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가 안재구 선생의 자서전 ‘어떤 현대사’를 연재한다. 시기는 해방 직후부터 6.25전쟁 때까지로 안 선생이 겪었던 현대사를 정리한 것이다. 이 자서전을 통해 독자들은 해방과 전쟁 속에 부대낀 한 인간의 이야기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황, 특히 지역운동사를 생생하게 접하게 될 것이다. 이 연재는 1회부터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에 걸쳐 게재됐는데, 41회부터는 매주 토요일에 게재된다. / 편집자 주 |
아재.아지매들의 사랑 속에서
대청으로 올라가는 축담의 섬돌에서 신을 벗고 마루에 올라서자 고모 내외분은 큰방에서 나오셨다. 고모는 막 부엌으로 가서 아침밥을 준비하러 나갈 양으로 차림을 하셨는데 고모부는 벌써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오셨는지 차림이 작업복 차림이었다. 그 부지런하심은 여전하셨다. 내가 방문 앞에 서자 두 분은 얼른 방안으로 들어가 나의 인사를 받을 차비를 하셨다. 방문 맞은 편 방안의 상좌에 나란히 좌정하시고 나는 그 앞에서 절을 하면서 인사 말씀을 드렸다. “새아재, 그 동안 오래도록 고생 많으셨지요?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오냐, 너그 집도 다 무사하시지? 그리고 너도 별일 없지? 이야기는 좀 들었지만. 밀양에 와도 되나?” “외고 다니지 않으니 괘않겠지요(괜찮겠지요). 하지만 조심 해야지요.” 이처럼 수인사를 마치자 나는 고모 곁으로 가서 손을 잡고 웃으면서 덕담 비슷하게 했다. “아지매, 새아재가 계시니 이제 얼굴이 환하고 옛날 우리 고모 같네.” 고모는 이 장난꾸러기 조카 입에 무슨 농이 나올까 겁이 나는지 못들은 채하고 얼른 말꼬리를 돌리려는데, 이때 병우가 방안으로 들어와 한 마디 거들었다. “읍내 아재요, 읍내 아지매, 아재 안 계실 때는 그렇게 못난 얼굴이 요즘은 우리 교동 어느 아지매들보다 달덩이 같이 더 훤하거든요.” 머슴애 둘과 새아재는 허허치고 웃고 아지매는 날 등짝을 때리고 병우에게는 곱게 눈을 흘기면서 우선 병우를 보고, “둘이 죽이 맞아 욕보는 건 아지매다. 오냐. 병우 나중에 보자.” “나중에 보자는 사람, 겁 안 나지.” 이렇게 수선을 떨고 아지매는 아침상 준비로 부엌으로 나가셨다. 나는 나가시는 등을 보고 말했다. “아지매, 나 퍼뜩 아침 먹곤 대구로 가야 한다.” “그 무슨 소리고? 1년을 훨씬 넘어 못보고 지냈는데, 아침만 먹고 달아나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래서 내가 초동학교 교원시험을 쳐서 합격된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이번에는 교사 발령을 받으려는 서류제출 때문에 읍사무소에서 호족등본과 초본을 떼려고 왔다고 말했다. 고모부 내외는 깜작 놀라면서, “우째 니가 선생이 되노? 초급중학교도 졸업 못했는데. 선생이라니.” “그래서 응시자격시험을 먼저 치고 합격해서 본시험을 쳤는데 다행이 둘 다 합격해서 준교사 자격을 받았어.” 고모 내외는 자기 일처럼 반가워했다. 병우도 눈이 동그랗게 해서, “야! 니가 선생이 되다니. 아무튼 시험이라 하면 다 붙는다니까. 그것도 1등 아니면 2등이니. 아지매, 이 친구 시험 치는 일은 다 붙는다니까. 그러나 저러나 니 한테 배우는 아이들이 정말 걱정이구나. 니 산술, 국어 학과목은 잘 가르치겠지. 그런데 니가 오죽 요란해야지. 동무들이 오죽해서 ‘개뚜뱅이’라고 별호를 붙였겠나. 니 제자가 되는 아이들이 정말 불쌍하겠다.” “이거 오늘 괜히 데리고 와서 욕 보네. 허참! 새아재, 이 놈아가 하는 말 믿지 마소.” 라고 하면서 손을 내 흔들자 고모부 내외는 폭소를 터뜨렸다. 나는 화제를 돌리기 위해서 고모에게 괜히 소리를 쳤다. “아지매, 뭐 하노, 아침밥 안 가지고 오고!” 고모는 내가 바쁠 듯해서 어제 저녁 새아재가 동네 일갓집에서 저녁진지를 잡숫고 오셔서 저녁밥이 이불 밑에 넣어둔 것이 있어서 국만 잠깐 대우면 된다고 하면서 밖으로 나가셨다. “병우는 집에 가면 밥이 있을 게고, 새아재는 좀 있다가 새로 지어서 상 차리면 되겠네.” 하자, 고모부는 한 말씀 하셨다. “안 준다는 소리가 없으니 고맙게 생각하고 기다리지요. 마님요.” 이 말에 모두 또한 웃음꽃이 피었다. 새아재는 앞서 말한 바 있지만, 8.15해방 직후 정치범과 경제사범들의 석방에서 부산형무소에서는 경제사범을 제외하는 바람에, 탈출을 조직하고 실행하다가 잡혀 가형을 2년을 받아 도합 5년을 감옥살이를 했던 것이다. 왜놈이 준 징역을 미국 놈이 곱빼기로 붙여주어 그야말로 곱징역을 산 셈이다. 아침을 먹자 나는 바로 고모 집을 나왔다. 병우와 나는 동구 밖까지 나와 서류접수하고 시간 내어 꼭 한번 오기로 기약하고 헤어졌다. 병우는 초등학교 다닐 때 몹시 조용한 아이였지만 나하고는 아주 친했는데 고모가 병우의 동네로 시집을 가자 나로 해서 고모와 매우 가까웠다. 중•고등학교를 밀양에서 다녔고 대학은 서울에서 「중앙대학교 약학대학」을 졸업하고 한 동안 제약회사에 근무했다. 정년이 되고부터는 강원도의 어느 곳에서 약국을 차렸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자세한 일은 모른다. 병우와 헤어지고부터는 나는 마음이 바빴다. 종종걸음으로 터실에 있는 할아버지 집으로 갔더니 할아버지는 북성거리 정미소 사랑에 가기고 안 계셨다. “재구가 집에 오면 시간이 없을 테니 바로 밀양역으로 가도록 하라.” 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이리하여 나는 아재와 할매의 전송을 받으면서 역으로 갔다. 대구로 가는 상행열차는 오전 10시 좀 넘어 있어서 정오가 안 되어 대구시의 대봉동에 있는 이모 집에 도착했다. 대구에서 서류를 만들어야 할 것은 「이력서」 몇 통과 보증인 2명을 정해서 서류에 도장을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력서」에 붙일 사진이 몇 장 필요했다. 보증인은 「보증인 동의서」에다 도장을 받는 일인데 한 분은 이모부 새아재에게 부탁하면 되겠고 한 분은 이종형이 오면 의논하면 될 것 같았다. 이모에게 형이 언제 오는 지 물었더니 이모는, “네 형이, 안 그래도, 오늘 네가 오면 저녁에 동인동 도청 사택에 가서 큰집 위원장 어른의 보증인을 받도록 한다고 했는데..... 형이 오거든 형 하고 동인동 도청 사택에 가보도록 해라. 할배가 안 계시면 우산 아재가 설두를 해주실 게다.”라고 설명해주셔서 보증인 일은 쉽게 해결 될 것 같았다. 나는 이모가 차려주신 점심을 먹고 우선 사진관을 찾아 나섰다. 대문을 나서자 대봉동에서 「대구중학교」로 가는 큰 도로로 나가는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바로 도로길 건너편에 「경북중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는 널찍한 길이 있다. 그 길 들머리 오른편에 길모퉁이에서 두어 집 건너에 사진관이 한 곳 있었다. 사진관의 미닫이 유리창 문을 ‘드르륵’ 소리나게 열고 들어갔더니 내 나이 또래의 소년이 있어, 나는 그 소년에게 작은 명함판 반신사진을 찍으러 왔다고 했다. 소년은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사에게 말했는지 40대 아저씨가 나와서 탁자 위에 있는 앨범을 펴놓고 판 크기를 골라라고 했다. 그 앨범에서 작은 명함판 반신사진을 가리켰다. 나는 회색빛 배경 앞에 섰다. 사진사는 사진기에 덮어놓은 빛 가리개 안에 머리를 넣고 무슨 조절을 하는지 좀 있다가 나오더니 원판을 넣고 고무공 누르개를 쥐고 한 손으로 나에게 얼굴을 바로 세우도록 이리저리 지시를 하고선 정지를 명하고 ‘하나, 둘, 셋“이라는 구령소리로 고무공누르개를 눌러 렌즈 슈터를 작동시켰다. 사진은 사진사와 의논을 해서 5장을 부탁하고 이튿날 아침 9시에 찾기로 했다. 나는 곧바로 이모 집으로 돌아와서 형이 올 때까지 형의 공부방에서 형의 책꽂이에 있는 책을 몇 권 빼다가 형이 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 다른 아이들은 모두 고령 개실, 이모부 고향마을로 갔고 형은 「대구농림학교」에서 「계성중학교」로 옮겨서 다니고 있었다. 당시 형은 6년제 중학교의 이름을 날리고 있던 농구선수였고, 학교의 대표선수는 코치와 감독의 지도에 따라 이 학교, 저 학교로 자주 바꾸어 다녔다. 그러니 학교의 운동선수들은 학교공부하고는 담을 싸고 있었다. 방학인데도 형은 아침부터 학교의 농구장에서 맹훈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형은 3시가 넘어서 집으로 왔다. 커다란 가방을 메고 왔는데 그 안에는 농구화, 유니폼, 그리고 타월 등으로 가득했다. 들어오자 나와는 겨우 ‘재야, 왔나!’라는 말소리 한 마디, 창가에 놓은 야전침대에 운동복을 입은 채 드러누워 잠이 들고 말았다. 나는 형의 잠에 방해될까 해서 이모가 계시는 큰방으로 옮겨서 책을 보고 있으면서 종종 이모와 말 상대도 하면서 오후의 시간을 한가롭게 보내고 있었다. 이모도 8월이 되면 고령 개실로 가서 시어른들을 뫼시고 시집살이를 할 작정이란다. 그래서 나도 서류만 제출하면 한 동안 구지에 가서 도동에 계신 외할머니 곁에서 푹 쉬면서 9월 새 학년 개학 때까지 지낼 작정이라고 했다. 이제 나의 삶이 터 잡힐 듯하자 좀 쉬고 싶었다. 이제 구지에 가면 외갓집에서 개학 때까지 들어박힐 작정이었다. 오후 6시 가까이 되자 형이 일어났고 곧 이모부도 퇴근하셨다. 곧 저녁 식사가 되어 큰 두레상에 둘러앉았다. 이모내외 두 분과 형과 나 그리고 이모의 수양딸 삼순이 모두 다섯이었다. 방학이 되자 곧 딸 셋, 아들 하나는 시골로 보내고 네 식구만 있는 셈이다. 식사를 마치자 형은 깨끗한 여름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고 나도 차비를 했다. 나는 보증인 서류용지를 새아재 앞에 내어놓았다. 새아재는 이름 난에 서명을 하고 주머니에 간직하고 있는 도장을 내고서 뚜껑에 들어있는 인주에 몇 번 누르시더니 그 아래에다 선명하게 도장을 찍으셨다. 그리고 나에게 주시면서 웃으시면서, “안재구 선생, 아이들 잘 가르쳐 주소.” 라고 농 반, 진 반으로 격려의 말씀으로 하셨다. 나는 말씀 드렸다. “새아재, 좋은 선생이 되겠습니다.” 이러는 동안 형은 외가 큰집에다 전화를 걸어서 나를 데리고 간다고 선통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나와 형은 책장이 넓은 책 안에 또 한 장의 보증인 용지를 넣은 책을 끼고 나왔다. 「경북중학교」 앞으로 나와 남북으로 뻗은 도로를 북쪽을 향해 나가자 동서로 뻗은 도로와 마주치는 봉산동 네거리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키네마극장’에서 동으로 뻗은 도로와 만나는데, 오른쪽으로 돌아 좀 나가면 도청관사 촌이 나온다. 도지사관사 바로 맞은편이 외가 큰집 할배 집이 있다. 둘은 대문에 서서, 형이 그 문기둥에 박아놓은 초인종 벨 단추를 눌렀다. 문이 지동으로 덜컥 열렸다. 둘은 현관 옆에 붙은 응접실로 들어갔다. 그러자 곧 우산 아재 내외가 응접실로 들어오시고, 아재는 그냥 나오라는 손짓을 하고 앞서 안으로 들어가셨다. 우산 아지매는 내 손을 잡고 안으로 인도했다. 그 뒤를 형이 따라왔다. 나는 널찍한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갔더니 의성 할머니가 계셨다. 할머니는 반가운 얼굴로 나와 형을 보고, “이리로 와 앉아. 이름이 ‘재야’라 했나.” 이제 두 번째 보는 할매인지라, 그냥 어리광조로 ‘그래’라고도 할 수 없고 그냥 엉거주춤하게 이도 저도 아닌 말로 대답 형용만 했다. 영남지방은 할매, 아지매, 엄마는 언제나 어리광부리는 대상이어서 말에 경어를 쓰지 않고 ‘하대 말’을 쓴다. 우산 아재도 내가 인사로 절을 하려는 몸짓을 하자 나의 어깨를 누르며, “무슨 절은? 그냥 앉거라.” 고 했다. 나는 그냥 앉았다. 모두 빙 둘러앉았고, 안에 둘러있는 미닫이 종이 문이 열리자 한 아주머니가 상에 외•수박에다 과자를 담은 접시를 얹은 상을 두어 상을 내왔다. 의성 할매는 내 곁에 바싹 다가앉으면서, “아직 철이 좀 덜 되어 맛이 날는지......” 라고 하면서 들기를 권한다. “할매, 잘 먹겠습니다.” 라고 하고 수박 한 쪽을 들자 모두 외와 수박을 들고서 먹는 분위기가 잡혀나갔다. 그래서 나는, “큰집 할배는 서울에 계시는가뵈.” 라고 했더니, 우산 아재는, “걱정 말거라, 모든 것을 다 내게 맡겨두고 있으니.” 라고 하시자, 나는 책갈피에 보증인 용지를 끼워둔 책에서 그 용지를 꺼냈다. 아재는 그 용지만 빼가지고 옆방으로 가서 좀 있다가 나오시는데 거기에는 큰집 할배 이름인 ‘김우식(金禹埴)’이라는 한자가 적혀있고 굵직한 도장이 점잖게 찍혀 있었다. 우산 아재는 그 서류를 내게 건네면서 “이만하면 됐지.” 라고 했다. 나는, “우산 아재,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했다. 형은 나에게 말했다. “국회의원 보증인이라. 그만하면 재야 너는 정말 든든하겠구나.” “국회의원 빽 가지고 한번 설친다?” 라고 내가 익살조로 말하자 모두 웃었다. 우산 아지매는 말했다. “재구야, 너 참 대단하구나. 학교도 안 다니고 시험을 두 번이나 치고 교사자격 합격이라니. 밀양 형님은 너를 보기만 해도 든든하시겠네.” 이렇게 해서 나는 고맙다는 말로써, 아재, 아지매, 할매는 모두 나를 축복해주는 말로써 그야말로 말꽃이 만발했다. 나는 우산아재에게 말했다. “석당 할배께 말씀드려 주시라고. 좋은 선생이 되겠다고 하더러고. 그리고 ‘고맙습니다.’라고.” “오냐, 뵙거든 말씀해 드릴께. 안 그래도 재구 네 말을 하시더구나.” 석당(石堂)은 이 할배의 호이다. 한참 놀다가 우리 종형제는 인사를 하고 나왔다. 우산 아재는 따라 나오시면서 나에게 살짝 귀엣말로 했다. “내가 도 학무과장에게 말해둘게. 임지는 구지로 해달라고.” 그리고 나는 그 이튿날로 모든 구비서류를 갖추어 도 학무과 서무계에다 제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