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약한 소년과 토끼 사랑

지난 4월 20일 발행된 시인의 향기 제8호 시향칼럼입니다.     병약한 소년과 토끼 사랑                                                                                  정 병 국   창가에서 촉촉이 내리는 봄비를 무심히 바라보다 한 소년을 떠올립니다.   몸이 허약한 탓일까. 소년은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거나 자치기를 하거나, 굴렁쇠 굴리기를 하지 않습니다. 교실이 초가(草家)인 학교에서의 소년은 양지바른 곳에서 학우들의 노는 모습을 지켜볼 뿐입니다.   또래들보다 키가 작은 소년은 유난히 토끼를 좋아했습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는 토끼가 좋아하는 풀을 뜯다보니 늘 손끝에 풀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성들여 키운 토끼가 다섯 마리의 새끼를 낳자 소년은 토끼장 곁에서 밤을 꼬박 새웠습니다.   소년은 큰 토끼장을 만들 궁리를 했습니다. 닭처럼 놓아 키우기 싶지만 개들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전에도 닭 한 마리가 이웃집 개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털이 하나도 없는 다섯 마리의 새끼 토끼는 고구마처럼 빨갰습니다. 눈도 못 뜬 채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드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예뻤습니다.   소년은 학교에서의 하루가 천년 같았습니다. 빨리 집으로 달려가 새끼 토끼들을 보고 싶었습니다. 새끼를 낳은 어미 토끼에게 줄 아카시아의 여린 잎과 씀바귀 풀을 망태기 가득 뜯고 싶었습니다.   청소당번도 잊고 집으로 달려온 소년은 그날 저녁부터 몹시 아팠습니다. 밤새 온 몸이 불덩어리였습니다. 다음 날 학교에도 결석했습니다.   “아버지가 잘 묻어 줬다. 천당 갔으니 걱정 말아라.” 학교에서 단숨에 달려와 토끼장부터 살펴본 소년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무엇에 놀랐는지 어미가 새끼를 모두 물어 죽였습니다.   토끼는 새끼를 낳았을 때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환경이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미토끼가 새끼를 물어 죽이는 경우가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토끼장을 새로 짓자. 아주 튼튼하게.” 그러나 소년은 그 후 토끼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어미토끼가 새끼를 죽인 사건, 그것은 참으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오십년도 훨씬 전인 먼 옛날의 충격이 지금도 가슴 아프게 합니다. 그때 조금만 더 정성 들였다면 새끼를 모두 잘 키웠을 거라는 아픔입니다.   토끼는 눈도 털도 참 예쁜 동물입니다. 가슴에 안으면 털의 감촉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 없습니다. 병약한 소년에서 초로(初老)의 삶으로 들어선 오늘날에도 가끔씩 마치 첫사랑을 추억하듯 그때의 토끼 사랑과 충격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곤 합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