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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제목을 부르는 사람은
환희·행복·영광의 인생
“생명의 본질을 증명하고
우주의 본원을 밝힌
니치렌대성인의 대철학에
젊은이여, 나는 몸을 던지리라
지혜 있는 자는 알아라
인류를 자애(慈愛)하는 자는 움직여라
유구한 평화, 광선유포
젊은이여, 눈을 떠라
젊은이야말로 위대한 철학을 수지하여
나아가는 정열과 힘이 있노라”
창제의 근본은 ‘신(信)’의 일자에
근원의 위대한 공덕을 여는 핵심은 무엇인가.
(중략)
어본존은 ‘공덕취(功德聚, 공덕의 덩어리)’라고도 합니다.
그런 끝이 없는 공력을 끌어내는 핵심은 자기자신의 강성한 신심입니다.
어서에 “대저 불도에 들어가는 근본은 신(信)으로써 본(本)으로 하고”(어서 940쪽)라고 말씀하시는 바와 같습니다.
진지하고 꾸준한 창제의 실천 속에서 무한의 공덕이 나타납니다. 제목을 부르면 생력이 용현하고 용기가 솟아납니다.
“고락(苦樂) 함께 아울러 생각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고 계시라.”(어서 1143쪽)입니다. 괴로울 때야말로 제목. 어려울 때야말로 제목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어본존에 대한 강한 기원은 반드시 통한다. 거기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첫째도 제목. 둘째도 제목. 셋째도 제목이다.”
“제목의 힘은 위대하다. 괴로운 업을 느끼는 생명이 마치 아름다운 꽃밭에 노니는 것과도 같은 편안한 꿈같은 상태로 변화한다.”
“제목은, 진지하게 기원하면 반드시 공덕으로 나타난다. 진지하게 기원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광포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절대로 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제목을 끝까지 부르며 싸운다. 근본은 제목이다. 기원이다.”
한 사람 한사람이 광선유포를 위해 살고, 행복해지는 지름길을 도다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창가학회(創價學會)에는 ‘대성인 직결의 신심’이 있습니다. 각자가 ‘서원의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체경의 간심, 제불의 안목인 ‘법화경의 제목’을 가장 확신하고 있으므로 분명히 모든 숙업을 전부 부수고 적광의 하늘을 자유자재로 유희하는 커다란 경애를 얻게 될 것은 틀림없습니다.
◇
<법화경제목초 942쪽 10행~12행>
물어 가로되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에는 얼마만큼의 공덕(功德)을 간직하고 있느뇨.
답(答)하여 가로되 대해(大海)는 중류(衆流)를 수용(收容)하였고, 대지(大地)는 유정비정(有情非情)을 보유(保有)했으며, 여의보주(如意寶珠)는 만재(萬財)를 내리게 하고, 범왕(梵王)은 삼계(三界)를 통령(統領)한다.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의 오자(五字) 또한 이와 같아서, 일체(一切)의 구계(九界)의 중생(衆生) 및 불계(佛界)를 갖춘다. 십계(十界)를 갖추니 역시 십계(十界)의 의보(依報)의 국토(國土)를 포함한다.
전 우주의 공덕을 간직한 ‘묘법’
여기서부터는 ‘묘호렌게쿄의 공덕’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지를 설합니다.
먼저 “묘호렌게쿄의 오자에는 얼마만큼의 공덕을 간직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구계 및 불계의 중생 모두 그리고 그들 십계의 중생이 의처로 하는 환경인 국토도 모두 포함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대해는 중류를 수용하였고”란 남묘호렌게쿄의 일법(一法)에 십계의 의정(依正), 삼라만상이 포함된다는 비유입니다.
또 무량의 보물을 뜻대로 꺼낼 수 있는 ‘여의보주’를 하나 손에 얻으면 모든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남묘호렌게쿄로부터 무량의 공덕이 열려 나타난다는 비유입니다.
묘법의 제목에는 일체의 공덕이 모두 남김없이 간직되고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묘법이라 해도 자신을 떠나서 어딘가 다른 곳에서 구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생명이 본디 묘법의 당체입니다. 자신 안에 애초부터 존재하는 힘을 이끌어내는 실천이 창제행입니다.
대성인께서는 자신의 밖에서 성불의 근본인(根本因)을 구하려는 자세는 불법이 아니라고 잘라 말씀하셨고, “만약 기심(己心)의 밖에 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혀 묘법이 아니라 추법(麤法)이니라.”(어서 383쪽) 하고 엄하게 훈계하십니다.
도다 선생님은 “제목을 부르는 일이 부처의 경애를 개발하는 일이다.” “신심은 가장 강하게 스스로 확신하는 일이다. 자신이 묘법의 당체이니까, 제천선신(諸天善神)이 지키지 않을 리 없다고 확신하고 제목을 불렀을 때 반드시 그렇게 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묘호렌게쿄의 오자에 일체의 법을 갖춘다.”(어서 942쪽)입니다.
따라서 불법의 진수는 어디까지나 ‘내 몸이 바로 묘법의 당체’라고 확신하고 자신에게 갖춰진 묘법의 공덕을 열어 나타내어 그것을 만끽하는 데 있습니다.
◇
<법화경제목초 942쪽 10행~13행>
묘(妙)란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 “방편(方便)의 문(門)을 열어서 진실(眞實)의 상(相)을 나타냄”, 장안대사(章安大師)의 석(釋)에 가로되 “비밀(秘密)의 오장(奧藏)을 여는 이것을 칭(稱)하여 묘(妙)라고 함”, 묘락대사(妙樂大師)가 이 글월을 받아 가로되 “발(發)이란 개(開)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묘(妙)라고 하는 것은 개(開)라고 하는 것이며, 세간(世間)에 재물(財物)을 쌓은 장(藏)에 열쇠가 없으면 열 수 없고, 열지 않으면 장내(藏內)의 재물(財物)을 보지 못한다.
묘란 ‘연다는 뜻’
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본질적인 급소를 가르치십니다.
여러 경전에서 부처라는 위대한 인격과 광대한 부처의 깨달음을 설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 가르침이 만인에게 열리지 않는다면 아무 이익도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현실 생활 속에 부처와 똑 같은 가장 존귀한 경애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불교의 진가는 발휘되지 않습니다.
당시 불교신앙은 자신의 밖에 ‘위대한 부처’를 두고, 그 부처의 공력에 의지하기만 하는 신앙입니다. 대성인 시대에 유포되었던 ‘염불의 제목’은 실로 그 상징입니다.
이에 ‘법화경의 제목’은 자신의 생명에 갖춰진 대우주의 묘법의 힘을 나타내고 성불이라는 위대한 경애를 열기 위한 제목입니다.
첫머리에 소개한 <대백련화〉창간호 권두언 ‘종교혁명’에서 도다 선생님은 이렇게 쓰셨습니다.
“본디 종교는 ‘생활의 법칙’이며 바로 그 생활 속에 존재해야 한다.”
“만약 지금 청년이나 지식인에게 남묘호렌게쿄와 나무아미타불이 어떻게 다른가 하고 질문한다면 거기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만족스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정도로 불교는 사회인에게 버림 받고, 사회인은 불교를 일상생활에 불필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참된 불교가 있으면 사회는 거듭납니다. 그 참된 민중 불법을 대성인께서 확립했습니다. 그것이 묘법의 제목입니다.
대성인불법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바꾸고, 현실을 변혁하는 종교입니다.
자기자신에게 갖춰진 불성(佛性)을 밖으로 나타내어 자신이 인간혁명 해야 합니다.
날마다 낭랑하게 제목을 부르고 신앙체험을 쌓아 그 기쁨을 이야기하여 선(善)의 유대를 넓혀야 합니다.
각성한 민중불법 운동의 토대 위에 생명 존엄, 인간 존경의 문화가 열려 사회도 번영하고, 세계평화도 확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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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제목초 944쪽 6행~9행>
묘(妙)란 천축(天竺)에서는 살(薩)이라 하고, 한토(漢土)에서는 묘(妙)라고 하며, 묘(妙)란 구(具)의 의(義)이고, 구(具)란 원만(圓滿)의 의(義)이니라.
법화경(法華經)의 일일(一一)의 문자(文字) 일자(一字) 일자(一字)에 나머지의 육만구천삼백팔십사자(六萬九千三百八十四字)를 갖추었느니라.
비유컨대 대해(大海)의 한방울의 물에 일체(一切)의 하천(河川)의 물을 갖추고, 하나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개자(芥子)만 하지만, 일체(一切)의 여의보주(如意寶珠)의 재물(財物)을 내리게 함과 같다.
묘는 ‘구족·원만의 뜻’
묘법의 음성에는 전 우주의 모든 부처가 갖춘 가장 존귀한 불성을 불러 깨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목을 부른 순간부터 불천(佛天)의 가호가 움직이기 시작해 모두가 내편으로 바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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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제목초 947쪽 2행~5행>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義)이고, 소생(蘇生)이라 함은 되살아난다는 의(義)이니라.
비유컨대 황곡(黃鵠)의 새끼가 죽었을 때 이미 학(鶴)이 자안(子安)하고 울면, 죽은 새끼가 다시 되살아나고,
짐조(鴆鳥)가 물에 들어가면 어방(魚蚌)이 모조리 죽고, 서우(犀牛)의 뿔이 이것에 닿으면 죽은 자(者)가 모두 되살아나는 것과 같이,
이전(爾前)의 경(經)들에서 불종(佛種)을 볶아 버려 죽은 이승(二乘)·천제(闡提)·여인(女人) 등(等)이 묘(妙)의 일자(一字)를 간직하면 볶인 불종(佛種)도 다시 싹트는 것과 같다.
묘란 ‘소생의 의(義)’
법화경은 다른 모든 경전에 설하지 않는 일체중생의 성불의 법리를 밝히고 있습니다. 어느 경전도 구하지 않는 악인과 여인의 성불을 밝히고, 만인 성불의 길을 열었습니다.
말하자면 모두가 저버린다 해도 절대로 저버리지 않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묘법을 믿고 수지함으로써 어떤 인간도 성불의 경애를 열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인류의 숙명을 크게 전환하는 광원(光源)입니다.
고뇌의 밑바닥에서 창조하는 환희의 생명으로 변혁시키는 에너지가 묘법의 소생의 힘입니다.
제목을 부르는 사람에게 막힘은 없다
초대회장인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이 배독하시던 어서전집에도 “묘란 소생의 의이니라.”라는 구절에 밑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도다 선생님은 “어본존의 힘은 그저 ‘묘(=불가사의)’라고 표현할 수밖에 방법이 없다. 절대적인 공덕이 있는 어본존이다. 반드시 이기기 위한 어본존이다.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리 없다. 촌각을 아껴 제목을 불러라!”하고 지도하셨습니다.
3년 전, 동일본 대지진 바로 뒤, 미국의 듀이협회 개리슨 전 회장은 곧바로 진심 어린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메시지에서 박사는 “우리가 곧바로 상기하는 바는 창가학회가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속에서 용감하게 다시 일어선 단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묘(妙)란 소생(蘇生)의 의이니라’라는 말을 현실 속에서 실증한 단체입니다.”하고 말했습니다.
박사는 ‘묘(妙)의 삼의(三義)’를 들어, “자신의 가능성을 열고, 소생시키고, 새로운 창조로 향하는” 학회원이라는 존재에 부흥을 향한 희망을 발견하셨습니다.
절망의 구렁에서 활력 넘치는 생활로 전환한다, 그것은 바로 한 사람 한사람의 학회원의 인간혁명의 모습입니다. 창가학회는 ‘묘란 소생’이라는 성훈을 전 세계에서 증명해 왔습니다.
이 환희와 약동의 민중 조류는 이제는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 한사람이 ‘행복의 주인공’이 되는 역전의 드라마가 지금 세계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묘의 삼의’의 결론은, 어둠을 부수는 아침 해처럼 묘법을 끝까지 부르는 인생에는 절대로 막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니치렌불법의 근본은 창제입니다.
낭랑하게 제목을 부를 때, 나의 흉중에 밝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릅니다. 힘이 넘칩니다. 자애가 솟습니다. 환희에 불탑니다. 지혜가 빛납니다. 제천과 제불이 모두 함께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제목의 힘보다 뛰어난 것은 없습니다.
“신심은 승리의 궤도의 법칙’
“남묘호렌게쿄를 단지 한번 부른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부처가 되지 않음이 없다.”(어서 1573쪽)라고 말씀하십니다.
뭔가 고민이 있으면 먼저 어본존 앞에 앉아 어디까지나 창제를 근본으로 나아간다. 그 ‘마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도다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신심은 우주 구극의 법칙”
“신심은 지혜의 보장(寶藏)”
“신심의 무상(無上)의 행복학”
“신심은 승리의 궤도의 법칙”
제목을 부르는 우리에게 두려움은 없습니다. 자, 오늘도 낭랑하게 제목을 부르면서 발랄한 생명력을 용솟음치게 하면서 용감하게 ‘행복의 대화’를 전개합시다!
인간의 가능성을 열고, 행복을 향한 근원의 힘을 소생시키는 위대한 철학을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하고 있습니다.
창가의 지용보살이 더욱 더 전세계로 뛰쳐나가서 〈대백력화〉처럼 행복승리의 큰 꽃을 활짝 피울 때가 왔습니다.
☞ 승리의 경전 ‘어서’에서 배운다 (64) ‘법화경제목초’에서
http://m.cafe.daum.net/seikyoohknews/R9dO/24?listURI=%2Fseikyoohknews%2FR9dO%3FboardType%3D
승리(64)제목을 부르는 사람에게 막힘은 없다 - 법화경제목초.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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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