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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달별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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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빛고을향토사 스크랩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 이야기
으뜸빛 추천 0 조회 15 11.10.21 08: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愼菴公派宗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섬촌리 708번지
건 축 주 :  신암(愼庵) 남손(南蓀, 1415~1488)
건축시기 :  1800년대
소 유 자 :  남광열
문 화 재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9호


건축 이야기
영양남씨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영양 남씨 입향조인 신암(愼庵) 남손(南蓀, 1415~1488)을 파조(派祖)로 하는 후손들이 종택으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종택은 원래 18세기 중반 남씨와 함께 집단을 이루며 살았던 안동권씨 문중에서 건립하여 대대로 거주하면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남손의 14대 주손인 남기영(南基永, 1853~1938)이 종택이 오래되어 무너짐에 따라 새로운 거주 장소를 물색하던 중 이 가옥이 매물로 나오자 주위 친척의 지원을 받아 1893년 매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신암공파 주손들은 이곳에 세거하면서 가문의 전통을 이어왔을 뿐만 아니라, 향촌의 제반 문제의 해결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등 유력사족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해 왔다.
경상북도 전문위원은 신암공파종택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이 가옥은 비록 영양 남씨 신암공파에 의해 건립된 것이 아닌 데다 주위 부속건물 일부가 훼철되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암공파의 집성촌에 일찍부터 자리 잡고 있었던 점. 인근의 남손이 만년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 신암정 정자와 더불어 섬촌리 신암공파 결속의 상징적 위상을 확보하고 있었던 점. 18세기 이 지역 민가양식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등에 비추어 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건축 구성
신암공파종택(愼庵公派宗宅)은 초막골 안쪽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래 좌측 전면에는 아래채가, 좌측 뒤쪽에는 방앗간 채가 각각 있었으나 모두 없어져 버리고, 현재는 ㄱ자형의 본채와 최근에 보수 정비된 건너채만 남아있다.
정침은 정면 4칸, 측면 5칸 규모의 ㄱ자형 건물이다. 평면은 가운데 칸의 봉당과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정지와 고방을 연결시켜 전체적으로 ㄱ자형의 평면을 이루게 하였다. 우측에는 상방과 마루방을 두었는데, 상방 뒤에는 마루를 깔아 대청은 ㄱ자형을 이루게 하였으며, 마루방의 뒤에는 모방을 두었다.
가구는 정침부분은 오량가이고, 고방부부은 삼량가인데, 정침부분의 안방과 모방상부에는 벽체를 설치하지 않고 상부 더그매가 노출되면서 합각부분에 환기구멍을 두어 완연한 까치구멍집이 되게 하였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영양남씨 시조인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 중국[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사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가족관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남민 처는 당나라 사람 장구령(張九鈴)의 여식(女息, 708~751)으로 그가 사신으로 일본에 가기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장남 복야공(僕射公) 김석중(金錫中)은 아버지 남민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김석중은 남민이 성을 받기 전에 태어났기 때문에 본성인 김씨를 지켜 후에 영양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남민은 신라에서 성을 받은 후, 신라 군윤(軍尹) 김원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여 남집(南鏶) 등을 낳았다. 이후 자손들은 하사 받은 성에 따라서 영양남씨가 되었다. 김(金), 남(南) 두 성씨는 성이 비록 다르나, 그 시조는 같으며, 남민은 두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
남민을 시조로 하는 남씨는 본관이 셋으로, 영양(英陽)·의령(宜寧)·고성(固城)이다. 그 유래는 고려 충렬왕 때 남민의 후손인 남홍보(南洪輔), 남군보(南君甫), 남광보(南匡甫) 세 명의 형제가 공을 세워 맏형인 남홍보는 중대광 도첨의 찬성사 상의회의 도감사(重大匡都僉議贊成事商議會議都監事)라는 벼슬을 하였고, 영양군(英陽君)으로 봉해져 남씨의 세 본관 가운데, 영양의 중시조가 되었고, 둘째인 남군보는 통헌대부 추밀원직부사(通憲大夫樞密院直府使)를 지내고,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져 영양남씨 밀직공파(密直公派)와 의령남씨 중시조가 되었으며, 셋째인 남광보는 고려좌복야(高麗左僕射)로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져 고성남씨의 중시조가 되었다.

 

관련인물
- 영양남씨 시조 남민(南敏, 712~782)
영양(英陽)·의령(宜寧)·고성(固城) 남씨와 영양김씨의 시조인 남민(南敏, 712~782)은 원래 성이 김이며, 이름은 충(忠)으로, 중국(당나라) 하남성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에서 태어났다.
벼슬은 형주자사(荊州刺史), 안렴사(按廉使), 이부상서(吏部尙書),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성좌시중(門下省左侍中)에 이르렀고, 당나라 천보(天寶) 14년(755년)에 안렴사로서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던 중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신라 유린(有隣)땅[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 죽도]에 머물게 되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은 그에게 “여남에서 왔으니, 남(南)으로 성을 하사한다.”하고, 또한 그의 행동거지를 듣고는 “민첩하고 온화한 것이 본받을만하니, 민(敏)이라 하라.” 하고는 영양현을 식읍으로 주고,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여, 그 곳에 살게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후 남민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라에 살면서 경덕왕을 섬기어 시무(時務)를 진술하고, 떳떳한 인륜을 닦아 『정관정요(貞館政要)』를 찬술하여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 신암(愼菴) 남손(南蓀, 1415~1488)
호는 신암(愼庵)이다. 그는 남씨 시조인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으로서, 1415년(태종15)에 영해(寧海) 인량리(仁良里)에서 남수(南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지녔고, 또한 지략은 남보다 뛰어났다. 1427년(세종9)에 왜구가 해주(海州)를 침탈하였을 때, 임금이 장수에게 명하여 왜구를 토벌하게 하였다. 장병들이 대마도를 공격하였다가 되돌아 올 때, 남손은 자신의 손으로 왜구를 무찌르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하였다. 이때 나이가 17세였다. 1435년(세종17)에 무과에 올라 의흥위 부장(義興衛部將)과 군위현감(軍威縣監), 진주병마사(晉州兵馬使)를 지냈는데, 다스리는 곳마다 어진 관리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뒤에 어버이가 연로하여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이때부터 그는 벼슬길을 완전히 끊고 오로지 스스로를 수양하는 일에 뜻을 두고, 대를 쌓고 연못을 판 뒤 유유자적하였다. 1488년(성종19)에 숨을 거뒀다.

 

영양 > 일월수비권 > 일월면 섬촌리
- 영양 남씨의 세장(世庄), 섬촌리(剡村里)
섬촌리는 장군천 따라 마을이 이루어진 열한 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섬촌리를 이루는데, 본래는 영양군 북초면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재인동(才仁洞)과 당하동(唐下洞)의 일부를 합하여 섬촌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속하게 하였다.
‘원뜸 또는 덕봉거리, 덕봉원(德峯院)’이라고 불리는 마을은 칠성봉에 속하는 봉우리 중 하나인 덕봉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하여 덕봉거리라 했고, 조선 시대에는 행인의 편의를 제공해 주는 덕봉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원뜸이라 함은 덕봉원이 있는 마을이란 뜻을 살린 이름으로 보인다. ‘동면 또는 독미원(獨美院), 독묘원(獨妙院)’이란 마을은 옛날 지금의 마을 동쪽 산허리에 황명운(黃明運)이 혼자 살면서 과수원을 만들어 살았는데, 이 과수원이 자리 잡은 터가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였으며 모양이 정원과 같다고 독미원이라 부르고 있다고 한다. ‘아릇독미원’이라 불리는 마을은 독미원의 과수원 아래쪽으로 강을 끼고 내려가면서 집 몇 채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마을인데 독미원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아릇독미원이라고 한다. ‘웃독미원’이란 마을은 지금의 마을 동편 산허리의 윗부분에 위치하고 있는데, 독미원 과수원의 맨 위 쯤에 있다.
‘매배리 또는 응암(鷹岩)’이라 불리는 마을은 마을 앞에 벼랑이 있는 마을로 학이 자주 날아와 앉기도 하고 매가 벼랑에 집을 지어 살고 있어 학과 매가 마을을 늘 지켜주므로 그 어떤 사고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곳이다. 매배리 북동쪽 언덕 위에도 마을이 있는데 ‘청두들(請邱)’이라고 부른다.
‘삼밭골(麻田谷) 또는 삼박골’은 옛날에 화전민들이 이 골짜기에 머무르면서 골짜기에 화전을 한 뒤 그 터에 삼을 갈았더니 다른 곳보다 특별히 잘 되고 질 좋은 삼이 생산되었고, 그 뒤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삼을 심었다고 하여 삼밭골이라고 한다.
‘섬마 또는 섬촌(剡村), 당하동(唐下洞)’은 방도헌이 있는 마을로 약 400년 전에 봉성 금씨(鳳城琴氏)가 처음으로 마을에 들어와 당하동이라고 부르다가, 동학운동으로 말미암아 금씨가 망하였다. 이후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들어와 보니, 마을 형상이 섬처럼 장군천에 둘러싸였다고 하여 ‘섬마’ 또는 ‘섬촌’이라고 불렀다.
‘육두들 또는 육구(陸邱)’는 섬마 북서쪽 산기슭 끝 둔덕을 이룬 마을이다. ‘재인두들 또는 재인구(才仁邱)’라는 마을은 약 300년 전에 손씨(孫氏)가 처음으로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200년 전부터 인동 장씨(仁同張氏)가 이 마을에 들어와 살면서 재주 있는 사람과 어진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여 재인두들 또는 재인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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