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문호 ‘섹스피어’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독사의 입에 물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키에케골’은 “행복은 감사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추수감사절로 지내는 이 날의 행사는 원래가 1621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간 영국의 소수의 청교도들이, 그들이 지은 첫 농사의 첫 열매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감사할 줄 아는 백성은 하나님께서 감사할 수 있는 백성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세계적 문호 ‘섹스피어’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과의 만남은 독사의 입에 물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철학자 ‘키에케골’은 “행복은 감사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같은 조건임에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과 반대로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매사에 감사함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저절로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신실한 성도이며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리하고 안 되는 것 같은 것들도 합력하여 유익하게 인도하여 주셨음을 알게 되고, 내 주변에서 괴롭히는 사람들도 알고 보면 나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요즈음 감사하고 사는 사람보다 불평으로 사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감사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감사는 행복입니까?
1. 만족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만족에서 나옵니다. 불평 불만은 불행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살고자 하면 감사를 배워야 하고, 감사를 연습해야 합니다. 본래 인간은 원죄가 있는 죄인으로 출생했기 때문에 연습하지 않으면 불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히브리 여인이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는 유식하거나 자녀 육아법을 알고 기른 것도 아닌데 아들을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세 가지를 말하더랍니다.
첫째는 모든 일에 무조건 감사하고 살아라. 입에서 한 마디도 불평하는 말을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저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하면서 살아라.” 그렇게 가르쳤고,
둘째는 원망 불평하는 사람과 놀지 말아라. 주변에 정당한 이유를 붙여서 원망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어울려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감사하고 사는 사람과 친해라. 그들과 함께 하라. 그것이 전부였다고 합니다.
결국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감사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많은 재산은 없다고 하더라도 하루 세끼 먹고 살 수 있다면 만족해야 하고,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릴 수 있는 건강을 주셨으니 감사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추수감사절을 지키게 되었으니 행복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불만입니까? 좀더 라는 욕심 때문입니다. 마음에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없는 것만 생각하면 언제나 불만입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누구나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갖고 살면 만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만족하게 살 수 있고 만족하게 사는 이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어느 여성도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자기는 결혼하고 십 여년 만에 전세집을 면하게 되었답니다. 전세 살 때에는 집 비우라 하면 어떻게 하나, 전세 값 올려달라 하면 어찌하나 전전긍긍하다가 제 집이 생겼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피곤도 모르고 이삿짐을 날랐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자기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 집에 가게 되었는데, 자기 집 보다 배나 더 큰집을 마련하였더랍니다.
돌아와 자기 집을 보니 갑자기 좁아 보이더랍니다.
자연히 기분은 좋지 않았고, 퇴근하는 남편을 보니 무능해 보이고 짜증이 나더랍니다.
결국은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답니다. 이유는 무엇입니까? 만족이 불만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만족할 때에는 감사하며 살고, 그 삶이 천국이었습니다. 불만을 품고 살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바울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족하기를 배웠노라”하였습니다.(빌 4:11)
만족하게 사는 법을 배우고 익히면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면서 살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2. 믿음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믿음의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에게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일이 생겼을 때 감사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감사합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이 생겼어도 이것을 모르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옛날 헬라 사람이 비 오는 날 갑자기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러더랍니다.
웬일로 그렇게 감사하는가 물었더니 ‘내 얼굴을 보니 하나님이 너무나 오묘하게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눈썹을 주셔서 비가 눈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코가 위로 구멍이 난 게 아니라 빗물이 들어가지 못하게 만들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더랍니다.
깨달아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시는 것은 다 나를 좋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하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이것이 믿어지면 감사하고 삽니다.
탈무드는 지혜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가고 가도 집은 없고 해는 저물어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다 묶어놓았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시간을 알기 위함이었고, 등불을 들고 다니는 것은 성경을 읽고자 함이었습니다. 불을 켜고 성경을 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등불을 넘어뜨려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그는 기도하고 잠을 청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맹수들이 나귀와 닭을 잡아 죽였습니다.
알고 보니 자기가 잠잔 곳에 가까운 동네가 있어서 동네에 들어갔더니 온통 아수라장입니다. 어제 밤에 강도 떼들이 들어와 동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강탈해 갔습니다.
랍비는 그 자리에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닭이나 나귀가 살아 있었더라면 강도들이 쳐들어와 자기 목숨을 해쳤을 것입니다. 불이 켜 있었어도 문제입니다. 생각해보니 잃어버린 것이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좋게하십니다.
여기까지 도우신 하나님은 나의 미래도 책임져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감사하게 되고 이런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감사 자체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감사도 있습니다. 지나간 일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구나 하고 믿어지면 감사하게 됩니다.
지난 세월 동안에 잘된 것도 있지만 잘못된 일도 있었습니다. 고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알고 보니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깨닫게 됩니다. 깨닫는 게 믿음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지금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수없이 역사하고 계시다 라고 믿어지기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엄청난 축복으로 충만하게 채우시리라 이것이 믿어지니까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행복의 원천인 동시에 행복의 열매가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큰 것에 감동하고 놀라기보다는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를 발견합니다. 적은 것으로 감사할 때에 행복한 것입니다.
기적적이고 엄청난 일에 대하여 감사하기보다는 매일의 삶에서 감사하는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든 것을 믿음으로 해석할 때에 감사가 가능합니다. 우리가 즐겨 사용하는 접착식 메모지 포스트 잇 은 원래 실패작이었다고 합니다. 애초에 의도하던 것보다 접착력이 약해서 제품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접착력이 약하다는 것이 접착식 메모지가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제품이 되었습니다. 접착지로 쓸모 없으나 메모지로는 쓸모 있는 물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모든 것으로 좋게 하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감사하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감사한 조건이 있을 때에 감사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조건이 없어도 감사하는 이들입니다. 믿음으로 해석하면 모든 게 감사한 것뿐입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행복합니다.
저는 오늘도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할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나를 부르시고 주의 종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뿐입니다.
더구나 이 축복된 김해제일교회 목사가 된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더욱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제가 설교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숙한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감사를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에 행복합니다.
사람들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직장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직장을 바꾸어 보십시오 행복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 행복을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환경을 바꾸어 보십시오 행복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기쁘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때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아내가 행복할 때는 남편과 가족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줄 때입니다.
남편이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아내와 가족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때입니다.
그러므로 서로가 칭찬해야 합니다. 부부간의 대화 중에도 서로가 높여주어야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소경 문고리 잡았어. 나 같은 남편 만난 게 보통 잘한 게 아니란 말이야.’라고 말하면 어느 여자라도 기분 좋을 사람 없을 것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반대말을 하여야 합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야 어쩌다가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났는지 모르겠어? 너무 감사해.” 그래 보세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도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어야 자신이 행복하다는 말입니다. 잔칫집이라도 기쁨과 즐거움이 없으면 초상집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잔칫집이 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주고 받고 살아야 합니다.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쁨이 없습니다. 거리 거리에 머리띠를 두르고 손을 높이 올리면서 결사반대, 관철이라는 패를 들고 데모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불만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들입니다. 예전에 우리는 가난하여도 힘들어도 서로가 협력하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사회적으로 불행한 모양이 보입니다. 우리는 기쁘게 살아갑시다. 기쁨을 주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할 영적인 사명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①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②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③ 믿어야 합니다. 믿지 아니하면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감사는 고난과 시련 그리고 실패한 자리에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은 감사의 사람입니다. 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해서도 또 많은 재산을 잃었어도 그리고 10남매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고(욥 1:18-19), 자기 몸에 병이 들어도 하나님께 감사를 하였습니다.
[욥 1:21-22]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욥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살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무엇이 있기에, 얻었으므로 감사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얻지 못하여도 감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감사는 행복을 주는 원료입니다.
감사는 마음에서부터 생겨야 합니다.
감사는 삶의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감사로 인하여 행복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전하는 일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명을 받은 후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왔던 것들을 분토와 같이 버린다, 나는 이제부터 예수만 알기로 작정했다,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 나는 죽든지 살든지 예수만 전하노라.” 깨달음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깨달음이 있으면 그 마음에 감사함의 마음이 솟아나게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이 마음을 품고 살면 그 삶이 행복하게 됩니다. 주어진 현재의 삶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삶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소유에서 오는 것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행복하면 무엇이든지 즐겁고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천국은 마음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지역에 건설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찬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양과 감사는 같은 뜻입니다. 그 감사함의 내용이 그 삶에, 얼굴에, 생각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Charles Spurgeon은 신학생들에게 설교자의 표정을 강의하면서 말하기를 “희망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위를 쳐다보라, 은혜와 감사와 영광을 말할 때는 눈을 크게 뜨고 빛나는 눈동자를 보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한 학생이 “그러면 지옥에 대해서 설교할 때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스펄젼은 “그 표정은 지금 자네의 그 얼굴이 적당하네”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얼굴을 찌푸리는 데는 얼굴 근육이 72개가 움직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소를 지을 때는 14개만 근육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웃으면서 사는 사람이 주름살이 그만큼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한 가지 명심하십시오. 사람이 정말 세상을 감사하며 살고 행복해 하며 살 때는 구겨졌던 얼굴의 주름살도 펴지고 마음의 주름살도 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원망도 사라지고 늙음도 방지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그 삶이 가장 좋은 약이 되고 보약이 되고 화장술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장은 얼굴에 바르고 치장해서 되는 일이 아니고 마음에서 만들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외모는 왜소했지만 그 마음에는 아주 넓은 천국을 품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아주 만족하고 행복한 여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하고 고백했습니다. 이 다음 우리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성공인생이 될 것입니다.
감사 신앙
하박국 3:17-19
인생에 있어서 감사를 느끼는 순간 풍성해집니다. 일마다 감사할 일들이라면 그 인생은 참으로 복있는 인생입니다.
새 성전을 이렇게 지어서 볼 때마다 감사합니다. 단칸방 생활을 하다가 크고 좋은 집으로 이사를 한 것처럼 꿈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점심 시간에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음식을 이리저리 나르며 고생하던 성도들을 보면서 너무도 마음이 상했는데 이렇게 좋은 시설에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으니 참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이 성전을 지으면서 우리 성도들의 헌신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볼 수가 있는 것은 성전을 짖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는 제 목회에 있어서 너무도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감사의 차원을 새롭게 정립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에 있어서 이렇게 좋은 일이 생겨서 감사할 일보다는 서운하고 불평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들이 어떻게 보면 더 많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해야 인생이 풍성해지는데 감사할 수 없는 일들 때문에 불평을 하고 만다면 우리 인생이 초라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감사는 그 차원(영역)을 넓혀가서 모든 일에까지 감사할 수가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감사를 해야 합니까? 그래야 우리가 건강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말랭이처럼 말라비틀어진 육체를 지니고 언제나 휠체어에 앉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루 게릭병(LouGehrig, 근육무력증)이라는 불치의 병에 걸린 사나입니다. 겨우 20세가 되던 해에 의사로부터 이 병에 걸렸다는 통고와 함께 앞으로 1,2년 이상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학적인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사람입니다.
바로 영국의 천재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W, Hawking)박사입니다. 하늘이 도와서 인지 죽음의 선고가 있은 후 무려25년 이상을 더 살고 있긴 하지만 그는 또다시 폐렴에 걸려 기관지 절개 수술을 받아 말하는 기능까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번 상상해 봅시다. 그 불행과 고통을 도대체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당사자인 호킹 박사의 「시간과 역사」라는 책을 대하면 유달리 농도 짙은 감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우리가 통상 머리말이라고 부르는 부분을 그는 '감사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글이 전개되어 가면서 그는 계속하여 자기의 행복을 고백하고 타인에 못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부단히 감격하고 있습니다.
호킹 박사는 만인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불행의 요건을 남달리 많이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히려 인생을 긍정적으로 이해하며 보다 적극적이고 활발한 삶의 자세로 감사가 넘치는 생을 살고있는 것입니다. 호킹 박사가 남달리 값지고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으로 활약하고 있는 동안은 곧 감사로 충만한 정신 자세 때문이 아니겠는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아주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감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용과 본문의 하박국입니다. 욥은 아주 경건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큰 불행이 닥쳤습니다. 하루 한 날에 온 재산과 열 명의 자녀를 잃은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그는 온 몸에 악창이 생겨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러한 불행을 당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대신 도리어 감사했습니다(욥 1장).
극도의 불행한 환경에 처하기는 하박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B C 600년경에 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때 바벨론의 침략으로 유다는 온통 폐허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의 주요 산물인 무화과나무며, 포도나무며, 감람나무를 비롯해서 밭에 심어놓은 식물들이 철저하게 짓밟히고 훼손되었습니다. 우리에서는 소 떼며 양 떼가 달아났습니다. 이 얼마나 큰 불행이며 시련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박국은 본문 18절에서 이렇게 감사의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을 통한 감사의 차원을 발견하게됩니다.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가 드릴 이 감사의 차원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감사의 조건은 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감사 없는 소망은 의식 불명의 소망이요, 감사 없는 믿음은 줏대 없는 믿음이요, 감사 없는 생애는 사랑이 메마른 생애이다. 어떤 아름다운 것도 거기서 감사를 제거하면 이미 절름거리고 만다"
라고 조뛕은 말하였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메마르게 되면 그 마음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선물을 주셔도 그것을 깨달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좋은 환경을 주시고, 좋은 부모를 주시고, 좋은 자식들을 주셨어도 이 땅의 집집마다 가보면 감사함보다는 원망과 시비와 갈등이 더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가 환경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가진 것이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고 그 감사의 조건을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차를 타고 지방 도로를 가다보면 과수원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한 과수원에는 사과며, 배며, 감 등이 주렁주렁 탐스럽게 열려 있습니다. 어떤 나무에는 과일이 얼마나 많이 열렸는지 가지가 쳐져서 막대기로 받쳐 놓은 것도 있습니다. 그 과일 나무는 해마다 심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심어놓고 조금만 잘 돌봐주기만 하면 매년 그렇게 열립니다. 그리고 매년 그냥 가서 따다 먹고 내다 팔면 돈이 생깁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요즘 도시인들은 자연과 멀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까 가슴이 자꾸만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고서도 거기서 감사함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조건이 늘 우리 곁에 있는데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차원에 머물게 되면 불평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큰 것을 주시고, 좋은 것을 주셔도 그 뜻을 모르고, 의미를 모르고, 고마움을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 무슨 감사의 기도가 나을 수 있습니까?
오늘 읽은 본문을 17절을 보십시오. 이 감사의 기도문이 얼마나 기가 막힌 감사의 노래입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얼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참으로 감사의 조건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의 조건입니다. 내게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 것,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는 것, 일용한 양식이 있고 호흡할 공기가 있는 것, 이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날마다의 가장 큰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시련이나 시험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도 결국은 협력하여 선을 이루고(롬 8:28) 마침내는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 가까이에 있는 감사의 조건들을 발견하고 그로 인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욥과 같이, 하박국과 같이, 호킹과 같이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감사의 기준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는 이 땅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정신이고 성숙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감사는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말 진정한 감사는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감사의 기도문을 보면 거기에 감사할 만한 조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있다면 원망과 절망과 탄식할 조건만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보면 진정한 감사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시편들을 보십시오 시편의 대부분은 감사 찬양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감사 찬양시들은 모두 기쁨의 조건 가운데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상당수가 다 환난과 고난을 겪으면서 그 고난 속에서 고백한 감사 찬양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감사는 모두 환경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이 있고 최고의 능력을 가진 기도는 '감사의 기도'라고 합니다. 히브리인들은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그 지혜는 그들이 수난을 많이 겪으면서 체득한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지혜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줄 알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감사의 기도가 능력 있는 기도임을 숱한 시련 속에서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고, 감사의 찬송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감사하는 삶이 있는 곳에 천국이 임합니다. 이것은 의심할 것 없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은 또 하나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감사할 만한 조건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 보면 그 무엇보다 더 진하고, 감동적이고, 진솔한 감사의 기도문이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언제나, 어떤 환경에서나, 하나님께 감사할 때 바로 거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나고, 응답이 주어지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환경을 초월해서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살전 5:18). '범사'는 좋을 때나 나쁠 때 모두를 가리킵니다.
감사에는 기준이 따로 있지 않음을 아시고 범사에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3, 감사의 시기는 바로 지금입니다.
펄 벅(Pearl Buck)이 쓴 「대지」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그 책의 주인공은 왕룽이라는 젊은이입니다. 이 왕릉이 자기마을에서 농사를 짓는데 매년 흉년이 듭니다. 죽도록 농사를 지어 놓으면 홍수가 나서 쓸어버리고, 또 땀 흘려 농사를 지어놓으면 수확기에 가서 메뚜기 가 와서 농작물을 모두 자아 먹어 버립니다. 그래서하는 수 없이 이 젊은이는 고향을 떠나 아내와 함께 도시로 갑니다. 가서 리어카 하나를 사서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밉니다. 땀을 흘리며 그날 그날을 부부가 함께 고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그 부인은 그 생활에 매우 행복해 합니다. 남편과 함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땀흘린 만큼 돈을 벌고, 그날 그날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왕룽 부부는 열심히 노력한 끝에 몇 해 후에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서 땅을 사고 큰집을 사고서 잘 살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금의환향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삶의 방향은 그렇게 순탄하게만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 왕릉이라는 남편이 잘 살게 되니까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립니다.
하루는 첩을 하나 데리고 들어와서는 부인을 부엌으로 내보내고 첩을 안방에 앉혀 놓습니다. 그리고 밥 먹을 때가 되면 이 부인은 밥상을 들여놓고는 자신은 부뚜막에 밥그릇을 놓고 그 곳에서 밥을 먹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한마디를 내뱄습니다.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언제냐 하면 남편은 리어카를 앞에서 끌고 자신은 뒤에서 밀며 땀을 흘리며 살아가던 때를 말합니다. 즉 고생도 되고 돈도 많이 없었지만 남편과 함께 도시에서 땀흘리며 살아가던 그때가 좋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일평생 가운데서 가장 행복할 때, 감사할 때가 언제라도 생각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 다음에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해질 것이며 그 때가 감사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이요 기대일 뿐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내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너무도 오해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오늘의 상황에서 행복해 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진정 행복하고 감사할 시기는 바로 이 순간입니다. 지금입니다. 생각 같아서는 내일이 더 나을 것 같고, 내년이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그날이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때는 다름 아닌 바로 오늘인 줄을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이 행복한 날인 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라야 내일이 되어도 행복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감사는 내일 하는 것이 아니고, 내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시간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의 시간입니다.
본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지금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도저히 감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도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도 없고, 감람나무를 심었는데 소출이 보잘것이 없고 어디를 보아도 감사할 수 있는 형편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기뻐하리로다. " 이 얼마나 간절한 감사의 기도입니까? 이것이 진정감사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현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 축복하시고 또 기회를 주시고 후에는 더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감사의 차원을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할 때임을 알고 매 순간 순간 감사하는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세상에는 건강, 지위, 재산, 가문, 학벌, 건전한 가족구성원 둥등 남이 부러워할 만한 여건들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서도 불평 불만에 사로잡혀 찌들고 비틀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은 그를 천국에 옮겨다 놓아도 불평 불만으로 지옥의 삶을 살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 아무리 고통스러워 보이는 삶의 여건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호킹박사와 같이 본인의 기본적인 자세만 제대로 갖추고 있다면, 감사가 충만한 생애를 살아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 인간임을 우리는 새삼스럽게 재음미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4-15)
우리는 늘 감사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 속에 더욱 감사가 넘치는 풍성한 삶을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