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3.13. ~ 2008.8.9.
“아빠, 말을 두고 우리만 떠나면 말이 외로워서 어떻게 해요?”
살던 집과 외양간, 쏘다니던 밭과 올리브 나무 사이를 돌아보면서
아이는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집에 온기가 있어야지. 식구가 다 떠나면 집이 그만 죽어버리지 않겠니."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아이에게 아버지는
“바람 부는 대로”하고 답했다.
때는 전쟁과 점령으로
팔레스타인의 고원, 해안 지역 농촌, 비옥한 제즈레엘(Jezreel),
또 드넓은 요르단 계곡으로부터 사람들이 밀려나오는 1948년 5월이었다.
졸지에 난민이 된 그들은 두고 떠난 것이 많았다.
그릇과 옷가지, 식탁보, 대를 물린 가구, 늘 손에 들던 시집.
사람들은 처음에는 짐가방을 들었지만
길을 가면서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내려놓게 되었다.
젖먹이를 안은 젊은 엄마는
처음부터 아기 기저귀와 우유병, 아기 우비 외에는 아무 것도 손에 들지도 않았다.
1941년 지중해안의 요새 성요한아크레 가까운 알 비르와(Al Birwa)에서 태어난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7살인 1948년, (유엔 집계) 71만 명을 헤아리는 이 피난 행렬에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함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겪게 된 추방과 유랑은
1948년 한 번이 아니라
1967년 전쟁, 1973년 전쟁,
1982년의 베이루트 포격,
그리고 2012년 11월 가자(Gaza) 지구 폭격까지 수없이 일어났다.
아이는 아버지를 잃고
여자는 남자와 헤어지고
이스라엘의 수용소,
남으로 이집트, 북으로 레바논, 동편의 요르단, 아랍 국가들,
더 멀리 유럽, 라틴아메리카로 흩어졌다.
그 혼란의 와중에서
아버지는 자식에게 이렇게 다짐한다.
“얘야, 나하고 잘 버티자. 우린 돌아올 테니.“
”아빠, 언제요?“
"멀지 않아서.”
“집은 우리가 떠난 그대로 잘 있을 거다.” (마흐무드 다르위시)
팔레스타인은 작은 땅이다.
유럽의 벨기에 면적과 비슷한 정도이다.
그러나 오랜 동안 지중해 동부로부터 아라비아 반도로,
서아시아로부터 유럽의 콘스탄티노플로 건너가는
전략적 요지가 이 땅이었다.
무엇보다 중대한 종교의 원천이었으며
고대 문화의 기상이 서린 이 지역은
1500년대 초부터 오스만터키의 관할이 된 후
1800년대 말 서양 세력을 맞았다.
1차 대전 중인 1916년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인들에게 적국 오스만터키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였다.
그리고 이 일대를 프랑스와 영국 지배로 나누었다.
여기에다 1917년
영국의 밸푸어(Balfour) 선언은
같은 땅을 유대인에게 할양한다는 문건이었다.
유대인들은 1890년대 말
유럽에서 일어난 새로운 유대인 박해 운동에 밀려
차츰 이리로 이주하고 농토를 획득하고 시온주의를 제창해갔다.
아랍인들은 1929년과 1936년 대규모의 봉기로
이런 영국의 이중 정책에 항의했지만 허사였다.
팔레스타인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는
이 영국령 갈릴레이에서 토지를 가진 수니(Sunni)파 무슬림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남매 가운데 둘째로 자랐다.
그는 어린 시절
이스라엘 경찰에 쫓기는 농민 노래꾼들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밤이면 마을에 들어오고
새벽이면 산속으로 사라지는
“그들은 내가 모르는 것들을 노래했지만 참 아름다웠고 내 마음은 흔들렸다.”
([대지는 우리에게 협소했네]의 후기).
집안이 레바논에서 1년여를 지내고
1950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스라엘 영토가 된 마을은 사라져 있었다.
이 땅을 원하는 점령자들은
여기서 사람들이 농사짓고 시를 읽고 오랜 동안 살았다는
흔적이 남기를 원치 않았다.
다르위시는 아크레에서 내륙으로 들어오는
데이르 알 아사드(Deir Al-Assad)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인근의 카푸르 야시프(Kafur Yasif)에서 중등학교를 마친 다음
지중해의 하이파(Haifa)로 나갔다.
그리고 19살인 1960년에 [날개 없는 새]를 출판했으며
이로부터 그의 첫 번째 대작인 “등록한다. 나는 아랍인이다”가 나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이스라엘 관할 지역에서 살게 된 아랍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신분 등록에 대한 저항시
“등록한다. 나는 아랍인이다”는 1964년,
그가 23살인 해에 발표되었다.
거주지를 제한하고
검문과 부자유 속에
사람을 가둬버린 점령자들에 대해 다르위시는 이 같은 시구로 맞섰다.
“나는 등록한다. 내 신분증 번호는 50000.
자식은 여덟, 올 여름에 아홉 번째가 또 태어난다.
넌 성을 내는군 (…) 나는 피땀 흘리는 동료들과 함께 채석장에서 일한다.
나는 돌무더기에서 여덟 어린 것의 빵, 입을 것,
학교 공책을 끌어낸다.”
이 시가 수록된 시집 [올리브 나무의 가지들]은 팔레스타인을 넘어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과 서방에 참패를 당한 온 아랍의 찬가가 되었다.
아랍은 단결할 필요를 느꼈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를 에워 싼
요르단과 시리아,
이집트의 공동전선은 쉽지 않았다.
한편 다르위시는 1961년에 무슬림과 유대인이 함께하는 조직인
이스라엘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20대의 그의 글쓰기와 정치 활동은 여러 차례 체포와 수감을 불렀다.
1960년대의 다르위시는
“팔레스타인의 연인들” “밤의 끝” “새들이 갈릴레이에서 죽어가네”를 연속 발표했으며
그의 시는 가자지구와 요르단 서안에 수용된 팔레스타인인들의 삶과 떨어지지 않았다.
토지와 작물을 빼앗긴 이들은 40-50%의 실업률로
취업자 1인당 평균 6명의 가족을 부양하는 현실과 맞닥뜨렸다.
게다가 학교, 병원, 일터 어디를 가나 군사적 제재가 따랐다.
1965년에는 팔레스타인인의 귀국의 권리와 영토의 권리를 천명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발족했으며
1950년대부터 점령에 맞서 무장 저항을 추구하는 게릴라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이집트의 비동맹 지도자인 나세르가 주장한
1967년 6월의 6일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400개 이상의 팔레스타인 도시와 마을이
이미 파괴된 터에 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트랜스요르단, 골란 고원이
이스라엘에 장악되었다.
다르위시는 이스라엘 사법 당국에 의해 4년 간 하이파로 주거가 제한되었는데
1970년 유학생 신분을 신청하여 모스크바로 갔고
거기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였으며
1971년에는 그의 모습이 카이로에 보였다.
다르위시가 카이로의 주요 언론 <알 아람(Al-Aram الأهرام)> 일을 중단하고
동부 지중해의 베이루트로 간 것은 1973년이었다.
PLO의 본거지가 된 이 도시에서 베이루트 대학생들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에 합류하였다.
다르위시는 월간 <팔레스타인 문제(Shu'un Filistiniyya)>의 편집인으로
PLO에 가담했지만
그의 지향점은 정치적 선언문이 아니라 문학다운 문학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1972),
“그건 그의 영상 또 그건 그의 연인의 자살”(1975)은
수백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깊은 상처를 서정시로 승화시켰으며
향수와 비애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의 양심을 일깨우는
그의 현대적 아랍어 시는 이제 프랑스어, 영어를 넘어
20여 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대학을 다니고 전문직에 종사하게 된 팔레스타인 출신도,
가자와 서안 정착촌의 실업자 젊은이들과 노인들도 그의 시를 들었다.
1967년 이스라엘 당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팔레스타인 비르제트(Birzeit) 대학생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카이로의 대학생들과 파리와 유럽의 독자들이 다르위시에 환호했다.
PLO 본거지가 있는 베이루트는
3면이 모두 바다에 면한 국제적, 문화적인 도시였다.
1982년 여름 그 베이루트에서 사람들은 지중해로부터 빗발치듯 날아오는
함대 포격과 공중 폭격을 피할 곳이 없었다.
세계에 지부를 두게 된 PLO는 1974년 뮌헨 올림픽의 검은 9월사건 이래 서방측에
위협적인 테러 세력으로 간주되었고
이 도시로부터 PLO를 몰아내려는 것이 미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의 목표였다.
다르위시는 1981년 베이루트에서
문예잡지 <알 카르멜(Al-Karmel)>을 창간했다.
이 잡지를 비르제트 대학과 10킬로 거리인 라말라(Ramallah)의 문화 센터로 옮겼던 그는
베이루트가 당하는 폭격의 현장에 있었다.
6, 7층의 건물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포탄 속에서
다르위시는 참화를 문학으로 재구성했다.
[망각을 위한 기억. 공간 1982년 여름, 시간 베이루트]가
그 작품의 제목이다.
작품은 꿈으로부터 시작하며 친구도 회상하게 된다.
학교를 졸업한 후 소식이 없던 친구가 어느 날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실린다.
“우리는 카피르 야시프에서 같은 중학에 다녔다.
그는 자주 학교에 오지 않았다.
그는 달에 가 있었고 책보다 바다와 사냥을 즐겨했고
다른 학생들의 소란으로부터 언제나 비켜서 있었다.
선지자 요셉처럼 수려하고,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그의 눈은 어머니 눈의 운명적 아름다움을 닮아 넓고 매우며
바다처럼 투명한 푸른색이었다.
밤색의 곱슬곱슬한 머리, 높은 이마는 우리를 넘어서는 무엇을 향했다.
6월 전쟁까지 우리는 그가 왜 학교, 가족, 그의 나라를 떠났는지 알지 못했다.
이스라엘 신문들은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하이파에서 공격을 벌이기 위해
국경을 넘으려던 팔레스타인 페다인(Fedayn) 체포”
이스라엘 신문들이 적대감의 포문을 열기 위해 무슨 핑계라도 찾고 있는 전쟁 전야였다.
신문에 난, 그의 긴 실루엣이 사슬에 묶여 구부린 사진을 보고
-사미르는 우리의 항의 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었다-
우리는 이 뉴스를 믿을 수 없었다."
- [베이루트 1982]
다르위시는 아랍 세계의 여느 남성처럼 엄마를 그리워하는 시구를 많이 내놓았지만―
“엄마의 빵이 그리워. 엄마의 커피도. 또 엄마의 포옹도”―
그 엄마는 빵과 커피를 주고 안아주기만 하는 여성이 아니었다.
붙잡힌 사미르가 심문실에서 고문을 받는 장면은 다르위시에 의해 이렇게 그려졌다.
“나의 사촌뻘인 그의 아버지는 경찰들이 어떻게 감옥의 벽 넘어 고문 받고 있는
아들의 신음소리를 듣게 했는지 나에게 이야기했다.
어린 양 한 마리를 놓고 서로 힘을 겨루는 이리떼.
늘씬하고 우아한 귀염둥이의 신체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죽음을 듣는 것은
아버지를 완전히 으깨버렸다.
혼을 빼는 미모를 지닌 어머니는 고통을 제어하고 평정을 유지할 줄 알았으며
버젓한 남자가 되어 수많은 이들을 쓰러뜨린 그 상태에서도 도전하는,
그런 자식을 낳았다는 것에 당당했다. 그 여자의 슬픔은 자부심으로 바뀌었다.”
- [베이루트 1982]
사실 이미 1950년대에 형성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저항운동은
대를 물리고 지역을 넘어 사회구호로부터 무장저항까지 세계적 현상으로 확장되었다.
팔레스타인 임시자치정부 원칙을 선포한 1993년 오슬로 협정 후
다르위시는 PLO를 떠났다.
그가 원한 것은 공정한 평화였지 협상을 위한 유화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하마스 파에 의한 과격한 투쟁에도 기울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에는 조금씩 PLO 노선도, 하마스 노선도 아닌
팔레스타인 지성의 흐름이 보였다.
주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기도 한 그는 시에 열중했다.
사실 팔레스타인의 수난(알나크바)은
지성의 용광로에 불을 지폈다.
아도니스(Adonis), 여성 시인 파드와 투칸(Fadwa Tuqan),
갓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
또 영어로 시를 쓰는 파아지 투르키(Fawaz Turki) 같은 시인과 작가들,
화가, 영화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재탄생을 만들고 있었다.
서구 비판의 오리엔탈리즘을 제시한 에드워드 사이드(1935-2003)는
누구보다도 팔레스타인의 자부심이었다.
뉴욕 컬럼비아 대학 영문학 이론 교수이며 피아노 연주자인 사이드는
팔레스타인 문제에 쉬지 않고 비평을 썼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찾아오면 늘 만났다.
다르위시는 그런 사이드를 보내면서 이렇게 추도를 맺었다.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가 없다.
그의 존재는 우리에게, 그리고 온 세상에 그만큼 크고 생생하다.
사이드는 인류의 양심에 보내는 우리의 양심이며 외교 사절이었다.
사이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권을 정당화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으며
이 레지스탕스 속에서 민족적, 인류적인 의무를 본 것이다.
에드워드는 살아 있는 양심과 백과전서적 교양으로 팔레스타인을
세상의 중심에, 세상을 팔레스타인의 중심에 놓았다.”
사이드 또한 자신에게 영감을 준 아랍어 최대의 시인으로
아도니스와 마흐무드 다르위시를 들었다.
다르위시는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를 즐겨했다.
소리를 내서 음악처럼 시를 읽는 것은 시를 재창조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220개의 게토에 미군이 공급한 아파치 헬리콥터,
메르카바 탱크, F-16 총이 매일 사람들을 노리고 수백 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죽었으며
수만 명이 부상당했고
팔레스타인 지도자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암살이 계속되는"
(에드워드 사이드) 상황에서 시가 무엇을 하는지 회의도 깊었다.
좌절한 진영 내부의 갈등과 분규, 항쟁이 테러로 그려지는 철벽같은 부조리를 헤아렸다.
이를 모두 담은 다르위시의 시는 선동 아닌 시어로 청중을 끌었다.
모로코 라바트에서는 이천 명의 청중이 극장에 들어가지 못한 적도 있고
2007년 10월 파리 오데옹 극장에서도 아랍어를 하나도 못 알아듣는
수많은 청중이 그의 낭송에 전율하였다.
30여 권 가까운 그의 시집이 수 십 개 언어로, 히브루어로도 번역되었으며
이스라엘의 노시인 하임 구리(Haim Gouri)는 “...
그의 시집 [계엄령]에는 희망의 불빛이 있다.
우리 두 민족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희망“이라고 했다.
다르위시 역시 후기에는 이스라엘의 사상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아프로-아시아작가의 로투스(Lotus) 문학상,
레닌 평화상, 프랑스의 문예상, 독일의 레마르크 평화상,
헤이그의 권위 있는 클라우스(Claus)상을 수상했다.
그런데 그는 웃기를 잘했고 심각한 얘기도 경쾌하게 표현했으며
어느 인터뷰에서는 이런 말도 했다.
”우선 저는 제가 쓴 것에 도무지 만족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언어를 추구해요.
또 한 가지, 저는 박수갈채를 믿지 않아요.
그건 지나가는 것이고,
박수는 시인을 시와 등지게 할 수 있어요.”
다르위시는 2007년 11월 내한하여
전주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발에 참석한 자리에서도
자신의 문학이 민족의 저항을 넘어 온 세상의 시로 빛나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가 창간한 문예지 <알 카르멜>의 글과 생각의 자유,
그것은 젊은 팔레스타인 시인들에게 남긴 그의 당부였다.
이미 두 번 심장 수술을 받았던 다르위시는
2008년 여름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의 병원에서
심장 수술 중 위중한 상태가 되어 8월 9일 사망했다.
팔레스타인 라말라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경찰 추산 1만 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온유하지만 칼칼한 그의 목소리가 확성기로 울려 퍼졌다.
“여기 비탈진 언덕에
석양을 앞에 두고
시간의 대포를 마주하고
산들거리는 정원 옆에서
우리는 포로들이,
실업자들이 했던 바를 다시 한다.
우리는 희망을 가꾼다.”
*본문의 번역은 아랍어 원문 아닌 불어 번역을 다시 옮긴 것임
- 노서경, 인물세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