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선생 연보 <출처 : 이우성 편, 도산서원, (주)도서출판 한길사, 2001> 1501년 1세 연산 7년 辛酉 11월25일 진시(辰時)에 예안현 온계리(溫溪里 ; 현 안동시 도산면)에서 태어나다. 1502년 2세 연산 8년 壬戌 6월 생후 7개월만에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식(埴) 별세하다. 1506년 6세 중종원년 丙寅 이웃노인에게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배우며 처음으로 글을 깨치다 1512년 12세 중종 7년 壬申 숙부 송재공(松齋公) 우( )에게 『논어』를 배우다.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모든 일에 있어서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라고 물어 송재공을 크게 놀라게 했다. 송재공은 성격이 엄숙하여 칭찬해 주는 일이 적었으나, 선생이 형 대헌공(大憲公) 해(瀣)와 함께 글을 배울 때에 송재공은 늘 칭찬하여 "죽은 형이 이 두 아들을 두었으니,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였다. 1514년 14세 중종 9년 甲戌 독서를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앉은자리에서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책을 보다. 1520년 20세 중종15년 庚辰 『주역』을 읽고 그 의미를 강구하느라 먹고 자는 일을 잊다. 이때부터 늘 파리하고 초췌한 병을 지니게 되었다. 후에 「조사경(趙士敬)에게 준 편지」에 "내가 어린 나이로 일찍이 망령되게 큰 뜻을 두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라 각고가 너무 심해 파리하고 초췌해지는 병을 얻었다"라고 한 바있다. 1521년 21세 중종16년 辛巳 진사(進士) 허찬(許瓚)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23년 23세 중종18년 癸未 10월에 아들 준(寯)이 태어나다. 이 해에 비로소 성균관에 유학(遊學)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친 이 시기, 선비들의 풍습이 부박(浮薄)하던 터라 오히려 선생의 행동거지에 법도(法度)가 있음을 보고 사람들은 대부분 비웃었다. 뜻을 알아준 이는 오직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뿐이다. 1527년 27세 중종22년 丁亥 경상도 향시(鄕試)에 응시하여 생원(生員) 제2위에 합격하다. 10월에 둘째 아들 채(寀)가 태어나다. 11월 7일 허씨 부인이 죽다. 1530년 30세 중종25년 庚寅 봉사(奉事) 권질(權 )의 따님에게 장가들다. 1531년 31세 중종26년 辛卯 측실(側室)에서 아들 적(寂)이 태어나다. 1532년 32세 중종27년 壬辰 진사시에 합격하고. 과거(科擧)에 나가 문과(文科) 별거(別擧)의 초시(初試)에 2위로 합격하다. 1533년 33세 중종28년 癸巳 반궁(泮宮)에 유학하다. 경상도 향시에 1위로 합격하다. 충재( 齋) 권벌(權 )을 따라 여주(驪州) 이호촌(利湖村)에 살고 있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뵙다. 선생은 만년에 "모재를 뵙고 비로소 정인(正人) 군자(君子)의 언론(言論)을 들었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詩 吉先生閭. 月影臺. 矗石樓. 1534년 34세 중종29년 甲午 3월에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임명되고,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경연시독관(經筵試讀官)등의 요직을 겸임하다. 1535년 35세 중종30년 乙未 6월에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왜인(倭人)을 동래(東來)로 보내다. 여주를 지나다 목사(牧使) 이순(李純)과 함께 신륵사(神勒寺)에 노닐면서 시를 짓고, 이 길에 고향에 들러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다. 詩 驪州牧李公純.訓導李 .遊神勒寺. 臨風樓. 嶺南樓 1536년 36세 중종31년 丙申 선무랑(宣務郞)과 성균관전적겸중학교수(成均館典籍兼中學敎授)를 거쳐 9월에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다. 詩 歲季得鄕書書懷. 感春. 安東愛蓮堂. 雨留新蕃縣 1537년 39세 중종34년 丁酉 선교랑(宣敎郞),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議郞)이 되었으나 10월15일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일시 물러나다. 1539년 39세 중종34년 己亥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수찬(修撰) 지제교(知濟敎)로 승진되고 경연(經筵) 검토관(檢討官)을 겸임하다. 1540년 40세 중종35년 庚子 1월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오른 후 봉훈랑(奉訓郞) 봉직랑(奉直郞)을 거쳐 승문원 교검(校檢),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고 10월에 교리(校理), 11월에 통선랑(通善郞)이 되다. 1541년 41세 중종36년 辛丑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고, 10월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겸하였다. 6월 4일 손자 안도(安道) 출생 詩 義州雜題十二絶. 聚勝亭韻奉別洪公. 平壤練光亭陪監司尙公震夜 . 書堂次金應霖秋懷. 讀東國史用應霖韻. 夕霽舟上示應霖·景說. 南樓壁上有六言四韻 次韻 示二君. 九月七日午憩臨津亭. 1542년 42세 중종37년 壬寅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을 거쳐 바로 어사(御使)로 임명되어 충청도 군읍(郡邑)의 흉년 구제사업을 순찰하고 상경하였다. 경주로 돌아가는 회재(晦齋) 이선생을 전송하다. 통덕랑(通德郞)이 되어 사인(舍人)에 승진되다. 8월에는 고향에 돌아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을 전송하다. 12월에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다. 詩 玉堂春雪用歐公韻. 泰安曉行 憶景明兄. 宿淸風寒碧樓. 鎭川東軒. 蓮亭小集. 秋日南樓晩霽. 湖上園亭偶出效康節體. 與諸君同登狎鷗亭後岡. 原州憑虛樓有懷州敎金質夫 次樓韻留贈. 酒泉縣酒泉石姜晉山韻. 錦江亭. 洪川三馬峴用景明兄竹嶺途中韻. 過淸平山有感 1543년 43세 중종38년 癸卯 2월에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임하다. 그 후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 조봉대부(朝奉大夫), 승문원 교감(校勘), 시강원 필선(弼善), 조산대부(朝散大夫), 사간원 사간(司諫), 성균관 사성(司成) 등 여러 직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11월에 다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에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이 때의 일을 뒤에 남명(南冥) 조식(曹植)에게 보낸 편지에서 "벼슬자리를 피하여, 옛 서적을 안고 고향의 산중에 돌아가 미처 이르지 못한 공부를 매일 한치씩 쌓아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이 '나의 10년 이래의 뜻이요 바람'이다"라고 밝혔다. 詩 奉酬聾巖李先生靈芝精舍詩. 題林士遂關西行錄後 二首. 當軒綠叢花 四季. 九月獨登書堂後翠微寄林士遂 四首. 送金厚之修撰乞假歸觀 仍請外補養親 恩許之行. 湖堂梅花暮春始開 用東坡韻 二首. 1544년 44세 중종39년 甲辰 홍문관 교리와 응교(應敎), 사헌부 장령, 경연 시강관(侍講官), 춘추관 편수관(編修官), 승문원 교감 등 여러 직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부임과 사임을 거듭하다가 9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하다. 11월에 중종(中宗)이 승하(昇遐)하자 상경하여 명나라에 보내는 부고(訃告)와 시호(諡號)의 두 표문(表文)을 지어 중국예부관원들을 감탄시키다. 詩 湖堂曉起 用東坡定惠院月夜偶出韻. 次韻答金應霖 林士遂在東湖見寄 二首. 七月望日 狎鷗亭卽事 四首. 晩步. 登狎鷗亭後岡 憶應霖 士遂 吉元 四首. 夜起有感. 大雷雨行. 剪開檻外樹作. 奉贈圭庵宋眉 以冬至副使赴京. 1545년 45세 인종원년 乙巳 정월에 원접사(遠接使)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가지 못하다. 내섬시(內贍寺) 첨정(僉正), 봉정대부(奉正大夫), 군자감(軍資監) 첨정(僉正), 중훈대부(中訓大夫), 홍문관 응교와 전한(典翰) 등을 지내다. 7월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왜인들이 강화하고자 비는 것을 허락하자는 소(疏)를 올리다. 중직대부(中直大夫), 사옹원정(司饔院正), 사복시정, 승문원 참교(參校) 등에 임명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많은 직을 사임하다가 11월에 통훈대부(通訓大夫)가 되고 영접도감(迎接都監) 낭청(郎廳)에 임명되다. 사림파(士林派)들을 몰아내려는 이기(李 )의 모함으로 관직을 삭탈당하였으나 교리(校理) 이원록(李元祿)의 간청으로 다시 첩지(牒旨)를 받다. 詩 送林士遂以迎詔使從事赴義州三首. 1546년 46세 명종원년 丙午 2월에 장인 권질(權 )의 장사를 지내다. 7월에 부인 권씨가 죽다. 8월에 교서관(校書館) 교리, 승문원 교리를 겸직하다. 11월에 예빈시정(禮賓寺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여 퇴계(退溪)의 동쪽 바위 곁에 작은 암자 '양진암(養眞菴)'을 짓고 학문연구에 정진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다. 詩 望湖堂梅花. 再用前韻 答景說. 兜觀院溪上 奉懷家兄話別於東郊 二首. 寓月瀾僧舍書懷 二首. 以事當還鄕 至榮川病發輟行 留草谷田舍. 孟夏二十五日 入龍壽寺 馬上記黃敬甫. 晨至溪莊 偶記東坡新城途中詩 用其韻 二首. 聾巖先生愛日堂 用李復古先生韻. 士遂寄詩次韻. 東巖言志. 獨遊孤山 至月明潭 因 水循山而下 晩抵退溪 每得勝境 卽賦一絶 凡九首. 後又得二勝. 1547년 47세 명종2년 丁未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8월에 홍문관 응교(應敎)를 받아 부임, 12월에 병으로 사직하자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에 다시 제수되다. 詩 踏靑登霞山. 淸吟石. 題黃仲擧方丈山遊錄. 和西林院詩韻 二首. 雨晴述懷. 戱作七臺三曲詩. 閒讀武夷志次九曲櫂歌韻十首. 古意. 玉堂宣 後 出書堂 馬上作. 次韻閔景說 景霖 二首. 雪竹歌. 冬日甚雨 已而大雪 喜而有作. 上聾巖李先生. 病中讀史有感 三首. 樂山南景霖在書堂 雪中寄松酒兼律詩 次韻 寄. 1548년 48세 명종3년 戊申 정월에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단양군수에 임명되다. 정사(政事)가 투명하고 간결하여, 아전들이나 백성들이 모두 편하게 여기다. 2월에 둘째아들 채(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되다. 詩 赴丹山書堂朴仲初左通禮閔景說正南景霖正尹士推典翰餞席留贈. 洛生驛樓次金應霖贈別韻 二首. 鄭吉元韻. 馬上次閔景說. 二月一日郡齋 雨中得洪退之見寄 次韻. 買浦滄賑給暮歸馬上. 島潭二絶. 仙巖. 馬上. 二樂樓 次東坡黃樓詩. 花灘. 舟中. 龜潭. 伏聞重新愛日堂 上聾巖先生. 1549년 49세 명종4년 己酉 4월에 소백산을 노닐고, 9월에 병으로 감사에 사직서를 올리다. 12월에 감사(監司)에게 글을 올려 관내(管內) 백운동(白雲洞) 서원의 편액(扁額)과 서적(書籍)을 청하였던 바, 조정에서 직접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리고,『사서(四書)』·『오경(五經)』·『성리대전(性理大典)』등의 책을 보내왔다. 서원의 흥성(興盛)이 여기서 비로소 시작되다.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감사의 허락도 없이 시골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詩 白雲洞書院示諸生. 答周景遊見寄 二首. 石崙寺效周景遊次紫極宮感秋詩韻. 紫蓋峯. 國望峯 三首. 答尙牧金季珍. 郡齋 有感小白山之遊 追次景遊用昌黎衡岳詩韻. 郡齋移竹. 浮石寺聚遠樓 鄭湖陰贈僧韻. 八月十五日夜陰. 十月十日夜 大雷雨. 十一日曉地震 三首. 池方寺瀑布 二首. 1550년 50세 명종5년 庚戌 정월에 임소(任所)를 함부로 버렸다는 이유로 고신(告身) 2등을 삭탈 당하다. 2월에 비로소 퇴계 서쪽에 자리를 잡아 '한서암(寒栖菴)'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니 각지에서 배움을 청하는 선비가 날로 늘어나다. 농암(聾巖) 이공(李公)을 분천(汾川)에 가 뵙다. 4월에 한서암 앞에 있는 광영당(光影塘) 연못을 파다. 8월에 형 좌윤공(左尹公) 해(瀣)의 부음(訃音)을 듣다. 詩 退溪草屋喜黃錦溪來訪. 移草屋於溪西 名曰寒棲庵. 三月三日 雨中 寓感 用丁未踏晴韻. 拜聾巖先生 先生令侍兒 歌東坡月飮杏花下詩 次其韻詩之 滉亦奉和 呈上. 退溪. 寒棲. 溪居雜興 二首. 寒棲雨後書事. 和陶集移居韻 二首 五月十八日. 和陶集飮酒 二十首. 七月七日作 閒許南仲遷謫. 偶讀宋潛溪靜室詩 次韻示兒子寯閔生應祺 二首. 1551년 51세 명종6년 辛亥 벼슬하지 않고 집에 거처하며 여러 사람과 시를 주고받다. 詩 十六日雨 辛亥正月. 和老杜幽人. 十六日夜大風寒. 十八日朝晴 感興. 二十日 又雨夜大風. 閒居次趙士敬 具景瑞 金舜擧 權景受諸人 十四首. 有嘆. 淸明 溪上書堂 二首 撤寒棲 移構小堂於溪北 次老杜韻. 春日閒居 次老杜六絶句. 聾巖李先生來臨溪堂. 十一日夜 陪聾巖先生 月下飮酒杏花下 用東坡韻. 溪堂偶興 十絶. 次趙監司季任 上聾巖先生韻. 次季任 密陽嶺南樓 和朴昌世詩 二十二韻. 七月十三月夜. 次金惇 讀書有感韻. 次韻答新寧宰黃仲擧. 1552년 52세 명종7년 壬子 4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로 임명되고,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승문원 교리를 겸임하게 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다. 7월에 통정대부가 되고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11월에 병으로 사임하고 상호군(上護軍)이 되다. 詩 正月二日立春 壬子. 上元日 遇李庇遠於溪路 同行卽事. 上元夜 溪堂對月. 次韻 答李靑松公幹 二首. 滉將拜聾巖於臨江寺 其夜有雪 先生朝遺僧以一絶速之 謹奉和 先以呈上. 暮歸馬上. 李大成來訪溪堂. 淸吟石. 答友人 丁季晦時謫巨濟. 四月初一日溪上作. 答黃仲擧. 幽居 示李仁仲 金信仲. 溪堂前方塘 微雨後作. 四月八日感事 國俗 以是日釋迦生 稱爲節日. 次韻寄題黃仲擧新構竹閣 夏赴都後. 八月十五日夜 西軒對月 二首. 次韻友人 二首. 1553년 53세 명종8년 癸丑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7월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다. 8월에 친시 대독관(親試對讀官)에 선출되다. 9월에 충무위(忠武衛) 상호군에 임명되다. 10월에 정지운(鄭之雲)의「천명도(天命圖)」를 개정하다. 1554년 54세 명종9년 甲寅 2월부터 동궁(東宮)과 사정전(思政殿)의 상량문을 짓다. 진도(珍島)에 귀양가 있는 이재(伊齋) 노수신(盧守愼)과 편지로「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註解)를 논하다. 손자 순도(純道) 출생 1555년 55세 명종10년 乙卯 2월에 강녕전(康寧殿)에 「7월편」을 써 올리다. 수많은 관직을 제수받을 때마다 신병으로 사퇴했으나 윤허가 내리지 않아 마침내 상경하여 사은(謝恩)하고 향리로 돌아오다. 6월에 농암(聾巖)이 별세하여 그의 행장을 짓다. 겨울에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산을 노닐며 여러 시를 짓고 한 달이 지나서야 돌아오다. 1556년 56세 명종11년 丙辰 5월에 홍문관 부제학 지제교(知製敎)로 임명되고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에 부름을 받았으나 거듭 사표를 내다.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차(編次)를 완성하다. 12월에 향약(鄕約)의 초안(草案)을 만들다. 향약모임에 귀천의 신분을 떠나 연령순으로 좌석을 정하기로 했는데 반대의견이 많았다. 선생은 자기주장을 역설했으나 제자들 마저 따르지 않자 거두어들이고 따랐다. 1557년 57세 명종12년 丁巳 3월에 「수곡암기(樹谷庵記)」를 짓다. 도산(陶山)의 남쪽에 서당 자리를 마련하다. 7월에『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하다. 1558년 58세 명종13년 戊午 10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다. 12월에 임금이 특별히 친필로 가선대부(嘉善大夫) 공조참판에 제수하다. 세 차례에 걸쳐 사임의 뜻을 전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자 일단 상경하여 부임하다. 1559년 59세 명종14년 己未 2월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병을 얻어 서장(書狀)을 올려 관직을 사임할 것을 원하였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동지 충주부사에 제수되다. 「이산서원기(伊山書院記)」를 짓고, 편액을 쓰고 서원(書院)의 규약을 정하다. 12월에「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편찬하기 시작하다. 2월 26일 손자 영도(詠道) 출생 1560년 60세 명종15년 庚申 정월에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에 발(跋)을 쓰다. 11월에「답기명언서(答奇明彦書)」에서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하여 변론하다. 도산서당(陶山書堂)이 이루어지다. 이때부터 호를 '도옹(陶翁)'이라 하고, 서당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 방은 '완락재(琓樂齋)'라 하였다. 1561년 61세 명종16년 辛酉 3월에 도산서당 왼쪽에 석축으로 절우사(節友社)를 만들다. 각처에서 모여든 기라성 같은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연(自然) 속에 우유(優遊)하였다. 11월에 「도산기(陶山記)」를 짓다. 1562년 62세 명종17년 壬戌 3월 3일 도산에 나와 배를 타고, 청계(淸溪)에 이르러 시냇가에 대를 쌓고, '청계대(淸溪臺)'라 이름하다. 귀암(龜巖) 이정(李禎)이 방문하고 며칠 후에 돌아가는데, 석간대(石澗臺)에서 송별하다. 1563년 63세 명종18년 癸亥 3월에 제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석하게 여겨, 글을 지어 두 번이나 사람을 보내어 제사지내고 그의 행장을 짓다. 1564년 64세 명종19년 甲子 4월에 여러 제자들과 시를 지으며 청량산을 노닐다. 9월에 정암(靜菴) 조광조의 행장을 짓다. 「심무체용설(心無體用說)」에 대한 변박(辨駁)의 글을 짓다. 1565년 65세 명종20년 乙丑 4월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명(職名)을 사임하는 글을 올려 허락받다. 「경재잠도(敬齋箴圖)」,「백록동규도(白鹿洞規圖)」,「명당실어(名堂室語)」를 써서 완락재 벽 위에 걸다. 8월에 제자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을 강론(講論)하고, 『경현록(景賢錄)』을 개정하다. 12월에 특명으로 소환(召還)되어 동지충주부사로 다시 임명되다. 1566년 66세 명종21년 丙寅 여러 관직을 제수받고 왕으로부터 특명이 내려 부득이 상경하다가 중도에서 병을 얻어 다시 사퇴하고 귀향하다. 왕은 실망과 한탄을 하며 유신(儒臣)들과 화공(畵工)을 내려보내 「도산기(陶山記)」와 도산 풍경을 그림으로 그려오게 하고 그것으로 병풍을 만들어 애완하였다. 10월에 회재(晦齋) 이선생(李先生)의 행장을 짓고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짓다. 1567년 67세 명종22년 丁卯 5월에 올라오라는 임금의 교지(敎旨)가 있었다. 6월에 부름에 응하여 서울에 들어가다. 명종이 승하하다. 7월에 예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퇴, 그밖에도 동지 경연 춘추관사, 동지 중추부사 등 수많은 관직의 제수가 있었으나 그때마다 사임을 간청하고 귀향하다. 9월에 기명언(奇明彦)의 편지에 답하다. 1568년 68세 선조원년 戊辰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에 임명되다. 6월에 왕명을 받들어 서울로 가면서, 길에서 잇달아 표문을 올려 다시 숭품을 사양하고 직품을 모두 개정해주기를 빌었으나 허락되지 않다. 7월 병인일(丙寅日)에 서울에 들어가다. 재임 중에 유명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지어 왕에게 올리다. 12월에 『성학십도(聖學十圖)』라는 제왕학(帝王學)을 열 장의 그림으로 그려 올리자 왕은 가납(嘉納)하여 병풍을 만들어 좌우에 두다. 1569년 69세 선조2년 己巳 정월에 이조판서에 제수되자 숙배(肅拜)하지 않고 병으로 세 번 사양하였더니 사면이 허락되었으나 다시 판중추부사로 임명되다.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되자 대궐로 들어가 성은(聖恩)에 감사하고 향리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아뢰는 등 거듭거듭 차자(箚子)를 올리다. 1570년 70세 선조3년 戊午 9월에 도산에 나가 제생(諸生)과 『계몽(啓蒙)』·『심경(心經)』을 강론하다. 10월에 기명언(奇明彦)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심성정도(心性情圖)」를 논하다. 11월에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가 신병(身病)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제자들을 돌려보내다. 12월에는 봉화현감(奉化縣監)으로 있는 아들 준(寯)을 불러 장사 준비를 갖추게하고, 형의 아들 영( )에게 비석을 세우지 말고 단지 자그마한 돌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유계(遺戒)를 쓰도록 명하고, 신축일(辛丑日) 유시(酉時)에 정침실(正寢室)에서 고요히 세상을 떠나다. 부고가 조정에 전해지자 영의정에 증직(贈職)을 명하다('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연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감상감사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領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를 추증하다). 1571년 선조 4년 辛未 3월 임오일(壬午日)에 예안(禮安) 건지산( 芝山) 남쪽에 장사지내다. 1573년 선조 6년 癸酉 11월 초하루 위패(位牌)를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봉안(奉安)하고 석채례(釋菜禮)를 거행하다. 1574년 선조 7년 甲戌 "도산은 선생이 도(道)를 강론하던 곳으로 서원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봄에 서원을 도산서당 뒤쪽에 세우기로 하다. 1575년 선조 8년 乙亥 여름에 도산서당 뒤에 서원이 낙성되니, 조정에서 '도산서원(陶山書院)'이라 사액(賜額)하다. 1576년 선조 9년 丙子 2월 정축일(丁丑日)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석채례를 거행하다. 이날 여강서원(廬江書院)에서도 위판(位版)을 봉안하고 제사지내다. 11월에 문순(文純)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지다. 도덕박문(道德博文)을 문(文)이라 하고, 중정정수(中正精粹)를 순(純)이라고 하다. 1596년 선조29년 丙申 윤(閏) 8월 무인일(戊寅日)에 지석(誌石)을 묻다. |
첫댓글 조선 시대 보석같은 인물들이지..............연화님도 그때 태어났음 아마 그들과 친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광수 생각 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