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로즈힐
PM 9:55
야간근무조는 10시 출근이다.
은석이 아까부터 초조한 기색으로 연신 시계 바늘만 쳐다봤다.
빨리.. 빨리..
은근히 걱정도 되었다.
과연 올까!? 오지 않더라도 사무실로 내려가 만날 작정이었다.
시계 바늘은 어느 새 10에 꽂혔다.
“똑똑~”
정확히 5분 뒤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은석 얼굴에 활짝 미소가 피었
다. 옷 매무새를 바로 하고 의자에 정자세로 앉았다. 손바닥만한 탁상 거울로 자
기 얼굴을 비춰봤다. 흥분하지 않고, 최대한 여유스런 얼굴로 보이려 애썼다.
딱. 누군가 문 넘어에서 마스터키로 문을 땄다.
혜선이었다.
혜선이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은석을 또렷이 바라봤다. 긴장했던 걸까, 은석은
빤히 바라보는 혜선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다.
“어? 왔어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그러면서 어색한 몸동작으로 손목시계를 봤다.
“불편하신 게 있으십니까, 사. 장. 님?”
혜선이 사장에 힘을 주었다.
눈치 못 챌 은석이 아니었다.
“왜 그러죠?”
“그 날 무슨 일이었죠?”
“뭐라구요?”
“제 기억으론 아무 일 없던 걸로 아는데 억울하네요. 부서 식구들한테 눈총 받고
나이트 근무까지 하게 되었으니까요...”
“아무 일 없었다고 생각해요?”
당당하던 혜선이 움찔했다.
“그.. 그럼요. 없었죠...”
“어떻게 그렇게 자신하죠? 술에 취해 쓰러진 사람이.....?”
“그거야.....”
은석이 깍지 끼고 턱을 괴었다.
“장혜선씨....”
“...........?”
“굳이 나한테 본인 부서와 이름을 밝힌 이유가 뭐죠?”
“언.. 언제요? 그런 적 없습니다.”
은석이 재밌다는 듯 실실 웃었다.
“그것도 기억 없습니까?”
“..........”
“장혜선씨가 기억하는 건 뭡니까?”
‘웨이브 머리...
길몽인 줄만 알았던 꿈이 이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
꿈 속에 당신이 현실에서 나타난 것...
그래서 운명이라 여겨 내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
그것만 기억해요...
그러니 날 놀리듯 묻지 마요...’
혜선이 자격지심을 느꼈던 걸까. 이 운좋은 재벌 2세 앞에서 꿇리고 싶지 않았다.
좀 더 당당해 지고 싶었다.
“절 부르신 용무가 있을텐데요?”
“하긴 그걸 묻고자 혜선씨를 부른 건 아니니까..”
당장 뛰쳐 나가고 싶어.
내가 작아져야 하는 거 기분이 나쁘다.
“장혜선씨가 내 방을 정비해줬으면 좋겠는데.....”
“싫습니다.”
망설이듯 말하는 은석에게 혜선은 딱부러지게 말했다.
“싫다고?”
“네. 싫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휙 돌아서 문고리를 잡았다.
“들어오는 건 자유지만 나가는 건 내 뜻이라고 했는데!”
은석도 적당히 기분이 상했다. 어제부터 오늘밤만 기다렸는데 이렇게 뒤틀리는 건
예상 못했고, 원치 않았다.
“당신에게 맞춰 줄 하녀가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아. 한 분 추천해드리죠... 연회
장에서 만났던 금발 머리 아가씨 어때요? 당신 말이라면 끔찍해보이던데....”
혜선이 냉정하게 나가버렸다.
어이없는 은석이 상체를 일으켰다 철퍽 앉았다.
“가난이 자랑이고, 자존심이라는 건가.
너 같은 여자들 얼마든지 신물나게 만났어.
겉으론 부자를 욕하면서도 언제라도 그 끈을 잡고 싶어하지.
그게 가난의 본성이야.”
“그 말에 책임져야할 거야. 날 조롱한 댓가를!”
은석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주먹을 쥐었다.
호텔 로즈힐
과장이 카트를 챙기고 있던 혜선을 찾아왔다.
“오너랑 무슨 사이야?”
“..........”
대꾸하기 싫어 린넨만 챙겼다.
“장혜선씨... 무척 이기적이네.”
“퇴근 안하세요?”
“해야지... 대답만 듣고.”
혜선이 한숨을 쉬고 허리를 잡았다.
“아무 사이 아닙니다. 됐죠?”
“뭐가 아냐. 오너가 전부터 알던 사이라는데......”
“그냥 하는 소리에요.”
“그래서, 오너 방 갔더니 뭐라셔?”
“객실 정비할 룸메이드가 필요하신 모양이에요...”
“자기보고 해달래?”
“싫다고 했어요.”
“왜?”
“왜라뇨... 야간조로 왜 왔는데요?... 오너층만 제외한 객실방만 정비하도록 해주
세요..”
과장은 더 이상 말을 붙이지 않고 뒷걸음 치듯 가버렸다.
날 갖고 놀 생각하지 마요.
드레스를 대신 배상해 준 건 고마워요,
술 취해 쓰러진 날 따뜻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재력이 뭐든 걸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 하지 마요.
이 이상 불편하게 하지 마요....
“퇴근해?”
혜선이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고 있었다.
“어, 아저씨!”
승준이 해맑게 웃어보였다.
“처음 야근 근무 일텐데... 괜찮았어?”
“음... 아뇨. 전혀요.”
“왜? 무슨 일 있었어?”
“글쎄요. 일이라면 대단한 일이 벌어진 거 같은데.... 무감각한 건 또 뭐죠?”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아저씨 보고 이해해달라는 건 아니에요.”
“........ 아침 먹었어?”
“네. 막 직원식당에서 먹고 나오는 길이에요.”
“그럼 차 한 잔 할래?”
“아저씨가 살 차례에요!”
“풋...”
혜선이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승준은 뒤를 졸졸 따라 걸었다. 한 눈으로 체어맨을
찾아 앞에 섰다.
“호텔 커피 말고, 나가요!”
“어딜?”
“아는데 없으세요?”
“아홉시도 안됐는데 이 시각에 여는 데가 있을까.”
“없나!?”
승준이 고민하다 차 문을 열었다.
“가자.”
“어딜요?”
“잘 아는 집.”
혜선이 피식 웃었다.
승준이 제법 먼 곳까지 페달을 밟았다. 혜선이 의아해 하며 낯선 길을 두고 두고 봤
다.
“아저씨 출근해야되잖아요?”
“괜찮아.....”
어느새 승준이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었다. 혜선도 이 아침햇살을 받으며 드라이브
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덜컹덜컹~
콘크리트가 깔리지 않은 바닥에서 흙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아직 멀었어요?”
“아니.. 저기 물레방아 보이는 집이야.”
혜선이 고개를 빼 보았다.
아담한 통나무집 옆으로 물레방아가 힘차게 돌고 있었다. 자갈이 깔린 마당으로 체
어맨이 부드럽게 멈췄다. 자동차 브레이크 소리에 찻집 안쪽에서 주인이 나왔다. 희
끗희끗 나이든 중년 부인이 점잖은 한복을 차려입고 나왔다.
“아이고. 왔는가.”
무척 기다린 사람처럼 승준을 다독이고 매만졌다.
혜선이 정겨운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어서 들어가...”
중년 부인이 언뜻 승준 옆에 서 있는 혜선을 봤다. 혜선이 겨우 목례하듯 인사했다.
찻집 안에 들어온 그 둘 앞으로 따뜻한 모과차가 놓여졌다.
“아가씨는.....”
중년부인은 혜선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같은 호텔에서 근무해요.”
승준이 앞서 말했다.
“그래.....”
부인은 실망한 듯 보였다.
"나이가 어떻게 되요?"
"이제 스무살 넘어가요."
"젊네..."
"그럼요. 아저씨한테 비교하면 안되죠. 아직 이팔청춘 꽃띠에요."
"......."
부인은 고개만 끄덕일뿐이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나갔다.
뒷마당으로 작은 연못과 기이한 조각상들이 있었다. 혜선이 신기한 듯 꼼꼼히 살펴
봤다.
“와, 대단하다”
미술관에라도 온 듯이 조각상이며 그림이며 종류도 다양했다.
“대체 누구 솜씨일까.”
혜선이 발길을 멈춰 구경하는데 열중이었다.
“이제야 마음이 놓이네.”
부인이 승준을 쓸쓸히 바라봤다.
“장모님. 그런 거 아니에요.”
부인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장모님!”
승준이 속상해 큰소리를 냈다.
“아니면 자네가 이곳에 저 아일 왜 데려왔겠는가.”
“그냥 직장동료인데 차 한잔 마시러 왔습니다.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무 생
각 없었다구요...”
“내 욕심이 지나쳤네. 아리도 편히 떠나겠군.”
“장모님!!”
승준은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자네 잊지 말게. 이 공간은 자네와 아리, 그리고 은아만의 공간이야. 자네 기억하
게!”
갑자기 애같이 구는 장모님이 미웠다. 혼자 사는 장모 안부 겸, 정말 직장동료와
차 한잔 마실겸 왔을 뿐인데... 그런 단순한 행동에 기막힌 이유를 붙이시다니.
화장실을 다녀온 혜선이 빈 테이블을 봤다. 어디로 갔는지 중년부인과 승준이가 보
이지 않았다.
혜선이 승준이 발견한 건 주차된 차 안이었다.
“뭐에요. 아저씨!”
혜선이 올라탔다.
승준은 대꾸 없이 시동을 걸었다.
“나 아직 차 다 안 마셨는데...”
“나중에 사줄게.”
“네.....”
“.......”
“근데 뒷마당 굉장하던데요. 미술관 같아요. 누구 작품이에요?”
“....... 은아 엄마.”
은아 엄마....
“아! 아저씨 부인이요? 와, 예술가인가봐요. 신기하던데... 저런 걸 전시회하지 않
고 뒷마당에 꼭꼭 숨겨둬요?”
“건축설계사였어.....”
“였다니뇨? 지금은 쉬세요?”
“......... 죽었어.”
승준 눈가에 이슬이 고였다.
“죄... 죄송해요. 안하셔도 될 말, 하게 해서 죄송해요...”
혜선이 룸미러 옆으로 달랑거리는 아기 사진을 봤다.
어딘가 허전해 보였는데...
이유가 있었어.
이럴 때는 위로 하지 않는 게 위로가 되는 거야.
혜선이 가만히 창밖을 봤다.
승준이 올 때와 달리 흥겨운 콧노래도 미소도 사라졌다.
6
호텔 로즈힐
한스 골프클럽.
두꺼운 유리창밖으로 강사가 몇 몇 수강생을 대상으로 실기교육을 하고 있었다. 금
발머리의 미주가 화난 듯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화난 건 아니었다. 그
녀 손에서 연신 통화음만 울리는 핸드폰 때문이었다.
“대체 뭐하길래 전화를 안 받아!!”
미주는 성질대로 핸드폰을 벽에 던졌다.
찻잔을 들고 들어온 비서가 깜짝 놀라 피했다.
“이사님...”
“오늘 오후 미팅 캔슬해.”
“하지만 아침에 장관님 사모님께서 직접 전화걸어 미팅 시간까지 확인 하셨습니
다.”
“장관이면 대수야! 바쁘다 그래.”
“네... 이사님.”
미주가 밍크 코트를 걸치고 거칠게 나갔다.
비서는 똥개마냥 졸졸 따라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호텔에 좀 다녀올게.”
“네...”
비서가 정중히 배웅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인데도 미주는 차를 끌고 호텔에 올라갔다.
산 허리에 위치한 호텔... 호텔과 맞은편에 있는 골프장...
어린 시절 절친했던 두 회장의 합작품이 호텔 로즈힐을 더 빛나게 했다.
씩씩거리며 오너방에 들어선 미주가 눌렀던 성질을 냈다. 뭐라 뭐라 떠들었지만, 결
론은 자기 전화를 씹느냐는 거였다. 하지만 은석은 아까부터 골똘히 생각에 잠겼
다. 미주가 들어온 것도 모른채 말이다.
“또 그 년 생각해!!”
은석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고개 돌려 미주를 봤다.
“뭐라 했니?”
“이젠 그만 할 수 없어!! 난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데...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그렇게 값지고 귀해. 응?”
“함부로 말하지마.”
“알고 싶어. 미친 듯이 오빠만 찾는 날 언제까지 이렇게 두려는지.”
“내가 시키지 않았어.”
미주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듯 싶었다.
“맞아. 시키지 않았는데... 내 맘이 그래. 오빠랑 어울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머
리도 염색했고, 얌전하게 있잖아.”
은석이 차갑게 웃었다.
“내 회색눈동자에 어울리는 금발머리니? 그렇게 짜 맞추듯 곁에 있으면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을까?”
“오빠!!”
“시끄러워. 니 아버지 소원대로 시집이나 가.”
“오빠가 허락해줘야 가지...”
칭얼거리는 아기처럼 울어댔다.
“제발. 고미주!”
버럭 큰소리를 쳤다. 놀란 미주가 충혈 된 눈동자로 꿈벅댔다.
“알았어. 그 놈의 조각상이랑 잘 놀아봐.”
픽 돌아서 나가버렸다.
은석 책상 끄트머리에 있는 조각상...
이슬람 궁전을 석고로 미니어처 한 것이었다. 그것을 만진 은석이 씁쓸히 웃었다.
누나. 아리 누나...
이 조각상을 보면서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됐어.
그 어린 여자를 어떻게 약 올릴까 하고 말야.
누구처럼 아주 자존심이 세거든...
우습지? 우습다. 정말......
호텔 로즈힐
인도 아그라.
모래 바람을 맞으며 아리가 이슬람 궁전 앞에 섰다. 빡빡한 여행 일정으로 지쳤던
아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 것도 그때였다. 서인도의 건축여행은 그리 즐겁지 못했
다. 속앓이를 한 탓에 목적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 앞에 펼쳐진 인도 건축물은 설레게 했다.
경이롭고 신비한, 종교적인 요소로 만들어진 궁전....
한 달음으로 걸어가 궁전 정문으로 들어섰다.
모래가 잔뜩 낀 목도리를 벗어던지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17세기 초 무갈제국이 시작되면서 이슬람과 힌두교 건축양식이 융합되었다. 그로 인
해 무갈 건축 양식이 크게 발전하였고, 우뚝 서 있는 저 궁전은... 그 대표적인 /타
지마할/묘였다. 귀중한 한 컷이라도 놓칠 세라 연신 셔터를 눌렀다.
궁전 주변을 두 서너 시각 돌았을까. 아리는 시장함을 느꼈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
빵조각을 꺼냈다. 질긴 빵 덩어리를 꾸역꾸역 입속에 넣고 주변을 돌아봤다.
“오, 멋진데...”
아리가 빵을 던져놓고 누군가를 향해 카메라 렌즈를 들이댔다.
“동양사람 같은데...”
렌즈 속에 남자도 건축양식에 감탄한 듯 촬영에 푹 빠져 있었다.
아리는 렌즈를 가까이 잡아당겼다.
“이국적인 이모에 동양사람이라... 일본인? 중화권 사람인가? 배경과 무척 잘 어울
리는 남자군...”
저 멀리서 남자가 카메라 방향을 돌렸다.
이쪽에 앉은 아리에게로...
아리의 렌즈와 맞부딪치자 두 사람은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 누구도 카메
라 렌즈를 치우지 않았다. 오히려 렌즈 속에 서로를 살피려 했다.
“뭐야. 기분 나쁘게...”
남자가 이쪽으로 걸었다.
아리는 서둘러 카메라 가방을 챙겨 들었다.
자리를 떠날 거라 직감한 남자는 달려오기 시작했다. 아리가 채 두 발짝도 못 떼고
어깨를 잡혔다.
“필름은 놓고 가셔야죠!”
아리는 흠짓 놀라 돌아섰다.
“한국 사람이었잖아!”
아리가 바라보고 선 남자는 다름 아닌 은석이었다.
은석은 아리의 카메라를 잡고 놓치 않았다.
호텔 로즈힐
아그라 타지마할 묘.
지하묘 입구에 마련된 의자에 아리와 은석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좀 전과 달리 매
우 친숙해 보였다. 외국 나가면 한국 사람이 그리워진다더니, 3개월동안 한국 사람
을 구경 못한 아리는 은석이 반갑기만 했다.
“타지마할 묘에 대해 알려드릴까요?”
은석도 제법 공손히 얘기했다.
“알지만 다시 듣고 싶어요.”
아리 입가에 미소가 베어있었다.
“샤 자한 황제가 가장 사랑한 황후 뭄타즈 마할에서 이름이 지어졌대요. 샤 자한
황제가 대칸 지방을 원정 했을때 함께 따라갔던 타지마할이 그만 해산 후 죽었대
요. 슬픔에 잠긴 황제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23
년간을 걸쳐 공사했죠... 그게 이 타지마할 묘랍니다.”
“하지만 2만여명의 쟁인을 동원했고, 막대한 국가 재정이 탕진되었어요.”
“사랑은 그만한 가치를 한다고 보는데요?”
“순수하시네요. 샤 자한 황제처럼. 지금은 찾아 볼 수 없죠... 내 사랑 떠나면 가
슴 앓이나 할 뿐이겠죠....”
“비관적이군요.”
“그래요. 사랑을 믿을 순 없으니까...”
“실연이라도 겪은 사람 같군요...”
아리가 문득 이 낯선 남자에게 속내를 보인 것에 화가 났다.
“넘겨짚는 게 취미세요?”
“......오. 죄송합니다. 전 다만 사랑은 그렇게 위대한 힘을 만든다고 말하려고 했
을 뿐입니다.”
은석이 어색하게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좌불안석 하는 모습에 아리가 하하거리며 웃었다.
관광객들이 보거나 말거나 엄숙한 장소에서 큰소리로 웃었다. 은석이 더욱 무안해졌
다.
“한국에서는 무슨 일 하세요?”
호감을 먼저 느낀 건 아리였다.
“그건 왜요?”
“혹시 같은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면 동업이라도 하고 싶어서요.”
“절 만난지 채 한 시간도 안 지났는데... 동업이요? 제가 사기꾼이면 어떻게 하려
구요?”
“아뇨. 난 그 눈에 반했어요. 회색빛이 감도는 눈동자... 첫인상이 강렬해서 상대
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겠지만, 난 그 눈에 반했다구요!”
아리는 1cm 더 다가섰다.
“한국에 언제 가십니까?”
은석이 가만히 물었다.
멋진 여자 같아. 한국에 가면 다시 만나고 싶어..
“글쎄요. 난 이쪽 분야에서 일해요. 일 하러 왔으니 건질 게 있어야 돌아가겠
죠...”
“돌아갈 때까지 함께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두 사람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왜 그런 말을 하죠?”
“......... 같은 뜻이길 바라면서요.”
은석의 상체가 앞으로 쏠려 아리를 품에 안았다. 아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흙먼
지가 느껴질 피부였지만 은석이 어루만지듯 그녀의 입술을 만졌다.
“나도 당신에게 반했어요....”
은석이 다문 아리 입술을 활짝 열어 비집고 들어갔다. 끔찍이도 사랑하는 연인들처
럼... 여태 그리 해왔던 익숙한 연인들처럼... 그들의 키스는 깊고 달콤했다.
내 사랑 아리...
행복하길 바랬어...
그렇게 무심히 떠났음 행복하게 살았어야 하잖아.....
내 질투가 하늘을 검게 물들더라도...
보고 싶다, 내 사랑.
은석이 책상에 놓인 이슬람 궁전에서 시선을 돌렸다.
딩동~
“하우스키핑~”
나이든 룸메이드가 들어왔다.
불현듯 은석이 수화기를 잡아채 다이얼을 눌렀다.
“이은석입니다. 하우스키핑의 김 과장 연결해주세요.”
저 너머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렸다.
“예. 사장님.”
“장혜선씨 퇴사처리하세요!”
“예? 제가 방금 못 들었거든..... 사장님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장혜선씨 오늘 당장 퇴사처리하세요!”
옆에서 듣던 나이든 룸메이드도 당황했다.
“너 따위가 감히 날 조롱해?
어서 무릎 꿇고 사과할 준비나 하시지...”
은석에게서 사나움이 느껴졌다.
7
호텔 로즈힐
“지금..... 뭐라고 하셨나요.....”
수화기를 붙잡은 혜선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사내의 낯선 음성이 혜선을 공포에 떨게 했다.
“여보세요? 장혜선씨?”
“..........”
뚝. 전화가 끊겼다. 혜선이 말이 없자 상대방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혜선이 수화기를 제자리에 놓지 못했다. 샘물 솟듯 눈물샘에서 하염없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 황급히 일어서긴 했는데 어쩔 줄 몰랐다.
장롱에서 외투 하나를 꺼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소매 끝을 제대로 찾지 못하
고, 허공만 찔러댔다. 대충 한 손을 찔러 넣고 다른 한 손으로 핸드백을 집어 들었
다.
허겁지겁 정류장 입구로 달려 나온 혜선이 도로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택시조
차도 보이지 않는다.
“내 이름이 장혜선 맞나...
아냐. 우리 엄마가 아닐 거야...
분명 착각하고 잘못 건 걸 거야...”
입술을 질끈 물고 좌우를 살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버스를 기다렸다.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넓게 킨 택시가 달려왔
다.
“아저씨. 한강병원이요... 아니... 한강 병원 맞나...”
넋을 잃고 횡설수설까지 했다.
운전기사는 황당해 빤히 볼 뿐이었다.
“한강병원이요! 빨리요!”
혜선이 생각난 듯 재촉했다.
택시는 한강병원 응급센터에 미끄러지듯 섰다. 서둘러 택시를 보내고 병원으로 들
어서는 혜선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왔다.
병원이 이리도 복잡했던가.
“어디로 가야 하지.”
사방에 이정표가 보였지만 까막눈이 된 것처럼 하나도 못 읽었다. 불안해 하며 손톱
을 깨물었다. 어지럽다. 이런 곳에 왜 와야 하지... 눈물자국으로 얼굴이 지저분해
졌다.
조금 전 전화 음성...
“한강병원 영안실입니다. 장혜선씨 모친께서 교통사고로 사망하셨습니다. 오셔서
확인 부탁드립니다...”
아냐.. 아냐..
본관 건물에서 구름다리로 이어놓은 2층 건물.
장례식장...
영안실...
어두컴컴한 복도로 끔찍한 글자가 보였다.
이 방 저 방에서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픈 곡조가 들려왔다. 혜선이 선뜻 들어가지 못
하고 망설였다.
“저 차갑고 어두운 곳에 엄마가 있다고?
추워진 날씨 탓에 몸이 쑤시다고 사우나 가신 엄마가...?
단 몇 시간 전이라고!”
“저... 이연자씨 보호자 되십니까?”
혜선이 멍청히 고개를 돌렸다.
“..........”
흰색 가운만 입었을뿐 저승사자나 다름없는 남자가 영안실로 안내했다.
두툼한 문을 열자 찬 공기가 혜선을 엄습했다.
남자는 냉동고에서 흰 시트에 덮힌 시체를 꺼냈다.
“확인 부탁 드립니다.”
설마.... 아닐 거야...
남자가 시트를 치워 한 발자국 물러섰다. 혜선이 조심스럽게 다가섰다. 핏기 없이
시퍼렇게 변한 얼굴... 터진 머리에서 흘러 굳은 피... 굳게 다문 입술...
“엄마?”
싸늘한 시신은 말이 없었다.
“엄마? 나 혜선이야?”
“..........”
“엄마!!!!!”
혜선이 시신을 잡아 흔들었다.
“지금 나 놀리는 거야.....? 사우나 같이 안 가서 삐진 거지? 그래서 이렇게 누워
서 장난 치는 거지.....? 맞다고 해봐! 응? 엄마... 그만 장난 쳐!!”
혜선이 오열해 통곡했다.
남자가 힘없이 쓰러지는 혜선을 붙잡았다.
“이봐요!!”
“...... 엄마... 엄마... 나 혼자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가면 어떡해...”
혜선이 분노한 듯 벌떡 일어나 시신을 들어올리려 했다. 남자가 당황해 혜선을 붙잡
아 끌어냈다. 시신은 다시 차디찬 냉동고 속으로 들어갔다.
호텔 로즈힐
은석은 늦게까지 업무를 보고 있었다.
“넌 호텔 경영에 관여 하지마!
네 능력을 믿다만, 항상 욕심이 지나치다는 게 문제야.
특히 그 녀석과 맞부딪쳐서 좋을 게 없다!”
사장 임명을 두고 그룹 회장이 후계자에게 부탁한 말이었다.
“아버지... 내가 죽거나 그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끝을 봐야겠습니다!”
눈가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문득 그 어린 여자 룸메이드가 떠올랐다.
지금쯤이면 와서 울며불며 애원해야 되는 게 정상 아니던가.
은석이 다이얼을 눌러 하우스키핑 사무실을 연결했다. 김과장이 절절 매듯 답했다.
“그게... 저... 연락이 안 닿았습니다.”
“통화를 못했다는 말입니까?”
“.........네. 사장님.”
“출근은 했습니까?”
“그게... 저 아직...”
“뭐라구요?”
“.........죄송합니다.”
“흠.. 알겠습니다.”
“뭐야. 잘도 피해 다니는구나.
근데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은석이 펜 뚜껑을 닫았다.
어린 여자를 걱정하는 자체가 자존심 상했다. 그만 사무를 마치고 데스크 램프를 껐
다.
호텔 로즈힐.
한강병원 장례식장.
국화꽃 한송이가 쓸쓸히 영정사진을 지키고 있었다. 혜선모 사진은 그동안의 고단
한 세월을 고스란히 보이기라도 하듯 깊이 패인 주름에 지친 얼굴이었다. 소복 입
은 혜선만이 조용한 장례식장을 돌봤다. 향이 꺼지면 다시 피우고... 피우고 하면
서...
가계빚으로 이혼도장 찍은 아버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혜선은 아버지를 원망
할 힘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기가 이연자 장례식장이야?”
갑자기 문쪽에서 소란스런 음성이 들렸다.
혜선이 퉁퉁 부은 눈으로 힘겹게 쳐다봤다.
무리의 중년 부인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씩씩대며 왔다.
“누구세요!”
당장이라도 장례식장을 뒤엎을 기세였다.
“니가 그 년 딸이야?”
“..........네?”
무리의 우두머리 여자가 영정사진을 봤다.
“제대로 찾아왔네.”
“누구시냐니깐요!!”
“우리? 니 어미가 빚진 돈 받을 사람들이다.”
“네.....?”
혜선이 어리둥절했다.
“가계 빚은 은행에만 있는 걸로 아는데...
이 아주머니들은 누구야.
엄마.. 누구야.. 나 두렵고 무서워.”
“니 엄마 고의적으로 차에 뛰어들어 죽었지?”
“맞아. 니 엄마 그러고도 남아...”
“내 돈 어떻게 갚을 거야?”
“내 돈은!!!”
살쾡이처럼 달겨 든 아주머니들로 혜선이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주머니들은 돈을 갚기 전에는 나갈 기세가 아니었다. 혜선이 죄인처럼 홀로 그들
을 맞섰다. 제발 가달라고... 죽은 사람 편히 보내달라고 애원했지만 듣지 않았다.
“제가 갚아 드린다고 했잖아요.”
“니 엄마도 매번 똑같은 소리했어.”
처음부터 잘못 꿰맨 단추처럼...
아버지 친구 분 보증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올라갔고...
아버지는 무책임하게 도망쳐버렸다.
빚은 눈덩이처럼 커졌고, 엄청난 빚은 혜선모에게 고스란히 떠안게 되었다. 은행 대
출로도 막지 못하자 띄엄띄엄 알게 된 사채놀이 아주머니들에게까지 자금을 융통했
었나보다.
“엄마... 나 힘들어...”
혜선이 넋을 잃은 사람처럼 아주머니들을 바라봤다.
삼일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마지막 날.
혜선은 수의를 입고 곱게 누워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겨뒀다.
“뭐라고들 하셨어요?”
“니 엄마 못 보내주겠다고.”
“너무들 하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빚 갚을 때까진 니 엄마 화장 못한다!!”
빚 독촉하는 아주머니들 결심도 대단했다.
“이미... 죽은 사람이에요. 제가 갚을 게요. 각서라도 쓸게요...”
“안돼!! 안된다잖아!!”
혜선이 멍하니 그들을 봤다.
숨 막히도록 조여 오는 손에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장례식장을 비워줘야 하는데.....
병원측에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엄마......”
염습까지 마친 시신은 다시 영안실로 옮겨졌다.
“무서워..... 엄마....”
호텔 로즈힐
은석이 점차 불안해졌다.
“이대로 인연이 끊어지는 걸까?
제대로 약을 올려주고 싶었다.
와서 무릎 꿇고 빌게 해주고 싶었다.”
그때 그 말이 다시 떠올랐다.
“당신에게 맞춰 줄 하녀가 필요하신 모양이군요. 아. 한 분 추천해드리죠... 연회장
에서 만났던 금발 머리 아가씨 어때요? 당신 말이라면 끔찍해보이던데....”
최선을 다해 어린 여자에게 다가서고 싶었다. 뜻과 달리 빗나가버린 상황이 은석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딩동~
“어?”
“방금 룸메이드가 다녀갔는데. 뭘 빠뜨리고 나갔나.
키가 있으면 열고 들어오겠지.”
은석은 상관 않고 보고서를 계속 검토했다.
딩동~
“?!”
딩동~
은석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누구십니까?”
“...........”
대답이 없었다.
은석은 렌즈로 된 구멍에 눈을 갖다댔다.
작은 구멍 속에 혜선이 서 있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 시건방진 룸메이드!”
이를 갈 듯 거칠게 문을 열어 제겼다.
“이게 누구신가요?”
“................”
"잘난 룸메이드 아니십니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혜선은 입을 열지 않았다.
“용서라도 빌러 온 모양이지? 하지만 늦었어. 내가 정한 기간은 그 날 하루였거
든!”
“.........”
여전히 혜선은 고개만 떨구고 있었다.
순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은 은석이 떨궈진 혜선의 턱을 들어올렸다.
“!!!!!!!”
혜선은 눈물이 뒤범벅된 채 울고 있었다.
“장혜선씨 무슨 일 있습니까?”
“........... 사장님. 사장님 룸메이드 될게요.”
“?”
“그럼 저한테 1억만 주시겠습니까?”
깜짝 놀란 은석이 혜선을 자세히 훑어봤다.
분명 장난은 아니었다.
“장혜선씨?”
“1억만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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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 소설 1.
[ 장편 ]
호텔 로즈힐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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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음이 너무 아프네요
불쌍해요ㅠ_ㅠ,, 빨리 담편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