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군의 여유
두 부대의 싸움이 내 이목을 끌었다.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과 국군 6사단의 와해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중공군에게 또 국군이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중공군은 이제 제 실력의 바닥을 거의 드러냈음에도 말이다. 그에 비해 영국군 1개 대대는 부대 전체의 소멸을 눈앞에 두고서도 끝내 싸웠다.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으로 당시부터 큰 이름을 얻었던 영국군은 내가 보기에 퍽 개성이 있는 군대였다. 그들은 미군에 이어 파견 병력의 숫자로 볼 때 유엔군 중 2위를 차지했다. 2개 여단을 파병해 영국군의 싸움 스타일을 선보였다. 우선 눈에 띄는 특징은 여유로움이었다.
그들은 늘 티타임(tea time)을 즐겼다. 전투가 한창 벌어지는 와중에서도 오후의 일정한 시간이 오면 진지 속에서 차를 끓여 마셨다. 전쟁을 수행하면서 나는 그런 영국군의 티타임을 종종 목격했다. 여유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격렬한 전투를 벌이면서도 그들은 다소 한가하다 싶을 정도로 차를 즐겼다.
그러나 책임감은 아주 높았다. 포병의 경우가 좋은 예다. 그들은 관측을 위해 일선 너머의 적진 가까이 침투하는 일을 포병중대의 중대장이 직접 맡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위험하면서 중요한 일에 높은 계급의 장교가 직접 나서는 식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 또는 무엇인가가 허전하고 부족해 보였다.
- 1950년 10월 북진 길에 서로 만난 미군과 스코틀랜드 출신 영국 사병이 서로 환담하고 있다. 영국군은 강인한 군인정신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면은 약 11㎞에 달했음에도 모두 4개 대대로 거점을 형성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으니 중간의 여러 곳은 중공군 침투에 취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상황이었다. 마침 중공군이 공세를 시작한 1951년 4월 22일은 영국인들의 종교적 명절 전야(前夜)였다. 여유를 즐기는 영국군답게 방어에 전력을 쏟지 못했던 모양이다.
중공군은 역시 밤에 움직였다. 글로스터 대대의 정면을 향해 임진강을 건넌 중공군이 거센 공격을 퍼부으면서 다가왔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병력의 우세를 활용해 밀고 또 밀며 들어왔다. 곧 중대장이 전사하는 등 영국군은 위기에 휩싸이고 말았다. 중공군은 역시 수적인 우세를 잘 활용하면서 전선을 압박했다.
중공군의 포위
하루가 꼬박 지나면서 상황은 다급해졌다. 인근 지역에서 가장 높아 상대를 감제할 수 있는 감악산(675m)이 중공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따라서 밀리는 것은 당연했다. 벨기에 대대와 다른 영국군 대대는 진지를 빼앗겼다 다시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벨기에 대대가 겨우 중공군 포위를 피해 후퇴하고 다른 영국군 대대 또한 후방으로 물러섰다.
글로스터 대대는 원래의 고지를 내주고 후방으로 내려와 인근 주요 도로를 통제할 수 있던 고지에 사주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235고지로, 일명 ‘설마리 고지’라고도 불렀던 곳이다. 24일 새벽에는 급기야 글로스터 대대 주변을 중공군 63군이 완전히 둘러싸는 상황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포위당한 글로스터 대대를 구출하기 위해 영국군 29여단장은 배속해 있던 미 3사단장과 긴밀하게 협의했으나 달리 방도는 없었다. 미 1군단장인 프랭크 밀번 장군까지 나서서 글로스터 대대의 구출작전을 지시했으나 역시 뾰족한 수는 없었다.
당초 유엔군이 진출했던 캔자스선은 일찌감치 무너졌고, 군단 전체는 캔자스선 후방에 새로 설정한 델타선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글로스터 대대의 고립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자력으로 중공군 포위를 뚫고 후퇴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시간은 점점 영국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글로스터 대대는 후퇴로가 막힌 상황에서도 진지를 향해 다가서는 중공군을 맞아 싸우고 또 싸웠다. 그러나 중공군의 막대한 수적 우위를 극복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글로스터 대대의 고립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져 부대 전체의 절멸, 아니면 혈로를 뚫고 각자도생(各自圖生)해야 하느냐의 고비에 가까이 가고 있었다.
결국 영국군 29여단장은 최후의 지시를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내렸다. 여단장은 본대 전체가 델타선으로 철수하기에 앞서 글로스터 대대장에게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해 철수하거나, 아니면 중공군에게 붙잡혀 포로가 될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하라”는 내용의 명령을 내렸다.
- 중공군 5차 1단계 공세 때 설마리 전투를 이끌어 영국군의 강인함을 알렸던 글로스터 대대장 J. P Carne 중령.
북쪽으로 철수 방향을 잡은 글로스터 대대 D중대만 중공군의 포위를 벗어날 수 있었다. 적이 버티고 있는 북쪽으로 움직여 상대의 허를 찌른 결과였다. 그들은 중공군 지역을 벗어나 인접한 한국군 1사단 지역으로 무사히 철수했다. 나머지는 모두 중공군에게 최후의 한 발을 날리면서 분전하다가 전사하거나 포로로 붙잡혔다.
중공군에게 임진강 남쪽의 일대를 내주는 결과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공세 의도는 이로써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영국군 29여단이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중공군과 맞서 싸운 까닭에 서울을 노리고 남하하는 적의 공세는 22일부터 25일까지 이곳 일대에서 머물고 말아야 했다. 전략적으로는 중공군에게 적지 않은 손실이었다.
사흘 발 묶인 중공군
글로스터 대대원은 모두 850여 명이었다. 그 중 장교 21명과 사병 509명이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희생은 컸으나 이 설마리 고지에서 보여준 글로스터 대대의 분투는 매우 성공적인 고립작전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중공군의 전체적인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고, 서부전선의 핵심인 미 1군단 주력이 무사히 후퇴하는 시간을 벌 수 있었기 때문이다.
- 글로스터 대대가 약 3만에 달하는 중공군에게 둘러싸여 최후의 접전을 벌였던 설마리 고지. /위키피디아
영국군은 식민지 경영을 위한 군대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 적은 병력으로 거대한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소수이지만 정예(精銳)로 군대를 키워야 했다. 부대의 기율과 장교의 책임감, 그로써 적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함 등을 갖췄지만 현대전을 수행하는 데는 부족한 면모도 없지 않았다.
대단위의 기동전, 대량의 물자와 장비를 일거에 동원하는 동원 능력 등을 고루 갖추지는 못했던 것이다. 게다가 영국인 특유의 여유와 격식을 따지는 문화적 배경도 갖췄다. 그럼에도 설마리에서 보인 글로스터 대대원의 감투정신은 고귀했다. 마지막까지 적에게 총구를 겨누고 싸우다가 적에게 포로로 잡히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던,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군대였다.
부족한 대대 병력으로 중공군의 거대 병력에 맞서 분전할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하다. 미군과의 원활한 협조가 그 한 원인으로 꼽힌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을 적절한 시기에 최대한 활용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크다. 미군과의 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던 언어와 문화적 배경이 큰 몫을 차지했을 것이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 등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던 영국군의 오랜 전통과 명예심, 자긍심 등이 적의 공격 앞에서 바로 등을 보이고 무기력하게 물러서는 일을 막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중공군은 여러 면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따라서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해 고립됐다고 하더라도 아군의 공중 보급력을 믿고 끝까지 싸우려는 전의를 잃지 않음으로써 영국군은 중공군의 공세의도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서부전선에서 글로스터 대대의 분전이 이어져가고 있던 무렵 중부 전선을 맡고 있던 미 9군단 지역에도 중공군이 몰려들었다. 전선의 구석구석을 때려 틈을 뚫으며 진격해 수도 서울까지 노리겠다는 게 중공군의 의도였다. 그에 맞서 미 9군단 예하의 미 1해병사단은 화천 저수지 북쪽, 한국군 6사단은 김화 지역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중공군의 공격은 역시 서부전선 미 1군단이 맞았던 상황처럼 4월 22일 벌어지고 있었다. 중공군은 이번에도 역시 미군을 우회하는 대신 한국군을 선택했다. 화력이 막강한 미군을 가능한 한 최대로 피하면서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크게 전력이 부족한 한국군을 제물로 삼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