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바르게 알려면 '칼빈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칼빈주의, 튤립이란 무엇인가?) ■ 들어가면서 칼빈주의에 대한 입장 세가지 '칼빈주의'에 대한 입장은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1) 칼빈주의를 미워하는 사람, (2) 칼빈주의가 신앙과 사역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하는 사람, (3) 칼빈주의를 따라가고 벗어나서는 안된다고 하는 사람 이렇게 세 가지 입장이 있다. 앞의 두가지 입장은 틀렸다. 첫 번째 입장은 성경으로 계시된 구원을 모르는 사람이다. 두 번째 입장은 복음과 구원에 관심이 없거나 적은 사람이다. 세 번째 입장은 복음의 내용을 이해한 사람이다. 개신교 신자는 (이단이 아니라면) 칼빈주의자이거나 아르미니우스주의자 둘 중에 하나이다.(웨슬리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당신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가? 아니면 칼빈주의자인가? 치킨게임 항상 문제는 어중간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어느 쪽 한편에도 서지 않고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평화주의자의 모양을 한다. 하지만 진리에서는 그런 것이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면 하나님이고, 바알이면 바알이지 둘 다 섬길 수 없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서로 정반대의 복음을 가지고 있다. 칼빈주의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으며 무능하고 주장한다. 반대로 아르미니우스는 인간이 부패하지 않았고 능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둘 다 맞을 수 없다. 어떤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칼빈주의는 하나님은 전능하시다고 주장한다. 아르미니우스는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다고 주장한다. 둘 다 맞을 수는 없다. 어떤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우리는 이런 진리에 대해서 애매하게 양다리를 걸칠 수 없거니와 걸쳐서도 안된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에 서면 안되고, 확실히 칼빈주의 입장에 서야 한다. 큰 문제 오늘날 한국교회에 퍼져있는 가장 큰 문제는 복음과 구원교리에 관심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며, 책을 읽지 않는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칼빈주의를 모르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가장 인기 없는 주제이며, 무관심의 영역이다. 왜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지 않고, 복음과 구원의 교리를 공부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이겠지만 무엇 보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그의 말씀과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를 이끈다. 목회자들이 칼빈주의를 모르고,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에 서있는 것은 그들이 주님에 대한 사랑과 공부가 없기 때문이다. 정체성 상실 칼빈주의라고 자처하는 많은 목회자들이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다. 생각과 관념, 이론으로는 칼빈주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르미니우스주의 입장에 서 있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칼빈주의자인지가 중요하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 시작함 인간의 타락하고 교만한 본성상 아르미니우스주의가 부드럽게 잘 받아들여진다. 모든 인간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 하지만 칼빈주의는 부드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매우 거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이다. 성경을 읽는 두가지 방식 : 성경은 반드시 두가지 방식으로 읽어야 함. 하나님과 하나님의 복음을 알기 위한 수단은 오직 성경인데, 성경은 반드시 두가지 방식으로 읽어가야 한다. 그 방식 중에 하나는 나무 하나를 집중해서 보듯이 본문과 장절을 국지적(局地的)으로 읽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숲 전체를 보듯이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서 읽는 방식이다. 성경을 교리적(숲 전체)으로 읽고 공부하지 않으면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없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 사람은 나무가 울창한 성경의 숲을 지나다가 방향을 잃어버린다. 왜냐하면 숲의 전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을 숲 전체를 읽듯이 정리한 것을 ‘교리’라고 한다. 숲을 벗어나지 않도록 울타리를 견고하게 치는 것이 바로 교리이다. 그러므로 교리로서 성경을 읽고 공부하면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된다. 불과 100~15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그렇게 성경을 두가지 방식으로 읽어 왔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귀한 유산들을 많이 남겨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한국 기독교의 성경 읽기 방식은 한쪽을 잃어버렸다. 그 결과 성경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크나큰 부작용에 갇히게 되었고, 그 결과 상상하지 못한 많은 오류와 잘못으로, 곁길로 치우치고 있다. 이에 대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언제나 여러분에게 성경을 장별로 죽 읽어 나가라고 권장합니다. 이것 역시 좋은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에 덧붙여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교리들을 취하여 구원의 계획 혹은 설계에 따라 살펴보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그렇게 해왔으며, 요즘의 교회가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성경을 통독하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나무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교리로서 성경을 읽어내면, 성경의 각 복문을 비로소 틀리지 않게 해석 할 수 있는 울타리를 갖게 된다. 이제 성경을 읽고 해석할 준비가 된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러한 입장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를 반드시 알아야 한다. ■ 복음을 왜곡되게 이해하고 있다면? 주님의 복음을 위해 목숨과 편안한 삶을 주님께 모두 바친 우리는, 주의 복음을 지키고 또 전하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그 귀한 복음을 잘못 알고 있다면? 복음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깨닫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지 않는다면? 사단이 비웃을 일이고,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위험에 처하게 된다. 1. 나의 구원이 위태로워진다. 2. 내가 돕는 이들의 구원이 위태로워진다.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구원을 가로 막는다면, 그로 하여금 죽는 날까지 구원의 확신을 잘못 갖게 하여서, 진정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 다른 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혹은 구원 얻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구원에 대한 교리와 영혼을 안내하는 방법을 몰라서 제대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까? 잉태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는 비참하고 부끄러운 종은 되지 말아야 한다.(사37:3) 혹은 너무나 게을러서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다면 얼마나 악한 것일까? 혹은 너무나 차갑고 메마른 심령이어서 구원 받지 못한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아서 나 혼자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얼마나 악한 죄인가? 혹은 나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것을 잊고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애를 쓰지도 않고, 복음을 더 알고자 하는 공부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얼마나 큰 배신자가 되는 것인가? 이 모든 죄들은 모두 가볍지 않고 너무나 큰 것들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만큼 심각하고 잘못된 문제가 또 있는데 ‘자신의 구원’이다. 우리는 구원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채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본다. 너무나 대충 구원을 생각하고, 꼼꼼하고 신중하게 살피지 않는 사람들도 본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 땅의 일들은 대단히 신중하게 처리하고, 조심성 있게 생각하면서도 자기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는 너무나 가볍고 쉽게, 안일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자신의 안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공부해서 바르게 알아야 한다. 성경으로 계시해주신 복음을 성경을 따라서 알아야 한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이 큰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칼빈주의를 알지 않고서는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 혹은 참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다면 칼빈주의에 동의하게 된다.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이 아닌, 자기 생각과 확신에 기초를 둔 구원의 확신이 난무 하는 시대이다. 혹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공포에 시달리는 자들이 있다. 혹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데도 태평하게,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야만적인 사람들이 있다. 먹고 사는 일에만 신경 쓰며 짐승처럼 지내는 이들이 있다. 도대체 자기의 구원을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취급하다니 이해 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그러한 죄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 모두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정리해 오셨는지, 선배들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 그 내용을 알고 공부할 필요가 절대적으로 있다. 당신이 이신론자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역사 속에서 정리해오시고, 심화시켜 오시고, 밝혀오신 하나님의 복음과 구원의 교리를 마땅히 공부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의 종들과 교사들을 통해 배우지 않고서는 우리가 복음을 바르고 깊이 있게,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는 길이 없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통해 미리 마련하시고 준비케 하신 그 길을 따라가자. ■ 칼빈주의란? 칼빈주의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라는 개인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본래의 기독교 사상’을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 죄인들의 타락,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부르심과 중생, 하나님의 도우심 등은 성경에 있는 것으로써 본래의 기독교가 가지고 있던 사상들이 있다. 칼빈은 그것을 일목요연하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탁월하게 정리한,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사용하신 사람, 하나님의 종이었다. ‘~주의’라고 할 때에는 ‘진영’, ‘부류’, ‘모임’ 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 “복음과 구원을 이해하는 것이 같은 부류” 정도 말이다. 그러니까 “가지고 있는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다름’의 정도가 이해와 허용이 되는 정도가 있다. 그러나 너무나 큰 차이가 나서 서로 다른 복음인 경우가 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는 ‘거의 다른 복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의 차이가 난다. 그리고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 역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그러나 정통 기독교는 오직 하나 일 수밖에 없다. 이단이나 심대한 오류를 가진 부류를 제외하면,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가 남는다. 특히나 진리는 두가지가 있을 수 없다. ■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아래의 [표1]은 각 교단별 교인수를 토대로 하여 복음교리 및 성경관에 따른 분포도 인데 이는 인터넷 자료들을 참고한 객관적인 수치이고, [표2]는 교단을 초월하여 실제 믿는 바가 어느 정도 분포인지에 대한 글쓴이가 바라본 대략적인 수치이다. [ 표 1 ] [ 표 2 ] ■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간략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유주의 자유주의는 기독교 5대 근본교리를 부인하고 믿지 않는다. 그 5대 근본교리라고 하는 것은 (1) 예수님의 성육신,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 (4) 예수님의 부활, (5)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믿지 않으며,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볼 때 자유주의는 이단적이다. 신정통주의 신정통주의는 성경이 영감되고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지 않는다. 성경은 잘못되고 틀린 곳이 있으며,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다고 믿는다. 성경은 특정한 때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천지창조, 아담의 타락 등을 신화로 본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부활 등을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으며, 보편구원론(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과 이교도들)을 주장한다. 이로 볼 때 신정통주의 역시 자유주의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며 이단적이다. ■ 자유주의와 신정통주의를 제외한 곳은? 위와 같이 자유주의와 싱정통주의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지 않았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바른 기독교의 부류에서 제외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이제 기독교 내에서 남은 진영은 두곳이 된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 주의가 그것이다. 우리가 바르고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이 둘 중 하나에 속해 있는 것이다. 아래의 [표3]은 아르미니우스와 칼빈주의 교단의 교세 분포인데 이는 인터넷 자료들을 참고한 객관적인 수치이고, [표4]는 교단을 초월하여 실제적인 아르미니우스와 칼빈주의가 어느 정도 분포인지에 대한 글쓴이가 바라본 대략적인 수치이다. [ 표 3 ] [ 표 4 ] ■ 칼빈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웨슬리주의를 왜 알아야 하는가? 1. 오늘날 기독교는 그들을 그대로 뒤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 있는 것이 절대로 새로운 것이 없다. 모든 것은 다 예전 것의 반복이다. 당신이 이단에 속하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진 복음과 구원교리는 저 중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아는 것은 기본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자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돕겠는가? 2. 셋 중에 옳은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구원의 길은 인문학이나 철학이 아니다. 정답이 여러개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책은 수학책과 같다. 오직 정답은 하나이다. 구원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구원자’이시지, ‘어떤 구원자’가 아니시다. 셋 다 맞을 수는 없다. 셋 중에 하나만 성경과 부합한다. 우리는 셋 중에 어떤 것이 성경적인지 알아내어서 그 뒤를 따라가야 한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셋 중에 둘은 하나님께만 온전히 영광돌리지 못하고, 하나만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린다.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라도 이 셋에 대해서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9) 4. 복음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질문하는 자에게 대답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어떤 구도자가 당신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를 “구원 받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가 믿기는 믿는데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영접기도를 따라했는데 저는 구원을 받은 것인가요?”, “구원의 확신을 가져도 되나요?” 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도울 것인가? 도망가는 비참하고 무식한 자가 되지 않고 대답하여 도울 것이라면, 이 질문에 대답해주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 잘못 대답하는 자는 그 영혼의 운명을 영원히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리처드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그동안 설교한 것과 저를 보내신 분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이 구원 얻는 일과 지옥에 떨어지는 일이 제 설교에 달려 있다는 생각을 할 때, 저는 혹시 하나님이 저를 그분의 진리와 사람들의 영혼을 등한히 여긴 자로 심판하시지 않을까 싶어 떨립니다. 그리고 제 설교(그 중 제일 훌륭했던 설교조차)가 저들의 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그런 설교는 아니었는지 두렵고 떨립니다.”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렘14:13,14)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눅17:2)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복음전도와 영혼들의 구원을 돕는 일에 있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들 아니겠는가? 때문에 구원 교리를 반드시 이해해서 성경을 바르게 적용한 구원교리를 가져야 한다. 5. 복음전도와 교회운영 방법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내용’이 다르고 그에 따라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가? 아는 바에 따라 교회운영과 복음전도 방법론이 갈라진다. 칼빈주의교회와 알미니안교회가 다르다. 천지차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성경적 전도 및 교회운영 방법이 있다. 그렇게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6. 목사와 교회를 분별하는 필수적인 지식이기 때문이다. 어떤 목사님이 바르게 설교하시는 목사님이시며, 어떤 교회가 바르게 가고 있는 교회인지 구분하는 기준이 되므로, 필수적인 지식이다. 교회를 분별하고 거취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거의 전부인 기준이다. 7. 우리 자신의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필요한 지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생활, 구원의 완성을 향한 달음질은 우리가 복음과 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복음과 구원의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에 따라서 그의 삶은 천지차이가 난다. 8. 영혼구원에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복음 역사, 영혼 구원 역사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칼빈주의여야 한다. 교회 부흥의 역사가 증거이다. 9. 옛 오류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 하늘 아래에 새 것이 없다. 오류와 이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다 예전에 있던 것들의 반복이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의 오류와 펠라기우스와 아르미니우스의 오류는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단지 그 옷만 바꿔 입었을 뿐이다. 그래서 많은 목회자와 성도들이 그런 오류들에 빠져있다. 교회 역사를 조금만 알았더라면 빠지지 않았을 오류에 빠져서 자기 옷을 더럽히고 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날의 여러 가지 오류와 이단들은 예전 것의 반복이다. 교회 역사를 공부해야만이 그런 것들로부터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 공부하지 않으면 방패 없이 적군의 화살부대 앞에 서는 꼴이다. 교회역사공부,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 공부는 매우 훌륭한 방패이다. 오늘날의 많은 오류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 있게 한다. ■ 교회역사 - 이신론(理神論)은 틀렸다. 종교개혁을 일으키신 분은 루터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으며, 종교개혁을 흥왕하게 하신 분은 칼빈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 종교개혁은 분명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고,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였다. 하나님께서 들어쓰신 루터, 칼빈 등의 위대한 인물들을 통한 고대 이후 첫 번째, 그리고 가장큰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였다. 세속 역사도 그러하지만 교회 역사 역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놀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세속 역사나 교회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 아니시고, 인간들의 행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신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는 하셨지만 역사에 개입하시지는 않는다는 이론. 그러나 역사는 히스 스토리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어떻게 섭리하시고, 역사 속에서 교회를 어떻게 보호하시고 부흥시키셨으며 사용하셨는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하게 하셨는지, 이단들을 어떻게 퇴치하셨는지를 보면 가슴이 설렌다.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교회의 교리를 보존하시고, 지켜오심. 일관된 교회역사 교리심화의 역사, 교리구체화 역사의 흐름이 있다. 그리고 그 중에 항상 성경적인 입장을 가진 해석과 사조와 인물들이 우세를 확실히 점하게 하셨고, 승리를 하게 하셨다. 물론 로마 카톨릭 천주교 암흑의 1천년이 있었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뒤집어 엎으셨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의 상황은 로마 카톨릭 암흑의 1천년과 유사한 상황이 되었다. - 교회 역사 도표 우리는 위의 교회 역사 도표로부터,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가 칼빈주의교회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도표 해설 : 교회 역사를 아는 것의 필요성과 유익 이와 같이 교회 역사는 칼빈주의가 정통이요, 나머지는 정통의 곁가지로 뻗쳐 나간 것임을 알 수 있다. 성경과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정리한 것은 칼빈주의였다. 그 일은 사람들이 하였지만 그 근본에서 역사하신 분은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교회 역사를 아는 것의 중요성과 유익이 바로 이 지점에 있는 것이다. 세상을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교회와 복음의 역사를 통치하시고 세밀하게 운행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 튤립이란? 역사성이 있는 정통기독교의 구원 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는 아르미니우스(네델란드 라이덴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세력을 얻게 되었고, 그를 추종하던 자들이 그의 사후에 네델란드 의회에 기존의 정통교리, 칼빈이 정리한 교리를 동의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 개신교는 대부분 칼빈주의였다.) 그에 대해 네델란드 정부는 이 문제를 확실히 판단하기 위해서 유럽 전역에서 각국의 대표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을 소집하여 도르트에서 총회를 개최하게 된다. 1618년 11월 ~ 1619년 5월, 136번에 걸쳐서 회의는 개최되게 된다. (네덜란드 개혁교회들의 대표자들과 영국,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의 8개국 27명의 외국 교회 대표자들도 함께 105명의 전 세계 교회의 총회였다.) 그 결과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의 구원교리가 잘못되었다고 결의하였으며, 그렇다면 어떤 구원교리가 옳은 것인지 5개 항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각 항의 앞글자를 따면 TULIP가 된다. 그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서 한다. ■ 하나님에 대하여 ▶ 전능하신 하나님 먼저 이 TULIP 교리를 공부하기 전에,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 정리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구원 하시고자 하시는 자를 반드시 구원해 내신다. 하나님은 구원코자 하시는 자를 절대로 놓치는 법이 없으시다.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1마리 양까지 찾아내셔서 100마리를 채우시며, 잃은 드라크마 하나를 찾아내셔서 10개를 채우신다. ▶ 하나님의 주권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롬9:21)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주권을 가지신 주인이시다. 모든 만물과 인생들은 하나님에게 그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실 권리가 있으시다. 어떤 그릇은 천하게, 어떤 그릇은 귀하게 사용하실 권한이 있으시며, 어떤 사람은 진노를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뜻으로 사용하시고, 어떤 사람은 자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하시더라도 그 누구도 그것을 부당하다고 말할 권리가 없으시며, 온당하신 하나님의 권리이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한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롬9:21,22,23)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믿는다면,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 선하신 하나님 그러므로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실 권리가 있으시며, 어떻게 하시더라도 선하신 행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성경이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선하지 않다, 악하다고 생각하기를 잘 한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생각에 선하고 악하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을 잘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행사가 우리가 보기에 선하지 않으면 선하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가진 윤리와 도덕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사를 선하다 선하지 않다고 판단한다.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선의 절대 기준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행사와 모든 말씀은 무조건 선하다. 내가 보기에 하나님의 어떤 행사나 말씀이 선하시지 않다면, 내 생각이 틀린 것이지 하나님이 틀리신 것이 아니다. ▶ 공의로우신 하나님 예를 들어 집총을 거부하는 자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국가에게 칼을 주셨고, 악인을 징벌하여 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국가는 사법권을 사용할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칼을 가지고 합당하게 사용할 때에는 합법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형제도 역시 하나님께서 세속 국가에 주신 권세에 해당하므로 선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국가의 의무에 따라 칼을 가지고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하여 수행하는 전쟁 역시 합법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이성을 진멸하실 때에 어린아이와 가축까지도 남김 없이 진멸하시는 것 역시 선이시며, 공의의 결정이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하나님 경외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구원하시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다. 그리고 절대로 하나님은 죄 없는 자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모든 자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예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머리로 모두가 다 이해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하시고 공정하신 뜻이 있으리라 믿어야 한다. ■ 인간에 대하여 우리가 구원 받기 전에 얼마나 무능했으며, 얼마나 무지했는가, 스스로 예수님을 찾았을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라. 성경은 인간에 대해서 무엇을 강조하여 말씀하고 계시는가? 인간이 아담의 후손인 상태에서는 자연적으로는 무능한 존재라는 것을 성경 전체를 통해서 거듭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의 죄는 단순히 혼자만의 죄가 아니었고, 온 인류와 함께 지은 죄이며, 그 죄가 모든 인간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말씀한다.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구원에 이를만큼의 지식과 의지를 가질 수 없으며, 선을 행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을 찾지도 않으며, 찾을 마음도 없게 된 존재가 되었다고 말씀한다. - 아래의 표를 보라. - 그래서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은 ‘인간의 전적 부패’라는 용어로 정리했다. ① 지성, 감정, 의지, 육체, 영혼, 정신, 마음이 모두 죄로 더럽혀지고, 무능해지고, 어둠과 무질서하고, 사망의 상태이며, 종이 되어 노예 의지만 남았고. ② 스스로 의와 믿음과 거룩에 이를 수 있는 능력과 지성과 분별력을 상실했다는 말이다. 모든 아담의 후손은 구원의 첫걸음을 시작 할 수도, 하나님을 인지하거나 알수도,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도, 구원의 걸음을 시작 할 수도, 복음을 믿을 수도, 선을 행할 수도 없는 존재이다. ■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비교 - TULIP ■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 요약 비교 ↳ 기본적으로 모든 인생들은 아르미니우스가 더 자연스럽다. 교만하고 부패한 인간의 본성상 그렇다. 그러나 자기가 구원 받았던 것을 깊이 되돌이켜 보고, 성경과 연결시켜 보면 칼빈주의가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성경에 비추어 깊이 생각해 보기 전에는 아르미니우스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혼돈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 당신들도 아르미니우스주의자 일 확률이 매우 많다. 아르미니우스주의를 선택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모자라게 되면, 공부가 모자라게 되면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다. ■ 각 입장별 정리 : 칼빈은 어거스틴과 동일함 ■ 존 웨슬리 존 웨슬리 (John Wesley, 1703.6.28 ~ 1791.3.2)는 1729년 11월 말부터 시작한 홀리클럽모임을 이룬 것으로 유명하며, 미국으로 건너가(1736년) 선교사역을 하였지만 실패 후에 8개월 만에 영국으로 돌아 온다. 이후 1738년 5월 24일, 회심하게 된다. 그 전까지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는 알지 못했다. 미국으로 선교사로까지 갔던 그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고, 회심도 하지 못했다니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적지 않다. 웨슬리의 경우처럼 회심을 하지도 않고, 구원에 이르는 믿음과 구원의 도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한채 선교사로 나간 이들과 목사로 사역하는 이들이 많다. 웨슬리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웨슬리는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사회구원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사회를 바른(?)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도 사역이라고 보았다. <웨슬리의 사회구원 주장> 1. 고용안정 : 실업은 빈곤의 원인이므로 고용이 안정되어야 한다. 2. 자본주의의 부당성 : 자본주의는 실업증가, 가난, 사회적 불평등, 독점화를 가져온다고 지적하고, 재산을 공유한 고대교회의 사회주의 사상을 주장함. 3. 세금제도 개혁 : 부자감세 반대, 민중감세 주장(민중들의 세금부담 감소) 4. 상속반대 :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만 상속. 5. 노동으로써 정직하게 번 돈으로 이웃을 도와야 한다. 6. 돈의 위험성 지적: 돈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만약 교회가 부자가 되면 성령께서 떠나신 교회가 될 것이다. 웨슬리는 그를 따르는 설교자들에게 부자들을 비평하는 설교를 하여야 한다고 했다. 7. 연대실천: 억눌린 자를 변호하고 고아를 위로하며 과부에게 남편이 되어 주어 마음속에서 기쁨의 노래가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출처 : https://ko.wikipedia.org) 이로 볼 때 웨슬리의 사상을 동조하거나 찬성하기에는 부적절하다. 그의 복음과 구원을 향한 열심은 귀하지만 그의 사상은 함께 하기에 어렵다. 18세기 위대한 설교자였으며, 미국 교회 부흥에 쓰임 받았던 존 웨슬리의 친구였던 조지 휫필드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다. ■ 칼빈주의, 알미니안주의, 자유주의, 신정통주의 기관과 인물들 ■ 아르미니우스주의식 전도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 中에서) 빌리 그래함, 빌 브라이트, 제임스 케네디에 이르기까지 모두 결심으로 중생되는 것을 믿고 ,초청이란 방법을 사용한다. 그래서 때로는 결심을 더욱 극적인 체험을 통해서 끌어내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찰스 피니가 170여 년 전 "갈망의 좌석"과 "회중 속에서 여자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기도하게 하여" 사람들로 더욱 극적인 체험을 갖게 했던 것처럼, 과도하게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환상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극적 체험을 유도하여 결심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그 결심을 중생으로 간주한다. 이는 바로 반펠라기우스 신학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거듭나지 않은 자가 어떻게 회개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주권으로 거듭나야 회개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반(半)펠라기우스 신학에 근거한 전도 방법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자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인간이 부패되지 않았고 충분히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전도법들은 반(半)펠라기우스 신학을 근거로 하고 있기 때문에 성령께서 하시는 "죄의 질책", 하나님의 거룩성으로 인한 더러움의 발견, 하나님의 계명을 통하여 죄와 죄성을 확인하는 것과 같은 것들을 삭제하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회개와 진정한 믿음에 대하여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진정한 회개의 증거는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것(렘31:19 참조)을 반드시 언급해야 한다. 또한 진정한 믿음의 증거로, 의로움을 사랑하는 것, 계명을 무거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계명을 지키기에 애쓰며 거룩에 힘쓰는 것, 의롭다 여김을 받음과 함께 시작되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을 모두 생략하고 , 전도 프로그램 다음으로 제시되는 제자훈련에서 배울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기계적 전도 프로그램은 보통 다음 단게로 제자훈련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놓고 있는데, 구원의 도와 은혜가 무엇인지를 다시 배우도록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기준을 사람의 지혜로 낮추었기 때문에, 예수를 주로 믿는 과정에서 경험하고 알아야 할 은혜의 덕목을 제자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내려 하는 것이다. 피상적인 기계적 전도 방법 때문에 제자 훈련에서 이들을 다시 가르치려 하고 있지만, 이것은 에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하셨던 전도는(눅9:23,14:26,27) 피전도자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 하는 자들에게 먼저 이르기를 "무릇 내게 오는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의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누가복음 14:28-32에서는 망대의 비유와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겠다고 결정할 때 신중함 없이 성급히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셨다. 또한 예수님을 따를 때는 자신의 모든 죄로부터 반드시 떠나야 하며, 자신의 의를 포기하고 예수님과 믿음 때문에 치러야 할 희생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말씀하셨다. 만약 따라오다가 중간에 그만둘 것 같으면 시작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게 될 때 발생하는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 따르기 전에 분명히 다 밝히셨다. 그러나 프로그램 전도법에서는 이러한 책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겠다는 말만 이끌어 내며 그것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선포한다. 이러한 기계적인 전도방법은 에수님이 하신 전도방법과 어긋나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교회는 기계적인 전도 방법으로 전도된 자들로부터 회개와 믿음의 증거를 볼 수 없기에 다시 제자훈련 프로그램을 통하여 변화시키려고 애쓰지만, 그 방법과 순서가 잘못되었다. 왜냐하면 전도의 결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것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전도 프로그램으로 구원받았다고 선포된 피전도자들이 권고사항인 제자훈련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없이 서둘러 성급하게 한 고백이 구원에 이른 것이라 착각하고 살아갈 것 아닌가. 그러므로 기계적 전도프로그램은 기독교의 기준(수준이 아니라 기준이다)을 낮추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전혀 행함이 없고 도덕적 감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만 넘쳐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경건의 감각이 없는 그리스도인들만 넘쳐나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경건의 능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세상은 점점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위 한국의 유명 교회들이 이러한 전도 프로그램을 매우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그 효과로 상당한 교회 성장을 이루었는데,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의 실용주의 철학과 맞물려 있는 주장이다. 복음주의자들은 그 효과만 나타나면 진리라고 믿는다. 따라서 어떠한 인간적인 방법도 사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교회 성장을 위해 인간적인 수단과 테크닉을 정당화하는 자들은 이것을 거룩한 실용주의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결신한 자가 수백만 명에 이른다고 광고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마태복음 7:22,23의 말씀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교회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따라서 전도 방법 역시 예수님의 방법과 합치해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의 역사이다. 인간의 방법으로 인간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고 마치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것처럼 위장한다면 마태복음 7:22,23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경우 그 의무와 책임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어리석고 헛된 동기로 예수를 쫓는 것을 금하고 있다. 또한 예수를 믿기 전 자신의 죄의 중함믈 철저히 깨닫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귀중함을 알도록 했으며, 예수를 믿은 후 참된 회개와 믿음의 증거로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경건함을 추구해야 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리고 서둘러서 결정을 하라고 촉구하지 않고, 많은 묵상과 생각을 통해 더 깊이 말씀의 도를 깨달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홍만, '개혁신앙으로 돌아가라'中에서. ■ 마무리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성경에 정반대되는 복음을 가르치고, 정통기독교에서 이탈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칼빈주의는 성경에 맞는 복음을 가르치고 이해하고 있으며, 정통 기독교를 그대로 물려 받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읽게 된 모든 분들은 잘못된 복음 이해,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되지 말고 칼빈주의자가 되기를 바란다. < 참고한 자료들 > ▶ 부흥과 부흥주의 (이안 머리, 부흥과 개혁사) ▶ 개혁주의 신앙고백(김의환,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 아르미니우스주의 내용 참고 : 양해민 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