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근 교수의 표해록 답사기
글이 실린곳: 한국일보, 1997. 9. 15일자 문화특집
글을 쓴 분: 박태근 교수
明나라 종단 大運河기행
崔溥의 漂海錄 <1>
21세기를 눈앞에 둔 지금 우리에게 세계화·국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명제이다.
세계의 3대 표류기로 꼽히는 15세기 후반 금남(錦南) 최부(崔溥)의 표해록(漂海錄)은
단순한 중국 명제국의 탐험이 아니라 시공을 뛰어넘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끊임없는 도전의 상징이었다.
무엇보다「표해록」은 응축된 시대정신의 표상으로 그 행간에 도도히 흐르는 자주정신과 충효사상은 세계화·국제화시대에 있어 모든이의 삶의 좌표가 될 것이다.
기행문학의 백미(白眉)이자 중국사연구의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표해록」은
그러나 후대의 무관심으로 정작 우리에게는 아직 낯설기만하다.
오히려 중국 일본 미국 등 해외에서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한국일보는「97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표해록」의 발자취를 따라 선인의 고고한 삶과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는
주간 시리즈를 마련한다. 【편집자주】
조선시대 최부(崔溥·1451∼1504년)가 쓴 중국기행문「금남선생표해록(錦南先生漂海錄·3권」은
우리나라 기행문학의 백미이자 세계적 표류기로 평가받는다.
학계는 세계 3대 중국기행으로 13세기 이탈리아 베니스상인 마르코 폴로의「동방견문록」, 9세기 일본스님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신라 장보고에 대한 귀중한 자료가 들어있음)」, 그리고 최부의「표해록」을 꼽는다.
1488년 윤1월(음력·성종 19년) 제주도 추쇄경차관 최부는 부친상을 당해 전라도 나주로 귀향하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다.(추쇄경차관은 다른 곳으로 도망간 백성을 송환 처리하던 특파관원이다.)
모진 고난 끝에 중국(명나라) 저장(浙江)성 닝보(寧波) 타이저우(台州)연안에 상륙한다.
해적을 만나 털리고 왜구로 몰려 죽을 고비도 여러번 만났으나 강인한 의지와 뛰어난 위기관리, 탁월한 지식으로 끝내 조선관원의 신분을 인정받았다.
그는 일행 42명과 함께 베이징(北京)을 거쳐 6월 무사히 귀환, 불과 8일만의 집필로 전인미답의 중국기행을 남겼다.
고국땅을 밟기 전까지 136일, 8,800여리의 고난어린 귀국길에서 최부는 조선 선비의 높은 긍지와 엄격한 자기관리로 중국인의 존경을 받았다.
어떤 조선인도 겪지 못한 역사적 체험(표류의 기구한 역정과 견문, 명의 사회실상)을 정밀한 관찰과 유려한 필체로 생생히 엮어냈다.
이 파란만장한 중국기행 기록이 바로「표해록」이다.
최부는 귀국 후 성종의 명에 따라「표해록」을 집필한 뒤 1491년(성종 2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으나
아무리 왕명이라도 복상(服喪)하지 않고 서울에 머무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탄핵받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홍문관 교리 및 응교(應敎)를 역임한다.
괴테의「이탈리아 기행」, 체홉의「시베리아 기행」등이 그렇듯이 기행문학은「이문화(異文化)와의 만남」이라는 비교문학, 문화교류의 시각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특히 조선시대의 문학유산 중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장르가 있다.
해외기행을 다룬「연행록(燕行錄·중국)」,「동사록(일본)」이 바로 그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해외나들이는 외교사절단의 공식기행(중국, 일본)에 국한되어 있었다.
우리는 기록을 통해 선인들의 다른 세계와의 만남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촘촘한 것, 거친 것, 비범한 것, 평범한 것 등 기록은 각양각색이지만 한 시대의 귀중한 증언으로 매우 값진 사료들이다.
이른바「북학」이나「서학」모두 이 루트를 통해 들어왔다.
그들이 견문하고 체험한 중국문명의 정보, 이미지는 중국측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하고 개성적인 사료성을 지닌다.
잘 짜여진 기록은 사료성 뿐만 아니라 짙은 문학성도 있고,
또 이문화와의 만남에서 비롯된 고도의 자기성찰을 통한 개혁사상이 돋보인다.
대표적인 것으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를 꼽을 수 있다.
표류가 모티브가 된 기행도 있지만 생환자가 드물고,
조난자 거의가 지식이 미약한 뱃사람들이라 뒷날 세계에 내놓을 만한 멋진「표류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모든「연행록」은 쓴 사람과 시대가 바뀌어도 서울, 베이징간의 똑같은 코스를 반복하는「선운동(線運動)」처럼 돼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
그러나 최부는 표류라는 비일상적 사건으로 조선사절의「궤도여행」에서 벗어나 전무후무한 체험공간의 확대를 이룩했다.
그 어떤 외국인도 꿈꾸지 못한 명제국의 안방을 종단하는「대운하(大運河)」기행을 해낸 것이다.
체험공간의 확대에 따라 서술세계도 자연히 확대된다.
최부라는 중국 문명에 통달한 한 외국인이 빗장을 굳게 잠근 15세기 명제국의 실상을 소상하게 관찰, 기록해 세계적인 사료를 제공한 것이다.
표해록 속에서 펼쳐지는 위기와 극복, 사건의 극적 전개는 다큐멘터리의 재미가 물씬해 마치 그리스의 고전「오디세이」를 읽는 기분이다.
최부의 사람됨을 살피고 배우는 것은 자아를 잃어버린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적지 않다.
유교이념의 종법(宗法)사회인 조선의 최고 덕목은 효. 효의 극단적 표현은 복상이다.
최부는 중국에서도 상복으로 일관했고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상복을 바꿔 입지 않았다.
해적을 만났을 때도, 황제를 알현했을 때도 상복을 고집했다.
전 서울대총장 고병익(高柄翊) 박사는「상복의 논리」라 이름했다.
시대의 윤리덕목을 끝까지 지킨 최부의 강인한 자아를 잘 말해준다.
충의 사상도 뚜렷했다.
그는 시종 철저한 공인정신으로 행동했다.
비록 조난자의 신분이지만 조선인으로서 예를 지켰고 도처에서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나타냈다.
또 국가기밀에는 입을 다물기도 했다.
조선역사를 묻는 관헌에게「단군건국설」을 말했고, "고구려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중국의 백만대군을 물리쳤다.
지금 조선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친 강대한 나라" 라고 했다.
최부는「동국통감」의 신사론(新史論) 204편 중 절반이 넘는 118편을 집필한 당대 으뜸가는 신진사관이다.
그의 사관(史觀)은 중국문명에 대한 친밀성이 강했으나 표류 중에 민족주의자로 회귀하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관념적인 주자학 원리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 어려운 나그네길에서도 본국의 농민을 생각해 중국의「수차(水車·논에 물을 퍼올리는 기구)」를 연구해 귀국 후 제작했다. 1496년(연산군·燕山君 2년) 그가 제작한 수차는 충청지역에 보급되기도 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돼 함경 단천으로 유배된 최부는 1504년 다시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51세의 나이로 아깝게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