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왕후 한씨 성은 한씨(韓氏), 본관은 안변(安邊)으로, 증 영문하부사(贈領門下府事) 한경(韓卿)의 딸이다. 충숙왕 복위 6년(1337)에 안변부에서 태어났다. 1351년, 영흥에 있던 태조에게 15세의 나이로 시집와서 슬하에 6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태조가 30년 가량 전장을 누비어 편안한 해가 없었는데, 왕후는 집안을 잘 다스려 성공하도록 도왔다. 고려 우왕 때에는 포천에 거주하였는데, 위화도회군 당시에는 동북면으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3년(1391), 52세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었다.태조가 개국 하기 불과 1년 전이었다. 태조 원년, 조선이 개국된 다음날 시호를 절비(節妃)라 추존하고, 능호를 제릉(齊陵)이라 하였다. 정종 원년(1398)에 신의왕후(神懿王后)로 추존되었다.
▶ 신덕왕후 강씨
태조의 계비(繼妃)로서 성은 강씨(康氏), 본관은 곡산(谷山)이며.판삼사사(判三司事) 강윤성(康允成)의 딸이다.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배경을 가진 강비는 이성계의 둘째부인이다. 위화도회군을 할 당시에는 포천에서 따로 살림을 하고 있다가, 변고에 대비하여 일가족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당시 고려에는 서울과 지방에 각각 아내를 두는 풍습이 있었는데, 신덕왕후는 서울의 아내로서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며, 태조 원년에 강씨를 세워 현비(顯妃)로 삼았다. 태조 5년(1396)에 죽었는데, 시호는 신덕왕후, 능호는 정릉(貞陵)으로 하였다. 정릉은 본래 현재의 덕수궁 옆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다. 태조의 사후 태종이 현재의 정릉동으로 이장했으며, 왕비의 제례를 폐하고 서모에게 행하는 기신제를 올리게 하였다. 그후 200년이 지난 뒤, 현종 때 송시열의 주장으로 종묘에 배향되고, 왕비의 기신제로 복구되었다. 결국 태종 이방원과의 갈등이 그녀의 두 아들과 자신의 사후까지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 의안대군 방석(芳碩)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자, 신덕왕후 강씨의 둘째 아들이다. 조선 건국 후, 세자 책봉에 관한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배극렴 등은 정안군 방원(芳遠)을 세자로 삼을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때 이미 방원의 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는 죽고 없었다. 이에 태조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의향에 따라 그녀의 큰아들인 방번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도전 조준을 비롯한 대신들의 반대로 방번의 세자 책봉은 무산되었고, 대신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11세의 나이로 왕세자가 된 방석은 어머니 강씨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의 보살핌으로 세자로서의 자질을 익혔다. 그러나 강씨가 죽고 태조도 병석에 눕자, 이방원 등 한씨 소생 왕자들이 난을 일으켰다(1차 왕자의 난). 이 난의 성공으로 세력을 잡은 방원은 세자 방석을 유배시키고 방번과 함께 살해하였다. 후에 세종의 여섯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후사를 이었으나, 금성대군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세조에게 죽임을 당하자 후사가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 회안대군 방간(芳幹) 태조와 신의왕후 한씨의 넷째 아들이다. 태종 이방원에게는 바로 위의 형이 된다. ‘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일파를 제거한 공으로 회안공이 되었다. 정종 즉위 후, 풍해도 서북면의 병사를 관장하였으며, 1400년 박포와 함께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방원에게 대항하였다. 그 후 방원의 군대에게 사로잡혀 평생 유배지를 전전하며 보냈다. 그는 성격이 괄괄하였고, 왕권에 대한 야심도 만만치 않았다. 박포의 이간으로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한다고 믿고, 앞 뒤 가리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난이 실패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세종의 배려로 유배지에서 천명을 누렸다. 1421년, 58세를 일기로 충남 홍성에서 죽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