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가 그녀를 구원할 수 있을까. 영화 '와일드'(장 마크 발레 감독, 리즈 위더스푼 주연)는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했던 여성 셰릴이 94일간 미국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구간을 종단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그녀는 걸으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그녀는 지금 자기 체구만한 커다란 배낭을 등에 짊어지고 힘겹게 한 발 한 발 옮기는 중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고생을 사서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때 쓰는 말일 겁니다. 숱한 남자들도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선다는 길 위에 그녀가 서 있습니다. 멕시고 접경에서 캐나다 접경까지 미국 서부를 종단하는 4285km의 구간,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이하 PCT)입니다.
지난주에 개봉한 영화 '와일드'(장 마크 발레 감독)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와일드'는 '걷는 영화'입니다. 주인공이 처음부터 끝까지 걷습니다. 어마어마한 들판을 지나고, 우거진 숲을 지나고, 개울을 건너고, 심지어 온통 눈밖에 보이지 않는 설원 한가운데도 배낭을 메고 뚫고 갑니다. magazine M 후배 기자들이 쓴 리뷰와 인터뷰 기사를 가장 먼저 읽는 특권을 누리고 있는 제가 지난 주말 선택한 영화였습니다.
'와일드'는 2012년에 출간된 셰릴 스트레이드의 동명의 회고록을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엄마를 암으로 잃은 뒤 마약과 섹스에 빠져 방탕하게 생활하다 남편과도 이혼한 스물여섯의 한 여성이 94일간 '악마의 코스'라 불리는 PCT를 종단하는 이야기입니다.
[셰릴은 걸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발은 짓무르고, 온몸은 멍이 들고, 아픈 기억들은 끊임없이 그를 찾아온다. 그 기억들과 싸우며 길 끝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받아들인다.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네, 그렇게 그녀는 걷기 시작합니다. 동네 산책길도 아니고 아름다운 유럽 도시의 골목길도 아닌, 사막이었다가 설원이었다가 어마어마한 바위 계곡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그것도 혼자서. 처음엔 그렇게 "내가 미쳤지" "그래, 금방 돌아가도 돼"를 번갈아 중얼거리면서 말이죠. 길에서 공포와 육체의 고통, 그리고 처절한 외로움을 마주하고, 걸음 걸음마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아픈 기억들과도 대면하면서 그렇게 쉬지 않고 걸어갑니다. 이쯤 하면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걷는 겁니까. 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미친 듯이 걸었던 사람들 얘기가 떠오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걸어서 광명 찾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브라질 출신의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67)입니다. 제가 흥미롭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저널리스트로, 세계적인 음반회사의 중역으로 일하던 코엘료가 마흔 살이 다가오던 1986년 모든 일을 관두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를 떠난 대목입니다. 코엘료 역시 날마다 걷고 또 걷는 길로 자신을 몰아넣은 것인데, 이때의 경험이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죠. 2008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열린 기자회견장에서 그를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그는 "내 길을 찾기까지 나도 불안과 절망의 고비를 넘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며 자신의 길을 찾는데 가장 중요했던 것으로 여행을 꼽았습니다. "여행이란 '안전한 항구'를 떠나 어린 아이처럼 온 우주에 나를 열어두는 것"이라면서 말입니다. 코엘료에게 산티아고 길을 걷는 행위는 절망의 고비에서 택한 마지막 도전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죽어도 좋다는 결단이 아니면 떠나기 힘든 길이 있다. 때로 사람들은 우리 몸을 극한대까지 소모시키는 길로 자신을 내던지곤 한다.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또 기억나는 한 사람은 소설가 서영은(72)씨입니다. 그는 2008년 예순 다섯 나이에 유언장까지 쓰며 비장한 각오로 떠나 40일 동안 산티아고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이 길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담아『노란 화살표 방향으로 걸었다』(2010) 를 펴냈습니다. 아래는 2010년 책이 나왔을 때, 제가 그를 만나 질문하고 그가 답한 내용입니다.
-산티아고를 택한 이유는.
" 걷기 위해서다.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걸으며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경험을 했다. 이번에는 스스로 위기라고 느껴 걷기 위해 떠났다. 내 안일함에 스스로 비수를 꽂은 거다."
-여행을 떠나기 전 유언장을 썼는데.
"그냥 한 번 다녀와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완전히 삶을 뒤엎고 그 길에서 죽어도 좋다는 결단을 내렸다."
-산티아고는 고행길이라는 얘기가 있다.
"길 자체가 우리 몸을 극한대까지 소모시키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눈이 오고 바람 불고 몸이 아파도 하루에 20~30km씩 계속 걸었다. 걷는다는 것은 움직이는 세상을, 움직이며 느끼는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이 수고이면서 기쁨이 되는 체험이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나.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특히 마음의 평강을 찾은 것 같다."
신기하게도, 5년 전에 쓴 기사를 돌아보니 당시 제가 만난 사람은 분명히 서영은 작가인데, 마치 '와일드'의 셰릴이 답변하는 듯한 느낌이 드네요.
'걷기'하면 또 빠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걷는다』『떠나든 머물든』을 쓴 프랑스 전직 기자(지금은 세계적인 도보여행 전문가) 베르나르 올리비에입니다. 60대 초반에 은퇴 후 우울증에 빠져 역시 자살 시도까지 했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혼자 길을 떠나 산티아고 길 1300km를 걷습니다. 그때 걷는 일에 처음으로 행복감을 느꼈다는 그는 이후 전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이쯤 되면 '산티아고에 도대체 무엇이 있길래'라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한국에 여러 차례 방문했던 그는 걷기를 "두 발을 움직이는 물리적 행동을 통해 진정한 나를 돌아보는 정신적 행동"이라고 정의합니다.
"인간 육체의 이 멋진 살과 뼈와 힘줄은 단지 걸을 수 있게 만들어지고, 구상되고, 조직되었던 것이다. 이 일은 그저 약간의 에너지만 필요할 뿐이다."
"몸이 리듬을 준다. 행군이 어떤 정신적 동력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걷는다는 것은 육체적이기보다 정신적 훈련임을 그때 깨달았다. 나는 눈으로, 몸으로, 세상을 흡수했다." ( 『떠나든 머물든』효형출판, 48~49쪽)
[할리우드 배우 리즈 위더스푼(39)은 영화 '와일드'의 제작과 주연을 맡았다. 위더스푼은 '와일드' 원작을 읽고 "불행에 빠진 있는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메시지에 매료돼 제작을 추진했다. 영화 '와일드'의 한 장면]
'걷기'로 광명 찾은 분들이 어디 위에 언급한 세 사람 뿐이겠습니까. 걷기에 대한 다른 책 얘기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더 풀어놓겠습니다. 어쨌든 다시 영화 '와일드' 얘기로 돌아가 볼까요. 삶이 엉망진창이었던 셰릴은 94일 동안의 걷기를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걷기'라는 행위에 깃든 굉장한 마법같은 힘입니다. 그런데 영화는 어땠느냐고요? '쓰나미같은 폭풍 감동'은 아니었지만 이런 영화를 제작하고 주연한 배우 리즈 위더스푼(39)을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게 된 정도라고 말해두겠습니다.
'걷기 열풍' 불고 지나간 지 언젠데 왜 갑자기 '걷기' 얘기냐고요. 사실, 최근에 산 새 운동화 한 켤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N사의 '공기 빵빵'이라는 운동화 사느라 나름 거금을 썼습니다. 부지런히 걸어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혹시 압니까. 이렇게 시작해 PCT(거기는 너무 험해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는 아니어도 언젠가 제가 "내가 미쳤지"를 연발하며 산티아고를 걷게 될지…. [사진 폭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