여 이끗을 탐하였으므로, 공자가 불인(不仁)하다고 했던 것이다. 《孔子家語 顏回》
공의휴(公儀休)가 …… 것 : 공의휴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재상이었는데, 그가 일찍이 채소를 먹어보고 맛이 좋으므로, 백성들과 이끗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뜻에서, 자기 채마밭에 있는 아욱을 뽑아 내버린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卷119》
사민(四民) : 사람의 신분을 네 가지로 구분한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을 가리킨다.
흰 관에 …… 하였으니 : 《예기(禮記)》 옥조(玉藻)에 “흰 관에 검은 띠를 두른 것은 자성의 관이고, …… 다섯 치의 끈을 드리운 것은 게을리 노는 선비의 꾸밈이며, 검은 관에 흰 테를 두른 것은 쫓겨난 사람의 복장이다[縞冠玄武 子姓之冠也 垂緌五寸 惰遊之士也 玄冠縞武 不齒之服也].” 한 데서 온 말인데, 여기에는 현관호무(玄冠縞武)가 호관현무(縞冠玄武)로 잘못 기재되었다.
우순(虞舜) …… 하였고 : 순(舜) 임금은 미천했을 적에 역산(歷山)에서 농사를 지었고 장저(長沮)ㆍ걸닉(桀溺)은 춘추 시대 초(楚)나라의 두 은자(隱者)로서, 두 사람이 나란히 밭을 갈았으며, 동소남(董邵南)은 당(唐)나라 때 사람으로, 낮에는 나가서 농사짓고 밤이면 돌아와 글을 읽었던 것을 이른 말이다. 《史記 五帝紀》《論語 微子》《韓昌黎集 董生行》
윤편(輪扁) : 춘추 시대 제(齊)나라 사람으로, 수레바퀴를 깎아 만드는 장인(匠人)이었다.
관중(管仲)ㆍ교격(膠鬲) : 제 환공(齊桓公)의 재상인 관중은 일찍이 미천했을 적에 친구인 포숙(鮑叔)과 함께 장사를 하였었고, 교격은 은(殷)나라 말기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은둔하여 장사를 하며 생활을 하다가, 뒤에 주 문왕(周文王)의 신하로 등용되었다. 《史記 管晏列傳》《孟子 吿子下》
성문(聖門)에 …… 것 : 공자의 제자인 번지(樊遲)가 공자에게 농사짓는 일을 배우기를 청하자, 공자가 이르기를 “내가 늙은 농부만 못하다.” 하고 거절하였던 데서 온 말이다. 《論語 子路》
농단(隴斷)에 …… 것 : 농단은 높은 언덕을 말하는데, 어느 천장부(賤丈夫)가 시장 근처의 높은 언덕에 올라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싼 물건을 사서 비싸게 팔아 이익을 독점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孟子 公孫丑下》
사업(四業) :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의 네 가지 업을 말한다.
백사집 제2권 / 서(敍)
전라도 산성도(山城圖)의 후면에 서하다. 갑오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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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臣)이 유 도독(劉都督)에 대한 문안관(問安官) 겸 의군사(議軍事)에 차임되었는데, 전일에 삼가 유지를 받들건대, 무군사 당상(撫軍司堂上) 1원(員)으로 하여금 도내(道內)의 산성(山城)을 순심(巡審)하고 또 사수(死守)하라는 뜻으로 유시(諭示)하도록 하였으므로, 무군사에서 신으로 하여금 이 일까지 겸관(兼管)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신이 도내의 산성들을 방문해 보니, 전주(全州)ㆍ순창(淳昌)ㆍ고산(高山)ㆍ고부(古阜)ㆍ보성(寶城)에는 구지(舊址)만 있을 뿐이고, 능성(綾城)ㆍ남평(南平)과 순천(順天) 부유현(富有縣)의 경우는 샘물이 적다는 이유로 정폐(停廢)된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순천과 광주(光州)는 이제야 비로소 터를 가려 놓았으나 물력(物力)이 핍갈되어 쌓을 수가 없고, 여산(礪山)은 비록 이미 쌓아 놓았으나 형세(形勢)가 편평하다.
신이 비록 혹 순심한 곳이더라도 생략하여 기록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만 그 가운데 담양(潭陽)ㆍ동복(同福)ㆍ나주(羅州)ㆍ강진(康津)ㆍ정읍(井邑)ㆍ남원(南原) 등지에 나아가서 그 형지(形止)를 그리고 아울러 기문(記聞)을 붙였으며, 또 천지(泉池), 계간(磎磵), 암동(巖洞), 사사(寺舍)를 기재하였다.
고금에 걸쳐 성(城)을 측량하는 데에는 혹은 지척(地尺)을 쓰기도 하고 혹은 백척(帛尺)을 쓰기도 하여 장단(長短)이 각각 다르기 때문에, 곧 보이는 바에 따라 그 이수(里數)를 대략 정하여 아울러 부록(附錄)으로 만들고, 성 밖의 요해처(要害處)와 원근의 도로에 대해서는 주획(朱畫)으로 구별하였다. 그리고 성 밖으로 빙 둘러 수보(數步) 이내에 평탄함과 험함이 각각 다르나, 한 폭(幅)의 도형(圖形)에다 각각 구별시키기 어려운 곳에 이르러서는 여기에서 저기까지, 저기에서 여기까지를 모두 청획(靑畫)으로 표시하고 주권(朱圈)으로 한계를 정한 다음, 그 곁에다 아무 땅은 험하고 아무 땅은 평탄하다고 기록해 놓았으니, 한번 열람하신다면 험조(險阻)와 요해(要害)가 성상(聖上)의 생각에 분명해질 것이다.
외신(外臣)은 삼가 생각하건대, 산성을 설치한 일은 전사(前史)에 나타나지 않았고, 병가(兵家)의 설(說)에도 이른바 ‘산성’이란 것은 없다. 그런데 유독 우리 나라의 군현(郡縣)에만 곳곳마다 있으니, 산성이 지금 어느 시대에 창설된 것인지 알 수 없고, 또한 그 당시에 이 산성에 웅거하여 지켜서 온전함을 얻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도 자세하지 못하다.
다만 구사(舊史)를 상고하건대, 조사(趙奢)가 진(秦) 나라 군사와 싸울 적에 허력(許歷)이 말하기를, “먼저 북산(北山)의 위쪽를 점거한 자가 승리한다.” 하였고, 마원(馬援)이 만인(蠻人)을 정벌할 적에는 만인들이 모두 산골짜기로 도망쳐 들어가는 바람에 길이 험하여 공격하지 못하였으며, 제갈량(諸葛亮)이 만인을 정벌할 적에는 여러 만인들의 동주(洞主)가 각각 산골짜기를 차지하고 험고한 데에 의지해 있으면서 한병(漢兵)과 싸우지 않으므로, 한병이 감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유에 대해서는 비록 그 산성을 쌓았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 그 산을 점거하여 험고함으로 삼아서 적병(敵兵)으로 하여금 감히 우러러 공격해 오지 못하게 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복파(伏波) 같은 위엄과 무후(武侯) 같은 지략(智略)으로 하나의 소추(小醜)를 공격하기란 마치 썩은 나무 꺾기와 같이 쉬웠을 터인데도 이 산골짜기에 막히어 감히 진군하지 못하였고, 마복군(馬服君)이 약한 조(趙) 나라의 병력으로 호랑(虎狼) 같은 진(秦) 나라를 억제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산을 점거한 형세 때문이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승패의 수(數)가 비록 지리(地理)에 달린 것은 아니나, 산성의 험고함은 역시 도움이 없지 않다 하겠다.
대체로 온갖 방도로 성을 공격하여 만변(萬變)의 계책을 낼 경우에는 성을 지키는 사람이 혹 공수반(工輸班) 같은 사람이 아니면 기교가 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산을 인하여 성을 만들어 성의 형세가 험준하면, 아군(我軍)이 성을 지키는 데에 있어서는 옹청(瓮聽)ㆍ풍선(風扇)을 설치할 필요가 없고, 노대(弩臺)ㆍ노대(露臺)를 세울 필요가 없으며,지삽(地澁)ㆍ추제(搊蹄)를 개착할 필요가 없고, 암문(暗門)ㆍ당거(撞車)를 만들 필요도 없다. 그리고 적군이 공격해 오는 데에 있어서는 운제(雲梯)ㆍ비루(飛樓)가 소용이 없게 되고, 지도(地道)ㆍ주반(注盤)을 만들 수가 없으며, 높이 올라가 먼지를 뿌릴 수 있는 수레도 그 기교를 베풀 데가 없고, 해자에 다리를 놓거나 성 밖에 흙을 쌓아올리는 시설도 그 기예를 부릴 수가 없게 되니, 평지에서 성을 지키는 것보다는 공(功)이 만 배나 된다.
신이 여러 성들을 순심하느라 친히 도보로 평탄함과 험준함을 따지지 않고 성가퀴를 세 가며 두루 돌아다니면서 피아(彼我)의 형세를 참작하고 공수(攻守)의 타당성을 살펴보니, 도내(道內)의 여섯 성이 비록 각각 장단점이 있고 서로 우열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가 매우 견고하여 스스로 천험(天險)을 이루었으므로, 주객의 형세로 말하자면 한 사람으로 백 명의 적을 당할 만하였다. 그러니 비록 노약자로 하여금 성을 지키게 하더라도 적이 오는 것을 보고서 심장이 뒤집어지기에만 이르지 않고 수족이 황란(慌亂)한 데에만 이르지 않는다면 몽둥이를 들거나 돌을 미는 데는 또한 여력(餘力)이 있을 터이니, 비록 백 만의 군사라 하더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러니 지금 만일 군사가 정예하고 양식이 충족해서, 군사들의 마음이 윗사람에게 친부(親附)하여, 적을 보고 군대를 징발해서 단번에 적을 박멸할 수 있다면 산성은 족히 논할 것도 없다. 그리고 혹 대장(大將)은 대군을 거느리고서 적의 대세(大勢)를 차단하고, 열진(列鎭)에서는 각기 스스로 성을 지키면서 적의 표략(剽掠)을 금한다면, 비록 대첩(大捷)은 거두지 못하더라도 적이 장차 절로 피곤해질 것이니, 굳이 산성으로 달아나 들어가서 적들에게 겁먹은 표정을 보일 필요가 없겠다. 만일 그렇지 못하여 기강이 이미 해이해지고 인심이 이미 흩어졌는데, 군사들은 피폐하고 식량은 다하여 군사를 수습할 수 없을 경우에는, 방군(傍郡)들과 규합하여 각자 험조(險阻)한 곳을 지키면서 수시로 장용(壯勇)한 자들을 출동시켜 미처 대비하지 못한 적을 엄습하기도 하며, 들판을 깨끗이 철거하고 기다려서 오랜 세월이 지나면, 바다를 건너온 적들이, 가져온 군량은 한계가 있는데 앞으로는 노략질을 할 수가 없고 뒤로는 군량을 수송해 올 수도 없으며 전진하려고 해도 되지 않아서 오래도록 버티기 어려울 것이니, 이것은 바로 태평 시대의 하책(下策)이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상책(上策)이 되는 것이다.
지금 여섯 성 가운데서 요해처를 가지고 논한다면, 교룡(蛟龍)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금성(錦城)이며, 그 다음은 입암(笠巖)ㆍ금성(金城)ㆍ옹성(瓮城)ㆍ수인(修因)의 순이다. 그리고 형세를 가지고 논한다면, 금성(金城)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입암이며, 그 다음은 수인ㆍ금성ㆍ옹성ㆍ교룡의 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형편으로 논한다면, 옹성이 제일이고 그 다음은 금성(錦城)ㆍ수인ㆍ입암ㆍ금성(金城)ㆍ교룡의 순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교룡은 이남(二南 호남과 영남)의 인후(咽喉)가 되는 자리에 웅거하여 삼로(三路)의 왕래하는 요충(要衝)을 누르고 있으므로, 참으로 굳게 지키기만 하고 함부로 적과 싸우지만 않는다면 아무리 거대한 적군일지라도 반드시 감히 내지(內地)를 지레 충돌하여 뒤를 밟히는 걱정을 남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요해처로는 제일이 된다. 그러나 문정(門庭)이 너무 넓고 중심 부위가 너무 드러나서 좌우가 서로 응하지 못하니, 형세를 이루는 땅은 아니다.
그리고 나주(羅州)는 호남의 거진(巨鎭)이요, 금성(錦城)은 본주(本州)의 우두머리로서 대군(大軍)이 주둔하고 있으니, 주성(州城)의 원병(援兵)이 산의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기각(掎角)의 형세로 위아래에서 서로 성원을 한다면 적이 와서 엿보더라도 배와 등[腹背]이 서로 견제를 받게 되므로 쉽게 손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 만일 나주를 잘 지키면 이 곳이 바로 호남의 보장(保障)이 되기 때문에 요해처로는 교룡의 다음 간다. 그러나 동문(東門)이 한쪽으로 기운데다 본주(本州)와의 거리는 너무 핍근한데, 본주의 성은 너무 광활하고 재력(才力)은 박약하므로, 밖에 엿보는 적이 많아서 실로 지키기가 어렵다. 그리고 웅번(雄藩)이라 호칭하여 적들이 기필코 차지하려는 땅이므로, 적이 만일 이 곳을 빼앗아 점거하고 비축해 놓은 곡식을 먹으면서 소굴로 삼을 경우에는, 산성에 있는 사람들은 적의 어깨와 등의 위치에 있게 되어 식량 운반의 길이 끊어짐으로써 전쟁을 하지 않고도 저절로 피곤하게 되니, 이는 위험한 방도이다.
금성(金城)의 험고함은 한 도의 으뜸이니, 만일 수군(數郡)을 불러모아 저축해 놓은 것들을 한데 모아 두고, 일이 없을 적에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땔나무를 하고 급한 일이 있을 적에는 서로 번들고 휴식하면서 수어(守禦)한다면, 아무리 대적을 만나더라도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성은 만 겹의 산중에 위치하여 밖으로 제어하여 누르는 형세가 없기 때문에 다만 스스로 그 땅을 지켜 보전할 수만 있을 뿐, 적들이 두려워하는 정도는 될 수가 없다. 그리고 또 만인(萬人)의 군사가 아니면 지킬 수도 없으니, 현재와 같이 소수의 군사로는 힘이 되기가 어렵다. 이것이 바로 병법에 이른바, 성은 크고 사람이 적은 경우는 바로 오패(五敗)를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입암(笠巖)의 형세는 금성(金城)에 다음 가나, 수어하기 어려움은 금성과 똑같다.
옹성(瓮城)은 협소하여 대군을 용납하기는 어려우나, 산이 모두 절벽이고 다만 두 갈래의 길이 있을 뿐이므로, 혹시 급한 일이 있으면 외부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고 일현(一縣)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스스로 지킬 수 있다. 옛 병법에 이르기를, “삼리(三里)의 성을 만가(萬家)가 지키면 충분하다.” 하였으니, 여기가 참으로 오늘날의 요지(要地)이다.
신이 오랫동안 도내에 있으면서 부로(父老)들을 찾아 물어보고 이해(利害)를 가지고 타이르면서 겸하여 민정(民情)을 살펴보니, 진주(晉州)가 함락되기 전에는 민정이 모두 들어가서 산성을 지켜 보전하려고 했었으나,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음에 미쳐서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진주처럼 험고한 지세와 많은 병력으로도 보전하지 못했다.” 하고, 이에 산성을 마치 반드시 죽게 되는 함정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다가 형세가 궁해진 지금에 미쳐서는 간혹 창언(唱言)하는 이가 있어 말하기를,
“방금에 재력(財力)이 이미 다하여 칠로(七路)가 똑같은 형편이니, 한번 토착(土着)의 땅을 잃으면 호구(糊口)하기가 어렵게 된다. 가령 바다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또한 해적의 해침을 당할 것이니, 지금의 계책으로는, 구적(寇賊)이 오면 산성에 들어가 점거하고 구적이 물러가면 나가서 농사를 짓되, 성이 보전되면 요행히 삶을 도모할 수 있고 성이 함락되면 그들과 함께 죽기로 하는 것이 가장 낫다.”
고 하는데, 들은 이가 이 말을 혹은 옳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성중(城中)을 둘러보면 무기와 군량이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비록 들어가 지키려고 하여도 모두 확고한 뜻이 없다. 그러므로 병법에 이르기를, “성을 지키는 데에 오전(五全)이 있으니, 첫째는 성황(城隍)이 수리되는 것이요, 둘째는 기계(器械)가 구비되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본도(本道)의 재력은 이미 다 고갈되어 모두가 적이 침공할 수 없는 방어 태세를 먼저 갖추어 놓지 못한 형편인데, 한갓 백성들을 몰아서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만 한다면, 오늘날 이미 흩어진 인심으로는 사수할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래서 비록 천험이 있다 하더라도 백성이 아니면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지리(地利)만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고금(古今)에 걸쳐 모두 자상하게 논하였다. 그러니 참으로 먼저 백성의 뜻을 견고히 하여 와해되지 않게 하고, 수신(帥臣)을 잘 가려 임명하여 기계를 수리하고 군량을 저축하도록 하고서, 적이 오면 그들과 싸워서 형세가 당해 낼 수 없을 경우에는, 각각 그 성을 점거하여 굳게 지키고 들판을 깨끗이 치워 놓는다면, 이것이 비록 뛰어난 대계(大計)는 아닐지라도 또한 임시의 요술(要術)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복파(伏波) : 후한(後漢)의 명장인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을 가리킨다.
마복군(馬服君) : 전국 시대 조(趙) 나라의 장수인 조사(趙奢)의 호칭이다.
공수반(工輸班) : 춘추 시대 노(魯) 나리 교장(巧匠)의 이름인데, 그가 일찍이 운제(雲梯)를 만들어서 송(宋) 나라의 성을 공략했다고 한다.
옹청(瓮聽) : 전쟁시에 쓰는 도구의 한 가지로, 큰 항아리의 주둥이를 얇은 가죽으로 가린 다음, 이를 지도(地道) 안에 엎어 놓고 귀 밝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밑에 앉아서 적군이 갱도(坑道)를 뚫고 쳐들어오는 소리를 청취하게 하는 도구이다.
풍선(風扇) : 무기의 한 가지인 풍선거(風扇車)의 준말인데, 이 풍선거를 이용하여 적군을 향해 석회를 날리거나 화구연(火毬煙)을 날려 보내서 적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다.
지삽(地澁) : 병기의 한 가지로서, 판자에 쇠못을 박아 길바닥에 포치(布置)하여 인마(人馬)의 침공을 방해하여 막는 것이다.
추제(搊蹄) : 미상.
암문(暗門) : 성에 적군이 알지 못하도록 따로 낸 문을 말한다. 적군이 쳐들어오면 이 문으로 군대를 내서 적군을 습격하도록 했다고 한다.
당거(撞車) : 수성구(守城具)의 한 가지로, 수레 위에 철판을 깔고 그 위에 당목(撞木)을 설치하여 적군의 비제(飛梯)를 공격하는 데에 사용했던 것이다.
운제(雲梯) : 높은 곳에 걸쳐 놓고 올라가는 공성용(攻城用)의 사다리이다.
비루(飛樓) : 공성구(攻城具)의 한 가지로, 망루(望樓)가 있는 전차(戰車)를 말한다.
지도(地道) : 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땅 속으로 굴을 파서 만든 길, 즉 참호(塹濠) 따위를 가리킨다.
주반(注盤) : 미상.
남원(南原)의 교룡산성(蛟龍山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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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부의 서쪽으로 7리에 있다. 이 산은 내려온 맥(脈)이 없이 들 가운데 불쑥 일어나서 두 봉우리가 생기어, 북쪽 봉우리는 밀덕(密德)이라 하고 남쪽 봉우리는 복덕(福德)이라 하는데, 이 산을 덮어서 성으로 만들었다.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데, 성은 모두 돌로 쌓았다.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이르기를, “주위는 5717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고 하였으나, 이 성을 쌓은 주승(主僧)은 “실상은 주위가 7600척이다.”라고 말하는데, 지금 주위가 15리 남짓이 되는 것으로 보아 주승의 말이 옳다.
옛날에는 99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그 후 막혀서 버려진 채 파지 않았고, 지금 있는 것은 8개의 우물뿐이다. 샘물이 밀덕봉(密德峯)의 하류에서 나와 냇물이 되었는데, 가물 때에도 물이 발등을 넘는다. 유 도독(劉都督)이 일찍이 이 성에 올라가 수맥을 찾아 우물을 파서 이따금 물을 얻었는데 유 도독이 말하기를, “성이 크고 지세가 험준하니 공효가 반드시 크겠다.” 하였다.
성 밖으로 서ㆍ남ㆍ북 삼면에는 성의 내부를 엿볼 수 있는 높은 봉우리나 깎아지른 언덕이 없고, 밀덕봉과 복덕봉의 두 지맥(支脈)이 동쪽으로 달려 내려가서 마치 두 교룡이 한가운데 나란히 누운 것처럼 되었는데, 이 곳을 삼동(三洞)으로 구분하여 중간을 적암(赤巖), 북쪽을 우암(牛巖), 남쪽을 빙암(氷巖)이라 하였다. 그리하여 두 봉우리는 머리가 되고, 두 지맥은 등성이가 되고, 삼동은 배[腹]가 되어, 폐부(肺腑)가 겹겹으로 가려지고 남북이 서로 차단되었으므로, 수미(首尾)가 서로 통하지 않고 협척(脇脊 옆구리와 등골)이 서로 관통되지 않아서, 혹 급한 일이 있을 경우에는 금고(金鼓)와 정기(旌旗)로써 군대를 지휘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리고 동문(東門)은 적을 받는 곳으로서 문 밖에 큰 길이 있어 우마(牛馬)가 모두 통행하는데, 길 위에서 쳐다보면 성 안의 벌레나 개미까지도 셀 수가 있다. 문에서 수백 보쯤 떨어진 곳에는 언덕이 앞에 우뚝 솟아 있어 화살이 미칠 수가 없고, 후면(後面)은 넓고 평탄하여 적이 오면 군사들을 감추어 둘 만하다. 세속에서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유인궤(劉仁軌)가 쌓은 것인데, 우리 태조(太祖)가 일찍이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적과 싸워서 격파하였다. 옛날에 군창(軍倉)이 있어 백성들이 항상 조곡(糶穀)을 받아갔는데, 지난 70년 전에 이를 부내(府內)에 옮겨 설치했다.”고 하는데, 《여지승람》을 상고하건대, 유인궤가 쌓은 것은 바로 본부의 치소(治所)였으니, 세속에 전한 말이 착오인 듯하다. 구사(舊史)를 상고하건대, 태조가 변안렬(邊安烈)과 함께 남원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운봉(雲峯)을 넘어서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쏘아 죽였다고 되어 있으니, 이른바 남원에 군대를 주둔시켰다는 곳이 아마 바로 이 땅인 듯하다.
지금 승려들을 모집하여 성을 고쳐 쌓고 있는바, 큰 돌을 모두 버리고 부서진 자갈들을 섞어 쌓으므로, 졸렬하고 치우쳐서 옛 제도에 많이 못 미치는데, 초가을에는 작업을 마칠 것이라고 한다.
운봉(雲峯)ㆍ장수(長水)ㆍ임실(任實)ㆍ곡성(谷城)ㆍ구례(求禮)를 겹쳐 넣었다.
담양(潭陽)의 금성(金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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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부의 북쪽으로 15리에 있다. 강천산(剛泉山) 한 등성이가 서쪽으로 펼쳐져서 금성이 되었는데, 어느 시대에 성을 처음 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역대병요(歷代兵要)》를 상고해 보니, “고려 말기에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장차 광주(光州)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먹일[穀馬] 것이라 성언(聲言)했다.”고 한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담양부에 있다.” 하였는데, 세속에 전하는 말에는, “우리 태조가 남원으로부터 운봉으로 넘어가서 적세(賊勢)가 매우 치성하다는 말을 듣고는 제장(諸將)들과 꾀하여 이르기를, ‘만일 여기에서 차질이 생기면 의당 퇴각하여 금성(金城)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하니, 어느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
동ㆍ서ㆍ남 삼문(三門)은 적(敵)을 받는 곳이다. 담양으로부터 올라가는 길은 산등성이에 나 있는데, 한 선로(線路)가 수많은 굽이를 거쳐 6, 7리를 돌아서 비로소 남문에 도달한다. 남문 밖에는 양쪽 옆이 모두 깊고 험준한 골짜기이고, 동문 밖으로 6,70보쯤 되는 곳에는 돌이 비스듬히 서 있어 성중(城中)의 일면(一面)을 엿보고 있는데, 화살이 미칠 만한 곳이므로 가장 깊이 꺼리는 대상이다. 그러니 지금 만일 양마성(羊馬城)을 물려서 쌓아 놓는다면 먼저 점거당하는 걱정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의 양쪽 옆에는 산이 모두 가파르므로, 적이 오면 마치 굴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감히 함부로 곧장 충돌해 오지 못하게 되어 있다. 샘물은 증암(甑巖) 아래서 나와 시내를 이루어 내려가는데,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이 밖에 또 아홉 개의 우물이 있는데, 혹은 마르고 혹은 차 있기도 하다. 동북쪽과 남쪽에는 천 길의 절벽이 있어 성의 형상이 기이하고 웅장하고 넓으며, 사방은 높고 중앙은 움푹 들어갔는데, 밖으로 높은 봉우리가 없기 때문에 성 안을 엿볼 수가 없고, 성 밖의 사면에는 선로들이 혈맥처럼 펼쳐져 있으니, 참으로 형세를 갖춘 땅이다.
성 안의 남쪽 봉우리에는 모양이 마치 강아지처럼 생긴 철마(鐵馬)가 있는데, 그 지방 사람이 압승술(壓勝術)을 상징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에는 90여 칸이 되는 관해(官廨)가 있다.
그리고 성의 높이는 한 길[一丈]도 채 안 되었고, 그 중 낮은 것은 혹 겨우 성가퀴를 이루는 정도였는데, 모두 자잘한 돌로 쌓아서 마치 제비 둥지 붙이듯이 해 놓았으므로, 막대기를 가지고 건들기만 하여도 무너뜨릴 수가 있으니, 믿을 만한 것이 되기 어렵다.
옛날에는 성터가 없었는데, 최근 4,5년 사이에 부인(府人)의 전하는 말을 인하여 산중에서 이 자리를 얻어 옛 금성의 유지(遺地)인 줄로 인식하고 석성(石城)을 처음으로 쌓았다. 주위는 20여 리로 1만 1천여 척(尺) 정도가 되는데, 《여지승람》에는 2084척이라고 하였으니, 옛날과 활협(闊狹)의 차이가 있고, 또 성을 쌓았던 옛터도 없는 실정이다.
신의 생각으로는, 금성의 험고함이 이웃 나라에까지 알려져서 아지발도가 기필코 쟁탈하려 한 것으로 보면, 반드시 성의 웅장하기가 타진(他鎭)에 으뜸이었을 것인만큼 성곽의 흔적이 전혀 없을 수 없을 터인데도 지금 이와 같으니, 옛날에 이른바 금성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상고할 수가 없다.
순창(淳昌)ㆍ창평(昌平)ㆍ옥과(玉果)를 겹쳐 넣었다.
동복(同福)의 옹성(甕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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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縣)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산에 세 바위가 있어 형상이 마치 항아리처럼 생겼기 때문에 옹성이라 한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7리 정도에 3874척이다.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나한전(羅漢殿)의 유지(遺址)로서 옛날에는 석주(石柱)와 석역(石閾)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하였고, 세속에 전하는 말에는, “전조(前朝) 때에 한 장수가 일찍이 이 성을 웅거하고 스스로 견고하게 여겼으나, 끝내 적에게 함락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상고할 수가 없다.
성의 남쪽과 북쪽에 두 문이 있는데, 다만 여기가 적을 받는 곳이다. 좁은 돌길이 둘러 있어 겨우 사람이 통할 정도인데, 길은 절벽 아래로 나 있고 성은 절벽 위에 눌러 있으므로, 성 위에서 사람이 왕래하는 것을 내려다보게 되어 있으니, 한 사람이 돌을 굴리면 천 사람이 지나갈 수가 없게 된다.
동성(東城) 밖으로 10여 보쯤 되는 곳에는 뾰족한 산봉우리가 서로 대치해 있어, 그 사이에는 새가 날아다니는 길만 있을 뿐, 사람은 올라갈 수가 없다. 남쪽으로부터 서쪽을 지나 북쪽에 이르기까지와 북쪽으로부터 동쪽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전석(全石)으로 이루어진 절벽이 만 길이나 되므로, 원숭이도 다닐 수 없는 곳이니, 참으로 천연의 요새이다.
성 안에는 7개의 우물이 있으나 그리 풍족하지 못한데, 서쪽 봉우리를 따라 내려가서 은밀히 적벽(赤壁)을 통하여 두레박에 노끈을 매면 큰 시냇물을 길을 수가 있는바, 여기는 깎아지른 비탈이 공중에 솟아 있으므로 적들이 알아차릴 수 없는 곳이다. 성의 옛터는 많이 퇴폐하였으므로, 황진(黃進)이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있을 때에 동북쪽 한 모퉁이를 가로로 끊어서 내성(內城)을 쌓았다.
화순(和順)ㆍ능성(綾城)을 겹쳐 넣었다.
나주(羅州)의 금성산성(錦城山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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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州)의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0리 정도에 2946척이다. 서ㆍ남ㆍ북 삼면은 지세가 험준하고, 동문 밖의 일면이 넓고 평탄하여 적을 받는 곳이 되었다. 성 안에는 5개의 우물이 있는데, 동문(東門)과 대곡(大谷)의 두 우물이 가장 크다.
또 네 산봉우리가 있어 북쪽은 정녕(定寧), 남쪽은 다복(多福), 서쪽은 오도(悟道), 동쪽은 노적(露積)이라 하는데, 그 중 정녕이 주봉(主峯)이고, 동ㆍ서ㆍ남의 세 봉우리는 주봉 앞에 공읍(拱揖)하는 자세로 서 있어,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돌아보며 서로 응할 수 있고, 언어도 서로 통할 수가 있다. 동북쪽 두 봉우리의 지맥이 빙 둘러 안아서 골짜기를 이루어 이를 대곡(大谷)이라 하는데, 여기에는 군사들을 감추어 둘 만하다. 혹자의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곳에 우물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성을 쌓는 사람은 말하기를, “역도(役徒) 5천 명이 동문의 우물 하나만 마셔도 우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산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아서 성의 형세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동문 밖의 산등성이가 수백 보를 죽 뻗어가서 장원봉(壯元峯)에 이르는데, 산등성이에서 성 안을 쳐다보면 철환(鐵丸)이 미칠 만하다. 서ㆍ북쪽 양면으로는 성이 산허리를 감아돌아서 형세가 내외로 나누어지므로, 성가퀴를 지키는 사람은 몸이 산 바깥쪽에 있게 된다. 그래서 동ㆍ남쪽 이면(裏面)과는 성세(聲勢)가 지척간이면서도 서로 돌아볼 수가 없으니, 이는 병가(兵家)에서 꺼리는 것이다.
《역대연표(歷代年表)》를 상고해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시대에 삼별초(三別抄)가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를 점거하고 본도를 침범하자, 군현(郡縣)들이 그들을 멀리 바라만 보고도 지레 항복을 하였다. 그리하여 나주 사록(羅州司錄) 김응덕(金應德)이 부사(副使) 박부(朴琈) 등과 함께 유예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상호장(上戶長) 정려(鄭呂)가 솔선하여 성을 지키기를 주장하고 제현(諸縣)의 병력(兵力)을 거느려 와서 금성(錦城)에 들어가 지키면서 가시나무를 세워 울짱을 만들고, 적의 화살에 맞아 다친 데를 싸매고 죽기로써 지키니, 적이 밤낮 7일 동안 성을 공격하였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다. 또 그 후 고려 때에는 거란이 쳐들어오자, 현종(顯宗)이 남쪽으로 몽진하여 이 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가, 거란이 패배하여 퇴각하자, 현종이 본주(本州)를 목(牧)으로 승격시켰다고 하였다.
무안(務安)ㆍ함평(咸平)을 겹쳐 넣었다. 성 안에서는 지금 한창 대장간을 열어서 대포(大砲)를 주조하고 있다
강진(康津)의 수인산성(修因山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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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은 병영(兵營)의 동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0여 리 정도로 3756척이다. 병영으로부터 남문까지는 새나 통과할 만한 길만 꼬불꼬불 나 있고, 문 밖에 다다라서는 지세가 매우 좁고 기울어서 두 사람이 나란히 설 수도 없으며, 북문은 더욱 험준하다. 그리고 동문만이 적을 받는 곳인데, 문 밖에 수덕동(修德洞)이라는 골짜기가 있고, 산세가 매우 가파르다. 성의 안팎은 서로 환히 볼 수 있고 철환이나 화살이 모두 미칠 만하다.
동문으로부터 남쪽으로 죽 내려가면 별도로 소동문(小東門)이 있고, 소동문 밖으로 1백 수십 보쯤에는 한 봉우리가 병풍처럼 서 있어 이를 물희봉(勿喜峯)이라 호칭하는데, 적이 만일 이 봉우리를 먼저 점거해 버리면 성 안의 일면(一面)은 감히 발을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선적봉성(仙迹峯城) 밖에는 또 험준한 봉우리가 수십 보 밖에 돌출해 있는데, 네 모퉁이가 모두 깎아질러서 쉽게 올라갈 수가 없다. 여기는 노적봉(露積峯)이 바로 주봉(主峯)이다.
서ㆍ남ㆍ북 삼면은 천연의 요새가 되기에 충분하나, 사이 사이에 작은 언덕이 있어 적이 성을 엿볼 수 있게 되어 있는데, 그 중에도 물희봉이 더욱 큰 해가 된다. 동문은 안팎으로 아무런 장애되는 것이 없으므로, 장점이 그 단점을 가릴 수가 없다. 옛날에는 천정(泉井)이 없는 것을 염려했었는데, 동문 밖 수십 보쯤에 여러 골짜기의 샘물들이 모여서 시내를 이루었으므로, 지금은 구성(舊城) 밖에 별도로 자성(子城)을 세우면서 뒤로 물려 시내를 빙 둘러서 쌓았기 때문에 시내가 성 안에 있게 되었다. 그 자성의 주의는 700여 척 정도이다.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고려 말기에 도강(道康)ㆍ탐진(耽津)ㆍ보성(寶城)ㆍ장흥(長興)ㆍ영암(靈巖)의 백성들이 모두 왜구를 피해 이 곳에 있었다.” 하였는데, 이른바 도강ㆍ탐진이 지금은 합해져서 강진현(康津縣)이 되었다.
금년에 성을 쌓던 이 지방 사람이 땅을 파다가 돌절구를 얻었고, 또 길이는 한 길쯤 되고 두께는 벽돌만한 큰 항아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손바닥 하나만한 동이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겹쳐 넣을 곳이 없으므로, 다만 강진을 수성(守城) 고을로 삼았다.
정읍(井邑)의 입암산성(笠巖山城)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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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縣)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주위는 대략 20리 정도이다. 《여지승람》에는 1만 2028척이라고 하였는데, 지금은 5460척이라고 한다. 성의 형세는 금성(金城)에 비해 약간 작은데, 백척(帛尺)으로 2척이 지척(地尺)의 1척에 준하니, 《여지승람》에서 말한 것은 아마도 백척을 사용한 듯하다.
산세는 높고 험준한데 꼭대기가 움푹 들어가서, 사방은 높고 가운데는 널찍하다. 그 형세를 인하여 성을 쌓았으므로, 형상이 마치 말의 구유[馬槽]와 같다. 각(閣)은 붕상(棚上)에 있으므로, 밖에서 쳐다보면 아득하고도 엄연하여 그 내부를 헤아릴 수가 없다. 성 안의 사면은 한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 없고, 천지(泉池)도 넉넉하여 물이 만 필의 말도 먹일 만하다. 험고함은 금성(金城)에 미치지 못하나 형세는 그보다 낫다. 동ㆍ남ㆍ북 삼면이 모두 적을 받는 곳이고, 입암 일면은 위령(葦嶺)의 큰 길을 굽어 누르고 있어 지세가 더욱 기이하고 웅장하다.
태인(泰仁)ㆍ흥덕(興德)ㆍ고창(高敞)ㆍ장성(長城)ㆍ진원(珍原)을 겹쳐 넣었다.
백사별집 제1권 / 계사(啓辭)
[오 도사의 말에 따라 서변(西邊)을 방어하도록 청한 계사] 경자년(1600년) 9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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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뢰기를,
“이 오 도사(吳都司)가 말한 것을 보건대, 정히 우리 나라가 근일에 일찍이 우려했던 것과 서로 부합되니, 방비(防備)에 관한 일을 의당 급히 조치해야 할 바입니다. 그러나 다만 이 적(賊)들이 우리 나라에 대하여 장차 소란을 일으킬 걱정은 있으나, 아직 입구(入寇)하는 자취는 없으니, 오직 변방에 신칙하여 군대를 엄격히 정돈하여 서로 기다리게 할 뿐입니다. 그리고 무사(武士)들을 모으고 포수(砲手)를 교련(敎鍊)하며 기계(機械)를 수선하고 무관 수령(武官守令)을 차송(差送)한 일은 이미 본도(本道)에 유시(諭示)하였습니다. 또 황해도(黃海道)의 군사들은 파방(罷防)의 기한까지 수하(水下)에서 첨방(添防)하도록 하였고, 또 황해도로 하여금 무사들을 모아서 경급(警急)한 때에 대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밖에 의당 해야 할 일들을 반복하여 헤아려 본 결과는 이러합니다. 적(賊)의 소혈(巢穴)은 정히 평안도(平安道)의 수하 열군(水下列郡)과 똑바로 마주해 있고 가깝기까지 하니, 혹시라도 분병(奔迸)할 뜻을 갖게 되면 수하의 제군(諸郡)이 의당 적을 받는 곳이 될 것인데, 그 중에는 창성(昌城)과 벽동(碧潼)만이 지형(地形)이 험고(險固)하여 약간 지킬 만한 형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본도의 포수(砲手)를 해마다 변방에 나누어 방어하게 한 결과, 소수(小數)의 군사가 여기저기 조금씩 흩어져 있어 힘과 형세가 분열되어 있으니, 그 가운데서 정용(精勇)한 군사 천여 명을 별도로 선발하여 주장(主將)이 친히 이들을 거느리고 교련시켜서 이상과 같은 중지(重地)에 머물러서 방어하도록 한다면 엄연하게 일대진(一大鎭)이 되어서 성세(聲勢)에 편리하고 유익할 듯합니다.
또 변란 이전에는 본도 내지(內地)의 무변 수령(武弁守令) 및 변장(邊將)들은 만일 동간(冬間)에 이르면 으레 조방장(助防將)이 되어 방어가 긴급한 곳으로 나누어 나가서 방어를 하였는데, 그들이 비록 군대를 거느리는 일은 없으나, 수하에 정용(精勇)한 아병(牙兵)이 매우 많으니, 타군(他軍)의 노약한 군사들에 비하면 공(功)이 월등할 것입니다.
그리고 변란을 겪기 시작한 이후로는 일로(一路)의 왕래하는 일과 천장(天將)의 지공(支供)에 분주하느라 겨를이 없어서 이 법이 마침내 폐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천장들이 거의 다 철수하고 돌아갔으니, 만일 이 달을 지나서 본도의 각관(各官)에 우선 대단히 분주할 일만 없으면 급히 전례에 의거해서 올 겨울부터 시작하여 조방장들을 응당 수령(守令)과 변장(邊將)으로 임명해서 하나하나 모두 들어가 방어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이런 뜻을 병조(兵曹)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하게 하고 본도의 감사(監司)와 병사(兵使)에게 하유(下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허한다. 그 적(賊)의 ‘동방진주(東方眞主)’라는 설(說)은 극히 흉참(凶慘)하니, 이것이 곧 동으로 압록강(鴨綠江)을 건널 계획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여 민중(民衆)을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적은 절대로 가벼이 보지 말고 많은 염려를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염려를 하여 미리 대비를 해서 혹 무사하게 된다면 나라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 만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나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얼음이 얼기 전에 만일 잡아 가두지 못했다가 천장(天將)은 서쪽으로 철수해 가고 금적(金賊)은 동으로 온다면 그 일을 장차 어찌하겠는가.
내가 보건대, 서방(西方) 일로(一路)는 한 군데도 의뢰할 만한 험고한 곳이 없는 탄탄대로로 마치 성자(城子)의 형세와 같아서, 방비(防備)의 소홀함에 대하여 이전에 이미 자세하게 말하였으니, 지금은 다시 거론할 것이 없겠다. 덕시(德時)가 만일 노추(老酋)와 함께 서로 이끌고 강물이 얼기를 기다려서 진군(進軍)하여 동으로 온다면 백성들은 안에서 궤란(潰亂)되고 적들은 뒤에서 기세를 탈 것이니, 일을 장차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뿐만이 아니라, 서로(西虜) 또한 우려되는 바이니, 지금 의당 이경준(李慶濬), 한명련(韓明璉) 같은 사람들을 방어사(防禦使)와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미리 배치하여 요동(遼東)의 거조(擧措)에 대비하게 해야만 일을 당해서 당황하지 않게 될 것이며, 또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가운데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을 체차(遞差)하고 무장(武將)을 정밀히 선택할 일로 회계(回啓)하라.”
하였다.
동방진주(東方眞主) 동쪽지방의 진정한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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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별집 제4권 / 잡기(雜記)
꿈을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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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방(東方)에는 문헌(文獻)이 부족하여 아무리 큰 사업(事業)이나 큰 시비(是非)가 있었더라도 몇 년만 지나고 나면 깜깜하게 전하지 않아서 고증할 데가 없게 되므로, 내가 일찍이 이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임진년의 변란 때에 내가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평양(平襄)에 이르러서 병조 판서에 초배(超拜)된 이후 7년 동안 중외(中外)를 드나들면서 항상 중병(中兵)을 주관하였으므로, 제장(諸將)의 공죄(功罪)와 시위(施爲)와 사공(事功)에 대해서 대략 이미 알고 있었다. 그 후 사명(使命)을 받들고 남번(南藩)에 나가서 기억나는 것과 들은 것을 참작하여 공론(公論)에 질정해 본 결과 더욱 그 사실이 밝게 드러났으나, 세상에는 그 실상을 분명하게 알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따금 사대부들의 논의를 들어 보면 번번이 서로 모순을 일으켜서 정적(情跡)이 도치(倒置)된 자가 있었다. 지금도 이러한데 만일 이 일이 전해진 지 오래되면 자색(紫色)이 주색(朱色)을 어지럽히는 격이 되어 시비(是非)가 천양지차로 달라지지 않기가 어려울 것이다.
상(上)이 일찍이 수륙(水陸) 제장(諸將)의 공을 논하여 이르기를, “이순신(李舜臣)과 원균(元均)이 해상(海上)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른 것과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의당 수공(首功)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으니, 이것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다. 그러나 그 사이의 곡절(曲折)은 다 드러나지 못한 것이 있다. 권 빙군(權聘君율-장인)이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세상에서는 내가 행주에서 한 일을 공으로 삼는데, 이는 참으로 공이라 이를 만하다. 그러나 나는 항오(行伍) 사이로부터 일어나서 공을 쌓은 것이 여기에 이르는 동안 크고 작은 전쟁을 적잖이 치렀다. 그 중에 전라도(全羅道) 웅치(熊峙)에서의 전공(戰功)이 가장 컸고 행주의 전공은 그 다음이다. 그런데 나는 끝내 행주의 전공으로 드러났으니, 일을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대체로 웅치의 싸움은 변란이 처음 일어날 때에 있었으므로, 적(賊)의 기세는 한창 정예하였고, 우리 군사는 단약(單弱)한데다 또 건장한 군졸도 없어서 군정(軍情)이 흉흉하여 믿고 의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능히 죽을 힘을 다하여 혈전(血戰)을 벌여서 천 명도 채 안 되는 단약한 군졸로 열 배나 많은 사나운 적군을 막아 내어 끝까지 호남(湖南)을 보존시켜 국가의 근본으로 만들었으니, 이것이 바로 어려웠던 이유이다. 그러나 이 때에는 서로(西路)가 꽉 막히어 소식이 통하지 않았고, 본도(本道)가 패하여 흩어져서 사람들이 대부분 도망쳐 숨어 버렸으므로, 내가 비록 공은 있었으나 포장(褒獎)해 줄 사람이 없어 조정에서 그 소식을 들을 길이 없었다. 그러니 비유하자면 마치 사람이 없는 깜깜한 밤에 자기들끼리 서로 격살(擊殺)한 것과 같았으므로, 공이 드러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행주의 싸움은 내가 공을 세운 뒤에 있었으므로, 권위(權位)가 이미 중해져서 사심(士心)이 귀부(歸附)하였고, 호남의 정병(精兵)과 맹장(猛將)이 모두 휘하에 소속되어 군사가 수천 명을 넘었고 지리(地利) 또한 험고하였으며, 적의 숫자는 비록 웅치에서보다는 많았으나 그 기세가 이미 쇠해졌으니, 이것이 공을 세우기가 쉬웠던 이유이다. 게다가 마침 천병(天兵)이 나와서 주둔하고 우리 나라 제로(諸路)의 근왕병(勤王兵)들이 바둑알처럼 기전(畿甸)에 포치(布置)되었을 때, 강화(江華)로 피란 가 있던 도성(都城)의 사민(士民)들이 우리의 승전(勝戰)을 학수고대하던 터에 나의 승전이 마침 다른 여러 진영(陣營)보다 먼저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공이 쉽게 드러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매우 요점을 얻었다.
그리고 원균(元均)의 경우는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성취시킨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李舜臣)과는 공을 겨룰 수가 없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은 당연히 수군(水軍)에 으뜸이다. 그런데 만일 그 심적(心迹)을 추구해 본다면 또한 반드시 그 공을 나누어 가질 자가 있으나, 일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문서(文書)에 나타나지 않았고, 내가 길에서 얻어 들은 말들도 꼭 믿기 어려운 실정이다. 내가 해진(海陣)을 왕래하면서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제장(諸將)들의 용병(用兵)이 어떠했는가를 물었는데, 해진 사람들이 꽤나 상세하게 그 사실을 말해 주었다.
영남(嶺南)이 함몰되던 날 이순신은 수영(水營)에 있으면서 어찌할 계책을 몰라서 노량(露梁)의 입구에 전함(戰艦)들을 죽 배열시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성(城)을 수리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였고, 또 본도(本道)만을 굳게 지키고 한산(閑山)의 어귀는 엿보지 않으려고 하여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그런데 당시 순천 부사(順天府使) 권준(權俊)과 광양 현감(光陽縣監) 어영담(魚泳潭)이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내 그를 일어나게 하고 몸소 스스로 달려가서 바다로 내려갈 계책을 극력 협찬해서야 비로소 이순신이 군대를 일으켰다고 한다. 만일 이 말이 사실이라면 권준과 어영담이 의당 그 공을 나누어 가져야 하겠거니와, 그 공을 논하자면 이순신이 실로 수공(首功)에 해당하지만, 그 심적으로 말하자면 이순신이 이 두 사람에게 약간 부끄러운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성을 지킨 공으로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유독 연안(延安)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이정암(李廷馣)만 일컫고 진주(晋州)에서 순절한 김시민(金時敏)은 언급하지 않으니, 이 또한 도치(倒置)된 일이다. 이정암의 공은 진실로 칭찬하고 장려할 만하나, 김시민과 똑같이 놓고 논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또한 차등이 없지 않다.
대체로 이정암이 상대했던 적은 흑전장정(黑田長政)으로서 그 군대는 만 명도 채 되지 않았고, 이정암이 거느린 군대는 또 수천 명을 넘었으며, 여기에 와서 회합한 여러 의병장들 또한 이정암의 군세(軍勢)와 서로 맞먹을 만한 이가 많았다. 게다가 이때 본도의 여러 장수들은 모두 공을 세우지 못했는데, 오직 이정암만이 이런 공을 세운데다가 진중(陣中)에는 또 선비들이 많아서 이정암의 전공(戰功)을 꾸며 작성하기가 쉬웠고, 행재소도 멀지 않아서 소식을 쉽게 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정암은 평소의 명성이 인심을 충분히 복종시킬 만하였으므로, 그 공이 크게 드러났던 것이다.
그러나 김시민의 경우는 자기에게 소속된 군대만을 거느렸고 구원병은 매우 적은데다 상대했던 적은 소서행장(小西行長)으로서 흑전장정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리고 각채(各寨)의 여러 적들이 진영(陣營)을 통틀어 합세(合勢)함으로써 적병(賊兵)의 수가 사군(四郡)에 널리 퍼져서 십수 만으로 헤아릴 수도 없었으니, 비유하자면 마치 산(山)을 들어서 새알[卵]을 누르는 것과 같은 실정이었다. 그런데도 김시민은 끝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능히 거대한 적을 물리쳤으니, 그 형세의 난이도(難易度)가 이정암의 처지에 비하면 월등히 어려웠다. 그러나 이 때는 본도가 패하여 흩어져서 그것을 보아서 아는 사람이 전혀 없었고, 행재소는 워낙 거리가 멀어서 그 소식이 미치지 못했으니, 이 일을 연안(延安)의 일과 동등하게 놓고 비유하는 것은 또한 정론(定論)이 아니다.
세상에서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의 죽음을 절의(節義)라고 하는데, 만일 왕사(王事)에 죽었다고 한다면 괜찮겠지만, 절의라고까지 칭하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해서 조헌 등은 일개 서생(書生)으로 팔뚝을 걷어붙이고 급히 일어나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왕실(王室)을 보존하는 데에 뜻을 두었으니, 그 충의(忠義)는 가상하다. 금산(錦山)의 싸움에 이르러서 제군(諸軍)이 어둠으로 인해 패하여 무너져서 적들이 칼을 뽑아 들고 튀어나오자, 지세(地勢)가 험하고 협착하여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는 와중에 조헌은 난병(亂兵)에게 죽었고, 고경명은 마침 술에 취해 말고삐도 잡을 수 없게 되어 그 또한 군중(軍中)에서 죽었다. 그들이 패한 것을 보고도 달아나지 않고 끝내 왕사에 죽은 것으로 말하자면 과연 포장(褒獎)할 만하나, 만일 절의라고 칭한다면 그것은 안 될 말이다.
조용하게 죽음을 당하면서 자기 지조를 잃지 않은 이로는 오직 김천일(金千鎰)과 양산숙(梁山壽) 두 사람뿐이다. 진주(晉州)가 포위되었을 때에 김천일은 포위된 형세가 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이끌고 그곳으로 달려 들어갔으니,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이 급해진 뒤에는 군중(軍中)에서 김천일이 사인(士人)이라는 이유로 그에게 군대를 부장(副將)에게 소속시키고 성을 급히 빠져나가서 자신을 보전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김천일은 그 말을 듣지 않고 끝내 촉석루(矗石樓) 일면(一面)을 굳게 지키다가 적병(賊兵)들이 성을 타고 올라옴에 이르러서도 얼굴빛도 변하지 않고 조용하게 북쪽을 향하여 재배(再拜)하고 죽었다.
또 양산숙 같은 이는 바로 시골 구석의 포의(布衣)로서 다만 김천일의 참모인(參謀人)이었을 뿐이니, 비록 따라 죽어도 괜찮겠지만 설령 죽지 않더라도 또한 괜찮은 처지였다. 그런데 김천일이 그로 하여금 성을 빠져나가서 함께 죽지 말도록 권하자, 그는 말하기를, “이미 일을 같이 하였으니, 의당 함께 죽어야 한다.” 하고, 끝내 김천일을 따라서 죽었다. 소행(素行)이 독실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세상의 논변하는 자들은 범범하게 이상의 네 사람을 똑같은 등급으로 치고 있으니, 이 또한 정론이 아니다.
그리고 박진(朴晉) 같은 사람은 전후로 종군(從軍)하는 동안에 황산(黃山)과 경주(慶州) 두 곳에서의 패배만 있었을 뿐이고 적봉(賊鋒)을 꺾거나 적진(賊陣)을 함락시킨 일은 별로 없다. 그런데 제장(諸將)들의 논의가 매양 박진을 으뜸으로 칭하여 감히 그와 더불어 고하(高下)를 겨룰 자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대체로 박진이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있을 적에 정면으로 적로(賊路)의 문호에 위치했는데도 변란을 당해서 당황하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하여 일부(一府)의 군졸로 대규모의 적군과 맞서 황산에서 적을 가로막아 직접 봉인(鋒刃)을 무릅쓰고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퇴각하였으므로, 그가 꺾여 패배한 상황을 또한 제장들에게 충분히 보여줄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의 기세가 충천하여 온 도내(道內)의 크고 작은 장관(將官)들이 머리를 부둥키고 바람에 쏠리듯이 무너져서 감히 적에게 대항하도록 군대를 강력히 지휘하는 소리를 한 마디도 내는 자가 없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박진은 시종일관의 지조로 백 번 꺾여도 돌아서지 않고 고군(孤軍)을 독려하여 충의(忠義)로써 권면하고 동서(東西)로 출몰하면서 가는 곳마다 적을 쳐부수다가 비록 누차 위태로운 지경을 당하였으나 어렵고 험난함을 회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전황(戰況)을 치보(馳報)하고 한편으로는 군대를 수습하였다. 당시에 조정에서 적정(賊情)을 탐지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박진의 첩보(牒報)가 있을 뿐이었으니, 만일 박진이 죽었더라면 영남(嶺南)의 소식은 거의 끊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상 또한 박진을 가상히 여기며 감탄하여 이르기를, “박진의 행위를 보니 다만 죽음을 면치 못할까 염려된다. 박진이 만일 죽는다면 국사(國事)는 그만이다. 박진이 어찌 죽어야 한단 말인가. 의당 형편을 보아서 진퇴(進退)해야 하는데, 박진이 혹 이런 형편을 헤아리지 않고 함부로 진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였으니, 박진을 애석히 여기는 뜻이 이 말 속에 넘쳐흐른다. 박진은 끝내 도내(道內)의 장사(將士)들을 수습하여 점차로 진영(陣營)의 모양을 이루어서 거의 끊어져 가는 온 도내의 기맥(氣脈)을 다시 소생시켰으니, 사람마다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박진의 공이었다.
권응수(權應銖)는 항오(行伍) 사이에서 일어나 드러난 명성도 없이 박진의 절도(節度)를 받아서 능히 향병(鄕兵)을 독려하고 인솔하여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영천(永川)을 공격하여 함락시켜서 적수(賊首) 7백여 급(級)을 베고 나니, 군성(軍聲)이 크게 떨쳐져서 한 도(道)의 수창자(首唱者)가 되었다.
안위(安衛)는 일개 현령(縣令)으로 이순신(李舜臣)의 분부를 받아 큰 전함(戰艦) 한 척을 가지고 조수(潮水)를 이용하여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명량(鳴梁)의 어귀에서 적진(賊陣)에 충돌한 다음 더욱 강력하게 혈전(血戰)을 벌이어 끝내 적선(賊船) 5백여 척을 벽파정(碧波亭) 밑에서 격파하여 물리쳤으니, 적들로 하여금 감히 다시 전라 우도(全羅右道)를 엿보아서 곧장 충청도(忠淸道)로 진격하지 못하게 한 것은 안위의 힘이었다. 당시에 안위의 승첩(勝捷)이 아니었다면 적들이 한산(閑山)에서 승리한 기세를 타고 장차 충청도를 곧장 범하여 바다를 따라서 올라오더라도 이를 물리쳐 금할 사람이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변란이 일어난 이후 10년 동안에 걸쳐 영천과 명량의 전투를 가장 장쾌(壯快)하다고 칭하는데, 그러나 안위의 일은 권응수의 일에 비하면 또 어찌 만 배만 더 장쾌할 뿐이겠는가.
이시언(李時言), 김응서(金應瑞), 고언백(高彦伯), 이광악(李光岳)은 크고 작은 싸움을 백여 차례나 치르는 동안에 일찍이 좌절한 적이 없었고, 한마(汗馬)의 노고와 참획(斬獲)한 것이 많기로 항상 여러 장수의 선두가 되었다. 그리고 박명현(朴名賢), 한명련(韓明璉), 홍계남(洪季男), 구황(具滉), 이남(李楠) 등은 가장 굳세고 용감하다고 일컬어져서 한때 여러 장수들이 감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가 없었다. 진영에 임하여 갑옷을 착용함에 이르러서는 모두 박명현 등을 으뜸으로 삼았으나, 그들이 종군(從軍)한 지 10년 동안 모두 특별히 지명(指名)할만한 큰 공훈을 세운 것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조우(遭遇)의 기회가 사람마다 서로 다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하던 때를 당해서는 사람들이 서로(西路)를 죽을 땅으로 보아서 모두 ‘끝내 반드시 적에게 유린당하여 심지어는 극도로 궁지에 빠져 모두가 아주 피폐한 지경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여겼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서로로 가려고 하지 않고 모두 경기(京畿)와 황해(黃海)의 사이에서 그럭저럭 배회하다가 형편을 보아서 전진하거나 후퇴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임진(臨津)이 패하자 각진(各陣)의 여러 장수들이 일시에 궤멸하여 흩어져서 각기 스스로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런데 오직 이빈(李薲)만은 패배한 곳으로부터 곧장 행재소로 들어가서 함께 평양(平壤)을 지켰다. 급기야 평양이 함락되자 사람들은 모두 일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여 다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심지어 식견 있는 문신(文臣)들 또한 그들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이빈은 또 정주(定州)로 물러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수합하여 다시 순안(順安)에 진(陣)을 치고 적을 차단할 계책을 세웠다.
이때 행조(行朝)의 일이 급하여 교서(敎書)를 급급히 보내서 날로 여러 장수들을 근왕(勤王)하도록 불렀으나, 여러 장수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서쪽으로 가려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혹은 겉으로 근왕한다 핑계하고 군대를 거느리고 바닷가로 내려가 첩(妾)이 사는 곳을 찾아 만나서 그를 말에 싣고 함께 돌아간 자도 있었고, 혹은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군대를 파하고 도망쳐 돌아가 관망(觀望)을 꾀하다가 징병(徵兵)하는 글을 보고는 다른 사람을 대하여 냉소(冷笑)하는 자도 있었으니, 인심이 여기에 이르러 극도에 달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직 전라 병사(全羅兵使) 최원(崔遠)만은 자기 소속 부대를 인솔하고 서쪽으로 올라가는데, 군정(軍情)이 중도에서 크게 변하자, 하루는 자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50여 인을 참수(斬首)하게 하여 필사(必死)의 뜻을 보였다. 그래도 끝내 금지할 수 없게 되자, 강화(江華)로 들어가 웅거하면서 군사들을 도망치지 못하게 하고 1년이 넘도록 애써 지키는 동안에 굶어죽은 자가 서로 잇달았으나 끝까지 마음을 변치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공을 세우지는 못했으나 그 마음은 또한 충분히 가상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변란이 일어난 이후의 여러 장수들 중에는 오직 이빈과 최원만이 신하된 의리를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신축년 7월 19일 밤에 천기(天氣)는 매우 덥고 성월(星月)은 휘영청 밝은데, 잠이 오지 않아 베개에 기대어 천첩(賤妾)과 함께 새벽까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첩이 말하기를,
“대인(大人)께서는 심장(心腸)이 지나치게 강하시어 과감하게 떨쳐 버리는 일이 많으므로, 급한 때에 믿고 의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인하여 무슨 말이냐고 물으니, 첩이 말하기를,
“임진년의 변란 초기에 변보(邊報)가 날로 급해진 다음에야 감역(監役)이 기종(騎從)을 첩에게 보내 대인과 만나서 결별(訣別)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첩이 집에 왔는데, 마침 빈객들이 당(堂)에 가득하였습니다. 밤이 깊어 빈객들이 다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 엿보게 했더니, 대인께서는 그때 막 이불을 덮고 별사(別舍)에 누워 계셨습니다. 그러자 감역이 첩으로 하여금 들어가서 작별 인사를 하도록 하므로, 그의 말에 따라 중문(中門)을 통하여 들어가니, 대인께서 첩이 온 것을 바라보고는 즉시 문을 닫고 응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첩이 문 밖에 서서, 잠시만 방으로 들어가 대면하여 결별하고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니, 대인께서 이에 응답하기를, ‘나도 정(情)이 없는 사람은 아니나, 다만 국사(國事)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사정을 돌볼 겨를이 없다. 지금 단란하게 마주앉아서 눈물이나 흘리는 것은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한갓 마음만 산란하게 된다. 너는 네 언니를 따라 잘 가거라. 언니가 스스로 네가 살 수 있는 길을 가리켜 줄 것이다.’ 하고, 끝내 응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다음 날 새벽, 대인께서 조정에 나가실 때에 첩이 죽기로 작정하고 대인 앞에 돌진하여 대인의 허리띠를 붙잡고 잠시만 머물러서 첩에게 어떻게 어떻게 하라고 지시해 주기를 애원했으나, 대인께서는 두세 번 옷자락을 뿌리치다가 끝내는 패도(佩刀)를 뽑아 가지고 그 허리띠를 끊으려고까지 하였습니다. 첩이 마지못하여 조금 물러섰더니, 대인께서는 마침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난리를 당해서 이러하였으니, 이것이 믿고 의지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고 하였다.
내가 이 말을 인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추억해 보니, 과연 그때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권속(眷屬)들과 서로 헤어지는 것에 연연하여 마음을 어지럽힌다면 비록 어가(御駕)를 따라 서쪽으로 가더라도, 일을 만날 때마다 권속을 돌아보는 가운데 사려(思慮)가 분열되어 반드시 처음에 먹은 마음대로 일을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여기었다. 마침내 다시는 집안 사람들과 서로 만나지 않았고, 어린아이가 혹 눈앞에 와서 재롱을 부리던 것도 이로 인하여 중문을 닫아서 오는 길을 차단하였으며, 늙은 누이가 집에 왔을 때에도 대면하여 결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홀로 외사(外舍)에서 거처하다가 그대로 호종(扈從) 길에 올랐다.
지금에 와서 그 일을 생각해 보니, 그 처치한 것이 비정(非情)함에 관계되고 또 중정(中正)한 도리도 아니었으니, 참으로 학자(學者)가 취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헤아리건대, 역량(力量)과 소양(素養)이 견고하고 확실하지 못할 경우 난리를 당해서 만일 이렇게 처치하지 않으면 반드시 마음이 허둥지둥 산란해져서 그 소행(素行)을 잃는 자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만일 조용하게 감당해 낼 수 없으면 차라리 과격한 조치를 취해야만 거의 시종(始終)을 온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하여 행조(行朝)에서의 처사(處事)를 점검해 보니, 대단히 군급(窘急)한 데에는 이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지려(志慮)가 이미 쇠해지고 혈기(血氣) 또한 약해졌으니, 혹 다시 이런 때를 만난다면 반드시 이러한 처치를 이렇듯 명쾌하게 하지 못하고 허둥지둥하여 일을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지 않기가 아마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서 스스로 경계하는 바이다.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병조(兵曹)의 장관(長官)이 되었고 또 비변사(備邊司) 유사(有司)의 직임을 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초야(草野)의 한천(寒賤)한 선비와는 체통과 형세가 절로 달라서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참예하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평양(平壤)으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렀다가 이곳으로 환가(還駕)하기까지 해가 장차 두 번 바뀌는 동안에 소장(疏章)이 구름처럼 쌓였으나, 신만이 유독 소장을 올리지 않았는데, 그것은 현재의 일에 미편(未便)함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까닭은 대체로 이렇습니다. 뜻을 행하는 자리가 있고 말씀을 아뢰는 길이 있으며, 조정에 나가면 회의(會議)가 있고 어전에 나아가면 인대(引對)가 있으니, 의리상 당연히 들어가서는 좋은 계책을 고하고 밖에 나와서는 조용히 그대로 따를 뿐이었고, 아뢴 계책을 드러내서 말하여 명성을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간혹 한 가지 쓸 만한 계책이 있으면 일에 따라서 그때 그때 논의하여, 아무리 미세한 정성이나마 생각한 것이 있으면 진계(陳啓)해서 마음속에 품은 사소한 지혜까지도 남김없이 다 말씀드렸으므로, 비록 헌의(獻議)하라는 명을 받더라도 실로 채택할 만한 말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시무(時務)의 급한 것이나 시행과 조처의 타당성 여부에 대해서는 전후의 성교(聖敎)에서 대강(大綱)을 펼쳐 놓으면 여러 경(卿)들의 논의에서 세목(細目)을 매우 정밀하게 제시하여, 신의 어리석은 논설을 기다리지 않고도 강론한 것이 이미 익숙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만 팔로(八路)가 매우 피폐해서 대세(大勢)가 진작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재물이 고갈됨에 따라 군량은 떨어지고 배가 고픔으로 인해 군사들은 흩어져서, 일의 가닥을 잡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계책은 많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니, 다만 힘써 행함이 어떠했는가를 반성해 볼 뿐입니다.
그러나 다만 신이 걱정하는 것은 여기에 있지 않고 저기에 있습니다. 지금 의원이 병을 진찰하는 데는 맥(脈)을 살피어 증세(證勢)를 확정해서 병이 생긴 원인을 분명히 안 다음에 그 증세에 합당한 약제(藥劑)를 투여해야만 약효를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병은 양명(陽明)에 있는데 음경(陰經)에 침(針)을 놓는다든지, 울화증(鬱火證)을 앓는 데다 함부로 조약(燥藥)을 복용시켜서, 진찰을 정확하게 하지 못하여 병과 약이 서로 어긋난다면 그 통증만 가중시킬 뿐 약효를 거두기가 어렵습니다.
비록 국가를 도모하는 데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지금 국가는 큰 그릇과 같아서 한 사람의 힘으로 손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한 가지 일로 그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 일조일석(一朝一夕)에 갑자기 망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온갖 일이 다스려지지 않고 온갖 폐단이 함께 일어나서 온갖 재변(災變)이 경계를 보여 주는데도 사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또 국가가 장차 흥하려면 반드시 온갖 일을 다 다스리고 온갖 폐단을 다 제거하여 온갖 재변에 응답해야만 일이 성취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망하게 되는 원인을 생각하고 흥하게 되는 원인을 강구하여 잘못된 과거사를 반대로 돌리어 모두 힘을 합해서 새롭게 고쳐 나가지는 않고 이에 별도로 다른 계책을 구하려 하고 있으니, 신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국가가 변란을 만난 때로부터 상하(上下)가 모두 허둥지둥하는 가운데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이 조정에서는 공의(公議)를 하고 항간(巷間)에서는 무리지어 이야기를 하였는데, 변란을 부른 까닭을 추구해 보았으나 그 연유를 알아 내지 못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 의논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의 번폐(藩蔽)가 되어 있으므로, 일본이 중국을 도모하려고 하면 조선은 기필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이다. 그런데 평수길(平秀吉)이 흉악한 계책을 기르고 거만(巨萬)의 군대를 훈련시켜서 갑자기 쳐들어왔으니, 강약(强弱)의 차이가 너무나 동떨어진다. 이 때를 당해서는 비록 문왕(文王), 무왕(武王) 같은 임금이 위에 계시고, 주공(周公), 소공(召公) 같은 이가 밑에 있으며, 장량(張良), 진평(陳平), 제갈량(諸葛亮) 같은 이가 안에서 모의를 완벽하게 하고, 한신(韓信), 경포(黥布), 항량(項梁), 항적(項籍) 같은 이가 밖에서 있는 힘을 다하더라도 옛날 주 태왕(周太王)이 적인(狄人)을 피해 빈(邠) 땅을 떠난 것과 같은 행행(行幸)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항간에서 이야기하는 이들은 말하기를, “정(政)은 백성을 기르는 것인데 지금은 백성을 해치고, 신(信)은 백성을 자립시키는 것인데 지금은 신의를 잃었다. 토목 공사(土木工事)를 일으킴으로써 백성들의 원망이 생기고, 부역(賦役)이 중해짐으로써 백성들이 탄식을 하는 실정이니, 나라가 실로 잘못된 정사를 하고 있는데, 백성이 어떻게 전쟁을 할 수 있겠는가. 단번에 여지없이 패하여 만사가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버린 것이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살펴보면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을 사랑하여 좋아하는 것에 공변됨이 가리워지고, 서민들은 강포(强暴)하여 임금을 지나치게 원망하고 있으니, 상하(上下)의 서로 다른 의논이 모두 그 요점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신은 이 두 가지 의논을 가지고 마음속으로 싸움을 벌여 가면서 밤낮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倭)가 감히 중국을 엿보지 못한 것은 조선이 중국의 한폐(扞蔽막고가림)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절강성(浙江省)을 경유하여 곧장 공격해 가자면 천 리나 먼 바다를 건너게 되고 길은 먼데다 수비(守備)도 있게 되지만, 우리 나라를 얻어서 계획을 시행할 경우 하루 동안의 순풍(順風)만 타면 무방비 상태인 중국에 곧장 출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가령 평수길(平秀吉)이 지혜가 있는 자일 경우에는 조선은 참으로 반드시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연전에 처음으로 적(賊)의 서계(書契)를 보고 즉시 이런 뜻을 탑전(榻前)에서 진계(陳啓)했는데, 당시 한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신더러 오활하다고 하였고, 상께서도 꼭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대체로 수길은 교활한 적입니다. 몸소 해도(海島)에 숨어 있으면서 이미 천하(天下)의 형세를 간파하고 마치 직접 가서 본 것처럼 계획을 작성하였거니와, 우리 나라에 대해서는 사자(使者)를 연달아 보내서 모든 동정(動靜)을 더욱 자상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이 쳐들어온 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격노(激怒)하여 군대를 일으킨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이에 앞서 우리의 허실(虛實)을 탐지하여 강약(强弱)을 헤아려 본 결과 이용할 만한 약점은 있으나 갑자기 도모할 만한 힘이 없음을 알고 난 다음에야 지금 군대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서 급격히 진군(進軍)하여 우리 나라를 이토록 유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가령 대마도주(對馬島主) 종의지(宗義智)가 왔을 때 우리 나라가 군신간(君臣間)에 서로 믿음이 있어 조정(朝廷)이 서로 화협하고, 기율(紀律)이 엄숙 명백하여 군정(軍政)이 잘 닦여졌으며, 상벌(賞罰)이 모두 타당하게 시행되어 온갖 기예(技藝)가 다 극도로 숙련(熟練)되어 있는 등, 저들이 우리를 이길 수 없는 만반의 준비를 먼저 하여 저들에게 보여 주었다면, 서계(書契)의 패악스러운 말도 굳이 계교할 것이 없었습니다. 종의지가 재차 오는 것도 굳이 거절할 것 없이 예의를 갖추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더라도 저들이 스스로 전쟁을 그만둘 줄을 알게 되어 단정코 오늘의 변란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살펴보니, 상하(上下)의 정의(情義)가 서로 막혔고, 조정의 분위기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며, 기율이 밝지 못하여 군정이 실추되었고, 상벌이 중정의 도리를 잃어서 온갖 기예가 태만해졌으며, 심지어는 오랑캐의 사자(使者)로 하여금 겁이 나서 숨을 죽이고 왔다가 곁눈질로 노려보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기필코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는 땅에 앉아서 저들이 이용할 만한 약점을 보여 주었으니, 적이 쳐들어오지 않기를 원하더라도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변방(邊方)에서 사소한 경보(警報)가 한 번 있자 열군(列郡)이 마치 쥐가 달아나 숨듯 서로 도망치는 데에 미쳐서는 사람마다 윗사람을 친애하는 마음이 없고, 백성들은 이반(離反)하는 뜻을 가지어, 임금의 과실을 캐내서 원망하고 욕하는 소리가 길에 그득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망하여 이반한 백성들을 몰아서 잘 교련(敎鍊)된 적군(賊軍)을 방어하게 하였고, 게다가 강약의 차이가 월등함으로 인해 국가의 근본이 되는 지방이 먼저 함락되었으니, 이때 백성들이 창을 반대쪽으로 겨누지 않고 스스로 패하여 무너지기만 한 것은 요행이요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적추(賊酋)가 인의(仁義)를 빙자하여 거짓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무(慰撫)했더라면 인심(人心)의 거취(去就)에 있어 혹은 저들의 편을 든 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나는 곳마다 잔인하고 포악한 짓을 마구 하였고, 도성(都城)에 들어와서는 사방으로 흩어져서 약탈을 자행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 적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을 안 다음에야 각각 자신을 위하는 계책으로 일어나서 서로 적에게 대항하게 되었고, 이를 이어서 천병(天兵)의 위세(威勢)가 그들을 두려워 떨게 하였으니, 이것으로 말한다면 백성들을 도륙(屠戮)시킨 것이 적의 입장에서는 방도를 잃은 것이요 우리 나라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은 나라를 회복시킨 것은 인력(人力)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지금 적들이 물러간 뒤에도 지난날 항간에서 의논하던 자들은 아직까지 강포한 노염을 품고서 나라가 망한 것을 오로지 임금의 탓으로 돌리고 있으니, 이는 참으로 임금을 지나치게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서 의논하던 인사들에 이르러서도 아직까지 지난날의 미혹된 판단을 고집하여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천운(天運)이 떠나지 않고 민심(民心)이 조국을 생각한다면 적(賊)이 아무리 인심을 얻고 천병(天兵)이 비록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는 자연히 흥복(興福)되는 것이다.” 하면서, 중흥(中興)의 큰 공훈을 국가가 스스로 취한 바가 아니라는 것을 자못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나라가 망하게 되거나 흥하게 되는 까닭을 전혀 강구(講究)하지 않아서 아직도 지난날의 잘못된 행위를 반대로 돌려 바로잡을 생각을 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계획하는 데 있어서도 가까이에 있는 것을 보지 않고 허망되고 요원한 데에서만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국사(國事)가 마치 통증이 일어난 후에 환자의 육맥(六脈)을 미처 진찰하지 않아서 병증(病證)을 확정짓지 못한 채 무턱대고 조약(燥藥)을 쓰다가 열(熱)만 더 조장시킴으로써 양명(陽明)의 병세가 약과 서로 어긋나게 되는 것과 같은 꼴이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지금 헌의(獻議)에서 다른 계책을 찾으려고 한다면 진언(進言)하는 자가 반드시 말하기를, “아무 조항을 가지고 사람의 머릿수대로 세금을 거둬들이면 군수(軍需)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고, 아무 도(道)에서 군대를 뽑으면 군세(軍勢)를 조장할 수 있다. 적이 물러가면 의당 아무 성(城)을 쌓아야 하고, 일이 안정되면 의당 아무 병기(兵器)를 수선해야 한다. 조총(鳥銃)과 칼 꼽은 대창[筤筅]은 적(敵)을 제어할 수 있고, 높은 보루(堡壘)와 험고한 성책(城柵)은 적(賊)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평상시에도 국가에서 이것을 강론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갑자기 경급(警急)한 일이 있으면 멀리서 적을 바라만 보고도 바람에 쏠리듯이 흩어져 달아나는데, 창고를 불지르고 떠나는 자는 곡식이 많이 쌓여 있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고, 줄을 타고 성(城)을 내려가는 자는 성루(城樓)와 성첩(城堞)이 높은 것을 걱정하며, 병기(兵器)를 이끌고 달아나는 자는 오직 병기의 예리함을 염려할 뿐입니다. 그래서 무고(武庫)를 완전하게 수리하는 것은 다만 무기(武器)를 적에게 빌려 주는 행위가 될 뿐이고, 창고에 곡식을 많이 쌓아 두는 것은 모두 도적에게 군량(軍糧)을 보태 주는 일이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재를 얻어서 잘 지키면 효산(崤山)과 함곡관(函谷關) 같은 요새가 평지에서 생겨날 수도 있거니와, 방법이 없이 적을 방어하려고 하면 골육(骨肉)도 시호(豺虎)처럼 사납게 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지금 굳이 먼 옛날의 일을 끌어댈 것도 없이 우선 눈앞의 일로 증거를 대 보겠습니다.
해주(海州)에서 험고하기로는 연안(延安)만한 데가 없고, 도성(都城)에서 험고하기로는 행주(幸州)만한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일개 진주성(晉州城)이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 김시민(金時敏)은 홀로 지키면서도 여유가 있었고, 서예원(徐禮元)은 군대를 더 지원받고도 부족하였습니다. 무기가 많기로는 도성의 무고(武庫)만한 데가 없으나 적이 도성에 들어왔을 때는 감히 그들을 검문(檢問)할 자도 없었는데, 황폐한 초야의 인사들이 작은 무기 하나라도 가진 것은 없었지만 의기(義氣)가 북받쳤기에 혹은 적을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말하자면 성은 참으로 쌓지 않을 수 없고, 못[池]은 참으로 파지 않을 수 없으며, 무기는 참으로 견고하게 수선하지 않을 수 없으나, 옳은 방도를 얻으면 공고(鞏固)해지고, 방도를 잃으면 정사가 어지러워지며, 정사가 어지러워지면 백성이 흩어지게 되는 것이니, 백성이 이미 흩어지고 나면 비록 높은 성이 있더라도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지키겠습니까.
정사를 바로세워서 백성을 보존하는 방도는 다만 힘써 행하려고 뜻을 기울이는 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대체로 계책을 아뢰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아뢴 말을 폐기한다고 하는 것이고, 받아들이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이것은 또한 빈말[空言]이 되는 것이며, 행하면서도 힘써 행하지 않으면 중도에 나태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말을 쓰기가 어려운 것이고, 말을 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쓰면서도 힘써 행하기가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임금이 학문(學問)을 힘써 행하면 지혜가 더욱 밝아지고 덕이 날로 진취되며, 정사(政事)를 힘써 행하면 백공(百工)이 서로 면려하여 만사가 잘 다스려지고, 훌륭한 계책을 힘써 행하면 여러 가지 계책이 들어오고 뭇 사람의 생각이 결집되는 것이니, 뭇 사람의 생각이 결집됨으로써 총명(聰明)함이 넓어지고, 여러 가지 계책이 들어옴으로써 온갖 정사가 잘 거행되는 것입니다. 정사를 하는 방도는 이와 같을 뿐입니다.
그러나 혹 그렇지 않고 힘써 행하지 않아서 한 마디 말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문득 사색(辭色)에 드러내고, 비록 억지로 위유(慰諭)를 한다 해도 의례적으로 해관(該官)에게 내려 버린다면, 구언(求言)의 분부를 날로 내린다 하더라도 말하는 이는 날로 멀어질 것입니다. 혹 이와 반대로 허심탄회하게 아랫사람의 말을 채납(採納)하되, 사람들의 장소(章疏)를 보는 데 있어 항상 계(啓) 자를 찍지 않은 것과 성상의 뜻에 거슬리는 곳에 대하여 반드시 반복해 읽어서 깊이 뜻을 기울여야 할 것이요, 화평한 얼굴로 읽어 내려가면서 가상히 여겨 칭찬할 만한 곳에 이르러서는 또한 반드시 속으로 반성하여 도리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한 가지 좋은 계책을 얻어서 이것을 미처 다 실행하기 전에 오히려 또 좋은 계책을 들을까 염려하신다면, 훌륭한 말이 날로 이름에 따라 이것을 날로 정사에 시행하는 가운데 이것이 사지(四肢)에 달하고 혈맥(血脈)에 통해서 천하 국가(天下國家)에 이르기까지 한 가지 일, 한 가지 정사가 어디를 가나 좋은 계책 아닌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설자(說者)는 말하기를, “지금 비록 누차 장수를 선발하였으나 장수가 등장하지 않은 것은 장수의 재목이 없어서이고, 비록 누차 말을 구하였으나 말을 올리지 않는 것은 좋은 계책이 없어서이며, 전하가 자신을 탓하는 하교가 전후로 연달아 내렸으나 백성들이 감동하지 않는 것은 풍속이 사납기 때문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임금의 성의(誠意)가 지극하지 못하고 행하기를 힘쓰지 않아서, 실지에 입각하여 사람들에게 진실한 노력의 효과를 보여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의 마음은 만화(萬化)의 근원이므로, 은미한 가운데서 조짐이 일기만 하면 이미 아주 밝은 데에 나타나서 사방(四方)에 유행하고 상하(上下)에 통달하는 것이니, 화복(禍福)의 사이에 전이(轉移)되는 기틀이 오로지 여기에 있습니다.
우선 신의 귀와 눈으로 보고 기억한 것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수십 년 이래로 인심(人心)과 세도(世道)가 모두 네 번 변하였는데, 첫번에는 변해서 맑아졌고, 두 번째는 변해서 각박해졌으며, 세 번째는 변해서 추잡해졌고, 네 번째는 변해서 더러워졌습니다.
즉위(卽位)하신 처음에는 곳곳마다 도(道)를 담론하고, 사람마다 책을 끼고 학문에 힘쓰며, 안색을 단정히 하고 걸음걸이를 점잖게 하여 옛 풍속이 크게 변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론(士論)이 한 번 갈라짐으로부터 각기 서로 남의 은미한 흉허물을 끝까지 찾아내어 일어나서 서로 공격을 함으로써 충후(忠厚)한 기상(氣象)은 쓸어버린 듯이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계미년 이후로는 유장(儒將)을 존중하여 등용함으로써 유생(儒生)들은 무예(武藝)를 익히고 명사(名士)들은 병사(兵事)를 담론하여 집집마다 책상 위에 모두 궁전(弓箭)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수년 이래로는 죄를 지은 자는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죄를 면하려 하고, 출세의 길이 침체된 자는 각각 부정한 문로를 통해 등용되기를 희망하며, 명류(名流)나 대관(大官)들은 왕실의 폐척(嬖戚)과 결탁하기를 바라서 남의 치질을 핥는 것보다 더 심한 아첨을 하면서도 전혀 후안무치한 상태이니, 세도가 더러워진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고 들은 데서 얻은 것이 아니며, 어린아이나 어리석은 부녀자들도 모두 항상 말하는 바입니다. 인심의 향배(向背)는 상(上)의 지향하는 곳을 보아서 정해지므로, 아주 밝은 데에 나타난 것은 곧 은미한 상의 마음에 대하여 메아리처럼 응한 것이니, 지금 만일 성심으로 인재를 구한다면 어찌 인재를 다른 시대에서 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상께서 몸소 솔선하여 모범을 보이면 명령을 하지 않아도 백성들이 가르침을 따를 것이니, 깊고 은미한 가운데서 통렬히 스스로 자신을 책망한다면 자신을 탓하는 하교를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먼저 감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도 백성들이 날로 더욱 흩어지고, 나라가 날로 더욱 깎이며, 일이 날로 더욱 실패되는 경우를 신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가장 큰 요점은 힘써 행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고, 지금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또한 상하(上下)의 뜻이 서로 막히고 조정이 화합하지 못한 것보다 앞설 것이 없으니, 이 한 가지 요점을 굳게 지키고 저 두 가지 걱정거리를 제거한다면 그 나머지 절목(節目)들은 모두 강론할 것도 못 됩니다. 대체로 아무리 총명(聰明)하여도 나라를 혼자서는 운영할 수 없고 명군(明君)과 양신(良臣)이 서로 만나야만 일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금의 공통적인 논의이며 필연적인 이치이니 신이 오늘 새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의 재상들이 모두 먼저 스스로 닦고 신칙하여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면서 이것을 도리어 임금을 존경하여 예우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참으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하들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는 그들에게 숨기는 것이 있다고 여겨 먼저 비밀을 캐내는 방법을 베풀어서 그들의 마음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상께서 마음을 터놓지 않고 아랫사람들과 담을 쌓아 대치하시면 아랫사람들이 먼저 의혹하여 상의 심중을 탐색하여 시험하게 되는 것이니, 고식적이고 구차하게 일시적인 미봉책만을 강구하는 행위가 참으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윽이 살펴보건대, 근세에 중용(重用)된 신하들은 처음에 군신(君臣)이 서로 잘 만나서 분발하여 힘써 국사를 담당하다 보면 뭇 사람의 비방이 마구 일어나서 끝내 이것으로 죄를 얻었는데, 그 잘못된 전철(前轍)을 뒷사람이 또 밟곤 하여 서로 연달아 한 구덩이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국사에 힘쓰는 자는 먼저 관재(官災)를 받게 되고, 이름도 없고 모남도 없는 자는 끝내 많은 복을 누리므로,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눈으로 직접 보아서 밝은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공조(公朝)의 대회(大會)에서 매양 성교(聖敎)를 받들 때에 이르러서는 좌우로 곁눈질을 하면서 마치 서로 말이 없는 것처럼 조용한 가운데, 비록 성교의 사지(辭旨)가 화평하여 더 이상 다른 뜻이 없더라도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어서 뜻밖의 뜻을 찾곤 합니다. 그리고 성교에 대답할 때에는 글자 한 자 한 자를 매우 신중히 놓아서, 혹시라도 성상의 진노를 일으킬까 염려하여 절실한 말은 깎아 버리고 애써 모호하게 얼버무려서 마치 과시(科試)에 응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리하여 구차하게 견책(譴責)을 면하고 물러가 집에 돌아가서는 각기 품은 생각을 토로하면서 그 생각을 조정에서 다 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곤 합니다. 이 어찌 전후의 재상(宰相)들이 모두가 용렬한 위인이어서 그렇겠습니까. 실상은 상하(上下)가 서로 간격을 쌓은 것이 이미 풍습을 이룬 데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선(善)을 개진한다면 어찌 생각한 바를 다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국사를 도모한다면 어찌 깊이 품은 계책을 다 발휘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사람을 천거한다면 어찌 아는 바를 다하겠으며, 이런 자세로 사람을 논한다면 어찌 미워하는 바를 다하겠습니까. 그래서 비록 삼공(三公)을 두었더라도 인원을 채운 데에 불과할 뿐이니, 국사가 문란해지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권간(權姦)이 나라를 해칠 경우에는 그 병폐를 받는 것은 비록 깊으나, 정사는 한 군데서 나오기 때문에 일은 많이 단서를 이루게 된다.”고 하였으니, 이는 다 분개하고 원망하는 말로 쇠퇴한 세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비록 뛰어난 슬기를 지닌 사람을 얻어 쓰지는 못할지라도, 만일 허물이나 없는 평범한 사람을 얻어서 작은 과실은 따지지 말고 외인(外人)의 말에 동요되지도 말고 직임을 맡겨 주어 성취하기를 책임지운다면 반드시 오늘날처럼 질서가 없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이 때문에 상하가 서로 막힌 것을 오늘날의 제일가는 걱정거리로 여기는 바입니다.
그리고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에 대한 설(說)에 이르러서는 말을 하자면 이가 아프므로 지금 다시 진술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온 나라에 만촉(蠻觸)의 전쟁이 일어나서 원기(元氣)가 날로 피폐해지고, 붕당(朋黨)을 갈라 서로 헐뜯음으로써 공론(公論)이 절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세력을 얻은 자가 위엄을 떨치면 그가 머리털을 풀어 헤치고 다녀도 남들이 그를 비웃지 않고, 세력을 잃은 자가 외로이 한쪽 구석에 있으면 그가 단정히 앉아 있어도 온 나라가 그를 비난합니다. 그래서 나라에 공론이 없는 것이 마치 배에 노가 없는 것과 같아서, 심지어는 작은 감(監)이나 하급 관사(官司)의 한 가지 일, 한 마디 말도 걸핏하면 서로 견제하여, 대소(大小)의 관원(官員)들이 손만 놀려도 법에 저촉되므로, 각자 숨을 죽이고 구차하게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조정이 화협하지 못한 것을 제2의 걱정거리로 여기는 바입니다.
설령 오늘 힘써 행하여 명일에 군신(君臣)의 사이가 서로 간격이 없어지고 또 명일에 조정이 서로 화합한다 하더라도 적(賊)이 반드시 그 즉시 물러가지는 않겠지만, 그 병통을 받은 근원을 추구해 보면 그 근원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병통을 치유하려고 생각하면 먼저 그 근원을 다스려야 합니다.
다행히도 하늘이 우리 동방을 보우하심에 따라 환연(渙然)히 깨달으시고 나라에 크게 명(命)을 내리어, 좋은 계책을 힘써 행하고 적합한 사람을 얻어 직임을 맡겨서, 뭇 신하들을 면려하여 그 마음과 힘을 하나로 단합시킨다면,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이렇게 한 다음에야 전쟁을 말할 수 있고, 지키는 것을 말할 수 있으며, 나라 다스리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계책이 행해지고 나면 그 상세한 절목(節目)들은 차례에 따라 절로 거행될 것이니, 굳이 마음과 힘을 써서 억지로 강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빈청(賓廳)에서 일상적으로 일에 따라 조목조목 열거해서 진술한 것 외에 한두 가지 진술할 것을 아래에 조목조목 열거하는 바입니다. -올리지 않았으므로 조목을 열거한 부분은 뺐다.
백사별집 제5권 / 조천록(朝天錄) 상(上)
12월 9일 월사가 두령(斗嶺) 위에서 새벽 서리를 읊은 운에 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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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나무 가득한 산에 눈이 온통 덮였는데 / 薝蔔漫山遍六花
구름 사이로 햇살이 밝은 놀을 쏘아 보내네 / 雲間日脚漏明霞
넓고 큰 천지가 맑은 기운 가득 품은 속에 / 乾坤浩渺涵澄氣
바다와 산이 희미하게 흰 꽃과 맞닿았구려 / 海嶽微冥接素華
눈 쌓인 나무 얼음 절벽에 한 해가 저물어 가니 / 雪樹氷崖逼歲闌
산천이 온통 옛날의 그 모습과 비슷하구려 / 山川渾似舊容顔
함께 온 시인은 한가로운 얘기를 잘도 하여 / 同來詩老能閑語
신계 한 길목의 구경거리를 환기시켜 주누나 / 喚作新溪一路看
월사공이 마상(馬上)에서 누차 이곳 산천(山川)이 신계(新溪), 수안(遂安) 사이의 경치와 흡사하다고 말하였으므로, 말구(末句)에서 그것을 언급하였다
치자나무(梔子, Gardenia jasminoides, cape jasmine)는 대한민국, 중국, 일본에 서식하는 상록관목으로 높이 2m 정도
전남과 제주도 남부지방에서 자라며, 키가 약 2~3m 정도 자라는 작은 관목 원산지 중국이라 하나 중국외에 일본, 필리핀에서 인도와 네팔까지 분포(인용 나무위키)
해월(海月)이 통원보(通遠堡)에서 지은 시운에 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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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새의 성에 해 떨어져 날은 어둠침침한데 / 邊城落日晩荒荒
축국장에서 노니는 기마들을 많이 만났네 / 遊騎多逢蹴踘場
온 천하가 이미 천자의 영토로 귀속됐기에 / 率土已全歸版籍
먼 지방 백성들도 생업을 즐기게 되었도다 / 遐氓猶得樂耕桑
북에서 날아올 오랑캐 먼지는 산이 막아 주고 / 腥塵臭北山爲障
남쪽을 엿보는 외적은 바다가 방어해 주네 / 妖孼窺南海作防
만리 길 이 행차는 진정 한 가지 쾌사로다 / 萬里此行眞一快
갑 속에 든 칼이 수시로 위엄을 떨치는구나 / 匣中時復拂秋霜
성호사설 제2권 / 천지문(天地門)
서도관액(西道關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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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판(參判) 이민환(李民寏)은 순무어사(巡撫御史)가 되어 서관(西關)을 두루 돌아다녔고, 또한 책중(柵中)에 갇히기도 하여, 변방의 정세를 잘 알았다. 그가 관방(關防)에 대해 논한 것을 보면, “창성(昌城)으로부터 시경(時梗)을 지나 운산(雲山)에 다다르고, 삭주(朔州)로부터 대삭주(大朔州)를 지나 구성(龜成)에 다다르며, 의주(義州)로부터 용천(龍川)을 지나 철산(鐵山)에 다다르는 이 세 길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전조(前朝)에도 글안(契丹거란)ㆍ몽고(蒙古)ㆍ홍건적[紅巾]이 다 이 구성ㆍ삭주ㆍ의주ㆍ철산의 길을 따라 쳐들어오지 않았던가? 더욱이 구성은 세 길의 중간에 있어, 형세가 매우 좋으므로 전조에도 박서(朴犀)가 지키던 땅이다. 시경과 용천 사이에도 또한 마땅히 지형과 지세[形勢]를 가늠하여 골라 수축하는 것이 옳겠다. 자모성(慈母城)은 비록 천험(天險)의 곳이라 하나 요충(要衝)이 아니다.”라고 했는데, 그 설은 이와 같으나 내 몸소 다녀보지 못해서 어떠한지 자세히 모르겠다.
그 밖의 강계(江界)ㆍ이산(理山) 등의 길도 우리나라를 정토(征討)할 때 그 길로 쳐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니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며, 정묘년ㆍ병자년 난리[赤兎赤鼠之役]가 다 의주의 길을 따라왔으니, 이것은 반드시 그 형세가 그러함이 있을 것이다.
대개 백두산의 큰 줄기가 바다를 끼고 남쪽으로 달리는 사이, 철령(鐵嶺)은 북관(北關)의 좁고 험한 곳이 되었고 조령(鳥嶺)은 동남쪽의 높고 험한 곳이 되었는데, 철령 이북으로부터는 산세가 다 서쪽으로 달려 그 맥락을 찾으려면 반드시 물을 의거하여야만 그 줄기를 알 수가 있다.
경도(京都) 이서에는 송도(松都) 뒤의 서강(西江)이 있고, 또 그 서쪽에 저탄(豬灘)이 있으며, 또한 그 서쪽에 대동강이 있고, 또한 그 서쪽에 청천강(淸川江)이 있으며, 또한 그 서쪽에 압록강이 있는데 이것은 대강 따진 것이다.
두 줄기 물 사이에는 반드시 한 줄기의 산이 있는데, 이른바, 청석령(靑石嶺)이라는 한 줄기는 서강과 저탄 사이에 있어 경기도와 황해도의 경계가 되어 있고, 정방성(正方城)의 한 줄기는 저탄과 대동강 사이에 있어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계가 되고 있다. 이 두 줄기는 실로 험조해서 지킬 만한 지점이다. 대동강과 청천강 사이에는 산맥이 낮고 평평하나 평안도 안의 청천강과 압록강 사이는 산세가 험준해서 곳곳이 지킬 만하니, 이른바, 청북제군(淸北諸郡)이 이곳이다.
강계는 북쪽으로 폐사군(廢四郡)과 접해 있고 북도(北道)와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이로부터 압록강 변을 따라 위원(渭源)ㆍ이산ㆍ벽동(碧潼)ㆍ창성(昌城)ㆍ삭주로부터 의주에 다다르기까지는 모두 왼쪽의 강(江)과 오른쪽의 영(嶺)이 내지(內地)를 보호하고 있으니, 대개 사람이 없음을 걱정할 일이요, 관액(關阨)이 없음을 걱정할 것은 아니다.
서도관액(西道關阨) : 서도 관문의 험준함. 서도란 요즘의 황해도와 평안 남북도 지방의 총칭. 서관(西關)ㆍ서로(西路)ㆍ서토(西土)라는 것이 모두 이것이다. 《類選》 卷1下 天地篇下 地理門.
12월 25일 해월이 광녕에 묵으면서 일을 기록한 운에 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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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천산에 가까워서 오랑캐 득실거리니 / 地近天山豺虎紛
호가와 뿔피리 소리 날마다 서로 들리어라 / 胡笳戍角日相聞
격구장의 교만한 말은 재갈을 물어 던지고 / 毬場驕馬輕抛鞚
소년들의 힘찬 매는 멀리 구름 위에 드누나 / 俠少豪鷹遠沒雲
교활한 오랑캐 곧장 와서 만리장성 엿볼 제 / 桀虜直來窺紫塞
대장군은 당당히 뛰어난 공훈 세우기 위해 / 元戎政欲樹奇勳
웃으면서 포도주 석 잔을 가져다 마시고는 / 三杯笑取葡萄飮
군악을 연주하며 밤중에 군대를 출동하였네 / 鐃鼓聲中夜出軍
휘황찬란한 성부는 통창하고 깊고 엄한데 / 煌煌城府敝深嚴
길 양쪽 일천 집엔 술집 깃발 우뚝하여라 / 挾道千家卓酒帘
마소의 화려한 장식들은 향기가 은은하고 / 繡鞅銀鞦香細細
층층의 누각엔 안개가 가늘게 피어 오르네 / 重樓複閣霧纖纖
소년들의 새 의복은 운금으로 지어 입었고 / 少年新服裁雲錦
유녀들은 곱게 단장하고 화첨에 기대 있더니 / 遊女明粧倚畫簷
옥총마 타고 나올 제 그림자 곁눈질하다가 / 騎出玉驄斜睨影
난간에서 배웅하고 주렴 틈으로 엿보누나 / 廻欄相送半窺簾
정월 9일(기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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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關)에 들어가니, 주사(主事) 오종영(吳鍾英)이 당(堂)에 앉아 있었다. 우리 일행이 예(禮)를 행할 적에 사신(使臣)이 당에 올라 재배(再拜)하니, 주사는 당에서 내려와 답배(答拜)하였고, 역관(譯官) 이하는 각각 뜰 아래에 늘어서서 이름을 점호하여 숫자를 확인하였다. 다음 날이 바로 입춘(立春)이었는데, 관속(關俗)에 입춘 하루 앞서 봄맞이놀이[迎春戲]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갑옷 입은 기병(騎兵) 수백 명이 앞에서 인도하는 가운데 귀면(鬼面)을 쓴 광대[優人]와 토우(土牛)와 채정(彩亭)이 길거리를 가득 메워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각 시장의 상인(商人)들은 채색 종이를 얽어 붕자(棚子)를 만들어서 이것을 메고 가는 자가 또 수십 명이나 되었으며, 주옥(珠玉)과 비취(翡翠) 등으로 눈이 부시도록 성대히 단장하고 말을 타고 가는 창기(娼妓)들이 또 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때 우리 일행들은 길가에 있는 소 수재(蕭秀才)의 집으로 잠시 피해 있었는데, 이윽고 나이 열한두 살쯤 되는 소년(少年) 네 사람이 밖으로부터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들어와서 우리에게 청하여 읍(揖)을 하므로, 우리들도 일어나서 그들에게 답읍(答揖)하였다. 읍을 마치고는 네 소년이 다시 종종걸음으로 나가므로, 그들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마을 유가(儒家)의 자식들인데, 외국 사람이 왔다는 말을 듣고 와서 만나보는 것이라고 하였다. 중당(中堂)의 병장(屛障) 밖에서는 또 한 소아(小兒)가 우리를 엿보고 있으므로, 역관 등이 그를 나오라고 부르자, 그 아이가 급히 안으로 들어가서 녹색 명주 도포를 입고 가죽신을 신고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나와 우리들 앞에 다가와서 읍을 하고는 인하여 의자(椅子) 하나를 끌어다가 동쪽 구석에 놓고 앉아서 어린 가동(家僮)을 시켜 차(茶)를 내왔는데, 그 의젓한 품이 일체 어른 같았다. 그래서 그의 나이를 물으니 11세라 하고,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으니 《논어(論語)》를 읽는다고 하였다. 중화(中華)의 예문(禮文)의 성대함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오후에는 망해정(望海亭)에 갔는데, 대황(臺隍)의 웅장하기가 요계(遼薊) 지역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일행들이 모두 “여기에 오지 않았으면 일생을 헛되이 지낼 뻔했다.”고 하였다. 이튿날에는 주사가 전례에 따라서 전별(餞別)의 예물(禮物)을 보내 주었다.
토우(土牛) : 흙으로 만든 소인데, 옛날 영춘(迎春봄맞이)의 의식에서 그것을 제(祭)하였다고 한다.
채정(彩亭) : 채색 종이 등으로 장식하여 정루(亭樓) 모양으로 만든 것을 말한다.
1599년4월 19일(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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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담장 뒤편을 걷고 있는데, 유 제독(劉提督)의 휘하 사람이 성(城) 안으로부터 와서 하인(下人)에게 말하여 나를 뵙고자 한다고 하기에 와서 만나도록 허락했다. 그 사람이 와서 즉시 예(禮)를 차리고 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본디 상주(尙州) 사람으로 성은 권(權)이고 소명(小名)은 학(鶴)이며, 바로 서애(西厓) 정승의 첩(妾)의 오라비의 자식으로 공검지(恭儉池) 옆에서 생장(生長)했는데, 난리를 만나서 유랑하다가 유가군(劉家軍)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해에 유야(劉爺)를 따라 서울에 들어갔다가 은밀히 서애 정승을 뵙고 장차 인하여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일이 누설되어 유야가 그 사실을 알아채고는 나의 행장(行裝)을 모조리 수색하여 은(銀) 2백 냥을 찾아 공탁(公橐)에 넣어서 나를 도망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또한 선래(先來)가 여기에 왔으니 사신(使臣)이 머지않아 회원관에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자주 와서 탐문을 하다가 오늘 다행히 만나뵙게 되었습니다.” 하고, 사천(泗川)의 풍속(風俗)과 인물(人物)에 대해서 갖추 진술하였다.
그는 또 말하기를, “내가 유야를 따라 동서(東西)로 정벌(征伐)을 나가서 적들을 많이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소견으로는 달자(㺚子)가 가장 상대하기 쉽고, 해적(海賊)은 그보다 조금 더 강하였으며, 왜자(倭子)의 경우는 가장 강해서 대적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순천(順天)의 싸움에서 사천의 관군(官軍)이 먼저 올라온 해적을 보고 다음으로 왜자를 보고는 모두가 놀라서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군공(軍功)을 헤아릴 때에 수급(首級)을 가장 많이 얻은 사람은 모두 한군(漢軍)으로 귀화한 조선인(朝鮮人)이었는데, 사천병(泗川兵)의 용감하기가 비록 조선인보다 못하지는 않으나, 전쟁에 임해서 어리석고 변통성이 없어 형세(形勢)를 잘 간파하는 조선인만 못하기 때문에 수급이 반드시 조선인에게 뒤집니다. 이로부터 유야가 더욱 조선인을 중시하여 매우 치밀하게 방비를 해서 도망쳐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유야를 따라 강을 건넌 조선인이 3백 인은 실히 되었는데, 해를 넘겨 가며 본국에 머무르는 동안 온갖 방법으로 도망치고 달아나서 망실(亡失)된 군사가 매우 많았습니다.” 하였다.
4월 23일 고령(高嶺)의 고개 위에 두견화(杜鵑花)가 만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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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청석령을 오늘은 고령을 넘는구나昨行靑石今高嶺
겹친 봉우리 다 지나니 내 집에 온 것 같네過盡重巒似到家
사월이라 변새의 산은 봄바람이 차가운데四月邊山寒料峭
숲 사이에 활짝 핀 두견화가 보기 좋구려林間喜見杜鵑花
들은 것을 기록하다.
[DCI]ITKC_BT_0260A_0120_020_0390_2002_003_XML DCI복사 URL복사
내가 봉산(鳳山)에 이르러 묵을 때였다. 당시 병사(兵使) 강덕휘(姜德輝)가 벼슬을 그만두고 본군(本郡)의 촌사(村舍)에서 한가하게 지냈는데, 마침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밤중에 나를 찾아왔다. 그래서 담화를 하는 가운데 강 병사의 말을 들어 보니, 지난 기축년(1589년) 8, 9월 사이에 교수(敎授) 정작(鄭昔)이 하루는 술에 취해 강 병사를 찾아와 그에게 지방관을 요청하여 지방으로 나가기를 권하면서 말하기를, “몇달 안에 조정에 큰 화(禍)가 일어날 것인데, 비록 그대에게는 화가 미치지 않을지라도 향린(鄕鄰)의 싸움 또한 친히 볼 필요가 없으니, 멀리 피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인하여 나에 대해서 언급을 했는데, 정 교수가 말하기를, “그는 의당 흑두상(黑頭相)이 될 것이니, 머지않아서 재상 자리에 오를 것이다. 그 사람이 재상으로 들어갈 때에는 국가가 의당 크게 어지러울 것이니, 국사(國事)가 이미 어긋난 뒤에 재상이 되어서 장차 어찌하겠는가. 반드시 머리를 득득 긁으면서 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고 했다 한다. 그래서 내가 괴이하게 여겨 정 교수가 제법 점을 볼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강 병사가 말하기를, “서로 매우 잘 아는 사이인데, 점을 잘 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묻기를, “그렇지 않으면 어찌 이렇게 신통할 수 있겠는가.” 하니, 강 병사가 말하기를, “나도 그 당시에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힐문했더니, 정 교수가 다만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가 어떻게 내가 그것을 아는 까닭을 알겠는가. 나는 자연히 알게 되었다.’ 고 했다.” 하였다.
임진년 이후로 우리 나라 백성으로 난리를 피해 중국으로 흘러 들어간 사람이 자못 많다. 계사년(1593)과 갑오년(1594)에 이르러서는 계속 흉년이 들었는데, 이때 총병(摠兵) 유정(劉綎)이 오래도록 양남(兩南) 지방에 주둔하였기 때문에 양남 지방의 유랑하는 백성들이 모두 방자(幇子)라는 명칭으로 총병의 군중(軍中)에 들어가 품팔이를 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된 사람이 거의 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은 유 총병의 군대가 철수하여 돌아갈 적에 그대로 따라서 강을 건너갔기 때문에 이 때부터 요양(遼陽)과 광녕(廣寧) 일대에 우리 나라의 남녀(男女)와 우마(牛馬)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므로, 식견 있는 이들이 매우 개탄스럽게 여겼다.
내가 요양에 당도했을 적에 한 젊은 놈이 자주 내 우사(寓舍)에 와서 하인들과 서로 친숙해졌는데,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공덕리(孔德里)에 살던 사람인데, 요양에 들어와서 수가(修家)의 가정(家丁)이 되었습니다.”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요양성(遼陽城) 안에 와서 사는 조선인을 이루 다 헤아릴 수도 없습니다.” 하였다. 또 한 무인(武人)은 그의 이름을 잊었는데, 그는 스스로 말하기를, “명족(名族)으로 기사(騎射)를 잘했는데, 천조(天朝) 사람들이 교사(敎師)로 호칭하고 여기서 6, 7십 리쯤 되는 거리에 특별히 교장(敎場)을 설치하여 요양 사람 가운데 영리한 사람을 직접 선발해서 날마다 그들을 교습(敎習)시키게 하고 늠료(廩料)를 후히 주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성취한 사람이 매우 많아졌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동관보(東關堡)의 길 곁에서 한복(漢服)을 입고 조선관(朝鮮冠)을 쓴 한 여인이 우리 일행을 보고 울면서 말하기를, “옛날 사직동(社稷洞)에서 살았고 천인(賤人)도 귀인(貴人)도 아니었는데, 여기에 부쳐 산 지가 벌써 6년이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산해관(山海關) 밖의 여사(旅舍)에서는 한 놈이 밤중에 남몰래 찾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나는 본디 조선 사람인데, 고향이 그리워서 항상 탈출하여 돌아가고자 하나, 주가(主家)에서 매우 열심히 지키고 있어 틈을 탈 수가 없습니다. 같은 마을에 부쳐 사는 조선인이 모두 30여 명은 실히 되니, 만일 한 사람이 먼저 이 일을 주도하면 모두 탈출하여 돌아갈 것입니다. 다만 그 중에 한 사람은 이곳에 와서 바로 장사를 하여 자산(資産)이 매우 많아져서 큰 집을 사고 아름다운 계집을 끼고 살면서 이미 부귀(富貴)의 낙을 누리어 조선에 돌아갈 생각을 끊었으니, 오직 이 사람만은 동요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이따금 조선인을 만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으니, 이 밖에 알지 못하는 자의 수가 얼마나 많겠는가.
연경(燕京)에 왕씨(王氏) 성을 가진 책 장사가 있는데, 매양 조선 사신이 관소(館所)에 이를 때마다 반드시 관소를 드나들면서 책을 팔았다. 하루는 내가 외랑(外廊)에서 산보(散步)를 하는데, 왕씨가 책 수십 권을 안고 와서 팔려다가 팔리지 않자, 나에게 와서 요청하여 말하기를, “재상께서 이 책을 사셔야겠습니다.” 하였다. 내가 그를 속여 말하기를, “나는 글자를 모르는데, 책을 사서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왕씨가 말하기를, “문(文)으로 진출한 선비이신데 무슨 까닭으로 글자를 모르시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나는 실은 문관(文官)이 아니고 본래 무관(武官)이었는데, 울산(蔚山)의 전투에서 수급(首級) 30개를 취하여 일품(一品)에 올랐으므로, 각로(閣老)의 직함을 빌려서 온 것이다.”라고 하니, 왕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는 왕씨가 매양 나를 만날 때마다 존경하는 태도가 전보다 약간 덜하였다.
요양(遼陽)으로부터 산해관(山海關)까지의 사이에 무릇 17개의 참(站)이 모두 호지(胡地)의 곁에 있는데, 그 중 호지와의 거리가 멀다는 곳도 백 리를 넘지 않고 가까운 곳은 혹 10여 리 정도여서 해마다 변방의 걱정거리가 되었으니, 그들이 와서 한인(漢人)을 약탈한 일이 그 수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 일행이 회동관(會同館)에 50여 일을 머무르는 동안에 조공(朝貢)하러 온 달자(㺚子) 6백여 명도 북관(北館)에 머무르면서 우리 일행의 하인들과 서로 안면과 정분이 친숙해졌다. 하루는 일로 인하여 관문(館門)을 크게 열었더니, 달자 수십여 인이 분잡하게 와서 구경을 하였는데, 이러기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그래서 내가 역관(譯官)을 시켜 물어 보게 하니, 요인(遼人)이 10분의 8, 9를 차지하고 그 가운데 진짜 달자는 겨우 1, 2분뿐이라는 것이었다. 인하여 본토(本土)가 퍽 그립지 않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부모(父母)와 처자(妻子)가 모두 중원(中原)에 있는데, 어찌 그리워하는 마음이야 없겠습니까마는, 호지(胡地)의 풍속이 중국보다 십분 순호(醇好)하여 부역(賦役)도 없고 도적(盜賊)도 없어 바깥 문을 닫지도 않고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곤 하여 자기 일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요양에 살면서 쉴새없이 일에 골몰하는 것과는 고락(苦樂)의 차이가 현저하게 다르기 때문에 구차하게 눈앞의 안일만을 탐하여 도망쳐 돌아가기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통주(通州)에 당도하니, 한 책 장사가 들러서 말하기를, “요즘 조공(朝貢)하러 가는 길에 이곳을 지나는 달자들이 서책(書冊)을 힘써 구하는데, 그 중에도 의서(醫書), 복서(卜書) 등의 책을 더욱 좋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날 저녁에 내가 마침 강가에 나가서 상선(商船)에 올라 잠시 번민을 삭이고 있는데, 지난날 관소에 머물렀던 달자 두어 사람이 와서 역관 등을 보고는 매우 기쁘고 위로됨을 느끼어 서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노중(虜中)의 일을 언급하여 갖추 말하였는데, “요양에 황씨(黃氏) 성을 가진 선비가 젊어서부터 글을 잘하기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포로로 잡혀가 호중(胡中)에 있으면서부터는 황 낭중(黃郞中)으로 일컬어지고 있으니, 호인(胡人)들은 문사(文士)를 낭중으로 호칭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막 조공하러 가는 호인들이 여기에 왔는데, 호인들이 그를 퍽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산(資産)이 매우 많아서 항상 미희(美姬) 4인과 산에 그득한 우마(牛馬)를 거느리고 삽니다.”라고 하였다.
동정(東征)의 일이 일어나서 부고(府庫)가 텅 비어 버렸다. 또 건청궁(乾淸宮), 곤녕궁(坤寧宮) 등은 극도로 사치스러워 용뇌(龍腦)ㆍ침향(沈香)ㆍ단향(檀香)의 가루를 산초(山椒) 가루에 섞어서 옥벽(屋壁)을 발랐다. 또 구슬 시장에 독촉하여 구슬을 모조리 다 바치게 해서 그 중에 큰 덩이만을 골라 엮어서 장자(障子)를 만들었다. 또 태감(太監)을 보내서 밖에서 구슬을 채취해 오게 하였는데, 남방에서 바친 구슬 하나는 그 무게가 4냥이나 되어 천하에서 바친 것 중에 이보다 더 큰 것은 없었다. 이 밖에 크다는 것은 3, 4전(錢)의 무게에 불과했는데, 이것을 취하는 데에 여력(餘力)을 남기지 않아 장안(長安)의 시장에는 용뇌(龍腦)와 진주(眞珠)가 일시에 동이 나 버렸다.
또 태감을 나누어 보내서 외방(外方)에 점(店)을 설치하여 이를 황점(皇店)이라 이름하고 상세(商稅)를 징수했는데, 무릇 상인(商人)이 모여드는 대부(大府)와 거진(巨鎭)의 지역에는 모두 황점이 있어 일개 점포마다 연중(年中) 수입이 많게는 2만여 냥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끗을 노리는 무뢰배들이 때를 타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일어나 분잡하게 주문(奏文)을 올려 서로 다투어 구슬을 캐겠다고 청하고 광산(鑛山)을 개설한 자들을 이루 다 기록할 수도 없다.
순상천호(馴象千戶) 왕관(王官)이란 자는 주문을 올려, 은(銀) 2만 냥을 납부하여 궁역(宮役)을 돕기 위해 제가 직접 군대를 모집하여 황천탕(黃天蕩)에서 소금을 굽게 해 주기를 원하였다. 그런데 각로(閣老)심일관(沈一貫)이 그를 미워하여 그의 말을 내치고 쓰지 않았다. 그러자 왕관이 각로가 입조(入朝)하기를 기다렸다가 단문(端門) 앞에서 각로를 만나 마침내 면전에서 욕을 퍼부었다. 각로는 이 때문에 주문을 올려 사직하였다.
광녕(廣寧)에 당도하여 하루를 머물렀다. 이때 온 성안의 상고(商賈)들이 모두 점포(店鋪)를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아서 모든 점포들이 적적하여 하인이 여러 가지 물품을 구입할 것이 있었으나 대부분 매매(賣買)를 하지 못하였다. 괴이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으니, 광녕 사람이 말하기를, “도어사(都御史) 이식(李植)이 요우(遼右) 지역으로 땅을 넓히기 위해 달로(㺚虜)들을 몰아내고 구요양(舊遼陽)에 성(城)을 쌓으면서 백성들을 징발하여 성역(城役)을 일으켜서 과외(科外)의 상세(商稅)를 더 징수하고 심지어는 인가(人家)의 간가(間架)에까지 모두 세금을 매겨서 그 역사(役事)를 돕게 하므로, 요민(遼民)들이 크게 원망하여 일시에 점포를 닫아 버렸습니다. 그러자 총병(總兵) 손수렴(孫守廉) 등이 우리가 변론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고 주문(奏文)을 올려 사직하려 하니, 온 성 안의 백성들이 괴이하게 여겨 탄식하면서 모두가 이 어사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길에서 보니, 요민 수백 명이 무리를 지어 연달아서 삽(鍤)을 메고 지나가는데 이들이 바로 성을 쌓는 역부(役夫)들이라고 하였다. 요양(遼陽)에 이르러 그 곡절을 자세히 들어 보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른바 구요양이란 지금의 요양과의 거리가 2백여 리로, 토지가 비옥하고 풀이 무성하여 호인(胡人)들의 말 먹이는 땅이 되었는데, 여기서 산해관(山海關)을 가는 것이 가장 직로(直路)이다. 그래서 이에 앞서 이성량(李成樑)이 주문(奏文)을 올려 호인들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서 그곳을 지키려고 했는데, 동정(東征)의 일이 일어나서 그 의논이 끝내 행해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동정의 일이 이미 끝났으므로, 이식(李植)이 지난날의 의논을 따라서 일을 진행시킨 것일 뿐이요, 이식이 스스로 건의(建議)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곧 10만의 군대를 징발하여 구성(舊城)에 여러 진영(陣營)을 구축하고, 또 역정(役丁) 8만 명을 징발하여 먼저 갱참(坑塹)을 설치해서 마치 긴 담장처럼 만들며, 연변(沿邊)의 여러 보(堡)들을 훼철하고 그곳의 수병(戍兵)들을 구성으로 옮겨 주둔시킬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의 요양성(遼陽城)으로부터 삼차하(三叉河)의 상류(上流)를 경유하여 요하(遼河), 혼하(混河), 태자하(太子河)를 건너서 구성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나라의 공로(貢路)로 말하자면 동팔참(東八站)에서 곧장 장전보(長奠堡)에 이르러 개원위(開元衛) 등의 지역을 지나서 산해관에 도달하게 되므로, 6, 7일을 넘지 않아서 관하(關下)에 당도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는 산계(山溪) 사이에 위치하여 땅에 사석(沙石)이 많으므로, 변방에는 모두 돌을 쌓아서 성을 만들다 보니, 성벽(城壁)이 울퉁불퉁하여 고르지 못하고, 관부(官府)나 사사(私舍)에 이르러서도 돌을 쌓아서 장벽(牆壁)을 만듦으로, 추루(粗陋)하여 정밀하지 못하다. 그런데 천조(天朝)에서는 죄다 벽돌을 사용하기 때문에 성벽은 마치 깎아놓은 무쇠와 같고 인가(人家)의 옥벽(屋壁)이나 계장(階牆) 또한 가지런하여 볼 만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벽돌을 만드는 데 있어 작업은 매우 거창한 데에 반해 생산되는 벽돌의 양은 매우 적으므로, 이 때문에 벽돌을 상용(常用)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벽돌 만드는 방법이 반드시 잘못되었다 생각하고 천조의 벽돌 만드는 기술자에게 그 방법을 물어 보았더니, 그 방법이 다음과 같았다. 한 가마[窯]마다 사람 4명이 붙어서 4일 동안 작업을 하면 끝난다. 그 사이에 풀을 베거나 혹은 차조짚[秫稭]으로 3백 속(束)을 젖은 진흙에다 마치 부침개에 부추 등을 섞듯이 골고루 혼합하여 벽돌판[磚板]에 채워 넣되, 그 벽돌판 하나에 가운데다 판자를 건너질러서 두 판으로 만들고는 흙이 절로 편평하게 다져지기를 기다릴 뿐 다시 손을 써서 다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섞은 진흙이 매우 매끄럽기 때문에 번거롭게 손으로 다지지 않아도 절로 잘 섞여진다. 1인당 하루에 풀벽돌[草磚] 4백 개를 찍어서 이를 엎어 놓아 볕에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려서 가마에 넣고 밤낮으로 3일간 불을 때면 완전히 구워진다. 큰 가마에서는 벽돌 1만 개를 구워 내는데, 벽돌 백 개당 파는 값은 은(銀)으로 1전(錢) 2푼(分)이므로, 한 가마당 4인이 작업을 하여 4일 동안에 벽돌 만 장을 만들어 내면 파는 값이 은으로 12냥(兩)이 된다. 혹 가마가 작은 경우에는 사람 수와 일수(日數)가 약간 적게 들면서 벽돌은 4, 5천 개를 만들어 낸다고 한다.
내가 일찍이 천조(天朝)에 조회갈 뜻이 있어 매양 경사(京師)에 갔다 돌아온 동료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중조(中朝)의 일을 물어 보았는데, 모두 말하기를, “역관(譯官)이 한 번 압록강(鴨綠江)을 건너기만 하면 문득 이리와 전갈[狼蝎]로 변하여 그 작태를 차마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번 길을 떠나면서 처음에는 이 무리들이 강을 건너면 반드시 사람의 눈을 빼고 창자를 긁어 내 씹어먹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사행 길을 왕복하는 동안에 대단히 해괴하고 경악스러운 일은 보지 못했으나, 그 실정을 살펴보니, 이끗을 다투는 곳에 과연 해괴한 일이 있었다. 그들 또한 사람인데 어찌 다 목석(木石)과 같을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세상에서는 혹 옥석(玉石)을 구분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싸잡아 사람으로서는 못할 짓을 한다고 지목하는 것이 으레 상담(常談)이 되기도 하므로, 말하는 자가 그렇게 말을 하면 나 같은 사람이 그 말을 듣고 그들의 일동 일정(一動一靜)에 대해서 일일이 다 혹 기만(欺瞞)하는 것이 있는가 의심을 한다. 그래서 심지어는 배가 고파서 당연히 먹어야 하고 목이 말라서 당연히 마셔야 할 것을 말하는 데 이르러서도 오히려 믿지 않고 말하기를, “저 사람은 혹 다른 창자가 따로 있어서 나를 기만하는 것인가.” 하고, 일마다 까다롭게 책망하고 마디마디 의심을 품어서, 간혹 실정에 동떨어진 말을 가지고 마치 뛰쳐나온 돼지를 거세게 쫓아서 돌아갈 길이 막히게 하듯이 마구 몰아붙이니, 원망하며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을 자가 드물 수밖에 없다.
혹 사신(使臣)이 그들의 잗닮을 본 나머지 그들과 허물없이 쉽게 가까워져 그들을 꺼리는 데 소홀했다가, 처음 마음이 혹 외물(外物)에 동요되어 털끝만큼의 작은 일에나마 떳떳하지 못한 태도가 드러나서 저들에게 단점을 보일 경우, 저들은 수없이 왕래하면서 많은 사람을 이미 겪어 보았으므로,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부족할지라도 인물을 품평하여 경중 천심(輕重淺深)을 헤아린 결과는 진실로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환히 드러났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내가 잠시 그들의 죄과를 점검하려 하다가 끝내는 자신의 혐의점이 드러나서 도리어 그들의 점검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슬픈 일이다. 이미 단점을 보인 뒤에는 비록 화를 내서 칼을 뽑아 들고 그를 노려본다 하더라도 그의 털끝 하나도 움직일 수 없고 나의 단점만 더욱 드러나서 가릴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의당 그들의 방종한 행위는 걱정하지 말고 나의 미진한 점만 걱정하여 항상 스스로 자신을 근엄하게 다스리면 그들이 절로 두려워서 복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이미 내가 허물없이 가깝다 해서 잘못을 너그러이 봐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마음속으로 공경하여 복종하는 뜻이 있어 결코 감히 함부로 나를 원망하여 욕하지 못할 것이다. 그 중에 간혹 불량한 자가 있어 근거 없는 말을 지어 냈을 경우에는 저들 사이에 또한 일종의 공론(公論)이 있게 될 것이다.
사명(使命)을 받들고 국경(國境)을 나가는 일은 체통이 가볍지 않은데, 전후의 사신들이 아랫사람들에게만 단점을 보일 뿐 아니라, 천조(天朝)에 모멸(侮蔑)을 받는 경우 또한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는 충분히 우리들의 경계로 삼을 만하다.
장록 선생(張祿先生)이 …… 것처럼 : 장록 선생은 위(魏) 나라 범수(范睢)를 가리키는데, 범수가 일찍이 위 나라 재상 위제(魏齊)에게 매를 맞고 도망쳐서 성명(姓名)을 장록이라 고치고 남몰래 진(秦) 나라에 들어갔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史記 卷79 范睢列傳》
백호(白湖) 윤휴(尹鑴)는 17세기의 천재적인 산림학자(山林學者)요,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였다. 특히 주자성리학이 교조적 권위를 누렸던 조선후기에 경학(經學)에서 독자적인 학문체계를 수립하였고, 이로 인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목되어 정치적, 사상적 숙청을 당하였다는 면에서 일찍부터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백호의 사상은 항상 이단으로 취급되었고, 조선 말까지 신원이 회복되지 못하여 문집조차 출간되지 못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이후 신원(伸寃)과 추증(追贈)이 행해지면서 아들 윤하제(尹夏濟)와 윤경제(尹景濟)가 유고를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남인 정권은 갑술옥사(甲戌獄事)로 곧 끝나고 이후 계속 서인의 집권 하에 있었기 때문에 윤휴는 계속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금고(禁錮) 상태에 있었다. 당시 그의 저작은 금서가 되어 그와 글을 주고받았던 제현들의 문집에도 저자와 관련된 기록은 기휘(忌諱)로 취급받아 빠지거나 따로 편차되곤 하였으므로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그의 문집이 간행되기 어려웠다. 결국 조선이 망한 뒤인 1926년 경에야 8대손 윤신환(尹臣煥)이 영남 유림의 협조를 얻어 30권 18책의 백호집을 진주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목활자로 간행하였다
백호 윤휴는 1617년(광해군9)에 태어나 1680년(숙종6)에 64세의 나이로 사사(賜死)되었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자는 희중(希仲)이고 또 다른 호는 하헌(夏軒)이며, 초명은 윤정(尹鍞)이다. 10월 14일 경주 부윤이었던 부친의 임소에서 태어났는데, 그 날 마침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방문하여 아명을 두괴(斗魁)라고 붙여주었다. 윤휴의 고조 윤관(尹寬)은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사사하였고, 증조 윤호(尹虎)와 조부 윤희손(尹喜孫)은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부친 윤효전은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인 민순(閔純)에게 수학하고, 광해군 5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참여한 공으로 익사 공신(翼社功臣) 2등에 책록된 후 대사헌, 의금부 지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한 소북계 관료이다. 그러나 백호가 2세 되던 해 부친을 잃었고 광해조 이후 북인 계열은 정계에서 축출된 데다 일가도 거의 없었으므로 집안의 영향을 많이 받지는 않은 듯하다. 어린 시절에는 보은(報恩) 삼산(三山)의 외가에서 지내면서 외조부 김덕민에게 글을 배웠는데, 김덕민은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제자였다. 이후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인 동주(東洲) 이민구(李民求)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청년이 된 후 외조모의 동생인 오윤겸(吳允謙)과 선친의 교우인 이원익(李元翼)을 찾아뵙기는 하였으나 실질적인 사승관계를 맺었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그의 학문은 거의 독학으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13세에 부친의 무고를 상언하여 관작을 회복케 하고, 17세 때 관례와 19세 때 혼례도 모두 스스로 예경을 고증하여 고례를 행하였다. 20세에 구언교지에 따라 만언소를 작성하는 조숙함에서도 그의 학문적 성취를 확인할 수 있다.
인조 15년(1637) 남한산성의 치욕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으며, 22세에 공주 유천(柳川)으로 이사하였다. 이즈음 당대의 명유들과 당색을 초월한 교분을 맺었는데, 허목(許穆)ㆍ권시(權諰)ㆍ권준(權儁) 등 남인뿐만 아니라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ㆍ윤선거(尹宣擧)ㆍ이유태(李惟泰)ㆍ유계(兪啓) 등 쟁쟁한 서인들과도 교유하였다. 이 시기는 송시열이 윤휴와 3일간 논학(論學) 끝에 자신의 30년 독서가 가소롭다고 자탄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괄목할 만한 학문적 성장을 이루던 시기이다. 유천에서의 7년 동안 사단칠정인심도심설과 독서기 중 홍범설ㆍ주례설ㆍ중용설 등 주요 작품을 저술하였다.
그 후 28세에 여주 백호로 옮겨 46세 서울 쌍계동 하헌(夏軒)으로 옮길 때까지 18년 동안 여주에 은거하며 독서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저술을 이 때 이루었는데, 학행으로 추천을 받아 효종 연간에 여러 번 부름을 받았다. 후에 윤휴를 공격하는 대 앞장 섰던 민정중(閔鼎重) 형제들도 당시는 백호 곁으로 이사와 수학할 정도로 추종하였다. 이 시기 윤휴에게 주목할 점은, 중용설ㆍ예설과 관련하여 송시열 등 서인과 결별하고 남인의 학문적 이론가로 정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송시열과의 결별은, 1653년 황산서원(黃山書院)의 모임에서 저자의 중용설이 주자의 장구를 무시했다는 것을 계기로 사문난적이라 지목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인인 심지원(沈之源)과 안방준(安邦俊)이 저자를 품행과 도의가 탁월한 인물로 평가하였고 송시열 자신도 이조 판서로 있으면서 여론에 밀려 정4품의 시강원 진선에 의망하였던 것을 보면 윤휴에 대한 반감이 서인의 공론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윤휴 자신이 밝힌 바와 같이 민정중 등 서인이 윤휴를 적대시 한 것은 기해년(1659) 자인대비(慈仁大妣)의 복제 문제에서였다. 서인은 기년복(朞年服)을 당론으로 정하였는데 윤휴가 이에 반하여 삼년설을 제기하고 남인인 허목ㆍ윤선도(尹善道) 등이 이를 지지하면서 남인이 서인을 공격하는 이론적 기반을 제시해 준 격이 되었다. 예론이 당쟁으로 비화되면서 민정중, 박세채(朴世采), 황세정(黃世楨), 송규정(宋奎禎) 등이 절교를 고하였는데, 이유(李𣞗)와 장선충(張善沖)만이 변치 않았다고 한다. 결국 소북계 집안의 학자로 서인들과 밀접한 교류를 맺어 왔던 저자가 송시열의 개인적 판단에서 사문난적이라는 지목을 받았는데, 이러한 시각이 복제 논쟁을 거치면서 서인들 사이에 확산되고 남인 정권에 의해 정계에 진출한 이후로 재고의 여지 없이 고착되어 학문적 파문을 당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경학에 대한 꾸준한 연구를 계속해서 효경장구고이와 대학설, 중용장구보록서 등을 저술하였다.
48세 경 잠시 여주에 내려가 있다가 52세 경에 다시 서울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669년 윤선거의 상에 조문하고 백호로 돌아가 거하였다. 54세에 주자의 사창법(社倉法)을 모방하여 이사법(里社法)을 제정하고 향약을 강론하였으며, 55세에 중용대학후설, 대학고본별록을, 56세에 칠십노이전설(七十老而傳說), 인심안불안설(人心安不安說) 등을 지었는데, 이즈음 민신(閔愼) 집안의 상례 문제로 인해 다시 송시열과 대립하였다. 현종 15년(1674)에 청나라에서 삼번(三藩)의 난이 일어나자 대의소(大義疏)를 올려 북벌의 의리를 논하였는데, 현종이 상소를 유중(留中)한 채로 곧 사망하자 숙종이 즉위한 뒤 다시 밀봉한 책자와 상소를 올렸다. 당시 조정에서 북벌은 이미 비현실성이 입증된 논의로 다만 인조 반정과 서인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내세우는 명분일 뿐이었다. 또 숙종 초년은 서인이 복제 문제의 추궁을 받아 퇴진하고 남인 정권이 막 들어서던 때였으므로 북벌은 더더욱 조정의 관심 사안이 아니었고, 명민한 숙종도 청과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킬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런 정국 하에서 윤휴는 북벌 대의의 실현을 명분으로 남인 정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숙종 1년(1675) 59세의 나이로 조정에 나온 윤휴는 사업(司業)으로부터 시작하여 동부승지, 이조 참의, 한성 우윤, 대사헌, 성균관 좨주, 이조 참판, 이조 판서, 도총주 총관, 우참찬, 좌참찬, 공조 판서, 형조 판서, 우찬성을 역임하였는데 높아지는 관직과는 달리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현실적인 벽이 너무 두터웠다. 출사하던 해 3월에 복창군(福昌君) 사건을 계기로 자전을 단속하기를 청하는 자전조관(慈殿照管)의 발언이 있었다. 이는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明聖王后)가 서인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이었으므로, 모후를 통해 서인 외척 세력이 간여하는 것을 방지하고 독립적인 왕권을 확보하고자 해서였다. 그러나 후에 이 발언은 서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신모설(臣母說)까지 확대 해석되어 남인의 실각 후 윤휴에 대한 결정적인 죄안이 된다. 또 북벌을 시무(時務)로 삼은 윤휴는 대외적 정책으로 청과의 화친을 끊고 대만의 반청 세력인 정성공(鄭成功)과 교통하고 일본과도 긴밀히 협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아울러 조정의 굴욕적인 대청 외교 자세를 비난하며 숙종에게도 청의 사신을 영칙(迎勅)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국내적 정책으로는 사대부들의 군사 훈련을 위한 총부랑(摠府郞)의 설치, 무관 충원을 위한 만인과(萬人科)의 시행, 군비 강화를 위한 병거(兵車) 제작등을 모두 의욕적으로 제안하고 추진하였으나 남인과 숙종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우활하다는 비난만 듣게 되었다. 결국 병거의 제작도 시늉에 그치고 오가작통법의 시행과 지패법(紙牌法)의 정비, 호포제를 비롯한 세제의 개편 등 국정 전반에 걸친 개혁책도 번번이 시행되지 못한 채 당쟁으로 탄핵만 비등하자 윤휴는 출사 기간 동안 사직을 반복하게 된다.
숙종 5년(1679) 공고직장도설을 올렸다. 여기에 담긴 주된 사상은, 국왕을 지존의 권력을 지닌 존재로 인정하고 그 권한을 왕이 독자적으로 행사해야 하며 여기에는 현명한 재상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는 삼대 이상정치구현을 목표로 한 제왕학이었다. 왕권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는 국왕관은 당시 서인이나 남인과 구별되는 사상인데 참최삼년설의 예론과 자성조관의 논리도 이런 관점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더 나아가 과거제도와 폐쇄적인 간관제도를 혁파하여 삼대와 같은 체제를 조선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윤휴의 사상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을 중심으로 한 신권중심의 정국운영방식에 대한 도전이었기 때문에 서인들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같은 해 2월 대사헌에 제수된 뒤 소나무를 남벌하여 사제(私第)를 지었다는 남구만의 탄핵을 받고 대죄하였다. 곧이어 이환(李煥)의 익명서 사건이 터지자 비밀 차자를 올려 궁궐의 호위와 병권을 담당한 인사를 바꾸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것을 청하고 또 체부(體府)의 부설을 청하였다. 당시 남인은 허적의 탁남(濁南)과 허목의 청남(淸南)으로 분열되었는데, 허목이 곧 허적과 그의 서자 허견(許堅)에 대한 탄핵소를 올리고 조정을 떠나자 각파의 유생들이 서로 굥격하고 신구하는 상소를 올려 숙종의 분노를 사고 있었다. 윤휴는 양쪽을 화해시키지 못한 채 여역(厲疫)에 걸려 오랫동안 투병 중이었는데 그러던 중 김석주(金錫胄)와 김익희(金益熙) 등 서인은 허견과 복창군의 역모를 고변하여 숙종 6년(1680)에 이른바 경신환국이 일어났다. 이에 윤휴를 하옥하고 심문하였는데 그 죄목은 자성조관이라는 발언, 체부의 설치로 병견을 차지하려는 음모, 복창군 형제와의 교분 등이었다. 여기에 이환의 익명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비밀 차자를 올린 것이 바로 서인을 제거하고 병권을 쥐려는 계책이었다는 죄가 덧붙여져, 5월 20일 도성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사사된 뒤 특별히 영의정에 추증되고 아들을 녹용하라는 명이 있었으며, 17년 윤휴의 묘지를 이장할 때 물품과 역군을 지급해 주었다. 그러나 20년(1694) 갑술옥사 이후 남인이 물러나고 소론이 등용되자 다시 관직을 추탈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그 뒤로는 신원 회복의 움직임이 없었다. 윤휴에 대한 공식적은 재평가는 조선이 끝날 때까지 다시는 고려되지 않았다. 탕평책이 시행된 영ㆍ정조 때도 허적의 복직은 의논되었으나 윤휴는 여전히 정인홍, 이이첨, 민암(閔黯) 등과 동급의 역적이자 성현인 주자와 선정 송시열을 헐뜯은 사문의 난적이었다. 인조반정 때 서인의 정권과 연대하였으나 뚜렷한 정체성 없이 소외되었던 남인은, 경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독자적인 해석 체계를 지닌 윤휴를 통해 그 이론적 기반을 다지고 서인과 학문적 경계를 분명히 하면서 자신만의 색깔을 지니게 되었다. 윤휴의 이와 같은 역할을 가장 먼저 알아본 이가 바로 송시열이었기에 그토록 경계하였으며, 그 때문에 끝까지 서인들이 인정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백호전서 제2권 / 시(詩)○오언절구(五言絶句)
문천상이 쓴 집두시를 보다가 감회가 일어 그 운대로 읊다[閱文山集杜詩感懷步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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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만리 뻗은 산하에 / 一萬里山河
기자의 유업 이어오는 곳 / 續箕聖舊業
원대한 계획 세운 자 누구였던가 / 訏謨者誰子
매서운 북풍이 낙엽을 쓸고 있네 / 朔風掃秋葉
이상은 산하[右山河]
난리를 평정하고 중흥 꾀하던 날 / 撥亂中興日
의기로운 말 자리에 넘치더니 / 談義溢芳茵
결국 건진 것 백에서 열이라 / 終然十濟城
눈물 흘러 옷과 수건 적신다네 / 有淚沾衣巾
이상은 중흥[右中興]
국가 안위는 대신들 책임이지 / 安危大臣在
극도의 주장 누구라 할 것인가 / 論議將誰極
화의도 아니요 또 전쟁도 아니게 / 非和亦非戰
신자 책임을 영원히 저버렸다네 / 永負臣子責
이상은 대신[右大臣]
준비한 도롱이도 삿갓도 없는데 / 恨無簑笠備
천지 가득히 천둥 일고 비 쏟아져 / 雷雨盈天地
성이 드디어 무너지고 말았으니 / 齊城遂不閉
한숨 쉬고 다시 흐느낄 수밖에 / 太息復歔欷
이상은 흐느낌[右歔欷]
조정에서 대장에게 맡겼으면 / 朝廷任大將
정예부대가 적진 향해 가얄 텐데 / 精甲赴西城
오랑캐 쳐들어오자 휘파람만 불고 있어 / 胡來但長嘯
동산에 깃발이 널리게 하다니 / 東山旌旆橫
이상은 대장[右大將]
불쌍도 하지 금산 전쟁에 / 哀哉金山戰
백만 생명이 귀신이 되었는데 / 百萬化爲鬼
한 번 죽어 나라 저버리지 않고 / 一死不負國
시체로 돌아온 것 눈물 날 일이지 / 輿尸堪流涕
이상은 금산싸움[右金山戰]
높은 관 쓴 유 절도사가 / 嵬冠柳節度
산 북쪽을 먼저 점거했는데 / 先據山之北
전쟁 끝나자 공로는 높았지만 / 戰罷功自高
하늘 끝에 시름에 찬 구름 덮여 있었다네 / 天外愁雲黑
이상은 유 절도[右柳節度]
갑옷 벗어던지고 조정으로 달려와 / 捲甲赴朝廷
눈물 뿌리며 슬픈 호소 해보았지만 / 雪涕風悲號
교졸들이 말을 듣지 않아 / 驕卒不用命
법을 못 지키고 한만 넘쳤다네 / 失法恨滔滔
이상은 교졸[右驕卒]
만산 속에 깃발을 휘날리며 / 揚旗萬山中
다급하게 응원 가는 것 양책 아니라네 / 赴急非良策
북문을 누가 굳게 지킬 것인가 / 北門誰鎖鑰
성이 높대야 자연의 벽일 뿐인데 / 城峻徒天壁
이상은 만산[右萬山]
말을 몰아 몇천 리를 왔어도 / 驅馳數千里
비바람 한 번 만나지 않았다네 / 不與風雨會
끝까지 밀고만 나가면은 / 有終只管行
음양이 하느님 조화도 빼앗는가봐 / 陰陽奪眞宰
이상은 풍우[右風雨]
창해에 둘러싸인 외딴 섬이요 / 別島圍滄海
세모 풍파에 파도도 사나웠지 / 歲暮風濤長
예로부터 지키기 어려운 것은 / 自古難與守
금성 탕지 없어서가 아니었다네 / 未始無金湯
이상은 별도[右別島]
한 잔 마시고 또 한 수 읊고 / 一觴復一詠
세상사 흐르는 물에 비겨야지 / 世事付長流
누가 알았으리 북에서 온 군대가 / 焉知北來軍
파도 잘 타는 규룡으로 변할 줄은 / 化作凌波虯
이상은 북에서 온 군대[右北來軍]
밤중에 들려오는 호가 소리에 / 胡笳中夜發
온 성곽이 비통한 기운에 잠겼지 / 楚氛迷四郭
초야에서 새로 생긴 고관대작들 / 草間公與侯
종놈 아니면 맨발의 천민이라네 / 長鬚與赤脚
이상은 호가[胡笳]
권사성 시 의 운에 맞추어 읊다[步權思誠 諰 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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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가 온갖 것 다 만들어내어 / 天地生萬有
악취 나는 풀도 있고 향초도 섞여 있지 / 雜然蕕與薰
성인도 그 둘 사이에 껴 살지만 / 聖人參兩間
한 그릇에 담겨진 것 아무렇지도 않다네 / 要無同器紛
옳고 그르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 是非愛憎間
왜들 그렇게도 시끄러울까 / 萬物何糾紛
그 중간에 천성을 가진 사람들은 / 中有民秉爲
악취는 싫어하고 향취를 좋아한다네 / 惡蕕而好薰
잘나고 못나고는 하늘에서 타고 난 것 / 善醜本諸天
시비를 가리는 건 내 맘으로 하는 게고 / 是非存吾胷
거기에서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 得失在此際
자칫하면 불길한 결과 오느니 / 否悔且吝凶
남이 비록 나를 헐뜯더라도 / 人雖毁詈我
나는 남을 원오하지 말아야지 / 我無怨惡人
오직 자신이 덕을 공경하는 것 / 惟皇自敬德
그를 일러 자기 반성이라고 하지 / 是之謂反身
기묘년 여름에 달을 보고[歲己卯夏見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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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맑은 달이 동천에 솟으니 / 蒼蒼月東出
질펀한 구름떼가 하얗게 변하네 / 浩浩浮雲白
흥망이 미리 정해진 게 아니거니 / 興亡未前定
하늘 뜻을 어떻게 헤아릴 것인가 / 天意安可測
옛날에 큰 걱정거리가 생겨 / 殷憂昔方興
우리 님도 분발하기로 했다네 / 我后思奮發
하늘이 이미 위엄을 보였으며 / 皇天已動威
백성들도 잘못을 알고 있다네 / 黎庶知闕失
치란의 원인을 깊이 생각하느라 / 深惟理亂源
유일들 꿈속에서도 고되다네 / 夢想勞遺逸
위태로움 넘길 대책이야 왜 없겠는가 / 安危豈無策
준걸한 인물이래야 시무를 아는게지 / 識時在俊傑
내 비록 가생의 재주는 아니로되 / 顧非賈生才
왕도정치에 느낀 바는 있어 / 感慨皇王道
잊을래야 못 잊고 마음은 불타지만 / 耿耿寸心赤
나가고 못 나가는 것 천수임을 어쩌리 / 出處惟天數
옛날 그 많은 선유들 생각하며 / 懷思列仙儒
돌아가 내 할 일이나 해야지 / 歸歟憮予玦
해와 달이 밀고 당기길 좋아하여 / 陰陽好推盪
꽃다운 나이는 금방새 지나가고 / 芳歲奄超忽
무서운 바람이 서북쪽에서 일어나 / 驚風西北起
참담하게도 서울을 휩쓸었다네 / 慘惔迷京闕
취화로 전쟁 먼지 잠재우려고 / 翠華捲飛塵
군대를 동원하자고 다급한 정책 세웠으나 / 犒師廟謨急
천연의 요충지가 이미 무너졌거니 / 長淮失天塹
누가 북문을 굳게 지킬 것인가 / 北門誰鎖鑰
한숨을 내쉬고 또 통곡을 하지만 / 太息復痛哭
나라 안정시킬 인재 정녕 없는 것일까 / 理亂寧匪人
군대 쓸 줄을 아는 여진족들 / 女眞誠知兵
다 망한 나라 다시 찾아주었던 중국도 / 再造功惟新
이젠 버려두고 다시 거들떠보지 않아 / 棄捐勿復陳
생각 없는 그 처사 전할 수 없는 일이지 / 浩蕩不可傳
산과 물 일천 리나 뻗어 있고 / 山河一千里
삼백 년 예악의 나라 아니던가 / 禮樂三百年
대동강 물줄기 서로 흐르고 / 浿河水西趨
숭명산 하늘 높이 치솟았는데 / 嵩明山極天
북극성 같이 기대했던 처량한 그 눈물 / 凄凉拱北淚
탄탄대로 두고 마음이 슬프다네 / 周道中心怛
인심이야 당연히 그렇다 치더라도 / 人心固如此
천도마저 그렇게 정도를 외면할까 / 天道猶蕩軼
성인 철인이 손을 못 쓸 바에야 / 聖哲時拱手
속세를 떠난 선비 할 일이 뭐라던가 / 逸士將何爲
세상과 동떨어진 창주를 찾아 / 滄洲去世外
책이나 들고 와서 사노라네 / 黃卷來棲遲
양양한 옛 성현의 마음 읽고 / 洋洋古聖心
지난 흥망의 역사나 보면서 / 粲粲興亡事
안씨의 가난함도 마다하지 않고 / 不辭顔氏貧
원헌의 부끄러움 하지도 않는다네 / 無爲原憲恥
장부라면 거취를 분명히 해야지 / 丈夫重去就
천하 다스리는 근본도 자기에게 있는 것 / 兼善本在己
산버들 있는 북산에 와서 / 且來北山杞
성현의 뒤를 따르기에 노력하리 / 努力追前軌
가생(賈生) : 한(漢)의 가의(賈誼)를 말함. 그는 문제(文帝)에게 당시 정치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국가 정책을 근본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유명한 상소를 올렸음. 《漢書 卷48》
취화(翠華) : 물총새 깃으로 장식한 천자(天子)의 기.
원헌의 부끄러움 : 공자 제자인 원헌(原憲)이 부끄러움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씀하기를,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 녹만 먹으며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 녹만 먹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니라.” 하였음. 《論語 憲問》
경진년 늦봄에 들은 것을 적다[庚辰季春記聞] 2수. 한강물이 붉어져서 삼공(三公)이 사퇴를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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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사십년에 / 東周四十年
공자가 춘추를 썼는데 / 仲尼成春秋
걱정에 싸인 군자의 그 마음 / 戚戚君子意
무엇을 바라고 그리 못 잊어했던가 / 睠睠何所求
하늘은 뭇백성을 사랑하기에 / 皇天固仁愛
경종을 울리는 것 빈말이 아니라네 / 警動非虛語
말하자면 부모의 마음과 같아서 / 比如父母心
차라리 호되게 꾸짖고 화도 내시지 / 譴責寧深怒
초 소왕은 진정 말할 줄 아는 사람 / 楚昭誠知言
동생도 긴 원려를 했던 게지 / 董生深長慮
주공이 왜 나를 속였으리 / 周公豈欺我
세 번 탄식하며 오직 그 교훈 생각한다네 / 三歎惟厥顧
질탕한 대궐문 높기만 하고 / 跌盪閶闔高
깊숙한 낭묘는 깊기만 하여 / 潭潭廊廟深
너무나 형식에만 얽매여 있는데 / 遜美迨虛文
격려해주시는 것 그래도 하늘이지 / 激厲猶天心
하늘이 감동하는 건 지성뿐이고 / 惟天動至誠
고명한 현자라야 시무를 아는 게지 / 識時須高賢
천하가 한 번 바뀌고 나면 / 一成夏天下
나라 안 백성도 우리 백성 아닌 것 / 環海匪吾民
이제야 알겠네 우리 선왕들께서 / 方知我先王
하늘 오르내리시며 권면의 뜻 보인 것을 / 陟降惟時勸
기회는 두 번 오지 않는 것이며 / 時乎不再來
귀신은 장난의 대상 아니라네 / 鬼神不可玩
옛 전설을 들어보지 않았던가 / 不聞古傳說
안정과 패망이 원인이 다 있는 것이라고 / 定傾非偶然
오사로써 뭇사람들 의견을 모으고 / 五事集群謀
삼책 결행 않고 시간만 끌면 안 되지 / 三策懼時遷
아아, 몇몇 위정자들이여 / 嗟嗟二三子
겸손한 체 서로들 끌지만 말고 / 且莫崇謙引
부디 적개심 불태우라는 뜻으로 / 請以吳越志
우리 임금께 되풀이해 말하게나 / 反復吾君前
님의 마음을 내가 읽어보면 / 君心我見之
눈물을 흘리며 부끄러워하고 있는데 / 涕出存深恥
부끄러워할진대 문왕을 본받으라는 / 恥之師文王
맹자의 교훈을 되새겨보시구려 / 考彼鄒孟氏
환하게 밝은 마음 가지시고 / 皇皇簡帝衷
백성을 자애롭게 인으로 감싸야지 / 勿勿民懷仁
백이 숙제라고 왜 세상 험하게만 보았던가 / 夷齊豈迍世
종려도 꽤나 남다른 신하들이었지 / 種蠡殆偏臣
대의명분은 그만 접어두고라도 / 大義且莫說
깊은 사랑이라면 죽음으로 보답하는 것 / 深仁唯一死
그 당시 부모님 은공으로 말하면 / 當年父母恩
지금까지도 하늘땅 같지 않은가 / 至今猶天地
백성에게 하기 따라 길흉은 달라지는 것 / 吉凶矧民事
백성을 해치면서 때를 기다린대서야 / 殘賊竢天時
아침이면 실망에 찬 탄식을 하고 / 憮然臨朝嘆
밤중이면 깊은 상념에 잠긴다네 / 尙紆中夜思
산하의 기운은 호호탕탕인데 / 山河氣浩蕩
연기 안개가 왜 이리 희미꾸레할까 / 煙霧蒼茫然
가슴을 만지며 뜰에 홀로 섰노라니 / 撫襟獨中庭
초생달이 떠올라 맴돌고 있네 / 初月來周旋
초 소왕(楚昭王) : 초나라 소왕이 군중(軍中)에서 병이 들었는데 그때 새처럼 생긴 붉은 구름이 태양을 끼고 나는 시늉을 하여 왕이 태사(太史)를 불러 물었더니 태사 말이, 이는 초나라 왕에게 불리한 징조인데 그 불길을 장상(將相)에게로 떠넘길 수는 있다고 하자 소왕은 말하기를, “장수와 재상이라면 바로 나의 팔다리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일인가.” 하고 듣지 않았고, 또 점을 쳤을 때 황하(黃河)가 병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점괘가 나와 대부(大夫)가 빌 것을 청하자 소왕은 또 말하기를, “우리는 선왕(先王) 때부터 강수(江水)ㆍ한수(漢水)만이 우리 국경 안에 있어 망제(望祭)를 지내왔을 뿐이므로 국경 밖에 있는 황하가 병의 빌미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고 역시 듣지 않자 공자(孔子)가 그 말을 전해듣고는, 초 소왕은 대도(大道)를 통한 사람이라고 격찬을 하였다.
《史記 楚世家》
동생도 긴 원려 : 동생(董生)은 한(漢)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 동중서가 재이지기(災異之記)를 써서 사람의 잘못이 결국 천재지변을 부른다는 경고의 뜻을 담았는데, 그 속에 풍자가 들어 있다 하여 천자(天子)로부터 죄를 받고 그후로는 끝내 재이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함. 《史記 儒林列傳》
오사(五事) :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 의견을 묻는다는 뜻으로 자ㆍ추ㆍ모ㆍ탁ㆍ순(咨諏謀度詢)을 말함. 《詩經 小雅 皇皇者華》
삼책(三策) : 세 가지 계책. 원래는 소진(蘇秦)이 조왕(趙王)을 유세하면서 쓴 말이었으나 여기서는 국가의 긴요한 정책을 들어 그렇게 표현한 것임.
종려(種蠡) : 춘추 시대 월(越)의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 월나라 왕 구천(句踐)을 도와 오(吳)를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들임.
천둥소리를 들으며[聞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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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하추동 사시가 번갈아 오가면서 / 四時迭起伏
거창하게 고금이 만들어진 것이지 / 軼蕩成今古
회오리바람 세차게 불면서 / 回風一以厲
한 해도 점점 저물어가고 있으면 / 歲晏孤光暮
아차 아차 지나간 날들이 아깝고 / 嗟嗟惜往日
답답하게 앞길을 생각하게 된다네 / 鬱鬱懷前途
조용히 사물의 변화를 느끼면서 / 沈吟感物化
홀로 일어나 하늘을 보았더니 / 獨起看天宇
먹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고 / 陰雲集四郊
매서운 바람이 비를 몰아치다가 / 慘憺風從雨
천둥 번개가 갑자기 일어나며 / 雷電忽交至
우글퉁탕 하늘이 화내셨네 / 震盪惟天怒
맹동이라 시월이 되면 / 孟冬十月中
전부가 음의기운이요 천지도 비색하여 / 重陰天地否
대다수의 것들은 거둬들이고 / 庶類固以藏
모든 동물도 다 하는 일 없다네 / 群動咸無爲
옛날 전설을 들어보아도 / 聞之古傳說
양이 나타나는 때가 아니랬는데 / 陽出非其時
때 아니게 서리 나타나고 있으니 / 非時出不常
이상하지 그 무슨 징조란 말인가 / 異哉玆何祥
공을 위해서나 사를 위해서나 / 爲公與爲私
하늘의 뜻은 기미가 없는 것 / 玄意無幾微
영원히 님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 永懷美人志
두려움에 싸여 밤중만 생각하니 / 怵惕中夜思
백성들은 중국(대막)을 못 잊고 있건만 / 民心思大漠
옥백은 힘센 오랑캐 쪽으로 가고 있어 / 玉帛趨强秦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세상사 / 悠悠世間事
말도 못하게 호호망망할 뿐이라네 / 浩浩不可陳
성인은 조물주의 조화를 본받아 / 聖人體元化
이변에 대해 대처할 교훈을 남겼고 / 興變垂訓彝
또 그대로 본받고 따라 / 亦有觀法象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 이도 있지 / 非禮斯不履
하늘 마음은 만물에 차별이 없어 / 天心普萬物
군자라면 조심하고 무서워하지 / 君子存欽畏
마치 부모를 대하는 모습같이 / 比諸父母容
부드러우면서도 조심성 있게 / 愉戚增夔齊
더구나 날로 그 길을 가고 보면 / 洋洋矧日迪
자신을 이기는 길도 그 길인 것을 / 自勝良在玆
어찌 목소리 얼굴빛을 무시해버리고 / 寧知泯聲色
발끈 화를 내서야 될 일인가 / 爀爀章明威
삼가 생각하면 순 임금께서는 / 恭惟帝舜氏
어느 때 어느 일 하나 조심하지 않은 게 없었기에 / 翼翼惟時幾
칙명에 대해서도 두 마음이 없었으며 / 勅命其無貳
매서운 바람에도 혼미하지 않았었지 / 風烈斯不迷
옥백(玉帛) : 옛날 제후(諸侯)들이 회맹(會盟)이나 조빙(朝聘) 때 사용하던 예물.
병술(丙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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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역시 삼십이 되었건만 / 吾年亦三十
그러나 입지는 언제나 될 것인지 / 而立將何有
거센 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쳐 / 高風忽以至
뜰에 나무들이 쉬쉬하고 울기에 / 庭木鳴颼颼
별들이 이동하는 모습을 쳐다보고 / 仰觀箕斗移
흐르는 강물도 내려다보았더니 / 俯視河漢流
호호탕탕한 대기 속에 / 一氣自浩蕩
천지조화가 잠시도 정지하는 법 없더라 / 萬化無停輈
젊은 시절도 날으는 새와 같아 / 芳時疾如羽
한 번 가서 다시 오지 못하는데 / 零落不可收
공부를 한다면서 노력을 아니하여 / 學道苦不力
언제나 부끄럽고 걱정도 한다네 / 每懷慚與憂
걱정을 한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 憂之復奈何
옛분을 생각해야 마음 여유가 생기지 / 懷古心悠哉
주공의 덕은 너무나도 훌륭했으나 / 叔朝至盛德
밤이 깊도록 생각에 잠겼었고 / 中夜仰以思
공자 역시 하늘이 내신 분이지만 / 仲尼亦天縱
침식도 잊고 발분했다지 않은가 / 發憤忘寢食
들밭에 무성하게 우거진 콩은 / 芃芃中原菽
하늘이 내린 비와 이슬 덕이지만 / 雨露荷天功
그 속의 잡초를 면밀히 가려내어 / 愼辨稂與莠
심은 곡식 아닌 것은 다 뽑아 없애야지 / 鉏去非其種
부지런히 가꾸고 북을 주고 하면 / 但能勤蔍蔉
결국은 자라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 何憂終不長
부와 귀는 나에게 없는 것이요 / 貴富我無之
내 원래 가진 것은 빈천이기에 / 貧賤吾素有
그 때문에 얻고 잃은 것 없고 / 以是無得喪
또 좋을 것도 걱정될 것도 없다네 / 仍無喜與憂
백권도 넘게 가지고 있는 서적 / 有書百餘卷
그 속에는 무한한 뜻이 있고 / 中有無盡意
받은 전답도 십수묘나 되어 / 爰田十數畝
잘만 지으면 굶주릴 까닭 없지 / 疾作無饑歲
내 집 뒤에는 청산이 있고 / 我家負靑山
문앞에는 여강이 흐르고 있어 / 驪水門前流
산에 올라 구기자 국화도 따고 / 上山采杞菊
물에서는 잉어 쏘가리도 낚으며 / 釣水鯉鱖富
가을이 오면 벼가 누렇게 익어 / 秋來萬禾黃
꼬마 종놈도 다 희색이라네 / 僮僕皆色喜
처음에 익은 가장 좋은 쌀로 / 初登最碩苗
단술 빚고 술도 밥도 만들면 / 爲醴復爲饎
밥도 술도 구수하고 향기롭다네 / 饎香酒濃郁
우리 조상께 그 음식 먼저 올리고 / 先薦我祖考
물려내와 부모님 봉양하면 / 退來奉高堂
어린 자식들도 모두가 기뻐한다네 / 稚子競懽敖
밥상 위의 따끈따끈한 저녁밥에 / 蒸蒸盤中飡
생선이랑 미나리랑 곁들여 놓으면 / 雜之鮮與蘄
그렇게 좋고 즐거울 수가 없고 / 甚大爲善樂
지극히 아름답기 숙속 맛이라네 / 至美菽粟味
부인은 그래도 부족할까 봐서 / 夫人苦不足
이러나 저러나 늘 근심 걱정이지만 / 得失皆憂愁
기껏 산대야 백년 동안에 / 遑遑百年內
그리 걱정한들 뭣을 더 바랄 것인가 / 恤恤終何求
여산은 어찌 저리 푸르르며 / 驪山何蒼蒼
여수는 넓고도 양양한데 / 驪水浩洋洋
사계절 따라서 변하는 대기 속에 / 一氣變四時
삼라만상 어찌 그리 각양각색일까 / 萬象何參差
그 모두를 호정에 앉아 보면서 / 納之戶庭際
우리 어버이와 함께 즐긴다네 / 吾與親共之
고인들 했던 말 읽을 때마다 / 每讀古人言
내 가슴 속엔 생각이 일지만 / 起予胸中思
만족을 아는 길이 우리 길일진대 / 我道固知足
이 즐거움 잊지 말도록 해야지 / 此樂要無忘
하늘은 나에게 후하게 해주시는데 / 天心餉我厚
그 덕을 못 지켜 그게 부끄럽다네 / 愧靡德自將
앞으로 너무 편안하게만 말고 / 無將太康好
태만을 두려워할 생각 꼭 해야지 / 職思懼怠慢
옳은일 하는 게 시서 읽은 보람이지만 / 詩書貴行義
가책 없이 살기란 참으로 어려운 것 / 不疚良獨難
아침 나들이[朝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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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성 동쪽 문을 나서 / 朝出城東門
평구역에서 말에 꼴을 먹였네 / 秣馬平丘驛
역관은 거의가 허물어졌는데 / 驛館旣頹落
안장 내려놓고 높은 언덕에 앉아 / 解鞍高阜息
서로 흐르는 한강수 보니 / 西臨漢水流
새하얀 봄빛이 호호탕탕하고 / 浩蕩春光白
북으로 고개 돌려 종남산을 보니 / 北顧終南山
아득히 아지랑이 속에 묻혀 있네 / 蒼茫擁煙霧
유다른 저 산 저 물은 / 異哉山河氣
바람 구름 비를 냈다 들였다 하는데 / 吐納風雲雨
그 사이에 살고 있는 저 많은 집들 / 中間百萬家
밤낮없이 수레와 말들 북적대고 / 日夕輪蹄擊
하늘이 후끈하게 부귀 누리는 사람들 / 熏天起富貴
그리고 저 빽빽한 고루거각들 / 撲地連甍桷
공후라 하여 의기 저리 양양하고 / 公侯足意氣
모양내고 즐기는 족속들 많겠지 / 游冶多容色
개중에 현자와 호걸도 있으련만 / 固有賢與豪
서로 만나도 서로 모름을 어쩌랴 / 相逢不相識
월계를 지나다[過月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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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 또 가고 월계에 이르자 / 行行到月磎
길 험하다 마부가 겁을 먹네 / 僕夫愁畏途
돌다리는 예부터도 어려운 길 / 棧磴自古難
내 말까지 병들지 않았던가 / 我馬且旣瘏
지난 해에 수해가 또 크게 나서 / 前年大水敗
더구나 옛길만도 못하다네 / 况復非昔時
뜻밖에 나 있는 길 하나가 / 俄然一條路
쪽 고르고 평탄하기만 한데 / 坦蕩平夷夷
위로는 새도 짐승도 오를 수 없고 / 上躋絶飛走
내려다보면 밑도 없는 연못이라 / 下臨無底淵
아무리 조마조마하긴 하지만 / 雖然有怵惕
끝내 넘어져 뒹굴진 않는다네 / 終亦無顚連
누가 그렇게 하는가고 물었더니 / 問誰能爲此
저기 사는 김 거사가 그렇다네 / 云彼金居士
그 거사 무엇하는 사람이던가 / 居士何爲者
원래는 석가여래 제자였는데 / 本業瞿曇氏
중원의 쇠붙이를 다 불려서 / 鼓鑄中原鐵
녹로에 올려놓고 큰 그릇 만들려다가 / 大施陶鈞化
양산이 갑자기 다 부숴버리고 / 楊山忽破碎
모두 죽이는 위험을 겪고서는 / 危險盡誅剮
앞길 막아선 높다란 바위 앞에 / 巖巖當路石
천 길이나 되게 머리 꺾고 말았다네 / 折首千丈下
이때가 무자년 겨울이었는데 세상 돌아가는 꼴이 이미 극에 달했음을 알고 감회가 일어 이렇게 말한 것임.
그리고는 고집불통 외곬이 되어 / 乃至硜硜類
다시는 수레도 말도 타지 않고 / 不復妨輿馬
백성들을 평탄한 길로 인도하는 / 厝民坦途上
남이 아는 정직한 사람이라네 / 正直人所視
이렇게 해서 착한 인연 쌓으면 / 以是求善因
부처님 자비도 내리시겠지 / 足見慈悲施
필부라도 중생 구제 마음 가지면 / 匹夫懷濟物
서민에게 이익이 돌아갈 것이며 / 利益及齊民
서민이 그 덕에 착한 일 하게 되면 / 齊民得一善
죄 주고 복 주는 건 하늘이 하신다네 / 罪福要諸天
제일로 부끄럽긴 이 세상 선비들이 / 常愧天下士
머리가 하얗도록 공부라고 하고서 / 白首攻文字
출세를 한다해도 남 도움 못 주고 / 縱達靡兼利
아니면 굶어죽게 궁해빠진 것이라네 / 卽窮寒餓死
이 길과 저 길은 하늘과 땅 차이라 / 悠悠此天壤
그래서 우리 길이 갈수록 묵는다네 / 吾道日陵替
파탕리에서 자다[宿波蕩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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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저물어 파탕리에 들렸더니 / 暮投波蕩里
주인이 날 맞아 재워주는데 / 主人延我宿
짧은 옷은 추위를 못 가리고 / 短衣寒不掩
아내 자식 굶주려 몰골 아니네 / 婦子飢無色
그가 한 말 이리 살기 어려운데 / 自言生理艱
흉년이면 과객까지 또 들끓어 / 貧歲復行客
한 해를 날 계책은 전연 없고 / 固無終歲計
겨우 아침저녁 연명이나 한다네 / 且復延朝夕
지난 해는 수해에 한재 겹쳐 / 前年水旱敗
단지 곡식은 벌써 동이 났는데 / 甁粟今已竭
하루라도 죽지를 못해 / 不能一日死
서산에 가 밤도 다 주워먹었다네 / 拾盡西山栗
정부의 조세 독촉 명령 때문에 / 政府催賦令
섶을 쳐서 강물에다 띄우려면 / 伐薪下江水
발이 얼어 몸을 가눌 수 없고 / 足寒體不扶
창자 비어 사지를 쓰기 어렵다네 / 腹空難用肢
애는 보채고 어른들 고민에 싸여 / 兒啼長者惱
자식을 낳은 것이 잘못이란다네 / 只爲生子非
여덟 아홉 집 살던 우리 마을이 / 我里八九家
네댓 집은 이미 도망가고 없다네 / 逃者已四五
보증 선 이웃더러 물어내라지만 / 徒知責鄰保
다른 사람 진 빚을 어쩌란 말인가 / 豈堪他人負
나라에선 조세 감면 해준다 해도 / 國家蠲賦貢
관리들은 갈수록 살만 두툼하고 / 官吏日豪肥
미음 쑤어 먹인다는 소식 들려도 / 雖聞設粥糜
자신의 차례까진 아니 온다네 / 未能身自致
난리를 치르고 난 이후부터 / 自從亂離來
흉년과 재해가 늘 이래 왔고 / 凶害一如是
장마에 가뭄에 바람 서리 우박 등등 / 水旱風霜雹
어찌할 도리가 계속 없었는데 / 無可奈何其
금년에는 특히 크게 죽일 모양이니 / 今年竟大殺
이 아마 하늘의 뜻인 것으로 / 恐是皇天意
말세에 속임수가 너무 심해 / 末俗巧僞甚
모조리 죽이고야 말 모양인가 보라네 / 威怒滅盡已
등불 가까이서 도란도란 얘기 끝에 / 侵燈款款話
이 나그네 딴 걱정이 불쑥 생겨 / 客子憂端抽
밤중에 일어나 침상을 맴돌다가 / 中宵起繞床
문을 나와 하늘의 별을 보았다네 / 出戶看星斗
날 밝으면 계속 길을 가서 / 平明登前途
내 집안 형편이나 살펴보아야지 / 獨去問室家
내가 사 태부가 아닌 바에야 / 顧非謝太傅
창생들에 대해 난들 어찌하리 / 其爾蒼生何
사 태부(謝太傅) : 진(晉)의 사안(謝安)을 말함. 사안이 동산(東山)에 숨어살면서 국가의 부름을 불고했는데 간문제(簡文帝)가 그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말하기를, “사안은 원래 즐거움을 남과 함께 나누는 사람이므로 틀림없이 걱정도 남과 함께 나누지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다.” 하고 불러서 오게 하였음. 《晉書 謝安傳》
안음을 맡아 나가는 윤노직 순거 을 전별하면서[奉別尹魯直 舜擧 出宰安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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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몰라주기에 차라리 못났었고 / 道汚志淳拙
풍진 헤쳐나가자니 그 답답 오죽하리 / 風塵氣鬱律
모군이 격소 받고 좋아했던 것 / 毛君奉檄喜
오로지 어버이 위함 아니었던가 / 知是爲親屈
이레 동안 남산의 안개는 / 南山七日霧
어찌 그리도 문채가 빛나더니 / 文彩何炳蔚
조심스러운 궐리로 통하는 길엔 / 踧踖闕里道
가시나무를 아직도 치지 않았다네 / 荊棘匪剪伐
여산은 왜 그리도 높고 높으며 / 廬山何高高
여수는 왜 그리도 도도히 흐를까 / 廬水何滔滔
태수 수레가 넓은 길에 나서니 / 綏軒出廣路
오마가 나란히 가네그려 / 五馬何儷儷
그대 아마 수레에서 내리는 날 / 想君下車日
맨 먼저 서유의 방을 찾겠지 / 先入徐孺室
내 알기로는 덕이 있는 이는 / 甚知丈人心
백성들 매질은 잘 않는다데 / 黎庶惜鞭撻
정사가 맑아야 백성들이 따르기에 / 民懷在淸靜
솔선수범 그것이 교화로는 제일인데 / 化行自閨闥
그 방법을 안 쓴 지가 이미 오래이니 / 此道久已喪
현자라면 거기 관심 두어야지 / 賢者宜兢慄
내 입과 내 배나 채우자고 / 寧將口腹累
나라 일엔 무관심해 될 일인가 / 未效公私勞
나는 안다네 좋은 목표 달성하고 / 吾知政成後
홀가분한 마음으로 돌아올 것을 / 歸袂風飄飄
모군이 …… 것 : 모군(毛君)은 후한(後漢) 시대의 모의(毛義). 어머니는 늙고 집은 가난했던 모의가 어느 날 뜻밖에 수령(守令)으로 부르는 부(府)의 격소(檄召)를 받고는 희색이 만면하여 그를 본 이들이 모두 그를 천히 여겼었는데, 그후 어머니가 죽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아 사람들이 그때서야 그의 진의를 알고 감탄했다는 것이다. 《後漢書 卷69》
남산의 안개 : 은둔생활을 의미함.
궐리(闕里) : 중국 산동성곡부현(曲阜縣)에 있는 옛날 공자(孔子)가 살던 마을.
서유(徐孺) : 후한(後漢)의 서치(徐穉), 자는 유자(孺子). 태수 진번(陳蕃)이 원래 손님 접대를 않는데 서치만은 찾아오면 특별히 자리 하나를 깔고 대접하다가 그가 가면 곧 그 자리를 걷어 다시 매달아 두었다는 것이다. 《後漢書 高士傳》
경세서를 읽고 나서 느낌을 적다[讀經世書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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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시에 뜻이 만만치 않아 / 我少志不畫
공자의 도를 꼭 배워보려고 / 欲學魯孔丘
마음 재워 만권 서적 다 읽으며 / 潛心萬載籍
걱정 근심 다 잊고 발분을 했고 / 發憤忘百憂
문장공부 하다가는 누가 될까 봐서 / 復恐文字累
깊이 있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 刪去不深求
포부만은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갖고 / 蓬弧四方志
만민과 근심 걱정 함께할 양으로 / 未忘同憂虞
일부러 여개도를 구해가지고 / 借得輿蓋圖
앉은 자리 구석에다 걸어두고 / 挂之當座隅
그리고 또 경세서를 펴놓고 / 再將經世書
어루만져가면서 읽기도 했다네 / 考閱手撫摩
회오리바람이 대궐문을 뒤흔들어 / 驚颷振閶闔
만물이 모두 한데 뒤섞이고 / 萬物皆紛劘
천지대운은 한도 끝도 없는데 / 大運旣坱軋
나는 장차 무슨 마음 먹어야 하는가 / 吾心將奈何
송영보와 수창하다[酬宋英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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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죄인이 천벌을 받았으며 / 大懟伏斧質
오묘에는 영령들 죽 계시는데 / 五廟神靈列
태음이 모두를 침범하여 / 太陰襲旄頭
하늘이 숙살의 뜻을 보이네 / 天意有肅殺
그대는 성현이 남긴 경전을 안고 / 夫君抱遺經
정의로운 역사 꾸밀 생각을 하면서 / 志在修麟筆
왜 대궐문을 향해 부르짖으며 / 曷不叫閶闔
혀를 내둘러 뜬구름 걷히게 못하는가 / 奮舌浮雲決
이 나라 수많은 용감한 군사들이 / 東韓萬豼貅
울분을 터뜨리지 못하고 있다네 / 有憤鬱未泄
기세를 타는 건 백성들 힘이지만 / 乘勢在黔蒼
시기를 맞추는 건 준걸만이 하는 일 / 識時唯俊傑
성철도 때를 만들지는 못하는 것 / 聖哲豈造時
때가 왔을 때 놓치질 말아야지 / 時至能不失
오묘(五廟) : 제후(諸侯) 나라의 사당. 천자(天子)의 나라는 칠묘(七廟).
모두(旄頭) : 별 이름. 묘성(昴星)을 말한 것으로 그 별이 밝으면 천하의 옥송(獄訟)이 공평함을 뜻하고 어두우면 옥송이 함부로 다루어짐을 뜻한다고 함. 《史記 天官書》
외삼촌 김 헌납 상 에게 올리다[上舅氏金獻納 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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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불탕 꼬불탕 한양성은 / 欝紆漢陽城
가파르고 험하기 상당 관문이라오 / 嶤岧上黨關
이별의 서러움 달랠 길 없어 / 離愁不可理
세상은 물결치는 파도랍니다 / 世事如濤瀾
나에게 푸른 대나무 열매를 주시고 / 遺我翠竹實
나를 상안산에서 나오도록 했는데 / 起我商顔山
어찌 처자를 못 잊어 그렇겠습니까 / 寧將戀妻子
발 벗고 나서는 것 어렵지야 않지마는 / 脫屣諒非難
숨을 때는 숨으라고 주역에서 경계했고 / 大易戒遯尾
굴원도 이소에서 때늦은 한탄 했지요 / 楚騷悲歲闌
쓸쓸하고 처량한 광릉 나무들 / 凄凄廣陵樹
돌아다보니 바람 앞에 눈물짓네요 / 睠焉風前潸
군평이 간 길이나 자릉이 갔던 길 / 君平與子陵
끝에 가선 그 길이 그 길이었지요 / 道論終爛漫
앞으로는 세상 소식 모두 끊고 / 且將斷朝報
늙도록 경전이나 손대렵니다 / 殘年窮述刪
상당(上黨) : 중국 산서성(山西省) 동남부에 위치한 군명. 지대가 너무 높아 하늘과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군평(君平) : 한(漢)나라 때 사람 엄군평(嚴君平). 이름은 준(遵). 점을 잘 쳐서 사람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하루면 많은 돈을 벌었지만 언제나 점괘를 빙자하여 사람들에게 충효(忠孝)와 신의(信義)를 가르쳤고 나이 90이 넘게 살면서 그 지조를 바꾼 일이 없었음. 《漢書 卷72》
자릉(子陵) : 동한(東漢) 때 사람 엄광(嚴光). 자릉은 그의 자임. 소년 시절 광무(光武)와 함께 자라며 공부했었는데, 그후 광무가 황제의 위에 오르자 변성명을 하고 숨어 지내다가 광무의 끈질긴 물색 끝에 발각되어 광무로부터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받았으나 끝내 사양하고 부춘산(富春山)에 숨어 밭 갈고 고기 낚다가 일생을 마쳤음. 《後漢書 卷113》
맹호연ㆍ두자미의 악양루 시를 화답하고 또 이어 화답하라고 권 양주 집 에게 주다[漫和浩然子美岳陽樓題求賡贈權楊州 諿] 정사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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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 위치로는 남초에 속하고 / 地勢爲南楚
호수 이름은 바로 동정이라네 / 湖名是洞庭
드넓은 물결 하늘 둥실 떠있고 / 浮天浪浩浩
해가 빠져버려 어두컴컴하다네 / 陷日氣冥冥
초 나라에서 바라보면 창오산 멀리 보이고 / 荊望蒼梧遠
오 나라에서 보면 회계산이 푸르다네 / 吳觀會稽靑
게 가보면 고금 감회가 엇갈리리 / 登臨今古感
얼마나 많은 현인 성자가 이 땅에 왔다 갔는가 / 賢聖幾凋零
차운(次韻) 권 양주의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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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임금이 트고 만든 물길 따라 / 導決經神禹
그 흐름이 동정으로 모였다네 / 分流會洞庭
물결은 칠백리를 삼키었고 / 波呑七百里
검푸른 기세 하늘에 닿는다네 / 氣逼萬重冥
건곤이 얼마나 큰지 금방 알게 되고 / 斗覺乾坤大
멀리 보이는 동해와 태산 푸르다네 / 遙瞻海岱靑
두소릉이 게 가서 구경하면서 / 少陵臨眺日
무슨 일로 눈물부터 흘렸다던가 / 何事涕先零
초나라 동남 땅 다 차지한 곳 / 楚據東南盡
높은 누대 동정호를 내리보고 있다네 / 危樓壓洞庭
아스랗기 몽택과 비슷하고 / 迷茫隣夢澤
까마득하여 하늘에 닿는다네 / 迢遞近蒼冥
천추를 두고 물빛 하얗고 / 水帶千秋白
산은 만고의 푸르름 간직하고 있다네 / 山留萬古靑
내 생전 한 번 구경하려던 생각이 / 平生登覽意
늙어지자 날로 시들해만 간다네 / 到老日頹零
몽택(夢澤) : 운몽(雲夢)의 늪. “형주(荊州)에 늪이 있는데, 이름하여 운몽(雲夢)이요 사방 둘레가 8백~9백리(里)에 이른다.” 하였음. 《周禮 周官 職方》
권사성의 시에 화답하다[和權思誠韻] 신사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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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있어 보내온 시편 / 有友來篇翰
쟁글쟁글 예스러운 소리가 나네 / 鏗然發古音
기러기는 날아 늪에 모이고 / 鴻飛初集澤
놀란 학은 홀로 음산에서 운다네 / 鶴驚獨鳴陰
월악산 하늘 닿게 가파르고 / 月岳參天峻 - 속리산(俗離山) 별명이 명월(明月)임 -
양계는 땅에 깔린 채 깊다네 / 楊溪伏地深
서로 그리운 사이 마땅한 선물이 없어 / 相思無可贈
그대 세한심을 굳히라고나 할까 / 勗爾歲寒心
「有友來篇翰 鏗然發古音」 이 구절을, 우리 친구가 보내온 시편[我友來篇翰] 청고한 가사에 옛소리가 있네[淸詞有古音]라고 쓴 곳도 있다.
그 옛날 거룩한 이 뒤따르고 / 邈邈追高步
우렁차게 큰 소리에 화답하지 / 寥寥和大音
오르고 내리고는 주위 사정 따라 하고 / 升沉隨變化
가고 안 가고는 날씨 따라 하는 게지 / 行止任晴陰
눈 다 녹은 속리산 다시 높고 / 雪盡離岑削
봄 맞은 금강 물도 깊다네 / 春生錦水深
청등을 켜놓고 얘기하던 하룻밤 / 靑燈一夜話
내 마음 있는 대로 그대에게 다 줬다네 / 送爾百年心
세한심(歲寒心) :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마음. 차가운 눈보라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고 꿋꿋이 서 있는 송백(松柏) 같은 마음.
○오언사운(五言四韻)
아, 적의 나라에 기강도 문란하고 수비도 현재 허술하여 바다 중심에서 돛 한 번만 걸면 일천리 내의 목을 조를 수도 있고, 관문 밖에서 먼지 한 번 날리면 백년의 운세도 잡을 수 있는 바로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시기와 형세를 잘 이용만 하면 귀신도 그를 막을 수 없는 것이고, 사람사람이 바른 일만 하면 천도(天道)도 따질 것이 없는 것인데, 아, 나라의 대신들이여! 이것이 어디 하늘이 키운 화란(禍亂)이겠는가. 앞으로 일천년 후에도 이 문제를 두고 개연탄식을 할 자가 있을런지? 밤중만 감회가 일어 이렇게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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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은 천하에 제일 높고 / 碣石傾天下
삼천 물에서는 먼지가 인다네 / 三川水起塵
- 한 군데는 「水起塵」을, 아직 사람이 있네[尙有人]라고 쓰기도 하였다. -
민심은 큰 가뭄에 비 바라듯 하고 / 民心大旱雨
해독은 한 백년 뻗쳐온 것이라네 / 害氣百年氛
창해에는 파도가 굉장하고 / 滄海風濤壯
요소마다 성도 쌓고 배도 있건만 / 關河堞櫓新
국가 간성인 그대 기보여 / 爪牙爾祈父
왜 성상만 노심초사하게 하는가 / 聖札獨辛勤
삼천(三川) : 안녹산(安祿山) 난리에 두보(杜甫)가 숨으러 갔던 곳이라고 함. 《唐書 杜甫傳》
기보(祈父) : 나라의 군대를 맡고 있는 관직 이름. 《시경(詩經)》 소아(小雅) 기보(祈父)에, “기보여! 나는 왕의 조아(爪牙)인데 …… ” 하였음.
○칠언고시(七言古詩)
장안의 길[長安道有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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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으로 가는 길 숫돌같이 평탄한 길 / 長安大道平如砥
해만 뜨면 수레와 말 줄을 서서 달리는 길 / 日出駢塡車馬馳
붉은 용마루 넓은 집들 구름 속에 은은하고 / 朱甍甲第隱高雲
옥굴레 찬 말을 몰고 새벽부터 연달아 가고 / 玉珂緹騶連曙暉
남쪽 이웃 북쪽 마을에 공경들 모여들고 / 南隣北里會公卿
동쪽 성과 서쪽 길에선 피리소리 떠들썩하다네 / 東郭西阡喧笙吹
풍류로는 이부가 제일로 호귀하여 / 風流吏部最豪貴
큰 수레에 줄달아 아내 자식 다 태우고 / 奕車連騎携婦兒
서호에 가 배를 끌며 마음껏 놀다가는 / 西湖蕩舟恣遊賞
해질 무렵 취한 채로 말을 몰고 돌아온다네 / 薄暮垂鞭騁醉歸
조정에 일도 없고 대우도 잘하기에 / 朝廷無事禮數寬
들고날 때 뽐을 내며 의기도 양양하고 / 出入揄揚多意氣
부귀 공명 그만하면 제 스스로 만족하여 / 功名貴富且自足
이 세상 모든 행락 제때 다 즐기려들지 / 世間行樂要及時
적토현에 올라보니 옛 도읍지와 서악이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登赤土峴 離都西岳次第在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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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숲을 뚫고 험준한 산 벗어나니 / 穿林竟日出嶔丘
갑자기 평지 나와 내 걱정이 놓이네그려 / 忽得平川散我愁
하늘에 가랑비 인간세상 이 아닌가 / 一天煙雨人間世
일천리 뻗은 산하 제왕의 도읍지라네 / 千里山河帝王州
아득한 물과 나무 그 경개 가이없고 / 蒼茫水樹無邊景
줄달은 들과 평원 무르익은 가을이로세 / 歷落郊原不盡秋
우리 어버이 계신 곳 어드메라 하던가 / 借問吾親何處住
흰구름 저 남쪽 강물 흐르는 곳이라네 / 白雲南畔小江流
원운(原韻) [이조연(李祖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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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를 온 회수가 한강과 만나는 곳 / 長淮千里漢江交
잎 진 나무 찬 연기에 들이 온통 깨끗하네 / 落木寒煙淨遠郊
설 지난 중 바리때 지고 제 있을 절 찾아들고 / 經臘鉢盂僧入定
하늘 가득 눈바람에 둥지 찾아 학은 가네 / 滿天風雪鶴歸巢
방공의 은거생활 후손에게 물려줘도 되지 / 龐公隱跡堪遺後
양자는 가난해도 해조하기 싫었다네 / 揚子貧居懶解嘲
응달에 해 둥실 떠 들창을 열었더니 / 陰谷日高方啓牖
어느새 숲 끝에 석양빛이 걸려 있네 / 已看斜景在林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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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5권 / 소차(疏箚)
갑인봉사소(甲寅封事疏) 갑인년(1674년현종15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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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의신(布衣臣) 윤휴는 참으로 황공하옵께도 삼가 목욕 재계하고 백 번 절하며 주상 전하께 이 말씀을 올리는 바입니다. 생각건대, 국모(國母)께서 승하하시고 인산(因山)도 이미 지났는데 우리 전하의 효성으로 추모하시는 마음 애통은 얼마이며 망극하기 그 어떻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감정을 억제하시고 예대로 따르시어 몸이 야위거나 부모의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선후(先后)의 뜻을 그대로 준수하심으로써 대효(大孝)의 도리를 다하소서. 신은 참으로 황공한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는 바입니다.
신이 듣건대, 천하의 걱정거리를 제거하는 자 반드시 천하의 복을 누리고 천하의 의리를 부식하는 자 반드시 천하의 명예를 얻는다고 했는데, 그 방법으로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잘 이용하고, 계기를 잘 살펴 기민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아, 지난 병자(1636년)ㆍ정축년(1637년)의 일로 말하면 하늘이 우리를 돌보지 않아 금수가 사람에게로 다가와서 우리를 치욕 속에 몰아넣고, 비좁은 성안에서 곤욕을 당하게 했으며, 우리 백성들을 죽이고 우리 의관을 다 찢었는데, 그때 선왕께서는 종묘사직을 위해 한번 죽고 싶은 것도 참고 만백성을 위해 수치도 털어버린 채 피눈물을 삼키고 가슴을 치면서 언젠가 한 번 나갈 기회를 보고 오늘까지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 많은 세월이 흘렀고 귀신도 사람도 울분이 찰 대로 찼습니다. 지금 북쪽 소식을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러나 그 추한 무리들이 점거하고 있은 지가 이미 오래되어 중국에서는 원노(怨怒)가 일고 있고, 서쪽에서는 오삼계(吳三桂)가 일어나고 있으며, 남쪽에서는 공유덕(孔有德)이 연결을 취하고 있고, 북쪽에서는 달자(韃子)가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동쪽에서는 정금(鄭錦)이 엿보고 있습니다. 머리 깎인 유민들이 숨을 죽이고 가슴을 치면서 고국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고 회오리바람이 이는가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천하 대세를 알 만합니다.
우리로 말하면 지형이 서로 인접해 있는 나라이고 또 가장 요충지대이며 천하의 뒤편에 위치하여 전성을 누릴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는데, 바로 이 시기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군대를 일으키고 격문을 돌려 그들 기를 꺾고 마음을 흥동시켜 천하의 걱정거리를 함께 걱정하고 천하의 의리를 붙잡아 세우지 않는다면, 그는 칼을 쥐고도 베지 않고 활을 만지기만 하고 쏘지는 않는 그렇게 애석한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선왕 유업을 이어가시려는 성상의 마음이 우리 조종 우리 선왕께 전달될 길이 없어 천하 만세에 이렇다 할 말이 없지 않을까 그것이 걱정인 것입니다.
옛날 우리 강헌 대왕(康獻大王 태조(太祖))께서 고려 말기를 당하여 동녕(東寧)을 공격, 북으로 원(元)나라를 끊고 요동에서 회군하여 역절(逆節)을 미연에 방지하였는데, 그는 사실 천명과 인심에 순응하여 끝없이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일로서 명 태조(明太祖)도 만리를 훤히 내다보고 특별히 사랑의 유지를 내렸던 것입니다. 그 유지에 의하면, “조선 국왕은 나 이상으로 기력을 발휘하여 중국을 치려던 군마(軍馬)를 되돌렸고 고려 국왕이 되어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천도(天道)가 본시 그러한 것이니 조선 국왕은 지성을 다하라.” 했는데, 그 교훈적인 말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귀에 쟁쟁하고 역사에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이후로 성자(聖子)와 신손(神孫)이 조금도 폐추함이 없이 그 유업을 이어왔고 중국에서도 우리를 다시 변방 이족(夷族)으로 대하지 않고 본토인과 똑같이 대우하면서 사랑과 광명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소경 대왕(昭敬大王 선조(宣祖)) 때는 임진ㆍ계사년 왜란으로 팔도 백성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고 종묘의 영령들도 다시 혈식(血食)을 못하게 됐었는데, 그때 만력(萬曆) 황제(명 신종(明神宗))가 천하 군대를 동원하고 대부(大府)에서 수백만금을 덜어내어 도왔으며 문무 장사들이 적의 칼날 아래서 죽음을 무릅쓰고 7년 가까운 전쟁 끝에 우리를 수화(水火) 속에서 구출하여 편안한 자리에다 올려놓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미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세워준 덕이야말로 끝없는 하늘과 맞먹는 덕으로서 일개 속국이 중국으로부터 그러한 대우를 받기란 고금을 통하여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소경 대왕께서는 우리의 힘이 그 은덕을 갚기에는 부족하고 당시 사세도 더 어쩔 수 없음을 알고서도 한평생 서쪽을 등지고 앉은 일이 없이 마치 물이 비록 일만 번 꺾이더라도 계속 동을 향해 흐르는 것과 같은 뜻을 보였고, 재조번방(再造藩邦)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크게 써서 중국 장사(將士)의 사당 안에다 걸게 하여 그것을 자손과 신서(臣庶)들에게 두고두고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얼마나 애처로운 뜻이며 또 얼마나 원대한 계획입니까.
급기야 광해군(光海君) 말기 심하(深河) 싸움에 중국에서는 사실 우리의 협조를 바랐던 것인데, 우리 쪽에서 서열 문제로 유감을 품고 결국 중국을 배신할 생각에서 암암리에 강홍립(姜弘立)에게 밀지를 주어 전 군대로 하여금 전쟁에 힘쓰지 말게 하여 오랑캐들이 날뛰게 만들고 그리하여 천하가 그 화를 입게 하였던 바, 이는 광해군이 어버이를 잊고 임금을 저버린 일로서 그 때문에 하늘에 죄를 얻고 하늘은 그의 녹(祿)을 거두어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반정(反正)하던 날 그의 죄상을 낱낱이 세면서, 북녘 오랑캐와 교통했다고 한 것이 바로 그 일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이상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하늘의 명을 받아 개국하고 또 중흥을 이룩했던 것은 모두가 중국을 섬긴 덕분이었고, 나라가 전복되고 위태로움을 당한 까닭은 다 중국을 배반한 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난번 가도(椵島) 전쟁, 송산(松山) 전쟁 때 모두 융신(戎臣)이 잘못해서 우리가 바로 적의 앞잡이 꼴이 되고 그리하여 갈석(碣石)이 무너지고 산해관(山海關)이 진동하면서 천지가 온통 흔들렸던 것은, 천하가 다 들은 사실이요 뭇사람 입에서 입으로 전송하는 사실로서 그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한 번 큰 일을 꾸미고 크게 무엇인가 바꿔놓지 않고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과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조 대왕이 허리를 굽히신 원통함과 효종 대왕께서 조신들 앞에서 통탄하신 일들은 사실 천지귀신이 다 알고 있는 마음들이십니다. 아, 효종 대왕께서 자리에 계시던 10년 동안 자나 깨나 군비를 정돈하고 인재를 초치하여 사전 만반 준비를 하시면서 어찌 하루인들 북벌하려는 마음을 잊었겠습니까. 포치(布置)를 다 끝내고 부서(部署)도 짜여졌었는데 하늘이 돕지 않아 중도에 가시고 말았기 때문에 그 원대한 계획과 뜻이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때가 아직 오지 않아 그런 것이고 이제 그 일을 전하가 떠맡게 된 것입니다. 선왕께서는 그렇게 크고 어려운 일을 뒷사람에게 남기셨고 우리 성상께서는 한없는 복과 함께 한없는 걱정까지 이어받으셨으니, 그야말로 큰 뜻을 세우시고 귀를 넓혀 하늘을 받들고 조종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시면서 모든 걸림돌을 제거하고 정의를 부식하고 큰 치욕을 설치할 계획을 세우심으로써 세상의 허물을 말끔히 씻고 천하의 복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므로, 그냥 그렇게 그렇게 넘어가고 말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기는 놓치면 뒤쫓아갈 수 없고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시기와 형세를 이용하여 몸을 보존하고 살아갈 길을 찾는 것이 오직 이때인 것입니다. 지(志)에 이르기를, “때가 왔는데도 단안을 내리지 않으면 도리어 난리를 당하게 되고, 하늘이 주는데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을 부른다.” 했는데,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입니다.
송(宋)의 주 문공(朱文公) 상소문에, “신이 염려되는 것은 상제(上帝)가 하루 아침에 진노하시고 필부들이 유언을 퍼뜨려 초야에서 분수 모르는 것들이 의리를 구현한답시고 봉기하고, 밖에서 노리고 있는 오랑캐들이 문죄(問罪)의 군대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했는데, 지금 현재 상황은 북녘 오랑캐들 운은 이미 갔고, 오삼계(吳三桂)도 이미 난이 발발하였으나 세상 전체가 시끄러움 속에 있어 일본 세력만으로도 천하를 뒤흔들기에 충분하고, 정금(鄭錦)의 마음은 예측할 수가 없는데, 우리가 우리 스스로 수립을 못하고 있다가 그들이 혹시 우리보다 먼저 착수했을 경우 우리에게 무슨 말을 뒤집어씌운다거나, 아니면 혹 광복(匡復)이 되는 날, 우리더러 무언가를 믿고 나쁜 짓 하는 자들을 응원했다고 따진다면, 그때 가서는 아무리 슬기로운 자가 있더라도 국가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것입니다. 아, 주 문공이 한 말 같은 것이야 신이 하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어리석은 신의 우직한 생각에 우리 임금을 위해 걱정이 안 될 수 없고 또 말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오늘 청한 말은 무슨 일을 꾸미고 공로를 세우자는 것이 아니라 바로 패망을 막고 기울어져가는 위급한 상황을 바로잡자는 부득이한 방법을 말한 것입니다. 이 신 참으로 황공하옵고 죽을죄를 지은 것만 같습니다.
신이 또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그 동안 겁에만 질려왔고 잦은 흉년으로 국력이 약해 무슨 일을 해낼 능력이 없을 것 같지만 그러나 인(仁)이면 용(勇)으로 안 되는 것이고 의리가 정당하면 힘을 따질 겨를이 없는 것입니다. 옛날에도 작은 병력으로 일어난 자도 있었고, 영토 없이 시작하여 왕이 된 자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천승(千乘)의 국력이요 군대가 만려(萬旅)이며 정예한 무기와 장사들이 있는데다 선왕들이 남기신 은택이 사람 몸에 배어 있고 성상의 사랑이 가해지고 있으며 게다가 또 몇 해를 두고 준비에 준비를 해왔을 뿐만 아니라, 저들은 저들대로 지금 안일에 푹 빠져 있고 그 당시 정예를 자랑하던 인력들은 거의 죽고 없는 상태이므로, 만약에 의성(義聲)이 떨치고 현인ㆍ호걸들이 힘을 뭉쳐 일이 잘 풀려나가기만 하면, 허깨비 같은 저들이 풍정(風霆) 앞에 오래 배겨나지 못할 것이고 반대로 우리 쪽에 유리한 소문이 천리 밖까지 절충을 할 것입니다.
명나라 태조는 오랑캐인 원나라를 소탕하여 그 공로가 대우(大禹) 못지 않고, 의종(毅宗)은 사직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의사들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하(夏)나라 국운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유궁후 예(有窮后羿)가 찬탈했었으나 하늘은 원래 공정 무사하여 얼마 후에는 다시 되찾고 말았던 것입니다.
옛날 주(周)가 기근에 시달리다가 상(商)을 멸하고 나자 풍년이 들었고, 형후(邢侯)가 무도하게 침범하여 위(衛)나라에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위가 형을 치려고 군대를 일으키자 비가 내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해마다 가뭄으로 흉년이 들고 백성들은 전염병에 시달리기 몇십 년이 되풀이되고 있으니, 그것은 하늘의 마음 그리고 성왕의 영령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 답답증을 느끼고 있다는 증좌(證左)가 아니겠습니까.
신이 또 듣기에 그 일은 저녁에라도 마음으로 다짐만 하면 천지귀신이 감동을 하고, 하루 아침에 일단 실천만 하면 억조 창생이 다 심복하고 이적ㆍ금수까지도 다 그쪽으로 쏠린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을 시작만 하면 하늘이 우리에게 풍년과 단비를 내리고, 단 하루라도 사심을 버리고 할 도리를 한다면 천하가 우리를 공정 무사하다고 평할는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리고 우리나라가 비록 연약하고 타성에 젖어 즐기기만 좋아하고 있다 해도 창과 양식을 싸들고 너도 나도 함께 나서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공자(孔子)가 노 애공(魯哀公)의 물음에 답하면서 말씀하시기를, “진항(陳恒)이 자기 임금을 시해했을 때 제(齊)나라 백성으로 그 일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절반이나 됩니다. 우리 노(魯)나라 전체가 동원되고 거기에 제나라의 그 절반 힘을 보태면 승리가 가능합니다.” 했습니다. 지금도 천하가 이렇게 큰데 영웅 호걸이 어찌 없을 것이며, 사해의 많은 백성들이 그들에게 심복하고 있는 자 누가 있겠습니까. 다만 지금까지 원수를 잊고 슬픔을 참고 머리로 땅을 찧고 무릎으로 기고 있는 것은 앞장서서 외치는 자가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이 팔을 휘둘렀던 것이 결국 진(秦)나라 백성들에겐 탕(湯)ㆍ무(武) 같은 존재가 되었고, 사현(謝玄)의 군대는 천 명뿐이었지만 주서(朱序)가 한 번 소리쳐 실제로 부견(苻堅)의 백만 대군을 궤멸시켰습니다. 지금도 저들과 합류하지 않고 있는 나라들이 어찌 천하의 절반 정도뿐이겠습니까. 황하의 제방이 무너지고 회수의 둑이 터지는 것은 바로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왕(漢王)이 소복을 하자 제후들이 모두 그를 따르고 큰 바람이 모래를 날렸고, 남양(南陽)의 유(劉)씨가 왕망(王莽)의 죄를 성토할 때는 곤양(昆陽)에 천둥 번개가 일었고 맹렬한 불길이 미앙궁(未央宮)을 불태우기도 했듯이 요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도 감응하는 이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상이 다 아는 정예한 병력과 사방을 제어할 수 있는 화포(火砲)와 비환(飛丸)이 있어 군대를 더 선발하고 잘 무장된 병거를 갖춘 다음 노련한 장수를 임명하여 북으로 연로(燕路)를 가 기회를 보아 전진하게만 하면 그들 등을 치고 그들 목을 조를 수도 있고, 또 바닷길을 열어 정금(鄭錦)과 합세하여 그들 뱃속을 흔들어놓을 수도 있으며, 또 연주(燕州)ㆍ계주(薊州)ㆍ요하(遼河)ㆍ이북(迤北)ㆍ야춘(野春) 등 여러 부족과 일본의 여러 섬나라들 그리고 청(靑)ㆍ제(齊)ㆍ회(淮)ㆍ절(浙) 등처에도 격문을 보내 서남지방과 통한 후 함께 원수로 여기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한꺼번에 일어나게 한다면, 교활한 놈들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고 동시에 천하 충의(忠義)의 기운을 고취시킬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저들 무리끼리 서로 도륙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설 자리를 잃은 개돼지 같은 그들을 누구나 쫓게 할 수도 있을 것이므로 우리로서는 중요한 위치를 점거하고 저들을 몰아내는 데 별 어려움 없이 천하를 위해 잔학한 자를 제거할 수도 있고 중국 왕실을 위해 수훈을 세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 법도를 닦고, 하늘 마음에 답하고, 수치를 물리치고, 군왕에 보답하고, 조종을 빛내고, 자손을 보존하고 그리고 지난 잘못을 없애고 앞으로 다가올 화환을 미연에 방지함으로써 세상 사람들 앞에 이렇다 하고 내놓을 일이 그 일 말고는 없는 것입니다.
맹자가 등 문공(滕文公)에게, “만약에 왕자(王者)가 있게 되면 틀림없이 와서 배워갈 것이니 그러면 왕자의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했듯이 신도 전하께 바라는 것이 오직 그것뿐입니다. 그리고 가령 성공을 못하더라도 그들 기를 꺾어놓은 것만으로 만천하에 폭로가 되고 선왕께 바칠 것이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선왕의 뜻을 전하께서 실천으로 옮기신 것이고, 생을 보답하는 뜻을 전하께서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우리의 인(仁)이 이오(夷吾)의 인보다 못할 것이 없고, 우리 인류가 모두 금수 되는 길을 면할 수 있으며, 우리 조종을 비롯한 군신 상하가 천하 만세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안팎으로 산과 바다이고 중국과는 거리가 떨어져 있습니다. 저들은 이미 발을 들고 마음이 초조한 상태여서 저들 자구책을 쓰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우리의 틈을 타 경솔하게 저들 소굴을 벗어나 몇천 리를 와서 우리와 땅을 두고 다툴 것입니까. 그리고 당당한 기자(箕子)의 나라, 넓고 넓은 일만 리 땅으로 그 전에는 수(隋)도 당(唐)도 곤욕을 당했고, 그후에도 요(遼)와 금(金)을 꺾은 일이 있는데 가령 저들이 온대도 우리 쪽에서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오늘 우리의 처지가 의리로 보아서나 형세로 보아서나, 그리고 이기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리한 방법으로 화합의 정도를 찾는 것이 《역(易)》의 이치이고, 《춘추(春秋)》의 의리라면 비록 패하더라도 영광인 것입니다. 때가 왔고 일도 꼭 해야 할 일인데, 단안을 내려 실천하는 일은 성상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그 밖의 조정 정치라든지 실시하는 정사 등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이렇다저렇다 할 일이 아니고 오직 성상께서 깊이 자신을 책려하고 일대 경각심을 일으켜,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수행을 함으로써 천재를 막아냈던 주(周)의 선왕(宣王) 같이, 또는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냄으로써 민심을 수습했던 한(漢)의 광무제(光武帝) 같이 하시어 국가를 쇠망으로부터 일으키고 난리를 뿌리뽑는 바탕으로 삼으셔야 할 것입니다.
신은 일개 선왕의 유민이요 포의 한사로서 만에 하나 닮은 것도 없고 백에 하나도 해놓은 것 없이 비록 고인의 글을 읽었다 해도 지금 세상에 해야 할 일에 관해서는 아는 바가 없습니다. 옛날 조정 신료의 잘못된 추천으로 선왕(先王) 시대에 외람되이 이름을 듣게 되었지만 원래 미련하고 물정에 어두워 감히 우리 영고(寧考)께서 불러주신 뜻을 승당할 수가 없었고 전하의 즉위 초년에도 관명(官命)이 또 내려왔었지만 신의 뜻은 전일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지금 와서는 이도 머리도 다 빠지고 고집스럽고 비뚤어지기까지 하여 이미 당세의 생각이라곤 없는 것입니다. 다만 공자가 목욕하고 청했던 일이 생각나고 과부가 종주(宗周)를 걱정했던 것 모양으로 전하를 위해 한 말씀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것은 위로 선왕의 지우(知遇)에 보답하고 아래로 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뜻이었으나 지위에 벗어난 일이요 분수에 어긋난 일이어서 그 죄 죽어 마땅하겠습니다.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인자하시고 현명하시고 규모가 크시어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도량이 있으실 것이므로 미천한 인물이라 하여 소홀히 여기시거나 참람된 일이라 하여 물리치지만 마시고 꼭 신의 말을 되새겨보고 깊이 생각하신 다음 강인한 덕을 발휘하고 신명한 계산을 산출하소서. 스스로 단안을 내리시고, 믿음이 가는 신하들에게도 물어 대계를 확정하시고, 성난 호랑이 같은 무신과 유능한 인재들을 불러 모아 성상의 뜻을 돕게 하고, 의심할 것도 없고 어렵게도 두렵게도 여길 것 없이 그 대사업을 잘 마치시면, 천하가 너무 다행한 일이며 종묘 사직이 그 이상의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미친 자의 말도 성인은 가려 듣고 나무꾼 얘기도 슬기로운 자는 취한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간은 비록 누추하고 그의 꾀는 어리석은 꾀라고 하더라도 혹시 천하 국가의 치란ㆍ안위ㆍ존망 그리고 세도(世道)와 민이(民彝)에 다소 상관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성인이나 슬기로운 이라면 그 말도 들어 참작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은 늙고 병들어 문 밖도 나가지 못하고 죽음과 이웃하고 있는 처지이나 마음 하나만은 일편 단심이어서 이 충정을 다 밝히지 못하고 죽기라도 하면 영원히 한이 맺힐 우려가 있기 때문에 몸은 저자에 처박혀 있으면서 천문을 향해 울부짖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렵고 떨려 더욱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신 하염없이 하늘과 성상을 우러러 임금 사랑, 나라 걱정하는 마음에 금방 죽을 것만 같은 것입니다.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진승(陳勝)ㆍ오광(吳廣) : 진 이세(秦二世) 때의 둔장(屯長)들. 이들이 기현(蘄縣)에서 군대를 일으켰던 것이 결국 진(秦)나라가 망하는 신호탄이 되었음. 《史略 卷2》
사현(謝玄)의 …… 궤멸시켰습니다 : 주서(朱序)는 원래 진(晉)나라 사람으로 양양(襄陽)을 지키다가 부견(苻堅)에게 패하고 잡혀와 있었다. 그후 사현이 적은 병력으로 비수(肥水)에서 막강을 자랑하는 부견의 군대와 싸우고 있을 때 주서가 나서서, 부견의 군대가 패했다고 외침으로 하여 부견의 군대는 결국 참패를 당했고 주서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음. 《晉書 卷81》
한왕(漢王)이 소복 : 항우(項羽)가 의제(義帝)를 시해했는데 당시 한왕이었던 유방(劉邦)이 의제를 위해 복을 입음.
큰 바람이 …… 날렸고 : 한왕이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갑자기 서북풍이 크게 일어 나무가 꺾이고 모래 자갈이 날리어 대낮이 깜깜했으므로 그 틈을 타 한왕이 도주하여 화를 피했다고 함. 《史略 卷2》
곤양에 …… 일었고 : 뒤에 동한(東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된 남양(南陽) 사람 유수(劉秀)가 일어나 왕망(王莽)의 난을 평정할 때 왕망의 당인 왕읍(王邑)ㆍ왕심(王尋) 등이 이름하여 백만 대군을 앞세우고 대항하여 왔다. 적군의 강성함에 놀란 유수의 군대는 모두 놀라 곤양(昆陽)으로 들어가서 전의를 잃고 흩어지려고 하였는데, 이때 유수가 앞서서 적과 싸워 연속 승리를 거두고 그를 본 곤양성을 지키던 자들도 모두 합세하여 싸웠던 바람에 왕망의 군대가 거의 궤멸되다시피 되었다. 그런데 때맞추어 천둥과 큰 바람이 일어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비가 쏟아지듯 퍼부어 수많은 적군이 치천(滍川)에 빠져죽기도 하였음. 《史略 卷3》
이오(夷吾)의 인 : 제(齊)의 관중(管仲)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주실(周室)을 받들었다 하여 공자(孔子)가 그에게 인(仁)을 허여하였음. 이오(夷吾)는 관중의 이름. 《論語 憲問》
공자가 …… 청했던 일 : 진성자(陳成子)가 간공(簡公)을 시해하자 공자가 목욕을 하고 애공(哀公)에게 조회하며, 진성자를 쳐야 한다고 청하였음. 《論語 憲問》
과부가 …… 걱정했던 것 : 정작 자기 걱정은 하지 않고 엉뚱한 걱정만 함. 베짜는 과부가 자기 짜는 베의 씨줄 부족한 것은 걱정 않고 주나라가 망할까 그것만을 걱정함. 《左氏傳 昭公 24年》
만려(萬旅) 려(旅) 옛날의 군제(軍制)로 군사 500명의 일컬음 500만
인용 한국고전종합DB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좋은 내용입니다. 구한말 한양 인구는 4-5백만에 이르렀다고 보는것이 기타자료를 토대로 분석해도 타당한 결론일듯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