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는 마초가 항복해오자 그의 명성을 듣고 누가 우위인지 제갈량에 서찰을 보내 묻는다 이떄 제갈량은 마초보다 우위를 점 하고싶은 관우의 마음을 헤아리고 미염공의 초절함에는 못미친다며 관우의 우위를 점친다 그리고 이사건은 그저 관우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단순 헤프닝으로 보여지는데 사서의 짤막한 글귀로 보면 단순 헤프닝으로 끝난게 아닌 실질적인 조치가 이루어졌었다라고 볼수있는 구석이있다
유비는 서쪽으로 익주를 평정하고, 관우에게 형주를 감독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겼다. <<촉서-관우전>>
유비는 사람을 보내 마초를 맞이했고, 마초는 병사를 이끌고 곧장 성 아래까지 이르렀다. 성안에서는 두려워 떨었으며, 유장은 곧바로 항복했다. 유비는 마초를 평서장군으로 삼고 임저를 다스리도록했으며 <<촉서-마초전>>
관우가 제갈량에게 서찰을 보낸시점은 형주의 군권최고책임자가 된후 마초가 항복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찰을 보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서찰을 보낸지 얼마지나지 않아 마초가 임저현의 독장으로 파견된다 촉서 본전에 "以超爲平西將軍 , 督臨沮"라고 기술되있다.
여기서 임저현은 형주 남군 임저현을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봐야할것은 마초가 왜 하필이면 임저현의 독장이 되야했냐는 것이었다. 이부분을 두고 각기 견해가 다를수있지만 2가지로 요약해 풀이를 해보겠다.
1.군벌로서의 항장이였던 마초를 대하는 유비의 태도는 유장과 같이 할수밖에 없는 상황이였다??
필자는 이부분에 대해서 한사코 아니라고 확답을 내릴수있다. 유장과 같이 마초는 군벌로서의 항장은 맞으나 유장과 마초는 항복한 과정자체가 틀리다. 유장은 3년여간 항전끝에 수많은 희생자를 발생하게 함은 물론이고 시간까지 낭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장이 항복을 하였다하더라도 유장이 촉땅안에 있는다는것은 언제든지 세를 규합하여 반란을 도모할수있다는 유비의 추측하에 유장을 공안으로 내려보는것으로 보여진다. 마초는 어떠한가? 마초는 량주 사람으로써 이미 세력의 기반을 잃고 촉으로 온 사람이였다. 그렇다고 하여 마초가 유비군과 마찰이있었던것 또한 아니고 오히려 유장을 정벌하는데 있어서 공을 세웠다고 볼수있는 입장이였다. 이런 그를 유비가 임저현의 독장으로 파견시킨 이유를 유장건과 연계시키는것은 부당하다고볼수있다.
2.마초보다 우위를 점하고싶어하는 관우의 마음을 헤아린 유비가 실질적인 조치를 내린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마초를 임저현으로 파견한 유비의 본심이라고 여겨진다. 앞서 말했듯이 유장과 같이 대우를 하려했다면 유비는 임저현에 독장으로 마초를 평생 썩혀두었을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정확한 시기를 알수는 없지만 마초가 한중전에 투입이 된것으로 보아 형주 남군 임저현에 잠시 독장으로 있다가 촉으로 들어간것이 확실하다고 볼수있다. 이후에도 표기장군에 양주목을 겸하며 후에는 태향후로 까지 승진하니 이러한 조치로 볼때 유비가 마초를 유장대하듯이는 하지않았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겠다.
이 2가지 견해를 뒤로하고도 의문은 남을수가있다. 유비가 그렇게 까지 해가면서 관우의 마음을 충족 시켜줘야 했냐는 것이었다.
이 견해에 대해 무리수를 두자면 유비가 관우와 형제와 같은 정으로 지내온건 사실이지만 떨어져있는 이상(촉과 형주) 관우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에 있었다는것. 그리고 이것을 보다 확실히 하기위해 유비 나름데로 실질적인 조치를 내림으로써 그에 보답한것이라고 본다.
어찌됐건 서찰의 내용대로 "미염공의 초절함에는 미치지 못합니다"라는 말은 실질적으로 마초가 관우의 하급관원이 되면서 딱 일치하게된다. 그리고 이러한 인사권은 유비가 쥐고 있었으므로 유비의 이러한 조치는 관우의 마음을 헤아린대서 나온것이라고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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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 vs 조운]
* 본문의 내용에 대하여 관련된 서적은 '연의'를 배제한 '정사 = 촉서 조운전[별전] / 촉서 마초전 / 전략 / 산양공제기' 등의 참고 문헌이 있으며, 필자 무교의 사견을 중간중간 덧붙여 최대한 간결하게 축약하여 서술토록 하겠습니다.
[先] 조운 자룡
맹덕의 대군에게 쫒기어 난민을 이끌고 피신중이던 '선주(소열황제 유비)'를 따라서 수행하였는데, 현덕은 자룡에게 자신들의 처자식을 맡겼으며, 난중에 자신이 보호하던 주군의 가족들을 잃어버리자(맹덕군의 발빠른 별동대에 습격당하여 적과 교전중 현덕의 가족들을 미처 신경쓰지 못하고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유추해봄이 가능함) 눈에 불을 켜고 행방을 찾아 끝내 발견하였으나 미부인은 이미 죽음에 이른 상황이었으며 훗날 선주 현덕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오르게 되는 '후주(유선=공사)'와 '감씨(소열황제의 정실이자 훗날 황후로 추존됨)'만을 찾아내어 '아두(후주의 어릴적 아호)'를 품에 안고 주군이 피신해있는 곳을 향해 신속히 나아갔으나 그 과정에서 맹덕군의 정예기병으로 구성되어 있는 별동대(아무리 현덕이 난민들을 거느리고 행군하였다고는 하지만 맹덕군이 현덕군을 쫒아 당도하여 살육할때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필시 발 빠른 정예기병들로 구성되어 있는 수천의 별동대에게 추격당하여 습격당했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 부합되지 않을까 함)와 조우하였지만 이들과 병장기를 마주하지 않고서 냉철한 판단하에 피해서 도주하였다(이 과정에서 맹덕군의 또 다른 몇갈레 부대와 마주치고 크던 작던 교전을 하지는 않았을까 유추해봄). - 조운전 -
{주 : 이때 자룡의 활약으로 인하여 먼 훗날 제위에 오른 후주는 그를 기리고 추모하여(선주의 대에 이미 운장/익덕/맹기/한승/사원/효직등이 조서를 내려 제각기 후작의 시호를 추증받았으며, 후주의 대에 이르러서 당시에는 오로지 제갈공명하고 진지만이 시호를 추증하여 받았다. 자룡이 서거하자 조정신료들이 그의 공을 기려 시호를 추증해주기를 상소하여 아뢰었으나 후주는 이를 묵살하다 먼 훗날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받아들여 뒤늦게 후작의 시호를 추증하고 '대장군'을 더하여 '순평후'라 하였다) 조서에서 말하길, "그 옛날 자룡은 당양에서 짐을 보위하여 난을 면하고 목숨을 구하였는데, 적군과 싸움에 있어서 그 무용과 담력은 진실로 '금석(쇠돌)'을 꿰뚫을만 하였으며 덕망이 있어 군자의 풍모를 갖추었으니 이에 '순평후'의 시호를 내리고 '대장군'의 작위를 더하여 추증하겠노라."}
한중에서 주장 '한승=황충'이 부장 '장저'를 거느리고 맹덕의 군량미를 지원하는 수송부대를 습격하였는데, 수가 적었으므로 이내 포위되어 위기에 처하였다. 자룡은 불과 수십기의 별동대를 인솔하여 맹덕군을 공격하였는데, 병장기를 날카롭게 다루어 좌우를 베어서 가르고 한승과 장저를 구출해냈었다. 그러나 곧 맹덕군의 추격을 당하자 '백공=장익'이 주둔하고 있던 진영으로 돌아왔고, 백공이 진문을 닫으려 하자 자룡은 오히려 진문을 활짝 열고는 기를 내리고 북소리를 멈추게 하였다. 이에 맹덕군은 복병이 있을까봐 우려하며 군대를 물렸는데, 자룡은 때를 놓치지 않고 포착하여 갑자기 북소리를 산과 계곡이 진동할 듯 울리도록 하며 궁노를 어지러이 쏘도록 명하였다. 이에 맹덕군은 크게 혼란스러워 하며 끝내 궤주하였는데, 자룡은 이를 추격하여 공격하니 맹덕군은 '한수'까지 궤주하여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 조운별전 -
제갈공명이 출사의 표를 올리고 북벌을 감행하자, 자룡은 '백묘=등지'와 함께 유군으로 참전하여 기곡으로 향하였으며, 위의 명장인 '자단=조진'이 거느리던 군을 맞이하여 교전하였다. 적군의 수가 많고 아군의 수가 적었으므로 패주하였으나, 뿔뿔이 흩어져가는 군사들을 규합하여 굳게 지키며 항전하니 크게 패배하여 격파 당하지는 않고 종국에는 자단으로 하여금 물러가게 만들었다. 이때 자룡은 귀국하여 강등당하기는 하였지만 제갈공명은 오히려 두사람의 공로를 평가하였는데, 어떻게 군대의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여서 퇴각할 수 있었는지 백묘에게 묻자 자룡의 활약상을 아뢰어 답변하였으며 제갈공명은 이에 감탄하여 자룡의 사졸들에게 보화를 나누어 주려 하였지만 자룡은 겸양하며 국가를 위하여 국고에 저장해두었다가 훗날 공을 세우거든 하사해줄 것을 말하며 사양하였다. - 조운별전 -
[後] 마초 맹기
초평 3년(192년), 한수와 마등은 병력을 이끌고 장안에 이르렀다. 조정은 한수를 진서장군으로 임명하여 금성으로 파견했고, 마등은 정서장군으로 임명해 미현에 주둔시켰다. 후에 마등이 장안을 습격했지만 패배하여 양주로 돌아왔다. 사예교위 종요가 관중을 지켰는데 한수와 마등에게 서신을 보내 화와 복을 말하며 달랬다. 마등은 마초를 보내 종요를 수행하여 평양에서 곽원과 고간을 토벌하도록 했으며, 마초의 심복인 방덕이 곽원의 머리를 베었다. 후에 마등은 한수와 화합하지 못하여 경기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마등을 불러 위위로 임명하고, 마초를 편장군, 도정후로 삼아 마등의 부곡을 이끌도록 했다. - 마초전 -
ㄴ 건안 13년(208), 마등을 위위로 임명했는데 마등은 연로했으므로 마침내 조정에 들어와 숙위했다. 이전에, 조조가 승상이 되고 마등의 장남인 마초에게 벼슬에 내렸는데 받지않았다. 마초는 이후에 사예교위를 수행해 곽원을 토벌했는데 곽원을 무찌르고 그 머리를 베었다. 서주자사로 삼고 이후에 간의대부로 임명했다. 마등이 입조할 때 마초를 편장군으로 임명해 마등의 군영을 통솔하도록 했다. 또 마초의 동생인 마철과 마휴를 기도위로 임명하여 그 가속들을 모두 업으로 옮겨 오직 마초만이 홀로 남았다. - 전략 -
그 뒤 마초는 한수,양추,이감,성의 등과 연합하여 군대를 진격시켜 군을 이끌고 진격하여 동관에 이르렀다. 조조는 홀로 말을 타고 와서 한수,마초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마초는 자신의 용력에 의지해 몰래 기습하여 조조를 붙잡으려고 했지만, 조조의 측근 장수 허저가 눈을 부릅뜬 채 노려보고 있었으므로 감히 행동하지 못했다. 조조는 가후의 책략을 이용하여 마초와 한수가 서로 의심하도록 만들었고, 그들의 군대는 크게 패했다. - 마초전 -
ㄴ 이전에, 조조가 포판진에서 서쪽으로 강을 건너려할때 마초가 한수에게 말했다. “위수 북쪽에서 조조를 막으면 이십일이 지나지않아 하동의 군량이 다하고 조조군은 필시 도망갈 것입니다” 한수가 마초에게 말했다 “강을 건너길 기다려 중간에 들이치는게 나을것이다” 조조가 이를 듣고 말했다. “마초 이 아이가 죽지않는 한 내가 묻힐 무덤이 없겠구나” - 산양공제기 -
마초는 달아나서 여러 이민족들을 보존했고 조조는 안정까지 추격했지만 마침 북쪽에 일이 발생하여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양부가 조조에게 말했다. "마초는 한신,경포의 용맹을 지니고 강족과 흉노의 마음을 얻고 있습니다. 만일 대군이 돌아가버려 그에 대한 방비를 엄히 하지 못한다면 농상의 여러 군은 나라의 영토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과연 마초는 여러 융족들을 이끌고 농상의 군현을 공격했는데 농상의 군현은 모두 호응하였고, 양주자사 위강을 죽이고 기성을 점거하여 그곳의 병력을 차지했다. 마초는 스스로 정서장군을 칭하고 병주목을 겸임했으며,양주의 군무를 지휘했다. 위강의 옛 관리와 백성인 양부, 강서, 양관, 조구가 함께 모의하여 마초를 공격했다. 양부, 강서는 노성에서 병사를 일으켰고 마초는 출병하여 그들을 공격했지만 점령할 수 없었다. 양관, 조구가 기성의 성문을 닫았으므로 마초는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궁지에 모린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나 장로에게 의지했다. 장로는 함께 큰 일을 도모하기에 부족한 인물이었으므로 마초는 내심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었는데, 유비가 성도에서 유장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밀서를 보내 투항을 청했다.
ㄴ 건안16년(211), 마초는 후선,정은,이감,장횡,양흥,성의,마완,양추,한수 등 관중지방의 여러장수들과 함께 10부를 통틀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병력이 10만에 달했고 하,동관 일대를 점거하고 둔영을 늘어세웠다. 그해에 조조가 서쪽으로 원정했는데 위수에서 싸워 마초 등의 군대는 패주했다. 마초가 안정에 이르렀고 마침내 양주로 달아났다. 조칙을 내려 마초의 가속들을 체포한후 멸족시켰다. 마초는 이후에 한중으로 달아났는데 장로는 마초를 도강좨주로 삼고 딸을 시집보내려 했는데 어떤이가 간언했다. “자신의 혈족을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이 어찌 남을 소중히 여기겠습니까”이에 장로는 이 일을 그만두었다. 마초에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그 처남인 충이 삼보에 머물렀는데 마초와 함께 싸움에 졌고 충이 먼저 한중에 들어왔다. 장로에게 병력을 청해 양주를 공격하고자 했는데 장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장로의 장수 양백 등이 해치려 하므로 마초는 무도에서 저족에게로 달아나다 진로를 바꾸어 촉으로 갔다. 그해가 건안 19년(214)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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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평 - 자룡은 당양에서 맹덕의 군을 맞이하여 홀홀단신 필마단기로 현덕의 자식 공사를 품에 안고 정예기병 수천기의 질풍노도와도 같은 거센 추격과 포위를 뚫고서 끝내 감부인과 아두를 구출해내는 활약상을 보여주었는데, 이때의 위급함은 삼국지 연의에 나타냈던 나관중의 묘사와 매우 흡사하였을 것입니다(병사의 수에서 차이가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예의 조조군을 맞이하여 한편으로는 싸우고 한편으로는 냉철하게 판단하여 지혜롭게 피하여 위난을 면했다고 사료되는 필자인데, 이는 비록 연의에서 보여주었던 나찰과도 같은 극강의 무용과 담력의 묘사는 아니지만 정사에서도 당시에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 후주가 내린 조서와 조운별전의 내용으로서 얼추 가늠해보는게 익히 가능할 것입니다.
혹자들은 자룡이 연의에서처럼 무려 83만에 육박하는 적군의 한복판을 가르고 나간게 아니라 정사에서 불과 몇줄 안되는 지극히 취약하고 짧은 내용만으로 제멋대로 판단하여 "자룡의 당양에서의 활약상은 실상인즉 다 뻥튀기였네, 사실 알고보니 별거도 아니구만. 실망~ㅠㅠ" 이라고 말하며 '호위무사'에 불과 했다느니 '오호대장(관장마황조)'중 서열이 가장 낮은 것은 모두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느니 자룡을 빼고 '문장=위연'을 오호대장의 반열에 넣어서 합류시켜 새로이 재평가를 해야한다 등의 말도 안되는 사견들을 고수하며 자룡의 진실된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제멋대로 난도질을 해대기에 급급한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보아왔습니다.
각설하고, 한마디로 단언컨데 이사람이 당양에서 보여준 활약상은 장판에서 익덕이 보여준 대성일갈 포스 & 운장이 백마에서 보여준 안량참살 포스 등과 비견하여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된다고 하면 아무래도 '활약상의 상세한 묘사'가 연의에서와 달리 정사에서는 없으므로 이점이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결코 공을 낮추거나 까서 될 성질의 것이 아닌 빼어난 무용과 담력을 보여준 좋은 예라고 단정지어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일 것입니다.
이와 비견하여 맹기는 당양에서 자룡이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활약상이랄게 딱히 없는게 사실이며, 홀로 적군을 휩쓸거나 뚫고서 빠져나왔다는 내용이 정사에서 단 한글자도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위략에 의하면 맹기가 어릴적 '문약=한수'의 사위이자 심복이었던 '언명=염행'와 일기토를 벌여 '모=창'에 찔렸으며, 병장기가 그대로 부러지자 거침없이 휘두른 언명의 공격에 목덜미를 얻어맞고 거의 죽음직전 까지 이르렀다가 간신히 기사회생 하였다는 내용이 전해지고 있으니 필시 삼국지의 독자들이나 유저들이 꿈구거나 환상을 품고 바라보는 그러한 극강함의 무용을 지닌 무인은 실로 아니었을 것이라 단정지어 봅니다만 과연 어찌 생각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 고로 [무력]부문에 있어서는 자룡에게 '반수'정도 우위를 점하게 해주더라도 그다지 괴리가 없을 거라 사료되며, [통솔]부문을 평해보죠.
우선 자룡부터 살펴보자면 한중에서 맹덕이 몸소 이끄는 군을 맞이하여 한승과 장저의 무리를 불과 수십기의 병사만을 이끌고서 뚫고 들어가 좌충우돌하며 휩쓸어서 포위를 뚫고는 두 사람을 모두 구출하는 활약상을 보여 주었는데, 여기까지는 일단 자룡의 [무력]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헌데 이 과정에서 퇴각하여 '백공=장익'이 주둔하던 진영으로 들어와서는 '공성지계'라는 오묘한 지략을 발휘하여 맹덕에게 의구심을 품어 더이상 전진하여 다가오지 못한채 고심하게끔 만들어서 끝내는 군을 물려 후퇴하도록 하였으며, 노병을 앞세워서 적의 예봉을 꺽고 계속해서 추격하여 '한수(장강/황하/회수등과 같음, 인물 '한수=문약' 아님.)'까지 몰아세워서 결국 맹덕의 병사들을 물에 빠뜨려 익사하게 만드는 전과를 세웁니다.
이부분은 '통솔'이라는 측면으로 접근해서 바라 보아야 할 것인데, '지력'이라는 영역또한 포함(군략/계략 모두 해당)을 시켜야만 합니다. '임기응변'으로 보시더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며, 일순 처한 상황에 따라서 담대하면서도 침착냉철하게 판단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지모로서 적을 공략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부분을 매우 높이 평가하고 있는 필자 무교인데, 비록 '중업=문빙'도 자룡과 같은 '공성지계'를 발휘하여 '중모=손권'가 이끌었던 대군을 물러나도록 만들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을 물러가게끔 만드는데 그쳤으며 자룡의 경우의 경우는 적을 추격하여 크게 격파를 하였다는 점에서 이미 차별화를 부여해주더라도 하등의 괴리가 없을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라면 '상대적 평가'라는 것인데, 자룡의 상대는 그 당시 후한말에 명멸했던 수많은 군웅중에서 가히 세손가락 안에는 능히 꼽힐 수 있는 당대의 군략가인 맹덕이었으나 중업의 상대는 수도 없이 많은 싸움에서 몸소 대군을 이끌고 지휘하였음에도 늘 '결과적 승률'이라는 측면(물론 능력까지 함께 포함되는)에서 별볼일 없었던 인물인 중모였다는 점에서 이미 차이점은 극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맹기의 활약상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지요, 자룡의 한중(정확히는 '북산=면수 부근 일대')싸움에 비하여 그다지 떨어지지 않는 싸움이라 하면 아무래도 장안(정확히는 '포판=위수 부근 일대')싸움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싸움에서 맹기는 도하중이었던 맹덕의 군을 습격하여 철저하게 유린하고 짓밟았는데, 늘 맹덕의 곁에서 수행하던 그의 '호위무사(호위무사라는 명칭은 정말이지 자룡에게 가져다 붙힐 성질의 단어가 아니지요, 이것에 어울리는 인물이라 하면 '중강=허저'혹은 전위뿐이 아닐까 사료됩니다.)'였던 중강의 괴물과 같은 활약이 없었더라면 맹덕은 그야말로 물귀신이 되어 수장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헌데 이싸움의 아쉬움이라 하면, 자룡처럼 내용의 묘사에 있어서 소상하지가 못하다는 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싸움의 가치라 하면 단순히 도하중인 맹덕의 군을 습격하여 절명의 순간까지 몰고 간 것만으로 매겨서는 지극히 위험한데, 그 이유라 하면 이때의 싸움에서 '서북지방(옹주/양주=관서)'의 군벌들이 모두 하나같이 합심하고 일치단결하여 들고 일어났다는 점에 있습니다. 맹기의 부친이던 '수성=마등'이 조정으로 들어간 것은 208년이고, 맹기가 한황조에 모반의 깃발을 올려 반란군을 규합하여 군벌들의 '맹주'격으로 표상되었던 것은 211년의 일입니다(현덕군에 귀의한게 214년). 즉, 맹기가 아비의 장졸과 군대를 물려받아 군벌들에게 '실력행사' 이건 '회유'이건 간에 모두 끌어들여 하나의 통합된 군세로서 확장하여 자리잡는데 걸린 시간이 불과 3년밖에 안된다는 점이지요.
정리하자면 자룡과 맹기의 우열론에 있어서 [무력]은 자룡에게 반수의 우위, [통솔]은 맹기에게 반수의 우위
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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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는 패륜아?]
삼국지연의에서 마초가 대(對)조조전에서 보여줬던 활약은 그야말로 일기당천의 용장. 서량의 금마초란 이름이 결코 허명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붉은 전포를 벗어던지고 수염을 깎아가면서까지 도주한 조조는 가후의 이간계를 써서야 마초를 간신히 격퇴시키죠.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마초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지에 몰아가며 반란을 일으킨, 사적으론 패륜아였고 공적으론 반역자였습니다.
실제 기록을 근거로 마등과 마초의 행보를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동탁과 이각& 곽사 콤비가 차례대로 조정을 농락하고 혼란을 가속화 시킬 때 마등 수성은 병주(서량은 훗날의 명칭으로 이 당시엔 병주라고 불렀습니다. 앞으로는 서량으로 쓸 것이나 유의해 주시기 바랍니다.)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그 반란의 목표가 헌제인가, 아님 역적 동탁과 그 잔당들이냐에 대해 확실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마침 내부에서 한수 등과 불화가 심해지자 마등은 조정에 표를 올려 중앙에서 섬기고 싶다는 뜻을 전합니다. 이것이 수용되어 마등은 위위로 조조와 같이 일하게 되지요.
즉, 삼국지연의에서 조조가 헌제의 칙명을 조작해 정남장군이란 작위를 미끼로 불러들인 후 무참히 죽인 것이 아니라 "마등이 자진해서" 조조에게 간 것입니다. 조조는 마등을 푸대접하진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마등 역시 제법 순조로운 중앙에서의 생활을 보내지요. 이러한 그의 운명을 뒤집어 엎는 사건이 벌어지니 바로 마초의 반란입니다.
조조가 종요 등에게 명해 한중의 장로를 침공하라 명하고 종요는 군을 이끌고 관서 일대로 이동합니다. 이때 마초를 비롯해 대다수의 강족과 병주의 세력가들이 조조의 군대를 보고 자신의 기득권을 빼앗을 거란 오해를 하고 그러한 두려움으로 결국 반란을 일으키지요. 마등은 즉각 반역자의 아버지가 되어 버려 처형되는 비운을 면치 못합니다.
여담으로 당시 이 사건을 두고 중원의 유학자들은 마초를 "아비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패륜아" 라고 맹비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초는 이러한 비난에 굴하지 않고 군을 이끌고 조조의 진압군과 맞서 싸우나 패퇴하고 촉으로 도주하지요. 촉은 마초의 효용성을 높히 판단하고 그를 받아들이기에 이릅니다.(혹자는 이것 때문에 마초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동한복고란 최대 슬로건을 내걸고 있는 유비가 동한의 반역자인 마초를 받아들릴 리 없다는 것이 이 주장의 골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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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와 조조의 위수대전은 조조의 완승이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마초 맹기가 아버지 마등과 동생들 마휴, 마철 등의 복수를 위해 한수와 의기투합해 조조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조조군의 용장 허저와 호각으로 승부를 겨루고 조조가 전포를 벗어 던지고 수염을 깎고 투구를 팽개치면서 까지 마초의 용맹을 무서워하며 도망쳤는데 한가지 재밌는 것은 이것은 95% 이상 나관중이 지어낸 허구란 것입니다. 실제 역사에선 오히려 조조의 완승이었지요.
우선 마초가 가족들의 복수를 위해 거병한 것 자체가 허구입니다. 당시 마등은 자신이 자진하여 허도에 입성해 위위란 벼슬로 헌제를 보필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조조가 종요에게 명해 한중 정벌을 명하자 서량의 세력가들이 종요군을 자신들의 기득권 박탈을 위해 온 공격군으로 착각. 반란을 일으키지요. 결국 마등 수성은 졸지에 반역자의 아버지가 되어 불귀의 객이 되고 이를 말미암아 중원의 유학자들은 마초를 "아비를 사지에 몰아 넣어 죽인 패륜아."라고 맹비난 했습니다. 조조로썬 명분이 갖춰지고 또 한중을 비롯해 대외전에 있어 서량의 평정의 필요성이 느껴져 조인, 하후연, 허저 , 장합, 비요, 가후 등을 이끌고 자신이 몸소 총대장이 됩니다.
조조는 조인을 선봉장에 삼고 하후연을 별동대로 보내 적군의 텅 빈 세력을 공격하라고 명합니다. 하후연이 떠나고 마초는 한수, 마대, 방덕, 양의, 양추, 성감 등 휘하 무장들과 아버지들의 동료를 긁어모아 조조군을 요격하지요. 하지만 조인, 장합 등의 활약으로 연패를 거듭합니다. 다급한 마초가 기습전을 시도해 한 때 조조의 본군을 궁지에 몰았으나 허저의 분전으로 조조의 목을 베는덴 실패하고 자신을 큰 소리로 비웃으며 강을 건너는 조조를 놓치고야 맙니다.
마초가 한 때 자신들의 아들들을 인질로 보내는 댓가로 조조와의 타협을 요청했으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계속 정벌을 감행합니다. 이때 가후가 간하지요.
"저들은 겉으론 단결되어 있으나 속은 그러하지 못하니 이간계를 쓰면 자중지란을 일으켜 무너질 것입니다. 그때를 틈타 공격하면 필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수는 전부터 마등과 마초 부자와 전략에 여러가지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는데 가후는 고의적으로 중요 부분을 지운 편지를 보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초가 편지를 요구하고 한수가 그 편지를 보여주나 중요 부분이 지워져 있으니 읽을 도리가 없었지요. 의심의 늪에 빠져든 것입니다.
상황이 어수선하게 되자 조조는 용기를 내 총공을 명하고 이 상황에서 마초와 마대는 대패해 도망쳤으나 서량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후연의 활약으로 저왕을 비롯해 대다수의 군대가 대파되었기 때문이지요. 결국 이들은 한중을 거쳐 유비에게 도망가게 되고 조조는 완승을 거둡니다. 실제로 사학자들 역시 위수대전을 조조의 병법적 재능을 가장 유감없이 보여준 전투로 손꼽지요.
그렇다면 나관중은 왜 이 사건을 이렇게까지 왜곡한 것일까요? 그의 입장에서 촉나라 오호장군이자 관우, 장비에 버금가는 용장으로 설정한 마초가 다른 사람도 아닌 악당 조조에게 휘둘리는 것이 심히 거슬리는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수대전에서 <삼국지연의>는 완승을 거둔 조조가 엉뚱하게 완패한 자로 나오게 되고 마초는 천하의 둘도 없는 용장으로 둔갑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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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마등과 마초 부자는 우국지사였을까?]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 연의를 살펴보면, 마등이 자신을 주살하려고 했던 사실을 알게 된 조조가 마등을 불러들여 죽이는 것으로 나옵니다. 마등은 서량의 군벌로서 북방의 유목민 호족과 많은 전투를 벌이고, 동시에 동맹을 맺으면서 그들의 지지를 받던 인물이었죠. 그런 마등이 조조의 음모(?)로 죽자 아들인 마초는 분개하며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공략합니다. 조조는 급히 군사를 이끌고 마초와 전쟁을 벌여 고전 끝에 마초를 한중으로 쫓아내는 데 성공하죠. 이후 마초는 이민족 부락과 한중 등을 떠돌다 유비에게 투항해 유비의 장군이 됩니다. 이렇게 삼국지 연의에서 마등과 마초 부자는 분명히 우국지사고, 조조는 악랄한 인물로 등장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게 사실일까요?
삼국지 정사 속의 마등과 마초를 살펴보면 그들이 우국지사일 리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마초는 그럴 수도 있지만, 마등은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습니다.
본래 마등은 중국 서북방 이민족과 상당히 친했습니다. 마등의 어머니가 이민족이었으니까요. 그런 배경으로 마등은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얻기 시작하는데, 그 와중에 친해진 사람이 바로 한수입니다. 그리고 마등과 한수는 왕국의 휘하에 들어가 한나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 반란군은 후한 최후의 명장인 황보숭에게 토벌당하고, 마등과 한수는 반란군의 수장인 왕국을 죽임으로써 한나라에 투항해 관직을 얻게 됩니다. 이게 마등의 진정한 시작이지요. 한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자신의 주군을 배반하고 관직을 얻어내는 센스(?)를 갖춘 군벌.
당시 마등, 한수 등이 있었던 장안 서북쪽 지역을 양주라고 불렀는데, 이 양주에 동탁이 오게 됩니다. 동탁은 마등, 한수, 이각, 곽사, 장제 등 여러 군벌의 수장을 규합해서 힘을 기른 뒤 모두가 잘 아는 '동탁의 난'을 일으켰지요. 비록 마등은 직접 동탁의 난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후 동탁이 죽은 뒤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장악하자 허리를 굽히고 들어가 관직을 얻습니다. 그런데 마등은 또 배신을 꿈꿉니다. 폭정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익주(촉)를 장악하고 있던 유언과 함께 이각, 곽사를 공격한 것이죠. 하지만 이번 배신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수만 명의 군사로 공격했지만, 1만 명이 죽는 참패를 당하고 양주로 도망쳤거든요. 애초에 이 공격은 중국의 다른 군벌의 호응도 얻지 못했어요. 마등, 한수는 몰라도 익주의 유언은 풍요로웠던 땅 익주를 피폐하게 만든 막장 정치가였으니까요. 그런 막장과 힘을 합친 마등을 세상이 긍정적으로 볼 리 없지요. (이 유언의 아들이 유비에게 익주를 넘겨주는 유장입니다.)
양주로 도망친 마등은 그간 함께 여러 전쟁을 겪어온 한수와 의형제가 됩니다. 그런데 이 배신의 아이콘들이 잘 지낼 리 없죠. 의형제 맺은 걸 깜빡 잊기라도 한 것처럼 싸우다 한수가 마등의 처자를 죽인 뒤 양주 끝으로 도망칩니다. 그리고 이후 몇 차례의 전투가 있었던 모양. 나중에 화해하긴 합니다만, 원한은 남았을 테지요. 어쩌면 한수가 죽인 마등의 처가 마초의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마등과 한수는 화해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또 싸웁니다. 마등은 이 싸움을 피해서 원씨 일가와 조조 둘 중의 하나를 섬기기로 하고 마초를 남겨서 군사를 인솔케 한 뒤 결국, 조조 아래로 들어가버리죠.
살펴본 것처럼 마등은 우국지사와 한참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한나라를 뒤엎으려 했던 역당 중 한 사람이었달까요.
마초는 마등이 조조의 아래로 들어간 뒤 조조의 요청에 따라 곽원을 토벌했습니다. 이때 마초는 부상을 입었음에도 온 힘을 다해 군사를 이끌어 곽원을 쳤고, 부장으로 나섰던 방덕이 곽원을 죽입니다. 마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죠. 그리고 긴 시간이 흘러 212년. 마초는 한수와 손을 잡고 양옹주의 10만 대군을 인솔해 장안을 공격합니다. 이 공격이 문제인 게 아버지인 마등을 비롯해 마초의 일족 대부분이 조조 아래에서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쉽게 말하자면, 마초는 자신의 일족 전체를 죽인 거나 다름없습니다. 게다가 마등과 원수지간이었던 한수와 힘을 합쳤다는 것도 문제였어요.
어쨌든 마초의 공격이 꽤 매섭긴 했던 모양입니다. 당시 조조의 진군을 살펴본 마초가 하동 주변으로 군사를 보내 진군을 끊고, 위수 북쪽을 막아서 보급을 어렵게 하면 조조를 이길 수 있다고 말하는데, 한수가 단박에 거절합니다. 삼국지 연의에선 한수가 '책사'처럼 나오고 마초는 용맹한 무공으로 적을 참살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실제론 한수가 마초의 탁월한 계책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 계책을 들은 조조는 깜짝 놀라며 마초를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다짐했다 합니다. 섬뜩했던 거겠죠. 게다가 마초는 조조가 도강하던 당시 1만 군사를 이끌고 조조의 부대를 집중 공격해서 와해시킨 뒤 도망치는 조조를 향해 화살을 퍼부어 죽일 뻔 했습니다. 허저가 아니었다면 자신이 죽었을 것이라 술회했을 정도로 조조를 위협했던 순간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발목을 건 것이 바로 마씨 일가와 한수의 깊은 원한이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한수는 마등과 수없이 싸웠고, 마등의 처자를 죽이기까지 했으니까요. 마초가 한수와 힘을 합치긴 했지만, 한수를 완전히 믿을 리 없었죠. 이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가후(가후는 본래 무위 출신으로 양주의 군벌에 빠삭한 인물입니다.)의 이간책에 휘말린 마초는 한수와 불화를 일으켰고, 조조의 강력한 군대에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일족 전체를 죽이는 행위를 해놓고 너무 손쉽게 계책에 휘말린 감이 없잖아 있어요.
이후 마초의 반란으로 말미암아 역모죄에 해당되어 마등을 비롯한 마씨 일가 대부분이 처형당하게 됩니다. 이에 마초는 또다시 군사를 일으키지만, 예전 같은 강병이 아니었는지 수차례 패배하기를 반복하다 유비에게 투항하게 되지요.
왜 뻘글엔 처자사진인지 알고 싶으면 500원.
보시다시피 마등과 마초는 우국지사와 한참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저 나라를 휘어잡고 싶었던 군웅이었을 뿐이에요. 게다가 마초는 꽤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지만, 마등은 기록만 보자면 재능조차 그리 뛰어나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말년엔 아들 때문에 일족이 몰살당했으니 안타깝기까지 합니다. 얼마나 많은 일족이 죽었냐면, 마초가 죽을 때 유비에게 '대를 이을 사람이 많지 않으니 마대를 잘 보살펴주십시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군벌을 통솔하는 군웅에서 순식간에 장로의 객장으로 추락했다가 유비의 관장마황조의 한 사람이 되어 간신히 이름값을 했군요. 안타깝기는 마초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네요.
흥미로운 에피소드들
1. 마초는 한수의 부장이었던 염행과 싸웠다가 목을 찔려 죽을 뻔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 이건 위나라에 대항한 인물을 막장으로 까내리는 '위략'의 기록이기 때문에 반신반의하고 있어요.
2. 마초는 조조와의 회담에서 조조를 죽이려고 했으나 허저가 뒤를 지키고 있어서 포기합니다. 조조 자신도 누군가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무인이라 만만치 않을 마당에 허저까지 있었으니 포기할 수밖에요.
3. 마초는 유비를 '현덕'이라고 부른 적이 있습니다. 화가 난 관우가 마초를 죽이려고 했는데, 유비가 괜찮다고 말립니다. 그러나 관우와 장비가 어떤 인물입니까? 가만히 있을 리 없죠. 유비와 마초가 다시 마주했을 때 관우와 장비는 아예 유비 옆에서 무장을 하고 마초를 뚫어지라 쳐다봤고, 마초는 그 이후 유비를 현덕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아, 뻘짓하다 관우와 장비한테 죽을 뻔했구나." 라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기록은 믿을 수 없는게 당시 관우는 익주가 아니라 형주에 있었거든요. 잠깐 익주로 왔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기록이네요.
4. 마초는 거병했을 때를 제외하면 이긴 전투가 거의 없습니다. 하후연에게 패배한 뒤론 전장에 나섰다는 기록도 거의 없지요. 유비의 익주 정벌과 한중 정벌에 참전했을 게 분명한데도 기록이 없는 건 왜일까요?
5. 방덕은 곽원을 죽였지만, 자기가 죽인 줄도 몰랐다고 합니다. 곽원 토벌은 마초의 통솔과 방덕의 용맹이 조화를 이룬 전쟁이었던 셈. 참고로 방덕은 관우의 이마에 화살을 맞춘 인물으로 결국, 관우에게 잡혀 죽습니다.
마초는 조조를 죽음 문턱까지 몰고갔던 맹장이지만
그 전투로 인해 아버지, 형제, 처자식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 후로 촉나라로 옮기게 되었고 오호대장군까지 오르지만
입촉한지 5년만에 사망...-_-
합니다.
마초 사망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요. 유비가 마초에게 자살 명령을 내렸다는 말도있고
제갈량이 처형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마초 생전에 보여준 활약은 그러한 음모론을 잠재우기 충분한 공적이었고
단명하지 않고 조금만 더 오래살았더라면
제갈량 북벌때 마대와 더불어 톡톡한 공을 세웠으리라 추측해봅니다.
처자식과 부모를 잃고 촉나라에 건너가서 유비를 섬겼는데
충성하게 된 일화가 꽤나 흥미로워서 공개합니다.
마초는 유비가 그를 후하게 대우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유비와 대화할 때는 항상 유비의 자(字)를 불렀다. 관우는 이 점을 노여워하며 그를 죽이기를 원했다. 유비는, "사람들이 나에게 돌아오고 있는데, 그대들은 화를 내며 나의 자를 부른 사람을 살해하려고 하니, 천하에 무엇을 보일 것입니까!" 라고 했다. 장비는, "그러면 그에게 예를 가르치도록 하십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대회의를 열어 마초에게 안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관우와 장비는 칼을 쥐고 서 있었다. 마초는 좌석을 둘러 보았지만, 관우와 장비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유비 곁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며, 다시는 유비의 자를 부르지 않았다. 다음날 탄식하며 "나는 오늘 내가 패배한 까닭을 알았다. 군주의 자를 불렀기 때문에 관우와 장비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후로는 경의를 갖고 유비를 존중하여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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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원래 좋아했던 인물이라면 몇개의 글은 제가 씁니다만 거의 대부분 퍼옵니다 ^^
삭제된 댓글 입니다.
관우, 장비입장에서는 어디서 갑자기 굴러들어온 돌이 있나 그랬을테죠. 그만큼 유비와 제갈량이 마초를 인정해주어서..
질투아닌 질투가 작용했을 거라봅니다. 그리고 촉한에서도 여러가지 파가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마초는 대표적인 귀순파였고, 관우장비세력과 제갈량을 따르는 세력에 많은 견제를 받았다고 볼수있습니다..
감녕도 올려주세요~
네~ 수전과 병기에 능한 감녕.. 곧 할 예정입니다.
장문원도 부탁드려요!!
넵 ㅎㅎ
관우가 제갈량한테 마초랑 나중에 누가 위냐고 물어보는 편지를 쓴거만 봐도 마초에 대한 견제가 얼마나 컸을지는 안봐도 뻔하죠.형주에 있던 관우도 그럴진데 중앙쪽은 말할필요도 없겠죠.마초는 제후로 유비와 대등한 위치에 있다가 망해서 밑으로 기어들어왔는데 여기저기서 갈구고 허탈해서 일찍 죽었을듯....사장하다가 망하고 아는회사 힘없는 이사자리 하나 쥐고왔는데 부장 과장한테 개까이면 살맛 안나죠.
제일 좋아하는 장수 마초네요 잘 읽고
갑니다 관우가 마초를 견제 했다는건
몰랐네요ㅎ
마초가 존나 매력있는게 중후반에 갑자기 나타나서 잘생기고 쌈잘하는 넘이 무대뽀로 조조랑 맞짱 떠버리는 포스를..
좀 무식하고 촉군 입성뒤 활약이 없는게 아쉽지만
제2의 여포 하지만 마초밑에 있었던 후에 조조의 장수가 되는 방덕이 마초보다 뛰어나다고 봅니다.
마초맨 이 여기서 유래된 말인가요?
마초기질.. 할때 그 마초인가요?
하나하나 많이 배웁니다
마초간지
금마초
맹기
맹구친구아님?
제 생각에 마초가 중용되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 제후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미 자신의 수하로 들어왔지만 한때 제후 출신으로써 조조를 공격하기까지 한 마초에게 병권을 주고 크게 중요시켰다가 만약 마초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그건 진짜 그건 수습할려면 엄청난 낭패기 때문에 중용하기보다는 변방에 내버려두고 마초의 이름을 이용하여 지키는 쪽으로만 쓴게 아닐까 합니다. 이릉전투에서 하다못해 마초만 데려갔어도 혹시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마초를 쓰기에는 이 제후 출신이라는게 너무나 위험한 부담인지라 그런것 아닐까 합니다.
이 의문점을 풀기위해서는 먼저 촉한에서의 마초의 입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유비의 입장에서 명문 무가의 전통있는 집안 출신인 자가 갑자기 자기에게 망명요청을 하는 겁니다. 뭐 물론 게임할때 마초가 등용되면 아싸!! 마초 이제 바로 써먹어야지!! 이런 마인드가 가능했겠지만
실제로는 많은 견제와 무시못할 파벌관계가 있었던 거죠. 정사에서의 마초는 유비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깁니다.
우리 마씨가 결국 이렇게 되어서 안타깝다. 마대에게 후일을 모두 맡겼으니 잘 부탁드린다면서 이 이상 바라는게 없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만봐도 얼마나 마초의 촉한에서의 생활이 비운의 생활이었는지 짐작케 해줍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건
마초가 입촉할 당시, 유비진영은 이제 막 건국한지 얼마 되지않아 정비되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나라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를 북방 망명장수에게 덜썩 줄순 없었겠죠.
그리고 너무 일찍죽어 중용될 기회가 오기전에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욱 중용시기를 놓쳤던것 같습니다. 즉, 견제와 파벌관계 그리고 마초의 단명이 중용되지 못한 이유중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다고 봅니다.
삼국지 보다보면 제갈량이 은근히 개씹새끼라는걸 느낄수있음..
음.. 어떤 내용에서 그런걸 느끼셨는지 궁금하네요!!
잘못알고 있으신듯 합니다. 제갈량의 관우 제거설이나 권신설등 많이 있지만 근거가 없지요. 안량 방심설이나. 위연의 자오곡 계책 이상으로 허무맹랑한 소립니다.
조조와의 전투 이전에 이미 마등,마휴등 가족은 죽엇습니다. 그 전투에선 처자식이 죽엇죠
그건 연의에서의 기록이구요. 연의에서는 마등,마휴가 먼저죽고 마초가 조조에게 복수를 하기위해 거병한 설정으로 나옵니다만, 실제 정사의 기록은
1. <건안 16년(211년) 가을 9월 경술일(15일), 조조가 위남에서 한수, 마초와 싸워 한수 등이 대패했고 관서가 평정되었다.>
: 211년 마초가 한수,이감,성의,양추와힘을 합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 이유는 마등이 조정에 입조할 때에 조정에 우호적이었던 마등의 태도에
불만을 갖던 서북의 군벌(대표적으로 한수)들이 마등이 입조를 하자 마초를 꼬드겨 난을 일으킨거죠.
2. <건안 17년(212년) 여름 5월 계미일, 위위 마등을 주살하고 3족을 멸했다>
: 그러나 허저와 가후의 계책으로 마초가 패배한 뒤에 마등이 그것에 연루되어 참수되었습니다.
결국 마초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위해 병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마등은 이미 그 당시 서량에 없었고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모든 서량군의 실세는 마초였습니다)
마초와 그 무리가 일으킨 전투로 인해 일가족이 참수당합니다 ^^ 연의를 역사적 사실로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
바보도 아니고 착각안해요..; 저부분에 대한 정사와 연의의 내용차이를 몰랏을뿐이에요...
억 ㅠ 미안합니다 연의를 진짜 사실로 생각하시는분들이 계셔서 혹시나해서 말한겁니다^^ 그리고 연의를 진짜로 보는게 원래 당연한 겁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나왔던 삼국지 이야기의 99프로는 거의 연의를 바탕으로 쓰여진거고 당연히 우리는 그것이 삼국지의 진실이라고 볼수밖에 없었던거죠
저또한 연의삼국지를 최근 몇년전까지만해도 진실인줄 알았다는..ㅋㅋㅋ
금마초!
이런글 너무 잼있네요 ㅎ 또올려주세요 ㅎ 삼국지 또 읽고싶어지네 ㅎ 조운에 대한이야기도 재미있던데.
그리고 감녕에대해서도 알고 싶네요. 살제론 감녕의 전투력수준이 여포와 맞먹었다고 하던데
그런 사실 없습니다. 사실 정사상 여포 자체도 조인 장료 관우 등 보다 강하지 않다는게 정사를 공부하신 대다수 분들의 평가죠. 여포는 정사상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군벌이었던거지 그 자신의 무력이 소설처럼 대적할자가 없을정도로 강했던건 아닙니다. 뭐 최상위 무장중에 하나긴 한데. 소설에선 너무 과장이 컸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