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대통령과 구미상모교회 이야기
고 박정희 대통령이
주일학교에서부터
대구사범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 칠곡 선산지구교회연합회 주최 웅변대회에서 1등을 독차지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신이 출석했던 자기 집에서
약 500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향 마을 교회인
구미 상모교회의 건축 헌금으로 100만원의 거액을 헌금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구미상모교회 100년사중에서)
교회사 기록에 의하면 박정희 대통령은 1918년 상모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상모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박 대통령과 함께 주일학교를 다녔던
한성도 장로는 박대통령과 죽마고우였으며
대구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정규선 목사
그리고 상모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던
김삼수 목사 등이 함께 주일학교를 다닌 것으로 확인됐다.
한성도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15-6세까지는 주일을 거르는 법이 없이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웅변과 동화 구연에 재능이 있어서
칠곡선산지구 교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는 맡아 놓고 1등을 했다”고 증언했다. 한 장로는 또 “동화대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하여서
입상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그러나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교회를 잘 나오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 동안 박 대통령이 고향인 선산(현재 구미시 상모동)에서
주일학교를 다녔다는 설은 있었으나 주일학교부터 시작해서 사범학교 전까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기는 뉴스파워가 처음이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대통령이 된 후인 1967년 구미상모교회 건축헌금으로
건축비 총 3,800,500원 중 100만원을 헌금한 것으로 확인됐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담임목사였던 안성택 목사가 건축헌금으로 8,500원을 냈고,
박인호 장로가 1만원을 내는 등 50원에서부터 1만원까지
교인들이 헌금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외에 특별헌금한 인사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100만원,
대구서현교회 정규만 장로가 20만원,
신흥직물공장 김종필 장로가 1만원,
구미읍 김성현 장로가 5000원, 대구 달서교회 이종한 장로가 3,000원,
대구 성상교회 이종성 장로가 2000원,
서문교회 이명숙 권사가 1만원,
서울신흥물산주식회사 정영현 사장이 20만원을 기부했고,
정규만 장로가 대지 270평을 기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를 보면 당시 100만원의 화폐가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특히 구미상모교회 당회가 1966년 9월 5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 서신을 송달키로 가결”했고,
1966년 6월 9일 열린 제 100회 당회에서 “박대통령께 서신을 송달키 위하여
서간을 인쇄하여 원본을 2통과 사본 30매를 구입키로 하다.
원본은 즉시 속달 우편으로 청와대에 송부하도록 하고
그 준비는 당회장 목사님이 책임지고 하도록 가결” 한 것으로 나타났다.
구미상모교회는 박 대통령의 도움을 기다릴 수만 없어서
안성택목사와 3명의 장로 그리고 130명의 교인들이 합심하여
특별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기도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1967년 5월 7일
박정희대통령이 육영수여사와 함께 고향의 선영을 방문차 왔다가 교회도 들렀다.
이 때 박대통령은 안성택목사와 악수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낡았습니까?” 라고 물었고,
안 목사는 “교회가 지난 6.25 전쟁시에 폭격을 맞아서 부서진 것을 수리한 것인데
이제 신축을 할 계획”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 박대통령은 “목사님 이제 나무로 짓지 말고 석조로 잘 지으십시오 도와드리지요”라고 말한 것으로 나와 있다.
구미상모교회는 박정희 대통령이 다녀간 구체적인 교회 건축 계획을 세운 것으로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교회 건축이 시작되자
대구에 주둔하는 육군 5관구 사령부 공병대에서 트럭1대와 기사1명을 1개월 간 파견으로 보내 주어서 동네와 교회 신축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한편 <기독신보> 1967년 5월 20일자는 “朴 大統領 鄕里에 紀念敎會”라는
제목으로 ‘상모교회, 신축위한 10개월 기도 끝엷 ‘대통령 어린 꿈 키우던 향수의 교회’
‘목사님 석조로 단단하게 지으시지요“라는 부제로 기사화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5월 지미 카터 대통령의 내한 당시
카터 대통령으로부터 예수 믿을 것으로 권유 받고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그해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총격을 받고 서거했다.
박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 하더라도
신앙적 차원에서 볼 때는 신앙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미 상모교회는 1901년 3월 13일에 상모동 211번지에
언더우드 선교사로부터 복음을 들은 정인백의 사랑방에서
정인기, 정인명, 한규석,
한몽교, 김현례, 한신석, 한화석, 여성희, 신양월 등이 모여
첫예배를 드리면서 태동되었다.
상모교회는 박정희 대통령 생가와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1993년 지금의 성전 건축을 시작하여 1994년 완공했다.
상모교회는 인구 38만명의 구미시민 중 3만명의 영혼을 책임지는 교회로서의 비전과
500여 소그룹과 50명 선교사 파송을 목표로 3000여 성도가 온 힘을 쏟고 있다.
경북기독교총연합회장, 한국 교회 단군상 반대 특별대책위원장이기도 한
김승동 담임목사는 "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셨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마을에 세워진 교회이고, 박 대통령이 출석했던 역사적인 교회로서 구미의 복음화와 대한민국의 복음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때에 그리스도인들이나라사랑의 마음으로 열심히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고 말했다.
안성택목사가 상모교회에 부임하여 열정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믿음으로 양육하여 안정적인 부흥의 기틀을 마련하는 중에
예배당의 협소함과 초라함이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사용하는 예배당은 1926년 와가 18평의 작은 예배당으로
목조 건물에 흙벽돌로 지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일제 말기에는 일제에 강제 압류를 당하여
동사무소와 야학 건물로 사용하였기에 더욱 낡아졌으며,
6.25전쟁시에 폭격으로 기둥이 기울어져 무너질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안성택 목사와 당회원 그리고 온 성도들이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농촌교회의 실정이라 헌금을 많이 할 수 없는 형편이기에
건축하는 일은 대단한 어려움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능치 못함이 없음을 믿고
마음으로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당회는 당시 상모교회 출신으로 국정을 책임진
박정희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기로 결의 하기도 하였다.
당시 당회가 이런 사실을 결의한 내용을 보면
*제99회 당회(1966년 6월 5일)에서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 서신을 송달키로 가결하다 .”
*제100회 당회(1966년 6월 9일)에서
“박대통령께 서신을 송달키 위하여 서간을 인쇄하여 원본을 2통과 사본 30매를 구입키로 하다. 원본은 즉시 속달 우편으로 청와대에 송부하도록 하고 그 준비는 당회장 목사님이 책임지고 하도록 가결하다.”
하지만 교회는 현 대통령의 도움을 기다릴 수만 없어서 안성택목사와 3명의 장로 그리고 130명의 교인들이 합심하여 특별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기도한 지 10여 개월이 지난 1967년 5월 7일 박정희대통령이 육영수여사와 함께 고향의 선영을 방문차 온 것이다. 물론 교인들은 동네 주민들과 함께 대통령을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행사를 하였다.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은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선영에 성묘를 하고
동네를 둘려 보면서 교회도 들렀다.
이 때 박대통령은 안성택목사와 악수하면서 “교회가 이렇게 낡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이 때 안목사는 교회가 지난 6.25 전쟁시에 폭격을 맞아서 부서진 것을 수리한 것인데
이제 신축을 할 계획이라고 말하였다.
이 때 박대통령은 “목사님 이제 나무로 짓지 말고 석조로 잘 지으십시오 도와드리지요”라고 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18년 상모동에서 출생하여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함께 상모교회 주일학교와 중고등부를 열심히 다녔다.
함께 주일학교를 다녔던 한성도 장로는 박대통령과 죽마고우였으며
대구 서현교회 정규만 장로와 장로교 총회장을 지낸 정규선 목사
그리고 상모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하였던 김삼수 목사 등이
함께 주일학교를 다닌 것이다.
한성도 장로는 박정희 대통령을 회상하며 어린 시절의 신앙생활을 회상하는 말을 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어릴 때부터 15-6세까지는 주일을 거르는 법이 없이 주일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웅변과 동화 구연에 재능이 있어서
칠곡선산지구 교회연합회에서 주최하는 웅변대회는 맡아 놓고 1등을 하였으며
동화대회에서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하여서 입상하기도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대구사범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교회를 잘 나오지 못했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