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그렇다고는 볼수 없습니다.
여성차별이라는 것도 그 기준이 모호한데, 전시대보다 여성의 지위가 떨어진것의 "보편적"인 상황은 17세기이후 조선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정서로볼때이고...
그 전시대에도 여성의 지위는 조선후기와 다를것이 없다는 정서도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여러 사료에 적혀있는 고대설화에서 찾을수 있습니다.
고대설화중에 "아미산 설화"가 있습니다.
여성지위가 하락한것이 "조선후기"보는데, 이것은 "보편적"인 정서로 녹아내린것으로 보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전에 호폐모에 올린글인데...
고대 우리나라 여성상황을 알수 있는 사료를 모아본것입니다.
참고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고대의 일은 문헌이 거의 없어 확실히 알수는 없고, 중국의 기사를 인용하거나 설화, 전설, 민속, 풍습을 보고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는 고대의 생활을 알수 있게 문헌이 남아있는데, 그것이 삼국사기와 풍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유사입니다.
이 책이 없었다면 그나마 현재에 고대의 여성뿐만이 아니라 사회를 알수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삼국유사에 보면 단군에대한 이야기가 신화형태로 적혀있습니다.
단군신화의 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기로하고...
단군의 이야기를 학자들간에는 많은 의견을 내놓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곰 토템족과 범 토템족이 서로 겨루다가 곰 토템족이 우세하였다라는 설입니다.
확실한 것은 고조선이 여러부족으로 남아있다가 국가로서 나아갈 무렵 여러 부족간의 세력싸움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이런 이야기가 평양을 중심으로 조선초까지 전승되어 세종실록에도 기록되는 겁니다.
고조선은 극 건국이야기에서도 여성이 등장하고 인내를 바탕으로하는 여성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 단군신화는 모계사회를 반영하는 유습형태가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고조선사회는 여성이 우세한 것은 아니었을것이라 짐작됩니다.
한서지리지에 전하는 8조법과 고조선의 사회를 나타내는 중국의 문헌에는 여성의 정신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서에는 8조법을 기자법으로 하고있으니, 기자가 조선왕에 등극한 이후의 일로서 짐작됩니다.
중국측 사료에 의하면 기자는 기원전 10세기경 조선으로 도망왔다고 하였으니, 그 이후의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중국책과 우리나라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유화부인柳花夫人에대해 나옵니다.
유화부인은 동명성왕 고주몽의 어머니이고, 河伯하백의 딸이고, 동생은 훤화, 위화로서 靑河청하(현 압록강)에 놀러갔다가 북부여의 왕 해모수와 사통하여 아버지에게 태백산 남쪽 우발수라는 곳으로 쫓겨갔다가 여기서 金蛙금와를 만나 북부여의 궁으로 입궁하여 큰알을 낳고, 그 알에서 주몽이 태어났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태자 琉璃王유리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하기전에 禮氏夫人예씨부인과 정을 통하여 잉태시켰는데, 주몽이 북부여를 탈출하고 고구려를 세운뒤 예씨부인은 아들을 낳았고, 그가 유리왕이라는 것입니다.
유리왕이 하루는 동네에서 물 긷는 아주머니의 동이를 깨트리자 그 아주머니는 "에비없는 자식"이라고 핀잔을 주었고, 이 말을 들은 어린 유리왕은 어머니께 가서 자신의 출생에대해 묻고 어머니 예씨부인은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매우 이해할수 없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네모난 돌 위에 서있는 소나무 밑에 가면 증표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나를 찾아와라"라고 예씨부인에게 말을 했다는 겁니다.
어린태자는 그것이 주춧돌과 기둥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곳에서 나온 깨진 칼조각을 들고 동명왕을 찾아가니, 주몽은 그를 태자로삼고 그 태자가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구려 유리왕이라 적고 있습니다.
동국통감에는 池恩지은이라는 효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지은은 한기부출신인데 부친을 여의고 32세기 되도록 혼인을 하지못하고 눈먼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살고 있었다고합니다.
지은은 구걸과 품팔이로 눈먼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다 쌀 10섬에 부잣집 종으로 팔려갑니다.
이 소문을 들은 花郞화랑의 한사람 효종이 가엽게 여겨 조 백석으로 면천을 시켜주고 다른 郎徒낭도에게도 조 한섬씩 내게하여 선물로 주게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신라 효공왕이 조 5백석을 하사하여 그 동네이름을 孝養坊효양방이라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효공왕때면 9세기 말에 해당됩니다.
신라 아달라왕 4년인 서기 157년에 신라 동해안에는 연오랑과 세오녀라는 부부가 살고있었습니다.
연오랑이 해초를 뜯으러갔다가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게되고 일본에서는 비범한 사람이라 생각하여 왕에 추대하고, 기다리던 세오녀도 바닷가에 나갔다가 바위에 실려 일본으로 가서 연오랑을 만나 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해와달이 빛을 잃게되고 天官천관을 불러 알아보니 빛이 일본으로 갔다는 것이었고, 신라 아달라왕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 자초지종을 말을 하니, 연오랑이 말하기를... "세오녀가 짠 옷감으로 제를 지내면 될것이다"라고 하여 신라는 그 옷감으로 제를 지내니 다시 신라에 빛이 돌아왔다는 이야기고, 그 제를 지낸곳이 지금의 포항 迎日입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에게는 탄생전설이 전하는데, 光州광주에 사는 아름다운 미모의 처녀가 아버지께 말하기를 매일밤 자색 옷을 입은 남자가 나타나 자고 간다고 하여, 아버지는 실을 그 남자에게 메어라라고 시켰고, 다음말 실을 다라가보니 지렁이 허리에 실이 꽃혀있엇다는 것입니다.
며칠뒤 처녀는 잉태를 하였는데, 그가 바로 完山州에 도읍을 정하고 한때 세력을 떨쳣던 영웅 견훤입니다.
신라에는 3분의 여왕이 계셨습니다.
연호를 인평으로 하고, 통일의 전초를 마련한 선덕여왕은 그가 평등한 사회풍토로 왕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진평왕에 아들이 없었기때문이며, 당태종에게 태평송을 지어 바친 진덕여왕도 마찬가지며, 신라의 혼란을 가속화시킨 진성여왕도 경문왕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즉위가 가능했습니다.
고대의 문헌에 기록된 여성을 몇 경우 보았습니다.
고대에는 모계사회의 유습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같은 나라에서는 시조신을 모시는 제천행사에 유화부인을 숭상했고, 고구려의 한 갈래인 백제는 말할 것도 없고, 신라에서도 조상신을 숭배하면서 여성을 모셨고, 여근신앙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의 8조금법, 신라의 여왕의 등극배경, 유리왕의 경우에서도 볼수있듯이, 이미 남아선호와 부계혈통은 있었으리 짐작됩니다.
더욱이 선덕여왕때 반란자인 비담이라는 자는 이찬으로서 상대등까지 역임한 귀족으로 반란의 명분을 "여자는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미 고대에도 이런 습속은 공존했으리라 짐작할수 있습니다.
전해내려오는 전설중에 峨嵋山傳說아미산전설이라는 이야기는 이것을 미루어 짐작할수 있습니다.
아마산 맞은편 송정봉 기슭에 홀어머니와 남매가 살았는데, 오누이는 낮이면 활쏘기, 밤에는 글읽기등으로 내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이 오누이는 목숨을 걸고 내기를 벌였는데, 오라비는 1백근 쇠로만든 신을 신고 360리길 서울에 다녀오는 것이고, 그 시간동안 여동생은 뒷산에 산성을 쌓는것이었습니다.
이를 안 어머니는 말렸으나 듣지않자 어머니는 여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입니다.
이 전설에 등장하는 뒷산 산성이 강화도에 있는 삼랑성일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아미산전설에서는 이미 남아선호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전설도 구전되면서 변형을 되었겠으나, 그 근본적인 뿌리까지는 이야기가 크게 수정되지는 않고,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만들어줍니다.
따라서 고대에는 여성이라고 구분하는 경우는 없었지만, 남아를 선호하는 사상은 보편화되었으나 여성과 남성은 평등했던 것으로 짐작됩니다.
-참고문헌-
삼국유사,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동국통감, 동국이상국집, 위지, 구당서, 한국민속고, 조선명인전, 조선위인감상, 인명대사전, 한국사 강의, 한국사대계, 조선상식문답, 광개토대왕비고, 호태왕비, 동아시아 문화론, 고대 동아시아 종교, 고구려 건국과 시조숭배, 고구려왕조 700년사, 고구려제국사, 일본서기, 조선설화집요, 몽고구비설화, 한국설화집, 우리고장 설화와 유래, 한국여성사사료집, 한국여성사, 한국문화사, 조선의 풍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