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vaccine / 김관영
개미군단들이 빚투로 주식시장에 화력貨力을 쏟아붓고 있다는 뉴스가 연일 메인뉴스로 등장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에서, 집에서, 스마트 폰으로 주식 매매에 일희일비한다는 것이었다. 뉴스 말미에 전문가의 이런저런 우려의 말을 듣는데 나의 아픈 기억이 어제의 일처럼 생생했다.
1998년 8월이었다. ‘후배를 위해 용퇴를’ 인사담당자의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이엠에프가 날린 카운트 펀치를 맞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나를 대하는 직원들의 눈빛이, 어색한 대화가, 힘이 들었다. 통근 버스에 올라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고, 구석진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직원들의 대화를 엿듣기도 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어색한 행동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밤낮으로 생각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돌렸지만, 답이 없었다. 점심시간 빈 사무실에서 사직서를 썼다.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러 장의 사직서가 구겨져 휴지통에 들어갔을 때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름 뒤에 도장을 두 손으로 꾹 눌렀다. 이름 석 자가 징검돌을 돌아 내리는 개울물처럼 심하게 일렁거렸다. 그리곤 갑자기 책상이, 의자가, 사무실이 낯설었다. 간신히 정신을 추스르고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꼭 내야 한 대?” 집사람도 요 며칠 동안 앞일에 대한 걱정에 말수가 적어진 상태였다.
봉투를 인사담당자 책상 정중앙에 올려놓고 정문을 나섰다. 29년 8개월 동안 동고동락했던 회사 명패가 나를 내려다보는데 가슴이 허했다. 섭씨 35도라는 불볕더위가 기성을 부리는데도 내 가슴엔 한파가 휘몰아쳤다.
시간은 빨랐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를 수없이 되뇌며 머리를 쥐어짜 봤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건 돈이라는 현실만이 하루하루 압박을 가해왔다.
그런 와중에 사람들이 모여 돈을 버는 경기장을 목격했다. 유심히 관찰했다. 그곳은 평소 내가 생각해온 경마장이나 사행성 게임도박장 같은 여느 경기장과는 달리 합리성이 있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주식을 사기만 하면 정부가 지정한 공간에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경기를 공정하게 관리해 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나를 유혹한 것은 주식시장이 활황이라는 이름으로 경기에 참여한 많은 사람이 이익을 보는 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좋은 일은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는 말을 앞세워 아침 일찍 경기장으로 갔다. 증권사 객장에는 이미 사람들로 붐볐다. 아홉 시, 경기가 시작되자 붉은 유니폼과 푸른 유니폼을 입은 말들이 펼치는 현란한 경기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어떤 종목을 선택해야 할지 막막했다. 오전 내내 객장과 휴게실을 오가며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염탐했다. 그때 내 귀에 꽂히는 말이 있었다.
‘◯◯ 우량종목이 요 며칠 동안 쉬고 있어 지금 잡으면 일주일에 십 퍼센트의 수익은 식은 죽 먹기야’ 나는 귀동냥한 종목의 매수 전표를 창구 직원에게 건넸다. 잠시 후 내 이름으로 주식이 매입되었다는 직원의 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휴게실로 갔다. 자판기 커피를 뽑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장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빨강과 푸른 시세 전광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별천지를 보는 것 같았다. 오후 세 시, 장 종료와 동시에 나는 계산에 열을 올렸다. 오늘 천만 원 투자에 실수익이 십오 만원이었다. 자그마치 수익률이 1.5%였다.
상상했다. 오늘 이 천만 원을 투자했다면 수익이 삼십 만원, 일억을 투자했다면 백오십 만원, 투자금액을 높이자 놀라움에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꿩 먹고 알 먹는 쉬운 방법을 여태 모르고 살아오다니!’ 그동안 재테크를 모르고 살아온 것이 후회막급이었다.
오늘 적은 투자금액이 못내 아쉬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한밤중에 아내가 눈치를 챌까 조심조심 작은방으로 갔다. 퇴직금으로 마련해 놓은 우리 가족의 비상 통장을 꺼냈다. 통장을 들고 망설이는 밖의 나에게 안의 내가 힘주어 말했다.
‘마, 걱정하지 마라.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야.’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은행에서 이 천만 원을 안주머니에 넣자 새로운 힘이 샘솟았다. 증권사 빌딩에 들어서는 나는 보무도 당당했다. 먼저 시세 전광판을 살폈다. 어제 매입한 주식은 붉은 유니폼을 입고 느리지만 늠름한 자세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일시에 가시는 순간이었다.
오늘 어떤 종목을 매입해야 할지 오전 내내 객장과 휴게실을 오가며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쫑긋거렸다. 오후가 되자 나는 조급해졌다. 더 버틴다면 큰 이익을 얻을 절호의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안달이 난 내 머릿속엔 이미 어제 산 주식이 동네 어귀를 지키는 당산나무처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결국, 어제 매입한 종목을 선택했다. 그리고 최면을 걸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의 황금기다’
밤낮으로 두 손 모아 기도를 했다. 그 정성에 힘입어 내가 보유한 주식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갔다. 삼천만 원으로 투자 열흘 만에 수익이 자그마치 사백오십만 원이었다. 수익률이 15%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현재의 계산법일 뿐 팔지 않으면 진정한 나의 수익이 아니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식값이 하락하면 미련 없이 매도해야 한다는 진리가 나의 머릿속 사전엔 없었다. 오늘 하락하면 어제의 가격 생각에, 조금 올라가면 언제까지나 올라갈 것 같은 착각에 팔지를 못했다. 그렇게 버티길 두 달여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주식을 처분했다. 원금 팔백만 원이 허공으로 사라진 뒤였다.
허공으로 날아간 돈을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은 늘 나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하루하루라는 배춧잎 애벌레가 원금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포장마차에서 가락국수 한 그릇과 소주 몇 잔의 힘으로 터덕터덕 집으로 오는 날들이 반복됐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 이성을 잃어갈 즈음 세상사 묘수를 가르치는 소리가 달팽이관을 맴돌았다. 증권사 객장 휴게실에서였다. 육상경기장의 트랙처럼 머리 위를 빙빙 돌던 푸른 담배 연기가 나의 귀에 바통처럼 터치해 준 말이었다. 주식투자를 시작한지 구 개월만이었다.
집을 담보로 마이너스 통장을 만들었다. 육 천만 원까지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대출 통장이었다. 직원이 내미는 깨알 같은 약관을 읽어보지도 않고 도장을 쾅쾅 찍었다. 그리곤 이번에야말로 정신 바짝 차리고 나를, 내 가족을, 만족시키고야 말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주식시장은 내 머릿속을 거울처럼 낱낱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식시장이 장기 침체기에 들어가고 주식 값이 하향 곡선을 그렸다. 신문 방송에선 연일 경고성 진단을 내렸지만 나는 장기 투자가 아닌 단기 투기에 열을 올리며 역주행을 계속했다.
이 년 육 개월이 흘렀다. 결과는 참담했다. 팔순 노모가 홀로 기거하던 산골 슬레이트집마저 빚에 넘겼다. 가정 경제를 파탄시킨 중죄를 지은 나는 몸과 마음의 병을 얻어 삶의 의욕을 상실했다. 급기야 B형 간염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병상에 누어 지난 시간을 되돌아봤다. 직장 생활 삼십 년보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최근 삼 년이 더 길고 험한 시간이었다.
병실 천장에 수없이 반성문을 썼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신을 들먹이며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빌었다.
병원비 감당이 어려워 조기 퇴원을 요청하며 이를 악물었다. 나의 의지와 가족의 도움을 받아 꼭 일어서리라고. 병원에서 퇴원한 다음 날 집에서 삼십 분 거리인 앞산 심신 수련장까지 목표를 정하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약 이백 미터 거리인 중동교를 넘어가지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와야만 했다. 나는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아내의 도움으로 도전을 계속했다.
삼 개월이 지나자 심신 수련장 의자에 앉아 심호흡을 할 수 있었다. 남매도 전에 없이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퇴원 첫돌이 지났다. 드디어 앞산 정상에 서서 대구 시내를 내려다봤다.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가족의 사랑이 나를 살린 것이었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도 주식투자를 한다는 말을 들으면 신신당부를 한다. 장기 투자에 자신이 없으면 손을 떼라고. 이는 그때 호되게 맞은 백신효과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