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 羅星.
태평양을 건너오다 보니 16시간의 시간이 뒤로 갔기에 거의 하루를 벌었다. 약 12시간을 날아왔지만 인천에서 출발한 날과 같은 날의 아침 8시. 열손가락 모두의 지문을 채취하는 입국심사를 거쳤지만, 시간이 그리 많이 걸리지는 않았다. 전자 여권으로 비자도 받지 않고 이토록 간편하게 미국엘 들어왔으니 세상이 변한걸까? 우리나라의 사람이 그만큼 신뢰할만한 상대가 된걸까?
집에서라면 이튿날 새벽 2시의 시각인 아침 10시, 56인승 대형버스에 오른 30명의 그룹투어 일행이 미국 서부 탐방을 위한 열흘 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오래전 서구를 여행하면서 알래스카 앵커리지를 경유하기도 하고 미 동부 지역을 여행한 적은 있지만, 미국의 서부 지역을 여행하는 건 이번이 처음. 아내의 다른 세 형제자매 부부와 함께하는 그저 즐기는 가벼운 마음의 가족 여행이다. 하지만, 이왕에 시작한 여행이니 이 여행의 의미를 찾아보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열흘 동안 우리를 안내해줄 잘 생긴 장년의 남성 가이드는 꼭찝어 우리 여행객들의 마음을 읽는 듯했다. 그는 이번의 미국 서부 여행을 "그간 여러 곳을 여행하고 나서 그래도 한번쯤은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떠나온 미국으로의 여행"으로 정의했다. 하지만 유서 깊은 역사와 문화 여행을 유럽으로 떠난다면, 지구의 대자연과 현대 문명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마땅히 미국의 서부 여행이라는 점을 자신있게 말했다. 미 서부는 각 개인 스스로가 피나는 삶의 길을 개척하고, 하나의 나라가 꾸준한 영토 확장을 통해 부강한 나라를 건설한 불굴의 정신을 느껴볼 수 있는 곳이이도 하다. 한편 올해는 1953년 우리 대한민국과 우리가 아름다운 나라라고 부르는 미국(美國)이 상호 안보동맹 관계를 구축한 지 7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기도 하다.
미국하면 내게는 신선하게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 하나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짐(Jim)이리고 부르던 고등학교 시절의 영어 선생님에 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 카튼(James Cotton). 내가 다니던 학교가 캠프케이지라는 미군부대와 울타리를 마주하고 있을 만큼 가까이에 있어서 미국인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가까이에서 미국인을 본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는 텍사스주립대학을 졸입하고 곧바로 평화봉사단 Peace Corps의 일원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우리에게 회화영어 Spoken English를 가르쳤다. 커다란 가죽 신발을 수선해서 신던 그의 검소함이 인상적이었고,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독일어 선생님과 비슷한 정도로 학습 지도에 엄격했다.
내가 처음으로 접했던 짐에 대한 인상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인식을 심어주었다. 어떤이들은 미국인을 코잡이 양키라고 싸잡아 무시하기도 하고, 히피와 동성애자, 마약중독자들이 범람하는가 하면 총기사고가 빈발하는 막가는 사회의 나라라는 선입견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미국의 모습은 어느 한 부분일뿐 그 바탕의 본 모습은 다를 것이란 생각을 가져왔다. 이들의 진면목, 참 모습은 어떤 것일까? 이번 여행을 통해 그런 것도 살펴볼 참이다.
버스 안에서 몰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향한 여행 첫날의 첫번째 목적지는 산타모니카(Santa Monica) 해변. 태평양의 가을 바다를 껴안은 해변은 한산했다. 야자수가 드문드문 서있을뿐 모래밭은 텅비어 있다. 하지만 바다 위 카페로 이어지는 데크에는 관광객들이 북적인다. 카페로 연결되는 데크의 중간쯤에는 'End of the Trail 66'라는 표지판이 서있다. 서부로 서부로 희망과 새로운 기회를 찾아 마차를 타고 달렸던 길의 종점이다. 고난과 애환을 함께 싣고 달리지 않으면 안되었던 마차가 더이상 갈 수가 없는 막다른 길. 동부의 시카고로부터 시작해서 미주리, 캔자스, 오클라호마,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그리고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3,000여 km의 장도.
'66번길(Route 66)'은 미국의 동과 서를 잇는 길이다. 그런데 이 길은 서쪽으로 서쪽으로 길도 없는 길을 개척하며 생사를 다투며 달렸던 19세기 서부 개척시대의 프런티어(Frontier), 이른바 도전과 모험의 길은 아니다. 66번길은 서부개척시대 이후 미국 중부와 남부 지역에 정착해서 살던 사람들에게 닥친 역경을 피해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고난의 길이었다. 이 길은 1920년대 말의 대공황시대에 엎친데 덮친 겪으로 1930년대의 심각한 가뭄과 기근, 이른바 "더스트 바울(Dust Bowl)'을 피해 못내 짐을 싸서 고향을 떠났던 탈출과 도망의 길이었다.
죤 스타인벡(John Steinbeck)의 소설《분노의 포도(The Grapes of Wrath)》는 바로 이 더스트 바울 시대의 상황과 66번길을 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중부의 오클라호마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던 조드 일가의 사람들은 그 고난의 시대에 생계 수단과 생활의 터전을 잃고 66번길을 따라 서부로 향한다. 고생과 희생 끝에 당도한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그들의 희망과 기대와는 달리 역시 힘들고 어려운 도시, 가난과 고난 속에서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고되고 힘든 삶을 살아간다. 고난과 아픔은 그 가족에게 끊임없이 이어진다. 소설은 그 마지막 장면에서 절망적인 순간에도 그들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베풀어 줌으로써 삶을 위한 인내와 따뜻한 인간애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오후의 여행지는 로스앤젤레스 역사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곳을 차례로 방문, 개척과 고난의 시대를 극복하고 오늘날의 풍요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은 다운타운에 자리한 Grand Central Market로 로스앤젤레스의 랜드마크 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다양한 농산물과 먹거리가 팔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는 LA의 또다른 역사적인 건축물인 Bradbury 빌딩, 그리고 시내를 두루 조망하고 산허리의 HOLLYWOOD 사인을 볼 수 있으며, Griffith 천문대, 박물관 등을 둘러볼 수 있는 Santa Monica 산의 Griffith Park 정상을 올랐다.
첫날의 여정은 LA를 만든 옛사랑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그들이 불굴의 인내와 노력으로 만들어낸 아름답고도 풍요로운 도시의 모습을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Santa Monica 해변의 66번도로 끝단에서 시작한 이번 여행에서 이후의 여행 도중에도 66번도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Yosemite공원으로 이동하는 도중의 Barstow라는 도시 노변 아울렛의 벽화 그림에서, Sedona국립공원 근처의 도시 Flagstaff라는 도시의 도로표지판에서, 또 그 길 위에 있었던 또다른 도시의 포스트카드 그림에서도... 동에서 서로 온갖 애환을 살어날랐던 66번도로는 새로운 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분노가 포도처럼 주렁주렁했던 시대, 상실과 희망, 새로운 시작의 길은 이제는 풍요롭고 자유로워진 미국인들의 마음 속에 죤 스타인벡이 말한 '어머니의 길(The Mother Road)'로 남아있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2023.10.18)
첫댓글 포리나이너 이후의 고난의 이동으로 생긴 길이 66번 도로군요. "더스트 바울(Dust Bowl)'을 극복하기 위해 대륙을 이동하는 몸부림의 역사는 그들의 DNA에 각인되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끊임없는 고난,역경, 연속되는 실망 등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포도송이에 비유한 것도 재미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이면 포도송이를 떠올리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나도 10여년전에 고등교 친목계원들과
콜로나도강ㆍ그랜드케년ㆍ자이언트
케년등 4대케년을 여행했지요
해외여행은 눈요기도하지만 생소한
문화를 탐방하는것이 더큰 의미
이지요ㆍ순우는 엄청나게 여행을
많이 했네요
<나성(羅城)에 가면 편지를 띄우세요>라는 노래가 있는데, 도착하자마자 순발력있게 여행기를 보내셨군요. 성의와 문장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나래실 농원 한창 수확에 분주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처가 형제들과의 해외여행을 하고 있으니 아주 화목한 패밀리입니다. 즐겁고 유익한 여행이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맘 먹고 15년 전 15일 일정으로 다녀온 미동부와 캐나다 그리고 미서부 패키지여행을 다녀와서 쓴 기행문을 다시 꺼내어 읽는 기분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오래동안 살아보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개척정신과 잠재력이 동하는 곳이지요. 1982년 여름 샌프란시스코 산타모니카 로스앤젤리스를 연하는 해안도로를 질주하면서 가도가도 끝이 없음에 촌놈은 황홀했었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또 가보고 싶습니다. 기회가 오려나?
좋른 여행 되시게. 건강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