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지요, 그것은 그러나 당신의 눈이 하는 말, 그 마 음이 뒤죽박죽 비틀어대는 주물럭, 얼굴 반죽인 것.
글쎄요, 나는 여태 내 기쁨까지 슬퍼한 적 없네요.
*이창동의 영화
# 탁본,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의사 출신, 고(故) 이태석 요한 신부의 삶을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도시, 톤즈에서 가난한 주민들을 위해 동분서주 온갖 봉사활동을 하고 아이들을 불러 모아 브라스밴드를 만들고, 학교를 짓고, 한센인 집단촌에 들어가 환자들을 돌보다가 마흔여덟 나이로 참 즐거운 일생을 마쳤다. 휴가차 귀국했다가 대장암 진단을 받고…… 그는 다만 아프리카를 앓다가 갔다. 사랑은 그것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하고 사랑한 일. 할 일이 엄청 많이도 남아 있었던 이, 그를 데려간 하느님의 뜻이 나로선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화면 속 벽안의 어느 노신부는 그것이 바로 하늘의 신비라고 말했다.
아이들의 연주가 그를 전송할 때 뭉개진 발가락, 뭉툭한 사제의 검은 족문이 절며 절며 걸어들어가는 아프리카의 밤하늘을 보았다. 설마 공연히 가는 것이겠냐 싶어 내 마음 또한 그의 뒷모습에다 대고 트럼펫을 불다가 큰북을 치다가 하는데 깜깜한 극장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때마침 눈꼬리를 찍어내고 싶었다. 어, 손수건이 없었다. 낌새를 알아챈 네가, 너의 손길이 어둠속을 더듬어 내게 번진 물기를 꼭, 꼭, 눌러 닦아주었다.
“울지 마, 톤즈”* 날 달래주었지만, 아프리카는 여전히 배가 고팠다.
배가 고팠다. 나는, 칠성시장 어느 돼지국밥집에서 소주를 곁들여 늦은 저녁밥 사먹고, 널 바래다주었다. 혹시나 싶어 낮에, 널 기다리며 눌러앉아 있었던 아파트 화단 앞 돌확 위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용케도 거기,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손수건이 잘 깔려 있었다. 아프리카, 아프리카…… 아프리카의 죄 없이 곤란한 인상. 그 복잡한 돌의 표면을 그대로 문 채 이 한 장의 자리가 날 태우고 거기까지 날아간 것이었다.
*이 다큐멘터리의 제목.
*시작메모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아프리카를 보았다. 그리고, 저, 한 사랑이 참 여러 사랑을 그곳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 정치
그는 대통령을 지냈다. 고향마을로 돌아와 다섯 살 손녀딸 아이와 자전거를 타고 논다. 구멍가게에 들러 얼음과자를 사고 아이가 손 시릴까봐 두루마리 티슈를 풀어 비닐 팩을 감싸준다. “할아버지 따라오너라~” 다시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집으로 돌아갈 때, 아이는 그러나 힘껏 제 페달을 밟아 할아버지를 앞지른다. 뭔 말, 그는 함빡 웃으며 짐짓 뒤로 처진다. 비로소 한 입, 행복을 맛본 정치다.
# 적막한 소리
적막도 산천에 들어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적막도 복받치는 것 넘치느라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새소리 매미소리 하염없는 물소리, 무슨 날도 아닌데 산소엘 와서 저 소리들 시끄럽다. 거역하지 않는 것은 내가 본래 적막이었고 지금도 다시 계속 적막 속으로 들어가는 중이어서 그런가, 그런가 보다 적막한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홀로 앉아 도 터지는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소주 몇 잔 걸치니, 코끝이 시큰거 려 냅다 코풀고 나니 배롱나무꽃 붉게 흐드러져 왈칵 적막하다. 내 마음이 받아 그득하고 불콰하여 길게 젖어 풀리는 저 또 그 소리에 그 소리인 부모님 말씀 적막도 산천에 들어있어 소리를 내는 것이겠다
# 영남대로*
고추가 잘 말랐는지 흔들어보다가 문득 수중에 남아 달랑거린 이 엽전 열닷냥이면 요즘 돈으로 도대체 얼마나 될까, 뭔 객고를 풀다 그리 되었을까, 벌건 국밥집 앞을 그냥 지나칠 때 그 저녁노을 냄새는 또 얼마나 얼큰했겠으며, 괴나리봇짐에 드는 들판의 별, 별, 별별 풀벌레 소리가 차라리 개운하였을까, 낙방 길의 길고 긴 뜨신 끈, 오줌 터는 그 기분 참 어땠을까, 싶다.
*한양천리, 과거보러 다니던 옛길.
# 어둠에도 냄새가 따로 있다
나는 으레 동대구역에서 내린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올 때를 말하는 것인데, 특히 심야에 도착했을 때 그 만만하고도 쓸쓸한 느낌이라니. 그래도 나는 아무런 불편 없이 집에 도착하곤 한다. 한 번은, 아니 세 번, 동대구역을 아차, 지나쳐버린 적 있다. 삼랑진역 부산역 왜관역, 영 엉뚱한 데서 내려 아주 낭패를 겪은 적 있다. 모두 서울이나 부산에서 술 마시고 밤기차를 탔을 때의 일이다. 온몸이 찬물에 빠진 듯한, 멍석에 휘말린 듯한 기운에 퍼뜩 잠 깨어 내다본
깜깜한 차창!
낯선 어둠이 엄청 컸다.
냄새가 달랐다. 나는 미처 몰랐다. 집으로 가는 길의 그, 모르고 좇은 내 체취를……
나는 으레 동대구역에서 내린다.
# 수류탄과 가락지 -영화 「웰컴 투 동막골」
이 어여쁜 여자아이는 지능이 약간 모자란다. 자꾸 웃는 바람에 우중에도 온 데 나비 떼가 희다. 제 버선을 벗어 날개 모양으로 접어 소년 병사의 젖은 얼굴을 해맑게 닦아준다.
강원도 첩첩산중 동막골에도 6.25전쟁이 들어왔다. 국군, 인민군, 유엔군 낙오병을 합쳐 여섯 명 병력 규모의 전쟁이 들어왔다. 너들 친구나? 여자아이가 물었다. 마을사람들에겐 먹혀들지 않는 전쟁, 전쟁이란 참 생전 처음 보는 괴물 멧돼지다. 꽥, 꽥, 제 졸음을 쫓으며 서로를 겨눈 전쟁. 싸우마 안돼, 이거 무슨 작대기나? 여자아이는 손가락 끝으로 서로를 겨눈 총구를 후벼 간질인다. 거기, 비암 나와! 여자아이는 어린 졸병이 부르쥔 수류탄 안전핀을 가로채 뽑아버렸다. 물음표같이 동그랗고 뾰족하게 생긴 것, 신기한 듯 매만지다 여자아이는 “가락지” 하고 웃는다. 웃는 가락지 속으로 앳된, 놀란 소년의, 전쟁의 표정이 순식간 녹아든다. “……? 마이 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