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원(왼쪽)과 미술평론가 조무하,인사동 김옥진 화백의 연구실에서 09년 1월ⓒ정재철
구산(龜山)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지운선생 사업을 인연으로 10년 넘게 만나면서 배움이 컸던 어른이었다. 췌장암으로 투병 중에도 증언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이 꼼꼼하게 정리한 자료를 필자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부친에 대한 얘기에 이르러서는 한숨이 더욱 깊어지고 남은 증언을 위해 아버지와 함께 학교를 만들던 후배교사의 이름을 날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겨우 들려주었다.
이즈음에 구산 선생의 삶과 그의 아버지를 차분하게 돌아보는 것이 남은 자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진상을 요구하며 전라북도의회에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시대사에 오류(誤謬)를 범하여 역사를 오기(誤記)한 사실들을 정정하고 밝혀 후손들의 한(恨) 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당상리 최기원이란 사람-
동진면 당상리 466번지에는 탐진(耽津) 최(崔)씨가 조상대대로 살았던 집이 남아 있다. 많이 퇴색했지만 고풍스러움이 느껴지고 지금이라도 사랑채를 손보면 몇이서 앉아서 늦도록 대화 할 수 있는 기품 있는 최기원의 집이다.
최기원(崔基元, 1937~2009)은 부안중학교 1학년 때 겪은 일을 잊을 수 없다. 한국전쟁이 나던 그해 7월에 논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사라졌다. 알고 보니 경찰이 동진지서로 데려갔다 한다. 3일 후에는 줄포유치장에 갇혔다가 경찰들이 퇴각하면서 유치장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줄포면 후촌 야산 골짜기에서 7월 19일 새벽에 사살했다.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40고라당’으로 불렀다. 40여명이 죽었다했다 해서 붙여진 슬픈 이름이다. 그 때 아버지는 한창 일할 나이인 갓 마흔이었다.
기원의 나이 열넷에 참으로 모진 일을 겪은 것이다. 줄포에 살던 친척이 관을 가지고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겨우 겨우 수습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부안 중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큰형 기송과 고려대를 다니던 작은형 기경이 전쟁 중에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촉망받던 장정 셋의 자리기 비어버린 가정은 대들보가 무너진 듯 깊은 슬픔과 정적에 묻혔다. 그렇다고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남겨진 가족들은 살아야 했으니 말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농사철이면 놉을 얻어서 농사지으려 나서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일찍 철이 든 기원이 나서서 농사일 거둘라 집안 대소사 치르랴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시간을 쪼개서 학업에 힘써 부안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전북대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도 집안 농사와 학업을 함께 할 수밖에 없었다.
졸업 후 농림부 시험에 합격했으나 4 · 19등 격변기가 계속되면서 임용이 어려웠다. 기원은 고향에서 근무하기를 원하여 농협시험을 치러 합격하여 62년부터 근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부안에 도축검사를 할 만한 인력이 없었기에 수의학을 전공한 기원이 군청에 파견되어 근무하기도 했다.
68년에 구시장 들머리에 최가축 병원을 개업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소죽을 쑤어 놓고 출근하는 부지럼을 떨어야 했다. 그는 농촌 발전을 위한 농촌운동에도 참여하여 전라북도 임원으로 활동했고 동진농조와 부안농조 합병 추진위원장으로 국회에 진정과 탄원을 하는데도 앞장섰다. 물이 없으면 농사짓기가 어렵고 농조가 합쳐져야 물관리가 용이하고 지역 농민들에게는 수세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라이온스 등 봉사단체 활동에도 적극적이고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로 인정받았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아버지 최순환(崔順煥, 1911~1950)은 조선 독립운동에 참가한 김한룡 · 최옥환 등과 독서회 활동을 하다가 경성사립중동학교에 재학 중에 퇴학을 당한 뒤 향리인 동진면 당상리에 내려와 최옥환 · 박병권 등과 농민조합을 결성하였다. 최씨 문중의 재각 모성재(慕省齋)나 최순환의 집에서 농민들과 회동하여 농민조합 등을 결성한 이유로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옥고를 치르고 치안 유지법으로 집행유예 5년을 언도 받는다.(1934.6.13 전주지방법원 형사부) 이러한 사실은 지수걸의 《일제하 농민조합 연구》에도 언급되었다.
최순환의 동생은 당시의 심정을 편지에서,
내가 보통학교 3~4학년 겨울방학 때 군산에서 집으로 오다가 검암리 앞에서 인부 차림의 10여명의 장성을 만났는데 왠지 으스스했지. 알고 보니 바로 이들은 우리 집을 가택수사하고 나오는 형사와 변장한 순사들이었어. 지금도 어머니가 벌벌 떠시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지 실로 참혹했다. 날마다 형사들이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한번은 형(순환)이 부안주재소에 왔다기에 면회를 갔다가 거절당한 가슴 아픈 기억도 있다. 사정했으나 면회가 안 되어 슬퍼하는 어머니 모습이 생각나서 지금도 눈물이 난다.
최순환은 농민조합 결성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고향에서 농사를 돌보며 최씨 재각에서 간이학교 식 후진교육을 하다가 해방을 맞는다. 해방 후에도 야학을 열어 공부를 하고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데 전념했다. 지역교육에 헌신하고자 당오분교를 세우기 위해 당오초등학교 설립후원회장이 되었다. 4~6㎞를 걸어서 동진 초등학교에 가는 초등학생들에게 가까운 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시 당오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김위현(金魏鉉)은 최순환을 가리켜 사람 좋고 교육열이 열렬했고 교육에 대한 특별한 신념을 가진 사람처럼 보였다고 술회했다. 학교 건립에는 벅차도록 많은 후원금을 내놓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50년에는 학교 건물은 세웠지만 아직 유리창에 유리를 못 넣어 완성을 못 본 상태에서 경찰에 끌려갔다. 자신에게 죄가 있었다면 얼마든지 몸을 숨겼을 것이다. 죄라 할 만한 것이 없었기에 느슨한 감시에도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경찰의 조치에 따랐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죄 없는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음으로 몰고 가겠느냐는 해방된 조국에 대한 믿음도 컷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믿음의 대가는 자신의 억울한 죽음뿐만 아니라 자녀에게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천형을 씌워 놓았다.
아버지는 누구인가? 어렸을 때 보는 아버지는 못하는 것이 없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겨울 칼바람의 바람막이요, 여름 뙤약볕의 쉴만한 그늘이다. 또한 험한 세상을 항해할 때 길을 인도하는 어둠 속의 속 깊은 나침반이다. 이렇게 넉넉한 아버지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가족까지 호소 할 길 없는 억울한 짐 가득 지고 세상을 살아가야하다니 앞길이 캄캄할 뿐이었다.
-국민보도연맹과 아버지-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이승만 정부가 일제시대나 해방 직후에 좌익 활동을 하다가 자수ㆍ전향한 민간인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만든 관변단체로, 전국의 회원 수가 6만2,000여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도연맹에 가입한 보도연맹원의 수는 최소 3,000명으로 보이고 부안군 국민보도연맹은 50년 1월 12일 군내 자수자 167명으로 결성선포 대회를 가졌다.
부안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가끔 지서와 경찰서에서 주관하는 교육 등에 참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일부는 3·1운동이나 8·15행사 등이 있을 때 예비 검속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보도연맹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경찰에 의해 소집되거나 연행되었을 때 별다른 의심 없이 응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전쟁 때 부안지역 보도연맹에 가입된 자들은 3차례에 걸쳐 170여명이 학살당했다. 1차는 7월 6일 경 개암동 골짜기에서, 2차는 7월 19일경 후촌 골짜기에서, 3차는 7월 20일 경 여룬개 골짜기에서 순차적으로 사살되었다. 1차는 보도연맹 갑종이고 2 · 3차는 부안 경찰서 후퇴시기에 임박하여 그때까지 구금되었던 보도연맹원들을 각각 분리하여 사살하였다.
국민보도연맹에서 규정한 가입 대상은 기본적으로 ‘좌익 전향자’라고 규정하였지만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았어도 좌익혐의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하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이승만 정권의 실정에 불만이 컸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 사건에 대해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서는 “일부는 적극적으로 좌익 활동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대다수는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농민들이었고,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당시 가해자는 희생자들의 불법 행위 등에 대한 확인 과정이나 사살의 법적 처리 절차를 거치지 않았고 다만 이들이 인민군에게 동조하여 후방을 교란할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 속에서 장기간 구금하여 불법 사살한 것으로 판단된다.”(《전북국민보도연맹 사건 진실규명결정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2009.)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이 때 보도연맹으로 몰려 죽은 사람들은 첫째, 대다수가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농민. 둘째, 저항 수단이 없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에 대한 혐의는 ‘인민군에게 동조하여 후방을 교란할 것이라는 막연한 우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실정법을 어긴 범죄 사실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누가 죽였을까. 보도연맹원 사살은 내무부 치안국과 전북지방 경찰국에서 지시를 내려 부안경찰서(서장 한00경감) 소속 경찰들이 부안지역 보도연맹원 및 예비 검속자들 사살에 직접 참여했다.(위의 책, 70쪽)
최순환은 3·22사건(47년 3월 22일 부안에서 24시간 총파업)관련으로 보도연맹에 가입되었다. 좌익 단체 가입이 본인의 자발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었기 보다는 지인의 권유에 의해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같은 책, 14쪽)
최순환의 해방 후 활동은 좌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기 보다는 진보적인 주변 지식인들의 권유로 소극적인 참여 정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방 후에 자주적인 나라 건설의 일부를 맡는다는 책임감으로 후진 교육에 매진했을 뿐이다.
-엽서 한 장-
기원의 집은 한국전쟁 동안과 이후에도 여러 차례 테러를 당했다. 그 때 테러를 하던 사람들은 살기등등한 기세로 죽창까지 가지고 왔다. 이 통에 조상들의 자료나 살림들은 남아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국동란에 학살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녀라는 이유로 평생 기를 펴고 살기 어렵게 만들었다. 농협에 근무할 때는 사찰계(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밥 사달라고를 않나 용돈 달라고를 않나 정말 고통스러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속상한 일을 겪으면서도 내색을 하지 않았다. 집안의 말 못할 아픔을 끌어 앉은 채 애써 평정을 유지하려고 노력 했고 지인들과 함께 봉사단체 활동도 열심이었다.
그는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픈 기억이 있는 부안에서 줄곧 살았다. 집안의 떳떳함이 훼손되지 않고 아버지를 향한 존경과 뜨거움이 변치말자는 마음에서였다. 아버지의 삶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부생(浮生)처럼 덧없고’ 한곳에 뿌리 내리지 못하는 ‘부초(浮草)같은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췌장암이 발병하여 죽기까지 11개월 동안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일제 때의 독립유공의 공적을 밝히고자 동분서주했지만 확실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죽음 길에 들어섰다. 그는 1년만 더 살수 있다면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확실한 결과를 얻을 텐데 하며 큰 죄를 지은 냥 얼굴을 들지 못했다.
기원은 1991년에 엽서 한 장을 건네받았다. 독립운동사 자료실에서 부안 동진면장 앞으로 보낸 엽서였다. 내용은 아버지 최순환의 1933년 항일운동자료가 나와서 유족을 찾는다는 뜻밖의 내용이었다. 그가 정부로부터 아버지에 대해서 받은 것이라곤 이때 받은 엽서 달랑 한 장이다. 그가 이 엽서를 중시해서 고이 간직한 것은 여기에 아버지의 흔적이 처음 언급된 이유이다.
왜란이 끝난 후 조선정부는 그 후로 100여년을 의병들의 공적을 찾고 어려워진 후손들을 살피고 도울 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삼았다. 나라가 위급에 처하면 국민 누구라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해야 하고, 묻힌 일들을 찾아내서 교육하는 것은 조국의 자존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후손들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
아버지의 독립운동에 대한 조명에 소홀한 정부가 아버지의 검증되지 못한 해방 후의 보도연맹 가입만을 내세워 독립운동에 대한 활동을 묻어 버리고 억울한 죽음까지 모른 체 한다면 역사에 죄짓는 일 아닌가. 일제 때는 일본 경찰에게 모진 고문과 아픔을 당한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대우는 못할망정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대한민국에서 불문곡직하고 사살했으니 이 원통함을 어디다 호소할 것인가.
식민지 시대의 독립운동에 대한 사례를 찾고 밝히는 것은 국가에서 할일이다. 동시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할 정부 기관이 아무리 전시라지만 민간인을 상대로 재판도 없이 목숨을 빼앗았다면 이것 역시 정부가 나서서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 하는 책임이 있다. 기원이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후손들을 만나 이 문제를 거론하고 정부에 진정하자고 했을 때 나서는 후손이 거의 없었다. 억울하고 분노로 가슴이 떨려오지만 그동안 당한 피해와 상처가 너무 큰데 60년이 흐른 지금 다시 떠올려서 또다시 피해를 받을까를 두려워하는 그동안의 학습 결과였다.
기원은 아버지에 대해서 〈독립유공자 공적조사서〉와〈진실규명 신청서〉를 정부에 냈다. 진실규명이 필요한 이유는 양민학살 피해자 및 유족명예회복이라고 밝혔다. 역사에 대한 잘못된 기록을 바로 잡고 가슴에 켜켜이 쌓이고 감추고 살았던 한(恨)을 풀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결과를 보지 못하고 이승을 떴다.
기원은 그동안 수집했던 여러 가지 자료나 애장품들을 주변에 나누어주었다. 유명을 달리하기 며칠 전 가족에게는 “이제 나에게 남아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을 비웠다”고 유언 했다. 그가 존경하고 따랐던 부안 출신 독립운동가 지운(遲耘) 김철수(金錣洙,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수여)선생처럼 자연에 한 점 흠 남기지 않고 지상에 흔적 남기지 않으려 자신을 몇 번이나 돌아봤다.
아버지의 기록이 나온 엽서, 독립운동사 자료실에서 보냄ⓒ정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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