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에서 바라본 소안도
백락연은 1877년(고종 14) 정월에서 고종 18년 5월까지, 심연택은 1883년(고종 20) 5월부터 고종 21년 12월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다. 1977년에 발행된 「완도군지」에 따르면 이들의 영세불망비는 소안도를 기항지로 만들고 지역 개발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공으로 소안도 주민들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소안도는 이들 현감 때문에 조선 후기 대표적인 제주와 육지 사이 선박들의 길목 역할을 하였다. 길목이란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후풍처(候風處)를 말하는 것이다. 강진의 남당포나 백도(신전), 해남과 관두량에서 출발하는 제주행 뱃길은 섬과 섬 사이를 따라 간다. 이 일대는 뱃길이 비교적 안전한 곳이다. 날씨가 좋지 않다거나 날이 저문다 싶으면 언제든지 가까운 섬으로 피신할 수 있다. 지금의 완도항인 가리포나 완도 군내면 백일도, 횡간도, 넙도 등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은 모두 후풍처였다.
제주에서 벼슬을 하면서 그곳 풍물을 자세히 기록한 『남사일록』의 필자 이증(李增)은 1679년 강진읍 남포에서 제주로 들어가면서 완도 백일도에서 1박을 했었다. 그때 강진읍 남포 마을의 방영초(74세) 할머니가 스무 살 되던 해로 가을에 제주도 추자읍 횡간도 청년 이형규(당시 24세) 씨에게 시집을 가면서 소안도 인근 넙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넙도는 보길도의 서쪽에 있고, 소안도는 보길도의 동쪽에 있어 다양한 지점의 섬들이 후풍처로 이용되었다. 섬과 섬이 밀집해 있는 곳은 소안군도가 끝이다. 소안도와 보길도를 벗어나면 이제 망망대해가 기다리고 있다. 언제 어떻게 태풍을 만날지 모를 일이다. 소안도에 배를 대면서 하늘을 보고 바람의 심기를 극진히 살펴야 했다. 섬사람들에게 육지와 제주도를 왕래하는 사람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었던 것 같다. 보통 30~40명 정도 되는 일행이 하룻밤을 묵어가면 그곳의 주막이나 여관 등이 재미를 톡톡히 봤을 게 분명한 일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중의 일행은 군관 2명, 별파진 1명, 화공·서리 2명, 남자 노비 1명, 강진공방 1명, 포수 1명, 문서직 1명, 격군 8명 등 50명에 달했다. 또 제주에서 육지로 말을 실어 나르던 공마선에는 격군만 소선이 34명, 중선 37명, 대선은 43명이 올라탔다고 한다. 여기에 태풍이라도 불면 보통 일주일 이상은 섬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이들이 육지와 고립된 섬 지역에 미친 영향은 막대했을 것이다. 지금은 풍선에서 동력선으로 변하여 1970년대 들어서야 육지에 나가는 일이 일반화됐다. 그 전까지는 거의 모든 것을 자급자족했다. 돛배를 타고 다닐 적에는 육지에 나간다는 것을 쉽게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안도를 집중적인 후풍처로 삼아준 제주 목사의 불망비를 세운 소안도 사람들의 심정을 알고도 남을 만하다. 소안도는 이렇게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에 바다라는 문화 고속도로를 통하여 일찍이 문물이 수입되었고 일찍 외부 세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10년 학교를 세우고 섬사람들의 자존심을 살려 주는 항일의 섬이 되었다.
소안도 이름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진과 소안 사이는 잔잔한 바다지만 제주와 소안 사이는 한없이 큰 바다로 평상시에도 파도가 일고 물결이 거칠어 바다를 처음 접한 관원들은 공포에 시달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다 소안도에 상륙하면 안심한 곳, 즉 ‘소안(所安)’이라고 외치게 된다. 이것이 소안도에 대한 간략한 역사다.
소안 항구에서 월항리를 지나면 소안도의 북쪽 마을인 북암리가 나타난다.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지만 포구는 한참 내려간 해안가에 있다. 방파제 너비는 승용차 두 대가 거뜬하게 지날 수 있는 면적이다. 오른쪽은 돌로 경사를 이루고 왼쪽은 삼발이 즉, 테트라포드가 심어져 있다.
방파제 끝에서 남쪽의 마을을 바라보면 왼쪽으로 해발 337m의 대봉산이 보인다. 마을은 중턱에 있어 북풍을 막기에는 안성맞춤의 지형이다. 이곳 역시 주변에 섬들이 많다. 여기서 왼쪽으로 보이는 큰 섬이 완도 본섬이고 오른쪽으로 대봉산 끝자락에 보이는 섬이 대모도다. 그 뒤 보일락 말락 한 작은 섬이 소모도이고, 뒤돌아서서 북서쪽을 바라보면 횡간도가 보인다.
소안도 해안은 작은 배들이 정박해 있는 평범한 포구다. 해변은 자갈밭으로 해안 주변에는 쓰레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방치물이 적재되어 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물과 빈 건물이 다수다. 해안 자갈밭에는 김 양식에 사용되었던 부표들이 무분별하게 방치되어 있다. 물양장 주변은 여느 포구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어수선함이 느껴진다. 이곳에는 수산물 가공 공장도 있고 다양한 시설도 들어섰다.
소안도 ‘북암 마을’은 마을이 이 섬의 북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마을 앞 바닷가의 바윗돌이 아름답고 깨끗하며 소재지 마을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뒷바구(뒷바위)’라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1600년경 김해 김씨가 강진에서 처음으로 들어와 살고 같은 시기에 비자리에 거주하던 풍천 노씨가 들어오면서부터였다.
북암 마을 가는 길 중간에 있는 월항 마을. 바로 ‘소안 팔경’의 한 곳이다. 여기서 바로 보이는 건너편이 바로 노화도 동천항이다. 인근 해안이 깨끗하여 김 양식이 일찍부터 행해져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바다낚시터로 유명해 전국 각지에서 낚시꾼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소안도 입주민이 제일 먼저 살기 시작한 마을이 바로 월항으로 명종대(1546~1567)에 김해 김씨가 장흥에서 처음 건너와 입주하자 비슷한 시기에 동북 오씨가 입주했다고 한다. 그런 탓인지 이곳은 면 소재지가 있는 비자 다음으로 큰 마을이다. 이 마을은 1627년 이진진이 설치된 이후, 이진에서 제주를 향해 출항한 배가 소안도에 기착한 길목 마을이었기에 소안도의 그 당시 지명인 ‘달목(達木)’이라는 이름을 붙여 달목 마을로 불렀고 달목을 차자하여 달(月)과 목(項), ‘월항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직사각형으로 된 포구에는 가운데에도 방파제가 있다. 이곳 역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소안 어촌체험 관광단지 조성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특히 개매기 어업으로 유명한 곳이다.
소안도의 개매기 축제를 즐기는 관광객들사진 제공 - 김준
‘개매기 어업’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를 이용한 전통 어로 방식으로 말목이나 대나무를 이용해 수십 개의 지주대를 설치하고 그 위에 그물을 친 다음 밀물 때 물고기 떼가 들어오면 일제히 그물을 올려 물고기를 가두는 방식이다. 이것을 체험하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철 지난 지금도 이곳에서는 긴 장대들이 바다에 꽂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 해안 오른쪽 즉, 북쪽은 매립된 곳이다. 해안에 지렁이처럼 가는 형태로 길게 이어진 튀어나온 부분이 있는데 이곳을 연결하여 메운 것이다. 사실 소안도 해안은 동쪽에 반도처럼 돌출된 부분을 비롯하여 곳곳에 소규모의 돌출부가 있다. 동쪽과 남쪽 해안은 암석 해안이 대부분이며, 중앙의 사주와 북쪽 해안에는 갯벌이 펼쳐져 있다.
월항 마을은 도로 아래쪽에 형성되어 있고 도로 위쪽에는 몇 채의 집들이 있을 뿐이다. 그 뒤로는 주로 밭이 있는 임야 지대로 제일 높은 곳이 바로 대봉산이다.
월항 마을 다음에 있는 마을이 이목 마을이다. ‘이목’이라는 지명은 노화도에도 있듯이 ‘배가 드나드는 포구’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마을 이름에 걸맞게 포구가 있어야 하는데 이곳에는 포구가 없다. 마을 앞에 물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일부는 메웠고 바다는 바로 앞에 있는 죽도 앞에서 막아 버렸다. 즉 소안항에서 비자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다리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매립된 곳에는 억새를 비롯한 잡초만이 무성했다. 막아 버린 물은 한쪽을 터 수문을 만들어 두었지만 흐름이 원활하지 않다.
겨울 철새가 날아든다는 이 앞은 두 개의 저수지가 되었다. 죽도 양옆으로 이어진 다리와 그 중간에 예부터 있던 다리가 만들어 낸 저수지가 그것이다. 수문을 통해 수시로 물을 갈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목 마을의 이름 유래는 마을 주변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남리’라고 부르다가 한자로 ‘이목리’라 표기했다고 한다. 효종대(1650~1659)에 수원 백씨, 남평 문씨, 전주 이씨 등이 처음 들어왔다는 설과 안동 권씨가 처음 들어왔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명확한 근거가 없고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안항에서 비자리로 오는 길목의 다리 앞은 삼거리로 왼쪽 길은 북암과 월항 마을로 가는 길이고 직진은 비자리로 가는 길이다. 이 주위 삼거리 한쪽 면에 ‘달목 공원’을 조성해 두었다. 화단과 돌탑 등을 올려놓은 일종의 쌈지 공원이다. 정자 쉼터와 휴식처 등 다양한 시설물이 있다.
얼마 가지 않아 삼거리가 나오고 가운데 ‘비자 마을’ 마을 표지석이 있다. 직진하면 농협이 나오고 길은 오른쪽으로 이어지는데 이 길로 해서 진산과 가학 마을 등으로 간다. 이 길은 해안으로 따라 가는 길이다. 이정표에는 농협만 표시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이 지역에 학교와 면사무소 등 공공 기관이 다 들어 있다.
농협 앞에서 길은 좌우로 이어지는데 오른쪽은 해안 즉, 포구로 가는 길이고 왼쪽이 면사무소 가는 길이다. 이 길로 들어서면 역시 섬의 번화가답게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다방부터 중국집, 노래 연습장 그리고 택배 사무실과 옷 가게, 장기 숙박 시설 등을 볼 수 있다. 도로변에는 유달리 1t 트럭이 많이 주차되어 있다. 이곳은 택시가 있는데 도시와는 달리 테라칸 등 대부분이 SUV들이다. 길은 방사형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곳이 바로 소안도의 행정 중심지인 ‘비자리’다.
마을에 비자나무가 많아 비재동(榧在洞 혹은 榧在洞)을 碑在洞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원래 비자리(榧子里, 이미 1700년대의 공문서에 등장하는 里名이다)로 쓰였다. 이곳에 세워진 ‘관찰사송덕비(1868년)’, ‘제주목사불망비(1875년)’의 일로 지금의 비자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원래 이 동네는 강진포구에서 제주로 가던 관원들이 머물러 해신제를 지내던 곳으로 이들 관원의 비석이 많이 세워져서 ‘비석 거리’라 불린 바 있다는 주장도 있다.
소안도 비자리, 가학리 마을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 때 전란을 피해 진주 강씨가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 후 가구 수가 점점 증가하자 1946년 해방 이후에 마을을 비동리와 비서리로 분리했다. 면사무소가 위치한 일대가 ‘비서리’이고 소안중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는 곳이 ‘비동리’이다.
면사무소 앞에 소안고등학교가 있다. 교사 바로 옆에는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 있고 학교 건물은 3층짜리 교사였다. 학교와 면사무소 뒤로는 언덕이자 구릉 지대이다. 즉 마을의 끝자락인 셈이다. 면사무소 옆으로 난 오르막길은 이목 마을로 가는 옛길이고 그 입구에 ‘소안로 207번길 43번’에 소방 파출소가 있다.
파출소에서 조금 더 가면 소안 중앙 교회가 있다. 소안도에서는 가장 큰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 옆으로 골목길이 있는데 이 길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소안초·중학교로 이어진다. 이 길은 차가 다니기 어려운 구조다. 거기에다 이 길은 산으로 치면 능선에 해당하는 길로 해발이 높은 지역이다. 길이 복잡해 외지인은 헷갈릴 수밖에 없는 구조로 길을 걷다 보면 미로 속을 헤매는 느낌이다.
도로 끝에 소안중학교가 있다. 주변이 한적해서 외따로이 보이며 마을과 단절된 듯 한 느낌의 학교다. 그러나 산뜻한 느낌이 드는 교사를 가진 제법 큰 학교다. 학교는 이 지역 마을의 동쪽 끝이다. 더 걸어가 보아도 마을은 없고 계속 동쪽으로 가면 대봉산 자락이 나타난다. 중학교 정문 앞에는 복지 법인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다.
소안중학교 옆에 포구가 있다. 학교와 길 사이에 담장이 맞대어 있는 곳이다. 포구에는 많은 배가 정박해 있다. 그만큼 포구도 큰 편이다. 포구 옆으로는 자갈밭이 있다. 이곳이 ‘소안해수욕장’이다.
그리고 소안중학교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소안초등학교 역시 규모가 큰 편이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보다도 더 크고 화려하다. 이 고장의 교육열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소안 항일 운동 기념탑
초등학교 옆에는 보건지소가 있는데 아주 오래된 건물이다. 여기서 오른쪽에 건물 한 채와 함께 기념탑이 있는데 ‘소안 항일 운동 기념탑’이다. 1990년 6월 5일에 세워진 것으로 이 탑이 비자리의 갯돌을 쌓아올려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 기념탑은 1990년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소안 면민들의 성금으로 만든 탑으로, 검은 돌과 하얀 돌들을 높이 8m, 폭 4m로 쌓아 건축하였다. 검은 돌은 일제의 탄압을, 하얀 돌은 우리 백의민족의 순결함을, 세 갈래로 솟아 오른 탑 모양은 일본에 대한 강렬한 저항을 상징하고 있다.
기념탑 뒤로 건물이 있는데 비자리 복지 회관이다. 2층짜리 건물에는 각종 단체가 입주해 있다. 소안도의 항일 청년 조직인 ‘소안 배달 청년회’를 비롯해 소안 축구협회, 소안 파출소 자율 방범대 등 대여섯 개의 단체가 입주해 있다.
기념탑 옆에는 검은 대리석으로 된 각종 안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물론 항일 운동에 대한 안내 표지석과 건립에 동참한 명단 등 그에 따른 부속 안내문들이었다. 그리고 한 쪽에는 ‘자지도 항일 전적비 안내’ 표지석도 세워져 있다. 자지도는 지금의 당사도를 말한다.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가학 마을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는 미라리로 가는 길이다. 그 갈림길에 항일 운동 공원이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공원 한가운데에는 대형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기념탑 좌우로는 항일을 상징하는 군상들의 동상이 있다. 단 아래에는 넓은 공간 그 좌우로 화강암으로 된 표지석이 두 개 세워져 있다. 오른쪽에는 ‘해방의 섬 소안 항일 운동 성지’ 그리고 왼쪽에는 ‘꺼지지 않은 민족혼 항일의 성지 소안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소안도 독립 기념학교
입구 쪽에 세워진 안내문에 의하면 비자리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 자리는 원래 ‘사립 소안 학교터’란다. 그러니까 소안도 중심지인 비자리에는 ‘소안 항일 운동 기념탑’이 서 있고 가학리 옛 사립학교 터에는 소안 항일 운동 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면민의 성금으로 세운 것이 기념탑이고 정부 지원으로 건립한 것이 기념관이다.
국가 보훈처와 완도군의 지원을 받아 2003년 옛 소안 사립학교 터인 이곳에 항일 운동 기념관과 기념탑을 건립하고, 2005년에는 소안학교 교사를 복원했다. 물론 당시에는 새로운 기념탑을 세우면서 옛 기념탑을 옮기자는 둥, 새로 조형을 하자는 둥 여러 가지 의견이 있었지만, 옛 기념탑이 이미 소안도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점을 고려해 같은 모양으로 새 기념탑을 짓기로 해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공원이다.
기념관은 소안도의 항일 운동사를 보여 주는 시청각실과 전시실로 꾸며졌으며, 전시실은 소안도가 배출한 독립운동가 88인의 사진과 공적사항, 독립유공자로 훈장을 받은 19명의 얼굴이 동판 부조로 만들어져 있다.
제단 아래 광장에서 계단을 타고 오르면 기념탑이고 좌우로도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왼쪽에는 앞뒤로 성금 기탁자 명단이, 오른쪽에는 최금동의 ‘소안 선열들에게 바치는 노래’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건립기(建立記)’가 새겨져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기념관이 있고 왼쪽에는 사립학교였던 소안학교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소안항일운동기념탑과 좌측 소안학교 전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