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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5권 / 소차(疏箚)
책자소(冊子疏)
[DCI]ITKC_BT_0380B_0060_010_0040_2003_001_XML DCI복사 URL복사
하늘이 돕지 않아 우리 대행대왕께서 갑자기 신민을 버리셨습니다. 슬픔에 저린 심산궁곡에서도 모두 나와 울부짖고 있는데, 지성이시고 순효이신 우리 전하로서 망극한 슬픔과 아픔을 어떻게 견뎌내고 계십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몸을 위태롭게 말라는 《예경(禮經)》의 말을 따르시고, 예를 어김이 없어야 한다는 중니(仲尼)의 교훈을 생각하시어 효도에 관한 생각을 잊지 마시고 좋은 소문 좋은 명망이 사방의 본보기가 되게 하소서.
신이 이어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어린 나이로 대상을 당하시어 슬픈 얼굴로 예복을 갖추고 말명(末命)을 받아 자리에 오르시던 날, 삼군(三軍)은 눈물을 뿌렸고 백료(百僚)들은 울음을 삼키다가, 급기야 머리를 묶고 일어나 눈물을 흘리며 말씀을 하시자, 듣는 이들 모두는 쥐죽은 듯하였고 소식을 전해 들은 사방에서는 바람이 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호령을 내리시자마자 금방 사이에 의구 속에 싸여 있던 뭇 백성들이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고 차분히 가라앉았는데, 이는 아마도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우시어 전하를 군사(君師)로 삼으시고 우리 왕에게 으뜸가는 자질을 부여하심으로써 상제를 도와 사방을 평온하게 만들게 하고 그리하여 우리 종묘와 사직 그리고 신민들의 끝없는 복이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신 것이니, 이 신 참으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면서 너무 감격스럽고 기가 솟아 눈물이 자꾸 나는 것입니다.
신이 비록 나이 늙고 의기도 소침하여 귀머거리요 병객에 불과하지만 행여 잠시라도 죽지 않는다면 우리 성상의 덕과 학문이 성취되고 훌륭한 공업을 이룰 날을 볼 수 있으리라 싶어, 어리석고 천한 것도 잊고 이 유신(維新)의 기회에 신의 소회를 한 번 토로하여 엄려(嚴廬)를 더럽히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신 참으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또 조아리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 아주 어리신 나이로 어렵고 큰 일을 이어받고 또 끝없는 걱정도 이어받으셨는데, 이는 주실(周室)의 어린 임금이 주공(周公)과 같은 충신도 성인도 없이 견디기 힘든 집안에 어려움이 많은 격이고, 한가(漢家)의 어린 황제가 곽광(霍光) 같은, 큰 일을 맡아 처리할 사람도 없이 국력이 약할 대로 약해진 뒤를 이어받은 격입니다. 가령 사방 나라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상(商)나라 것들이 선동하여 변을 일으키듯이 된다면 어떻게 대응을 할 것이며, 헐뜯기 잘하는 연개(燕蓋)나 간사하고 못되기 상관(上官) 같은 자들을 어떻게 살필 것입니까. 동산(東山)에서 군대 통솔은 누가 할 것이며, 오랑캐 몰아낼 도료(度遼)는 누가 될 것입니까. 더구나 지금 섬오랑캐들은 호시탐탐 우리 틈을 노려보고 있고, 북녘의 적들도 어차피 넘어질 바엔 남을 걸고 넘어질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힘으로 하면 부치고 덕으로 해도 아니며 조정에는 알맹이 있는 정사가 없고 전야에는 한탄스럽게 삼공(三空)의 현상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것마다 걱정되는 일이요 그 걱정은 마음을 태우고 있습니다. 마치 큰 물을 건너야겠는데 끝도 보이지 않고 나루터도 없는 것처럼 숨돌릴 사이도 없이 흥망이 결정될 듯한 기분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성난 파도 위에 뜬 배라고 해도 현재의 위급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고, 호랑이 꼬리를 밟고 봄철 얼음판을 건넌다는 표현으로도 지금의 위기를 비유하기에는 부족한 실정이어서, 이 어리석은 신으로서도 가슴이 싸늘하고 속이 떨려 밤중에도 잠을 못 이루고 전하를 위해 아무리 묘안을 짜보지만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이 들은 바에 옛날 진(晉)의 도공(悼公)은 나이 14세에 즉위하여 능히 국가 대정(大政)을 요리하고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결국 막강한 초나라를 꺾고 천하의 패자가 됐었고, 한(漢)의 화제(和帝)도 14세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하면서 기무를 계획하고 정책을 결정하여 흉노를 토벌하고 안팎을 숙청하여 종묘 사직을 편안하게 만들었는데, 그 두 임금이라고 무슨 별다른 사람이었겠습니까. 내내 전하의 춘추와 똑같은 또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인이 말하기를, “그도 장부요 나도 장부인데 내가 왜 그를 무서워하랴. 순(舜)은 누구이며 나는 누구란 말인가. 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문왕(文王)은 우리 스승이라고 했는데, 주공(周公)이 왜 나를 속였을 것인가.”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요순(堯舜)도 되려면 될 수가 있고 문무(文武)도 배울 수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성지(聖知)의 자질을 타고나시고 그 일을 할 만한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문제는 되도록 큰 뜻을 세워 국가 융흥이 성상으로부터 실현되도록 하시고 학문에 노력하여 자나 깨나 영웅ㆍ호걸을 지향하면서, 나도 전왕(前王)들처럼 할 수 있다고 다짐만 하신다면 신이 알기에 전하께서도 틀림없이 그 두 임금들이 해냈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이며, 전복된 나라를 붙잡아 세우고 거꾸로 매달려 신음하는 백성들을 풀어주는 방법도 지금 당장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전(傳)에 이르기를, “어려운 일 많은 것이 나라를 일으키는 길이고, 끊임없는 걱정이 성자(聖者)를 만드는 것이다.” 했습니다. 오늘 그 많은 일들이 바로 하늘이 우리 왕을 도와 성상의 마음에 많은 격려와 다짐을 주기 위한 것인 줄 그 누가 알겠습니까.
신은 사실 지극히 어리석고 누추하고 거칠고 세상 물정에 어두워 백에 하나 취할 것은 없으나 구구한 생각 하나를 마음속에 축적해 오기 반평생을 해왔는데, 그것이 혹시 오늘 어려운 시기를 타개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 있는 세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것을 곧 임종을 앞둔 선왕께 올렸던 것인데, 때마침 국가가 다사하고 선왕께서도 병환이 위독한 상태여서 선왕으로부터 아무런 명령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전하께서도 혹시 문침(問寢), 시선(視膳)의 여가에 한 번이나 보신 일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신이 선왕께 아뢰었던 것은 바로 다시 전하께 아뢰고 싶은 그 내용입니다. 사람은 비록 미천하고 하는 말은 비록 미치광이 같은 말을 할지라도 아뢴 그것만은 사실 오늘에 있어 세상이 가야 할 길과 백성들이 지켜야 할 도리 그리고 흥폐 존망이 걸려 있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만약 이렇다저렇다 말 한 마디 없이 버려버리고 만다면 그는 신이 성상께 고하는 본의가 아닐 뿐더러 남이 보기에는 아무리 가치없는 물건일지라도 신에게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신이 감히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 그 원소(原疏)를 다시 찾아내어 관심을 갖고 세밀히 검토하면서 성상의 마음으로 재택을 하시고, 또 유악(帷幄)의 대신들과도 그 소문을 놓고 함께 평가하여 잘되고 잘못된 것을 골라 취사를 결정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천하다 하여 그가 한 말까지 소홀히 여기지 마시고, 일이 크고 어려운 일이라 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으신다면 사실 천하가 그 이상의 다행이 없고 종묘 사직이 그 이상의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문에서 줄거리만 대충 거론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지금부터 전하를 위해 상세히 아뢰겠습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삼강(三綱)은 천지간의 원리와 법칙이요 사람의 도리도 그것이 기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크게는 천지요 그 다음으론 군신인데 군신 사이의 의리는 마치 부자 사이의 천성과도 같아서 천지 사이 어디서고 공통적인 것으로 중화라고 더 많고 오랑캐라고 더 적은 것도 아니며, 옛날에는 있었고 지금 와서는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잘 다스리면 치세가 되고 그것이 어지러워지면 난세이며,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사람이고 그것을 잃어버리면 오랑캐가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나라와 중국 명나라와의 관계가 마치 지금 조정 신하들과 성상의 관계와 같은 처지인데, 지금 우리는 삼강이 땅에 떨어졌고 기강 확립이 안 돼 있으며, 금수가 사람을 잡아먹고 사설(邪說)이 거침없이 나돌고 있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병자ㆍ정축년의 일은 신하들 전부가 잘못하고 사직이 영험이 없어 결국 천지가 뒤집히고 해와 별이 빛을 잃었던 것인데, 그래도 그 당시의 군신 상하는 분하고 원통하고 부끄러움을 느껴 마치 하늘 땅 사이에 서 있을 수 없을 듯이 했었습니다. 인조 대왕께서는 언제나 초하루 보름 망궐례(望闕禮) 때만 되면 서를 향해 통곡하시고 혹 신하들을 대해 흐느끼기도 하시고, 혹은 술의 힘을 빌려 울분을 달래기도 하시면서 한평생 원우(怨尤)를 억누르고 지내셨는데, 그 당시 대신이었던 최명길(崔鳴吉)은 소를 올려, 마음을 너그럽게 갖고 그렇게 억울하게만 생각지 마시라고 했던 것이 바로 사설이었습니다.
그리고 효종 대왕으로 말하면 당신 자신 꺾임을 당하고 발로 북정(北庭)까지 밟아보셨기에 더욱 분에 못 이겨 그들과는 하늘을 함께 않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상 그 문제를 가지고 신하들을 격려하면서 함께 충의(忠義)를 구현해보려고 하셨고 사실은 몸소 갑옷 입고 투구 쓰고 말을 몰아 진두에 서실 생각으로 늘 후원에서 친히 궁마(弓馬)를 익히시면서 송 효종(宋孝宗)의 목마철장(木馬鐵杖) 뜻을 따르다가 불행히도 거마가 전복되는 변을 당하게 되어 그 때문에 건강이 점점 나빠지고 고치기 어려운 병까지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길에서 들은 얘기지만 병이 위독한 상태에 이르자 좌우를 돌아보고 긴 한숨을 내쉬며 이르시기를, “하늘이 날 10년만 더 살게 해줬더라면 그 적들을 멸망시킬 수가 있었을텐데.”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이 전번 상소에서 말했던, 인조 대왕의 삭배지통(朔拜之慟)과 효종 대왕의 임조지탄(臨朝之歎)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을 지칭한 것으로 그 꺼질 줄 몰랐던 일편 단심은 사실 천지귀신도 다 아는 것들이었습니다. 아, 너무 고통스러워 길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입니다. 그로부터 이후로는 숱한 견제와 금령 속에서 그렁저렁 세월만 3, 4십 년이 흐르면서 인심은 점점 감염이 되고 인륜 기강은 무너지고 흐트러져 우선 벼슬아치와 선비라는 자들부터 다신 그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수치라고는 전연 없이 마음 달게 저들을 섬기고 무릎꿇고 벌벌 기면서 누구에게 뒤질세라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치 우리의 죽고 사는 것이 저들 성쇠(盛衰)에 달려 있기라도 하는 양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그때에 비해 형세가 이미 달라졌는데도 굽신거리면서 아양을 떠는 꼴은 오히려 전보다도 더하여 꼭 할 것이 아닌 것을 하기도 하고, 참을 수 없는 것도 참아가면서 지금 이러한 뜻밖의 말이라도 들으면 그것은 아주 해서는 안 될 말, 대단히 위험한 일로만 생각하고 입을 모아 배척하면서 그 말을 다시 할까 그것이 걱정인 것입니다. 자신의 현재 처지를 돌아보면서 본심으로 한 번 생각해볼 줄도 모르고, 지금의 우리 임금 심정이 지난 옛날 임금의 심정과 같으리라는 것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임금 곁에서 천하의 의리나 사직을 위한 계책을 들고 운위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는 실정이니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마음만 수고롭지 지혜가 졸렬하고 기가 더욱 약해지고 세력을 다 빼앗기고 하여 오랑캐들 속에서 스스로 떨치고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심을 괴란시키고 세상을 오도하고 임금을 못 본 체하고 어버이를 제 이차로 치는 폐단이 홍수(洪水)나 맹수(猛獸) 재앙 정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 밖에 예를 어기고 떳떳지 못한 일을 하여 풍교(風敎)를 해치는 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는 부류가 돼버리는 일들은 오히려 여벌이 되고 있습니다.
옛날 송(宋)의 고종(高宗)이 진회(秦檜)의 말을 믿고 수치를 무릅쓰고 원수를 관대하게 대하면서 자기 딴에는 적당한 시기를 기다리면서 백성들도 쉬게 하고 상대의 틈도 본다고 했다가, 급기야 금(金)나라의 왕인 양(亮)이 죽고 그 유민들이 소란했을 때 해볼 만한 기회가 있었는데도, 조종 공론이 아직도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여 효종(孝宗)같이 현명한 임금으로서도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놓치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원수인 오랑캐들은 스스로 망하고 다시 이웃한 적에게 먹힌 바 되어 드디어 천하를 송두리째 넘겨주고 천지 개벽 이후 일찍이 없었던 화환을 만들어내어 그 매서운 여독이 지금까지도 흘러오고 있는데, 이는 역사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는 지난 사실들로서 우리가 거울삼아야 할 것들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귀를 한껏 높이시고 원대한 계획을 세우시어 뭇 사람들 말에 현혹되지 마소서. 맹자가 이르기를, “양묵(楊墨)을 막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성인(聖人)의 무리인 것이다.” 했고, 송의 주 문공(朱文公)이 거기에 부연해서 말하기를, “사설(邪說)ㆍ피설(詖說)에 대한 공격은 꼭 성현(聖賢)만이 하는 것이 아니고, 난신(亂臣)ㆍ적자(賊子)를 죽이는 것은 꼭 사사(士師)만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토벌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맹자의 그 뜻을 미루어본다면 난신 적자를 공격도 주토도 못하면서 게다가 또 공격 주토할 필요가 없다고 앞장서서 주장하는 자는, 그가 바로 편파적이고 음란한 말을 하는 자이고 난신 적자와 같은 무리인 것이 분명하다.” 했습니다. 군자라면 도(道)를 보호하고 이륜(彝倫)을 바로 세우는 데 있어 말 한마디가 듣기에 그렇게도 무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사설이 거침없이 나돌고 있다고 한 말이 바로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전쟁도 수비도 다 않고 군대고 백성이고 모두 지쳤으며, 환관이 대를 물려 기세 등등하고 과거 습관은 고질화되어 현부(賢否)가 거꾸로 되어 있고, 당론(黨論)은 편파적이고 대원(臺垣)은 있으나마나 하여 시비(是非)가 헷갈리고 있습니다. 하늘은 그것을 미워하여 기근을 계속 내리고 죽이고 죽고 하는 화환이 병난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나라는 뿌리가 흔들리고 요사한 것들은 그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붕괴의 조짐이 중외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비들은 이해를 추구하는 마음뿐이고 백성들에겐 장자를 위해 목숨을 바칠 의리가 없습니다. 예의도 없고 의리도 없고 임금으로 해서는 큰 걱정거리이지만 누구 하나 감히 말하는 자 없고, 형성(衡星)이 자리를 옮기고 두성(斗星)이 꺼져 백성들의 재앙이 되고 있으나 하늘은 그것을 수습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라가 오래 지속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늘에는 혜성과 무지개가 나타나고 땅에서는 산이 무너지고 시냇물이 밭고 사람은 병들고 괴물이 판을 치고 천지가 진동하는 등 이 모두가 고인들 말에 의하면 망국의 이변인 것입니다.
그 조짐이 전부터 쌓여왔기에 지금 와서 나타나고 있는 것인데, 움직이고 있는 하늘을 보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느슨하게만 생각하고 있으니 백성이 어육이 될 날이 곧 다가올 것입니다. 더구나 오랑캐들은 세력이 이미 꺾이고 의려(義旅)가 각처에서 일어나 천하 사람들 모두가 원수놈의 배에다 칼질을 하려고 하고 있는데, 우리는 의관 갖춘 사신이나 오가고 경조(慶弔)의 일에 서로 찾아다니기나 하면서 불쌍한 백성들 고혈(膏血)을 짜내 굶주린 호랑이 주둥이에다 처넣고 있으니, 우리로서는 적을 대비할 만한 축적도 비어책(備禦策)도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신이 들은 바로는 옛날에 소국이 대국을 섬기고 약국이 강국을 받드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예(禮)를 앞세워 자강(自强) 정책을 수립하였고 또 참작해서 할 것은 해도 안 할 것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鄭)의 자산(子産)은 진(晉)나라 사람들이 사씨(駟氏)를 후계자로 세우게 한 일을 허락하지 않았고, 병기를 주어 진(晉)과의 접경지역 성가퀴에 올라 지키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으며, 또 한자(韓子)가 옥환(玉環) 사는 일도 허락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경위가 반듯하고 사리에 맞고 자기 자신을 예로 지킨다면 비록 약소국일지라도 강포한 나라를 상대로 자기 입장을 주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북을 섬기면서 피폐(皮幣)와 금보(金寶)로 저들 배를 양껏 채워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재상 지위에 있는 관료라도 저들이 죽이고 싶으면 죽이고, 잡아가고 싶으면 잡아가고, 금고시키고 싶으면 금고도 시키고, 가두고 싶으면 가두기도 합니다. 일개 사신, 심지어 우리를 배반하고 그쪽으로 간 무리들까지도 모두가 우리 조정을 업신여기고 우리 관리들을 모욕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예리한 칼을 주어 저들 마음대로 베도록 하고 금은 비단을 송두리째 맡겨 저들 멋대로 삼켰다 뱉았다 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문 앞에 금을 그어두고 성지(城池)와 갑병(甲兵)을 다 버렸으며 좋은 말 좋은 기구도 다 가져가게 내버려두고 있고, 심지어 한족(漢族)의 유민(遺民)이 아무도 모르게 와 숨어 있어도 그것을 감히 숨겨주지 못하고 이리와 구렁이 입에다 가져다 넣어주고 있으니, 그야말로 자산(子産)이 말한바, “진 나라 속현에 불과하지 무슨 나라라고 할 것인가.” 했던 말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이고 우리가 지금 넋이 도망가고 몸이 부들부들하여 혼자 서지도 못하고 있는 꼴은 비록 적들이 보더라도 틀림없이 비웃을 것입니다. 이러다간 청하지 않은 것도 허락하고 부르지 않아도 대답하는 꼴도 못 돼 그렁저렁 세월만 가노라면 일은 자꾸만 변할 것인데 결국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옛날 우리 태종 대왕 때 중국에서 온 태감(太監) 황엄(黃儼)이 자기가 지니고 있던 동불(銅佛)에다 절을 올리려고 하자, 하륜(河崙)ㆍ조영무(趙英茂) 등이 상도 따라 할 것을 청하니, 상께서 꾸짖기를, “우리나라 신하들이 의리를 지키는 자 한 사람도 없구나. 그러고서야 어떻게 임금을 급난(急難)에서 구출해낼 것인가. 고려국 충혜왕(忠惠王)이 원(元)나라로 끌려갈 때 그를 구출하려던 이가 한 사람도 없었다더니 나는 비록 이 모양이지만 꼭 그 신세 비슷하구나.” 하고 끝까지 절하지 않았고 그것을 본 황엄 역시 웃고 절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례한 자를 심복시키고 아래 신하들을 깨우친 성철(聖哲)의 깊고 원대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군신 상하도 태종 대왕의 교훈을 본보기로 삼고 가슴에 새겨둔다면 적에게 멸시만 당하고 우리 자신 아무 희망이 없는 사람을 스스로 만드는 일은 아마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지(城池)와 갑병(甲兵) 문제에 있어서는 그것이 비록 당초 조약 속에 들어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예로부터 국교를 수립하고 서로 우호를 다지는 입장에서는 누구나 상대방의 울타리를 자진 철거해 버리고 폭객(暴客)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옛날 주 세종(周世宗)은 남당(南唐)과 싸워 이기고서도 특히 그들로 하여금 성곽을 튼튼히 쌓고 갑병을 잘 손질하여 자손의 백년 대계를 삼도록 했었습니다. 우리가 비록 저들에게 그렇게까지 바랄 수는 없지마는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하면 저들이 저들 입장만 내세울 핑계도 없을 것이고 또 안 들어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몇십 년 동안 설비도 철거해버리고 해자도 메워버리고 항거하는 말 한마디 없이 성도 쌓았다가 무너뜨리고 어쩌다 있는 것까지 몽땅 헐어버렸습니다. 장수래야 군병 통솔도 않고 군대래야 활 하나 당길 줄도 모르며 재정과 군량미는 모두 빚쟁이들 손아귀 아니면 장사치들 주둥이로 들어가고 말기 때문에 여기나 저기나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 백년이 가도 회복할 가망이 없고, 천리를 가도 방어에 필요한 설비 하나 해놓은 곳 없습니다. 아무리 슬기로운 자가 있다 해도 도무지 손을 쓸 곳이 없게 만들어놓았는데 이 대체 무슨 까닭입니까? 자산(子産)에 관한 기사는 《좌사(左史)》에 나와 있고, 남당(南唐) 기사는 《통감(通鑑)》에 있습니다.
나라의 이기(利器)와 장기(長技)를 가져다 남을 줘버리고도 그리 애석해 하지 않고 또 삼한(三韓)의 갑옷을 몽땅 가져다 여산(廬山) 큰 골짝을 메워버리고서도 후회할 줄을 모르니 아아, 슬프외다. 그리도 그렇게 않으면 안 되었던가요?
신의 생각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활이 장기였는데 거기에다 지금은 화총(火銃)까지 겸하고 있습니다. 이 화총은 지난 임진년과 정유년에 일본에서 온 것입니다. 일본은 일찍이 그것으로 우리 백성들을 무참히 죽이고 천하를 진동하게 했었고, 여진족들 송산(松山 의주(義州)의 옛 이름) 싸움에서는 또 우리에게서 그것을 빌려다가 10만 의사(義士)를 도사(濤斜) 패전에서 한꺼번에 죽게 만들었으며, 또 관내(關內)를 짓밟고 중국까지 삼켜버린 것도 모두 그 물건이 그렇게 했었으니, 참으로 천하에 몹쓸 무기이고 치우(蚩尤)도 항우(項羽)도 못 당해낼 무기인 것을 우리는 갖고서도 이용을 못하고 다만 그것으로 오랑캐들 포학만 도와준 꼴이 되어 천하에 죄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또 해마다 적사(敵使)들이 와서 그것을 찾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거절할 줄도 모르고 있으니, 그러고도 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하나가 천 명을 당하고 열이면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그것을 남에게 빌려만 주었으니, 그것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붙여주고, 적에게 칼을 대주고, 도둑놈에게 식량을 대준 정도가 아닙니다. 그뿐입니까. 저들은 또 틀림없이 그것을 가지고 중국에 독을 뿌리고 천하를 호령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조선이 대준 것이다.” 할 것이니, 그 어찌 천하의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과오를 거듭 범한 꼴이 아니겠으며, 우리 입부리가 비록 석 자가 되고 혀가 백 개가 있다 한들 온 천하가 우리를 원수로 여기고 군대를 동원하여 치려고 덤비는 화환을 무슨 수로 막아낼 것입니까.
또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우리 조정 신료들 생각에 저들이 만약 입만 떼면 앞으로 금려(禁旅)를 동원하여 응원할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데 그 말은 또 어찌해서 난 말이랍니까? 노씨(老氏)의 말에, “물고기는 못을 벗어나서는 안 되고, 나라의 이기(利器)는 남에게 빌려줘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그 말은 물고기는 못을 벗어나면 죽고 나라의 이기는 남에게 빌려주면 망한다는 말이지만, 그 떠도는 말은 또 이기를 가져다 남에게 준 그 정도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 자신 효경(梟獍)이 되어 상제의 노여움을 사면서까지 하찮은 자기 목숨을 유지하려 하고, 또 그 방법으로 우리 임금까지 종용하여 깊이를 측량 못할 못 속에다 천균(天勻)의 무게를 넣으려고 하고 있으니, 그러한 말을 하는 자 비록 명분 의리 따위는 생각지 않는다 치더라도 바로 피부에 닿는 이해 관계도 생각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곧바로 통곡을 할 일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관자(管子)의 말에, ‘예의염치(禮義廉恥) 그것을 사유(四維)라고 하는데 사유가 팽팽하게 서 있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하고 만다.’고 했습니다. 관자가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라면 모르지만 관자가 조금이라도 치체(治體)를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라고 말입니다. 관자가 말한 염치라는 것, 가의가 말한 한심이라는 것을 신은 잘 모르지만, 그들이 만약 지금 있어 돌아가고 있는 시세를 본다면 어떻다고 하겠습니까.
신이 길에 떠도는 말만 듣고 국사를 함부로 논한 죄는 만 번 죽어 마땅하지만 그러나 오늘 인습에만 젖어있는 국사 또는 신하들의 몸에 밴 관습으로 볼 때 그 정도까지 가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는 것을 성상께서도 알고 계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오늘의 나라 형세를 보실 때 편안합니까, 위태위태합니까? 이대로 지속이 되겠습니까, 이러다간 망하겠습니까? 스스로 안정을 누릴 만한 권세도 없고 자립을 할 만큼 명분도 의리도 없다면 하루 아침에 귀신이 재화를 부추기고 인심이 뒤집혀 큰 집이 흔들릴 염려가 있고, 비바람이 갑자기 불어닥쳐 산이 무너지고 언덕이 꺼지면서 대세가 기울 염려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신하로서 임금을 배반할 자도 있을 것이고 자식으로서 아비를 버릴 자도 있을 것이며 어린 적자(赤子)들이 모두 용사(龍蛇)로 변하고 중국이고 오랑캐고 모두 우리와는 원수가 될 것인데, 그렇게 되면 비록 종묘 사직의 신령(神靈)과 전하의 위복(威福)으로도 그 뒷수습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신이 전번 상소에, 오늘 이 말은 일을 일으키고 무슨 공을 탐내서가 아니라 바로 존망이 걸려 있는 마당에 부득이한 구급책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서는 의분이 복받치고 말을 다하자면 감정이 넘쳤지만 한 가닥 이해 문제 때문에 할 말을 다 못했었는데 이제 현명하신 주상을 위해 감히 다시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아, 국가 존망이야 물론 하늘이 하는 일이지만 하늘은 사실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아 흥폐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인(仁)과 지(智)가 좋다는 것은 그것이면 실패를 성공으로 돌리고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수양이 수명을 연장하는 경지에 이르고,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이르고, 국가가 하늘의 명으로 장구한 복을 누리게 되기는 다 어렵기는 어려운 일들이지만 노력하면 되기는 다 되는 일들입니다. 우리도 단 하루라도 스스로 노력만 하면 임금이 소강(小康)ㆍ무정(武丁)ㆍ선왕(宣王)ㆍ광무(光武)가 되지 말라는 법 없고, 신하들이 이윤(伊尹)ㆍ여망(呂望)ㆍ관중(管仲)ㆍ악의(樂毅)가 안 될 수 없고, 군대가 잘 훈련되고 씩씩하고 용감하지 않을 수 없고, 백성들도 태평 성대를 노래하며 잘살지 않을 수 없어 모든 길이 다 열리고 모든 선이 다 모여들 것이고, 그렇지 못하고 하루하루 구차하게 전례만 인습해 나간다면 모든 것이 불만족하고 풀이 확 꺾여 위에서도 우두머리 노릇을 할 수가 없고 아래서도 마음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치 산을 넘는 해나 골짝을 내닫는 물처럼 석진(石晉)이 되고 항송(杭宋)이 돼버려 삼강(三綱)ㆍ구법(九法)이 다 무너지고 인류가 금수로 변할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기를 잘하고 못하고에 따라 화복(禍福)이 그렇게도 달라지니 그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신이 또 애석히 여기는 것은 당당한 기자(箕子)의 나라 수천 년 인현(仁賢)의 나라가 결국 오랑캐로 전락되어 천하의 버림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고, 또 애석한 것은 전하께서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질을 가지시고 그만한 위치에 계시면서 무엇인가 할 수 있는 때를 만났는데도 이 어려운 시기에 뭐 하나 해내지 못하고 말세의 못난 임금들과 똑같이 돼버리는 것입니다. 지(志)에 이르기를, “선을 보고도 태만하고, 그른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있고, 때가 왔는데도 의심을 하는 것이 도(道)가 행해지지 않는 원인인 것이다. 선을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사특함이 날로 자라나고, 그른 줄을 알면서도 버리지 않으면 도가 날로 오염이 되고, 때가 왔는데도 맞아들이지 않으면 큰 복록이 다른 데로 가버리는 것이다.” 했는데, 지금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을 신은 저으기 전하를 위해 애석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지금 때는 비록 왔어도 우리나라에는 인물이 없어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자가 없다고 하지만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이 단비를 내리려고 하면 산천에서 구름이 생겨나는 것이고 성인(聖人)이 나타나면 만물이 다 보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의 선왕(宣王)이 난리를 평정하려고 했을 때 방숙(方叔)ㆍ소호(召虎)ㆍ번 중산보(樊仲山甫)ㆍ윤길보(尹吉甫)가 조정에 함께 있었고, 광무(光武)가 의(義)를 앞세워 일어나자 등우(鄧禹)ㆍ풍이(馮異)ㆍ가복(賈復)ㆍ구순(寇恂)이 한때에 일어났으며, 지덕(至德) 연간에 난리를 평정할 때는 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가 있었고, 소흥(紹興) 연간에는 한세충(韓世忠)ㆍ악비(岳飛)가 일어나 용병을 했습니다. 세상에 인재 있는 것이 비유하자면 산에 곰과 표범이 있고 늪에는 물고기와 용이 있는 것 같아서 하늘도 언제나 내놓고 있고 땅도 언제나 기르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임금 된 이가 찾아서 쓰느냐 안 쓰느냐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임금은 있는데 신하가 없는 경우는 없었고 그래서 옛분들이, 인재는 다른 시대로 빌리러 갈 것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도 선왕ㆍ광무같이 뜻이 있고 하려고만 하신다면, 신이 알기에 방숙ㆍ소호나 등우ㆍ가복 같은 무리들은 왕께서 취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주역》에 이르기를, “아름다움을 감추어두고 있으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있느니라.” 했는데, 그 말은 임금이 아름답고 독실한 덕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면 보도 듣도 못한 데서 인재가 나타나, 와서 도와주는 것이 마치 하늘에서나 내려온 것 같다는 말로서, 그것은 틀림없이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이 바로 진리인 것입니다. 성인이 왜 우리를 속이겠습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전하께서 어린 나이에 새로 즉위를 했고 적들은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어 대사를 일으킬 수는 없는 일이다.”고 하고 있으나 신은 그것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상께서 현철하고 슬기로움을 하늘에서 타고났고 때만 오면 일을 꾸미려고 항상 대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옛날 주온(朱溫)은 진 장종(晉莊宗)이 새로 즉위했다고 만만하게 생각했다가 급기야 협채(夾寨) 싸움에서 양(梁)나라 사람들 간담이 싸늘했고, 유숭(劉崇)은 주 세종(周世宗)이 나이 어리다고 쉽게 보았다가 급기야 고평(高平) 싸움에서 한(漢)나라 사람들이 대패를 했습니다. 그 모두는 고인들이 자기 쪽에 유리하도록 형세를 이용하고 다른 일 다 제치고 일을 꾸며 큰 공로를 세운 예들입니다. 후세에 전하가 이런 경우를 만날 줄 누가 알겠습니까. 성상께서 하늘이 주신 슬기를 발휘하시고 신속하게 토벌할 수 있는 규모를 짜신 다음 훼방 놓는 뭇사람들 말에 현혹되지 마시고 스스로의 주장대로 해나가시는 것이, 바로 우리 전하께서 오늘 노력하실 일이고 또 그리하면 우리 백성들 적개심을 고취시켜 불의에 적을 기습하게 하는 길도 될 것입니다.
혹자는 또 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 마음이 모두 풀려서 적지에 가서 써먹을 수가 없게 됐다.”고 하지만 신은 그것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가도(椵島) 싸움과 송산(松山) 싸움 때도 내내 다 그 사람들이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군대를 깊은 발해만 속 또는 흑룡강 이북까지 몰아넣었어도 천행으로 끝까지 무사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정의를 위해 동원되고 하는 일이 순리적인데 무슨 염려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것들은 신으로서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말들입니다. 《주역》에도 이르지 않았습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천지도 따라주는데, 하물며 제후 봉하고 삼군 동원하는 일이겠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또, 전쟁은 깊이 들어갈수록 적극적이어서 주인 쪽이 이기지 못한다고도 하지 않았습니까.
신이 생각하기에, 지금 사대부(士大夫)들은 마음속에는 이해가 엇갈리고 보고 들은 것만 앞세우기 때문에 하는 말이나 하는 짓들이 본심에 어긋나는 경우가 있지만, 차라리 서민들은 비록 무식하고 멍청하기는 해도 천부의 성품만은 그대로 가지고 있어 지극히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신령하고 고지식한 속에도 신의가 있습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지난 송산(松山) 전쟁에서도 아군이 화기에 탄환까지 가지고 있었지만 차마 중국 사람들을 향해 쏘지를 못하고 적들이 듣게 소리만 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장령(將領)과 편비(褊裨)들이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서 쫓아다니며 달래고 위협하고 하여 독한 마음으로 실지 살상을 하게 했다고 하는데, 지금 들어도 슬픈 얘기입니다. 그렇게 위협을 주고 다그침을 당하는 속에서도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은 끝내 속일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도 사대부 쪽에서는 엉뚱한 주장을 하는 자들이 없지 않겠지만 삼군(三軍)과 백성들 마음만은 틀림없이, ‘그대와 함께 가리’ 하고 바라고 있을 것으로 신은 알고 있습니다. 이쪽에서 시작만 하면 백성들은 크게 호응할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풀은 쓰러지듯 아래에서 틀림없이 더할 것입니다.
혹자 중에는, “군량미 요청해 온 것을 일단 거절하고 관문도 닫고 조약도 끊어버리고 군대를 국경에 집결시켜 사변에 대비하자.”고 하는 자도 있는데, 그 주장도 그럴 듯한 것 같지만 사실은 크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전쟁과 수비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이고, 주둔하고 있거나 행군을 하거나 군비를 쓰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로부터 전쟁이 있던 세상에는 싸우는 쪽이 언제나 여유가 있었고 수비하는 쪽은 늘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가령 진(秦)나라가 함곡관을 나서서 제후들을 공략할 때는 일개 주(州)의 병력으로 천하의 7분의 6에 해당하는 상대를 공격하면서도 마치 여우나 토끼 사냥하듯 하였으나 진나라는 힘이 남아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급기야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이 일어나자, 천하를 통일하고 백 번 싸워 다 이겼던 그 위력으로 진승ㆍ항우(項羽)의 오합지졸, 그나마 호미 들고 나무창 든 그들을 맞아 싸웠어도 오히려 지탱을 못하고 결국 진나라는 없어지고 말았는데, 그것이 바로 가의(賈誼)가 말한, 힘의 강약이 달라져서가 아니라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라진 것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대체로 남을 정벌하는 것과 남에게 정벌을 당하는 것과는 강약이 우선 달라지고 또 지키기만 하다가는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게 되어 그 결과는 구차하게 시간이나 끌다가 결국 문드러져 구제불능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더구나 관문을 닫고 조약을 끊는다고 해도 오는 적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을 것이고 국경에다 군대를 집결시키면 그것은 자기 땅에서 싸우지 말라고 한 경계를 우리 스스로 범한 꼴이 되니, 그 주장은 경계를 해야지 시도해서는 안 될 오늘의 최하책인 것입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가 말하기를, “지금 백성들은 궁하고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쳐 있지만 일은 그만둘 수가 없는데 이왕 그만둘 수 없는 일이면 그냥 주둔해 있거나 행군을 하거나 힘들고 비용이 들기는 매일반입니다. 그런데 지금 바로 도모하지 않고 일개 주(州)의 땅을 가지고서 적과 지구전을 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신으로서는 이해 못할 일입니다.” 했습니다.
아, 무후의 세상 경영하는 계획과 일에 숙달해 보이는 그 말이야말로 바로 지금 일의 귀감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사정은 전쟁을 하거나 수비만 하고 있거나 조건은 일반이고, 내수(內修)를 하거나 외양(外攘)을 하거나 그 일이 그 일이며, 가만히 있거나 움직이거나 드는 노비(勞費)는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러나 또 전쟁을 하면 틀림없이 이기고 수비만 하면 틀림없이 패하며, 가만히 있으면 스스로 곤욕을 부르고 움직이면 식량을 버는 일이며, 외양 그것이 바로 내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지만 오늘 일을 두고 얘기할 수가 있습니다. 아, 사람들의 말에, “비록 지혜가 있어도 시기를 타는 것만 못하다.”는 말도 있듯이, 시기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식량을 싸가지고 말을 달려야지 틈을 주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민생이 괴롭기 이보다 더한 때가 없고, 백성들 갈망도 이보다 더한 때는 없었습니다. 동해의 수비가 매우 허술하고 관내의 민심도 이미 동요되고 있어 우리가 인성(仁聲)을 앞세우고 의기(義旗)가 서로 향하기만 하면 요동의 중국 유민들이 틀림없이 단사호장(簞食壺漿)으로 왕사(王師)를 맞을 것이고, 중국 본토인들도 창을 거꾸로 들고 반격을 개시하여 뭇 적을 한꺼번에 무찌름으로써 원수와 함께 살아왔던 부끄러움을 씻고 우리를 학대한 분풀이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마치 초(楚)나라 장왕(莊王)의 3년을 울지 않은 경우나, 한(漢)나라 사람들의 몇 해를 못 들었다는 말처럼 큰 가뭄 끝에 단비 같고 강하같이 세가 곱으로 불어날 것인데 그것을 누가 막아낼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맹자(孟子)가 말한, ‘일은 옛사람에 비해 절반만 해도 공로는 곱으로 빛날 것이 오직 이때가 그럴 때’라는 것이고, 또 ‘인자(仁者)는 대항할 자가 없다는 것을 왕은 의심하지 마소서’라는 경우이니, 신이 감히 우리 왕을 위해 다시 외우는 것입니다.
신이 지난 일들을 두고 상고해보기도 하고 또 현실과 맞추어보기도 하면서 밤낮으로 익히 생각 끝에 한 말이지, 감히 전하께 위태로운 일을 하시라는 것이 아니며 또 감히 실속없는 말로 전하를 강권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상께서 총명이 으뜸이셔서 이러한 말을 올려도 되겠다는 것을 알았고 또 오늘 천시(天時)와 인사(人事)로 보아 뒤로 미루고 오래 붙잡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보이기 때문에 우리 성상께서 능력이 닿으시는 데까지 해보셨으면 하는 것이고, 또 말하지 아니할 수 없어서 말을 한 신의 입장을 이해하시고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한나라 제갈 무후의 말에, “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왕업(王業)은 망하기 마련인데 그냥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토벌하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했고, 또 이르기를, “신은 죽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다 바칠 뿐이고 잘되고 못되는 결과에 대해서는 신으로서도 미리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 했습니다.
지금 우리 군신 상하 모두가 그렇게만 마음을 먹으면 그 마음이 정직하고 의기가 꿋꿋하여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것이 없고 내려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울 것도 없으며 살아서 내 할 일 다하고 죽으면 편안한 것 그뿐입니다. 벼락이 떨어지고 거센 바람이 몰아쳐도 끄떡없고 비록 천만인이 뭐래도 내 갈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상제를 감동시킬 수도 있고 사해에 빛을 낼 수도 있으며, 천지도 힘이 돼주고 귀신도 피해갈 것입니다. 따라서 일이 성공될 수 있다는 것, 적을 섬멸할 수 있다는 것, 잠깐 사이에 많은 공로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 등은 오히려 이차적 문제인 것입니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지사(志士)와 인인(仁人)은 살기 위해 인(仁)을 해치는 일이 없고, 몸을 죽임으로써 인을 성취하는 경우가 있느니라.” 했고, 또 “예로부터 죽지는 다 죽지마는 신의가 없으면 백성들은 자립을 못하느니라.” 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사생과 존망 그리고 인신(仁信) 관계에 있어 성인이 그 경중을 구별하여 취사 선택을 결정하게도 했던 것입니다. 신이 또 들은 바로는, 제왕의 효도는 선왕의 뜻과 하시던 일을 계승하는 것보다 더 큰 효도가 없고, 상례(喪禮)도 경(敬)이 첫째이고 애(哀)가 그 다음이고 척(戚)이 최하라고 했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업을 계승하는 것을 가장 큰 일로, 어버이 현양하는 것을 가장 중한 일로 삼으시고, 몸을 야위게 만들어 보고 듣는 이를 놀라게 마실 것이며, 번다한 비용으로 백성들 힘을 더 상하게 하지 마소서. 되도록 탕평 정책을 쓰시고 사방의 이목에 관심을 기울이실 것이며, 경연(經筵)을 자주 열어 마음을 올바르게 가꾸시고 노성(老成)을 가까이하여 많은 도움을 받으실 것이며, 많이 베풀어 백성들 환심을 사시고 수강(搜講)을 균등히 하여 대체적 국가 예산을 짜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빨리 도롱이와 삿갓 등, 비에 대비한 도구를 마련하여 궂은비가 내릴 때 군색한 일이 없도록 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옛분들 말에, “모신(謀臣)과 맹사(猛士)는 도롱이나 삿갓과 같아 비가 내리게 되면 반드시 찾게 된다.”고 했는데, 이 문제야말로 오늘 전하께서 당연히 성의를 다해 호소하고 그러한 인물을 찾아내고 또 추려서 장래에 대비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기타 병졸ㆍ군량미ㆍ마소ㆍ병기ㆍ기계ㆍ투구ㆍ갑옷 등등도 모두 미리미리 준비해두었다가 쓸 때 써야 할 물건들입니다. 그리고 또 화포(火砲)로 말하면 지금 천하에서 기술로 우리나라를 당할 나라가 없는데, 그것은 마치 하늘이 우리에게 그 물건을 주어 오랑캐를 쳐 없애고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뜻 같습니다. 그리고 또 신이 들은 바로는, 옛날에는 병력을 동원할 때 수레로 군대를 편성했는데, 그것은 헌원씨(軒轅氏)가 남긴 제도로서 중국의 안전을 유지하고 사이(四夷)를 제어하는 데 써왔다는 것입니다. 후세에 그 제도가 점점 무너지고 중국이 오랑캐들 틈바구니에서 스스로 지탱을 못해왔던 것도 사실은 그 제도가 무너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승거(乘車) 제도는 지금 비록 갑자기 회복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병서(兵書)에서 말하고 있는 무충(武衝)과 부서(扶胥), 또는 진인(晉人)들이 말한, 마융(馬隆)이 만든 편상거(偏箱車) 같은 것들은 지금도 쓸 수가 있고 그것을 만드는 법도 알기 어려운 게 아닌데다, 그것이면 돌진해오는 적군의 말을 막을 수도 있고 화포로 적진을 먼저 쳐들어가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신이 전번 상소에서 말했던 무강천편(武剛千偏)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오랑캐를 제어하는 도구로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데 그 역시 궂은비에 대비하여 미리미리 갖추어 놓아야지 갑자기 변통할 수는 없는 것들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그 계획을 일찍 세우시고 힘을 다해 만들고 시험하게 하여 일이 닥쳤을 때 이용할 수 있게 하소서. 이는 나라를 요리하는 자가 할 일이지 신이 말할 것이 아닌데도 자꾸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빨리 달리자니 예모를 차릴 겨를이 없는 격이어서 신으로서는 너무나 황공하고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해하시고 살펴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최복(衰服)에 검정물을 들여 입고 종군한 경우도 있었고, 하얀 상복 차림으로 정벌에 나선 예도 있었습니다. 전하께서도 힘과 재정을 축적하고 때와 형세를 이용하여 일찍 조벌(吊伐)의 군대를 일으켜서 천하의 더러운 존재를 제거하시고 한 번 성내시기를 문왕(文王)ㆍ무왕(武王)처럼 하여 대대로 묵은 울분을 걸러버림으로써 백성들을 복되게 하고 우리 조종을 빛내시면, 그것은 오늘의 신민들의 다행만이 아니라 사실 천하 만세를 두고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신이 또 생각해보건대, 지금 세상에 백성이 있고, 사직이 있고, 산천이 있고, 갑병(甲兵)이 있어 저들 오랑캐와 서로 겨룰 만한 형세를 갖추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라고 봅니다. 현재 오(吳)와 정(鄭)이 일어나 천하가 둘로 나누인 상태이므로 우리가 바른발을 드느냐 왼발을 드느냐에 따라 저들 존망이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사랑하고 돌보며 해내(海內)가 모두 바라고 있는 자가 우리 임금을 버려두고 그 누구이겠습니까. 탕서(湯誓)에 이르기를, “하읍(夏邑)의 형벌이 호되고 백성을 못살게 굴어 백성들이 함께 망하기를 바라고 있으니, 지금 내가 꼭 가서 정벌하리라.” 했고, 무왕(武王)은 말하기를, “상(商)의 죄가 이미 찼는데 내가 하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 죄 그와 같으리라.” 했습니다. 우리 성상께서도 그 두 성인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으신다면, 하늘의 위엄이 무섭고 백성들의 다급함을 알아 놀랍고 두려워서 감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던 그 심정을 전하도 느끼실 것입니다. 하늘이 몹쓸 덕에 싫증을 느끼고 세상에 그 포학이 알려졌을 때 우리 왕께서 불끈 일어나시면 사람도 귀신도 우러러볼 것이고, 때가 오려고 하고 일이 틈이 있는데도 그냥 지나쳐버리면 덕을 잃고 이름도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덕이 가볍기가 털과 같다지만 그것을 드는 백성이 적다네. 내 헤아려보고 재보아도 그를 드는 자 중산보(仲山甫)뿐이라네.” 했는데, 이 신 현명하신 주상을 위해 그 시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은 나이 60이 다 되어 죽을 날이 머지 않았고 귀도 눈도 다 어둡고 근력도 푹 썩어 공명에 대한 희망이라곤 이미 없습니다. 다만 천명(天命)을 무서워하고 남의 궁한 것을 슬퍼했던 고인들 말씀에 느낌이 있었고, 또 전하께서 처음 자리를 이어받은 청명(淸明)한 이 시기에 많은 어려움을 목격하고는 그냥 말 수가 없어 망령되이 이렇게 논해 본 것입니다. 울분이 가슴을 메우고 있어 말이 자연 길어졌고 저촉된 부분도 많기는 합니다만, 전하께서 미치광이 같고 참람됨을 용서하시고 우직한 충정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의 좌우명을 생각하시고 특별히 유념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비는 바입니다. 이 신 하염없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아뢰는 바입니다.
이상 소본(疏本)은 원래 꼭 올릴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그냥 써본 소문이기 때문에 올리기에 맞지 않은 점이 있으나 그러나 개진(開陳)하고 싶은 구구한 심정과 함께 성상께서도 신의 본심을 살펴주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감히 이 원본을 올리기로 한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특별히 유념하여 한 번 보아주시고 반복하여 또 보셔서 득실을 결정한 후 채택된 부분은 그대로 시행하시고 남이 알게 비답을 내려 성문을 번거롭게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비밀리에 가부를 결정하여 신이 직접 받들도록 해주시기 바라오며, 혹시 표현이 애매하거나 인용한 부분에 잘 모르시는 데가 있으면 가까이서 모시고 있는 대신을 불러 자문을 구하셔서 이 신의 말에 아무런 의심이 없이 확실한 파악을 하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소본에서 언급한 선왕조의 소본에 대해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으면 그를 찾아오게 하여 종합해서 보셨으면 좋겠고, 만약 날짜가 오래되어 없어졌으면 다시 신으로 하여금 베껴 올리게 하여 전후 아뢰었던 뜻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신 다음 아울러 재택을 하시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연개(燕蓋) : 한 소제(漢昭帝) 때의 연왕 조(燕王旦)와 개장공주(蓋長公主). 황제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곽광(霍光)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 황제까지 폐위시키려고 모사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에 다 자결하였음. 《漢書 昭帝紀》
상관(上官) : 복성(複姓). 여기서는 한 소제 때의 상관걸(上官桀)과 걸의 아들 상관안(上官安)을 말함. 《漢書 昭帝紀》
동산(東山) : 주공(周公)의 동정(東征)을 말함. 《詩經 豳風》
도료(度遼) : 한(漢)나라 때 장군의 명호. 요수(遼水)를 건너가 흉노족을 친다는 뜻으로 만들어진 이름. 《漢書 匈奴傳》
삼공(三空) : 전야(田野)가 비어 있고, 조정(朝廷)이 비어 있고, 창고가 비어 있는 것. 《後漢書 陳蕃傳》
진(晉)나라 …… 세우게 한 일 : 정(鄭)의 사언(駟偃)이 진(晉)나라 대부(大夫) 집안으로 장가들어 아들 사(絲)를 낳고 죽었는데, 사가 어리다 하여 그들 집안에서는 사언의 숙부인 사걸(駟乞)을 그 집안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으나 자산(子産)이 그를 허락지 않고 모른 체 내버려두었다. 그후 사는 당시 강국이었던 자기 외가 나라인 진나라 힘을 빌려 후계자가 되어보려고 호소를 했고, 진은 그 문제를 가지고 사신을 보내 사걸이 후계자가 된 연유를 따졌으나 자산은 끝내 당당한 주장을 내세워 진나라의 간섭을 배제하였음. 《左氏傳 昭公 19年》
병기를 …… 지키게 하는 일 : 정나라에 화재가 났을 때 자산은 만일에 대비하여 군대를 동원 진나라와의 접경지대 성가퀴에 올라 수비를 엄하게 하도록 하였다. 자대숙(子大叔)은 그 일로 하여 진과 사이가 나빠질까 봐 난색을 표했으나, 자산은, “작은 나라가 자기 나라를 지킬 줄 모르면 위험하다. 나라가 작다고 무시 못하는 것은 항상 만약에 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하면서 그 일을 결행하였음. 《左氏傳 昭公 18年》
한자(韓子)가 …… 사는 일 : 진(晉)의 한기(韓起)에게 옥고리 한 쌍이 있었는데 그 한 짝이 정나라 상인 수중에 들어갔다. 한기가 정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 한 짝을 자기에게로 돌려주도록 할 것을 정나라에 요구했으나 자산은 그를 들어주지 않았고, 나중에는 그 상인으로부터 사가려고 자산에게 청탁했으나 자산은 조리 있는 답변으로 그를 설득하여 결국 그가 사과를 하고 자진 포기하도록 만들었음. 《左氏傳 昭公 16年》
3년을 울지 않은 : 초 장왕(楚莊王)은 즉위하고 3년 동안을 즐기기만 일삼으면서 감히 간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리라고 하였다. 이에 오거(伍擧)가 말하기를, “언덕에 새가 3년 동안 날아가지도 울지도 않고 있는데 그게 무슨 새이겠습니까?” 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3년을 날지 않았으니 날았다 하면 하늘에 닿을 것이며, 3년을 울지 않았으니 울었다 하면 사람을 놀라게 할 것이다.” 하고 그날로 즐기던 것을 다 치우고 정사에 열중하였다고 함. 《史略 卷1》
몇 해를 못 들었다 :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처음 경시(更始)의 사예 교위(司隷校尉)로 있으면서 그 부하들은 모두 한(漢)의 의관을 갖추고 있었는데, 부녀자 복장 같은 복장을 한 경시의 장졸들을 보고 모두 비웃거나 무서워 도망을 치던 한인들이, 사예의 관속들 복장을 보고는 혹 눈물을 글썽이면서 말하기를, “몇 해를 듣도 보도 못했던 것을 오늘 와서 다시 보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했다는 것임. 《後漢書 光武帝紀》
백호전서 제4권 / 소차(疏箚)
본뜬 상소문[擬上疏] 병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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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생각건대, 근래 천운(天運)이 다시 돌아오고 성상의 치화가 앞으로 일어나려는지 성상께서 좋은 뜻의 말씀을 늘 반포하시고 국가 백년 대계를 위해 이 미천한 신에게까지 의견을 물어 오셨습니다. 초야에 묻힌 어리석은 이 신이 그것을 읽고 나자 감개한 생각이 들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야말로 요순 같은 임금이시라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재이를 당하여 백성 돌볼 것을 생각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하늘을 무서워하겠는가. 비록 초야의 백성이지만 감히 소원하다 하여 어리석은 충정이나마 있는 대로 말씀 올리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성상께서 요순의 덕이 있는 이상, 어리석은 이 신은 임금을 존경하는 도리를 알기에 오직 요순을 들어 말씀 올릴까 합니다. 성상께서 비근한 말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주실 줄 알고 삼가 죽기를 무릅쓰고 할 말 다 하겠습니다.
전(傳)에, 덕을 닦음으로써 하늘에 대응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왕자(王者)가 덕을 닦아야지만 하늘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왕자의 덕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고 군사(君師)를 내세워 맡아 기르게 한 것이므로, 왕자란 하늘을 대신해서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로서 만민에게는 바로 부모가 되는 것이고,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임금이란 그 나라 귀신의 주인이며 백성들의 의지가 되고 만물도 그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책임이 얼마나 크고 무거우며 할 일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만기(萬機)가 다 모여 있는 곳으로 한 가지라도 잘못이 있으면 화패(禍敗)가 금방 뒤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시경(詩經)》에도 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래서 밝고 밝았기에 위에서도 빛나고 있네. 하늘은 믿기 어려운 것이니 왕이 쉬운 게 아니라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고 백성이란 무서운 존재여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옛날 성왕(聖王)들은 그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덕을 올바르게 닦아 천직(天職)을 지켰고, 큰 길을 개척하여 억조창생이 그리로 가게 했던 것입니다. 가령 천하 다스리기를 마치 썩은 끈으로 육마(六馬)를 몰듯 했으며, 백성들 대하기를 마치 인자한 어머니가 갓난아이 돌보듯 했습니다. 농지와 살곳을 마련해주고 조세를 적게 받아 잘살 수 있도록 해주고, 학교를 세우고 교화를 일으켜 인격을 양성했습니다. 하늘처럼 덮어주고 땅처럼 포용했으며, 비와 이슬이 윤택하게 해주듯, 사계절 따라 만물이 변화하듯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시절은 풍성하고 귀신이 복을 내렸으며, 백성들은 순박하고 만물이 다 잘 자랐습니다. 하늘과 사람이 조화를 이루어 모든 아름다움으로 나타나고 사방 오랑캐들도 소식을 듣고 덕이 그리워 모여들었으므로 만세를 두고 경사가 연속되고 자손들이 그 속에서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선왕(先王)들이 천하를 맡아 다스리면서 하늘을 받들어 나갔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따르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그 반대이면 어지러워졌는데, 이는 고금을 통해서도 또 하늘과 사람에 증험해 보아도 속일 수 없는 사실로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통하는 원칙이요 하늘도 사람도 달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공자가 이르기를, “위대하다 요(堯)의 임금됨이여! 제일 위대한 것이 하늘이건만 요만은 하늘을 본받았네. 임금다워라 순(舜)이여! 덕이 높아 천하를 소유하고서도 그것을 전부로 여기지 않았다.” 하였는데, 그것은 요와 순만이 임금으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책임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까. “아. 너 순(舜)아! 하늘의 역수(曆數)가 네 몸에 있으니 꼭 최고의 올바른 길을 택하라. 천하가 곤궁하게 되면 하늘이 네게 주는 복이 영원히 끊기고 말리라.”라고 말입니다. 제왕이면 그 직이 천직(天職)임을 생각하고, 그 자리가 천위(天位)라는 것을 생각하여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하므로 하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제왕의 길은 그것이 언제나 상관 관계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되면 해야 할 도리는 한이 없고 책임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신은 알고 있습니다.
아, 하늘이 왕께 용맹과 슬기를 부여하여 이 동쪽 나라를 잘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기성(箕聖)의 옛 사업을 이어가고 조종(祖宗)의 유업을 더 확장해야 할 그 자리에 있고 그 직을 맡았으니 책임은 얼마나 중하고 걱정은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게으름과 거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며, 안일과 방종도 해서는 안 되며, 새면 막고 해지면 깁는 식으로 그때그때 적당히 메워 나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임금이 되려거든 임금 도리를 다하고, 신하가 되려거든 신하 도리를 다해야 하는데 둘 다 요와 순만 본받으면 된다.” 하였습니다. 아, 전하께서도 그 말에 대하여 일찍이 되새겨본 일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또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어 본 일이 있으십니까? 만약 성상께서 뜻이 없다면야 그뿐이지만 성상께서 임금으로서 임금 도리를 다 해보려고 하신다면 신도 요순 말고는 성상을 위해 올릴 말이 다시 없습니다. 아, 지난번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고, 인간 윤리는 땅에 떨어졌으며, 만민이 도탄에 빠져 있었는데, 그때 하늘이 성상을 사랑하시어 대명(大命)을 받아 만백성의 임금이 되게 하고 난리를 평정하여 올바른 세상으로 만들어놓게 하셨습니다. 무언가 해낼 수 있는 자질로서 큰 난리 끝을 만난 셈인데 그때라면 하늘이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을 내리시는 때이며, 만백성이 머리를 쳐들고 치세가 오기를 갈망하는 때이므로 당연히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큰 덕을 새롭게 닦아 전대의 잘못된 점을 개혁하고 만세 대업의 기반을 다짐으로써 하늘의 뜻에 부응하고 백성들을 따라야 할 때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화란이 거듭 닥치고 국사가 크게 잘못되어 정령(政令)은 비뚤어지고 백성들은 실망에 실망을 거듭했습니다. 큰 난리 끝이었는데도 이상적인 정치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왕의 권위가 떨쳐지지 못해 기강은 날이 갈수록 해이해졌으며, 성상이 이미 해태를 느껴 뿌리가 흔들렸으며, 말길이 꽉 막혀 귀와 눈은 가리워졌으며, 현자ㆍ능자가 기용되지 않아 나라는 비어있는 상태였으며, 변방에 늘 소요가 일어도 막아낼 방법이 없었습니다. 아, 이 얼마나 위태로운 시기였습니까.
하늘은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고 상감(商鑑)이 멀지 않다고 했거니와, 복거(覆車)의 수레자국을 바로 성상이 직접 뒤따라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하여 민생은 이미 곤경에 빠졌고 이어 하늘이 진노하여 이변이 번갈아 나타났으며 위란의 싹이 이미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하늘이 오늘 와서 마음을 돌렸던지 성상의 마음 한 구석에 선단(善端)이 싹트기 시작하여 불이 점점 타오르고 샘물이 점점 솟아오르듯 하다가 급기야 뼈저린 반성과 깊은 상념에 잠겼던 끝에 덕음을 중외에 선포하면서 이르기를, “아, 이는 내 잘못이었다.” 하시고, 서관(庶官) 백직(百職)에서 초야에 이르기까지 널리 자문을 구하여 모두 말들을 하게 하시고, 미천한 속에서도 현량(賢良)을 찾아내어 일을 바로잡고 재앙을 멎게 할 방법을 생각했으며, 국력이 부진한 것을 분히 여겨 외침을 막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힘을 길러야겠다는 생각도 하셨습니다. 아, 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옛 성왕(聖王)들도 그랬듯이 재앙을 상서로 바꾸고 난(亂)을 이용하여 치(治)를 다지는 일대 전기인 것입니다. 굳이 상(商)을 중흥시킨 무정(武丁)이나 주(周)를 중흥시킨 선왕(宣王)을 감탄하고 흠모할 필요없이 우리가 오늘 직접 눈으로 보는 현실인 것이니, 이야말로 이 나라 만세를 두고 한도 끝도 없는 복인 것입니다.
아, 성상께서 참으로 대역량을 발휘하고 백년 대계를 정립하여 정치는 요순(堯舜)처럼, 법제는 삼왕(三王)처럼 그러한 길로 나가도록 모든 신하를 격려하고 또 하늘의 뜻은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여 모두 그쪽으로 가도록 하며, 하늘의 상제가 위에 계신 듯, 종묘사직의 영령들이 곁에 계신 듯한 마음으로 일찍 깨고 새벽에 일어나 성현의 학문에 매진하고, 유능한 인재를 다방면으로 초치하여 나라 다스리는 법을 강마합니다. 분한 일은 반드시 한 번 더 생각하여 참고, 사사로운 생각은 반드시 극복하며, 아무리 비근한 말이라도 반드시 새겨 듣고 선행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꼭 실천합니다. 옛것에만 얽매이지 말고 원대한 계획을 새로 세움으로써 하늘 마음을 돌리고 백성들 마음도 붙잡아 우리 선왕의 찬란한 공을 더욱 빛나게 하고 후세 자손들에게는 많은 복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제 삼왕(二帝三王)같은 성대를 우리 백성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만드신다면 그것이 성상에 있어 최고의 아름다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 총명하고 영무(英武)하신 성상으로서 참으로 크게 분발만 하신다면 옛날 성왕들이 했던 무슨 일을 못 해내겠습니까. 요와 순이 될 수도 있고 이상 정치도 실현이 가능합니다. 찬란한 왕업, 빛나는 상제의 명, 이 모두가 전하 하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늘 고무를 시키면 백성들이 달라지고 늘 진작을 하면 덕업(德業)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굳건한 마음으로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 밀고 나가면서 오늘의 그 뜻이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계속 노력한 끝에 광명이 한 곳으로 모여 백대나 만년 뒤의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중흥의 임금이었다고 한다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
전에 이르기를, “임금 뜻이 굳어지면 천하가 안정이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뜻을 이미 굳히고 그리고 목적도 확립이 되었다면 이제부터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 계획을 짜고 법도 만들고 기율도 세우고 하여 말세의 고식적 타성은 털어버리고 오직 옛날 훌륭했던 정치제도만을 재연하면서 선왕의 도를 차근차근 행해 나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국토 전체가 소망대로 잘 다스려져 앞으로 만대의 뚜렷한 표본이 될 것이며, 뒤에 혹시 불초한 자손이 나온다 해도 모두 그 유업을 힘입어 편안하게 지낼 것입니다. 따라서 전장에서 말했던, 천하를 맡아 다스리면서 하늘 마음에 대응하는 요순의 정치, 제왕의 도라고 하는 것이 이 방법 외에 달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밖의 정치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옛분들도 관심을 안 가졌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강조했던 것이 입지(立志)였습니다. ‘양기(陽氣)가 한번 발산하면 금석(金石)도 뚫을 수 있고, 정신을 외곬으로 쓰면 무슨 일인들 못 해내겠는가.’ 하는 말도 있거니와, 신도 그래서 성상의 뜻을 굳히는 것뿐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질서정연한 큰 법은 성인이 정한 것이다.” 했습니다. 초야의 이 신은 다른 지식은 없고 오직 성상의 뜻을 굳히시는 데 도움이 될까 하여 감히 소회를 개진한 것뿐입니다.
또 하나 신이 죽 보건대, 천년 이래 제왕이 일어났을 때는 반드시 충직하고 진실하고 총명하고 준걸한 신하가 나와 좌우에서 보필을 해야지만 빛나는 업적을 남길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요와 순 같은 성군, 탕(湯)과 무왕(武王) 같은 현군들도 반드시 고요(皐陶)가 모훈을 아뢰고, 기자(箕子)ㆍ중훼(仲虺)가 모훈을 씀으로써 당우(唐虞)ㆍ삼대(三代)의 치적을 남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창업주가 아닌, 왕위를 이어받은 임금이라 하더라도 중흥의 업적을 남기려고 하면 현철(賢哲)의 보좌가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가령 은나라 고종(高宗)은 부열(傅說)을, 주나라 선왕(宣王)은 신백(申伯)ㆍ중산보(仲山甫)를 등용했기 때문에 왕업이 흥성하여 좋은 치적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찬양하는 시에도 이르기를, “주 나라 덕이 하민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을 하늘이 보시고는 그 천자를 돕기 위해 중산보를 내셨다네.” 하였는데, 이 시는, 하늘이 현명한 임금을 내시면 또 반드시 현명한 신하를 내어 보좌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또, “하늘이 단비를 내리시려면 산천에서 구름이 이느니라. 성군이 나라를 잘 다스리려고 하면 능력 있는 신하들이 일을 거드느니라.” 한 말도 있는데, 그렇다면 지금 전하께서는 중흥의 공을 세우기 위한 선무(宣武)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상을 보좌할 만한 부열ㆍ신백ㆍ중산보ㆍ윤길보(尹吉甫)ㆍ소호(召虎) 같은 무리들이 전하 밑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신이 독서를 하다가 송 신종(宋神宗)이 임금은 됐는데 신하다운 신하가 없어 뜻을 두고도 그 뜻을 이루지 못했던 대목을 읽고는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었습니다.
성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정사를 잘하려면 인재 발굴을 해야 하고, 좋은 치적을 남기려면 현자부터 찾아야 한다.” 하셨습니다. 아, 참 성왕이 먼저 해야 할 일을 서두르신 말씀으로,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성세의 치적이 나타날 모양입니다. 신이 추가해서 성상의 뜻을 한번 대변해 보겠습니다. 인재 발굴이라면 그도 방법이 있는데, 우선 예학(禮學)을 숭상하면서 인재를 육성해야 하고, 벼슬길을 맑게 하여 조정을 바로잡아야 하고, 예우하는 풍토를 조성하여 인물을 모아야 하고, 마음을 활짝 열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왜 예학을 숭상하면서 인재 육성을 해야 하는가 하면 저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각기 마음이라는 것을 주어 사람마다 항성(恒性)이 있으므로 옛날부터 군사(君師)가 되면 백성들이 그 항성대로 살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를 숭상하고 그것으로 만민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易)》에서도 이르기를, “천둥이 천하를 울려 만물이 모두 망령됨이 없나니 선왕이 그를 본받아 계절에 맞추어 만물을 육성하나니라.” 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왕자(王者)가 백성을 진작시키고 덕을 쌓게 하여 하늘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주(周)나라가 한창 융성할 때는 위로 조정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지방에 이르기까지 배우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모든 일에 예를 다 갖추었으며, 원자를 위해 준걸한 인재를 골라 지도하게 하고, 선왕의 예악을 따라 그리로 가게 했습니다. 행실을 돈독히 하고 덕을 흥기시켰기 때문에 도(道)와 교화가 행해지고 훌륭한 인재가 다 모여 조정 분위기가 질서 정연하고 아름다웠으며 학교마다 많은 선비가 모여 보기에 장엄했습니다. 때문에 시인이 그를 찬미하여 이르기를, “무성한 쑥이여! 저 언덕에 있구나. 군자를 보고 나니 즐겁고 예의 바르네.” 하였는데, 이는 왕자가 그 정도까지 인재 육성을 많이 하여 천하의 표본이 되게 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후세에 와서는 예학이 어두워지고 교육제도도 폐기되었기 때문에 고을에 좋은 풍속이 없어지고 세상에는 인재가 동이 났습니다. 그 때문에 좋은 세상은 적고 어지러운 세상만 많게 되어 비록 뜻이 있고 한번 잘 다스려보려는 임금이 위에 있더라도 이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 앞으로는 이 세상에 사람이 없다는 한탄이 나오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과거제도로 사람을 뽑고, 익힌다는 것이 사장(詞章)이어서 인재 교육이라고 해보아야 기껏 조충전각(雕蟲篆刻)을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때까지 거기에 매달려 있으며, 늘 하는 일이라곤 소리와 운(韻)을 고르는 것이니, 그들에게 천공(天工)을 맡기고 경제(經濟)를 맡겼을 때 인재가 어디에서 나올 것이며 국가 사업이 어긋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사장을 익히고 과거제도로 사람 고르는 일은 진(陳)ㆍ수(隋)와 같은 말세에 나온 제도인데 역대로 그 제도를 반복하면서 오늘까지 왔으니 그것은 바로 유토자(有土者)의 책임인 것입니다.
천지가 다시 시작되는 날이 바로 오늘이요 하늘이 하민에게 주신 마음들은 예나 지금이나 일반입니다. 그런데 그간 몇천 년 동안에 얼마나 많은 총명한 인재와 특이한 자질들이 올바른 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그냥 세속에 빠져 하류(下流)와 우천(愚賤)으로 끝나고 말았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 그것이 무슨 덕을 쌓게 하고 백성을 진작시키는 길이겠습니까.
예를 숭상하고 천륜을 밝힌 것이 삼대(三代)의 좋은 교육제도입니다. 덕을 귀히 여기고 기예를 천히 여기는 것은 군자가 칭도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 성상께서 참으로 온 세상이 함께 가야 할 큰 길을 찾아 백성들을 그 방향으로 가르치고, 사장을 없애고 예학을 밝히며 학교 제도를 재정비하고 주나라 법도를 다시 상고하여 그것으로 우리 백성들을 지도하고 영재를 길러내서 그들이 임금을 보좌하고 잘못이 있으면 바로잡으며 또 그들을 성취시키고 진작시켜 후일 왕정(王庭)에 나와 이름을 날릴 자들 모두가 국가 대업을 요리하고 세도(世道)를 만회하게 하여 옛날 하(夏)ㆍ은(殷)ㆍ주(周)만이 훌륭한 나라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하게 만든다면 성상의 치적은 성공을 한 것이 됩니다. 《시경》에 이르기를, “아름다운 많은 선비들이 이 왕국에 났다네. 그 많은 선비들 덕에 문왕은 편안하겠네.” 하였는데, 인재를 길러내어 나라가 영원히 그들의 힘을 입게 하는 것, 성인들이 말하는 길상(吉祥)한 좋은 일치고 그보다 더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은 영원히 행복을 누리고 백성들은 영원히 태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상께서는 그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벼슬길을 맑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하는 것도 방법이 있습니다. 선왕들이 세상을 다스려 나가면서는 대체로 예를 강조하고 염치를 숭상했으며, 덕을 높이고 선비를 존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하를 위해 뜻을 굽히고 몸을 낮추어 현자를 예우하는 것은 임금의 도리이고, 예에 맞아야 나가고 초빙을 해야 가는 것은 군자의 지조인 것입니다. 옛분들은 나아갈 때 반드시 예를 앞세웠고, 물러설 때도 반드시 의리를 앞세웠습니다. 선비로서 자진해 나가는 것을 군자는 수치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임금이 현자를 찾고 선비를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군자는 그 조정에 있지 않았었고, 선비로서 덕을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지 않으면 현명한 임금은 그러한 자를 신하로 삼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는 현량(賢良)으로 인재 선발을 했고 위(魏)ㆍ진(晉) 시대는 중정(中正)으로 골라서 썼었는데 그때만 해도 인재를 덕으로 취하고 예로 맞았던 것입니다.
아, 세상이 갈수록 질이 떨어져 그 훌륭했던 선왕의 도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껏 인재 고르기를 과책(科策)으로 하고 제도 역시 형식적인 문장을 위주로 하여 예빙(禮聘)의 길은 없어지고 눈속임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선왕의 큰 법도는 무시해버리고 쓸모없는 작은 기예만 숭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화려한 문장만 꾸며대고 실속없는 말만 과장하면서 그 방법으로 자신을 임금에게 팔고 담당관에게 값을 인정받으려고 하니 그야말로 군자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첩부(妾婦)나 하는 일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고인들이 만약 이 시대에 산다면 그런 일을 할지 안 할지 모를 일입니다. 자기를 팔고 자신을 소개하는 일은 사녀(士女)의 추행인 것이고, 시대에 영합하여 출세를 바라는 일은 도의적으로 천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때문에 호협하고 유능한 선비들은 설 땅을 잃게 되고 다짜고짜로 대드는 무리들이 제때라고 날뛰어 제 몸 제가 파는 것이 하나의 풍속을 이루고 염치라곤 씻은 듯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선왕의 도는 이미 없어지고 벼슬길은 흐리기만 하여 천하가 난리 속에 오늘까지 온 것입니다. 아, 그것을 그렇게 하지 않을 방법은 없는 것입니까?
옛날 선왕들은 인재 등용에 있어 방법이 있었습니다. 즉 대사도(大司徒)가 지방에서 세 가지로 만민을 가르치고 유능한 자는 손님으로 예우하여 천거하였는데, 그 세 가지 중 첫째가 육덕(六德)이요, 두 번째가 육행(六行)이며, 세 번째가 육예(六藝)였던 것입니다. 향대부(鄕大夫)가 그것을 받아 가지고 가서 자기 고을에서 고을 백성들을 가르쳐 그의 재주와 덕이 성취되면 거기에서 우열을 가린 후 예로 맞이하여 향음주례(鄕飮酒禮)를 베풀고 녹명(鹿鳴)의 시를 노래하면서 사도(司徒)에게 추천합니다. 그 중에서 우수한 자를 대학(大學)으로 올리고, 대학에서 우수한 자는 대사성(大司成)이 그의 도학 예능을 살펴보고 그의 덕행을 기록하여 천자(天子)에게 올립니다. 천자는 그를 받아들여 천부(天府)에다 두고 해마다 그 중에서 현자ㆍ능자를 골라 조정 논의에 붙였다가 조정 논의가 확정되면 그때 가서야 그에게 관직을 맡겼던 것입니다. 그것은 천공(天工)에 신중을 기하고 도덕자를 간발하고 교화를 도타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작위도 그의 덕에 맞게 수여되고,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한 관직자도 없어 조정은 맑고 깨끗했으며 유능한 인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훌륭한 삼대의 시절을 그토록 들먹이는 까닭은 현자를 존경하고 덕 있는 자를 올려세워 덕이 그만큼 넘쳐 흘렀고, 천하에 교화가 이루어져 치화가 최고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와서 어쩌다가 형식만 추구하고 다짜고짜 대드는 풍습이 생겨 오늘에 와서는 그것이 도(道)가 되고 덕(德)이 되고 그것만을 고상히 여겨, 부자 사이에도 그렇게 가르치고 친구 사이에도 서로 그렇게 권면하는 바람에 나이 어린 시절부터 그저 나가기로만 작정하고 그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영화로 여깁니다. 그리하여 선비가 옛것을 챙기면 오활하고 졸렬하다고 지목하고 덕으로 하여 자리에 오른 자를 도리어 적격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선비들 기풍이 부진하고 절의라고는 거의 무너졌으며 학술이 멸시되고 행검이 말이 아니어서 사람의 심술(心術)을 못쓰게 만들고 큰 사업에 방해를 주는 것이 그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아, 그렇고서야 벼슬길이 깨끗하지 못하고 인재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풍속이 나빠지고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 어느 때나 끝이 나려는지.
중국으로 말하면 거기에도 역시 과거로 인재 취하는 법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취하는 방법이 주(州)나 현(縣)에서 천거하여 서울로 올리면 서울에서는 그를 받아 학궁(學宮)에 가 있게 했다가 책명을 내리므로 그 제도는 그래도 옛 제도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인재 취하는 방법에 있어 승천(陞薦) 제도는 아예 없고 자기 스스로 나가야 하는 길만 열려 있기 때문에 염치를 배양하고 요행수로 나가는 길을 막는 데 있어 벌써 큰 모순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명을 할 때도 대예(臺隷)나 졸오(卒伍)와 같은 급으로 취급을 하고 가시울타리 안에다 넣어두기도 하고, 뜰 아래로 모이게도 하며, 회초리나 형구로 겁을 주기도 하고, 징과 북 그리고 군대를 풀어 위압을 주기도 하여 사람치고는 견디지 못할 온갖 치욕과 구박을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선비라는 자들이 사문(史門)에다 이름을 걸고 강석(講席)을 쫓아다니며 책을 지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경쟁에 겨를이 없는데 그 마당에서 염치라는 것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붓을 들고 고인의 인품을 논한답시고 위로 유광(由光)을 말하고, 아래로 공안(孔顔)을 들먹이며, 왕도의 옳지 못한 점을 논하고, 제값을 기다리는 양옥(良玉)인 양하면서 그것을 고관(考官)에게 바쳐 되도록 그의 마음에 들게 꾸미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것이 통과되면 다행으로 여기고 실패하면 슬퍼하는데, 이욕(利欲)의 유혹이라는 것이 그런 것이며, 습속이 그렇게까지 사람을 바꿔놓는 것인지. 아, 그야 물론 선비들 잘못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어디 국가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이겠습니까. 더러는 사실 마음 내키지 않는 것을 오직 임금과 백성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와 국가 경제를 맡은 자가 있기는 해도 그게 어디 그 사람이 하고 싶어 한 일이겠습니까.
아, 지금 과거장에 나온 선비들이 바로 후일 묘당(廟堂)에 앉아서 전하와 국사를 논하고 정치를 요리할 자들이므로 그들을 미리 가다듬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왕들은 지극히 경건한 마음으로 선비를 예우했고 선비는 선비대로 지극히 신중하게 자신을 지켰던 것입니다. 선비가 임금 앞에 나가는 일이 마치 처녀가 시집가는 일 같아서, 예를 무시하고 음분(淫奔)한 아낙이면 점잖은 선비가 그를 배필로 맞기 부끄러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현명한 임금이 위에 있으면서 부정한 방법으로 사람을 취하여 그와 함께 나라 일을 다스려서야 될 일입니까. 그런데 몇천 년을 그렇게 하다 보니 그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어버려 모두 보통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자를 초빙하는 길은 이미 막혀버렸고 사람에게 벼슬 주는 길이 그 길밖에 없기 때문에 벼슬 하나 못 얻었을 때는 조정에서도 폐인으로 대하고 고을에서도 천대를 받다가 급기야 얻고 나면 그때는 영신책(榮身策)이 이루어진 셈이고 진취의 길이 열린 폭이어서 이른바 유가(遊街)를 하고 면신례(免新禮)를 행하게 됩니다. 그 모두가 사실은 그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로서 갓을 찢고 매질을 하고 못하는 짓이 없이 별별 치욕적인 일을 다합니다. 그것이 성상의 덕화에 누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말을 하자면 너무 깁니다.
아, 절의(節義)란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한계선인 것이고, 사대부라면 그는 국가의 정간(楨幹)인 것입니다. 위에서 지도를 그렇게 하는데 아래서 그를 따르자니 그럴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조정이 올발라야지만 정치가 잘되는 것이고, 벼슬길이 맑아야지만 관직이 설만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말하고 싶은 것은 조정이 올바르게 되자면 우선 벼슬길이 맑아야 하고, 벼슬길을 맑게 하려면 과거제도부터 없애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분명히 백관들에게 각자 현자ㆍ능자를 천거하도록 명하셨으니, 그것은 매우 훌륭한 일이요 높으신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과거제도를 없애지 않으면 비록 현자ㆍ능자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 세상에 쓰이지 않아 절의를 숭상할 수도 없고, 염치도 배양할 수가 없고, 덕행도 장려할 수가 없고, 부정의 길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끝까지 과거로 사람을 취한다면 아래서도 모두 과거 쪽으로 쏠리게 되어 결국에는 전일에 했던 것을 다시 되풀이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지금 성상께서 기왕 대명(大命)을 선포하셨으니 한 번 더 생각하셔서 과거제도를 개혁하고 인재 취하는 법을 바르게 정하십시오. 주나라 때의 빈흥(賓興)의 제도를 되살려 절의라는 큰 틀로 세상을 격려하고 천고를 얽매어 온 굴레를 벗어버리십시오. 그리하여 그것을 두고두고 백왕들이 준수할 법으로 정하여 이 세상 모두가 그 큰 길로 나가게 되기를 이 신 크게 원해마지 않는 바입니다. 그러나 선비들이 평소 단련이 되어 있지 않고 돌 속에 든 옥도 캐내야 하듯이 이는 반드시 그쪽으로 인도하고 양성하는 교화의 본원을 다져놓아야만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신의 생각에는 전장에서 거론했던 주나라 때 학교제도에 유의하여 고을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학(學)을 두어 학문과 도덕이 있는 자를 골라 스승을 정하고 사대부의 아들들 또는 시골의 준수한 자들을 선발해서 날마다 수업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성현의 글을 가르치고 충신과 행검으로 지도하면서 날과 달로 끊임없이 연마가 되게 하고, 그 중에서 덕행이 순수한 자가 있으면 선발해서 예부(禮部)를 거쳐 대학(大學)에 오르게 합니다. 그리하여 대사성(大司成)이 그를 훈도하고 아침저녁으로 강마하여 성취가 되도록 하며 더러는 주상께서 직접 학궁을 시찰하시면서 격려도 하고 시험도 해보고 혹 친히 자문도 하시고 혹은 책문(策問)을 내기도 하여 조종조에서 현량과(賢良科)를 두었던 때처럼 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특수한 자는 기용을 하고 따르지 못한 자는 격려를 가하고 그래도 고치지 않는 자는 내쫓아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학문이 성취된 자는 대사성이 그의 이름을 천부(天府)에 올려 조정 공론이 모아지면 그에게 관작(官爵)을 주되 그의 재능을 감안하여 계급에 관계없이 등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을 가다듬고 많은 선비들이 배출되어 조정이 깨끗해지고 사방에 바람이 일 것입니다. 염치가 강조되고 도덕이 높은 대우를 받을 것이며 교화가 도타워지고 예악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반드시 과거제도 폐지라고 신은 주장합니다.
앞으로 과거 날짜가 다가오고 있는데 신은 성상께서 민활한 정치를 한번 펴주시기를 바랍니다. 제왕의 경륜으로 한번 바람을 일으켜 빛나는 업적이 후세에 빛을 내게 하자면 옛 것에 끌리고 지금 것에 얽매여 시간을 계속 끄는 구차한 방법으로는 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치적을 남기자면 인재를 얻는 것이 제일의 방법이고, 정사를 하는 데 있어서는 폐단을 없애는 것이 급선무인 것입니다. 성상께서 참으로 선왕의 도를 다시 실현시키실 뜻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것부터 뜯어 고쳐야 합니다. 그것을 금슬(琴瑟)에다 비유하자면 제일 안 맞는 줄이기 때문입니다. 신이 주장하는, 벼슬길을 맑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예로 대우하는 기풍을 일으켜 준수한 인재가 모여들게 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보고 듣는 문호를 넓혀야 한다고 했던 것도 신이 차근차근 다 말씀 올리겠습니다. 옛날 왕자(王者)들은, 천하는 혼자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고 일만 가지 일을 혼자 처리할 수는 없는 것임을 생각해서, 이는 반드시 천하의 선비들과 함께 해나가야 한다고 하고 그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찾았으며 정성과 공경을 다해 예우하고 신분에 관계없이 적격자이면 다 기용하고 진심으로 믿고 맡겨버렸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당(唐)ㆍ우(虞)ㆍ삼대(三代) 시대에는 유능한 인재들이 다 모여들어 천하가 잘 다스려졌던 것입니다. 활기차고 명철한 신하와 묵직하고 정중한 임금이 한 조정 안에 어우러져 정신을 한데 모으고 엄숙하면서도 화기애애하게 서로 꾸려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도 이르기를, “봉황이 우네, 저 높은 산등성이에서! 오동이 났네, 저 산 양지쪽에! 오동은 무성하기만 하고 봉황 소리 화락하기도 해라.” 했지만 이를 일러 도덕을 최고로 하는 정치요 명철한 임금, 충량한 신하가 모인 곳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덕이 깊은 산속에까지 미쳐갔을 때 기린과 봉황이 교외에 와 놀고, 예가 바위구멍에 숨어 있는 자에게까지 미쳐갔을 때 군자가 그 조정에 왔던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선왕은 천하의 선비들을 예우하면서 자신을 낮춤으로써 충분한 경의를 표하고 예물을 후히 내려 정성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선비들은 그래도 얼른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공(周公)은 입에 든 밥까지 뱉아가면서 선비들을 대하였고, 고종(高宗)은 꿈에 선몽을 하도록 현자를 찾았으며, 이윤(伊尹)은 탕(湯)의 삼빙(三聘)이 있은 후에 나아갔고, 제갈 무후는 소열(昭烈)의 삼고(三顧)를 받고서야 나갔던 것입니다. 선왕들이 애써 선비를 맞으려 했던 것이나 선비가 자기 자신 지키는 것이 모두 그러했기 때문에 옛날 임금들은 대체로 그 일에 급급했던 것입니다.
천하는 그만큼 크고 일들은 그만큼 많아 아무리 총명하고 신성하고 슬기로운 성인이라도 혼자 힘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 있기 때문에 비록 요와 순 같은 성군으로서도 자기 자신의 있는 역량을 다하여 천하 일을 살피고 그러면서도 많은 인재를 선출하고 의견을 널리 물어 함께 다스려 나갔던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했기에 좋은 말치고 채택되지 않은 말이 없고 현자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번 성상 하교에도, 문무 백관들은 각자 현자ㆍ능자를 천거하여 빠져 있는 인재가 없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아, 그야말로 옛 성왕의 도이십니다. 그러나 인재를 찾는 방법에 있어 선왕들이 쓰던 방법을 쓰지 않으면 현자ㆍ능자를 꼭 얻는다는 보장도 없고 훌륭한 일을 완전하게 해내지도 못하지 않을까 신으로서는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상께서 참으로 현자 초빙의 방법을 지금 꼭 실현하려고 하신다면 이 어리석은 신의 생각으로는 우선 선거(選擧)제도를 엄정하게 하고,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제도도 부활시킬 것이며, 예물을 보내 손님으로 대우하고 관직을 맡겨 시험도 해보아 그들과 함께 천하를 다스리고 모든 업무를 처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관광(觀光)의 법과 대사(待士)의 예를 재정비하여 사방 인재들이 모두 왕의 나라로 모여들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성상께서 성심으로 대하고 마음을 비우는 일입니다. 바른말 듣기를 좋아하고 충의(忠義)의 길을 넓힐 것이며, 조서를 자주 내려 백년 대계에 대해 많은 의견을 물어야 합니다. 비록 현실과 동떨어진 대책일지라도 그 한 가지 일이 맞지 않다 하여 물리쳐서는 안 되며, 비록 금기사항에 저촉되는 말일지라도 그 말 한 마디가 마음에 거슬린다 하여 물리쳐서도 안 됩니다. 여유 있게 포용해주고, 너그럽게 대해주고, 자꾸 말을 하게 만들고, 의사 전달을 하도록 길을 터주고, 좋은 말을 들으면 그대로 고치고, 정의로운 말을 하면 그대로 따르고 하여 위 아래가 뜻과 감정이 서로 통하여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는 풍토가 조성되고 정책을 내놓으면 그대로 거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나라 안 선비들이 모두 불만을 토로하고 속에 있는 말을 다 하게 되어 충직한 말과 좋은 제안이 날로 들려올 것이며 만사가 조리 정연하여 나라의 겉과 속을 한눈에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만 된다면 전장에서 말했던 당ㆍ우ㆍ삼대의 시대를 오늘에 다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말한, 유능한 인재를 한데 모아 이목을 넓혀야 한다고 한 것도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그 점 깊이 유의하셔서 단안을 내리고 실천으로 옮기신다면 그는 사실 이 나라 만세를 두고 다행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 모든 것이 다 전대에도 미처 못했던 일들이고 시속에서도 듣지도 못한 일들입니다. 신이 생각하기에는 제왕이 일단 만백성 위에 군림하여 왕의 권한을 장악하였으면 당연히 건강(乾剛)한 덕을 떨치고 백성들에게 표준을 세워 국가 경륜 사업이 만약 옛것에 비교하여 잘못됨이 없고 의리로 보아 틀림없는 일이면 비록 그 말 그 정책이 초야의 미천한 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도 성상께서 뜻을 확고히 굳히시고 단안을 내려 그대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하건 구애받을 것 없고 일상적 사소한 문제에도 구애받을 것 없이 그 일이 성사되도록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이 바로 제왕이 치적을 세우는 방법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던 대로 따르기를 좋아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을 꺼려하여 한다는 말이, 역대 오래된 법을 갑자기 고쳐서는 안 된다고 하고, 조종의 옛 제도를 까닭없이 개혁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아, 그래서 세상 일이 되는 것이 없고 뜻있는 선비들이 천고를 두고 계속 한탄해 왔던 것입니다. 왜 《주역》에도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오래 되면 궁해지고, 궁해지면 변한다고 말입니다. 제왕이 그 변한 것을 잘 변통하여 백성들이 권태를 느끼지 않게 해주기 때문에, 하늘이 도와 모두가 다 잘된다고 한 것입니다.
제왕이 일어나면 꼭 변통해야 할 것은 반드시 고쳤고, 조종들도 다시 경영해야 할 것이면 반드시 했던 것입니다. 만약 옛것만 지키면서 변통할 줄을 모르거나 폐단을 그대로 두고 개혁할 줄을 모르면 아무리 왼편에 순(舜)ㆍ우(禹)가 있고 바른편에 고요(皐陶)가 있어도 나라에 도움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조종의 뜻이며 무슨 제왕의 도리이겠습니까. 크게 무언가 해낼 임금이면 반드시 큰 경장(更張)이 있는 법이고, 만세의 공을 세울 자는 반드시 일대의 의심스러운 일을 털어버리는 법입니다. 이 어리석은 신이 성상께 간절히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성상께서 치적을 남기시는 데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리석은 자의 일득(一得)을 성인도 취택하는 것입니다.
아, 용은 구름과 비를 얻어야 조화를 일으키고, 성군은 어진 신하를 얻어야 훌륭한 치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전(傳)에도 이르기를, “임금이 어진 신하가 없으면 마치 길잡이 없는 장님과도 같아서 길 복판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 하였는데, 이 말이 지극한 경계의 뜻이 있는 말입니다. 옛날 고종(高宗)이 침묵을 지키며 나라 다스리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자 하늘이 그에게 훌륭한 보필자를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그 성의가 신명을 감동시키고 뜻이 하늘과 통하여 그리 된 것입니다. 성상께서도 고종 같은 뜻만 있다면 하늘이 인재를 배출하여 한 시대의 사업을 마무리짓게 하실 것입니다. 왜 부열(傅說)과 신백(申伯)ㆍ윤길보(尹吉甫)가 상(商)ㆍ주(周)의 시대에만 있겠습니까. 지금 성상의 조정에도 이윤(伊尹)ㆍ주공(周公) 같이 국가의 모든 것을 위임하더라도 의심할 것도 없고 충분히 해낼 만한 인물이 있습니다. 성상께서는 그를 뉘라고 생각하십니까? 옛 기록에 이르기를, “철인(哲人)을 널리 구하여 그로 하여금 후사(后嗣)를 돕게 하였다.” 했는데, 옛 선왕이 길이길이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깊은 산, 큰 늪을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못 가는 것은 그 속에 용과 뱀 그리고 맹수들이 살고 있으면서 수시로 영괴(靈怪)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 현자가 많으면 그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왕의 권위는 그 때문에 더 신장되고, 외적들도 그 때문에 넘보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그 점 유념하소서.
현재 북녘 오랑캐가 저들 멋대로 놀아나 국경지대가 날로 시끄럽고, 쌓인 폐단이 제거되지 않아 백성들 힘은 바닥이 나 있으며, 군대는 기율이 없어 사졸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고, 국가 정책은 갈피를 못 잡아 백성들 마음이 이리저리 갈리고 있는 등 이러한 위급한 상황을 지적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런데 신이 감히 오늘 해야 할 일로, 임금의 의지가 확고해야 하고 다음으로 인재 발굴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 말 그 계책이 현실과는 동떨어져 지금 세상에 적용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라는 게 별거 아닌 것 같으면서 사실은 절실한 것이 있고, 근본만 잘 다스려지면 끝은 저절로 되는 것도 있는 것입니다. 우선 성상의 뜻이 확고하고 그리고 현자ㆍ재자(才者)만 포열이 된다면 모든 위급한 상황이 다 풀릴 수 있어, 이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틀림없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전(傳)에 있는, 어려움이 많을 때 나라가 일어나고, 큰 걱정거리가 성군을 만든다고 하는 말을 이 신 감히 전하를 위해 다시 한번 외우는 바입니다. 전하께서 오늘의 뜻만 변치 않으신다면 용 가는 데 구름이 가고 범 가는 데 바람이 가듯 필연적으로 성인이 나타나고 만물이 다 우러러볼 것입니다. 성상께서는 그 점 유념하소서. 신은 초야에 묻힌 몸으로 성상의 물으심이 초야에까지 미쳐왔기에 감히 올라와 이렇게 분별없고 의혹되는 말을 올리는 바입니다.
이상은 구언(求言) 때 써본 초고이다. 처음에는 국가적 폐단과 백성들에게 해가 되는 점 한두 가지만 지적하여 구폐책(救弊策)으로 삼을까 했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큰 뿌리가 흔들리고 있고 급선무를 손대지 않고 있는 판에 그 정도로 치(治)를 말한다는 것은 모두 구차한 짓이다 싶어 이 소문을 다시 썼던 것이다. 이어 또 생각해보니, 뿌리를 고정시키고 근원을 맑히는 일이 치를 위해서는 물론 급선무이겠으나 그러나 현재 북녘 오랑캐가 날개를 벌리고 있는데 국가적 대책은 서 있지 않아 그야말로 깊이 생각하고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위급존망지추이기에 이 소문 끝에다, 화의냐 전쟁이냐를 결정하고 수어(守禦)에 대비해야 할 점들을 대략 더 써서 붙여둘까 했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그 원고는 없어지고 내용도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그 대의만은 이런 것이었다. 즉 정묘년(1627, 인조5) 강화(講和) 이후로 국가 기강은 부진하고,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안일에 젖어들었으며, 묘당에서는 일시적 미봉책만 쓰고, 수어에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더구나 저들의 한량없는 욕구는 채울 수가 없었고 날이 갈수록 공갈만 더해가고 있는데 이렇게 부진하다가는 나라가 금방 멸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강화도를 보장(保障) 지대로 생각하고 전 국토의 방어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 가령 오랑캐들이 승승장구 쳐들어와 팔도를 짓밟았을 때 성상은 비록 강화도를 지키며 그대로 있다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가지고 갈 곳이 어디란 말인가. 그리하여 이 어리석은 신의 주장은, 의리를 앞세워 강화를 깨고 뜻을 굳혀 전쟁과 수비에 임할 것이며, 강화도 수어를 단념하고 서로(西路)의 요충지대를 찾아야 한다. 성상은 서둘러 주가(駐駕)를 옮기고 또 근처 성지(城池)가 튼튼한 곳을 골라 장상(將相)이 나누어 그곳에 있으면서 군대를 조련하고 군비를 정돈하여 굳게 지킬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오랑캐들이 쳐들어오면 그들을 맞아 싸우지 말고 철벽 속에 들어앉아 있으면 저들이 장차 제풀에 지쳐 물러갈 것이니 우리로서는 그 동안 예기를 축적해두었다가 그들이 지쳐 돌아갈 때 그들을 꽁무니에서 협공하고 그리고 바싹 추격을 하면 틀림없이 승리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의 거마목(拒馬木)ㆍ질려(蒺藜)ㆍ조총(鳥銃) 등은 오랑캐 방어에 있어 좋은 도구이므로 미리 비축해두었다가 유사시 이용하자는 등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써놓고서도 결국 올리진 않았었는데, 우연히 묵은 책을 뒤지다가 발견하고는 감회가 없지 않아 후일에 다시 보기 위하여 이렇게 적어두기로 한 것이다.
중훼(仲虺) : 탕(湯)의 신하. 《서경(書經)》에 중훼지고(仲虺之誥)가 있음.
주 나라 …… 내셨다네 : 《시경(詩經)》 대아(大雅) 증민편(烝民篇)에 있는 시구. 현자ㆍ능자를 등용하여 주나라 중흥의 업적을 이룩한 선왕(宣王)을 찬양하기 위하여 윤길보(尹吉甫)가 노래한 것임.[
윤길보(尹吉甫) : 선왕(宣王)의 명을 받고 북으로 오랑캐를 쳐 멀리 내쫓고 중흥의 업을 이루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음. 《史記 卷4》
소호(召虎) : 소공(召公)의 후손으로 역시 선왕을 도와 회이(淮夷)를 정벌하고 주실(周室) 중흥에 한몫을 하였음. 《詩經 大雅 江漢》
현량(賢良) : 한(漢)나라 때의 선거(選擧) 과목의 하나. 한나라 때는 효렴(孝廉)과 현량방정(賢良方正)의 두 과목을 두고 그에 해당한 자를 지방 추천에 의해 선발하여 기용하였음. 《漢書 文帝紀》
중정(中正) : 위 문제(魏文帝) 때 제정하여 남북조(南北朝) 시대까지 통용되었던 인재 선발제도. 군읍(郡邑)에는 소중정(小中正), 주(州)에는 대중정(大中正)을 두고 아홉 종류로 인물 평가를 하여 소중정에서 대중정으로 올리면 대중정에서는 이를 다시 검사한 후 사도(司徒)로 올린다. 사도는 또 이를 재심사해서 합격자를 상서(尙書)에 회부하여 선용하게 하였음. 《魏志 陳群傳》
육덕(六德) : 지ㆍ인ㆍ성ㆍ의ㆍ충ㆍ화(智仁聖義忠和).
육행(六行) : 효ㆍ우ㆍ목ㆍ인ㆍ임ㆍ휼(孝友睦婣任恤).
육예(六藝) : 예ㆍ악ㆍ사ㆍ어ㆍ서ㆍ수(禮樂射御書數). 《周禮 地官 大司徒》
녹명(鹿鳴)의 시 : 임금이 신하들과 연회할 때 또는 향음주례(鄕飮酒禮) 등에서 노래하던 시가. 《詩經 小雅 鹿鳴》
유광(由光) : 요(堯)가 천하를 양도하자 받지 않고 기산(箕山)에 가 숨었다는 허유(許由)와, 탕(湯)이 걸(桀)을 정벌한 후 천하를 그에게 양도하자 받지 않고 요수(蓼水)에 들어가 숨었다고 하는 무광(務光)
유가(遊街) : 과거의 급제자가 광대를 앞세우고 풍악을 잡히면서 거리를 돌고 좌주(座主)와 친척들을 찾아보는 일
면신례(免新禮) : 새로 출사(出仕)하는 관원이 선배 관원들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예.
백호전서 제7권 / 소차(疏箚)
소회를 아뢴 소[陳所懷疏]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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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은 매번 연석(筵席)에서 번독스럽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소회가 있으면 즉시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전하를 가까이 대하자 몸이 떨리어 마침내 소회를 다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와 생각건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감히 빠뜨린 것을 수습하여 다시 전하께 번독스럽게 아뢰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재량하시어 살피소서.
이번에 무과(武科)의 회시(會試)를 거행하는데 서북 양도(西北兩道)는, 조정에서 변방의 먼 곳에서 기일 안에 오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미 변통하여 도별로 나누어 설행하게 하였는데 매우 사리에 맞는 처사였습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에는 그밖의 다른 도도 변통시켜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 이유는 도성 및 경기ㆍ영동(嶺東)ㆍ해서(海西)ㆍ삼남(三南)의 초시(初試)에 합격한 거자(擧子)의 수가 대략 4, 5만 명이 될 것이고 그들이 데리고 오는 마부(馬夫)를 합치면 10여만 명이 넘을 것입니다. 4, 5만 명의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기예를 시취(試取)하는 데 있어 달포가 넘어야 끝날 것이고 10만 명의 몇 달간의 양식은 대략 10여만 섬이 소요될 것인데 먼 곳에서 오는 거자(擧子)는 이 양식을 싸가지고 올 수 없고 장안(長安)의 쌀을 먹어야 할 형편일 것입니다. 이러할 경우 서울에 팔방의 사람이 모두 모여들어 물가가 치솟아 주객(主客)이 모두 곤궁하게 되어 염려스러운 일들을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봄철에 많은 사람이 모인 훈기(薰氣)로 역질(疫疾)의 유행이 없지 않을 것인데 이것은 필시 그러할 형세인 것이고 매우 절실한 걱정인 것입니다.
아, 금년 농사에 양남(兩南) 지방은 약간 풍년이 들었으나 영남ㆍ호서의 좌우도는 큰 흉년이 들었고 경기 지방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이 물고기가 길바닥의 고인 물에서 벌름거리고 기러기가 물이 마른 못가에서 우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하여 현재 아이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갈 겨를도 없습니다. 따라서 《주례(周禮)》의 열두 가지 황정(荒政)을 모두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굶어죽은 시체가 골짜기를 채우는 걱정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시기에 먼 지방의 사람들을 모이도록 하여 도성 백성 10만 명이 먹을 수 있을 양식을 빼앗게 하여 더 곤궁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신이 이른바 다른 도도 변통하여 회시를 나누어 시행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신이 지난번에 도당(都堂)이 상의하던 날 이 일에 대해서 발언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였고, 전번에 입시했을 때 개정(開政)하기에 바빴으므로 미처 아뢰지 못했고, 이제사 성상께 한 말씀을 드리게 되었으니 민첩하지 못한 잘못과 뒤늦게 아뢴 죄가 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회시 보일 날짜가 아직도 멀었으니 지금에 강론하여 결정하더라도 선처할 수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특별히 유념하소서.
혹자는 말하기를, “과거보이는 일은 중대한 일이므로 의당 옛 규례를 준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근사한 말인 듯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어떠한 일이 궁지에 이르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통하게 되는 것인데 그 변하는 것을 통하게 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곤궁하지 않게 하는 것이 참으로 요ㆍ순(堯舜)의 도이고 왕정(王政)의 대체(大體)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상규(常規)만을 고수하여 백성들이 곤궁한 것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서북 지방은 이미 변통하였는데 동남 지방은 변통할 수 없겠습니까. 동남 지방의 먼 것이 서북 지방보다 큰 차이가 없는데 서북 지방의 백성들은 깊이 멀어 기일 안에 올 수 없다고 하여 변통시켰으니 서울에 곡식이 귀해지고 백성들이 곤궁해지는 데 있어 동남 지방도 변통시키는 것이 신은 불가한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 즉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익숙히 의논하여 다시 결정하도록 하고 경관(京官)을 보내어 도별로 나누어 시취할 뜻을 여러 도에 속히 반포하여 사방의 사람들이 조정에서 사랑하고 걱정해 주는 지극한 뜻을 알게 하소서. 그리고 중외 백성들이 빈곤에 시달리는 환난을 예방하시면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은 걱정스럽고 황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비답(批答)
상소를 보고 모두 알았다. 아침에 선원(璿源)의 후손인 사람이 봉소(封疏)를 올렸는데 그 내용에, “다가오는 회시에 응시할 사람이 대략 2, 3만 명이 될 것인데 이들은 서울에서 거리가 매우 멀지 않은 도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봄철에 농사짓는 일을 버리고 천리의 먼 길을 떠나 과거에 응시할 경우 그들의 본업을 잃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 상소 내용의 대략을 뽑아 재상들에 자문하였다. 따라서 수의(收議)한 것을 보고 난 뒤에 나는 생각하여 조처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라.
《주례(周禮)》의 열두 가지 황정(荒政) : 흉년이 들었을 때 열두 조항의 구황(救荒) 정사를 말한 것. 첫째 곡식 종자와 양식을 나누어주는 것[散利], 둘째 조세를 적게 거두는 것[薄征], 셋째 형벌을 늦추는 것[緩刑], 넷째 요역(繇役)을 없애는 것[弛力], 다섯째 금령(禁令)을 폐지하는 것[舍禁], 여섯째 관시(關市)의 기찰을 하지 않는 것[去幾], 일곱째 길차의 예절을 생략하는 것[眚禮], 여덟째 상례를 간략하게 치르는 것[殺哀], 아홉째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蕃樂], 열째 혼인할 때 예를 갖추지 않고 치르도록 하는 것[多昏], 열한번째 모든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索鬼神], 열두번째 형벌을 엄하게 하여 도적을 제거시키는 것[除盗賊].《周禮 地官 大司徒》
올리려고 한 차자[擬上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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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늙고 병든 몸으로 분주히 출사하느라 근력이 이미 축난데다가 감기까지 겸하였는데 병든 몸을 이끌고 다녔으므로 밤마다 신음하며 앓았습니다. 오늘 정당(政堂) 및 강석(講席)에도 역시 자리에 나가지 못하여 두렵고 불안하지만 소회가 있기에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번에 무과(武科)를 보이는 데 있어 시험의 규정을 수월하게 하고 인원수를 정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유사(遊士)들을 널리 수용하여 그들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고 임용에 대비하려는 것인 듯합니다. 그러나 초시(初試)를 보일 때에 팔도의 선비들이 모두 응시하여 평소에 학문도 무예도 익히지 않고 일없이 놀고 먹으며 항오(行伍)에 속하지 않고 부역에도 예속되지 않은 무리들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도별로 나누어 회시(會試)를 보이더라도 서울에 모이는 4도의 인원 수가 수만명이 넘을 것인데, 회시에서 뽑는 인원이 너무 적으므로 초시에 합격한 무리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과거 날짜가 이미 박두하여 멀고 가까운 곳의 거자(擧子)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들이 몇 명씩 모여 말하기를, “국가에서 초시는 가볍게 하고 회시는 중하게 하여 끝내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이 주고받으며 비난하는 소리가 길거리에 가득합니다. 이에 신은 말하기를, “국가에서 이 과거를 실행하는 것은 백성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 것인데 오히려 원망만을 초래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선비들이 모이는 데 있어 민심이 흥분하기 쉬운 것으로서 어떠한 변고가 발생하는 일이 없지 않을 듯싶기에 신이 이 일을 탑전(榻前)에서 이미 아뢰었고 오늘 또 거듭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로 어떠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직접 보고 듣는 데에서 생각이 떠오르게 되어 변통하는 일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생각에는 국가에서 오늘날 변통하려고 할 경우, 세 가지 기예 중에 한 가지만 합격한 자도 모두 뽑되 세 가지 기예에 모두 합격한 자는 으뜸으로 하고 두 가지에 합격한 자는 그 다음으로 하고 한 가지만 합격한 자는 또 그 다음으로 하고, 세 가지 기예에 모두 합격하지 못한 뒤에야 버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강서(講書)의 규칙을 준엄하게 하여 정자(丁字)만을 아는 자들로 하여금 요행으로 그 사이에 끼지 못하게 한다면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기예를 발휘하고 애초의 소원을 이루게 되어 실망하거나 원망하는 걱정이 없게 될 것이라고 여깁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무과라고 한 이상 단지 강서의 시험만을 보이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초시에 이미 무술의 기예를 보였으니 회시에서는 단지 강서의 시험만을 보이는 것은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신은 자신의 말과 계책이 소활하여 시행하기에 적합하지 않음을 알고 있으나 소회가 있기에 감히 신음 중에 짤막한 차자로 아뢰어 처분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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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회를 아뢴 소[陳所懷疏]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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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병석에 누워 휴가를 청하고 있는 중에 변무사(辨誣使)가 떠날 날짜가 다가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이 일에 있어 울분의 심정을 견딜 수 없기에 말이 번거롭다고 하여도 끝내 반복해서 아뢰는 정성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국가의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명분을 헤아리고 이해를 참작해야 하는 것인데, 신은 이 거조가 어떠한 명분에서 나온 것이고 일에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하늘이 오랑캐의 추악한 덕을 싫어하는지라 해내(海內)가 시끄럽고 어지러워 저들에게 실로 위급한 사태가 아침저녁으로 있는 것이니, 이러한 것은 지난번 북관(北關)에서 올린 장계(狀啓)와 이번 사행(使行)의 선래관(先來官)의 보고에서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도리는 의당 우리의 정형(政刑)을 밝히고 우리의 무기를 수리하여 기어이 흉악한 오랑캐를 제거하여 풀지 못했던 울분을 털어버리고 조종(祖宗)의 치욕을 깨끗이 씻고서 천하에 자립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망하려고 하는 오랑캐에게 구구히 애걸하여 억울한 것을 밝히고 치욕을 씻으려는 계모를 하고 있으니, 신은 오늘날의 집사(執事)들에 대해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우리 군신 상하로 하여금 천하 사람들의 앞에 자립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에 계신 우리 선왕(先王)들의 혼령이 만세 이후까지 치욕을 받으실까 염려됩니다.
오랑캐는 금수(禽獸)와 같은 것인지라 그들에게 좋은 말을 듣더라도 기뻐할 것이 못되고 악한 말을 듣더라도 노여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의 일은 명분을 정하고 포폄(褒貶)을 바로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이어 진실을 후대에 전하는 것인데, 어찌 저들에게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사록(史錄)을 편수(編修)할 때를 당하여 한 마디 말로 그 사실을 밝혀 천하 사람들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미 말했는데 저들이 들어주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만두어야 하는데 어찌 다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가령 저들이 우리의 말을 쾌히 들어주어 우리에게 개정(改正)할 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실로 천하 후세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오랑캐와 친분을 맺고 뇌물을 바치고서 사실을 변경시켜 소망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니, 신임하지 않을 뿐더러 또다시 치욕을 초래하고, 유익함이 없을 뿐더러 또한 해가 될 듯싶습니다. 신의 전번 상소에 이른바, ‘비단을 빠는 데 있어 기름으로 빨고 뱀을 그리는 데 있어 발을 덧붙였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러한 것을 염려한 것이고, 지난번 연석(筵席)에서도 거듭 아뢰었으니 성명께서 필시 기억하고 계실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이익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우리의 사신들을 수고롭게 하고 우리의 사명(辭命)을 욕되게 하며,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고 나라의 패물ㆍ비단을 바닥내어 굶주린 호랑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데, 신은 이것이 어떠한 묘당(廟堂)의 계책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살피시지 않으시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오늘날 성상께 기원하는 것은 위로 천심(天心)이 더욱 노여워하는 것을 살피시고 아래로 민심이 변동하는 것을 살피시어, 속히 이익이 없는 거조를 정지하고 깊이 이용할 만한 기회를 생각하시어 큰 뜻을 분발하시고 신하들을 권면하고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시어 지사(志士)들의 기개를 넓히시며, 백성을 회합시키는 일을 힘쓰시어 그들의 질고(疾苦)를 제거하여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의리를 부지하는 계모를 넓히시고 아울러 뜻하지 않은 변란을 미리 대비하도록 하시어 변방의 군량을 비축하고 성곽을 수선하고 선봉(選鋒 정예(精銳)로운 군사와 부비(浮費))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 반드시 유의하여 급히 강구하도록 하시어 수국왕(收國王)ㆍ관선생(關先生)의 무리들로 하여금 의외에 갑자기 침범하여 백성들의 화단(禍端)이 되고 사직(社稷)의 걱정이 되는 일이 없게 하셔야 합니다. 부지런히 시행하시는 데 있어 시간을 다투시고 급급하게 여기시어 날이 부족한 듯이 하시며, 전례만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시고 견제하는 것을 단절하시며,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시거나 안일한 태도를 지니지 마시고 자신을 극복하고 정신을 가다듬으시어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고 백성을 보전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계획을 세우신다면 신에게는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신은 노쇠하고 병들어 죽을 날이 다가왔고, 좌절되고 무시를 당하여 사람들이 미워하고 있으니 몸이 조정에 있더라도 관가(官家)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바라건대, 일찍 해골(骸骨)이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어 시골에서 여생을 마치며 평소의 분수를 편안하게 하소서. 신은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백호전서 제11권 / 소차(疏箚)
대죄한 소[待罪疏]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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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강교(江郊)에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 사직 단자를 올린 지 수개월이 지나서야 다행으로 본직(本職)을 체면받았으나 서반(西班)의 직함은 아직 지니고 있어 모두 면제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왕대비(王大妃)의 탄신일을 맞이하여 몸을 일으켜 문안드리는 자리에 달려가지 못했으니, 신은 참으로 대궐을 바라보며 불안한 몸으로 황공하여 대죄하는 마음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삼가 생각건대, 신이 며칠 전에 외람되게도 호패법(號牌法)을 파하실 것과 만과 출신(萬科出身)들을 계문(啓聞)하지 않고 수금 치죄하라는 명을 정지하실 것을 아뢰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성명(聖明)께서 우부(愚夫)의 천려일득(千慮一得)의 말을 살펴주시어 즉시 두 건(件)의 일을 정지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일월(日月)의 밝은 것이 은미한 곳도 모두 비추고 성인(聖人)의 마음이 작은 선(善)도 모두 허여하는 것을 우러러볼 수 있었을 뿐더러 백성들이 기뻐하며 길거리의 사람들이 서로 알리면서, 걱정스러워하던 모습이 은택을 받아 생기를 되찾은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조보(朝報)를 읽어보건대, 호패법에 있어 대신(大臣) 및 여러 관료들이 쟁집(爭執)한 것으로 인하여 성상께서 뜻을 굽혀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으니, 신은 이에 또 놀라 의심하고 실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신이 이 일에 있어 지난 일을 철회시키고 남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더라도, 성상께서 윤음(綸音)을 내리시어 백성들의 소원을 따르신 큰 호령이 얼마 되지 아니하여 다시 도로 거두어 신임을 받지 못하는 거조가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신하들이 청한 것을 억지로 따르시더라도 우리 현고(顯考)의 세상을 다스리는 깊은 식견과 백성을 보호하는 훌륭한 계모를 전하께서 계술(繼述)하시는 큰 계획은 신하들의 말에 저지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 대신이 말하기를, “거의 완성된 일을 한 사람의 말로 인하여 그만둘 수 없다.”고 하고, 또 말하기를, “지패(紙牌)의 법을 목패(木牌)의 법으로 하는 데 있어 더욱 원망을 받을 것이 없다. 묘당 및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누구도 이의(異議)를 제기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말에 대해서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이번의 지패법은 실로 선왕(先王)의 유교(遺敎)이며 오늘날의 완성된 법이고, 호패법은 이미 시험했다가 실패한 것으로서 오늘날에 거의 완성된 것이니, 거의 완성된 폐단의 정사를 성취시키려고 하여 이미 완성된 선왕의 법을 혁파하는 것보다는 아예 이미 완성된 일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더라도 결정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도는 그 말의 시비(是非)ㆍ선악을 살피는 데 있는 것이고 사람의 숫자가 많고 적은 것에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그 말이 옳은 말일 경우에는 한 사람의 말이더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고, 그 말이 옳지 못한 말일 경우에는 대신의 말이고 온 조정의 의논이더라도 따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스스로 훌륭한 체하고 남을 하찮게 여기지 말라. 한 남자, 한 여자가 스스로 다함을 얻지 못하면 백성들과 임금이 그 공을 이룰 수 없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성인(聖人)이 말을 듣고 일을 계획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더구나 신의 말은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바로 온 나라 백성들이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마음인 것이겠습니까. 지난날에 예(禮)를 의논할 때 온 조정의 사람 및 빈청(賓廳)의 신하들의 논의가 어찌 온 나라의 논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는 유독 형편없는 도신징(都愼徵)의 말을 취택하시어 끝내 나라의 예를 정하고 국시(國是)를 밝히셨는데, 오늘날에 와서는 그 말이 온 나라의 공론이 되었습니다. 이에 또한 공론의 소재가 애초에 사람의 숫자가 많고 적은 것에 달려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뿐더러, 한때 조정에 이론이 없는 것은 여러 백성들이 같은 마음으로 드러내어 말하지 않는 공론에 부합하는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그리고 호패의 제도는 옛날에 없었던 것으로서 단지 우리나라에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도 아예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태종조(太宗朝) 때 한 번 시행했다가 곧바로 혁파하였는데 어찌하여 시행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겠습니까. 형편상 시행할 수 없었던 것이고, 백성들을 한결같이 법으로 묶어놓을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조조(仁祖朝) 때에도 또한 시행했다가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지패로 변경시키자, 입적(入籍)된 행민(倖民)의 수가 90여만 명이라고 하는데 백성들이 다행하게도 소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대로 유지해 나갈 경우 우리 백성들을 십가(什家)ㆍ오가(伍家)로 편성하여 선왕(先王)의 정사를 행할 수 있고, 그대로 수행할 경우 민수(民數)를 알 수 있고 부역(賦役)을 균등하게 할 수 있고, 도적을 없앨 수 있고 농상(農桑)을 권면하고 형정(刑政)을 공평하게 할 수 있으며, 무비(武備)를 닦고 병거(兵車)를 낼 수 있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다시 목패의 제도를 시행하여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범하면서 뱀을 그릴 때 발을 덧붙이듯이 쓸데없는 일을 하겠습니까. 신이 두렵게 여기는 것은 정묘년(1627, 인조5)의 일처럼 호패법이 백성들에게 편리하지 못하여 끝내 시행할 수 없게 될 경우 지패법도 시행할 수 없게 되어 국가가 그 폐해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 군신 상하가 수년간 경영하였고, 전하께서 즉위하신 초기의 위덕(威德)을 지니신 때를 당하여 선대왕의 유의(遺意)를 이룬 것인데 마침내 쓸데없는 호패의 일로 인하여 실패하게 되었으니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송(宋)나라 신종(神宗) 때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떠돌아다니자, 감문(監門) 정협(鄭俠)이 유민도(流民圖)를 올려 신법(新法)을 혁파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신종은 크게 깨닫고서 그 그림을 소매 속에 넣고 내전(內殿)으로 들어가 즉시 신법을 혁파했는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큰비가 내렸습니다. 그런데 조정 신하들이 서로 상(上)을 뵙고 말하기를, “한 사람의 광부(狂夫)의 망언(妄言)으로 인하여 이미 완성한 법을 혁파하는 것은 불가한 일입니다.”라고 하며, 다시 시행할 것을 굳이 청하여 끝내 송나라 왕실의 화단이 되게 하였는데 오늘날의 일이 불행하게도 이와 같은 것인지라 신은 이에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오늘날이 어떠한 시기입니까. 시운이 쇠미한 때를 당하여 국가에 어려움이 많고 천지가 변동하여 민생이 고난에 빠졌고, 사행(使行)이 끊이지 아니하여 옥백(玉帛)의 예물이 중국으로 다 들어가고 한발(旱魃)이 기세를 부려 국가의 일이 애통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의 심각한 것에 대해서 신이 모두 말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지금의 시기를 어떠한 시기라고 여기십니까. 오늘날의 일은 군신 상하가 자신을 죄책하고 마음과 생각을 변경하고 계모를 바꾸는 데에 미련없이 하여 천의(天意)의 소재를 캐내는 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또다시 까다롭고 번거로우며 시급하지 않은 정사를 행하면서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傳)에 이르기를, “천도(天道)는 청명하고 안정한 것이므로 이유없이 민수(民數)를 조사하여 소요스럽게 하는 것은 하늘이 싫어하는 것이라, 반드시 왕정(王政)에 해가 되고 후손에게 해를 끼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은 지패법을 시행한 이후, 부역을 균등히 하고 백성들을 공평히 하는 제도에 급급히 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그대로 미루어 왔으므로 일은 절반도 시행하지 못했는데 법은 이미 폐단이 생겼으니 하늘이 싫어할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호패에 기록하여 까다롭고 번거로운 제도의 세밀한 정사를 시행하여 천도를 범하고 불상스러운 일을 간범하는 데 있어 민심을 억누르며 시행하고 임금에게 강요하여 따르게 하고 있으니, 신은 집사(執事)들이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신은 듣건대, 옛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은 명령하고 신하는 따른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임금은 명령을 내리는 분이고 신하는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는 자입니다. 이리하여,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며 임금은 강하고 신하는 유순한 것은 천지의 큰 법인 것이라, 상하가 제자리를 얻어 국가가 다스려지고 편안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슬기로우신 자질로 위에 계시어 즉위하신 지가 여러 해가 되었으니 국사(國事)에 대해서 환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정사를 시행하시는 데 있어 의당 모든 정사를 직접 처결하시고 사람들의 말의 시비를 참작하시어 취택해서 시행하고 버리기도 하시어 군신의 큰 체모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신하들의 말만을 들으시어 그 말이 옳은 것임을 아시면서도 시행하지 못하시고 그 말이 그른 것임을 아시고도 버리지 못하시어, 옛사람이 조롱한 바, ‘곽공(郭公)이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했다.’는 경계를 범하지 마셔야 합니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신은 더욱 크게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신은 또 생각건대, 지난해에 묘당(廟堂)에서도 또한 호패에 대한 의논을 하였는데, 신이 당시에 소장(疏章)을 올려 그 법이 불편한 것을 대략 아뢰자, 성상께서 즉시 윤허하셨습니다. 당시 호패법이 관직을 지니고 있는 자에게만 행해지고 서민들에게는 행해지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었고, 호패법이 관리들에게 시행된 지 오래되었으나 신은 그 법이 정사에 관계되고 다스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패법이 두서(頭緖)를 찾게 되자 쓸데없는 말을 하는 자들의 습관적인 논의에 따라 또다시 온 나라 사람에게 시행하려고 하여 백성들의 싫어하는 마음을 거슬리면서 그 정위(情僞)의 실정과 편부(便否)의 소재를 살피지 않고, 또한 질고(疾苦)를 제거하고 부역을 균등하게 하여 법을 설치한 뜻을 종결지어 선대왕의 유제(遺制)를 성취하고 성상의 덕정(德政)을 봉행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그들의 주장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거의 완성 되었다.’라고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시행하여 백성들이 그다지 놀라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패의 제도는 단지 묘당(廟堂)의 신하들이 문서로만 계산하고 억측으로 따진 것일 뿐, 백성들은 아예 듣지 못한 것인데 어떻게 거의 완성된 것이라 하여 고칠 수 없는 것이겠습니까. 일에 있어 편리하지 못한 것은 아무리 완성되었더라도 얼마든지 고칠 수 있는 것인데 더구나 완성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지금 전하께서 신의 말이 성상의 마음에 맞는다고 하셨으나 끝내 여러 신하들의 논의를 따르셨는데, 신은 형편없고 미천한 인물이므로 고려할 여지도 없다고 여기시더라도 오늘날의 신하들이 대신의 말만을 따르고 전하의 훌륭하신 뜻을 받드는 자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살피시지 않으십니까. 이에 대해 신은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신이 지금 번독스럽게 아뢰는 말이 성상의 마음에 맞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간절히 충성을 바치고 싶은 마음에 단지 성상께서 신의 마음이 이러하고 사리가 이러한 것임을 아시게 하려는 것이고, 건강(乾剛)의 덕을 분발하시고 개과 천선(改過遷善)의 도리를 넓히시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일월(日月)의 밝은 것을 우러러볼 수 있게 하실지는 신이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모두가 신이 함부로 말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국가의 일에 이익이 없고 임금의 덕에 손상만 있게 하여 큰 신의를 훼손시켰으며, 또한 온 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조정의 속마음을 알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신의 큰 죄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의 관작을 삭탈하시고 신의 죄를 다스리시어 신하로서 함부로 말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신은 황공하여 대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첩황(貼黃)
신은 또 생각건대, 전하께서 과연 정신을 집중하시고 반성하시어 즉시 큰 호령을 내리시고 묘당의 신하들을 독려하시어 속히 호패의 명령을 그만두게 하고 아약(兒弱)ㆍ도망(逃亡)ㆍ물고(物故)ㆍ족린(族隣)의 부세를 제거하여 부역을 균평하게 하는 정사를 행하시려고 하는데도 하늘이 좋아하지 않고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을 경우, 신은 임금을 기망한 벌을 받아 오늘날 이의(異議)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보답하시기를 청할 것이니, 전하께서 아무리 용서하려고 하시더라도 신은 구차스럽게 모면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특별히 살펴주소서. 신은 또 황공한 마음으로 아룁니다.
비답(批答)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모두 알았다. 지난번에 호패의 명을 정지하도록 한 것은 백성들의 원망을 염려했던 것인데, 낭묘(廊廟)의 신하들이 지패를 목패(木牌)로 바꾸는 데 있어 별로 원망을 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며 누누이 아뢰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의논을 채택하여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런데 경에게 무슨 혐의스럽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죄하지 말라.
곽공(郭公)이 …… 싫어했다.’는 경계 : 선을 좋아하면서 시행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면서 제거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옛날에 제 환공(齊桓公)이 들놀이를 나갔다가 멸망한 옛 성(城)에 곽씨(郭氏)가 살았던 폐허(廢墟)를 촌 사람에게 묻기를, “이 마을은 무슨 마을인가.” 하자, 촌 사람이, “이 마을은 곽씨의 마을이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묻기를, “곽씨는 어떠한 사람이었나?” 하니, 촌 사람이, “곽씨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환공이 말하기를,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은 사람의 훌륭한 행실인데 무엇 때문에 폐허가 되었는가?” 하니, 촌 사람이 말하기를, “선을 좋아하면서 시행하지 못하고 악을 싫어하면서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폐허가 되었다.”고 하였다는 데에서 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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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11권 / 소차(疏箚)
사직하면서 아울러 소회를 아뢴 소[辭職兼陳所懷疏] 6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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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황(貼黃)
신이 이 소(疏)를 작성하고서 어제 내리신 비망기(備忘記)를 삼가 읽어 보건대, “임금에게 걱정이 있으면 신하는 치욕을 받고 임금이 치욕을 받으면 신하는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는데, 주상께서 이토록 노심 초사하고 계시니, 신들은 죽더라도 남은 죄가 있을 것입니다. 이어 삼가 생각건대, 한재(旱災)의 참혹한 것이 경자(1660, 현종1)ㆍ신축년보다 더 참혹합니다. 경자ㆍ신축년의 일은 그야말로 처절한 상황이었으니 전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고 탄식하시는 것이 또한 극도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과 폐백, 옥과 구슬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남교(南郊)에 사용하였으나 하늘이 감응하지 않았고 사직(社稷)에 바쳤으나 땅이 감응하지 않았으며, 종묘(宗廟)에 올렸으나 조고(祖考)의 혼령이 흠향하지 않았고 산천에 바쳤으나 귀신이 흠향하지 아니하여, 열기가 치성하고 타는 듯한 가뭄이 계속되어 오다 지금 벌써 가을철이 되었습니다. 죄수들을 석방시키는 데 있어 요행으로 모면하는 자가 있으니 하늘을 감응시킬 수 없는 것이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견감시키려고 하였으나 시급히 봉행하지 아니하여 실제의 혜택이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또한 어떻게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신명(神明)을 감동시키는 데 있어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명덕(明德)만이 향기로운 것인데 역사(驛使)들이 분답스럽게 왕래하는 것은 단지 백성들을 소요스럽게 할 뿐입니다. 더구나 전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는 유지(諭旨)를 내리셨으나 아직도 자만하시어 선언(善言)을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지니고 계시니, 이는 인심을 감동시키고 천의(天意)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때가 바로 성상께서 지난날의 일을 회고하시고 잘못을 반성하시어 허식을 버리시고 불안한 자세로 행실을 닦으셔야 할 때입니다.
신은 쓸쓸한 서재에서 병으로 신음하고 있으면서 한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전하를 위하여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재변은 오늘날 전하의 정사와 시설이 하늘의 뜻에 맞지 아니하여 상제(上帝)의 노여움을 일으킬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기근(飢饉)의 재앙을 내려 백성들을 죽게 함으로써 복망(覆亡)의 화란이 자리잡게 한 것인 듯한데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일이 하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 일일이 손꼽아 말할 수 없으나, 그 첫째는 북쪽 오랑캐를 섬기는 일인데 저들을 섬기는 일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우리 선왕조(先王朝) 때에도 모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왕조의 열성(列聖)들께서는 천지가 번복되고 대세가 기울어진 때를 당해서도 오히려 분통과 수치를 품고서 부득이한 뜻을 지니셨고, 또한 수치와 울분을 축적하여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을 지니시어, 오늘날 온 천하가 모두 원수로 여겨 사람들이 몽둥이를 들고 대적하기를 생각하고 있는 때에 우리나라만이 저들에게 복종하기를 좋아하고 그지없이 비굴하여 수치와 분통의 생각이 없는 것처럼 하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사행(使行)이 잇달아 왕래하고 예물을 바치는 데 있어 백성들의 고혈(膏血)이 노룡(盧龍)의 골짜기에 다 들어가고 우리나라의 이기(利器)를 구적(仇賊)에게 내주어 저들로 하여금 천하를 해치고 저항군을 함몰시키게 하면서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한 바람 매서운 날씨에 지존(至尊)을 모시고 칙사(勅使)를 영접하는 데 있어 성상의 안후(安候)를 염려하지 않았고, 전하께서 누워계시는 궁전에서 오랑캐의 사신을 맞이하여 황후(皇后)의 상(喪)을 발표하였는데도 아직까지 설광덕(薛廣德)이 수레 앞을 막고 곽헌(郭憲)이 말고삐를 자른 것처럼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들의 허락을 받아 변무(辨誣)하여 나라를 빛나게 하는 계모를 하는 데 있어 심지어 옥당(玉堂)의 사신(詞臣)이 시가(詩歌)를 지어 올리고 학문을 칭송하게 하자, 사대부들이 머리를 숙이고 명을 따르며 한 사람도 항변하거나 거역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러한 일은 저들과 교접한 지 10여 년에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저들이 이러한 일을 가지고 중국에 과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수치를 더하게 되고 천하의 충의(忠義)를 지닌 선비들의 기세를 좌절시키지 않겠습니까. 신하의 직무가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고 사자(士子)의 기풍이 진작되지 못하는 것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실로 군신(君臣)ㆍ유사(有司)들이 전하를 위하여 일을 도모하는 데에 있어 충성스럽지 못한 것이고, 전하께서 사직(社稷)의 계책을 하시는 데 있어 분명하시지 못한 것입니다.
아,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는 나라에 네 가지 기강[四維]으로서 군신 상하가 서로 보전할 수 있는 것인데, 이 네 가지가 없어진 뒤에는 어떠한 경지엔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날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고 통분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와 명(明)나라는 군신의 의리에 있어서는 말할 여지도 없는 것이고 우리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는 실로 부모와 같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종신토록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지 않으셨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는 조정에 계실 때 눈물을 흘리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시며 통곡하시기를 돌아가실 때까지 하셨으며, 열성(列聖)이 계승하시면서 모두 이 마음을 전수하셨는데, 그 은택이 오늘날에도 백성들의 피부와 골수에 스며들어 노래를 부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군신(君臣)ㆍ유사(有司)들의 행위가 항장(降將) 및 해구(海寇)들의 소행에도 미치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비굴한 짓을 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황천(皇天)의 뜻이 아니고 조종(祖宗)의 마음이 아니며, 귀신이 흠향하지 않고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할 수 없는 형편일 경우에는 실로 함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없는 것이지만 시기가 다르고 기회를 가질 수 있는데도 하늘에 순응하고 시기를 틈타 우리의 정형(政刑)을 닦아 우리 조종(祖宗)의 울분을 씻어버리기를 생각하지 않고서 단지 우리 임금을 위태롭고 치욕스러운 데로 인도하고 패란(敗亂)의 전철을 따르게 하고 있으니, 이것이 진정 조종이 분노하시고 천심(天心)이 불쾌하게 여기는 것인지라 신은 삼가 두렵게 여깁니다.
소회를 아뢴 소[陳所懷疏]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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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늙고 병든 몸으로 강교(江郊)에 물러와 있은 지가 벌써 수개월이 되었는데 직명(職名)을 아직도 지니고 있으므로, 해면시켜주시기를 청하였으나 들어주시지 않았고 급한 사정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시지 않았고 소장(疏章)을 올렸으나 저지를 당하였으니, 신은 진정 걱정스럽고 두려워 꿈속에서도 불안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일월과 같이 밝으신 성상께서 어찌 이러한 정세를 이해하시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도 한번 윤허를 내리시어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은 소원을 이루어주시지 않으려고 하시니, 이것은 신이 성명께 신임을 받지 못한 때문인 것이고, 또한 신이 은총과 녹봉을 탐내어 쫓아내도 떠나가지 않고 입으로는 물러갈 것을 말하지만 마음은 실제로 그렇지 아니하여 전하를 감동시킬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이에 신은 더욱 부끄럽고 애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실상을 살피시고 신의 진정을 가엾게 여기시어 속히 치사(致仕)의 소청을 윤허하소서. 이리하여 성명의 조정에 관직을 함부로 제수한 잘못이 없게 하시고 우매한 신이 명분에 맞지 않는 직위를 차지하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게 하시면, 실로 국가와 개인에 있어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그러나 신은 견마(犬馬)의 성품을 마음속에 지니고 있으므로, 아무리 늙고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할지라도 목숨이 남아 있는 한 주인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자주 아뢰어 소원해지더라도 스스로 외면할 수 없고 물러난 몸으로서 지위에 벗어나더라도 혐의삼을 수 없기에 지난날에 아뢴 말을 다시 정리하여 오늘날에 또 올리는 것이오니 성명께서 유념하소서. 변무사(辨誣使)를 다시 보내는 일에 대해서 신이 그만둘 것을 여러 번 아뢰었는데, 성상께서 매번 하교하시기를, “매우 애통한 일이므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 일이야말로 매우 애통한 것이고 매우 억울한 것으로서 변론하는 일을 그만둘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선왕(先王)께서 명(明)나라 때 이미 변무했지만 사관(史官)이 기록하는 데 있어 미처 개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번에 저들이 사록(史錄)을 수정하는 일이 있게 되자 우리로서 한번 변론하여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인데, 저들의 가부(可否)에 따라 경중(輕重)을 삼은 것이 아니라 천하와 후세에 알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우리의 소청을 들어주지 않는 이상, 우리로서는 또한 정직한 의리를 지키고 사명(辭命)을 닦아 명나라 시대의 대인(大人)이 나타나기를 기다리지 않고서 저들이 따라주느냐의 여부에만 급급히 하여 천하ㆍ후세 사람의 의심과 모욕을 초래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오늘날 저들의 허락을 받는다 하더라도 이는 더욱 천하 사람을 의심스럽게 하고 영원히 후세 사람에게 드러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거조가 조종(祖宗)을 빛내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높이는 것이 아니며, 치욕이 또한 큰 것이고 애통함이 또한 심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우리 성상께서 변무하시려는 애초의 마음이겠습니까. 더구나 저들이 오늘날 위급한 상황에 처하여 자신들도 돌볼 여지가 없는데 어느 여가에 우리를 위하여 이 일을 의논하겠습니까. 저들이 우리와 서로 버티지 않고 순순히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 거의 망해가는 추악한 무리의 허락을 받아 국가를 빛내는 계모를 하려고 하는 것은 또한 잘못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것은 천하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에 있어 관계되는 것이 미세한 것이 아니고 치욕이 가벼운 것이 아닌 것으로서 이해가 달려 있는 것이니, 전하께서는 여러 번 생각하시고 신하들에게 자문하시어 좋은 계책을 따르시고, 이미 이루어진 일이라 하여 개정하시기를 망설이지 마시어 곧바로 고치시는 미덕을 지니소서.
아, 천시(天時)가 이미 변하였고 오랑캐의 운이 이미 다하였으니, 백수(白水)의 진인(眞人)이 나타날 시기가 아마도 멀지 않은 듯싶습니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의당 뛰어난 인재를 기용하고 형정(刑政)을 밝히고 갑병(甲兵)을 수리하여 기회를 틈타 분발하여 우리 조종(祖宗)의 울분을 풀어버리고 우리나라 백세의 치욕을 씻어버릴 것을 생각하여 천하ㆍ후세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굴복만 하고 한결같이 좌절당하며, 명(明)나라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고 이륜(彝倫)이 상실되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서 수천 리의 강토를 지닌 당당한 나라로서 늘 원수의 사역(使役) 노릇만 하여 천하 사람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형세는 산과 바다가 안팎으로 둘러 있어 천연의 요해지인 데다가 사졸(士卒)이 강하고 정예로우며 무기가 튼튼하고 예리합니다. 따라서 제일의 계책은 북소리를 울리어 대의(大義)를 천하에 알리고 북쪽으로 쳐들어가 저들의 심장부를 궤멸시켜 만대의 위대한 공적을 세울 수 있는 것이고, 다음의 계책은 국경을 봉쇄하고 백성을 보호하여 저들의 뿔과 발톱을 자르고 우리의 옛 강토를 개척할 경우, 남의 침범을 받지 않을 뿐더러 우리의 난공 불발(難攻不拔)의 기초를 튼튼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책을 하지 않고서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면서 스스로 위태롭고 치욕스러운 경지로 나아가고 신복(臣僕)의 사역이 되는 것을 좋아하여 끝내 패란(敗亂)의 상황에 이르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이러한 것에 대해서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옛적에 전씨(田氏) 제(齊)나라는 천하의 한쪽 구석에 자리하여 이웃 나라의 침범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대대로 진(秦)나라를 잘 섬기고 다섯 나라(초(楚)ㆍ연(燕)ㆍ한(韓)ㆍ위(魏)ㆍ조(趙))가 진나라를 치는 것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즉묵 대부(卽墨大夫)가, ‘진 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진(晋)나라ㆍ초(楚)나라의 대부들을 수용하면 진나라의 임진관(臨晋關)ㆍ무관(武關)으로 쳐들어갈 수 있다.’고 간한 말을 듣지 않다가 끝내, ‘소나무 잣나무여 공(共)에 머문다.’라는 가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안일이 해로운 것이고 미루는 것이 잘못인 것으로서 한번 기회를 잃으면 화란이 이러한 데에 이르는 것인데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신이 전에 전하를 모시고 《사기(史記)》의 이 조항을 강독하고 나서 감히 아뢰기를, “나라가 망할 때에도 기이한 모책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제나라 임금이 과연 즉묵 대부의 계책대로 했더라면 비단 제나라의 위세를 떨치고 진(秦)나라를 망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천하의 권한이 유방(劉邦)ㆍ항우(項羽)에게 있지 않고 전씨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씨가 그 말을 소홀히 여기고 깨닫지 못했다가 결국 자신은 굶어죽고 나라는 망하게 되어 후회하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천하의 큰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성상께서도 수긍하셨는데 어쩌면 성상께서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신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이 불행하게도 이와 같다고 여깁니다.
총명하신 우리 성상께서 무엇인들 생각하시지 않으시며, 세상 만사에 어떠한 일인들 없겠습니까. 삶을 지니고 있는 자는 죽음을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고 나라를 소유한 자는 멸망을 말하는 것을 기휘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영명한 임금은 사생 존망의 경계를 들으려고 하는 것인데, 신은 감히 전하를 위하여 아뢰겠습니다. 신은 조정이 경거 망동하여 성공을 기필할 수 없는 일을 시도해서 의외의 이익과 명성을 도모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니, 실제로 대의(大義)를 버릴 수 없고 천운을 어길 수 없으며, 예의가 없어지면 화단이 뒤따르고 때가 되었는데도 거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그 재앙을 받기 때문인 것입니다. 공격하고 수비하는 데 있어 형세가 다르고, 주둔하고 있거나 행군하는 데 있어 비용이 드는 것은 똑같은 것인데 우리나라의 선인(先人)들은 실로 남을 공격할 수 있는 기세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굽혀 남에게 따르기만 하여 끝내 자립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끝내 버티지 못하여 소굴로 도망쳐 온 뒤에는 우리나라와 인접하게 되어 저들 군신(君臣)이 서로 찾아와 우리에게 화내고 요구하는 것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인데, 신은 이때에 국가에 뒤늦은 후회가 있게 되고 제때가 아닌 거사를 할 경우 위태로운 상황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명분과 의리에 부끄러움이 있을 듯싶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은 오늘날의 일에 있어 변무사를 보내는 것을 속히 정지하고 그 예물과 비용을 가지고 우리의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하고, 아울러 한 사람의 차관(差官)을 보내어, ‘우리는 현재 흉년이 들었으므로 사신의 경비를 마련할 수 없다.’고 아뢰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내외 신하들을 크게 경계하여 자신의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우리의 성지(城池)를 수축하고 우리의 곤궁한 백성들을 보살피고 우리의 정예로운 군사를 모집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도록 하고, 여러 도(道)에 명을 내리시어 지난번에 하교하신 아약(兒弱)ㆍ도망(逃亡)ㆍ물고(物故)의 숫자를 속히 올리도록 하여 신포(身布)를 면제하고 부역(賦役)을 균등히 하는 정사를 의논하여 백성들의 적개심(敵愾心)을 일으켜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고을 및 각도에 분부하시어 지난해에 반포한 병거(兵車)의 제도를 다시 수행하여 일이 닥쳤을 때 다급한 상황에 빠져 나라를 적군에게 넘겨주는 걱정이 없게 하고 칼을 뽑았으면 반드시 잘라내는 형세가 되게 하소서. 그리고 관서(關西)ㆍ관북(關北) 일대의 수령들에게 있어서는 더욱더 재능이 있고 정직한 사람을 선발하여 보내어 미리 군비(軍備) 및 성곽(城郭)을 수선하여 그 기세를 웅장하게 하여 저들의 소굴을 넘보는 시세를 이루어 나라에서 큰 호령을 내리기를 기다리도록 하고 그럭저럭 미루며 중단하거나 사태를 관망하고 퇴보하는 계책을 하지 말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바라건대, 성상께서도 큰 뜻을 분발하시고 정신을 가다듬으시어 위로 천심(天心)을 감격시키기를 생각하시고 아래로 민심을 감동시킬 것을 생각하시며, 뛰어난 인재를 밤낮으로 생각하시고 용렬한 인물을 멀리 배척하시며, 충성스럽고 현명한 사람을 좌우에 있게 하시고 경전(經典)의 훈계를 깊이 생각하시어 부지런히 하시고 노력하시어 덕이 날로 새롭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 백성들의 홀아비와 홀어미를 보살펴주시고 현명하고 재능이 있는 자에게 직임을 맡기시며 수레와 말을 다스리는 데 있어 옛날 주 선왕(周宣王)의 규범대로 하시고, 마음을 깨끗이 하고 예(禮)에 돌아가며 참소하는 소인을 제거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화(財貨)를 천하게 여기고 덕(德)을 중하게 여기기를 공자(孔子)의 말씀대로 하신다면, 어찌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고 난(亂)을 제거하고 쇠미한 국운을 부흥시켜 옛날의 어진 임금들이 행한 일을 추적할 수 없겠습니까. 이러한 것이 실제로 우리 조종(祖宗)들께서 기대하시는 것이고 백성들이 축원하는 것이며, 온 나라 사람이 소생시켜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고 황천(皇天)이 보살펴 주는 것입니다.
신은 전하께서 총명하시고 영특하시므로 시세에 따라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에 시행하시는 데 있어 실로 어렵게 여기시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하지 않을 경우 천명(天命)은 믿을 수 없는 것이고 민심은 일정하지 않은 것이며, 기회는 놓치기 쉬운 것이고 사변은 짐작할 수 없는 것이며, 어떠한 일에 있어 화단이 복이 될 수 있고 나라도 또한 편안한 데에서 망하는 데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니 신은 이것을 두렵게 여깁니다. 신은 근력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에 치사(致仕)를 청하는 때에 한 마디 말을 아뢰어 평소의 하찮은 충성을 조금이나마 바치려 하오니, 성명께서는 유념하시어 살피소서.
비답(批答)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심정을 모두 알았다. 상소 내용에 나라를 위하여 조목을 나누어 아뢴 일에 대해서 자세히 보았다. 변무(辨誣)의 한 조항은 일의 체모가 중대한 것이기에 이미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상의해서 확정하여 품처(稟處)하도록 하였다. 경은 편안한 마음으로 사직하지 말고 속히 들어와 연석(筵席)에 출입하여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라.
백수(白水)의 진인(眞人) :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하였는데, 광무제(光武帝)가 백수에서 일어나 중흥시켰으므로 백수 진인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청(淸)나라의 운이 쇠하여 명(明)나라를 중흥시킬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소나무 잣나무여 …… 머문다.’라는 가요 : 전국(戰國) 시대 말기에 진 시황(秦始皇)이 제(齊)나라를 멸망시키고 제왕(齊王) 건(建)을 공(共)이란 곳에 안치시켰는데, 제나라 백성들이 제왕이 제후(諸侯)를 연합하여 진(秦)나라를 치지 않고 빈객들의 참소하는 말을 듣다가 나라를 망하게 한 것에 대해 원망하여 가요를 불렀는데, 그 가요에, “소나무여 잣나무여! 건을 공에 머물게 한 자가 빈객이던가?[松耶栢耶 住建共者客耶]”라고 하였다. 《史記 卷46》
밀소(密疏) 9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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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룁니다. 아,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하늘이 재이(災異)를 내려 우리 전하를 경동(驚動)시킨 것에 대해서 일일이 손꼽아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이 보고 들은 것만을 말하더라도 일식과 지진이 있었고 무지개가 해를 관통했으며, 괴이한 별이 낮에 나타났고 태백(太白)이 빛을 드러냈으며, 혜성(彗星)이 해의 곁에 떴었는가 하면, 무지개가 내전(內殿) 뜰에서 발생하였고 큰 구렁이가 조정 뜰에 나타났으며, 큰 바람이 사직단(社稷壇)을 무너뜨렸고 폭우가 산릉(山陵)을 무너지게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모두가 옛사람이 이른바 망국(亡國)의 큰 이변인 것입니다. 그끄저께 신이 성관(星官)의 보고를 받았는데 벌성(罰星 형혹성(熒惑星))이 귀성(鬼星)을 덮고 적시기(積尸氣)를 침범했다고 하니, 이는 《성경(星經)》에 기록된 바 큰 흉변이 있을 조짐이고 큰 병난(兵難)이 일어날 형상인 것으로서 예사로운 재이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우리나라가 하늘에 어떠한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늘이 위엄으로 경동시키고 형상으로 보여주는 데 있어 이처럼 드러나게 하고 박절하게 하는 것이겠습니까. 신은 실로 마음이 떨리고 간담이 떨리어 침식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삼가 생각건대,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가 말하기를, “하늘이 임금을 매우 인애(仁愛)하기 때문에 먼저 재이(災異)를 드러내어 경동시켜 임금이 잘못을 깨달아 선으로 돌아가게 하고 고칠 줄을 모른 뒤에야 패망의 흉변을 내린다.”고 하였는데, 이 이치로 미루어 본다면 오늘날의 일은 그래도 해볼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팔짱만 끼고 있으면서 소홀히 하여 어쩔 수 없는 경지에 이르고서야 그만둘 것이겠습니까. 대체로 하늘과 사람은 감통(感通)하는 이치가 있고 화(禍)와 복(福)은 이전되는 기미가 있고 사람의 일은 변화하는 도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옛날의 성군(聖君)들이 덕(德)을 닦아 요괴스러운 재이를 극복하고 깊이 근심하여 성명(聖明)을 깨닫게 한 효과로서 은(殷)나라의 태무(太戊)와 고종(高宗)이 백왕(百王)의 준칙(準則)이 되는 것입니다.
신은 전지(前志)를 상고해 보건대, 형혹성의 변괴가 정성(井星)ㆍ귀성(鬼星)의 분야(分野), 인방(寅方)ㆍ묘방(卯方), 갑일(甲日)ㆍ을일(乙日)에 있었으니, 아마도 급질(急疾) 및 흉폭스러운 변란이 우리나라 서남(西南) 지방에서 발생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신은 길거리의 전하는 말을 듣건대, 정금(鄭錦)이 오삼계(吳三桂)와 모의하여 주사(舟師 수군(水軍))로써 중국의 왼쪽 바다를 돌아 산동(山東)으로 나오려고 한다고 하고, 또 일본(日本)과 통행한 형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경우 그들 군사가 우리를 침범하고 우리를 위협하여 북인(北人 청(淸)나라)의 왼쪽 팔을 자르고 청나라를 능가하는 형세를 펼치려는 것이 그들의 계책인 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순종하기도 하고 거역도 하였으며 내뱉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였는데 저들이 우리를 짓밟고 살륙하며 약탈하고 곤욕스럽게 하는 화단이 어찌 없겠습니까. 그러나 《성경(星經)》에 이른바, ‘큰 전쟁이 일어나 피가 흘러내리고 군사가 전몰되고 장수가 죽는다.’고 한 것이 없을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 적(敵)의 형세가 저러하고 하늘의 현상도 이러하니 신은 두렵게 여깁니다.
대체로 오늘날의 형세에 있어 우리는 지형이 편리하고 요해지(要害地)에 처해 있으니, 우리가 대의(大義)를 부지하여 스스로 분발할 경우 적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며 천하를 진동시키고 태산(太山)처럼 튼튼한 형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계책을 하지 않고서 두려워하고 안일만을 취하여 줄곧 적인(敵人)의 사역(使役)이 되어 저들이 싫어하는 화를 대신 받기만 한다면, 신은 우리 사직(社稷)의 근심과 백성들의 화란이 실로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를 듯싶습니다. 신의 전번 상소에 이른바, 사행(使行)을 정지하고 신포(身布)를 견감하고 군비(軍備)를 수선하는 등의 일은 모두가 오늘날의 우환에 대한 계책이었는데, 어쩌면 성상께서 유의하고 계시는지요? 신은 또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에 있어 조정의 대소 신하가 모두 마음을 가다듬고 두려워하며 적들이 벌써 다가온 것처럼 여겨 의리를 주장하고 덕을 닦으며 우리의 형정(刑政)을 밝혀 혹시라도 저들의 모멸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체부(體府)가 장수를 선발하고 군사를 뽑으며 수레와 배를 건조하고 기계(器械)를 수선하는 일에 있어 특별히 계획할 것을 생각해야 하고, 강도(江都)의 위아래에서 해서(海西)ㆍ관북(關北)의 강변 등지까지도 또한 각별히 방비할 것을 생각하여 뜻하지 않은 사태에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또한 계획할 수 있는 사람과 주선할 수 있는 사람을 얻어야 하는 것인데, 신은 조정의 관리들 중에 이러한 일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듯싶으니 실로 성상께서 선발하시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고 대궐 밖에 있는 신으로서는 함부로 아뢰어 말할 수 없습니다.
신은 지금의 안변 부사(安邊府使) 조성(趙䃏)을 만나보았는데 그의 계려(計慮)와 지개(志槩)는 그와 비교할 만한 자가 드물었습니다. 이전에 대신들이 그의 재능을 추천한 자가 많았고, 그가 군현(郡縣)에 부임해 재간(才幹)과 방책(方策)을 펼쳐 이미 공적을 드러냈는데, 인재가 급한 이때를 당하여 그를 군현으로 내보내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닌 듯싶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묘당(廟堂)에 자문하시어 그를 보내는 것을 특별히 유보하고 기용할 방도를 다시 의논하게 하소서. 기타 조정의 관리들 중에 재능이 뛰어났으나 그다지 드러나지 않은 자들도 또한 조정이 수습하여 기량에 따라 직임을 맡겨 성망(聲望)을 기르도록 하여 환난을 미리 대비하는 때에 군색함이 없게 하소서. 그리고 혹 하급 관료에 침체되어 있거나 초야(草野)에 묻혀 있거나 무오(武伍)에 끼어 있거나 비천한 데에서 나온 자이더라도 조정 및 지방의 수령들로 하여금 아는 사람을 모두 천거하여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말고 재능에 따라 조용(調用)하여 각자 재능을 드러내어 온갖 공적을 이루게 하고 인재를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하소서. 옛사람이 말하기를, “삼신(三辰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이 궤도(軌道)대로 운행하지 않을 경우 선비를 발탁하여 재상을 삼고, 사방의 오랑캐가 순종하지 않을 경우 병졸을 선발하여 장수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바로 오늘날의 일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이상의 일들은 오늘날 하늘에 호응하여 재이(災異)를 소멸시키고 환난을 미리 대비하는 계책이 되는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신의 이 소(疏)를 묘당에 내리시어 취사 선택을 의논하게 하소서. 신은 쓸쓸한 서재에서 근심에 젖어 한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위급한 사태에 도움이 될 만한 기이한 묘책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이에 전번 상소의 미진한 말을 대략 아뢰게 되었는데, 성명께서는 다시 유념하시어 살피소서.
대죄한 소[待罪疏] 9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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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룁니다. 신은 마음속에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곧바로 오늘날의 일이야말로 눈물을 흘릴 만하다는 글을 올려 성상께서 유념하시기를 기원했습니다. 조정 관리가 전하는 말을 삼가 듣건대, 지난번 인견(引見)하실 때 성상께서 신의 소본(疏本)을 내어 신하들에게 편리한지의 여부를 하문하셨다고 하니, 성인(聖人)이 우매한 자의 말과 추요(蒭蕘)의 소리도 채택하시는 성대한 뜻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듣건대, 당시 대신(大臣)들이 대답하는 데 있어 신의 말이 큰소리를 좋아하고 과장되고 허탄한 것처럼 하여, ‘지금 사방에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위란(危亂)의 사태가 이미 다가온 것처럼 하였으니 알 수 없다.’고 말한 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오늘날 사로(仕路)가 혼잡한 것은 지난날의 전관(銓官)이 유학(幼學)의 별천(別薦)을 많이 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니 별천을 혁파하고 향천(鄕薦)도 혁파해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이에 신은 놀라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으며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전하께서 너그럽게 용납하시지 않으셨다면 신은 실로 요망한 말을 한 죄와 정사를 어지럽게 한 벌을 면할 수 없는 것이고, 신은 의당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문을 닫고 거적을 깔고서 삼가 견책을 기다리기에 겨를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정성을 전하께 우러러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은 듣건대,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하늘이 지금 노여워하는데 큰소리치거나 아첨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노여움이란 하늘이 노여워하는 것이고 큰소리란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고 아첨이란 남에게 굽신거리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소인(小人)이 천명(天命)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탄하는 바가 없는 자의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신의 말은 하늘의 노여움을 두려워하고 국가에 삼공(三空)의 재액이 있을까 두려워하여 일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는 때에 기휘하는 말을 하여 환난이 닥치기 이전에 미리 대비할 것을 바랐던 것이니, 겁이 많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만 과장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고, 큰소리치며 기휘할 줄을 모른다고 한다면 옳지만 허탄한 말을 하여 경동케 한 것이라고 한다면 신의 진정이 아닙니다.
지금 사방에 실제로 풍진(風塵)의 경보(警報)는 없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오랫동안 쇠퇴하고 안일에 젖어 있는 때를 당하여 남쪽에는 왜적(倭賊)이 호시 탐탐(虎視耽耽) 기회를 노리고 있고, 북쪽에는 청(淸)나라가 있으니 악질(惡疾)처럼 걱정스럽습니다. 그런데 의리가 사라져 인심이 흩어지고 천시(天時)가 순조롭지 못하여 집들이 텅 비었으며, 성(城)들이 붕괴되어 변방의 방어가 없고 창고가 텅 비어 1년을 넘길 저축이 없으며, 사졸들이 교습을 받지 못했고 장수들이 병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를 적(敵)에게 넘겨줄까 근심스럽고, 사기(士氣)가 진작되지 못하고 조정 대신들이 분란만 일으켜 국가의 형세가 위급한 것이 극심합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늘이 노하여 크게 위엄을 보이고 큰 이변이 잇달아 나타나는 데이겠습니까. 이번에 발생한 별의 변괴에 대해서 식견이 있는 장로(長老)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있으니 하찮게 여겨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맹자(孟子)는 이르기를, “국가가 무사한 때에 즐기기만 하고 태만한 것은 화란을 자초하는 것이다. 하늘이 지은 재앙은 오히려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지은 재앙은 모면할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오늘날 우리나라는 무사한 때라고 할 수 없는 것에 있어서겠습니까. 대체로 화변이 일어나는 것은 늘 오랫동안 안일한 데에서 일어나고 뜻하지 않은 데에서 일어나고 사람이 생각지 못한 데에서 발생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형세는 민심이 두려워하며 의지할 데가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래도 해볼 수 있지만 조금이라도 늦으면 아예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이니, 걱정할 만하다고 하는 것은 옳지만 걱정이 없다고 하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절과 의리도 없고 신의와 무기를 버리고서 적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나라를 보전한 사람은 자고 이래로 없었으니, 신은 참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로(仕路)가 신으로 인하여 혼탁하게 된 것에 대해서 신은 죽을죄를 지었는데 신이 주벌을 받아야 할 처지에 어떻게 스스로 변론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별천(別薦)ㆍ향천(鄕薦)을 혁파해야 한다는 논설에 있어서는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추천으로 인재를 등용하고 덕(德)으로 선비를 선발하는 것은 당(唐)ㆍ우(虞) 이후, 한(漢)ㆍ진(晉) 이전에 나라를 소유한 자의 공통적인 것으로서 그 유래를 알 수 없습니다. 주(周)나라 때에는 학교(學校)에서 인재를 진출시켰고 한(漢)나라 때에는 향리(鄕里)에서 선비를 천거하였는데 그 일이 매우 훌륭하고 많은 인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 양제(隋煬帝) 때에 이르러 비로소 진사과(進士科)를 설립하여 문예(文藝)로써 선비를 뽑았는데 그것은 한나라 영제(靈帝) 때 홍도문(鴻都門)의 학사(學士)의 제도를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 후로 역대의 제왕들이 그대로 따라 이 제도를 중하게 여겼고 우리나라의 제도도 이것을 따른 것이었는데, 천하의 선비들 중에 응시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있고 간혹 응시했더라도 제대로 쓰임을 받지 못한 자도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훌륭한 재능과 뛰어난 기량을 지닌 자가 대부분 하급 지위에 있고 문묵(文墨)의 하찮은 기예를 지닌 자들이 그 당시에 등용되어 온 천하가 바람에 휩쓸리듯이 하여 날로 진기시킬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전인(前人)들이 매우 걱정하고 은근히 탄식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후세의 천하와 국가를 소유한 제왕들도 또한 과목(科目) 이외의 인재를 뽑아 현자를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하지 못했다는 것을 역대의 지난 사적에 상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조(國朝)에 추천으로 등용되어 현직(顯職)에 오른 사람들 중에 과거의 급제를 거치지 않고 진출한 자들을 또한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는 본시 과거법을 중하게 여겼지만 중간에 간혹 과거로 뽑는 것을 그만두고 천거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것은 과거로 뽑는 데 있어 인재를 모두 뽑을 수 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때에 따라 조이기도 하고 늦추기도 하여 일정한 규례(規例)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제왕의 대략적인 것입니다.
오늘날 향천의 제도에 있어 꼭 인재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별천에 있어 사(私)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조정에서 각별히 경계하고 옛 규례를 크게 고쳐 지난날의 습관을 따르지 말도록 하고, 또한 말단의 규례인 과거만을 중하게 여기지 말아 전대 제왕들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일시적인 일로 인하여 전대 제왕 및 조종의 전제(典制)를 모두 혁파하고 단지 과거에 합격한 선비들만을 기용한다면 국가에서 인재를 뽑는 길이 너무 좁고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가 너무 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의 법이 공정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심(私心)을 부리는 길을 터놓은 것입니다. 관자(管子)가 말하기를, “어지러운 시대의 일은 공정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데에서 사심이 행해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인심이 예전과 같지 아니하여 간사스러운 폐단이 점점 발생하고 있는데 근래에 와서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요즈음 조정이 세밀히 제지하고 엄하게 금하더라도 간위(奸僞)만을 더욱 키울 뿐, 실제로 일에 아무런 이익이 없을 듯싶은데, 대신들이 이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송(宋)나라 때 주 문공(朱文公)은 말하기를, “조정이 중원(中原)을 회복하려고 한다면 30년의 과거를 혁파해야만 된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실로 현재의 급선무인 것으로서 성상께서 오래도록 생각하셔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있어 또한 과장된 말이 될 것이기에 신은 끝까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작년에 과장(科場)에서 작간(作奸)한 일이 발각되었을 때, 죽은 승지 이동규(李同揆)가 신에게 말하기를, “과장의 간사스러운 폐단이 날로 발생하고 있으니 끝내 국가에 해가 될 듯싶다. 소장(疏章)을 올려 우선 과거를 혁파하여 사습(士習)을 바로잡을 것을 청하려 한다.”고 하기에, 신은 주자(朱子)의 말을 그에게 일러주고, 또 말하기를, “이 일은 실제로 그러하다. 그러나 오늘날 조정이 필시 시행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서서히 하도록 하여 성상의 마음이 깨닫게 되시고 성상의 학문이 고명해지시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할 듯하다.”고 하자, 동규도 마침내 그만두고 하지 않았는데, 신은 오늘날 동규가 선견의 지식이 있고 신은 어물거리며 결단성이 없는 것을 탄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거하는 제도를 혁파하고 전적으로 과목만을 시행할 경우 동규가 이른바 간사스러운 폐단을 더욱 금지할 수 없게 되어 또다시 성명(聖明)께 걱정을 끼치는 일이 있게 될까 염려스럽습니다. 그리고 당(唐)나라의 육지(陸贄)는 대성(臺省)의 장관들이 각자 아는 사람을 천거하도록 할 것을 청하여 아뢰기를, “더구나 오늘의 대성의 장관은 바로 내일의 재상이고, 내일의 재상은 바로 어제의 대성의 장관인데 어찌 재상이 되면 천하의 선비를 모두 알 수 있고 대성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천거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오늘날 대성의 별천을 혁파하고 단지 삼공(三公)ㆍ이조(吏曹)가 천거하는 사람만을 등용하려고 한다면 또한 육지가 비난한 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은 오늘날 이러한 법이 지난날 사심을 부리고 인재를 얻지 못한 폐단을 구제하지 못할 듯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30~40여 명을 천거했다.’고 한 것은 또한 신이 전조(銓曹)에 있을 때의 일을 지적한 것입니다. 천거한 사람이 많을 경우 사실 용잡(冗雜)한 것은 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동료와 함께 각자 아는 사람을 천거하여 묘당(廟堂)의 논의를 거친 것이지 개인의 사사로운 의논이 아니었습니다. 신이 추천서(推薦書)에 넣으려고 한 사람은 60~70명이었는데, 대신(大臣)이, ‘우선 훗날을 기다리자.’고 해서 그 반을 잘라 버렸기에 신은 뜻대로 다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습니다. 당(唐)나라 때 이길보(李吉甫)는 재상이 되어 배기(裵垍)에게 인재를 묻자, 배기가 즉시 30여 명을 소장(疏章)으로 천거하였는데 그들을 수개월 이내에 모두 선발하여 기용한 것에 대해서 전사(前史)에 칭송하였습니다. 전조(銓曹)가 인재를 기용하는 것은 마치 장인(匠人)이 온갖 재목을 모으고 의사(醫師)가 여러 종류의 약을 모으는 데 있어 박노(欂櫨)ㆍ주유(株檽)와 창양(昌陽)ㆍ마발(馬勃) 등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비축하여 각각 그 재능과 쓰임에 맞게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어찌 많은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리고 대신이 이른바, ‘변무사(辨誣使)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청론(淸論)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은 더욱 대신의 뜻을 알 수 없고 어떠한 이유의 말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 일이 조종(祖宗)의 수치와 국가의 영욕(榮辱)과 사기(事機)의 득실에 관계가 있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신은 번독스럽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서 성상을 위하여 할 말을 다했던 것인데 어찌 스스로 청론에 의탁하여 우리 임금께서 지극히 애통해 하시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청론이 국가에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한(漢)나라 때에는 청론이 없었기 때문에 이응(李膺)ㆍ두밀(杜密)ㆍ진번(陳蕃)ㆍ부융(符融) 등이 절의를 지켜 죽었고 황보숭(皇甫崇)ㆍ노식(盧植)ㆍ화흠(華歆) 등이 일을 맡게 되자 한나라 왕실이 망하였고, 당(唐)나라 때에 청론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의 청류(淸流)들을 모두 황하(黃河)의 탁류(濁流)에 던져버리자 주온(朱溫)이 임금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송(宋)나라 때에 청론이 없었기 때문에 사마광(司馬光)ㆍ정이(程頤)ㆍ장준(張浚) 등이 서울에서 도망가고 진회(秦檜)ㆍ한탁주(韓侂冑) 등이 일을 담당하게 되자 오랑캐가 중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청론이 없어지자 나라도 따라서 망하는 것인데 청론이 국가에 무슨 잘못이겠습니까. 오늘날 신이 걱정하는 것은 바로 청론이 일어나지 아니하여 국가의 일이 날로 잘못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재상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청론과 공의(公議)를 주장하여 우리 임금께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경지에 계시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청론을 무시하고 공의를 돌보지 않으며 우리 임금의 영욕(榮辱)을 생각하지 않고서 오직 그지없이 두려워하고 치욕을 감수하면서 먼 천릿길에 사신을 보내어 원수의 사역(使役)이 되는 것을 기탄하지 않는다면, 어찌 넘어지고 위태로운 것을 부지하여 보상(輔相)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대신이 이에 대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라 여깁니다.
아, 오늘날이 어떠한 시기이겠습니까. 대신의 도리는 백성들의 고역(苦役)을 조절하고 소요스러운 사태를 진정시키며, 각자 의견이 다른 것을 받아들이고 남의 잘못과 추악한 것을 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덕을 모두 받아들이고 정교(政敎)를 펴며 동료간에 서로 화합하고 협력하여 사심(私心)을 잊고 국가에 봉사하여 임금의 직무를 보필함으로써 스스로 위욕(危辱)의 경지에서 벗어나고 어려운 상황을 함께 구제하여 국가의 형세가 공고(鞏固)하여 동요되지 않는 경지에 놓여지도록 하여 우리 임금이 위임하신 뜻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낭묘(廊廟)의 대신들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신이 스스로 화합하지 않고 간격을 두며, 여러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기밀의 일에 대해서 데면스럽게 여기며, 일이 다가왔는데도 분발하지 않고 시기가 닥쳤는데도 거행하지 않으며, 그만둘 수 있는 일인데도 그만두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인데도 하지 않고서, 환난을 미리 대비하는 계책에 있어 걱정만 하고 저들에게 재물을 실어 보내는 일에 대해서 탄식만 해서야 될 일이겠습니까. 신은 벌써 늙었고 몸이 이미 물러났으니, 실로 시끄럽게 떠들며 스스로 변론하고 대신들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습니다. 단지 성상께서 사리가 이러한 것을 아시고서 사람들의 말을 들으시고 일을 처리하시는 데 있어 잘못 들으시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리하여 혐의와 번독스러움을 회피하지 않고서 이처럼 많은 말을 하였는데 신은 참으로 황공하고 부끄러워 등이 땀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사방에 걱정이 없는 때에 함부로 큰소리를 쳤고 또한 사로(仕路)를 혼란스럽게 한 큰 죄를 졌습니다. 그리고 신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겁이 많으며 범상한 인물을 발탁하고 시세를 헤아리지 못한 말로 인하여 선왕(先王)의 옛 제도가 오늘날에 혁파되게 하였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청론(淸論)을 의탁하여 변무(辨誣)의 중대한 일을 저지하려고 하였으니, 만 번 죽임을 받더라도 여죄가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신의 직명(職名)을 체면시키시고 이어 신의 죄율(罪律)을 의논하도록 하시어 대신들에게 보답하시고 조정 신하들을 격려하소서. 이리하여 조정에 과장된 말을 하는 자가 없게 하시고 사로가 영원히 깨끗하게 하소서. 신은 두려워하며 대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공(三空)의 재액 : 세 가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말한 것으로서 토지가 텅 비어 있는 것, 조정이 텅 비어 있는 것, 창고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말한 것이다.
사직하면서 아울러 소회를 아뢴 소[辭職兼陳所懷疏] 11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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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강교(江郊)에 병으로 누워 죽음과 가까이하고 있으면서 직명(職名)을 차지하고 있은 지가 벌써 수개월이 지났는데 몸을 일으켜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했고, 동지(冬至)의 절후를 맞이하여 또한 문안드리는 반열에 달려가지 못했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죽더라도 여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패초(牌招)에도 또한 의상(衣裳)을 거꾸로 입고 수레에 멍에 메우기를 기다리지 않는 의리를 다하지 못했으니 신은 참으로 황공하여 대죄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이 노쇠하고 질병이 있는 까닭으로 육신으로는 전하를 섬길 수 없지만 마음에 소회가 있고 일에 대해서 말할 만한 것이 있으니, 전하께 우러러 아뢰지 않는다면 이것이 어찌 신이 평소에 충직한 마음을 지니고서 전하를 섬기려던 마음이겠습니까.
신은 삼가 보건대, 요즈음 음양(陰陽)이 순조롭지 못하고 큰 이변이 자주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되고 원망이 일시에 일어나 도성(都城)에서 사방에 이르기까지 근거없는 말로 서로 선동하여 백성들 모두가 도망가고 난리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대체로 금년에 한재(旱災)가 6, 7개월 계속되어 여름에 장마가 없었고 가을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여 물줄기가 고갈되었고 초목이 말랐는데 이는 참으로 예전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조정이 평년과 똑같이 여겨 한재가 극심한 곳 수십 고을을 제외하고는 전혀 급재(給災)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백성들이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들은 체하지 않았고, 중신(重臣)이 진언하였지만 채택하지 않았으며, 주상께서 명령을 내리셨는데도 시행하지 않고 있으니, 이는 실로 유사(有司)들의 잘못이고 조정의 정사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이처럼 큰 흉년이 든 해를 당하여 백성들이 아침저녁에 먹을 양식이 없어 부자(父子)가 서로 보전하지 못하고 형제ㆍ처자가 흩어지게 되었는데도 성상께서 걱정하시고 애처롭게 여기시는 유지(諭旨)를 내리셨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조정에서 원망을 사고 원수를 부르는 것이 실로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환자[還上]를 독촉하여 받아들이는 일도 이때에 병행하고 있습니다. 조정이 감분(減分)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줄인 수량이 얼마되지 않는데다가 봉행하는 수령들이 아예 성상의 은덕을 선포하지 않고서 한결같이 독촉하여 금년분 및 지난해의 분량을 모두 징수하는 데 있어 독촉이 성화(星火)보다 급하고 호통소리가 온 마을에 울리고 있으니, 이에 백성들이 속마음을 하소연할 데가 없어 애절히 하늘에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백성은 양식을 하늘처럼 여기고 나라는 백성을 생명으로 여기며, 하늘의 마음은 또한 백성들의 마음인 것인데 민심이 이와 같다면 하늘이 어떻게 노하지 않을 수 있으며 나라가 어떻게 위태롭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듣건대, 조정이 강도(江都)를 순시(巡視)한 데에 있어 성첩(城堞)을 구축하는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강도의 백성들이 환자의 독촉에 시달림을 받아 원망과 분노의 말이 자자하게 들리어 심지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 있기까지 합니다. 옛날에 윤탁(尹鐸)은 진양(晋陽)을 보장(保障)으로 만드는 데 있어 그 고을의 호수(戶數)를 줄였는데, 대체로 민력을 느긋하게 하고 민심을 순하게 하는 것이 바로 보장의 근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원망하고 분노하여, ‘지금에서야 보복할 수 있다.’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면 천 길의 금성(金城), 백 길의 탕지(湯池)가 있더라도 난을 당했을 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큰 우환입니다. 우매한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지금 집사(執事)들에게 깊이 당부하시어 금년의 재상관(災傷官)이 가 있는 곳에 대해서 한재가 극심하지 않은 고을도 조세(租稅)를 거둘 때 똑같이 6, 7분의 급재(給災)를 적용하도록 하고, 또한 제도(諸道)의 감사(監司) 및 수령들로 하여금 연분 초책(年分草冊)을 다시 작성하여 처리하도록 하고 아직 미납분의 환자에 대해서 속히 독촉을 정지하고 내년 가을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수령들이 감분(減分)을 시행하지 않고서 멋대로 독촉하여 거두어들이고, 금년분 및 지난해의 환자를 일시에 징수하여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 자들에 대해서, 감사ㆍ대간(臺諫)들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축출시키는 벌을 가하도록 하여 사방의 백성들에게 성상의 실제의 혜택을 모두 입게 하여 근심과 원망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고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위급한 상황을 모면하게 하시면 하늘의 노여움을 그치게 할 수 있고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오늘날 환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년의 진구(賑救)의 계책을 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하는데, 신은 그렇지 않다고 여깁니다. 대체로 백성을 기르는 도리는 그들의 심정을 순하게 하여 소요스럽게 하지 않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환자의 일은 본시 왕자(王者)의 훌륭한 정치가 아니고 출납하는 데 있어 노고와 경비가 실로 큽니다. 지금 그들의 곡식을 가지고 내주었다가 바치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백성들이 편안하게 여기는 데에 따라 그들 스스로 계책을 하도록 하고 싫어하는 것을 시행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삼법사(三法司 형조(刑曹)ㆍ한성부(漢城府)ㆍ사헌부(司憲府)를 말함)의 금란(禁亂)하는 일은 본시 백성들의 지나친 사치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시적인 금령(禁令)이 백성들의 그른 마음을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이고, 금리(禁吏)들의 횡포만 더 심하여 백성들이 파산(破産)하고 법령에 죽는 자가 있기까지 하니 이것은 법의 폐단인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백성들을 박해하고 간악한 자들만 이롭게 하며 약탈하고 법을 빙자하여 죽일 수 있는 소지가 되기 때문에 백성들이 오래 전부터 이러한 것을 걱정스럽게 여겼습니다. 요즈음 듣건대, 법사(法司)의 금령이 너무도 까다롭고 금령의 횡포가 그지없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이로 인해 소요하고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며, 시장 거리의 사람들이 손발을 놀릴 수 없다는 탄식을 한다고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또한 유사들에게 분명히 당부하시어 융통성이 있게 처리하고 때에 따라 늦추기도 하고 조이기도 하며, 급하지 않은 금령은 우선 느슨하게 하여 까다로워 도성 백성들을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많은 백성들로 하여금 삶을 즐기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법사의 관리들에 대해서 적당히 녹봉을 지급하여 그들의 염치를 기르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남의 재물을 뜯어내어 스스로 생활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이러한 것이 또한 왕자(王者)가 관대하여 난(亂)을 지식(止息)시키는 한 가지 일이고, 또한 주(周)나라가 황정(荒政)에 형벌을 느슨하게 하고 금령을 해제했던 도리일 뿐더러, 도성의 백성이 원망하고 괴로워하며 동요하고 불안해 하는 것은 작은 염려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신은 듣건대, 잠자리에서 일찍 일어나는지 늦게 일어나는지를 보고 그 집의 성쇠(盛衰)를 점칠 수 있다고 하는데, 임금이 조회를 드물게 보고 자주 보는 것에 따라서 정치의 흥폐를 점칠 수 있는 것입니다. 선왕(先王)들은 새벽부터 덕을 빛나게 하고 앉아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며, 훌륭한 인재를 널리 구하여 자신을 보필하도록 하고, 아침부터 한낮이 되도록 식사할 겨를도 없이 하여 만민(萬民)을 모두 화평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옛 제왕(帝王)들이 천시(天時)를 두려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며, 마음을 보존하고 덕을 수양하며, 정치를 수행하는 데에 근본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시경(詩經)》의 계명장(鷄鳴章)ㆍ월출장(月出章)은 어진 임금, 어진 왕비가 밤낮으로 경계하여 서로 도왔던 것이고, 《시경》 정료장(庭燎章)에, ‘밤이 어떻게 되었는가 제후들의 깃발을 보겠네.’라고 한 것은 주 선왕(周宣王)이 불안해 하며 행실을 닦고 어진 선비들을 예우하여 난을 평정하고서 중흥했던 까닭이고, 연회와 여색을 즐기며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조회를 보되 한 달에 두세 번도 조회를 보지 아니하여 대신(大臣)들이 임금을 뵙기가 드물었던 것은 당(唐)나라 경종(敬宗)이 멋대로 즐기며 덕을 상실하여 국운을 전복시켰던 까닭입니다. 선왕(先王)의 제도에 날마다 조회를 보고 신하들을 대하여 만기(萬幾)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오히려 미진하다고 여겨 아침에 정사를 듣고 낮에 자문하고 저녁에 전형(典刑)을 살피고 밤에 백공(百工)들을 경계하여 유감이 없은 뒤에야 안심하면서도 오히려 음탕한 데에 빠질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조(國朝)의 제도는 실제로 옛 전례(典例)를 모방한 것으로서 상참(常參)ㆍ조강(朝講)ㆍ주강(晝講)ㆍ석강(夕講)ㆍ야대(夜對)가 있고 또한 무시로 소대(召對)하는 것이 있어 단지 날마다 조회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는 이 제도를 준행(遵行)하시어 그 덕을 높이 쌓아 신명(神明)의 경지에 이르셨고 태평 성세를 이루시어 후세 자손들의 법이 되게 하셨는데 성대하신 덕과 공렬이 근본한 데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하께서 즉위하시어 춘추(春秋)가 한창이시고 지기(志氣)가 강성한 때이시니, 의당 조종(祖宗)을 본받아 이 도리를 넓히셔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중간에 편찮으신 때가 계시어 아직도 이 예(禮)를 거행하지 못하고 있으니 신은 일찍부터 탄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안락한 시기에 또한 조종의 제도를 차츰 회복하여 날마다 한 번씩 조회에 임하시고 날마다 한 번씩 개강(開講)하시며 밤에 간혹 소대도 하시어 정사의 근본을 세우시고 조종의 행적을 이으시고 옛 제도를 따르셔야 하고, 항상 수 양제(隋煬帝)가 5일에 한 번 조회를 보고 당 고종(唐高宗)이 하루 건너 시사(視事)한 것으로써 경계를 삼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성상의 혈기(血氣)가 화평해지시어 질병이 날로 사라지고 총명이 날로 트이시며 학문이 날로 진보되시기를 기다린다면 옛날 선왕들이 대례(大禮)를 크게 행하고 종묘의 예절, 조정의 의식, 경수(耕蒐)의 제도, 정토(征討)의 일 등에 있어 성상께서도 충분히 모두 거행하시게 될 것입니다.
지금 상참(常參)을 폐지하였고 경연(經筵)까지도 정지하였으니, 이것은 정자(程子)가 이른바, ‘깊은 궁중에 거처하여 부녀자와 환관들을 대하는 날이 많고 조정에 앉아 사대부를 접하는 날이 적다.’고 한 것으로서, 비국(備局)의 신하를 한 달에 세 번 인견(引見)하고 근신(近臣)을 간혹 소대(召對)하는 것만으로는 문무(文武)의 공렬을 선양하고 큰 교화의 근본을 넓히지 못할 듯싶습니다. 더구나 지금 어려운 상황이 펼쳐지고 산천이 고갈된 이때에 군신 상하가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며 입술이 타고 얼굴이 수척해지며 밤낮으로 노력하더라도 제대로 극복할 수 없을까 염려되는 데이겠습니까. 그런데 옛 습관을 그대로 따르며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어 나랏일이 세월이 갈수록 그르쳐지고 있으니, 위욕(危辱)의 경지에서 벗어나고 난망(亂亡)의 전철(前轍)을 밟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또한 어려운 것입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이 점을 염려하시어 즐거운 놀이가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연안(宴安)이 짐독(鴆毒)이 되며 필사(拂士)의 간하는 말이 강한 보필이 되고 안일하지 않는 것이 지위를 오래 누리는 근본이 되며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 천명(天命)을 영원히 하는 계책인 것을 생각하소서. 따라서 매우 경동하시고 이전의 규례(規例)를 크게 고치시어 기필코 선왕(先王)의 일을 본받고 조종(祖宗)의 법을 따르시어 하늘의 노여움을 막고 국가의 명운을 이어지도록 하소서. 그리고 추운 때와 더운 때에 강연(講筵)을 정지하는 근래의 규례를 시행하지 마시어 대우(大禹)가 촌음(寸陰)을 아낀 뜻을 본받으소서. 이것이 신의 큰 소원입니다. 신은 임금을 사랑하는 근심이 깊고 충성을 바치려는 뜻이 간절하여 매번 사퇴할 때마다 지위에 벗어나는 말을 아뢰었으니 신 스스로도 비웃을 일인데 사람들은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구구한 충정(衷情)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니, 성명(聖明)께서 이 점에 대해 유념하시어 살피시고 보잘것없는 인물이라 여기시어 말까지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우부(愚夫)의 천려일득(千慮一得)이 성덕(聖德)에 만분의 일이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듯합니다. 신은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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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11권 / 소차(疏箚)
전번 상소의 내용을 거듭 아뢴 소[申前言疏] 11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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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우매한 소견을 아뢰어 전하의 들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는데, 성상께서 굽어살피시고서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상하게 여긴다고 하시고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겠다고 하셨으니, 신은 참으로 기쁘고 감격하여 머리를 들어 축원하고 기대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강도(江都)의 수축하는 일은 신이 불가하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양(晋陽)의 보장(保障)이 되는 곳이므로 먼저 백성들의 힘을 느긋하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환곡(還穀)의 일로 먼저 그들의 마음을 잃지 않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 명백하지 못하고 뜻이 통쾌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신이 그 일을 그만두게 하려는 것으로 여기시고 이러한 말씀의 전교를 내리셨으니 신은 황공스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강도는 바로 나라의 천부(天府)이므로 비어(備禦)의 계책을 미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에 신이 지난해에 이 일을 전하께 아뢰어 한번 순시(巡視)하도록 할 것을 청하기까지 하였고, 또한 지금의 성천 부사(成川府使) 허질(許秩)에게 이 일을 위임시켜 경리(經理)하기를 의논하도록 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체면되어 지위에서 떠나자 오늘날까지 지연되어 아직도 신의 애초의 계획대로 되지 못했으니 이것을 한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오늘날에 와서 그 일이 불가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성명(聖明)께서 환난을 염려하시는 마음에 신의 말을 잘 살피지 못하신 듯싶습니다.
대체로 강도(江都)는 토지가 넓지 않고 인민도 또한 적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저축이 모두 그곳에 쌓여 있으므로 백성들 모두가 환곡에 의지하여 살고 있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돈이 백성들의 수중에 들어가면 아무리 양민(良民)이더라도 함부로 사용하게 되는데 그 돈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반드시 매질을 하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풍년든 해에 많은 수확을 했더라도 백성들이 충당하여 상환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이처럼 흉년이 든 해이겠습니까. 먹을 양식 이외에는 여분이 없을 것인데 긁어모아 충당하여 상환하려면 의당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급히 독촉까지 하면 백성들이 어찌 원망하며 울부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바로 신이 그들에게 하는 독촉을 우선 늦추어 그들의 힘을 펴주게끔 하려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신은 이곳에 구축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에 아뢰어 성명께서 재량하시어 채택하시기를 대비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신은 삼가 듣건대, 이번에 병조(兵曹)가 순시(巡視)하고서 섬 주위 3백여 리에 49개 소의 돈대(墩臺)를 설치하여 둔수(屯守)하는 곳을 만들려고 한다는데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그러한 것입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신은 온당치 않다고 여깁니다. 3백여 리에 49개 소의 돈대를 설치하면 4백여 리가 될 것입니다. 구축하느라 인부들을 수고롭게 할 것이고, 둔수하느라 양곡을 소비시켜야 할 것이고, 방어하느라 병력을 분산시키게 될 것인데, 인부들이 수고로우면 원망이 일어나고, 양곡이 소비되면 저축이 고갈되고, 병력이 분산되면 세력이 약해질 것이니, 이러한 것은 모두가 병가(兵家)에서 기피하는 것으로서 좋은 계책이 아닌 것입니다.
신이 전에 이 섬의 형세를 대략 살펴보았습니다. 이 섬의 서북(西北)쪽에 있는 인화도(仁華島)는 바로 송도(松都)ㆍ황해도ㆍ평안도의 육로(陸路)ㆍ수로(水路)가 모이는 곳이고, 동북쪽에 있는 갑곶(甲串)은 바로 경도(京都) 이남에서 왕래하는 요충지이고, 동남쪽에 있는 금도(黔島)는 바로 경기도 동남, 호서(湖西)의 서남 지방의 수로ㆍ육로가 모이는 곳이고, 서남쪽의 장곶(長串)은 남쪽은 외양(外洋)으로 통하고 서쪽은 중국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서 적국(敵國)의 선척(船隻)이 침범해 올 경우 수비하기에 매우 편리한 요충지입니다. 그리고 섬의 동쪽 건너편 해안에 문수산(文殊山)이 바다와 육지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섬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곳으로서 전시에는 적군과 아군이 먼저 점거하려는 곳입니다. 이상의 다섯 곳에 3~5리의 성곽(城郭)을 설치하고서 2, 3천 명의 군사를 주둔시키고 포루(砲樓)ㆍ번락(藩落)ㆍ고교(庫窖)ㆍ시석(矢石) 등의 기구를 설치하도록 하고, 또한 교동(喬桐)의 병영을 풍덕(豐德)의 남쪽 해안으로 옮겨 송도(松都)ㆍ대흥군(大興郡)과 연결시키고 교동의 옛 장소에 수군(水軍)의 첨사(僉使)ㆍ만호(萬戶)를 두어 그 절제를 받도록 할 경우, 장성(長城)ㆍ천참(天塹)을 우리가 모두 차지하게 되어 적군이 우리를 넘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산지(散地)의 산이 막혀 있고 험조한 해안 지대에는 일일이 유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도성(都城) 안에는 훈국(訓局)ㆍ어영(御營)ㆍ수어(守禦)ㆍ총융(摠戎)ㆍ정초(精抄)의 놀고 먹는 군사가 있는데, 이 여러 국청(局廳)의 군사들을 사역시켜 몇 달간의 공사를 할 경우 인민을 괴롭히지 않고 재력도 소비시키지 않고서 공역(功役)을 완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러 국청의 군사가 교대로 수비하도록 하고, 해안의 공한지(空閒地)에 농사를 짓게 하며 주민 및 둔졸(屯卒)들에게 배당시켜 배와 수레를 많이 만들도록 하고서 평소에는 수레를 달리고 배를 띄워 전쟁하는 일과 고기잡는 일을 익히도록 하고 유사시에는 동쪽과 서쪽에서 일제히 일어나 합공ㆍ호응하는 형세를 보일 경우, 적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우리에게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이고 지역이 넓더라도 기필코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송조(宋朝)의 명신(名臣) 왕립신(汪立信)이 이른바, ‘내군(內郡)에 무엇 때문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킬 것이겠는가. 모두 강상(江上)으로 내보내어 배를 수리하고 싸움을 익히게 하여 평상시에는 왕래하며 순시(巡視)하고 유사시에는 동쪽과 서쪽에서 일제히 일어나게 해야 한다.’고 한 것처럼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강도(江都)를 수비하는 데의 큰 형세인 것입니다.
그리고 경도(京都)는 바로 근본이 되는 곳으로서 종묘사직과 백관(百官)이 있는 곳이고 부고(府庫)와 만백성이 있는 곳이며, 산하(山河)가 험고하고 성지(城池)가 웅장한 데다가 백이(百二)의 험난한 것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호(塹濠)와 성첩(城堞)이 무너진 지 백 년이 지났으나 보수하지 아니하여 꼴베고 나무하는 자들이 올라가고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 넘어다니기까지 하여 사람들이 견고한 뜻을 갖지 못하고 국가의 위용(威容)이 서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별히 유념하여 계획하고 때에 따라 보수하여 사변에 대처할 수 있게 하며, 서해(西海)에 잇달아 왕래하는 계획을 장대(壯大)히 하고 상산(常山)의 뱀의 형세가 되게 하고, 갑자기 변란이 발생했을 때 지난날처럼 버리고 떠나가서 3백 년 동안 축적해온 것과 수천만의 생령(生靈)이 하루아침에 적(賊)의 손에 박살되는 일이 없게 해야 하는데, 이것이 또한 국가의 영원한 계획을 도모하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이상에서 아뢴 것이 신이 평소에 지녔던 소견으로서 늘 전하께 아뢰려고 하였으나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국가에서 이 일을 거행하려고 하는 데 있어 소회를 아뢰지 않을 수 없고, 또한 생각건대 신이 전에 이 일을 건의했었으니 지금 묘당(廟堂)의 논의에 참여하여 들을 수 없지만 마음속으로 그 이해(利害)를 알고 있으면서 끝내 한 마디 말을 하지 않는다면 또한 전하를 위하여 계획을 말하고 환난을 염려하는 애초의 마음이 아니기에 이에 감히 이처럼 대략 아룁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이 올린 전후의 차자(箚子)를 묘당에 내리시어 그들로 하여금 익숙히 강론하고 분명히 처리하도록 하시어 우부(愚夫)의 말이라 하여 한 가지 좋은 계책까지 버리지는 말게 하시면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늙고 병든 몸을 다시 부르시어 조정을 욕되게 하고 자신의 뜻을 굽히도록 하려고 하시는데 이러한 것이 어찌 신의 뜻을 굽어 아시고 신의 말을 한 번 시행하시어 그 도리가 순조롭게 하는 것이 군신이 모두 영광스럽고 상하가 서로 이루어줌이 되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 점을 성상께서는 살피소서. 신은 두렵고 간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또 생각건대, 오늘날 의리를 주장하여 서쪽을 공략하는 것은 그야말로 인의(仁義)를 시행하고 지력(智力)을 행사하지 아니하는 천하 무적(天下無敵)의 도리로서 바로 왕자(王者)의 군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첩(城堞)을 수리하고 참호(塹濠)를 굴착하여 적(敵)을 방어하고 스스로 견고히 하는 계책을 하는 것은 이미 제이(第二)의 도리로서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 일도 또한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이것은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도리로서 생민(生民)의 화단과 사직(社稷)의 걱정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매한 신의 오늘의 말은 참으로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니, 성상께서는 재량하소서. 신은 또 황공하게 아룁니다.
소회를 아뢴 차자[陳所懷箚] 12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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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은 은명(恩命)의 다그침을 받아 가마에 실려 도성(都城)에 들어와서 병든 몸을 억지로 지탱하여 궁전의 뜰에 올라갔으나 갑자기 통증이 발생하여 전하께 대답을 올릴 때 숨이 가쁘고 몸이 떨리어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집에 돌아와서는 죽은 몸이 되어 자리에 누워 있으면서 며칠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고, 요즈음 소대(召對)에도 또한 달려가지 못했으니, 노쇠한 것이 이러하고 질병이 이러하여 벌써 조정의 버려진 인물이 된 것에 대해서, 신 스스로 가련하게 여깁니다. 의외에도 새로 제수하신 명을 이때에 내리셨는데 신이 그날에 숙배하지 못했으니, 이에 신은 참으로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신은 본시 무능하여 힘을 펼쳐 반열에 나갈 수 없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강교(江郊)에 물러와 있은 지가 지금 벌써 3년입니다. 오늘 온 것은 비단 성상의 은총과 예우에 감격했을 뿐만 아니라 전하의 모습을 한번 뵈옵고 신의 정세를 직접 아뢰고서 물러가 죽더라도 한(恨)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매우 노쇠하고 질병이 극심한 정상은 성상께서 목격하신 것인지라 신이 일일이 번독스럽게 아뢸 것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실상을 굽어살피시고 가엾게 여기시고서 신의 직명(職名)을 체면시키도록 하시어 죽기 이전에 편안한 마음으로 편리하게 지낼 수 있게 해주시면 실로 천지 부모의 은덕이겠습니다. 이에 신은 두려워하며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이 등대(登對)하던 날에 재해(災害)를 입은 토지의 조세(租稅)를 면제하고 환곡(還穀)을 거두어들이고 돈대(墩臺)를 구축하는 일들을 성상께서 물으셨기에 대략 언급하였습니다. 대체로 신의 생각에 금년의 한재(旱災)는 팔로(八路)가 동일한 것으로서 극심한 읍ㆍ면(邑面)이 아니더라도 납세(納稅)할 때에 정당히 급재(給災)해야 하고, 지금 마감(磨勘)이 끝났더라도 주ㆍ현(州縣)의 수령들로 하여금 연분 초책(年分草冊)을 다시 조사하여 잘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금년이 벌써 다 갔는데 환자[還上]의 독촉이 그치지 아니하여 유민(流民)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습니다. 남한(南漢)ㆍ강도(江都)의 환곡을 받은 백성들에 있어서는 군량을 충당시켜야 하므로 독촉이 더욱 엄하여 감분(減分)하지 않고 있는데 아무리 군량이 중하더라도 바칠 힘이 없는 백성들에게 독촉하여 군민(軍民)의 마음을 잃는 것은 옳은 계책이 아닌 것이니, 또한 이때에 독촉을 정지하여 내년 가을을 기다리게 해야 합니다. 지금 모두 받아들였더라도 몇 달이 안 가서 또다시 나누어 주어야 하는데, 이미 받아들였다가 도로 내주는 것이 차라리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그대로 주는 것만 하겠습니까. 더구나 내주고 받아들일 때 축나는 폐단이 없고 고함을 지르며 추구하고 매질을 하는 걱정이 없으면서 흉황(凶荒)을 구제하고 백성을 구휼하는 한 가지 일이 되는 데이겠습니까. 그리고 신은 듣건대, 환곡을 받은 백성들이 잡곡(雜穀)으로 대신 바치려는 자가 있는데 묘당(廟堂)의 분부가 없으므로 수령들이 시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이것은 융통성 있게 조처하는 데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백성들을 구제하는 데 있어 한 가지 규칙만을 고수해서도 안 되고 백성들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도(江都)의 돈대(墩臺)를 구축하는 일에 있어 이것은 국가의 영원한 이해(利害)가 달려 있는 것으로서, 일을 담당한 신하에게 분부하시어 널리 자문(諮問)하여 좋은 계책을 따르게 해야 합니다. 신이 전일에 올린 상소의 내용은 또한 익숙히 생각하고 오랫동안 강구한 것입니다. 설비를 많이 하여 세력이 분산되고 약해지게 하는 것이 편리한 요해지를 점검하여 세력이 온전하고 장대해져서 영원한 계책이 되고 또한 백성들의 힘을 소비시키지 않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이 일을 담당한 신하와 더불어 이 일을 토론하지 못했고, 지금 병이 이러하여 제신(諸臣)을 인대(引對)하시는 때에 입시(入侍)하지 못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이 논한 내용에 대해서 다시 묘당에 자문하시어 익숙히 강론하고 분명히 조처하여 올바른 도리에 맞게 해서 백성들의 원망을 받는 일이 없게 하시면 국가에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한정을 수색하는 일에 대해 논한 차자[論搜丁箚] 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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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룁니다. 신이 그끄저께 삼가 차자의 비답을 받들건대, “먼저 덕음(德音)을 선포하는 것은 형편상 곤란스러운 상황이 있을 듯하다.”고 하셨는데 신은 여러 번 생각해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5일 조보(朝報)에 기재된 성교(聖敎)를 삼가 읽어보건대, “호포(戶布)를 거두어들이면 물고(物故)ㆍ아약(兒弱)의 폐단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예 신역(身役)에 해당되지 않는 민호(民戶)에게서 베를 거두는 것은 그 폐단이 오히려 물고ㆍ아약에게서 베를 거두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이 있을 것이니 결코 시행할 수 없다. 변통하는 도리는 오직 한정(閑丁)을 수색하는 길을 널리 틔워 점차적으로 부족한 인원수를 충정(充定)하도록 하여 아약ㆍ물고의 징포(徵布)를 탕감하는 바탕이 되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셨는데, 신은 이에 대해 또한 멍청히 의심하고 우두커니 실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성상께서 지혜로운 자질을 가지신 데다가 백성을 사랑하는 덕을 지니셨고 폐단을 혁파하려는 마음을 갖고 계시니, 이러한 윤음(綸音)은 신하들이 성상께 고한 어떠한 말 중에 천총(天聰)을 혼란스럽게 할 만한 것이 있었는데도 성명께서 깨닫지 못하신 때문이 아니면, 좌우의 붓을 잡은 신하가 기록할 때에 전하께서 말씀하신 뜻의 소재를 아주 몰랐던 때문이고, 또한 승지(承旨)들이 왕명(王命)을 출납할 때 진실되게 하는 도리를 잃었던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째서이겠습니까. 오늘날 백성들에게 아약(兒弱)ㆍ물고(物故)의 징포(徵布)가 있게 된 것은 한정(閑丁)을 찾아내어 쉽게 충정(充定)시킬 수 없기 때문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한정을 찾아내어 충정시키기가 어렵지 않다면 상사(上司)가 아무리 탐학(貪虐)하고 수령이 아무리 형편없더라도 그 누가 백골이 된 죽은 사람에게 조세를 거두고 포대기에 싸여 있는 어린아이에게 부역을 시켜 사람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조정의 부역(賦役)의 법이 균평하지 못하여 행민(倖民)이 많고 역호(役戶)에게만 부역이 무겁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부역을 균평하게 하여 역호들만이 고통을 받는 폐단을 제거하려고 하지 않고 양민(良民)들까지 그 속으로 몰아넣어 그들로 하여금 그 고초를 대신 받게 하려고 하니, 이것은 성상께서 내리신 유지(諭旨)에 이른바, ‘아예 부역에 해당되지 않는 민호(民戶)에 베를 거두는 것은 그 원망이 오히려 더 심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은 논자(論者)의 말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한정을 수색하는 길을 크게 틔워 부족한 인원수를 충정시키려고 한다면, 필시 여러 군(郡)의 정원수 이외의 교생(校生)과 한미(寒微)한 사족(士族), 양반(兩班)의 얼속(孽屬) 및 각 아문(衙門)의 군관(軍官)ㆍ업무(業武) 등을 색출하여 여러 읍(邑)의 군역(軍役)으로 강등하여 충정시키고서 신포(身布)를 내도록 해야 할 뿐이고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서 온 나라에서 공통으로 각기 힘을 내어 관아를 돕고 아약ㆍ물고의 고통을 구제하게 할 경우 그다지 원망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들을 군역으로 강등하여 충정시키고 신포를 똑같이 내게 할 경우 저들이 어찌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위에서 시행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백성들에게 호부(戶賦)를 시행할 수 없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 신은 실로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한정을 색출하는 것이 1, 2년 사이에 끝나는 일이 아니고 1, 2년 이후에도 아약ㆍ백골의 폐단이 지난날과 같을 것인데 담당자가 일일이 색출하여 일일이 충정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정을 색출하기 이전에는 아약ㆍ물고자의 고통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니, 그렇다면 이전 원망이 제거되지 않았는데 새로운 원망이 또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약ㆍ물고자의 징포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사람의 피부를 벗겨내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들의 원망과 고통이 상제(上帝)의 노여움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고, 한정을 수색하는 데 있어 침해하고 소동을 피우게 되어 또한 많은 사람의 원망을 사게 될 것이니,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국가가 현재 불행한 시운(時運)을 만나 하늘이 매우 노여워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시 이러한 원망을 감당하고 이 일을 치를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아약ㆍ물고의 징포에 대해서 성상께서 이미 측은하게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셨다면 의당 즉시 제거시켜 백성을 어린아이를 보호하듯이 하고 상할 듯이 여기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한정을 색출하여 점차적으로 충정시킨다고만 하신다면, 이것은 요즈음 부역을 견감시키는 일에 있어 한 통의 전교만 내리시면 결정지을 수 있는 것인데도 마냥 지체하시고 점점 소홀히 여기시어 끝내 결말을 지을 기일이 없는 것과 같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진 것을 보고도 고의로 발걸음을 늦추고 사람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의 묶인 것을 빨리 풀려고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서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셨다고 하더라도 신은 믿을 수 없고, 이것이 신이 실심하여 필시 성명(聖明)의 본의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던 까닭입니다. 전하께서 애당초 이 일을 모르셨다면 그만이지만 이미 이 일을 아시어 윤음(綸音)을 선포하였고 경사(卿士)들이 회의(會議)하였는데도 시행하는 것이 이러한 것뿐이라면, 온 나라 백성들이 전하의 마음이 백성들에게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어 크게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성상께서 총명하시고 인애하시어 옛 성왕(聖王)의 자질을 지니셨고 폐단을 구제하고 시대를 걱정하시는 측은한 마음을 가지셨는데도 신하들이 보도(輔導)하고 받들어 사방에 선포하도록 한 것이 이러한 데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천하에 알려지게 할 수 없는 것으로 가생(賈生)이 이때에 태어났더라면 신은 그가 이 일에 대해서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릴 만한 것이라고 말했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윤음이 선포되면 온 나라 백성들이 놀라게 되고 은덕이 시행되지 못하여 원망이 더욱 일어날 것이기에 신은 슬픕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 급히 이 윤음을 도로 거두시어 사방에 선포하지 말도록 하시고, 다시 훌륭한 계모로 국운을 안정시키고 원대한 계획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도리를 생각하소서. 그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특별히 폐단을 혁파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도리를 강구하여 우리 성상께서 인정(仁政)을 베푸시는 지극한 뜻에 부응하고 국가가 백성들을 화합하고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는 근본이 되게 하시면 신은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소회를 아뢴 소[陳所懷疏] 3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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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병석에 누워 휴가를 청하고 있는 중에 변무사(辨誣使)가 떠날 날짜가 다가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신은 이 일에 있어 울분의 심정을 견딜 수 없기에 말이 번거롭다고 하여도 끝내 반복해서 아뢰는 정성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국가의 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명분을 헤아리고 이해를 참작해야 하는 것인데, 신은 이 거조가 어떠한 명분에서 나온 것이고 일에 어떠한 이익이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지금 하늘이 오랑캐의 추악한 덕을 싫어하는지라 해내(海內)가 시끄럽고 어지러워 저들에게 실로 위급한 사태가 아침저녁으로 있는 것이니, 이러한 것은 지난번 북관(北關)에서 올린 장계(狀啓)와 이번 사행(使行)의 선래관(先來官)의 보고에서도 또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취해야 할 도리는 의당 우리의 정형(政刑)을 밝히고 우리의 무기를 수리하여 기어이 흉악한 오랑캐를 제거하여 풀지 못했던 울분을 털어버리고 조종(祖宗)의 치욕을 깨끗이 씻고서 천하에 자립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망하려고 하는 오랑캐에게 구구히 애걸하여 억울한 것을 밝히고 치욕을 씻으려는 계모를 하고 있으니, 신은 오늘날의 집사(執事)들에 대해서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러한 것은 비단 우리 군신 상하로 하여금 천하 사람들의 앞에 자립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늘에 계신 우리 선왕(先王)들의 혼령이 만세 이후까지 치욕을 받으실까 염려됩니다.
오랑캐는 금수(禽獸)와 같은 것인지라 그들에게 좋은 말을 듣더라도 기뻐할 것이 못되고 악한 말을 듣더라도 노여워할 것이 없습니다. 더구나 이번의 일은 명분을 정하고 포폄(褒貶)을 바로하고 시비를 밝히는 것으로서 《춘추(春秋)》의 필법(筆法)을 이어 진실을 후대에 전하는 것인데, 어찌 저들에게 바랄 것이 있겠습니까. 단지 우리가 사록(史錄)을 편수(編修)할 때를 당하여 한 마디 말로 그 사실을 밝혀 천하 사람들에게 고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미 말했는데 저들이 들어주지 않고 있으니 또한 그만두어야 하는데 어찌 다시 보낼 수 있겠습니까. 가령 저들이 우리의 말을 쾌히 들어주어 우리에게 개정(改正)할 것을 허락한다고 하더라도 신은 실로 천하 후세 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오랑캐와 친분을 맺고 뇌물을 바치고서 사실을 변경시켜 소망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니, 신임하지 않을 뿐더러 또다시 치욕을 초래하고, 유익함이 없을 뿐더러 또한 해가 될 듯싶습니다. 신의 전번 상소에 이른바, ‘비단을 빠는 데 있어 기름으로 빨고 뱀을 그리는 데 있어 발을 덧붙였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러한 것을 염려한 것이고, 지난번 연석(筵席)에서도 거듭 아뢰었으니 성명께서 필시 기억하고 계실 것이라 여깁니다. 그런데 이익이 없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우리의 사신들을 수고롭게 하고 우리의 사명(辭命)을 욕되게 하며,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내고 나라의 패물ㆍ비단을 바닥내어 굶주린 호랑이의 입을 막으려고 하는데, 신은 이것이 어떠한 묘당(廟堂)의 계책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상께서 살피시지 않으시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신이 오늘날 성상께 기원하는 것은 위로 천심(天心)이 더욱 노여워하는 것을 살피시고 아래로 민심이 변동하는 것을 살피시어, 속히 이익이 없는 거조를 정지하고 깊이 이용할 만한 기회를 생각하시어 큰 뜻을 분발하시고 신하들을 권면하고 정직한 말을 받아들이시어 지사(志士)들의 기개를 넓히시며, 백성을 회합시키는 일을 힘쓰시어 그들의 질고(疾苦)를 제거하여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과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리고 의리를 부지하는 계모를 넓히시고 아울러 뜻하지 않은 변란을 미리 대비하도록 하시어 변방의 군량을 비축하고 성곽을 수선하고 선봉(選鋒 정예(精銳)로운 군사와 부비(浮費))을 설치하는 일에 대해서 반드시 유의하여 급히 강구하도록 하시어 수국왕(收國王)ㆍ관선생(關先生)의 무리들로 하여금 의외에 갑자기 침범하여 백성들의 화단(禍端)이 되고 사직(社稷)의 걱정이 되는 일이 없게 하셔야 합니다. 부지런히 시행하시는 데 있어 시간을 다투시고 급급하게 여기시어 날이 부족한 듯이 하시며, 전례만을 따르는 것을 경계하시고 견제하는 것을 단절하시며,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시거나 안일한 태도를 지니지 마시고 자신을 극복하고 정신을 가다듬으시어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고 백성을 보전하고 나라를 튼튼히 하는 계획을 세우신다면 신에게는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소회를 아뢴 차자[陳所懷箚] 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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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아뢰건대, 신이 강교(江郊)에 병으로 누워 있느라 시사(時事)에 대해서 들어 알 수 없을 뿐더러 또한 간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항(閭巷)의 말을 듣건대, 요즈음 인심이 불안하여 길거리에 떠도는 소문이 전해지는 곳마다 그지없이 흉흉(訩訩)하다고 하는데, 이것은 호패(號牌)를 시행하려고 하고 만과 출신(萬科出身)들을 경사(京司) 및 외대(外臺 도사(都事)의 별칭)가 곧바로 수금(囚禁)하고 형추(刑推)하라는 명을 내리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신은 삼가 생각건대, 호패법은 실로 백성의 숫자를 모두 파악하고 귀천(貴賤)의 신분을 구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의 조항이 너무도 세밀하여 도망한 백성들이 용납될 수 없고 천한 자들이 신분을 감출 수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백성들이 매우 불편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께서 민심과 물정(物情)이 편리하게 여기는 것을 깊이 생각하시어 지패(紙牌)의 제도를 창출하셨는데 미처 시행하시지 못했습니다. 이에 신이 전일에 시행할 것을 강력히 주청하여 이미 파했다가 다시 거행하여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국가의 일이 대략 두서(頭緖)가 있고 민심이 매우 놀라지 않게 된 것인데, 지금 의논하는 자들은 기필코 호패법을 시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신은 장로(長老)들의 말을 듣건대, “호패법은 광해조(光海朝) 때에 사대부(士大夫)에게 시행했다가 수개월이 못 되어 파하였고,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병인(1626, 인조4)ㆍ정묘년에 또 상하(上下)에게 모두 시행하였다. 그런데 정묘년에 북쪽의 금(金)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안주(安州)까지 쳐들어오자, 감사(監司) 윤훤(尹暄)이 성(城)을 지키려는 계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군사들이 호패를 풀어 성 위에 쌓아놓고 떠들기를, ‘호패가 적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군사가 크게 궤멸하였고 윤훤은 달아나서 서로(西路)가 패하여 나라가 지탱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조정에서 민심이 이러한 것을 알고서 적이 물러가자 즉시 그 법을 파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지난날의 일이 사람들의 이목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지패법을 시행한 지가 벌써 4년이 지났는데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을 뿐더러 도망하는 자가 점점 줄어지고 부역이 점점 공평해지며, 전에 처음 보는 일에 대해 의아하게 여기던 자들이 법령이 편리하다고 와서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백성의 숫자를 이것으로 인하여 파악할 수 있고 부역을 이것으로 인하여 균등하게 할 수 있으며, 병거(兵車)를 이것으로 인하여 낼 수 있고 농상(農桑)을 이것으로 인하여 부과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급선무는 단지 경윤(京尹)ㆍ도신(道臣)들에게 거듭 분부하시어 이유사(里有司) 및 도윤(都尹)ㆍ부윤(副尹)들로 하여금 날마다 그들의 신부(身符 지패를 말함)가 있고 없는 것을 조사하고 떠돌면서 관아에 보고하지 않은 자들을 엄중히 금지하도록 해야 하며, 점차적으로 부유하게 하고 가르치는 교화를 시행하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호패에 기록하여 세상의 서얼(庶孽)ㆍ천례(賤隷)들의 신분을 사람들에게 낱낱이 드러내 보여 마치 여러 사람 앞에 발가벗은 몸을 보이듯이 하려고 할 경우, 이것은 인정(人情)이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라, 길들지 않은 망아지에게 멍에를 씌우고 달아나는 송아지에게 수레를 메우면 반드시 날뛰고 발길질하고 물어뜯어 결렬시키고서야 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수레를 부수고 짐을 쓰러뜨리지 않는 것이 거의 드물 것입니다. 백성들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신명(神明)과 같고 약한 듯하지만 이길 수 없으며, 평상시에는 쉽게 제압할 수 있으나 사변을 당했을 때에는 용과 뱀을 길들일 수 없는 것과 같고 범과 표범을 가까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라, 이러한 것을 신은 두렵게 여기는데 정묘년(1627, 인조5)의 지난 일이 전감(前鑑)이 될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집사(執事)들은 하필이면 선대왕(先大王)의 유명(遺命)을 어기고 이미 전해진 법을 무너뜨리고 백성들의 원망과 증오를 사는 일을 하여 패망한 전철(前轍)을 답습하려 한단 말입니까.
만과 출신(萬科出身)의 일에 있어서는 신은 더욱 옳지 않다고 여깁니다. 애당초 만과를 설행한 것은 성상께서 나라의 유사(遊士)ㆍ건아(健兒)들을 수용하여 그들의 목숨을 바치는 힘을 얻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국내의 무술을 익힌 사람, 학문을 연마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소매를 걷어올리고 옷자락을 떨치며 바람처럼 일어나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활쏘는 장소에 달려갔던 것은 어쩌면 전하께서 훌륭한 일을 하시려는 뜻을 가지신 것에 감동하고 오랫동안 울분이 쌓인 끝에 한번 해볼 것을 생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얼마쯤 지나서 일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여 이들의 정수(征戍)를 파하고 속포(粟布)를 바치게 하자, 백성들이 파산(破産)하는 데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며 응하는 데 있어 마치 부호(富豪)들이 부채를 독촉하고 빚진 것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고 있으니, 실로 온 나라에 큰 신의를 잃은 것이고 만부(萬夫)의 원망을 초래한 것입니다.
지금 한두 사람이 소란을 피우고 행패를 부린다고 해서 합격한 출신들을 욕보이기를 상인(常人)ㆍ천례(賤隷)를 다스리는 것처럼 하여 계문(啓聞)을 기다리지 않고 유사(有司)들에게 형장을 받게 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아, 누가 전하를 위하여 이러한 계책을 만들어낸 것입니까? 국가에서 과거를 설치하여 취재(取才)하는 것은 실로 그의 명성을 높이고 그의 몸을 현달케 하여 그 사람을 쓰려고 하는 것이고, 사람들이 임금에게 예물을 바치고 신하가 되는 데 있어서도 또한 임금의 은총을 받들고 나라의 체모를 같이하여 임금의 일에 목숨을 바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 사람의 무뢰한(無賴漢)이 욕하며 싸운 일에 대해서는 의당 국법에 의해 그 사람을 다스려 그 폐단을 막는 것이 괜찮은 것입니다. 그런데 형벌이 만인(萬人)에게 미치게 하여 국가의 체모를 추락시키고 적수(敵讎)를 초래하게 되는데도 걱정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은의(恩義)를 끊어버리고 백성들의 애초의 기대에 어긋나는데도 고려하지 않고 있으니, 신은 이것이 어떠한 논설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이들로 하여금 성상의 뜻에 따라 연운(燕雲)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고 이오(伊吾)의 북쪽에서 칼을 울리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전하께서 내려주신 고신(告身)을 지니고 있으면서 천례와 똑같이 유사들의 손에 심한 매를 맞게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들에게 죄가 있더라도 어찌 억울한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또 그들의 죄가 애석하게 여길 만한 것이 못 되더라도 어찌 국가의 체모에 손상이 있지 않겠습니까. 원위(元魏) 때에 장중우(張仲㙖)는 봉사(封事)를 올려 무인(武人)을 배척하고 억제하여 청선(淸選)에 참여할 수 없게 하였는데 시끄러운 비방이 길거리에 가득하여 자신이 죽임을 당하여 나라가 그 화를 받았고, 고려(高麗) 때 정중부(鄭仲夫) 등은 문사(文士) 임종식(林宗植)ㆍ한뢰(韓賴) 등이 무사(武士)를 오만하게 대하는 것을 기회로 삼아 끝내 큰 환난을 일으켜 종사(宗社)가 멸망하게 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을 신은 전하께 아뢰고 싶지 않으나 또한 전하를 위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가뭄이 심하여 바닥이 갈라진 상태이므로 백성들이 급급하게 여기고 있으며, 난폭한 객사(客使)가 잇달아 오고 있으므로 국고의 재물이 바닥난 것에 있어서겠습니까. 게다가 지진이 발생하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며 금성(金星)이 빛을 발휘하여 하늘의 노여움이 두려워할 만한데, 조정이 이때에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환난을 미리 대비하는 계책을 세워 백성을 보전하고 기회를 노릴 수 있는 방도를 힘쓰지 않고서, 또다시 민심을 거슬려 원망과 분노를 초래하는 일을 하여 하늘의 노여움을 증가시키고 있으니, 실로 화변의 종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일이란 미세한 데서 발생하여 그지없는 화변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더구나 이 두 가지 일은 작은 일이 아닌 데이겠습니까. 우매한 신은 바라건대, 전하께서 속히 큰 호령을 내리시어 즉시 호패의 명령을 파하시고 또한 만과 출신들을 추조(秋曹 형조의 별칭)ㆍ외대(外臺)가 제멋대로 수금 형추(囚禁刑推)하는 명을 중지하소서. 그리고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지난해에 의논한 아약(兒弱)ㆍ물고(物故)ㆍ도망(逃亡)한 자의 신포(身布)를 면제하는 일과 부역(賦役)을 균평하게 하는 제도를 속히 강론하게 하시어 백성들의 고난을 풀어주고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하며, 하늘에 호응하여 재앙을 막는 근본을 삼게 하신다면 신은 이보다 더 큰 소원이 없겠습니다.
옛사람의 말에, “임금은 백성들을 적자(赤子)처럼 여기고 용사(龍蛇)와 같이 여긴다.”고 하였는데, 적자는 사랑할 만한 것이고 용사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니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 임금의 도리인 것입니다. 이리하여, ‘백성들은 친근히 할지언정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또 ‘감동시키는 것은 쉬우나 편안케 하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이러한 것을 늘 생각하시어 백성들이 하찮더라도 깔보지 마시고 일이 미세하더라도 소홀히 여기지 마시며, 두려워하는 마음을 잊지 마시어 국가의 위대한 기업을 튼튼히 하소서. 신이 이 일에 대해서 여러 번 아뢰었으나 전하께서 살피지 않으셨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신의 몸이 이미 물러났으니 말을 하지 않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인자하시고 영명하신 전하께서 이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신하들이 이 일을 가지고 전석(前席)에서 반복해 아뢰는 자가 없었던 것이고 전하께서 유념할 줄 모르시는 것은 아닌 듯싶습니다. 이에 신은 끝내 모른 체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패법을 시행하고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일은 신이 전에 건의한 것인데 일이 잘못된 것이 이러한 상황에 이르렀는데도 신이 말하지 않을 경우 신에게 실제로 폐단을 일으킨 죄가 있게 되어 크게 우리 성상을 저버리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 신의 말에 대해 유념하시고 쓸모없는 몸이 물러가기를 청한 것을 윤허하시어, 관직을 오래 비워 사람들의 원망을 초래하는 일이 없게 하시면 실로 국가와 개인에 있어 매우 다행한 일이겠습니다. 신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공의 휘(諱)는 휴(䥴)이고, 자(字)는 희중(希仲)이며, 호(號)는 백호(白湖)이고, 남원 윤씨(南原尹氏)이다.
1659년 제1차 예송 논쟁에서는 허목, 윤선도 등과 함께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으로 봐야 된다며 3년설을 주장, 서인과 갈등하였다.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 서인 정권의 전복을 꾀하자 송시열과 원수가 되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1674년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논객으로 인선왕후가 맏며느리의 예로써 1년복 설을 주장, 2차 예송에서 남인이 승리하면서 요직에 발탁, 사헌부 대사헌, 이조판서, 우참찬 등을 지냈다. 이때 호포법의 실시, 전제의 개혁 등을 꾀했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사헌부 대사헌으로 재직 중에는 청나라를 정벌할 것을 주장했으며, 1679년 의정부우찬성에 이르렀다. 1675년(숙종 1년) 홍수의 변 때 숙종에게 “대비를 조관하라”고 충고하여 임금의 미움을 샀다. 이 일로 평소 숙종의 눈 밖에 났던 관계로 1680년(숙종 6년) 허견의 옥사와 무관했으나 함께 엮여서 그해 5월 갑산에 유배가던 중 사사됨.
1636년 병자호란이 터지자 다시 외가가 있던 보은군의 삼산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국가의 치욕에 한을 느껴 관직을 단념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공주 유천으로 들어가 학문에 전념하기도 했으나, 주로 여주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때 그는 송시열과 두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복수설치를 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부터 10여 년간 그는 오로지 학문에만 열중하여 유교의 경전인 중용, 대학, 효경 등에 독자적인 해석을 가할 수 있게 되었고 장구(章句)와 주(註)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였다. 그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49년 효종 즉위 초부터 그는 이기설을 저술하여 조선 유교의 정통인 이퇴계(李退溪)·이율곡(李栗谷)의 이기설(理氣說)을 모두 반대하였다.
20대 초반에 '사단칠정인심도심설 四端七情人心道心說'을 지어 이기심성(理氣心性)의 문제에 대해 이황와 이이의 견해를 비판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형성하였다.
중용장구보록, 중용대학후설 등에서 주희와 다른 해석을 하여 송시열과 논쟁을 벌이는 등 학문에 뛰어났다. 그는 관직에 여러번 천거되었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양하고 저술 활동과 강연에 전념했다.
재학(才學)과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관직에 발탁되었다.
그는 주자만이 답을 아느냐며, 주자의 학설에 추종하여 이를 묵수하려는 태도를 배격하고, 《대학》,《중용》,《효경》 등의 경전을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구절과 해석을 수정, 주자와 대등한 입장에서 유학의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는 데 과감했다. 이는 당시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성리학을 심하게 비판하자 그와 친분이 있었던 민정중, 김수항 등이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송시열은 그가 잘못된 사상을 가졌다며 여러 번 만나거나 서신으로 설득하였다. 송준길과 윤선거 역시 여러번 찾아가고 서신을 보내 그를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송준길은 그의 집 출입을 끊었고, 윤선거는 절교를 선언한다.
그는 북인계열로 서인이나 남인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는 않았다. 본래 당색에 구애됨이 적었으나, 예송을 통하여 서인측과 틈이 생겨 출사 뒤에는 남인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기해예송 때 포의(布衣)로서 송시열의 주장의 오류를 가장 먼저 지적하였으며, 후일 1674년 갑인예송 때에도 같은 기준에서 서인측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였다.[6] 남인으로서 그는 허적(許積), 권대운 등을 중심으로 한 탁남(濁南)과는 입장을 달리하여 허목(許穆)과 함께 청남(淸南) 일파를 형성하게 된다.
그가 주자의 사상을 맹목적으로 존경하지 않고, 심지어는 공자나 맹자의 사서육경에도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보이자 이는 서인은 물론 일부 남인들에게도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1674년(현종 15) 7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윤휴는 현종에게 '이 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인 대의소(大義疏)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곧 사망했고 그의 상소는 묻혀졌다.
그 뒤 현종이 갑자기 죽자 송시열이 현종의 묘지명을 쓰는 것을 두고 사양하다가 서인들이 숙종의 진노를 유발하여 숙청되자, 윤휴는 성균관사업에 제수되어 조정의 요직에 복귀한다. 한편 이 무렵을 전후해서 그가 복창군과 친밀하게 지낸다는 헛소문이 암암리에 퍼져서 만난적이 없음을 해명하느라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북벌 상소와 개혁안 제시[편집]
1674년(숙종 즉위) 12월 1일 상소를 올려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일을 언급하며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상소로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밀봉 북벌 상소는 화제가 되었고, 12월 2일 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과 예조판서 권대운 등을 불러 그의 상소를 놓고 의견을 물었으나 부정적으로 봤다. 숙종은 허적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이에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며 숙종의 말에 찬동했고,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하다"며 비판하였다. 이후 여러 번 밀소(密疏)를 올려 호포법(戶布法)․상평제(常平制)의 실시를 주장하여 전정(田政)의 개혁을 도모하였고, 북벌을 위해 군권(軍權)을 통합한 도체찰사부의 설치와 전차의 제조를 주장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1675년 1월 2일 숙종이 그를 경연관에 임명하자 처음에는 고사하였으나 계속 출사하라 권고하여 다시 경연장에 출사하게 되었다. 1월 성균관사업(司業)이 되었다. 이때 예송 논쟁으로 유벌을 받은 윤선도(尹善道)와 그밖에 유직(柳稷) 및 홍유부(洪有阜) 등의 유벌(儒罰)을 풀어달라고 청하여 관철시켰으며, 그해 2월 홍우원의 복직을 청하여 성사시켰다. 그해 2월초 승지가 되었다. 2월 다시 승정원우부승지로 개차되었다. 그해 왕에게 건의를 올려 백성들에게 뽕을 심고 수리를 일으키게 할 것을 주청하였다. 또한 그는 강력한 왕권을 위해 간관 제도를 폐지하고, 특정 문벌에 의해 독식되다 시피하는 과거제도의 폐지, 그리고 비상설기구인 비변사를 원래의 목적대로 되돌리거나 아니면 비변사를 혁파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또한 그는 주례(周禮)를 참고로 하여 〈공고직장도설 公孤職掌圖說〉을 숙종에게 올려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숙종 초에 남인이 득세하자 사헌부대사헌·이조판서·의정부좌찬성의 요직을 역임했다.
윤휴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국초의 오위제(五衛制)를 회복하고 오위도총부를 강화하며 양반에게도 병역을 부과하고 호포를 거둬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양반 역시 임금의 보살핌을 받는 국가의 백성임을 강조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자고 역설하였다. 또한 무사양성과 병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인과(萬人科)를 설치하고 북벌을 위한 정예부대로서 체부(體府)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북벌 지휘부를 구성할 것과 병거(兵車)를 제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서얼 허통론을 실시하여 인재 확보의 폭을 넓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또 당시 중국 대륙의 상황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까지 명나라에 충성하고 청나라를 거부하는 중국의 대의 지사들이 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게 위협적인 오삼계(吳三桂) 세력과 대만 정금(鄭錦)의 세력, 그리고 몽골 지역의 제 부족들의 존재를 주장하고, 이들의 세력이 각각 확장되어 청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정금과 교통하여 청나라를 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윤휴에게 비판적이었던 송시열 조차 그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같은 남인계 허적, 권대운 비롯한 중신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한편 1679년(숙종 5년) 오삼계의 죽음 이후 그의 이러한 북벌 주장은 완전히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이어 그는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의 개정을 건의하고, 통의 주민이 야반도주했을 때 통장과 다른 통의 백성들, 친척들에게 연좌제를 적용해 도망친 농민, 상인의 몫까지 부과하는 폐단을 없앨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양반에게도 병역을 부과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신분에 따라 구별하던 호패 제도를 모두 종이로 만든 지패로 바꿀 것을 건의하였다. 양반에게는 상아를 일반 선비에게는 녹각을, 평민과 노비에게는 나무 호패를 패용하게 하는 것은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며 다같은 임금의 백성이므로 종이로 된 호패를 사용하게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건의에 같은 남인에서 조차 사대부를 모독하는 처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당시 양반 사대부는 상아 호패, 평핀은 뿔 호패, 노비는 나무 호패를 찼는데, 이러한 호패 구분이 신분간에 위화감을 조장한다는 것이며, 이 위화감을 없애는 것이 전투에 유리하다는 견해를 폈다. 그리고 종이 호패를 소지하고 다니면서 포졸들의 검사가 있을 때만 종이 호패를 보여주는 식으로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1627년 병자호란 당시에 있었던 일을 근거로 들기도 했다. '병자호란 당시 평양성에는 평안감사 윤훤이 6000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인근 수령들이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 집결하면서 병력은 총[11] 8000명에 달했다.[12] 그러나 이들은 정예병이 아니라 민가에서 강제로 징발된 오합지졸들이었다.[12]
이때 사령관 윤훤이 성을 지키는 계책을 내놓았다. 그런데 하루는 군사들이 호패를 풀어서 성(城) 위에 쌓아 두고서 떠들썩하게, "호패가 적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데 우리들이 어찌 싸우겠느냐?"라고 말했고, 드디어 군사가 궤멸하기[13]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패를 새로 지패로 만들면 비용도 들고 시간이 든다는 점과 양반과 상민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사라진다는 이유를 들어 같은 남인의 허적, 권대운 조차 반대하였다. 허목 역시도 지패법을 반대하였고 결국 지패법은 무산되고 만다.
제도 개혁과 군제 정비[편집]
병거(兵車)의 정비를 청하여 신기전을 다시 제조하고, 전차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할 것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정예 병력 양성을 위해 그는 군사 제도의 개편을 주장하였다. 그는 무과인 만과(萬科)를 시행하여, 양반 상민 노비 신분에 가릴 것 없이 무예와 담력에 능한 자를 정병으로 선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기존의 무과 이외에 새로운 무과가 필요하냐는 반론과, 만과 합격자 중에 노비와 평민, 상민들도 존재하자 이들의 부하가 되기 싫어하는 신임 무과 합격자들 및 병사들의 반발로 실패한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미 조정 중신들의 비밀 회의기관으로 전락, 유명무실화된 비변사를 폐지하고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여 조정의 관료가 도체찰사부의 체찰사와 부체찰사를 겸하여 군권을 쥐고 상시 전시체제로 운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문란한 군정을 바로잡기 위해 백골징포와 황구첨정 등 사망자 몫의 군포와 10세 미만의 어린아이와 젖먹이 남자 아이의 몫으로 군포를 거두는 것의 부당함을 건의하여 금지시켰다. 그는 양반도 임금의 백성이므로 그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해야 한다며 양반에게도 병역을 부과할 것과 병역에 징집이 불가하다면 병역 대신 호포를 거둘 것을 건의하였다. 양반 사대부와 중인들에게 병역을 부과하면 군포 수를 채우기 위해 억지로 백골징포나 황구첨정과 같은 무리한 폐단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이어 상평창(常平倉)·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윤휴는 두 글에서 온통 청나라 정벌의 대의명분과 당위성을 말하고, 조선의 군비가 잘 정돈되었으며 만약 북벌을 단행하면 중국 내지의 여러 세력이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새로운 무기인 무강차(武剛車)를 만들어 만주 벌판을 달려야 한다는 정도가 더 보태졌을 뿐이다.
우리나라는 평지가 적어 두 바퀴로 굴리는 것이 불편하다고 하자 윤휴는 외바퀴를 달면 험난한 길도 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에도 숙종에게 절도 하지 말고 교외로 나가 영접도 하지 말라고 우겼다. 허적(許積)이 난색을 표명하며 관례대로 하지 않으면 저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고 말하자 윤휴는 호언장담하였다.
“ 만일 저들이 의심을 내서 군사를 움직이면 정말로 좋은 기회를 얻는 셈이오. 우리나라에는 십만의 정병이 있고 황해도, 평안도에서 군량미를 공급할 수 있으니 열흘이 못 돼 심양을 차지하고 심양이 거덜나면 중국 내륙이 진동하여 일이 성공하지 않을 염려가 없소”
그러나 그의 주장에 같은 남인의 청남이던 허목 등은 불가능하다며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의 잔여세력이 여기저기서 난을 일으켜 오삼계(吳三桂) 등이 이들을 소탕하느라 다소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청나라의 번왕(蕃王)인 오삼계 역시 1673년 양자강 주변의 남쪽 지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몇년 간 변경이 떠들썩했다.윤휴는 조정에 몸담고 있던 3년 동안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야의 선비들 중에서도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허목, 허적 등 원로들은 애써 이를 막았다.
1674년부터 허적과 윤휴 중심으로 북벌론이 계획되었다. 김석주 역시 북벌론 재개에 지지 의사를 표했고 곧 체부(도체찰사부) 부활과 만과 설치, 병력 선발 등의 안이 건의되었다. 송시열은 유배소에 있으면서도 이 점에는 깊이 공감하고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보낸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인 전차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이었다.
한편 1676년에 연중(筵中)에서 대사헌 윤휴(尹鑴)가 북벌의(北伐議)를 주장하니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군사를 출전시킬 시기는 이미 정하여졌으나 군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고 말하니 당시 이조참판인 심재(沈梓)가 나가서 말하기를 복수하여 설욕하는 대의는 진실로 좋으나 작은 나라로서 위험한 때에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그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서인, 남인의 당론이 일치하면서 일시적으로 통합이 가능하였으나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이 불가함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장정을 많이 징발하면 국가의 일꾼이 없어진다는 것과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에다가 국론까지 분열되었는데 상대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인 강경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북벌론은 다시 묻혀진다. 결국 송시열은 윤휴의 북벌론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차 예송논쟁과 2차 예송논쟁 당시 3년복과 1년복을 주장했지만 강경론을 주장한 허목과 온건론을 주장한 허적의 생각 차이로 갈등을 빚어왔다. 윤휴는 초기에 허목과 허적 두 영수의 싸움을 중재하고 화합하려 하였지만, 허목과 허적의 갈등과 대립이 심해지자 그는 허목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1679년 5월 허목이 영상 허적의 아들 허견의 권력남용을 이유로 탁남의 영수인 영상 허적을 탄핵했다가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당하였다. 6월 16일 윤휴는 허목의 허물을 지탄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어 허목을 탄핵하는 상소가 올라왔고, 6월 18일 숙종은 허목을 추궁하였다. 6월 21일 사헌부장령 김정태(金鼎台)가 허목을 신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하고, 이어 태학생(太學生) 이택(李澤) 등이 허목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묵살당했다.
그해 가을 윤휴가 차자를 올려 허목과 허적의 화해를 주선하는 한편 허목의 허물을 지탄하였다. 임금이 노하자 허목은 스스로 죄를 청하고 연천으로 낙향한다. 이에 윤휴는 허목이 과격하다며 허적을 옹호하였다. 이에 허목은 윤휴가 서도의 금송을 불법으로 가져다가 재목으로 집을 지었다며 소나무 재목을 받은 것을 문제삼았고 이 일로 윤휴와 허목의 관계는 틀어지게 된다. 이 사건 이후 후대의 남인은 허목과 윤휴 중 누구를 정통으로 보느냐를 두고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성호 이익은 허목을 정통으로 보고 윤휴를 패리라고 주장한 반면 다산 정약용은 윤휴의 노선이 선명하고 허목의 견해는 선명하지 못하여 다소 문제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
1680년(숙종 6년) 박치도(朴致道), 이언강(李彦綱) 등은 윤휴를 사형에 처할 것을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이후 서인계 유생들은 계속 상소를 올려 그를 헛된 이론으로 민심을 현혹한다며 사형에 처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1680년 4월 의금부에 갇힌 윤휴는 여러번의 형문을 당하였다. 서인 위관들은 그에게 혹독한 형문을 가하며 도체찰사부 설치 건의를 반란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며 추궁했고, 허적 일파와의 관계성과 허견의 역모에 가담한 이유 등을 추궁하였으나, 청남의 중진으로 탁남 허적 일파와 사사건건 대립했던 그는 고문에도 역모 가담 혐의를 승복하지 않았다. 5월 초 유배에 처해져 함경북도 갑산으로 가게 되었다. 유배지로 가던 중 역시 유배지로 향하던 홍우원을 만나 작별을 고한다. 그러나 출발 직후 사사의 명이 내려졌고, 다시 유배지로 가던 중 5월 20일 뒤따라온 금부도사에 의해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이때 그는 '나라에서 유학자가 싫으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이유가 있느냐'고 항변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63세였다.
사약을 받기 직전 그는 종이와 먹, 붓으로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금부도사는 거절했다. 이때 함께 유배된 아들 윤의제 역시 얼마 뒤 배소에서 병사한다. 서인계에서는 그가 죽은 뒤에도 그를 계속 탄핵, 비판하며 그에게 역률을 부과할 것을 계속 주청하였으나 숙종이 듣지 않았다. 이때 그의 아들들도 모두 유배된 상태였으므로 서형 윤영과 사위들이 그의 시신을 염습하고 장례를 주관했고, 왕족 이희년, 남인 당원인 윤학관(尹學官), 미수 허목 등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였다. 바로 여주군 금사면 백호리 선영 근처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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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연강설(經筵講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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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묘년(1675, 숙종1) 1월 9일
사업(司業)을 제수한 명에 사은숙배하고 이어 소대(召對)에 들어갔다.
견사(繭絲)’와 ‘보장(保障)’의 설명에 대해서 승지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견사는 호구(戶口)의 부세(賦稅)를 가리켜 말한 것이고 보장은 성지(城池) 등의 일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오로지 호구에 따라 부역을 내는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전결(田結)에 따라 부역을 내고 있습니다.”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중국에서도 오로지 호구에 따라 부역과 조세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부역과 조세가 같지 않았던 것으로서, 부역은 호구에 따라 전포(錢布)를 내어 군병을 양성했던 것이고 조세는 정전(井田)의 10분의 1을 바치는 제도에 따라 속미(粟米)를 내어 녹봉을 마련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고어(古語)에, ‘부역으로써 군병을 풍족하게 하고 조세로써 양식을 풍족하게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부역과 조세를 모두 전결에 따라 내도록 하는데, 이것은 농민들을 이중으로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구와 전결을 분리시켜 옛날의 양식을 풍족하게 하고 군병을 풍족하게 한 제도대로 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을묘년(1675, 숙종1) 1월 10일
신이 아뢰기를,
“옛날에 작위(爵位)는 공(公)ㆍ후(侯)ㆍ백(伯)ㆍ자(子)ㆍ남(男)의 다섯 등급이 있는데 이것은 군(君)이라 이르고, 관직은 공(公)ㆍ경(卿)ㆍ대부(大夫)ㆍ사(士)의 네 등급이 있는데 이것은 자(子)라 이릅니다. 따라서 군자라 이르는 것은 그의 재주와 덕이 군이 될 수 있고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인에 대해서 물으시기에, 신이 아뢰기를,
“사람의 덕이 공정하면 큰 것이고 사사로우면 작은 것인데, 소인의 마음은 단지 자신의 사욕만 알고 남에게 공평히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소인이란 칭호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을묘년(1675, 숙종1) 1월 10일
‘유민들에게 머리를 깎게 했다.[薙髮遺民]’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청인(淸人)이 중국에 들어가서 천하 사람들에게 모두 머리를 깎게 하였는데 이것을 ‘치발(薙髮)’이라 한 것이고, ‘유민(遺民)’은 명(明)나라의 유민을 지칭한 것입니다. ‘한(漢)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란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찬탈하자, 사람들이 모두 회복시킬 것을 생각하였는데, 이리하여 사책(史策)에, ‘한나라를 생각한다.[思漢]’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바람 소리를 듣는다.’고 한 것은 진(晋)나라 모용수(慕容垂)의 일입니다. 모용수가 진(秦)나라 부견(符堅)에게 항복하고 나서 회복하려는 뜻을 가졌는데, 당시 그는 말하기를, ‘새장 속에 갇힌 매는 바람 소리를 들을 때마다 하늘을 날고 싶은 뜻을 지닌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이웃 나라’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웃 나라’라는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과 국경이 연접해 있는 것을 말한 것이고, ‘요해(要害)의 곳’이라고 한 것은 이해가 서로 관계되는 것을 지칭한 것이고, ‘천하의 후면에 있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후면에 있는 것을 말한 것이며, ‘그 형세를 흩어지게 한다.’는 것은 저들의 세력을 분산시키는 것을 말한 것이고, ‘그 마음을 떨게 한다.’는 것은 저들로 하여금 마음이 두렵게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천하의 근심을 함께하고 천하의 의리를 부지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또 아뢰기를,
“이는 윤휴의 오늘날의 뜻입니다. 현재 중국 각처에 의병(義兵)이 일어나 명나라 황실을 회복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데, 우리나라가 기병(起兵)하여 저들과 대항할 경우 이는 천하의 근심을 함께하고 천하의 의리를 부지하는 것입니다. ‘칼을 잡고도 자르지 않는다.’는 것은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고, ‘활을 잡고 쏘지 않는다.’는 것은 기회를 잃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동녕(東寧)을 공격했다.’고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몽고(蒙古 원(元)을 말함)가 압록강(鴨綠江) 서쪽 지역을 동녕부(東寧府)로 삼았는데 몽고가 명(明)나라에게 쫓겨나 북쪽으로 도망치자, 고려가 우리 태조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동녕부를 공격하여 그들과의 교제를 끊게 하였는데, 《동사(東史)》에서 이른바, ‘서북면(西北面) 일대가 텅 비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영상이 아뢰기를,
“원(元)나라가 고려와 가장 친한 사이였는데 명나라가 일어났는데도 고려의 조신(朝臣)들이 원나라를 섬기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태조께서 동녕부를 공격하여 그들의 왕래를 끊은 것입니다. ‘요동(遼東)을 치는 군사를 돌려 역절(逆節)을 막았다.’는 것은 고려의 최영(崔瑩) 등이 신우(辛禑)에게 기병하여 중국을 칠 것을 권한 것이 역절인 것인데 이 때문에 우리 태조께서 군사를 돌리신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신우가 요동을 치려고 했을 때 우리 태조께서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중로(中路)에 갔을 때 사졸들이 모두 원망하고 분개하여 창날을 되돌리려고 했으므로 태조께서 민심에 순응하시어 동쪽으로 돌아온 것인데, 이것이 우리 태조께서 천명(天命)을 받게 되신 것입니다.”
하였다. ‘우리 성상께서는 기력을 내소서.’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해석하자, 영상이 아뢰기를,
“그러합니다. 이것은 이문(吏文)인데 중국의 이문은 우리나라의 언문(諺文)과 같은 것으로서 공문(公文)에 사용하는 문자입니다.”
하였다. ‘우리 소경 대왕(昭敬大王)의 용사 도이(龍蛇島夷)의 난’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용(龍)은 진년(辰年)이고 사(蛇)는 사년(巳年)이고 도이(島夷)는 일본(日本)인 것으로서 이는 임진 왜란의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대부(大府)의 수백만 금을 내주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당시 만력 황제(萬曆皇帝)께서 우리나라가 적의 침입을 받고 흉년이 든 것을 걱정하시어 미곡을 운송하여 시장을 열도록 하고 내탕금을 풀어 구제하도록 하였는데, 당시 소비된 것이 7백만 금에 이른다 합니다.”
하였다. ‘힘이 은덕에 보답할 수 없고 일이 조화(造化)에 수응(酬應)할 수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은덕이란 부모의 자애로운 은혜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영상이 아뢰기를,
“조화라고 한 것은 천지의 조화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종신토록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이 말은 고(故)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이원익(李元翼)의 기록에 나옵니다.”
하였다. ‘수만 갈래의 물이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지상에 흐르는 물은 동서 남북으로 수만 가닥이 굽이져 흐르지만 그 물길이 모두 동해(東海)로 흘러가는데, 이는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이 말도 고(故)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가 지은 무술년(1598, 선조31)의 변무주문(辨誣奏文)에 적혀 있습니다.”
하였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이란 사대자(四大字)를 쓰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사대자는 오늘날 민간에도 인본(印本)이 있는데,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직접 쓰시어 경리(經理) 양호(楊鎬)의 생사(生祠)에 현판으로 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이 만년에 심하(深河)의 싸움에 복종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심하는 요동(遼東)의 지명입니다. 만력 무오년(1618, 광해10)에 중국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노추(老酋)의 소굴을 전복시키려 하면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내어 서로 돕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광해는 강홍립(姜弘立)ㆍ김경서(金景瑞) 등을 장수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는 데 있어 몰래 밀지(密旨)를 주어 오랑캐와 서로 통하게 하여 중국 군대가 이 때문에 크게 패하고 용장(勇將)이 모두 죽었으며, 강홍립ㆍ김경서 등도 모두 추노(酋奴)에게 항복하여 요좌(遼左)가 끝내 함락되었는데, 상소에서 이른바, ‘중국이 그 화단을 받았다.’고 한 것이 이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 죄를 낱낱이 거론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우리 인조께서 반정하실 때 인목대비께서 폐주(廢主 광해군을 말함)의 열 가지 큰 죄를 헤아려 폐위시켰는데, ‘모후(母后)를 유폐(幽廢)하고 북쪽 오랑캐와 교통한 것이 첫 번째 죄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하늘을 섬기면 도움을 받고 하늘을 배반하면 죄를 받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하늘을 섬긴다는 것은 중국을 섬기는 것을 말한 것이고, 하늘을 배반한다는 것은 중국을 배반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가도(椵島)의 사건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가도는 바로 피도(皮島)입니다. 이 섬은 평안도 서해에 있는데, 중국이 장수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주둔하여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에 충돌하는 것을 제지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자년(1636, 인조14)에 명나라 군사가 돌아갈 때 북쪽 오랑캐가 우리나라 장수 유림(柳琳)ㆍ임경업(林敬業) 등을 위협하여 주사(舟師 수군(水軍)을 말함)로 함몰시켰습니다.”
하였다. ‘송산(松山)의 싸움이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송산은 광녕(廣寧) 지방에 있는데 조대수(祖大壽)가 수년간 굳게 지켰습니다. 중국 조정이 30여만 명의 군사를 보내어 홍승주(洪承疇)를 장수로 삼아 구제하도록 하였는데, 우리나라 군사는 화포(火炮)에 섬멸되어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서, 상소에, ‘창귀(倀鬼)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맹호(猛虎)가 사람을 많이 잡아먹는 데 있어 죽은 자의 귀신이 범에게 잡아 먹혔지만 범의 사나운 것을 무서워하여 도리어 사역(使役)이 되고 앞잡이가 되어 장치해 놓은 기계나 함정을 만났을 때 반드시 앞서가며 제거합니다. 여기에 이른바, ‘창귀’는 바로 우리 군사가 저들의 사역노릇하기를 창귀처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신은 아뢰기를,
“당시에 10만 명의 의사(義士)가 화포에 죽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노상승(盧象昇)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실로 천하의 명장(名將)으로서 지혜와 용력이 대적할 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전에 남쪽에서 싸워 승리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이 싸움에서 그도 또한 진중(陣中)에서 죽었습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 군사의 화포에 맞아 죽은 것으로서 그의 지혜와 용력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니, 참으로 애통한 것이었습니다.”
하니, 상이 탄식하시며 이르기를,
“그런가.”
하였다. 영상이 말하기를,
“갈석(碣石)이란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갈석은 바다에 있는 것인데 여기서 말한 갈석은 요동을 가리키고, 산해(山海)는 관(關)의 이름을 말한 것인데 관내(關內)는 중국을 이릅니다.”
하였다. ‘크게 일을 시작하고 크게 변경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말은 오늘날 우리 국가가 반드시 큰 일을 해야만 중국 사람에게 보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초하루에 절하시고 애통해 하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당시 신이 시골에 있으면서 도로에서 전하는 말을 듣건대, 인조 대왕께서 병자ㆍ정축년에 출성(出城)하신 이후 초하루에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실 때마다 서쪽을 향하여 통곡하셨다고 하였는데, 이는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일찍 잠에서 깨시고 새벽에 일어나셨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뜻을 신이 알고 있습니다. 이 상소에서 이른바, ‘무기를 수리하고 병사를 소집하라.’고 한 것은 무비(武備)를 닦는 것을 말한 것이고, ‘외적의 침입을 미리 대비하라.’고 한 것은 의외의 환난이 발생하는 것을 염려한 것이고, ‘북쪽으로 향한다.’고 한 것은 서쪽으로 오랑캐를 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천시(天時)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여 걱정이 전하에게 있게 되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반복해서 아뢰기를,
“선왕 때에 비록 큰 뜻을 지니셨지만 단지 천시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도에 돌아가시어 끝내 중대하고 어려운 사업을 후인(後人)에게 물려주시게 된 것이니, 이것이 ‘걱정이 전하에게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잔포하고 추악한 무리를 제거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잔포 추악하다는 것은 모두가 저들의 잔포 추악한 일을 지적하여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큰 의리’란 것은 오늘날 저들을 토벌하여 분한을 씻는 대의(大義)를 말한 것이고, ‘큰 수치’란 것은 지난날의 치욕의 부끄러움을 지칭한 것입니다.”
하고, ‘시기와 형세를 틈타고 나라의 보존을 도모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 아뢰기를,
“‘시기와 형세를 틈탄다.’는 것은 지금 저들이 패하여 무너진 때를 틈타려는 것이고, ‘나라의 보존을 도모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보존을 도모하는 것이 또한 이 거사에 달려 있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고, ‘오랑캐의 운이 점점 쇠미해지고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아뢰기를,
“‘오랑캐’는 저들을 말한 것이고, ‘오(吳)’는 오삼계(吳三桂)를 말한 것이고, ‘일역(日域)’은 일본(日本)을 말한 것이고, ‘정인(鄭人)’은 정금(鄭錦)ㆍ정이사(鄭二舍)를 말한 것입니다. 윤휴의 생각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정금의 화란(禍亂)을 받을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말을 한 것인 듯합니다.”
하였다. 신이 아뢰기를,
“지금 듣건대, 중국이 군사를 일으키자 오랑캐의 형세가 이미 꺾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군사를 출발시킬 경우, 저들이 앞뒤로 공격을 받아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사신이 왕래하여 저들과 한편이 되었으니, 오삼계가 이러한 것을 알게 될 경우 필시 우리의 행위에 대해 분개하여, 혹은 정금 등으로 하여금 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와 저들이 교통하는 길을 끊게 하고, 또는 우리나라를 일본에게 넘겨줄 경우 일본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인데, 이 점이 신이 이른바,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한심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의 병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데 혹시 광복(光復)시켰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우리가 시종 저들의 편당이 된 실정을 따져 물을 경우 우리로서는 대답할 말이 없을 뿐더러, 군신 상하가 다시 중국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게 되고, 또한 천지 사이에 설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러하다고 하시고, 영상 및 정유악도 그렇다고 하였다. ‘지난날의 정예롭고 뛰어난 인물이 거의 모두 죽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저들이 애당초 천하를 얻을 때에는 그들의 장수와 재상 및 구왕(九王)ㆍ보정(輔政) 등이 모두가 뛰어난 인물들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사망하여 저들의 형세가 지난날과 같지 않습니다. 이에 윤휴가 이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하였다. ‘중국의 사람들이 누구인들 저들에게 심복하겠습니까.’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청인(淸人)이 중국에 대해서 그 실책이 머리를 깎게 한 것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이것이 바로 중국 사람들이 분개하여 모두가 쫓아내려고 하는 까닭입니다.”
하였다. ‘진승(陳勝)ㆍ오광(吳廣)이 팔을 치켜든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이것은 사책(史策)에서 이른바, ‘하걸(夏桀)ㆍ상주(商紂)가 임금의 도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자 탕왕(湯王)ㆍ무왕(武王)이 일어났고, 진(秦)나라 사람이 도리를 잃자 진승ㆍ오광이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진승ㆍ오광이 제일 먼저 주창하여 진나라를 파멸시킨 공이 탕왕ㆍ무왕과 동등한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주서(朱序)가 한 번 소리쳤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 일은 《통감(通鑑)》에 보이는 것으로서, 이른바, ‘주서가 군대의 후미에서 소리쳐 말하기를, 「진(秦)나라 군사가 파멸되었다.」고 했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했다. ‘황하(黃河)의 제방과 회수(淮水)의 제방이 무너졌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아뢰기를,
“이것은 천하의 형세가 토붕 와해(土崩瓦解)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제후들이 그림자처럼 따르고 큰 바람이 불어 모래가 날렸다.’고 한 것에 대해서 정유악이 아뢰기를,
“이 일도 또한 《통감》에 보이는 것으로서, 이른바, ‘한왕(漢王)이 다섯 제후의 군사들을 따라 팽성(彭城)에 들어갔는데, 큰 바람이 불어 모래와 돌을 날리고 낮인데도 캄캄하고 어두웠기 때문에 한왕이 수십 기(騎)를 따라 도망갈 수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급한 천둥이 치고 불이 맹렬히 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이 일도 역시 《통감》에 보입니다. 곤양(昆陽)의 싸움에 있어 하늘이 크게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 치천(滍川)의 물이 범람했으므로 왕심(王尋)ㆍ왕읍(王邑)이 도망갔습니다. 한(漢)나라 군사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미앙궁(未央宮)을 태우자 왕망(王莽)이 선실(宣室)에 가서 불을 피했는데 그가 가는 곳마다 불길이 따라갔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왕망의 기세가 융성할 때에는 하늘이 그를 미워하여도 어떻게 할 수 없었는데, 한나라 군사가 와서 그 죄를 성토하자 하늘도 그 성세(聲勢)를 돕는 데 있어 이처럼 한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하늘과 사람의 일에 있어 요점은 사람이 주장하는 데에 달려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께서도 수긍하시며 그렇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의 정예로운 무기와 강한 화살 및 화포(火炮)ㆍ비환(飛丸)’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본시 궁시(弓矢)가 예리한 것으로 천하에 알려졌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또한 화포의 기예가 알려졌습니다. 대체로 화포는 본시 남만(南蠻)에서 제조된 것인데, 임진년에 일본이 이것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공격하니 우리나라 사람은 화포 소리에 놀래어 닥치는 곳마다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노인들에게 듣건대, 당시 민가에서 기르는 개들이 화포 소리를 듣고 발광하여 도망쳤고 사람들도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 군사들이 그 기예를 학습하여 병사들이 모두 조종할 수 있을 뿐더러 일본의 군인들보다 더 정통하여 천하의 어느 나라도 상대할 수 없는 형세를 지니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사방의 나라에 횡행할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영상이 아뢰기를,
“이 말은 참으로 그러합니다. 군중(軍中)의 무기에 있어 어찌 조총(鳥銃)보다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도 항우(項羽)를 대적할 수 있는 것으로서 참으로 천하에 편리한 무기입니다.”
하였다. ‘선졸(選卒) 1만 대(隊), 무강거(武剛車) 1천 편(偏)’을 말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신을 돌아보며 진주(陳奏)하라고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대(隊)는 10인이 1대인데 이는 10만 명을 말한 것입니다. 무강거는 《한서(漢書)》에서 이른바, ‘위청(衛靑)이 무강거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고 한 것이고, 편(偏)은 수레 열다섯 대입니다. 무강거는 위에 방패를 설치하고 아래에 한 개의 바퀴가 있는데, 이른바, ‘편상거(偏箱車)’라는 것입니다. 진(晉)나라 때 마융(馬隆)이 이 수레를 사용하여 수기능(樹機能)을 토벌하는 데 있어 천리를 달려가 승리를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대부분 산악지대이고 도로가 험난하기 때문에 이 수레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여깁니다. 오늘날 북쪽 오랑캐와 교전(交戰)하는 데 있어 이 수레가 아니면 오랑캐 기마병(騎馬兵)의 충돌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이에 신이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장인(丈人)’이란 말과, ‘삼석(三錫)’이란 말은 《주역(周易)》에 나오는데, ‘장인’은 지략과 덕망을 지닌 사람으로서 충분히 삼군(三軍)의 장수가 될 만한 사람을 말한 것이고, ‘세 번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은총으로 임명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주역》에, ‘군사를 출동시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로 해야 하는데 장인이 군사를 거느리게 하는 것이 길하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군사를 거느리는 데 있어 중도(中道)를 지키는 것이 길한 것으로서 임금의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하였고, 또 ‘임금이 세 번 명령을 내리는 것은 만방(萬邦)의 백성을 생각해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연(燕)’은 연경(燕京)을 말한 것이고,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인다.’고 한 것은 우리나라가 저들의 왼쪽에 있는데 우리가 출병하여 요동(遼東)ㆍ계주(薊州)의 길을 끊을 경우, 저들의 등을 치고 목을 조르는 형세를 갖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통감》에 이른바, ‘천하의 목을 누르고 등을 친다.’는 것이다.”
하였다. ‘해양(海洋)의 길을 튼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이 말은 정금(鄭錦)이란 자와 합세하려는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신이 세력을 합친다고 말한 것은 정금과 함께 일할 것을 청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군사가 요동(遼東)ㆍ심양(瀋陽)으로 곧바로 쳐들어가고 정금이 회령(淮寧)ㆍ절강(浙江) 지방에서 함께 일어날 것을 약속하여 산동(山東) 지방을 동요시킬 경우 그 형세가 저절로 연속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세력을 합쳐 저들의 복부(腹部)를 동요시킨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곳에 격문(檄文)을 보낸다.’고 한 말은 천하 사람들이 듣고서 함께 기병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한 적들의 마음이 떨리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하였다. ‘의무려(醫無閭)를 점거하여 유(幽)ㆍ심(瀋)의 적들을 내쫓는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의무려는 요녕(遼寧)의 진산(鎭山)이고 유(幽)는 연경이고 심(瀋)은 심양을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요동 지방으로 출병하여 산해관(山海關) 밖의 지역을 점령할 경우 연경ㆍ심양의 적들이 저절로 쫓겨날 형편에 있게 될 것이니, 이때에 천하를 위하여 잔적(殘賊)을 제거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晋文公)이 이적(夷狄)을 물리치고 주(周)나라를 높인 것도 또한 이처럼 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러한 거사는 분수에서 벗어나는 뜻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왕실(王室)을 높이고 왕자(王者)의 군사가 되려는 것뿐이니, 이 때문에 신이, ‘왕자의 군사’란 말을 했던 것입니다.”
하였다. ‘이 일이 실패하더라도 대의(大義)를 천하에 드러낼 수 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진주(陳奏)하라고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승패(勝敗)와 존망(存亡)은 실로 기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승리할 경우 그대로 대의를 천하에 펼 수 있는 것이고, 성공하지 못하여 실패한다 하더라도 또한 충의(忠義)의 마음을 드러내어 천하 후세에 부끄러움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다.’라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옛말에, ‘사람은 세 가지에서 산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섬겨야 하는데, 부모가 낳아 주시고 스승이 가르쳐 주시고 임금이 길러 주시니, 이분들은 나를 살려주신 분들이므로 처지에 따라 목숨을 바쳐야 한다. 살려준 은혜에는 죽음으로 보답하고 은덕을 베푼 데에는 힘으로 보답하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명(明)나라에 군신의 의리가 있고 부자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살려준 은혜에 보답하는 의리’라고 하였습니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관중(管仲)이 아니었다면 나는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그의 인(仁)만 하겠는가, 그의 인만 하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오(夷吾)는 관중의 이름인데, 이것이 신이 이른바, ‘우리의 인한 것이 이오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발을 떼자 복부가 무너진다.’고 한 것에 대해서 영상이 말하기를,
“무엇을 말한 것인가?”
하기에, 신이 아뢰기를,
“저들이 떠돌이 민족으로서 중국을 차지하여 늘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일로 인하여 군사를 일으켜 동쪽으로 침범해 올 경우, 중국 사람이 필시 시기를 틈타 일어날 것이니, 이는 저들이 발을 떼는 즉시 복부가 먼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신은, ‘발을 떼자 복부가 먼저 무너져 저들 스스로 구제하기에 여가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액액 만리(額額萬里)’란 말은, 한유(韓愈)의 평회서비(平淮西碑)에, ‘크나큰 채주(蔡州)의 성(城)이여, 그 지역이 천리이다.’라고 하였는데, 액액(額額)은 작지 않다는 뜻이고, 원 세조(元世祖)의 말에, ‘조선(朝鮮)은 만리의 나라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수 양제(隋煬帝)가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高句麗)를 쳤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에게 패하여 돌아갔고, 당 태종(唐太宗)은 천하를 평정하고서 직접 동정(東征)하는 데 있어 곧바로 요동(遼東)에 와서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요(遼)나라는 고려(高麗)를 쳤으나 강감찬(姜邯贊)에게 패하였고, 금(金)나라도 고려를 쳤지만 조충(趙沖)ㆍ김취려(金就礪)에게 패하였습니다. 그런데 병자년(丙子年)에 청인(淸人)만이 유독 우리에게 승리하였으니, 이는 전대(前代)에 없었던 일로서 실은 우리의 실책이었습니다. 우리가 미리 계책을 수립했더라면 어찌 갑자기 다른 사람들보다 못하였겠습니까.”
하였다. ‘오늘날의 일에 있어 의리로 보나 형세로 보나,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라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의리와 형세에 있어 실로 승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불행히 패하더라도 또한 우리의 충의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습니다. 《주역(周易)》의 도리는 의리가 이익을 만드는 것이고, 《춘추(春秋)》의 의리에는 제후(諸侯)가 서로 싸우다 패했더라도 성인(聖人)이 허여한 것이 있습니다. 예컨대, 노(魯)나라가 제후들과 싸우다 패했으면 성인이 반드시 기휘(忌諱)하였는데, 장공(莊公)이 제(齊)나라와 싸우다가 패했는데도 쓴 것은 영광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저들과 싸워 승리하면 참으로 좋은 것이고, 패하더라도 또한 영광스러운 것이니, 이것이 신이 이른바, ‘이기거나 지거나 간에 모두 그만둘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한 광무(漢光武)는 다른 사람이 행하지 못한 것을 행했다.’고 한 것에 대해서 신이 아뢰기를,
“이 말은 풍이(馮異)가 광무에게 말한 것입니다. 당시 분잡하게 일어난 장수들이 미녀와 재물을 취하는 데에만 뜻이 있고 원대한 계략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에 풍이가 광무에게 가혹한 정사를 제거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것으로 천하를 얻는 근본으로 삼으라고 권했는데, 이 말은 그 일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2) 1월 8일
신이 아뢰기를,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치려고 와신 상담(臥薪嘗膽)하였는데, 그가 와신 상담하는 데 있어 기필코 그 일을 하려는 뜻을 가졌기 때문에 끝내 회계(會稽)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구천이 복수(復讐)의 뜻을 가질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리며 그럭저럭 지내면서 복수의 뜻이 때때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여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을 보냈더라면 끝내 그도 멸망했을 것인데 어떻게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승리를 이룰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10년 동안 양성하고 10년 동안 교훈한다.’고 한 것도 오늘날의 일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일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있었던 초기라면 말할 수 있지만, 병자년 이후 지금까지 수십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인조대왕(仁祖大王) 이후 선왕(先王)들께서 이 일만을 염려하셨으니, 양성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고 교훈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서 지금은 시기를 틈타 분발하여 선왕들의 쌓인 울분을 풀어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또 10년 동안 양성하고 10년 동안 교훈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는 천시(天時)를 잃고 인사(人事)가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놓치는 데에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또한 오늘날의 일과 비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형세에 있어 기회에 따라 계책을 결정하여 지난날에 있었던 앙화(殃禍)를 모면하려고 하지 않고 다시 시대가 변하여 마침내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경우 사직(社稷)의 존망(存亡)을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연대는 늘 중국과 서로 같았습니다.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원(元)나라를 몰아내고 고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여 천하를 소유하였으니, 그 공덕이 백대의 제왕들보다 뛰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3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 와서는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었고 자손들이 떠돌아다니게 되었으니, 이것은 아마도 국운이 다하여 인사가 상응하는 것인 듯합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 개국(開國)하신 지도 벌써 3백 년이 지났으니, 이는 천운이 바뀌고 인사가 변환하는 때인지라 신은 실로 두렵습니다. 하늘이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이 이때이고 우리를 흥하게 하는 것도 이때입니다. 전하께서 이때에 사람들이 행하지 못하는 것을 행하시어 위로 천심(天心)에 부합되게 하신다면, 옛사람이 이른바,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한다.’고 한 것이 실로 이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이러한 계책을 하지 않고서 단지 하찮은 폐단을 막는 일로 세월을 보내면서 복수하려는 뜻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뿐이고, 큰 뜻을 분발하고 훌륭한 계책을 세워 천하의 대의(大義)를 부지하고 고난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하지 못할 경우, 국가의 일이 날로 퇴폐하여 바다로 흘러가는 물과 서산에 지는 해처럼 끝내 멸망의 경지에 이르러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실로 국가 운수의 소재에 따라 천도(天道)와 인사(人事)가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60년 동안 시골에서 지내며 출세하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큰 일을 하시려는 뜻을 지니신 것에 감격하고 천하의 일이 기회를 틈탈 수 있는 때를 당했으므로 염치를 무릅쓰고 벼슬길에 나와 노력할 것을 허락했던 것이지, 신의 마음이 실제로 벼슬살이로 의식(衣食)을 하려고 나온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만약에 명망과 은총을 차지하고 녹봉과 직위만을 탐내고 오늘날에 훌륭한 일을 하지 못하여 마침내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할 경우, 이것은 또한 신의 마음에 기대했던 것이 아닙니다.”
소회를 대략 기록한 소차(小箚)를 넣어가지고 왔는데 성상께 올려 보시게 할 수는 없으나 신이 펴 읽어 소회를 다 아뢰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고, 소매 속의 차본(箚本)을 꺼내어 읽었는데, 그 차본은 다음과 같았다.
“신은 타고난 성품이 거칠고 우직하여 말을 하거나 일을 행하는 데 있어 마음내키는 대로 행할 줄만 알고, 시의(時議)를 따르지 않으며 하찮은 혐의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원망과 비난이 집중되고 종적이 불안합니다. 이러한데 어떻게 조정의 자리에 편안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의 은총이 높을수록 신의 마음은 더욱 불안하고 신의 종적이 더욱 낭패스러우니, 삼가 바라건대, 일찍 해면시키시어 국가와 개인이 다행하게 하소서. 성명(聖明)께서 큰 뜻을 세우시어 훌륭한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평탄한 때이거나 험난한 때를 가리지 않고서 목숨을 바쳐 종사할 것이지만, 헛된 예우(禮遇)로 잡아두시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게 하신다면 차라리 신의 사퇴를 윤허하시어 필부(匹夫)의 뜻을 온전히 할 수 있게 하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명의 조정에 왕후(王侯)를 섬기지 않는 신하 한 사람이 있게 하는 것이 또한 한 가지입니다.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떠들썩하여 국가의 계획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인심이 불선한 데에서 그러한 것이지만, 또한 성상의 뜻이 정해지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옛날의 임금들이 위대한 공적을 수립하는 데 있어서는 자신의 뜻을 굳게 정했습니다. 예컨대, 구천(句踐)이 쓸개를 맛보고 손권(孫權)이 책상을 쪼갠 것처럼 하여 소인(小人)의 참소하는 말이 그 사이에 낄 수 없도록 해야만 일을 제대로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떠한 임금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서 잠깐 시행했다가 곧바로 그만두어 일을 담당한 신하들이 믿을 수 없고 소인들의 사설(邪說)이 틈을 노리게 하는데, 이러하고서도 천하의 큰 공을 이루고 난망(亂亡)에서 벗어난 자는 없었습니다.
병거(兵車)의 일에 있어 신은 진중(陣中)에서 사용하는 한 가지 기계를 가지고 자신의 진퇴(進退)를 결정하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오랑캐를 막는 기구에 있어 이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건대, 맹수(猛獸)는 발톱과 이빨을 지니고 있는데 이것이 아니면 위력을 쓸 수 없고, 밭가는 사람은 쟁기를 사용하고 김매는 사람은 우장과 삿갓을 쓰는데 이것이 아니면 풀밭을 개간하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은 미리 만들어 조치하여 적이 쳐들어왔을 때 대비하고 우리가 적을 칠 때에 사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저지하는 자들은 본시 적을 토벌하여 치욕을 씻으려는 마음이 없고 의리를 부지하려는 계책도 없으면서 이것을 빙자하여 신을 배척하고 천하의 대의(大義)를 저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당 현종(唐玄宗)은 요원지(姚元之)에게 말하기를, ‘경을 재상으로 삼았으니 어떻게 경의 말을 시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전하께서 신을 조정에 있게 하려고 하신다면 또한 신의 말을 시행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 사람들의 말에 동요되시어 신이 하려고 하는 것을 시행하지 않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도 신의 말을 채택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시고, 신 또한 어떠한 것을 가지고도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인데, 신이 또 어떻게 이 일을 가지고 거취(去就)를 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조정 신하들의 논의를 살펴보건대, 인심과 세도(世道)가 벌써 어쩔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고 성상의 마음도 많은 사람의 말에 동요되시지 않을 수 없으니, 신은 이 때문에 감히 다시 조정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할 경우 또한 신이 건의한 일을 모두 혁파하여 여러 사람의 말에 보답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리고 훗날에 간인(奸人)들이 신을 공척하는 구실로 삼아 끝내 국가가 그 폐단을 받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괜찮겠습니다.
그리고 신도 국력을 헤아리거나 시세를 살펴보지 않고서 칼을 만지고 노려보며 장수를 제수하고 군사를 진출시키는 하루아침의 계책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큰 뜻을 세우고 조정을 바르게 하며, 백성을 무마하고 군졸을 훈련시키며 기계를 정비하여 무비(武備)를 닦고 적을 물리치는 실상을 다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신이 급급하게 여기는 것으로서 지난번 상소 내용에 모두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을 공척하는 자들이 신이 시행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일체 저지하여 우리가 안으로 무비를 닦는 기구에 있어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게 할 뿐더러, 단지, ‘저들이 군사를 출발시킬 기일이 이미 정해졌다.’느니, ‘함부로 출동하는 것은 망함을 재촉하는 것이다.’ 등의 말을 가지고 신을 공척하는 소재로 삼고 있으니, 신은 참으로 그들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이 떠들어대고 비난하는 소리가 세상에 가득한데 신이 또한 어떻게 태연히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스스로 물러날 계책을 하지 않고 큰소리를 쳐서 자신이 훌륭한 명성을 차지하고 나라가 실제의 화란을 받는 데에 이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점이 또한 신이 사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단지 헛된 명성만 있을 뿐이고 끝내 실제로 거행된 것이 없다. 이리하여 한 가지 일을 할 때마다 여러 사람의 말에 저지되어 일이 그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러하기 때문에 신이 1년 동안 조정에 있었으나 끝내 한 가지 일도 시행된 것이 없었으니, 이것이 또한 신이 개탄하는 것입니다. 이러할 뿐이라면 아무리 몸이 조정에 있더라도 국가에 어떠한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한 사람이 주창한 것에 대해서 여러 사람의 말이 번갈아 일어나고 있는데 그 말이 퍼져 저들의 귀에 흘러 들어갈 경우 실로 좋은 대책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필시 신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자들이 거짓말을 지어내고 기필코 국가의 일을 그르쳐 그 화단을 신에게 돌리려고 한 것이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알고서 따져 묻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로서 어찌 대답할 말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저들의 오늘날 형세로는 안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공갈을 치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국가의 그만둘 수 없는 일에 있어서 저들의 형세를 두려워하여 손을 쓰지 못한다면, 신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고 어떠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전유하신 내용에, ‘민심이 동요되기 쉽고 나라의 근본이 이러한 상황인데 남의 나라를 넘보는 것은 예전에 없었던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성상의 유지가 참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신도 백성들의 일을 걱정하지 않고 함부로 군병을 출동시키려는 것은 아닙니다. 민심이 진정되고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지는 것은 조정이 조처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전하의 이 말씀은 조정 신하들의 고식적이고 지체하는 자들의 말에 동요되신 것인 듯싶습니다. 그리고 성상께서 큰 뜻을 세우시어 기어이 큰 일을 하려고 하신다면, 신은 몸이 지치도록 노력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고 참소와 비방이 날마다 이른다 하더라도 걱정하지 않을 것이지만, 단지 그러한 말씀만 하시고 기필코 하려는 마음이 없으시며 안일만 취하시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시려고 하신다면, 전하께서는 실제로 신을 쓰실 것이 없고 오늘날 조정에 있는 신하들만으로도 충분하실 것입니다. 따라서 작명(爵名)을 내리시고 헛된 예우로 잡아두시어 신으로 하여금 평소의 지조를 상실하고 명교(名敎)에 죄를 짓게 하시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날 연중(筵中)에 있었던 진교(陳橋)의 설은 더욱더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이 시기에 이러한 말은 단지 오늘날의 대계(大計)를 저지하고 전하의 군신(君臣)을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참소하는 말이 한번 행해지면 훗날 사변(事變)이 발생했을 때 누가 나라를 위해 일을 담당하여 스스로 예측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려고 하겠습니까. ‘한 마디 말이 나라를 잃게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경우를 말한 것입니다. 성명(聖明)께서는 특별히 살피시고 호오(好惡)를 분명히 보이시어 사설(邪說)을 하는 자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셔야 합니다.
신은 초야 출신으로 식견이 고루한 인물인데 외람되이 전형(銓衡)의 직임을 맡았으나 인물을 알아보는 감식과 인재를 열람하는 일도 없이 단지 공정한 마음을 가지는 것으로써만 보답하는 소지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듣건대, 어제 연중(筵中)에서 영상이 신이 친척을 분간하지 않았다고 말하였고, 신이 주의(注擬)한 사람에 대해서 대간(臺諫)의 탄핵이 잇달아 전조(銓曹)가 사정(私情)을 따르고 편리한 자를 취택한 것처럼 했다고 하는데, 신은 매우 두려우며 많은 변론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상이, ‘친척을 분간하지 않았다.’고 한 것은 필시 박세면(朴世冕) 등의 일을 지적한 것인데, 세면은 신의 동서(同婿)입니다. 주의하던 날 수령의 자리가 빈 곳이 많았는데, 비단 인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늙었으나 정력이 강성하여 수령의 직임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신이 혐의를 피하는 것을 잊고서 의흥군(義興郡)에 의망했습니다. 이것은 또한 신이 자기가 아는 사람을 천거하는 뜻이었고, 또한 국전(國典)에도 당상관(堂上官)은 서로 피혐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정을 따르는 마음을 갖지 않았는데도 물의(物議)가 이러하니, 이 또한 신의 죄입니다.”
백호전서 제15권 / 서(書)
허 영상에게 답함 무오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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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 보내주신 답서를 읽고 상공께서 이 어리석은 자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자는 뜻과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에 대해 분개를 느끼고 있는 뜻을 살펴주시고 받아주심을 알게 되었고, 또 대의(大義)는 점점 어두워져 가고 인심은 안일에만 젖어 있다고 한탄하심도 뵈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변무(辨誣) 문제는 아마 묘당(廟堂)에서 이미 그에 대한 대책을 짜놓았으리라 생각되는데 아직 들어보지 못해 한입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말과 급하지 않은 일을 조정에서는 틀림없이 하지 않으리라고 이 어리석은 자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상공께서 말씀하신, 관문(關門)을 너무 일찍 닫는다고 하신 주장에 대해서는 저는 의견을 좀 달리하고 있습니다. 변고가 있은 이후로 우리가 기회를 놓치고 도리어 앙화를 받은 경우가 몇 차례나 되었습니까. 무오년 오랑캐가 처음 일어났을 때 우리가 한 양장(良將)을 명해 중국 장사들과 협력해서 막 일어나는 저들의 세력을 쳐 없애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간신(奸臣)에게 밀지를 주어 귀신에게 죄를 맞이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하늘에 통하는 죄와 유폐(幽廢)의 재앙을 받았고 그러고도 또 일개 사신을 보내 속임질만 하다가 끝내 일을 그르친 모문룡(毛文龍)의 죄상을 폭로하지도 못했으니, 그것이 기회를 잃은 첫 번째입니다.
기사년에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나왔을 때도 우리가 경내의 적을 소탕해버리고 서쪽으로 가 원 경략과 기각(猗角)의 형세를 이루지 못하여 원 경략으로 하여금 공이 도리어 죄가 되어 혹독한 참형을 당하게 만들고 또 적세만 창궐하게 만들어 결국 남한산성이 포위를 당하여 끝내 항복까지 하게 되어 천하 후세에 해명의 길이 없게 만들었으니, 그것이 기회를 잃은 두 번째입니다.
그리고 갑인년에 오삼계(吳三桂)가 서남방에서 일어났을 때도 오랑캐들은 그때 궁지에 몰려 있었고 요동은 갈팡질팡 정신이 없었는데 우리가 또 그 기회를 잡아 스스로 분발함으로써 와서 살려주기를 갈망하는 천하 백성들의 소원을 풀어주지 못했으니, 그것이 세 번째 기회를 놓친 일이었습니다. 금인(金人)들이 아직까지 중국을 차지하고 있고 유예(劉豫)가 제(帝)를 칭하면서 남북의 백성들이 수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또한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오늘날에 와서는 5년 계속되는 전쟁에 천하가 매우 시끄럽고 동남 반쪽은 또 이미 분열되어 있으며, 수전과 육전 할 것 없이 패배의 연속이어서 한 번 나가면 돌아오는 군대가 없는 데다 금인들이 이미 보물을 북쪽으로 수송하고 있어 형세가 매우 급급한 때입니다. 이야말로 고인들이 말한, 병법(兵法)에 상대의 지친 틈을 타 진격한다고 하는 바로 그때가 아니겠습니까. 지금이야말로 놓쳐서는 안 될 바로 그 기회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관문을 닫아 걸려고 할 뿐만이 아니라, 욕심 같아서는 방략(方略)을 짜서 각자 분담을 시키고 틈을 노리고 있다가 여차하면 동서에서 일제히 일어나 놈들의 소굴을 뒤엎고 놈들의 왼팔에 해당하는 지역을 자른 다음 바닷가에 연해 있는 그들 심장부까지 흔들어놓아 하늘이 저들을 망하게 만드는 일을 도움으로써 중국을 한 번 떨치게 만들어야 합니다. 힘도 부족하지 않고 시기로도 해볼 만하니, 혹시라도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으로 들고 일어나 달려나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오히려 늦었다고 한다면 옳지만 너무 이르다고 한다면 이는 잘못된 계산인 것입니다. 이는 마치 불에 타는 자, 물에 빠진 자를 구제하는 일과도 같아서 불길이 한창 번진 뒤에 물로 끄려 한다거나 이미 물 속에 잠겨버린 뒤에 손으로 건지려고 한다면 아무 도움이 안 될 뿐 아니라 함께 빠져 죽거나 불에 타기 십상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 뱃속이 비어 있어 담당하고 나설 사람이 없다고 하겠지만 주(周)나라가 흉년이 들었다고 무왕(武王)이 상(商)나라 정벌하던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았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관중(關中)이 심한 기근에 허덕였지만 한 고조(漢高祖)는 위(魏)를 사로잡고 조(趙)를 거꾸러뜨리는 전쟁을 그 때문에 그만두지 않았는데, 이유는 때를 놓칠 수가 없고 머뭇거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해낼 인재들도 굳이 전대(前代)에서 찾거나 다른 나라에 가서 구할 것 없이 우리의 깊은 산 깊은 숲 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적의 형세는 이미 꺾였고 인심도 이미 동요되고 있어 천하의 저울대는 사실 우리가 쥐고 있으므로 지금 저울질을 하자면 그 경중이 한(韓)ㆍ제(齊)가 초(楚)ㆍ한(漢)에 대한 정도뿐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존주(尊周)의 의리를 앞세우고 조민벌죄(吊民伐罪)의 군대를 한 번 일으키기만 하면 여우들이 지쳐 자빠져 있고 비어 있다시피 한 요동 등지에서는 누구 하나 우리 앞을 막아설 자가 없어 도끼의 이 하나 어그러지는 일도 없을 것이며, 중국의 유민들이 너도 나도 음식을 싸들고 서로 나와 우리 군대를 환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저들 본거지까지 깊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저들 내부가 먼저 무너져 저들끼리 서로 도륙을 할 것이고, 천하 영웅들도 그 바람과 벼락 소리에 기가 죽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의리와 지략이 이 세상 어느 영웅도 당할 수 없을 만큼 뚜렷이 나타나 온 천하가 다 심복을 할 것이니, 동서남북 어느 나라가 우리를 업신여기고 감히 우리를 넘볼 것입니까. 이렇게 되면 중국의 은혜를 갚는 길도 되고, 조종의 수치도 씻을 수가 있고, 이미 무너진 인간 질서도 바로잡힐 것이고, 믿기 어려운 하늘의 마음도 붙잡을 수가 있어 천하 후세에 길이 할 말이 있을 것이지만, 지금 기회를 놓치고 하지 않는다면 아마 천시(天時)도 차질을 가져올 것이고 기회도 두 번 다시 오지 않아 우리는 은혜도 의리도 다 저버리고 수치만 몽땅 덮어쓴 자가 되어 이제 하늘 땅 사이에 자립할 자격이 없이 영원히 명교(名敎)의 죄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더구나 성문에 불이 나고, 초나라가 원숭이를 잃어버린 일은 우리가 거울 삼아야 할 일들이고, 긴 나무가 넘어지면 그 밑에 있는 우리도 자연 죽음을 면치 못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일본은 일본대로 으르렁대고 있고, 좌해(左海)에서는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그들이 또 명분과 의리를 앞세우고 우리에게 덤벼들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것은 그리 슬기로운 자가 아니고도 한심스러워 할 일인 것입니다. 옛날 전제(田齊)가 망했을 때 식견 있는 자들은 모두 당시 재상 후승(后勝)이 왕을 잘못 인도하여 쓸데없는 객들을 많이 접촉한 것이 패망의 원인이 됐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상공께서도 바로 임금 밑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렇게 대의(大義)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안일에 젖은 뭇사람들 말만 듣고 한번 기회를 잃어 큰일을 그르치고 말게 되면 후세의 논자들이 그 탓을 상공에게로 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저는 그게 걱정입니다.
상공은 세 왕조를 보필해 오시면서 후한 은총을 받아온 처지인데, 지금 국가의 존망이 걸려 있는 위급한 이때 마음과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지 않고 책임 없는 무리들의 소리만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리하여 제가 어리석고 참람된 것도 불고하고 이렇게까지 말하게 된 것이니, 상공께서는 저의 죄를 너그럽게 보아주시고 충정에서 나온 말임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마침 또 천기를 보았더니, 서남방과 동방에서 이변의 빛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고는 더욱 놀라고 마음이 떨려 감히 심한 말씀을 안 드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상공께서 그 점 거듭 살펴주셨으면 합니다.
성문에 …… 잃어버린 일 : 애매하게 화를 당한 것의 비유. 성문에 불이 난 통에 애꿎게 못의 물고기가 죽음을 당하고, 초나라 왕이 원숭이를 잃고서 그것을 찾기 위해 산에 있는 수목을 다 베어 없앤 일을 말함. 《杜弼 檄梁文》
백호전서 제16권 / 서(書)
김 병판에게 답함[答金兵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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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사환 편에 보내신 서신 받고 감사했습니다. 강도(江都)의 지도 설명서는 병중에 겨우 한번 훑어보았는데 아주 치밀했었습니다. 그러나 고인들 말에, 법대로 다하고 나면 법이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 작디작은 곳은 다급할 때 잠깐 피난이나 할 곳일 뿐인데 거기에다 무슨 설비를 곳곳에 하는 등 법대로 다하는 일을 하여 원대한 꿈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국력까지 허비할 것입니까. 네댓 곳에다 둔수(屯守)할 곳만 두어도 만일의 대비에는 족합니다. 그리고 배와 수레를 많이 만들고 겸하여 농업에도 힘쓰게 하여 그곳 백성들 본업이 충실해지면 갑작스러운 변란도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먼 앞날을 내다보는 길도 되어 얼핏 소루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이 주밀한 법이고, 일은 별로 안 해도 큰 효과를 낼 것입니다. 대감께서도 그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이조연동규 에게 답함[答李祖然 同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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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에 광기가 또 발작해서 공연한 짓을 저질렀더니 지금 온 나라가 떠들썩한데 막상 형의 편지를 받고 보니, 어쩌면 그리도 같은 병을 앓고 같은 길을 가고 있는 사람 같단 말인가. 또 어쩌면 그리 세상 사람들과는 정반대의 견해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 말이 일생을 두고 한번 하고 싶었던 말인데 죽기 전에 한번 뱉어버리고 나니 가슴속이 조금 시원한 것 같네. 보내오신 시는 사람의 흐린 정신을 일깨워주기에 족하여 형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하는 뜻에서 삼가 화답해 보았다네.
서신 안의 “쓰지 않으면 후회가 된다.”와 “천하가 다같이 버릴 것이다.” 등등의 말은 그 말을 우리 임금 앞에서 직접 못하는 것이 한이 되기 때문에 한 말인데 보시고서 남에게는 보이지 마시게. 지금 천하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다급한 상황인데 거기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고 할 수 있는 조건들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마치 큰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이 멍청하게만 앉아 있고, 게다가 또 우리 백성들을 흐르는 강회(江淮)에다 몰아넣으려고 하는 자까지 있다고 하니, 그들은 도대체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아, 슬픈 일이로세. 노초(老草)를 이만 줄이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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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두 분 형이 나란히 왕림하시어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것 잘 들었고, 형은 또 더 누누이 말씀을 해주셨는데 날 사랑하시는 마음에서 충고를 반복한다는 것 잘 알고 있다네. 야복(野服) 그것이야 소소한 문제이고 오늘 제공들이 그것을 어렵게 생각한다면 그만두더라도 별 탈이야 없겠지만 그래도 한평생 가슴에 안고 있는 것이 사실 대단한 보물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것을 깊이깊이 간직해온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가. 그런데 지금 패소(牌召)가 있다 하여 자현(自衒)의 혐의도 돌볼 겨를없이 금방 달려간다면 어떻게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도(道)를 존중하고 세(勢)를 잊게 하는 마음을 갖도록 인도하여 후일 사물을 바루고 백성들을 수화(水火) 속에서 건져내는 기틀을 만들게 할 수 있겠는가. 이 어리석은 자는 그래서 두리번거리고 두려워하며 진퇴(進退) 문제를 스스로 결정 못하고 있는 것이라네. 그것은 감히 교만하거나 방자해서도 아니고 또 감히 무엇인가를 바라서도 아니라네.
《시경》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왜 가고 싶지 않으랴만 우리 벗들이 무서워서”라고 말일세. 지금의 내 뜻은 바로 그 옛분들이 또 무서운 것이네. 형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형께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결론을 내려주셨으면 좋겠네. 마침 손님이 있어서 남의 손을 빌린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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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그립던 차에 편지를 주시고 또 교훈이 되는 말씀을 많이 해주셔서 마음이 깨치고 많은 위안이 되었다네. 더구나 이 무더운 장마에 기거가 좋으시다는 걸 알게 되어 더욱 기쁘이. 나는 성은을 입고 조정에 있으면서 아무 도움도 되는 것이 없다가 물러나면서 보답의 뜻으로 한 말씀 올린다고 올렸던 것이 뜻하지 않게 주상의 노여움만 사서 이 모양으로 보탬은 없고 손만 있게 되었으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지. 사실은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니 낸들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주상의 마음에 끝까지 아무런 변동이 없고 세상에도 아무런 도움이 없을 것인지는 아직은 모를 일이지만 형마저 왜 그 일로 하여 위구와 동요를 느끼는 듯하는 것인가? 상소 내내 누누이 강조한 말들은 그 모두가 지금 세상 일에 관계된 것들이고, 그중에서도 재최와 참최에 관한 말은 기실 임금도 무시하는 주장이 득세하여 결국 나라도 없는 지경에까지 가지 않을까 염려가 돼서 한 말이었네. 옛 사람도 한때 좌립(坐立)의 위치가 잘못되었던 일을 가지고 그 나라의 흥망을 점친 경우도 있었는데, 이 문제로 말하면 위치가 잘못된 것 치고는 크게 잘못된 일이니 회한(悔恨)이 어찌 없겠는가.
이조연에게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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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찌는 듯한 더위에 체후는 어떠신가? 그리고 원방(元方)의 병환은 또 어떠한가? 마음이 늘 쓰인다네. 이쪽은 날마다 앓는 것이 일이어서 편할 날이라고는 없다네. 지난번 비를 빌기 위해 올린 차자는 그대로 실행이 안 되었고, 영상이 차자로 청한 날짜는 초이튿날이지만 이제 여름이 거의 끝나가고 시절이 이미 늦어버렸으니, 어찌 해야 좋단 말인가. 체부(體府)에서는 그제 회의에서 이미 그만두기로 결정을 했다고 하는데, 맨 먼저 주장했던 형으로서 한 마디도 안 해서야 되겠으며 또한 그 책임도 져야 할 것 아닌가. 말하는 자들은 그 사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관직만을 따져 말하고 있으니, 주상을 위해 분명히 말할 자가 누구이겠는가. 손 발 한번 움직이는 사이 자칫 잘못하다가는 사방에 주상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알리는 꼴이 되어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충의(忠義)를 바칠 마음이 없게 만들 염려가 있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우리들의 죄인 것이네. 안부 전하며 이만 줄이겠네.
이조연에게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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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신 편지 받고 밤 사이에도 체후가 좋으시다는 걸 알게 되어 위안이 되네. 탑전에서 있었던 얘기는 어제 계문(季文)이 찾아온 편에 대강 들었지만 홍대성(洪大成)이 떠도는 공론에 휘말려서 매우 잘못된 말을 아뢰었다는데 형은 그를 바로잡을 말 한 마디도 않고 그냥 조정을 멀리 떠나 겉체면이나 차리려고 하는가? 형이 무슨 말을 아무리 해도 내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 것이네. 맨 처음에 한 일이 형살(刑殺)이라는 하나의 큰 사건에 실수를 저질렀으니, 그게 어디 작은 문제인가. 조정 중신들이 그를 만류하지는 않고 자질구레한 법을 적용하여 한쪽 울과 담을 무너뜨려 버리려고 하였으니, 그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것이 어디 우리가 평소 군징(君澄)에게 바라던 일인가.
그리고 계문이 오늘 강석(講席)에 들어가서 어제 아뢰지 못했던 것을 마저 아뢰어 호백(湖伯)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형도 그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아닌가. 그리고 우상이 올린 상소문을 형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들이 조정에 있으면서 의리를 저버리고 인륜에 어그러진 일을 하여 세상 일을 이렇게까지 못 쓰게 만들어 버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네. 사람으로 하여금 밥을 대해도 먹을 것을 잊고 밤중에도 일어나 침상을 맴돌게 만들고 있다네.
신시 이후에 혹시 성균관으로 왕림하실 수 있겠는가? 속에 있는 걸 좀 털어버려야겠네. 너무 피곤해서 남의 손을 빌렸기에 이만 줄이네.
계문의 말을 들어보면 군징이 말하고 나온 뒤에 자기도 한 마디 하려고 했다가 형이 만류하는 바람에 못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형 자신만 직분을 잃은 것이 아니라 남까지 직무 수행을 못하게 만든 것 아니겠는가. 임금이 일단 명령을 했다고 해서 신하가 그를 감히 만류해서는 안 된다면 옛날부터 있었던, 난간을 부러뜨리고 옷깃을 끌어당기며 조서를 불태워버리고 공독(公牘)을 보충했던 자들은 모두가 신하 도리를 잃은 자들 아니겠는가.
이조연에게 답함 2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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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남산만큼이나 쌓이고 그립기는 또 못 견디게 그리운 이 즈음에 마침 서찰이 와 쓸쓸함이 조금은 풀렸다네. 이쪽의 오늘 일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야. 이제 떠나는 길밖에 없는 것은 형이나 나나 같은 입장이지만 형은 딱 잘라 할 수 있어도 나는 좀 머뭇거릴 수밖에 없는 것이 국상(國祥)이 머지 않았고 내가 책임 맡은 문자(文字)는 그 안에 다 마쳐야 비로소 홀가분하게 갈 수 있기 때문이지.
다만 옛사람들이 말했던 대로, 임금은 어리고 나라는 위태위태하며 대신들은 서로 사이가 안 좋고 백성들 마음은 들떠 있고 한 것이 마음에 걸릴 뿐이지. 형이 서울 가까이 있으면서 제반(祭班)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리로 보아 미안한 일인데 그때 일단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면 안 되겠는가? 나라에 일이 있으면 그날은 서울 근교의 백성들도 모두 가 보는 것이 규례이니까 말일세. 전번 편지는 읽고 감탄을 했는데 내가 지금 행장을 쓰느라고 편지고 인사고 다 전폐하고 있어 아직 답을 못했다네. 이해하시게. 이만 줄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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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전서 제24권 / 기(記)
백호 신거기(白湖新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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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驪州)는 실로 기성(箕星)의 한 중간 분야로서, 우리나라로는 등성마루가 되어 나라의 상류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북성(北城)을 베고 장강(長江)을 띠어 좋은 경치를 이루었는데, 물은 곤곤히 흐르고 산은 높고 수려하며 들판은 넓고 편평하니, 강의 위아래에 이곳을 놔두고는 일컬을 것이 없다고 한다.
북성을 떠나 강을 따라서 내려가면 또 나의 천태(天台)ㆍ백호(白湖)란 곳을 만나게 되는데, 주치(州治)와의 거리는 백 리도 채 안 되어 서로 바라보인다. 강의 근원은 영(嶺)의 오대산(五臺山)ㆍ태백산(太白山)에서 시작하여 구불구불 수백 리를 내려가 속리산(俗離山)의 물과 만나가지고 여기에 이르러 다시 충주(忠州)ㆍ원주(原州)ㆍ음성(陰城)ㆍ이천(利川) 등 몇몇 고을의 물과 합해져서 더욱 커진다. 이 물이 큰 들판을 돌아서 천태를 잠가 백호를 이루니, 천태의 시초는 실로 원적산(元積山)에서 나온 것이요, 원적산의 시초는 속리산에서 나와 상당(上黨)을 거쳐 태원(太原)을 경유하여 북쪽으로 상산(常山)의 서북쪽을 통과해서 죽 연달아 내려가 황무(黃武)가 되고, 또 꺾이어 동으로 달려 여기에 미쳐서는 굼틀굼틀 가기(佳氣)가 충만하여 이것이 백호에 이르러서 다한다. 이것이 여주 지세(地勢)의 대략적인 것이다. 여기에서 남쪽으로는 호령(湖嶺)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신도(神都)를 향하는데, 그 가운데서 천태를 의지하고 백호를 굽어보며, 안은 깊숙하여 널리 용납할 만하고 밖은 광활하여 큰 들판을 가로질러 임해있는 곳이 바로 내가 사는 곳이다.
숭정(崇禎) 17년인 갑신년 봄에 처음으로 내가 이 경계에 올라 위연히 감탄하기를,
“아, 아름답다, 이 어찌 하늘이 나를 살게 한 곳이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아무도 나보다 먼저 얻은 사람이 없었단 말인가?”
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여기저기를 바라보니, 우뚝하게 솟아올라 충만한 기운이 높이 하늘까지 닿아서 동북을 횡단한 것은 용문산의 높은 봉우리이고, 깊게 뻗치어 아득하고 넓게 내려와 혹은 돌아흐르기도 하고 혹은 곧게 흐르기도 하여 뱉고 받아들이고 삼키고 내뿜으면서 동남쪽의 광대히 넘실대는 것은 흘러오는 여강(驪江)의 물줄기이다. 서리어 화산이 되고 우뚝 일어나 원적산이 되어 여주로 들어오는 것은 마치 천리마가 먼 길을 가는 것과 같고, 멀리 있는 것은 월악(月岳)이요 가까이 있는 것은 우수(牛首)이다. 치악(雉岳)과 운악(雲岳)은 마치 난새와 봉황새가 서로 빙빙 돌며 날다가 내려앉는 것과 같고, 북성(北城)ㆍ오갑(烏甲)ㆍ가섭(迦葉) 등 여러 산으로부터 죽 달려 내려와 꼬불꼬불 돌아서 깎아질러 상두산(象頭山)이 되고 상두산은 우뚝 솟아 마치 사방 산천을 쫓아가 누르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수많은 산들이 날고 뜨고 서로 취합하곤 하면서 수십, 수백 리 이내에 푸릇푸릇 숨고 나타나고 하지 않는 것이 없어, 이에 왼쪽은 용문이요, 오른쪽은 원적인데, 앞으로 장호(長湖)를 띠고서 수많은 산봉우리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나는 가시덤불을 베내고 숲속을 헤치고서 여기에 집터를 잡은 다음, 내가 울을 치고 내가 언덕을 쌓고서 두어 칸의 협소한 집 하나를 지어 비바람과 추위와 더위를 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위치는 양지쪽을 향하고 음지쪽을 등졌으며, 그 샘물은 마실 만하고 그 토지는 곡식을 가꾸어 먹을 만하며, 소나무는 늙어서 어루만져 완상할 만하고 바위는 편평해서 앉아 노닐 만하다. 그리고 위로는 광대한 하늘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넓고 깊은 못을 내려다보며, 운연(雲煙)의 여닫음과 무우(霧雨)의 내뿜는 것과 설월 풍화(雪月風花)ㆍ조석 주야(朝夕晝夜)의 펴이고 움츠림과 음양(陰陽)의 변화와 사시(四時)의 기후와 갈매기ㆍ백로의 출몰(出沒)과 곤새ㆍ두루미의 부르짖어 우는 것과 인물(人物)이며 어상(漁商)들의 왕래하며 배회하는 것 등, 모든 시야에 들어와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서 사람의 희락(喜樂)과 우분(憂憤)을 분발 감격시키는 것들이 대개 또 잠깐 사이에 오만 가지로 변화하여 끝간 데가 없다.
그 주(州)를 내봉지주(來鳳之州)라 명명하였으니, 아마도 그 봉황이 여기에 왔었다는 것인가? 그 못을 잠약지연(潛躍之淵)이라 명명하였으니, 혹 용(龍)이 여기에서 숨고 날아오르고 했던 것인가? 바위에는 ‘망팔(望八)’이라 새기었으니, 두보(杜甫)의 말을 취하여 발을 씻을 만함을 이른 것이고, 당(堂)에는 ‘대유(大有)’라는 편액(扁額)을 걸었으니, 이는 《주역(周易)》 대유괘(大有卦)의 뜻을 빌려서 관조(觀頫)하는 것이 원대함을 이른 말이다.
천태산(天台山)은 편평한 들판에서 빼어났고, 큰 강이 한가운데로 흘러서 온갖 냇물이 한 군데로 모이게 되고 만상(萬象)이 한가지로 거울처럼 비추이게 되었는데, 한 구역(區域)이 실로 여기를 굽어보고 있으므로, 마침내 이를 ‘만상지대(萬象之臺)’라 명명하였다. 또 소나무 수십 그루가 성하게 굼틀거리는 용처럼 생긴데다 오래된 가지의 푸른 잎이 완상할 만하고, 때로는 사나운 바람이 맹렬히 부딪치어 오만 구멍이 일제히 소리를 내기도 하며, 혹 고요한 날에 소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려 마치 음악 연주하는 것과 같은 소리가 울리어 그 쌀쌀함을 또 들을 만하므로, 이를 또 ‘만뢰지정(萬籟之亭)’이라 이름하였다.
용이 되고 봉황이 되어, 전야에 있기도 하고 못에 있기도 하면서 만상(萬象)을 임하여 만뢰(萬籟)를 듣노니, 그 산은 만 겹이요 그 물은 만 길이라, 여기에 깃들어 휴식할 만도 하고 여기에 들어앉아 숨을 만도 하다. 그런데 어찌 이런 곳을 곁눈질한 자가 없었으랴마는, 또 아무도 그 땅을 만나지 못하여 이전에는 내내 가려져 오다가 이제야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것이 혹 이른바 유도자(有道者)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천명(天命)이 자못 기다림이 있음을 인하여 나의 생애는 부족함이 없게 되었으니, 내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산에서 캐면 고사리와 고비가 있고, 물에서 낚시질을 하면 잉어와 쏘가리가 있으며, 무성한 나무를 어루만지며 배회하기도 하고, 또한 높은 데에 올라서 먼 곳을 바라보기도 한다. 여기에서 노래하고 여기에서 춤추며, 여기에서 누워 쉬고 여기에서 노닐며, 방 한구석에서 예(禮)를 외고,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시(詩)를 읊으며, 거문고를 타고 글을 저술하며, 선왕(先王)의 도를 노래하노라면 충분히 나의 분(憤)을 풀고 나의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내가 들으니, 부자(夫子)의 말씀에 이르기를,
“높은 데에 올라 먼 데를 바라보면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하였으니, 여기에서 생각을 다하면 이르지 못할 곳이 없을 것이다. 이 언덕에 올라 먼 데를 바라보니, 내 마음에 슬픔을 느끼게 된다.
나는 동이(東夷) 사람으로, 삼묘(三畝)의 집, 일보(一步)의 방에 거처하면서 발자취가 일찍이 마당 밖을 나가지 않았었다. 15세에는 문자(文字)를 알았고, 20세에는 고인(古人)의 글을 읽었으나, 30세가 되어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뜻이 펴이지 못하고 대도(大道)로의 길이 막히었다.
그래서 결국 책상자를 열고 주렴을 내리치고서 목탑(木榻)이 뚫리고 가죽 끈이 끊어지도록 발분하여 밥먹는 것도 잊고 걱정하는 것도 잊고서 천하의 글을 다 읽고 성현의 은미한 말들을 연구하며, 천지의 운화(運化)를 관찰하며 고금의 치란 흥쇠(治亂興衰)에 관한 자취를 발견해서 천재(千載)의 지우(知遇)를 기약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또 나의 날개를 크게 떨치어 창해(滄海)를 횡단하여 연조(燕趙) 지역으로 건너가서 주로(周魯)의 옛터를 유람하고, 양도(兩都)의 남아있는 자취와 강하(江河)의 호탕(浩蕩)함을 관람한 다음, 태행산(太行山)을 오르고 숭산(嵩山)ㆍ화산(華山)의 절정에 올라 사해(四海) 민인(民人)들의 풍부함을 보고 또 산천(山川)들이 꼬불꼬불 돌아서 깊숙하고 멀고 기이하고 괴상하고 질탕한 경관이 극도에 달한 것을 관람하고서, 더러 천하에 뛰어난 영웅 호걸이며 비분강개한 선비들을 접견하여 세도(世道)의 흥패 존망(興敗存亡)에 관한 일과 상하 고금(上下古今)에 관한 논의들을 궁구함으로써 이 높다랗게 쌓인 채 억눌려 막힌 회포를 토로해보지도 못한 실정이다.
나는 이렇게 방황하며 읊조리고 탄식이나 하면서 스스로 이 오랑캐 지역 먼 구석의 적막한 곳에 방치된 채, 무기력하고 옹졸하고 무료하게 지내면서 오직 전답이나 가옥을 장만하는 것으로 소일하면서 홀로 자나 깨나 한탄이나 하고 있다. 또 영원토록 이 동강(東岡)의 언덕을 고수하여 살면서 조정(朝廷)의 임면 출척(任免黜陟)하는 일에 귀기울이지 않고, 천하의 치란(治亂)에 관한 일을 마음에 두지 않으며, 진 시황(秦始皇)ㆍ한 고조(漢高祖)ㆍ항우(項羽) 시대의 변역과 진(晉)ㆍ한(漢)ㆍ주(周)의 쟁탈전에 대해서도 간섭하여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장부의 평생 소망과 남아가 사방으로 멀리 유람하려는 뜻이 더더욱 사그라지게 되었으니, 아, 슬프다.
옛날 중니(仲尼) 같은 성인은, 위로는 황제(黃帝)ㆍ우순(虞舜)ㆍ하후(夏后)의 성대함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은(殷)ㆍ주(周)ㆍ오패(五霸)의 일을 상고하고 나서 진(晉)ㆍ초(楚)ㆍ제(齊)ㆍ양(梁)의 지역을 두루 돌아다닌 다음, 태산(泰山)에 올라 천하를 왜소하게 여기었으니, 그 피곤한 채 돌아오면서도 오히려 이렇게 탄식을 한 것이다. 그리고는 또 장차 사방을 주유(周遊)하려는 뜻을 드높여 바야흐로 바다에 뜬 떼[桴]를 타고 저 창해(滄海) 밖으로 나가 세상을 버리고 뜻을 한껏 펴보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소견 좁은 나는 잗단 세속일에 골몰하여 일생을 보내면서 끝내 대방(大方)을 밟아 보지도 못하고, 저 척안(尺鷃 아주 작은 새 이름)이 훌쩍 날아오르려다가 그냥 땅에 떨어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데에 비교할 뿐이니, 비록 먼 데를 기대하지는 않을지라도 어찌 유독 슬프지 않겠는가. 대체로 군자가 홀로 있을 적에는 전세(前世)의 일을 생각하여 이 때문에 탄식을 하게 되는 것이니, 옛일을 생각하고 지금의 사정을 헤아려보면 또한 어떻게 탄식이 없을 수 있겠는가. 울적한 나의 회포는 끝없이 길건만 날개가 없어 높이 날아오를 수 없고, 허둥지둥 나의 말이 달려가기는 하나 걱정스러워라 내가 사방에 그 누구와 함께 달리겠는가.
고인 또한 말하기를,
“만일 구할 수 없을진댄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르리라.”
하였으니, 내가 들은 바에 의거한다면, 비록 성지(聖智)를 지닌 분일지라도 이와 같이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어찌 시(時)와 명(命)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과연 시와 명이 그러하다면 또 어찌 탄식할 것이 있겠으며, 또 어찌 마음대로 슬퍼하잘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부자(夫子)께서 치사(致思)의 탄식이 있게 된 것이니, 또 어찌 다만 동로(東魯)에서 궁액을 겪은 일과 천하를 작게 여긴 일과 창해(滄海)에 뜨고자 하는 일과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자 한 일만을 말할 뿐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노라. 담담(炎炎)한 것으로 논하자면 그 누추함을 달게 생각할 것이요, 여유작작한 것으로 말하자면 누가 그를 능가하겠는가. 반찬 없는 거친 밥 먹고 물마시고 팔꿈치 베고 자더라도 즐거울 뿐이요, 목석(木石)과 함께 살고 미록(糜鹿)과 친구를 삼아도 뜻에 맞을 뿐인 것이다. 도(道)란 본디 굴신(屈伸)이 있는 것이요, 물(物)은 여러 가지를 겸해서 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는 명(命)이 있고 명에는 때[時]가 있고 때에는 일[事]이 있는 것이니, 하늘이 시킨 대로 따르고 명에 맡겨버리고 때에 순종하여 확고히 나의 일만을 능란하게 해나갈 뿐인 것이다.
여주의 산은 우뚝하여 나의 옷깃을 드날릴 수가 있고, 여강의 물은 맑아서 나의 갓끈을 씻을 만하다. 닭을 길러 번식시키고 나무를 기르며, 자식을 가르쳐 기르고, 저 논밭을 내 쟁기를 갈아 농사지으며, 비록 흉년이 들더라도 반드시 나에게는 풍년이 있을 것이다. 내 기장과 내 벼를 수확하여 오직 이것으로 나의 노후(老後)를 편케 하고, 서(書)를 외고 시(詩)를 읽어서 또 나의 뜻을 구하며, 내 박달나무에서 땔나무를 취하고, 고기를 낚고 사냥을 하며, 길게 노래를 하고 느릿느릿 춤을 추며, 혼자 술 부어 마시고 혼자 시 읊고 하면 나는 이것으로 만족하게 여길 뿐이다.
조용하고도 너른 이 땅에 그 누가 와서 내 사는 곳을 뺏으려 하리오. 진실로 나의 천명이 여기에 있는데 또 누가 나의 일을 변화시킬 수 있겠으며, 중국(中國)을 간들 나에게 무엇이 더 나아질 것이 있겠는가.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더 아끼는 마음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옛사람은 속으로 얻은 것을 중히 여겼는데, 밖에서 구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좀 사치스러운가? 그러나 나는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 나는 이미 중니(仲尼)의 말에 감격하여 나의 좁은 소견을 슬퍼하거니와, 한편으로 내가 오히려 일삼을 바를 얻음으로써 슬픔을 일삼을 것이 없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말하여 나의 뜻에 맹세하는 바이다. 그러니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또 내 말이 미치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여 우리 부자(夫子)의 ‘생각을 다한다[致思]’는 교훈을 끝까지 연구해서 서로 꾸준히 나를 계발시켜주기 바란다. 그리고 연운(煙雲)ㆍ초수(草樹)ㆍ유치(流峙 산천(山川)을 뜻함)ㆍ청음(晴陰) 등의 경관에 대해서는 나 또한 다른 사람과 함께 완상하기를 좋아하노니, 가능한 대로 더 발휘하여 찬양의 말을 널리 펴서 내 집의 좋은 경치를 빛내주면 그 또한 좋겠다.
망팔(望八) : 당나라 두보(杜甫)가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주(韓注)에 부친 시에, “동정호에 발을 씻고 팔황을 바라본다[濯足洞庭望八荒]” 한 데서 온 말이다. 《杜少陵詩集 卷17》
주렴을 내리치고서 : 집에 꼭 들어앉아 글만 읽는 것을 이름. 한(漢)나라 때 동중서(董仲舒)가 주렴을 내리치고 수년 동안 글을 강송(講誦)했던 데서 온 말이다.
목탑(木榻)이 뚫리고 : 삼국(三國) 시대 위(魏)의 관녕(管寧)이 50여 년 동안을 한결같이 하나의 목탑에만 꿇고 앉아 글을 읽었으므로, 그 무릎 닿은 곳에 구멍이 뚫렸다는 데서 온 말이다. 《三國志 卷11》
가죽 …… 끊어지도록 : 공자(孔子)가 만년에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워낙 많이 읽었던 관계로, 책을 맨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데서 온 말이다. 《史記 孔子世家》
만일 …… 따르리라 :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부(富)를 마음대로 구할 수 있을진댄 비록 채찍을 잡는 천역(賤役)이라도 내가 또한 하겠거니와, 만일 마음대로 구할 수 없을진댄 내가 좋아하는 것(의리(義理)를 뜻함)을 따르리라.” 한 데서 온 말이다. 《論語 述而》
치사(致思) : 생각을 쓴다는 뜻으로, 공자가 일찍이 북쪽으로 농산(農山)의 위에 올라가 노닐면서 사방을 바라보고 위연히 탄식하며 말하기를, “높은 데에 올라서 아래를 바라보면 사람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여기에 생각을 쓴다면 그 생각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한 데서 온 말이다. 《孔子家語 卷2》
백호전서 제27권 / 잡저(雜著)
만필(漫筆) 중(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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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관(諫官)을 설치한 것은 옛날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秦)나라 때에 시작되어 당(唐)나라 때에 대단하였고 송(宋)나라 때에 기세가 극히 치성하였던 것이다. 송나라 사람의 기록에 “송 태조(宋太祖)가 일찍이 ‘간관을 설치하고 남인을 기용하여 재상으로 삼았을 경우 나의 자손이 아니다.[設諫官 用南人作相 非吾子孫]’라는 12자를 써서 비석에 새긴 다음 대궐 뜰에 세워 후세에 보였다.”고 하였는데, 남인을 기용하여 송나라가 끝내 천하를 잃게 되었으니, 왕흠약(王欽若)ㆍ채경(蔡京)ㆍ여혜경(呂惠卿)ㆍ진팽년(陳彭年)의 무리가 모두 남인들이다. 옛날 사람이 이미 간관의 설치에 대해서 논하였지만 아직도 간관을 설치하는 것이 실제로 천하를 망하게 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 대체로 송나라 태종(太宗)이 처음으로 사간(司諫)ㆍ정언(正言) 등의 관직을 설치하여 가법(家法)을 변경하였고, 인종(仁宗)이 또한 간관의 인원수를 증가시켜 그들의 세력을 더 키워 주고는 그들로 하여금 재상 및 국론을 동요시키게 하였다. 이에 간관의 기세는 날로 횡포스럽고 대신들의 권력은 날로 무시되어 대신과 간관들이 서로 조정에서 승부를 겨루어 천하에 많은 일들이 발생하였고, 송나라가 망할 무렵에는 놀라운 사건이 마구 발생하고 온갖 사단이 함께 일어나 천하의 환란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간관을 설치한 본의는 임금의 총명을 넓히려는 것이었는데 심복(心腹)이 먼저 병들게 되었고 대신들의 부정을 단속하려는 것이었는데 간악한 소인들이 더욱더 기세를 부리게 되었으며, 언로(言路)를 통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국시(國是)가 더욱더 분명하지 않게 되었고 현명한 인재들이 조정에 있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요행으로 과거에 급제한 자들이 간관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붕당이 형성되어 군자들이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였고 언론이 우세하여 훌륭한 계책이 끝내 시행되지 못하였으며, 관직을 한쪽 사람들에게만 제수하여 대중의 여론이 실제로 막히게 되었는데, 성군(聖君)의 시대에 있어 반드시 실제로 유익하지는 않았고 혼군(昏君)의 시대에 있어 재앙만 있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과연 말 잘하는 소인을 지적하고 간사한 무리를 공척하는 사람을 선출하여 간관의 자리에 있게 했을 경우 혼매한 임금과 포악한 소인들이 원수처럼 여겨 후한(後漢) 말엽에 환관들의 당고(黨錮)의 옥사와 당(唐)나라 말기에 청류(淸流)들의 시체를 황하(黃河)의 탁류에 버린 화난이 반드시 일어난 것이고, 불행하게도 양외(楊畏)ㆍ황리(黃履)ㆍ진가(陳賈)ㆍ호굉(胡紘)의 무리가 이 자리를 차지했을 경우에는 또한 장돈(章惇)ㆍ채경ㆍ한탁주(韓侘冑)의 무리가 저들의 세력을 믿고서 간당비(奸黨碑)와 위학적(僞學籍)을 세웠던 것인데, 간관이 단지 국가에 해만 되고 복이 되지 못하며 유익한 것이 언제나 적고 손해가 된 것이 매우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체로 간관의 세력이 대단한 것이 송나라 때보다 더한 적이 없었는데 천하의 환난도 또한 간관으로 인하여 격심하였으니, 아, 애절한 일이다. 그렇다면 송 태조(宋太祖)의 경계한 말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았던 것인데 자손들이 소홀히 여기고 그 경계를 범하여 자신들이 그 화난에 빠졌을 뿐더러, 결국에는 남인(南人)과 간관이 한편이 되어 송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아, 또한 이상한 일이다. 전대의 일을 잊지 않는 것이 후대 사람이 배워야 할 일인데, 이러한 것이 어찌 조씨(趙氏)의 경계만 될 뿐이겠는가.
이러하건대 장차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삼대(三代) 이전에는 백관들이 각자 자신들의 직책으로 간하였는데, 진(秦)ㆍ한(漢) 이후 처음으로 간의대부(諫議大夫)를 두어 논의를 맡도록 하였고, 당(唐)나라 무후(武后)와 송(宋)나라 진종(眞宗)은 또다시 규핵(糾劾)을 전담시키는 데 있어 뜬소문을 가지고 논핵할 수 있도록 하여 재상의 권력을 분산시켰는데, 그 당시의 국가가 태평한 세상이었는가 어지러운 세상이었는가를 살펴보면 간관을 설치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를 논할 수 있다.
간관을 설치하고 나서 언로(言路)가 좁아졌다. 대체로 임금의 이목인 간관을 한쪽 편의 사람에게만 제수하고 조정의 관직은 자신의 직무를 각자 전담하는 것으로서 실로 다른 사람의 직무에 간여할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후대에 상관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직책을 벗어나 일을 말한 죄를 짓고 하급 관리도 지위를 벗어나 윗사람에게 버릇없는 짓을 하는 혐의를 갖게 되어, 간악한 소인들이 간혹 임금의 신임을 받게 되고 충직한 말과 지론의 계책을 지닌 사람들이 모두가 가슴에 울분을 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생각건대, 이 간관의 제도는 실로 포악스러운 진(秦)나라 때 상앙(商鞅)ㆍ이사(李斯)의 무리가 천리(天理)와 인심(人心)에 위배되는 정치를 시행하는 데 있어 사람들의 비난을 듣기 싫어하여 이 기관을 설치하여 남몰래 천하 사람의 입을 막으려고 했던 것으로서, 《시경(詩經)》ㆍ《서경(書經)》을 불태우고 비방하는 사람을 멸족시킨 행위와 똑같은 방법이라 여긴다. 그런데 후대 사람이 그러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말하기를 “쟁신(爭臣) 및 간관은 국가를 소유한 임금들의 기강이 되고 이목과 같은 것으로서 버릴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사와 조고(趙高)의 술책이 단지 그 당시 사람들만 우매한 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후대 사람을 우매한 자로 만들었다고 할 만한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간관을 설치하지 않으면 임금이 어떻게 자신의 과오를 들을 수 있으며 대신들의 죄악을 어느 누가 규탄할 것이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사방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귀를 통하게 하며, 백관들에게 자문하여 각자 맡은 직책으로 간하게 하고 백성들에게 물어 각자 자신의 의견을 말하게 하며, 관리들은 조정에서 논의하도록 하고 상인들은 시장에서 비평하도록 하며, 사자(士子)들은 충직한 말을 올리도록 하고 악사(樂師)는 시(詩)를 외우게 하며, 보필하는 신하는 임금의 잘못을 타이르고 친척들은 임금의 행동을 살피게 하며, 비방목(誹謗木)을 세워 온 천하 사람이 자신의 과오를 공척하게 하고 진선정(進善旌)을 세워 온 천하 사람이 할 말을 다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옛 선왕(先王)의 제도인 것이다. 공자(孔子)의 말씀에 ‘제요(帝堯)ㆍ제순(帝舜)도 자신의 몸을 낮추어 천하 사람의 말을 살펴 들었다.’라고 한 것이 이러한 것인데, 간관을 두는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며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이 넓은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나는 임금이 대신들과 모의하고서 하찮은 신하들이 참여하게 하며, 노성(老成)한 사람과 모의하고서 신진(新進)들을 참여시키며, 한 사람과 모의하고서 여러 사람의 말로 판단하는 것은 실로 국론을 결정하는 데 있어 좋은 계책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설치한 제도가 송나라와 같고 국가의 화복(禍福)도 또한 서로 같은 점이 있는데 후대의 논의하는 자들이 이 점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이다. 아, 우리나라에 간관이 없었다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그처럼 혹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을사년(1545, 명종즉위년)에 간흉들의 기세가 그토록 치성하지 않았을 것이며, 서궁(西宮)에 모후(母后)를 유폐한 인륜의 변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게 포위당한 화난이 어찌 그토록 심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이러한 것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서 이러한 앙화가 간관들로부터 시작된 것에 대해서 탄식하며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세상에 형체가 드러나지 않는 재난이 있는데, 참람한 짓을 하는 권신(權臣)은 아니지만 권신보다 더 참람한 것이 있고 소요를 일으키는 도적이 아니지만 도적보다 더 소요스러운 것이 있고 세력이 강한 오랑캐가 아니지만 오랑캐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붕당(朋黨)의 논의인 것이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붕당이 실로 천하를 어지럽게 할 만한 것이지만 붕당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하는 자도 반드시 천하를 잃는 지경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이에 대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이 눈앞에 있는 신하들에 대해서 단지 사악(邪惡)한 자와 정직한 자를 분별해야만 하고 입으로 붕당이란 말을 하지 않으며 가슴속에 붕당을 제거하려는 생각을 갖지 않을 경우 붕당을 절반쯤 제거하게 되고, 간관의 제도를 혁파하고 총재(冢宰)의 직임을 회복시킬 경우 또한 나머지 절반의 수를 제거하게 될 것이다.
과거 제도를 설치한 이후 인재를 제대로 선발하지 못했고, 간관을 설치한 이후 조정이 어지러웠고, 군현(郡縣) 제도가 설치된 이후 천하가 동요되었는데, 이 세 가지 폐단을 제거하지 않을 경우 아무리 훌륭한 정치를 말하려고 하더라도 모두가 구차스러울 뿐이다.
과거 시험에 이름을 쓴 종이를 말아 붙인 것은 당(唐)나라 무후(武后) 때 시작된 것인데, 이러한 것은 법만을 믿고 사람을 믿지 못했던 것으로서 본시 사정(私情)으로 합격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명(明)나라 때에는 부정을 방지하고 감시하는 법을 더욱더 엄밀하게 하였지만 끝내 농간을 부리는 것을 금지하고 과제(科題)가 유출되는 것을 막지 못하여 한 번 과장(科場)을 열 때마다 비난하는 말이 시끄러웠고, 때로는 방목(榜目)을 아직 게시하지 않았는데 합격자의 성명이 벌써 선포되어 공정한 도리로 과거를 치렀더라도 원망과 비난이 곧바로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과거를 주관한 신하 중에 부정에 관계하지 않은 사람이 있을 경우 화단의 계제가 발생하게 되고 억울하게 화액을 당한 자도 있었다. 당나라 때에 우승유(牛僧孺)ㆍ이종민(李宗閔)의 일로 말미암아 일어난 화난은 과거가 원인이 된 것이었고, 명 태조(明太祖) 때 유삼오(劉三吾) 등 수십 명이 또한 과거로 인하여 모두가 능지처참의 형벌을 받았는데, 이러한 것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말하기를,
“천하는 본시 무사한 것인데 과거가 소요를 일으키고, 조정이 본시 무사한 것인데 간관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길은 다르지만 모두가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할 만한 것으로서, 어찌 용렬한 자가 소요를 일으키는 것만 할 뿐이겠는가.”
세상에 옥송을 다스리는 자들이 자복을 받아야만 형벌을 시행할 수 있다고 하여 간혹 죄인이 자복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죄의 실정이 환히 드러나고 증거가 명백한 것에 대해서도 곧바로 그 죄를 단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이러하므로 후대에 고문의 형벌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고문을 하는 데 있어 사람들이 실로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거짓으로 자복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동해(東海)의 효부(孝婦)가 거짓으로 자복하고 위원충(魏元忠)이 죄를 승복한 것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미 자복했다고 하여 형벌을 시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겠는가
우리나라에서 옥사(獄事)를 신문하는 데 있어 애초에는 법으로 기준을 정한 것이 없었는데 병자년(1456, 세조2)에 단종(端宗)을 복위시키려고 한 옥사에 이르러 처음으로 불로 단근질하는 형벌이 있게 되어 그 후 그대로 인습하여 시행하였다. 광해조(光海朝) 때 역적의 옥사가 여러 번 일어나자 가혹한 형벌을 함부로 시행하여 고문을 받은 자들이 곧바로 승복하였다. 이에 대해 상국(相國) 이항복(李恒福)이 말하기를 “송피(松皮)를 두드려 떡을 만드는 것처럼 사람을 매질하여 역적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사람들이 명언이라고 하였다.
나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문의 형벌은 옛날에 없었던 것이고 진(秦)나라 말기에 시작된 것인데 한(漢)나라에 유전되어 당(唐)나라 때 극도에 이르렀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 없어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세상의 군자(君子)들은 무엇 때문에 그 폐단의 시말을 캐내어 옛 제도를 회복시킬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자문하고 의논도 하며, 지체(肢體)를 찢어 죽이기도 하고 목을 베어 죽이기도 하며 의형(劓刑)ㆍ월형(刖刑)과 궁형(宮刑)ㆍ경형(黥刑)을 하는 것도 괜찮고, 유배하고 안치하는 것도 괜찮으며, 과오로 지은 죄는 사면하고 의심스러운 죄는 풀어 주는 것도 괜찮은 것인데, 무엇 때문에 고문을 하고 또 무엇 때문에 매질로 자복을 받는 짓을 하는가. 채찍과 매질의 형벌은 옛날에 하찮은 죄를 처결했던 것이고 죄수의 실정을 캐내기 위한 것이 아니며, 매질로 고문하고 형벌로 단련하는 것은 실로 상앙(商鞅)ㆍ조고(趙高) 및 내준신(來俊臣)ㆍ삭원례(索元禮) 등의 가혹한 행위인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지나친 형벌은 하늘이 금지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매질하고 고문하는 것이 어찌 백성의 부모인 임금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겠는가. 이에 나는 고문의 형벌이 옛날에는 없었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중국이 오랑캐를 상대하는 데 있어 화친과 전쟁과 수비의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과거의 사적을 살펴보건대, 화친과 전쟁과 항복의 세 가지 방법만 있고 수비의 방법은 없었다. 대체로 전쟁을 하고 나서는 중국이 오랑캐와 화친하는 것이 아니면 오랑캐가 중국과 화친하게 되고, 화친을 한 뒤에는 중국이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이 아니면 오랑캐가 중국에 항복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화친은 오래 유지될 수 없는 것이며 항복은 화친과 전쟁의 끝에 있는 일인 것이니, 안일에 빠져 화란을 겪는 해독은 약자(弱者)에게 늘 있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수비의 경우에 있어서는 전쟁도 화친도 아닌 것으로서 가만히 앉아서 곤욕을 치르기만 하는 방법인 것이다. 비유하건대, 두 사람이 싸우는 데 있어 한 사람은 팔을 걷어붙이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상대의 목을 비틀고 허점을 노려 치기도 하고 단단한 곳을 때리고 요소를 찌르기도 하며 온갖 방법을 다 쓰는데도 한 사람은 단지 상대의 공격에 따라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면서 상대가 공격을 멈추기를 바라고 한 번도 손을 쓰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서 상대의 칼날에 쓰러져 죽임을 당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방법은 사망에 이르지 않으려고 해도 저절로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송(宋)나라가 북쪽 오랑캐에게 처음에는 전쟁으로 강세를 보였고 중간에는 화친으로 안정을 유지하였으나 나중에는 수비하려다가 끝내 지탱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것이 후대의 거울이 되지 않겠는가.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탄(幷呑)하고 육국의 후손들이 진나라를 멸족시킨 것에 있어서도 또한 모두 공격과 수비의 형세가 달랐던 것이다.
역대의 임금들이 조정에 나와 신하들을 대할 때마다 인재가 없는 것을 탄식하였다. 그러나 그 시대마다 천하에 인재가 없었던 것이 아니고 단지 안일에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당(唐)나라 지덕(至德) 연간에 역적을 치는 군사를 일으키자 이광필(李光弼)ㆍ곽자의(郭子儀)가 나타났고, 송(宋)나라 건염(建炎) 연간에 오랑캐를 치는 군사를 일으키자 한세충(韓世忠)ㆍ악비(岳飛)가 나타났는데, 두 임금의 시대는 말세의 안일에 빠졌던 시대이지만 이상 몇 사람의 재능과 기량이 어찌 옛날 사람보다 못했겠는가. 아, 심하여라. 안일의 화액이 짐독(鴆毒)보다 더 혹심한 것이다.
천하가 태평한 시대이더라도 전쟁을 잊어버리면 반드시 위태로운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송(宋)나라가 금인(金人)과 화친하여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였고 또한 다른 오랑캐도 망하게 하였는데, 여진(女眞)이 해상(海上)에서 일어나 요(遼)의 전역을 석권하여 천하를 진동시켰다. 이러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잊었기 때문인데, 원(元)나라가 금나라, 송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또한 그러했던 것이다.
삼대(三代) 이전에 세도(世道)를 주관한 임금에 있어 복희씨(伏羲氏)ㆍ신농씨(神農氏)가 서계(書契)를 만들고 농기구를 만들어 천하에 왕 노릇 한 경우가 아니면 헌원씨(軒轅氏)ㆍ전욱씨(顓頊氏)가 치우(蚩尤)를 죽이고 공공(共工)을 정벌하여 천하에 위세를 보였고,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읍양(揖讓)으로 천하를 넘겨준 경우가 아니면 성탕(成湯)ㆍ무왕(武王)이 포학스러운 임금을 주벌하고 화란을 소멸시켜서 천하의 큰 해악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진(秦)나라가 낭성(狼星)ㆍ호성(弧星), 삼성(參星)ㆍ벌성(伐星)의 기운을 이어받아 무력을 떨쳐 제후들을 병탄하고 나서는 5등 제후의 제도와 성현의 법도를 소멸시켜 선왕(先王)의 행적을 제거하였는데, 그 후 필부(匹夫)인 진섭(陳涉)이 진(秦)나라를 망하게 하였고, 간신(奸臣)인 조조(曹操)가 한(漢)나라를 찬탈하였으며, 오호(五胡)가 진(晉)나라를 전복시켰고, 큰 도둑인 주온이 당(唐)나라를 절취하였으며, 여진(女眞)이 송(宋)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아갔고 몽고(蒙古)가 중국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여자 및 환관들이 천자의 지위를 차지하여 천하를 용이하게 지휘하였고 오늘날에 와서는 떠돌이 도적떼와 하찮은 오랑캐가 합세하여 천하를 차지하였으니, 이러한 것이 어찌 세도(世道)의 그지없는 변고가 아니겠는가. 대체로 성왕(聖王)이 나오지 않은 지 오래 되어 백성들의 우환이 극심하므로 그 형세가 어떠한 경지에 이를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아, 슬픈 일이다. 이후로 중국을 다스리는 임금은 지난날을 징계하여 훗날을 삼가는 도모를 하는 데 있어서 방법을 바꿀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수(隋)나라는 부강하였는데도 군병이 살수(薩水)에서 몰살당하였고, 당 태종(唐太宗)은 뛰어난 무략을 지녔는데도 안시성(安市城) 싸움에 지혜가 미치지 못하였으니, 중국이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실로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런데 한쪽 모퉁이의 하찮은 오랑캐가 적은 군사를 모집하여 곧바로 성 밑에까지 쳐들어와 끝내 항복의 맹약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러한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이던가. 학사(學士) 및 대부(大夫)들은 이 까닭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평양(平壤)에 도읍한 것에 대해서 옛 기록에 “2천 년 전에 신인(神人)이 태백산(太白山)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와 중국의 당요(唐堯) 무진년에 기원(起元)하여 평양에 서울을 정하고 당요와 같이 임금 노릇을 하였는데, 호칭을 단군(檀君)이라고 하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고 하였다. 그 후 주 무왕(周武王) 기묘년에 기자(箕子)가 요수(遼水)를 건너 평양에 오자 단군은 그에게 나라를 넘겨 주고 평양을 떠나 아사달산(阿斯達山)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 …… ”고 하였는데, 이 사실은 우뚝이 천추(千秋)에 빛날 만한 것이다. 단군이 덕을 지닌 사람을 존경하고 어진 이에게 나라를 넘겨 주어 임금의 지위를 버리는 데 있어 헌신짝을 벗어 버리듯이 하였으니, 이것이야말로 요 임금과 순 임금이 천자의 지위를 주고받은 것을 따른 것인데 어찌 중국과 우리나라에 대해서 다르게 볼 수 있겠는가. 단군의 이름은 왕검(王儉)인데 지금 평양성을 왕검성이라 부르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선인(仙人)인 왕검이 서울로 정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사달산은 지금 문화현(文化縣)의 구월산(九月山)인데 그 곳에 단군의 옛 사당이 있으니, 그 사실을 충분히 증명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당요의 무진년에서 무왕의 기묘년까지 한 사람이 어떻게 수천 년이 지나도록 살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준 사람은 단군의 후예인 듯싶다. 그리고 고려(高麗)의 태조(太祖) 왕씨(王氏)는 민간에서 태어나 성씨의 유래를 알 수 없지만 5백 년 왕조의 세대를 전했으니 어쩌면 왕검의 후손이 아닐까.
옛 무덤의 말에 대해서 본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왕검성(王儉城) 서쪽에 기자(箕子)의 묘가 있는데 예부터 말이 서로 전해져 제사를 끊이지 않고 받들어 왔다. 그런데 두예(杜預)의 말에 “양(梁)나라 몽현(蒙縣)에 기자의 묘가 있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하동(河東)에 백이(伯夷)ㆍ숙제(叔齊)의 묘가 있는데 지금 요서(遼西)에 옛 고죽국(孤竹國)에도 백이ㆍ숙제의 묘가 있는 것은 또한 무엇인가. 이에 있어 필시 하나는 진짜이고 하나는 가짜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동의 수양산(首陽山)에 있는 백이ㆍ숙제의 묘도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고, 고죽에 있는 묘는 어쩌면 사상보(師尙父)가 제(齊)나라에 봉해졌으므로 5대까지 주(周)나라에서 반장(反葬)한 뜻이었는가.
화포(火砲)는 예전에 없었는데 남만(南蠻)의 해도(海島)에서 처음 나온 것이다. 지난날 하찮은 무리의 일본(日本)이 이 화기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전복시키고 곧바로 압록강까지 쳐들어가서 중국을 동요시켰다. 그리고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우리나라의 포수를 데려가 끝내 송관(松關)에서 크게 승리하고 산해관(山海關)에서 전승을 거두어 몇 달 지나지 않아 중국을 소유하였다. 저들이 천둥 벼락처럼 명(明)나라 군사를 쳐부수어 천하를 진동시킨 것은 그야말로 황제(黃帝)ㆍ탕왕(湯王)ㆍ무왕(武王)의 군사도 그처럼 맹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늘이 무엇 때문에 이런 흉기를 만들어 내어 다른 종족에게 주어 백성들을 살육하고 중국을 멸망시키는 데 있어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한단 말인가. 아, 또한 이상한 일이다.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남쪽의 화기(火器)와 북쪽의 마병(馬兵)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 환공(齊桓公), 진 문공(晉文公)의 절제가 없고 한신(韓信)ㆍ백기(白起)의 모략이 없었는데도 천하가 그들을 대적하지 못했다. 중국이 적에게 패할 때 마치 강물이 터지고 천둥이 치듯 하여 그 이유를 헤아릴 수 없고 오랑캐들 자신도 승리하게 된 까닭을 알지 못했다. 단지 우리나라의 군사가 가는 데마다 대항하는 진영이 없었기 때문에 끝내 우리나라의 군사를 천하의 정병(精兵)이라 칭하여 저들이 한인(漢人)보다 더 후대하고, 또한 자기 나라 군사보다 더 후대하였다. 아, 우리나라는 이러한 정병과 화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저들의 앞잡이가 되어 군사와 화기를 적에게 실어 보내었으니 또한 무엇 때문일까.
달단(韃靼)이 사방에 횡행할 수 있는 것은 화포(火砲)를 가졌기 때문이고, 건주(建州)의 오랑캐가 천하에 대적이 없는 것은 화환(火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이 저들에게 손을 쓰도록 하는 데 있어 반드시 예리한 무기를 주어 거센 분노를 터뜨리게 하였는데, 아,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옛날에는 수레를 모는 것과 활을 쏘는 것이 같은 법인 것으로서, 성인이 죄악이 있는 자를 공벌하고 무고한 백성을 구제하여 중국을 안정시키는 기구였던 것이다. 그런데 후대에 와서는 수레를 사용하는 법이 시행되지 않은 데다가 북쪽 오랑캐들은 말 타고 기세를 부려 중국이 단 하루도 보전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저들의 기세가 강하고 약한 것에 따라 중국의 안위(安危)를 추측하여 판단하는 지경이 되었다. 오호(五胡)가 중원(中原)을 어지럽혔으며, 탁발규(拓跋珪)가 중국을 반쯤 차지하였고, 거란(契丹)이 연대(燕代) 지역을 점거하였으며, 금(金)나라 태종(太宗) 완안성(完顔晟)이 송(宋)나라의 두 황제를 잡아갔고, 몽고(蒙古)의 기악온씨(奇渥溫氏)가 중국의 황제가 되었는데, 이러한 것은 저들의 세력이 이러한 데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니, 이것은 진실로 형세가 그러했던 것이지 운수가 그러했던 것이 아닌 것이다.
문중자(文中子)왕통(王通)이 말하기를, “중국이 패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을 오랑캐들이 먼저 안다.”고 하였는데, 나는 이 말을 가지고 중국 역대의 일을 살펴보건대 마치 계약 문서가 서로 맞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것은 도리가 그러한 것이고 형세가 그러한 것이 아닌 것이니, 이 말은 참으로 도리를 아는 사람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가 망할 무렵에 도적이 일어나고 재변이 발생하는 것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고, 단지 정치가 문란한 끝에 하늘이 나라의 혼백을 빼앗아 가는 것이 제일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우리나라 평양성(平壤城)의 함구문(含毬門)ㆍ정양문(正陽門) 밖에 정방형으로 정리된 농지가 있는데, 사람들이 서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기자(箕子)의 정전(井田) 이라고 하는데 몇천 년이 지났으나 그 형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 형체가 정자형(井字形)이 아니고 전자형(田字形)인 것으로서 한 전자의 전지가 네 자리로 나누어졌는데 자리 사이에 1무(畝) 넓이의 길이 경계가 되었고 전자형 사이에는 3무 넓이의 길이 경계가 되었으며, 전자형을 둘씩 붙여 네 개가 된 사이에는 9무 넓이의 길이 경계가 되어 있다. 관람하는 사람들이 단지 고적(古蹟)만을 구경하고 어느 시대의 제도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선조조(宣祖朝)의 말년에 참의(參議) 한백겸(韓百謙)이 그 전지의 형태를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상(商)나라 때 70무의 조법(助法)인 것이니 전자형의 네 자리 전지가 70무씩인 것으로서 그 제도가 이에 있는데 주(周)나라의 철법(徹法)과 제도는 다르지만 법은 같은 것이다. 태사(太師)인 기자(箕子)가 우리나라에 와서 중국의 제도를 가지고 우리나라를 변화시키는 데 있어 선왕(先王)의 옛 제도를 고치지 않고서 백성들에게 이처럼 가르쳤던 것이다.”라고 하였고, 허성(許筬)은 그 제도를 부연해서 말하기를 “전자형의 네 자리인 것을 둘씩 합치면 두 전자형의 전지가 여덟 자리인데 7명의 농부가 70무의 전지를 차지하고 나머지 한 자리의 70무는 공전(公田)인데 한 농부에게 7무씩 분배되어 49무가 되고 한 농부의 집터가 3무씩이면 21무인데, 이것이 바로 10분의 1을 바치는 제도인 것이고 맹자(孟子)가 이른바 ‘조법과 철법이 모두 10분의 1이다.’라고 한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이에 그 사적(事迹)이 환히 드러나고 증거가 명백할 뿐더러 사라진 예법을 농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니 오랜 시대의 사적이라고 하여 소홀히 여길 수 없는 것이며, 더구나 성군인 기자의 유적(遺蹟)인 데이겠는가.
진 시황(秦始皇)이 축조한 만리장성을 역대 제왕들이 수리하고 감히 그만두지 않았고, 이전 사람도 말하기를 “진 시황의 공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진 시황이 장성을 쌓은 것에 있어 비단 그 당시 백성들에게 원망을 샀을 뿐만 아니라, 끝내 종묘를 전복시켰고 실제로는 중국의 지도를 스스로 축소시켰으며, 선왕(先王)의 광대한 규모를 무너뜨렸고 만대에 우환을 끼친 것이었다.
위와 같이 말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대체로 선왕이 천하의 토지를 정리하여 구복(九服)을 만들고 기주(冀州)에 왕도(王都)를 정하여 사방 5천 리에 이르게 한 것은 기주가 중국의 중심이 되고 천하의 요지에 위치하여 남쪽으로는 중국을 통제하고 북쪽으로는 서융(西戎)과 삭방(朔方) 지역을 다스릴 수 있으며, 경중의 차등을 두고 중화와 오랑캐의 지역이 연관되어 천하의 대국을 형성하고 원대한 계책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걸출한 인물이 대부분 북쪽 지방에서 태어나고 건장한 말과 사나운 군대로써 무지한 오랑캐를 소탕하고 간흉들을 굴복시킬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우(虞)ㆍ하(夏)ㆍ상(商)ㆍ주(周) 시대에 오랫동안 태평 시대를 유지하고 중국을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진 시황 때에 와서는 장성의 방벽을 쌓아 머리 부분의 지역을 잘라 버리고 구부러진 제방을 수축하기 위해 큰 제방을 무너뜨리는 짓을 하였으며, 스스로 국토의 경계를 삭감한 뒤에는 북쪽의 산하지대가 끝내 오랑캐의 유목장이 되었다. 이리하여 걸출한 인물들이 모두 저들의 편이 되었고 정예로운 군대와 건장한 말이 저들 지역에서 나오게 되었는데, 저들이 고지대와 광활한 지역을 점거하고서 중국을 내려다보며 침공하는 데 있어 그 형세가 물동이의 물을 아래로 쏟아 붓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것이 바로 오랑캐의 기세는 날이 갈수록 치성해지고 중국은 늘 떨면서 스스로 보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은 마치 경계둑을 헐고 울타리를 뜯어버리고서 나중에는 안방까지 내주는 격인 것이다.
지난 역사를 살펴보건대, 삼대(三代) 이전에 훈육(獯鬻)ㆍ험윤(獫狁)의 우환이 어떠하였으며, 진(秦)ㆍ한(漢) 이후에 흉노(匈奴)ㆍ강융(羌戎)ㆍ색두(索頭)ㆍ거란(契丹)ㆍ여진(女眞)ㆍ몽고(蒙古)의 화란이 또한 어떠하였던가. 후대에 와서 한나라 때 김일제(金日磾)의 충직하고 근면한 것과 진(晉)나라 때 모용외(慕容廆)ㆍ단필제(段匹磾)의 왕실에 마음을 다한 것과 당(唐)나라 때 아사나(阿史那)ㆍ설필하력(契苾何力)ㆍ흑치상지(黑齒常之)ㆍ이광필(李光弼)ㆍ왕사례(王思禮)와 주야집의(朱邪執誼)ㆍ주야적심(朱邪赤心) 부자 등의 재질과 기개는 어떻게 남쪽의 중국 사람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晉)나라 때 한왕(漢王) 유연(劉淵), 조주(趙主) 석륵(石勒)과 연(燕)의 모용각(慕容恪)ㆍ모용수(慕容垂)와 대(代)의 탁발의로(拓跋猗盧), 요(遼)의 야율휴가(耶律休哥), 금(金)의 점갈신노(粘葛申奴)와 원(元)의 야율초재(耶律楚材)ㆍ백안(伯顔) 및 완안아골(完顔阿骨)ㆍ철목필렬(鐵木必烈) 등과 같은 자들이 과연 중국 조정에 기용되어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의복을 입고 충실히 직무를 수행하여 공적을 쌓게 한다면, 또한 중국의 천자 및 대신들과 함께 큰 공을 거두고 많은 복을 누리며 천하의 우환을 제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저들의 종족들과 혼합하여 함께 살게 할 경우 나라가 혼란 상태에 이르게 되고, 뛰어난 인재를 수용하여 똑같이 대우할 경우 나라가 번창하게 될 것인데, 이러한 사례를 사마씨(司馬氏) 진(晉)나라와 당 태종(唐太宗)의 일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니, 아, 애통하게 여길 만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흰 옷 입는 것을 좋아하여 풍속이 되었는데, 고려 때 술가(術家)의 말에 따라 동쪽의 본색은 청색인데 흰 옷을 입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여 법령을 설정해서 금지하여 입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관가ㆍ사가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관아의 관복이 아닌 경우에는 모두 흰 옷을 입는데 그 유래를 알 수 없다. 옛 기록에 “기자(箕子)가 백마(白馬)를 타고 주(周)나라에 조회를 갔다.”는 설이 있는데 흰색은 은(殷)나라가 숭상한 것이었으니, 기자가 주나라에 손으로 간 것이고 신복(臣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옛 제도를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시인(詩人)이 미자(微子)를 읊은 시에 “손님이 와서 여러 날 묵고 있는데 그의 말이 흰색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미자도 예물을 마련하여 왕가에 손이 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사람이 흰색을 숭상하는 것도 어쩌면 성인(聖人)의 유풍과 교화가 몇천 년이 지났는데도 없어지지 않은 것이 아닐까. 따라서 보존시켜 백대에 법이 전해지도록 해야 하고 금지하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해주(海州)에 수양산(首陽山)이 있고, 또한 고죽국(孤竹國)의 호칭도 전대에 전해지고 있으며, “기자(箕子)가 수양산에 와서 백이(伯夷)를 만나 보았다.”는 설이 동사(東史)에 기재되어 있지만, 그 일이 중국 사람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기주(冀州)하동(河東)에 수양산이 있고 그곳에도 백이의 무덤이 있는데, 사람들이 실로 그곳이 백이가 은거했던 곳이라 여긴다. 그러나 나는 생각건대, 백이ㆍ숙제가 본시 북해 바닷가에 살면서 천하가 청명해지기를 기다리다가 문왕(文王)이 노인을 잘 대우한다는 말을 듣고 주나라에 갔던 것이다. 그 후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를 치는 데 있어 의리상 주나라를 섬길 수 없었다면 의당 멀리 떠나 예전에 온 길을 찾아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뜻을 가져야 했던 것이고 하내(河內)의 서울에 가까운 곳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으니, 그들이 고국으로 온 것은 기자가 조선으로 달려온 것처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고죽국은 본시 요서(遼西) 지방으로서 우리나라의 해서(海西)와 가까운 곳이다. 생각건대 백이ㆍ숙제가 중국을 떠나 고국에 갔다가 다시 우리나라에 온 것인 듯싶다. 그들 형제가 서로 나라를 사양한 의리를 돈독히 하였고 또한 주나라 천자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는 뜻을 가졌던 것이니, 수양산을 고죽이라 호칭한 것도 그 당시 붙인 이름인 것으로서 고향을 잊지 않으려는 뜻을 보인 것이 아닐까. 이것은 실로 우리나라의 수양산과 고죽의 호칭이 민간에서 부회하여 칭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주례(周禮)》에서 큰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작은 나라를 국(國)이라 하며, 방(邦)이 있는 곳을 또한 국(國)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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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악록(楓岳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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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자년 윤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楓岳)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금강산(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장백산(長白山)에서 시작되어 검산(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철령(鐵嶺)을 가로질러 추지(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능호봉(凌灝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비로봉(毗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중향성(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ㆍ잣ㆍ해송(海松)ㆍ만향(蔓香) 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일출봉(日出峯)ㆍ월출봉(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백운대(白雲臺)ㆍ금강대ㆍ대향로(大香爐)ㆍ소향로(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만폭동(萬瀑洞)인데 백천동(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회한(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망고봉(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백마(白馬)ㆍ현등(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간 놈은 천후(天吼)ㆍ설악(雪嶽)ㆍ한계(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영(嶺)의 좌우 그리고 호(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내산(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외산(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회수(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 가서 양강(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그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구룡연(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맑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대낮에도 풍정(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유점사(楡岾寺) 절이 사실은 금강산 동쪽 기슭 중앙에 위치하여 남쪽을 향하고 있으며 모든 산이 거기를 중심하여 둘러 있고 일백 시냇물도 그 곳을 중심으로 감돌아 흐르는데 그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들이 만마(萬馬)를 수용할 만큼 크고 넓고 또 해를 가리고 구름 높이 치솟은 빽빽한 나무들이 수도 없이 서 있는데 모두가 해송이 아니면 토삼(土杉)ㆍ적목들이다. 그리고 전우(殿宇)의 굉장하고 화려함, 문정(門庭)의 넓고 확 트임 또는 각 암자 자리 기타 시설물 그 밖의 기용(器用) 따위가 충분히 왕공(王公)과 맞먹을 정도이고, 금벽(金碧)의 장식이나 심지어 놀이개 도구 하나까지도 모두 최고의 사치를 다하고 있었다.
산외에서 온 노복과 말들은 장안사(長安寺) 북쪽으로 산기슭을 따라 오다가 추지령(楸池嶺)을 넘고 통천(洞川)ㆍ고성(高城)ㆍ삼일포(三日浦)를 거쳐 산 아래까지 왔는데 거의 3백 리 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중의 말을 들으면 장안사에서 남쪽으로 나와 건봉(乾鳳)의 앞재를 거쳐 여기까지 오려면 이 길보다 꽤 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산이 자리잡고 있는 둘레는 5, 6백 리쯤 되는 것으로 옛날에, 8백 리라고 한 말은 허탄한 말인 것이다.
이 재 구현(狗峴) 는 금강산 동쪽 기슭의 한 가지로서 유점사에서 오자면 하나의 작은 재에 불과하지만, 이 재에서 동으로는 산마루가 그렇게 험준하고 구불구불 구절양장이어서 동해가 내려다보인다.
기하(圻下)에서 영서(嶺西)를 거치는 동안 가을이 비록 풍년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두 자 빠짐- 경치가 좋아 추흥(秋興)이 꽤 있었다. 산으로 들어온 이후로는 들판의 경치며 농사 일이 모두 딴 세상 일로 생각되었는데 어제 경구(京口)에 와서야 비로소 곡식이 심어져 있는 전답을 보았다. 그런데 바닷가로는 옥토는 없고 빈 땅이 많았으며 마을이나 살고 있는 백성들이 사뭇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게다가 또 과수원이나 풍성한 숲도 없어서 새와 짐승들이 깃들 곳도 없었고 가을 농사 역시 영서 지방만 못하였다. 이곳 백성들은 모두가 게을러서 농사에 주력하지 않으며 가끔 고기잡고 해초 캐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는 단호(蜑戶)가 있기는 하였으나 지난 해에 흉년이 크게 들어 죽은 자가 거의 절반이었다고 하여 듣기에 슬펐다.
12일(갑인) 맑음. 주인의 집이 바다 부근에 위치해 있어 해돋는 광경을 볼 수 있었으므로 여러 벗들과 시간이 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때마침 구름이 살짝 가렸다. 주인 말에 의하면, 언제나 해돋이 구경을 하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늘 가려 버려 확실히 볼 수 있는 청명한 날은 드물다고 한다. 그 곳을 일찍 출발하여 간성(杆城)의 북천교(北川橋)를 건너고 읍성(邑城)을 지나 소나무숲 속으로 10여 리를 가니 중간에 둘레가 3리쯤 되어 보이는 호수 하나가 있었다. 남쪽에는 묏부리가 못 속까지 들어와 있고 고색창연한 바위에 모래알들은 하얀데 게다가 푸른 소나무가 울창하고 못 안에는 순채잎이 가득하여 그야말로 ‘천리호 순채국에다 된장만 풀지 않은 격’이었는데, 이른바 선유담(仙遊潭)이라는 곳이었다. 서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한참을 감탄하며 보다가 내가 일행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들 행색이 너무 맑아 흥을 도와 줄 만한 물건 하나 없으니 이곳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무작정 오래 있을 수는 없겠네.”
하고, 드디어 길을 떠났다. 길가에 기러기들이 떼지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마부 한 사람을 시켜 총을 쏴 보라고 했으나 맞추지 못해 서로 한바탕 웃었다. 30여 리를 와 한 곳에 다다르니 붉은 기둥으로 된 높은 누각이 바다를 향하여 있고 어촌(漁村)이 저자를 이루고 있었는데 구름과 물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말에서 내려 난간에 올라 보니 마음까지 시원하였고, 옛날에 이른바 청간정(淸澗亭)이라는 곳이었다. 청간이라는 명칭은 역(驛)의 이름을 따라 붙여졌던 것인데 지금은 창해정(滄海亭)이라고 이르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하는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구경을 다녀 보았지만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은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한평생 제일 좋은 구경이요 천하의 장관이라고 하겠다.”
하고, 드디어 그 곳에서 유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 단호(蜑戶) 중국 남쪽 열대 지방에 사는 만족의 하나
13일(을묘) 새벽에 일어나 일출 광경을 보았더니 구름이 가리고 있었으나 구름과 해가 서로 부딪치는 바람에 황금빛이 내리쏘이고 구름 속에서 번개가 번쩍이고 있는 것 같아 보기에 매우 좋았다. 길 중간에 언덕이 하나 보였는데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대의 크기는 모두 화살 감이었으며 바다 속의 섬들도 모두 푸르른 대숲으로 되어 있었다. 노포(蘆浦)에 와서는 호수가 터져 건널 수가 없어서 뱃사람으로 하여금 바다의 배를 끌어다가 건너게 했었다. 내가 보기에 동해에 있는 배들은 통나무를 파서 만든 것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은 것이 마치 말구유 모양이고 몸통도 매우 적은데 그래야 배가 파도를 잘 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날은 큰 배 한 척을 보았는데 모양이 서해(西海)에서 부리는 배 같았고 모래 위에 정지해 있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들 말이, 동해에는 그렇게 생긴 배가 없고 지난 큰 흉년 때 영남(嶺南) 백성들이 살 길이 없자, 그 배로 고기 잡고 해초라도 캐기 위해 파도를 무릅쓰고 동해로 들어왔던 것인데, 그들은 동해에서 고기잡이를 하여 생활을 꾸려가자는 속셈이었으며, 파도에도 역시 별 걱정이 없었다고 하였다. 내 그들 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을 때 동해의 작은 배들은 그것이 거민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들 쓰기에 편리하게 만든 것이지만 저 큰 파도는 큰 배가 아니고서는 건널 수가 없는 것이다. 국가가 동해에는 파도가 거세지 않다 하여 관(官)의 힘으로 큰 배를 부리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해에는 큰 배가 필요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지금 지난 흉년 때 들어왔다는 저 배를 놓고 보더라도 동해ㆍ서해를 배로 통행할 수 있음을 알지 않겠는가.
그날은 또 염막(鹽幕)을 지나다가 소금 굽는 법을 들어가서 보았는데 바닷물을 달여서 소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서해와 다르고 소금 맛도 너무 써서 음식을 만들면 달고 맛있는 서해 소금보다 훨씬 못하다는 것이다. 서해안의 소금 만드는 법을 동해안에서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은 또 따뜻한 날씨에 동남풍이 불어 바닷물이 잔잔했는데 가끔 고래가 나와 노는 모습이 보였다.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면 눈발 같았으며 소리는 소울음소리 같았다. 어부들의 말에 의하면 바닷고기로는 고래보다 더 큰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 황수차(黃水差)라고 하는 고기가 있는데 서로 만나기만 하면 반드시 고래가 죽는다는 것이다. 그 황수차는 꼭 떼를 지어 다니다가 만약 고래를 만나게 되면 수컷 하나가 지휘자로 뒤에 딱 버티고 서서 그 무리들로 하여금 번갈아서 나가게 하여 꼭 죽여 놓고야 만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종류별로 서로 제어를 하고 또 싸우는 기술까지 갖고 있다니 그 역시 자연의 섭리가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20여 리를 더 가 건봉(乾鳳) 하류를 건너 낙산(洛山)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산등성이로 올라 얼마를 더 가서 절 문간에 들어서니 중들이 견여를 메고 나와 맞이했다. 견여를 물리치고 걸어서 이화정(梨花亭)에 올라 앉아 있었다. 정자는 절 문간 밖에 있었는데, 그 절의 문정(門庭)이나 헌각(軒閣)이 웅장하여 바로 하나의 큰 아문(衙門)이었다. 절은 설악산을 등진 채 동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지세가 편평하며 넓고 건물도 탁 틔어 넓었다. 당(堂)에 올라 보니, 금벽(金碧) 장식이나 용마루 등의 높이는 비록 장안사ㆍ유점사 등만 못해도 대문과 담의 꾸밈새나 전망이 좋기는 그 두 절이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17일(기미) 맑음. 신흥사(神興寺)에 들렀더니 중들이 견여를 가지고 동구 밖까지 환영을 나왔다. 그 절은 설악산 북쪽 기슭에 있는 절로 동쪽을 향해 앉아 있었는데 전각(殿閣)이나 헌루(軒樓)가 역시 규모가 큰 사찰 중의 하나였고, 여기에서 바라다보이는 설악산과 천후산(天吼山)의 깎아지른 봉우리와 가파른 산세는 마치 풍악(楓岳)과 기걸함을 겨루기라도 하는 듯했다.
18일(경신)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뒷 고개를 넘어 외삼촌을 따라가다가 유군과 뒤떨어져 계조굴(繼祖窟)에 들어갔다. 바위에 나무를 걸쳐 처마를 만들어서 지은 절인데 지키는 중은 없었다. 앞에는 깎아지른 바위 하나가 서 있는데 그 이름이 용바위[龍巖]이고 아래는 활모양으로 된 바위 하나가 반석을 이고 있었다. 그 크기가 집채만 했는데 중 하나가 흔들어도 흔들흔들하여 이른바 흔들바위[動石]라는 것이다. 천후산 중간에 위치하여 남으로는 설악산과 마주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해 있어 역시 한번 구경할 만한 곳이었다.
그 굴 뒤로는 지상에서 몇 천 길 높이로 석부용(石芙蓉)이 치솟아 있는데 서쪽에서 달려온 것으로서 기기교교한 형상의 봉우리가 40여 개나 되었다. 어떤 것은 검극(劍戟) 같고, 어떤 것은 규벽(圭壁) 같고, 어떤 것은 종정(鍾鼎) 같고, 어떤 것은 기고(旗鼓) 같고, 어떤 것은 불꽃이 튀는 모양이고, 어떤 것은 용솟음치는 파도와도 같아 모양이 제각기 형형색색이고, 중간의 한 봉우리는 구멍이 나 있어 마치 풍악의 혈망봉(穴網峯)처럼 생겼는데, 중의 말에 의하면 그 산을 소금강(小金剛)이라 부른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비바람이 있으려면 미리 울기 때문에 천후(天吼)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고 하였다.
미시령(彌時嶺) 재 위에 군데군데 옛 성터가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고장성(古長城)인 것으로 금강산ㆍ설악산 정상에도 그러한 곳들이 더러 있었다
20일(임술) 맑음. 일찍 출발하여 광치(廣峙)를 넘는데, 재가 매우 가파르고 길이 전부 돌 뿐이어서 사람이나 말이나 힘들고 괴롭기가 미시령에 버금갔다
22일(갑자) 맑음. 춘천(春川)과 잿마루와의 거리는 멀지 않은데, 물이 급류에다 여울이 얕다. 주(州)의 북쪽에 청연(靑淵)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심이 배를 띄울 만한데 여기는 바로 소양강(昭陽江) 상류이다. 그 강이 양구(楊口)의 강과 합류하여 신연도(新淵渡)를 이루고 평야 가운데로 굽이굽이 흘러 파강(巴江)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경운(慶雲)의 북치(北峙) 서쪽에는 백운산(白雲山)이 있는데 일명 화악산(華岳山)이라고도 한다. 가파른 바위 산이 구름 높이 솟아 있어 영서(嶺西)에서는 화악만큼 높은 산이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경운은 청평의 원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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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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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서해가 어디인가요? 동정호가 서해면, 파양호가 동해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