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16-21장.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16.1-2). 그 때는 애굽에서 나온 후 2월 15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출 16.1). 이스라엘은 1월 15일에 출애굽을 하였기 때문에 이 때는 출애굽을 한 이후 한 달이 되는 때였습니다.아마도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생필품들이 대부분 고갈되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수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원망할 때는 단순히 그 백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출 15.24), 이에 반하여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원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2). 따라서 16장 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원망하는 말을 듣고 저녁에는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출 16.8). 이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일 뿐 아니라 야웨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출 16.12). 하나님의 약속대로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습니다. 메추라기는 철새의 일종으로 지금도 북 시내 반도와 애굽에 있는 새 종류로 가을에 중앙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하였다가 봄에 다시 돌아가는 떼를 지어 움직이는 이동 철새입니다. 메추라기는 참새처럼 작은 몸집에 장거리를 이동해야 합니다. 게다가 저공비행을 하는 새이기 때문에 그물이나 손으로도 쉽게 잡을 수 있고, 또한 기름이 없이도 불로 쉽게 구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새입니다(참조. 민 11.31-32; 시 78.27-28).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었습니다(출 16.13b-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만나란 히브리어 ‘마 후’에서 ‘마’(무엇이냐)와 ‘후’(이것이)의 고대 사투리인 ‘만 후’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의 ‘만 후’에서 ‘만나’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만나는 지금도 시내 반도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6월이 되면 깍지 벌레가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내어,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아 놓습니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만나입니다. 야웨 하나님은 이미 광야에 있는 만나를 통해서 먹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필요의 때에 맞게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으셨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특정한 계절(5월에서 7월)에만, 그리고 위성류가 있는 곳에서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한 계절 내내 생겨도 통상 약 230킬로그램밖에는 되지 않을텐데, 이것은 사람들이 날마다 1인당 약 230그램씩 거두었다는 성경의 기사와는 대조됩니다(J.Walton). 만나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광야 여정의 참된 양식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곧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만나 훈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음식을 먹고 원기를 얻는 일임을 각인시키는 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만나를 떡을 달게 만드는데 사용된 함마다 식물의 달짝지근한 액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더욱 광범위한 사막 식물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새로운 경제원리요 새로운 영성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거둠의 영성입니다. 16절. 한 사람당 한 오 멜씩(한 오멜은 대략 1-2리터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의 굶주림은 생산량과 소비가 소수에게 몰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나눔의 영성입니다. 남겨두지 못하게 함으로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먹게 했습니다. 먹을거리의 베품과 나눔은 단순한 자선이 아닙니다. 이는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셋째, 안식의 영성입니다.
여섯 째 날에는 두 오멜씩, 즉 양식을 갑절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도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은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주님, 우리에게 거둠의 영성과 나눔의 영성 및 안식의 영성을 갖게 하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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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odus 16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온 회중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습니다(16.1-2).
그 때는 애굽에서 나온 후 2월 15일이 되는 날이었습니다(출 16.1). 이스라엘은 1월 15일에 출애굽을 하였기 때문에 이 때는 출애굽을 한 이후 한 달이 되는 때였습니다.아마도 애굽에서 가지고 나왔던 생필품들이 대부분 고갈되었을 것입니다. 출애굽 이후 수르 광야에서 마실 물이 없어 원망할 때는 단순히 그 백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출 15.24), 이에 반하여 여기서는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원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출 16.2).
출 16장 3절
사람은 새로운 일을 시도해 가는 과정에서 난관에 부딪히면 곧잘 의혹과 유혹에 빠져서 과거를 동경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과거의 굴욕적인 상황이 현재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것입니다. 아마 애굽의 고기 가마는 이러한 상황을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들의 원망에는 그들의 굶주림의 상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내면에 일어나는 원망 중에는 이와 달리 전혀 다른 측면에서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면에 원망을 품으면 우리 삶은 온통 원망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상처와 고통을 마음속 깊은 곳, 즉 잠재의식 속에 묻어 둡니다. 용서하지 않고 분노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왜 자신이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지, 왜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지, 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지 의아해합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할 뿐, 그 마음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내면에 품고 있는 원망은 결국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을 더럽힙니다. 우리 자신의 인격과 태도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 모두 말입니다(Joel Osteen, Your Best Life Now, <긍정의 힘>, 178).
문제의 원인은 깊은 곳에 있습니다. 화가 나는 이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이유, 항상 부정적인 생각만 하는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을 뒤져서 뿌리에 도달하면 문제를 해결하고 진정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Osteen, 179).
과거의 모든 아픈 기억을 더듬어 볼 필요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내면을 샅샅이 뒤져 숨겨진 분노와 앙심이 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습니다. 바꾸려고 꾸준히 노력하는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인생의 영역이 있다면, 무엇이 우리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지 하나님께 여쭤 봐야 합니다. 뽑아야 할 쓴 뿌리가 있는지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 뿌리를 보여주시면 지체 말고 그것을 제거하십시오. 지체할수록 과거의 독은 우리 인생의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갑니다(Osteen, 180).
몇 년 전에 아프리카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끔찍한 병이 돌았습니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신음하고 구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가 지나자 병은 널리 퍼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병의 소문이 전해지자 그 지역의 큰 도시에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파견했고, 곧 물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을은 산 위의 수원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식수로 삼고 있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오염의 원인을 찾기로 했습니다. 물줄기의 입구에 도달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잠수부들은 보내 수원 근처의 수중을 탐색하기도 했습니다.
잠수부들의 보고에 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커다란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수원 입구에 끼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돼지들은 사고로 익사한 후에 거기에 끼어 썩고 있었습니다. 그 바람에 원래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던 샘물이 돼지들이 썩은 사체를 통과하면서 오염되고 있었습니다. 잠수부들이 죽은 돼지들을 치우자마자 물은 다시 전처럼 맑고 깨끗해졌습니다(Osteen, 180-181).
용서하지 않고 남겨둔 앙심이 수정처럼 깨끗한 물을 더럽힌 돼지 시체들처럼 우리의 삶을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원망의 뿌리가 점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우리가 그 원망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원망이 자라날 자리를 만들어 주고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버립니다. “나는 원래 화를 잘 내는 사람이야.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라고? 이게 나란 인간이야.”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우리 삶을 오염시키고 있는 독을 뽑아내면 우리는 수정처럼 깨끗한 물줄기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건강하며 온전하기를 원하시지, 원망과 분노 속에서 허덕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오염되고 썩을 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까지 전염시키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결코 아닙니다(Osteen, 181-182).
배 한 척이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을 헤치며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선장의 눈앞에 밝은 불빛이 나타났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그 불빛과 충돌할 판이었습니다. 선장은 급히 무선 장치로 달려가 항로를 동쪽으로 10도 틀라는 긴급 메시지를 상대편 선박에 보냈습니다.
몇 초 후에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럴 수 없소. 당신들이 항로를 서쪽으로 10도 트시오.”
화가 난 선장은 다시 암호문을 보냈습니다.
“나는 해군 함장이다. 그러니 당신이 항로를 변경하라.”
몇 초 후에 두 번째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등 수병이지만 방향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항로 변경하십시오.”
함장은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솟아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이 배는 전함이야! 우리는 항로를 바꿀 수 없다!”
그러자 퉁명스러운 메시지가 돌아왔습니다.
“그럼 마음대로 하십시오! 여기는 등대입니다!”
우리도 이 해군 함장처럼 쓸데없는 고집을 부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온갖 이유를 대면서 바뀌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내게 너무 큰 상처를 줬어. 내게 너무 못되게 굴었어. 절대 그들을 용서할 수 없어.’ (Osteen, 189-190)
따라서 16장 4절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다.
16장 4절
하나님은 이들의 원망하는 말을 듣고 저녁에는 고기를 주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출 16.8).
이들의 요구에 대한 응답일 뿐 아니라 야웨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출 16.12).
하나님의 약속대로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습니다.
16장 13a절
메추라기는 철새의 일종으로 지금도 북 시내 반도와 애굽에 있는 새 종류로 가을에 중앙 유럽에서 아프리카로 이동하였다가 봄에 다시 돌아가는 떼를 지어 움직이는 이동 철새입니다. 메추라기는 참새처럼 작은 몸집에 장거리를 이동해야 합니다. 게다가 저공비행을 하는 새이기 때문에 그물이나 손으로도 쉽게 잡을 수 있고,
또한 기름이 없이도 불로 쉽게 구어 먹을 수 있는 맛있는 새입니다(참조. 민 11.31-32; 시 78.27-28).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습니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었습니다(출 16.13b-14).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를 만나라고 불렀습니다(차준희, 136-137).
16장 31절
만나란 히브리어 ‘마 후’에서 ‘마’(무엇이냐)와 ‘후’(이것이)의 고대 사투리인 ‘만 후’에서 비롯된 용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는 뜻의 ‘만 후’에서 ‘만나’라는 용어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만나는 지금도 시내 반도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6월이 되면 깍지 벌레가 탄수화물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위성류 나무의 수액을 빨아 내어, 일부는 애벌레에게 주고 나머지는 가지 위에 방울 모양으로 뱉아 놓습니다. 이 분비물은 건조한 기후 탓에 물기가 빠져 금방 결정체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데, 매우 달고 쫀득쫀득하여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만나입니다(차준희, 137-138).
야웨 하나님은 이미 광야에 있는 만나를 통해서 먹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그들의 필요의 때에 맞게 풍족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으셨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슬과 함께 내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연적인 과정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특정한 계절(5월에서 7월)에만, 그리고 위성류가 있는 곳에서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한 계절 내내 생겨도 통상 약 230킬로그램밖에는 되지 않을텐데, 이것은 사람들이 날마다 1인당 약 230그램씩 거두었다는 성경의 기사와는 대조됩니다(J.Walton, 128).
만나는 인간의 탐욕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광야 여정의 참된 양식임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곧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요 4.34). … 만나 훈련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이 음식을 먹고 원기를 얻는 일임을 각인시키는 훈련입니다(김회권, <모세오경1>, 250).
어떤 이들은 이 만나를 떡을 달게 만드는데 사용된 함마다 식물의 달짝지근한 액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더욱 광범위한 사막 식물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새로운 경제원리요 새로운 영성 원리를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거둠의 영성입니다.
출 16장 18절
16절. 한 사람당 한 오 멜씩(한 오멜은 대략 1-2리터에 해당됩니다).
이 시대의 굶주림은 생산량과 소비가 소수에게 몰려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둘째, 나눔의 영성입니다.
출 16장 19절
남겨두지 못하게 함으로 모두가 골고루 나누어 먹게 했습니다. 먹을거리의 베품과 나눔은 단순한 자선이 아닙니다. 이는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입니다(창 1.30).
셋째, 안식의 영성입니다.
출 16장 22절
여섯 째 날에는 두 오멜씩, 즉 양식을 갑절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일을 하지 않고도 일용할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안식일은 하나님의 특별한 돌보심과 은혜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지금은 부활절을 기점으로 주일이 안식일을 대신하고 있는데, 주일에 일을 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안식을 얻음으로서 쉼을 얻을 필요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의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주일에도 불가피하게 일을 해야하는 직업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소 능률적이다는 이유나, 효과적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할 때가 있는데…이것을 우리는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교우들 중에도 주일날 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위해서 늘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그 사업이 주일날 운영하지 않아도 유지될 수 있는 은총을 주시고, 주님께서 그 분들의 중심을 주장하셔서 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