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남양주 와부읍 김번 김생해 김달행(신안동김씨의 발복처)
1. 조선8대 명혈 논쟁
* 안동김씨 김번(金璠, 1479 성종10년~1544 중종39년)은 이조 문인인데 그 직계후손들이 300여년간 정승15명, 대제학3명, 판서35명, 등과300명에 이르런다. 풍수들이 눈에 불을 켜고 그 발복처를 추적하는데 ① 김번의 조부 김계권 묘 ②김번(12세손)의 묘 ③ 아들 김생해 묘 ④ 김달행(20세손)의 묘(물론 김달행 이후의 후손에 대하여)가 거론된다. 대체로 김번의 묘를 옥호저수형으로 조선8대명혈의 하나로 보고 후손발복처라고 하지만 혈이 아니라는 견해도 만만찮다. 조선8대명당에 대하여 이견이 없는 곳은 한 곳도 없으니 풍수의 눈은 유별나다. 그밖에 김이중(김달행의 아들) 묘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 김번의 숙부 학조대사는 풍수의 대가이요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부친 김계권(金係權)이 돌아가자 세조에게 청원하여 안동 풍산읍 소산리에 있는 역참자리를 얻어 묘를 썼는데 창평부수형의 명당이고이라한다. 동생인 김영수(김번의 아버지)를 위하여 양소당 종택(안동 소산리)을 소점하고 김번을 위하여 음택(옥호저수)과 양택(무소헌, 서울 종로구 궁정동2. 현재 로마교황청 대사관)을 소점하였다. 궁정동 양택 또한 대명당으로 김번이후 증손 김상헌까지 거주하여 번성함으로써 壯洞김씨파를 형성하는 뿌리가 되었다.
* 신 안동김씨의 발복은 학조대사가 소점한 음양택의 덕택이다. 장동은 시가지가 발전하여 원형을 알수 없고 양소당과 김계권묘는 별도로 간산기를 쓰기로 하고 여기서는 김번묘역과 김달행묘에 대한 간산기를 쓴다. 사대부 집안이므로 유명 풍수를 초빙하여 묘를 썼을 터이니 찾아 볼 묘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소문난 묘를 보면 충분하고 소소한 묘까지 연구할 필요는 없다.
2 김번 家系의 흥망
* 안동김씨에는 舊안동김씨와 新안동김씨가 있다. 本과 姓은 같지만(同姓同本) 시조가 다르고 따라서 같은 혈족은 아니다. 前者는 신라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金淑承)을 시조로 함에 대하여 後者는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한다. 신안동김씨는 시조이후 250여년을 실계하고 고려중기 공수부정을 지낸 김습돈을 중시조겸 기세조(1세대)로 한다. 구 안동김씨는 79만명 18位임에 대하여 신 안동은 4만7천명 145位이다(2015년 기준)
* 9세 김상금(8세까지 묘와 계대를 실전) 안동 풍산읍 소산리 입향조---
12세김번평양서윤(1479~1544),13세 김생해신천군수, 14세 김극효(1542~1618),
15세 영의정 김상헌(1570~1652)과 우의정 김상용(1561~1637), 20세 김달행(1706~1738), 21세 김이중---
22세 김조순(1765~1832)세도정치---23세 영의정 김좌근(1779~1869)---24세 이조판서 김병기(1818~1875, 김좌근에게 입양).
* 신안동김씨는 이조초기까지 미미하다가 12세 김번이 중종때 과거에 급제하고 시강원문학을 역임 하였고 안동에서 서울 장동(壯洞)으로 주거를 옮겨서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후손들은 장동파로 칭하면서 장동파로 사칭하는자를 엄벌하였다. 14세 김극효가 좌의정 정유길의 사위가 되면서 중앙 세력층에 접근하였고 극효의 아들 상용과 상헌이 병자호란때 주전파(척화파)로 목숨을 걸었다는 명분 때문에 후손들이 출세가도를 달렸다. 김상용은 1636년 병자호란때 사대부와 왕실가족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가 성이 함락되자 화약을 폭발시켜 순절하였다고 기록되었으나 당시부터 지금까지 실화설이 유력하고 그 10년전 정묘호란때 유도대장을 맡아 한양성을 지킬 책임이 있는데도 성을 버리고 도망간 전력이 있었다. 김상헌은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서 “부모 나라인 明을 배신할 수 없다”는 명분론으로 항전을 주장하고 친화파 최명길을 비난하였으나 대책없는 억지이었다. 정작 인조가 47일간의 농성을 풀고 치욕적인 항복을 할 때 슬거머니 안동으로 내려갔다. 뒤에 청을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믿보여 심양에 6년간 잡혀있었고 마침 최명길도 친명을 꾀하다가 심양에 잡혀오는 바람에 만나게 되자 서로 화해를 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의 세도정치로 이메지가 나쁘지만 심양에 잡혀갈 때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 말동하여라”라는 유명한 시를 남겼다.
* 신안동김씨는 김조순이 순조의 장인이 되고 김좌근의 딸이 헌종의 왕비, 김좌근의 조카딸이 철종의 왕비가 된 덕에 10촌이내의 형제 조카가 돌아가면서 정승판서를 차지하고 대원군에게 권력을 뺏길 때 까지 60년간 세도정치(勢道政治)를 하였고 그 폐해가 망국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김조순은 성격이 원만하고 소설을 좋아하여 오대검협전이란 무협소설을 썼다고 한다.
3. 김번의 묘(와부읍 덕소리 산5, 명당인가?)
* 전해오는 바로는, 이 터는 원래 김번의 부인 남양홍씨친정집 방앗간이 있던 곳인데 김번의 삼촌 학조대사가 명당임을 알려주어 홍씨가 친정으로부터 양보받아 김번을 쓰고 6년뒤 홍씨가 합장으로 묻혔다고 한다.
* 진혈이 아니라는 소수설은 횡룡입수라면 현무 뒤에 후장이 귀성으로 있어야 되는데 그렇지 않다. 혈장이 푸석거려 생기가 없다. 청룡쪽이 빈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다수설은 순전이 길게 나가 자기안(自己案)을 만들고 있는 옥호저수형이다. 횡룡입수가 아니고 기룡혈이다. 8대명혈이라는 것이다.
* 횡맥혈이나 기룡혈이 아니다. 후장이 없이 간룡이 乳로 결혈하였고 옆으로 요도가 받쳐준다. 김생해 묘가 있는 방면이 넓게 청룡이 된다. 현장에 서있으면 청룡쪽이 허전하거나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 없다. 옥호저수형의 명혈이다. 상등 초급.
4. 가족묘
김번묘 일원에 가족묘가 있다. 13세 김생해 묘를 대명당이라는 사람이 있으나 중등중급이다. 이 묘야 말로 횡맥혈이다. 그 밑에 있는 15세 김상헌 묘와 14세 김극효의 묘는 초급명당이고 맨 아래에 있는 김광찬 묘는 물이 침범하지 않을가?
5. 사진설명
* 소국일원의 사진 설명---태조 천마산, 중조 백봉산. 옥저호가 진응수이고 청룡이 유정하다.
* 김번 묘---다른 브로그에서 인용
* 자기 안(案)---
* 옥저호---진응수
6. 김달행의 묘(경기 양평군 개군면 향리128-3)
* 김상헌(시조로부터 15세손)의 6세손 김달행(1706~1738)은 33세에 요절하여 부친묘 옆에 초장하였다가 9년뒤 부인 한산이씨가 죽자 이 곳에 합장하였다. 김달행자신은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그의 손자 김조순(22세)이 세도정치를 시작하였으므로 김조순의 발복처를 찾다보니 김달행의 묘가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다.
* 처음 차에 내려 묘를 올려다 보니 중등초급이었는데 입수 뒤 현무를 둘러본 즉, 견실하기가 곰의 목덜미 같이 두텁고 기운이 옹축되어 있어서 중등중급이었다. 다시 앞에 있는 개군저수지를 한바퀴 돌면서 살펴보니 추읍산의 아름다운 자태에서 출발한 비룡음수형으로 중등상급대혈이더라.(20023.8)
* 추읍산---개군저수지 전망대에서
* 김달행 중국---추읍산 중출 룡이고 주혈이다.
* 김달행의 묘 소국---
* 김달행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