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 정권은 경기인과 전남 정권이었다.
광종 때 전남 훈구파 공신을 숙청하고 전주의 유방헌 등이 진출하면서 전북인이 중용을 받았다.
광종은 충주유씨 청주가문의 신명순성황후 [제3황후 유긍달의 딸]로
제2황후인 장화황후 [나주 오다련의 딸]의 아들 혜종가문을 밀어내고
정종에 이어 고려 4대왕으로 등극하여 과거제도 등 최초로 중국식 관료제도로 전환시킨다.
고려중기 인종 때 장흥임씨인 공예왕후가 들어서자, 신라파 진출로 정권을 잡으면서
김부식 등이 삼국사기를 편찬한다.
경종~목종시기 경주상인 김원숭이 고려경제를 농락하면서 몰락의 길을 간다.
매점매석의 달인 김원숭이 문경새재에서 대구사과를 모두 사들이고
창고에 쌓아놓았다가 사과값이 폭등하자 내다팔아 부를 축적한다.
나중에는 자기 딸을 왕후로 만드는 등 화폐까지 위조하여 주조권을 틀어쥐고 농락하다가 몰락한다.
그후 무신시대를 거쳐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다.
고려왕실의 친족이 황해도 황주에 걸쳐 살았기 때문에,
목종, 현종시기 천추태후 이후 황해도 황주파는 몰락한다.
고려시대를 통틀어도 황해북도 황주 이북의 평안도, 함경도는
고려정부에 제대로 진출할 수도 없었고 남부인 [양광도 동인, 사림파 동인, 남인]들이 가서 다스렸다.
오죽했으면 서북인 차별로 1135년 묘청의 난과 1174년 조위총의 난이 발생하였고,
조휘, 탁청의 반란(1258-1356)으로 강원도 인제 한계령까지 침략하고 철령 이북지역을
99년간 장악하고 몽골에 바쳤을 정도였다.
조선 건국 정권은
전주출신 이성계와 함남 함흥(함주),영흥(화주) 쌍성총관부 주변의 함남인들이 건국하였다.
그러나 함남인은 한자를 몰라 조선 중앙정부에 출사하기 어려웠다.
숙여진족 이지란(퉁두란)등 몇몇을 제외하고 진출하지 못하였다.
이방원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경기동부 여주의 원경왕후, 이천[이서군]의 문관을 중심으로 그 주변 지역과
전북 [무관 중심/전남 북부]이 우대를 받았다.
조선건국 훈구파 정권은 국가발전이 더디게 진행되자 동인, 남인을 등용시키게 된다.
양광도 동인에 이어 사림파가 등장하면서 영남사림파 동인, 남인 등이 출사를 한다.
출사를 하였지만 모두 훈구파 서인을 끼고 정치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동인, 남인의 무인은 변방으로 보내 등용시켰으나 이로 인해
크고 작은 반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북한은 황해도 안악, 재령지방까지는 등용이 잘되었지만
평안도의 서북인 함경도의 관북인은 여전히 차별을 받아 조선정권에 출사하기 어려웠다.
경남 양산출신의 함길도 절제사 이징옥이 수양대군의 권력독점을 거부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여진족 지역으로 가서 여진과 함께 대금황제에 올랐다가 정종, 이행검의 습격으로 죽었다.
1467년 이시애의 난도 있었고, 인조 때 평안도 병마절도사이자 고성이씨이며 남인이었던 이괄[여주]이
후금을 치러가는 길에 서인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겸 평안북도 병마절도사(영변) 자리를 주자,
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며 평안도 서북면 병력을 이끌고 서울을 점령하여
인조가 공주 공산성으로 피신하였다.
후에 1811년 홍경래의 난도 벌어지게 된다.
조선 정권 또한 남부지방의 사람들이 북한지방으로 파견되어 다스려왔다.
고려, 조선정권 그 어디에도 북한 출신들은 정권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1945년 광복 후, 평양출신 이승만이 정권을 잡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가 있을까?
나라를 맡아본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 정권을 장악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단적으로 역사를 통해 증명해주고 있다.
북한 주체사상의 이론적 창시자 황장엽이 말년에 남한으로 탈출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남한으로 가서 분열을 획책해보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내려온 것으로 판단되는 역사적 이유이다.
이런 사실이 들통났는지 그는 욕실에서 조용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요즘 문화가 성숙해서 이분법적 분열은 쉽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의 혼란 공작은 통하지 않게 되어 있다.
문화가 부족한 서역이나 아프리카에서는 통할 수가 있다.
대부분은 성실하게 살아가는데 몇몇이 욕을 먹이고 있는 것이다.
이들 때문에 탈북민들에게 더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에 와서 얼마되지도 않아 정치문제에 개입하는 모습은 좋지 못하다.
누가 부추기거나 사주해도 쉽게 동화되어 나서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고구려 멸망이후
정권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증명되기 때문에 따라 줄 남한 사람은 없다.
고구려 멸망때도 어떻게 망했는지 다 알지 않는가?
안승 후고구려의 보덕국도 이간질 하나에 대문의 난으로 쉽게 무너진 나라다.
한국 침공의 선봉으로 나섰던 5만의 팔로군은 섬서성 연안시에 있었던 연안파들이었다.
민족 사회주의자들로서 모택동에 협력하여 장개석 군대를 대만으로 몰아내는데
주력으로 나섰던 군대였다.
모택동은 1949년 장개석 군대를 몰아내고 나자, 5만의 조선인 팔로군 처리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3,8선에서의 국지전을 명분삼아 북한으로 보내 한국전쟁에 투입하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다.
6.25전쟁 전에 400회가 넘는 크고 작은 교전이 휴전선 일대에서 펼쳐졌다.
유격대는 해주까지 들어가 유격활동을 하며 김일성 별장 등을 공격했다.
즉, 휴전선 일대에서만 교전을 허가했어야만 하였다.
이승만은 누가봐도 대통령감이 아니었다.
그는 목사감이었지 절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인물이었다.
왜냐하면 고려, 조선역사를 통틀어서 북한인들은 정당을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인들이 처음으로 나라를 갖게 된 것이 현재의 북한 정권이다.
나라를 꾸려가는 방법이 어이상실인 것은 분명하다 할 것이다.
북한지역은 조선시대 동인 [양광도 동인, 영남사림파 동인], 남인이 중앙출세의 수단으로 자리만 지키다가
중앙으로 진출하는 코스였으며, 성리학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아 평양을 중심으로 북방과의
상업무역이 발달해 있었고, 평양은 고려, 조선의 경제를 이끌어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지방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고려 때부터 상업 무역 세력이 많아 장삿술과 처세술에 밝은 사람들이
많은 지방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자본주의경제를 펼쳤다면 한국을 능가하고도 남는 국가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국가 정치이념은 사회주의체제에 경제이념은 공산주의 이념을 택하여
최악의 국가로 전락되고 만다.
[서울사람에게 대동강 물을 팔아먹었다는 봉이 김선달 이야기가 상징성으로 남아 전해져 오는 이유임].
영국은 남부의 잉글랜드가 북부의 스코틀랜드를 복속하고
앵글로족이 색슨족을 누르고 현재도 지배하고 있다.
축구도 유일하게 스코틀랜드, 잉글랜드로 나뉘어서 둘다 출전한다.
축구가 영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뜻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영국만 두지역이 출전을 한다.
영화배우 숀코너리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잉글랜드를 비판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독립운동이야기도 나오지만 현실적으로 독립하면 손해가 막심한 쪽은 스코틀랜드다.
꿈은 상상속으로만 만족해야 한다고 본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으로 유로 단독가입시 다시 독일경제의 영향력 하에 들어가게 됨]
북한에서 1.4후퇴로 전란을 피해 내려온 숫자가 늘어 이제 500만에 이른다고 한다.
무조건 북한을 저주하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된 대책을 내세우고 계획을 세우라는 말이다.
자기 부모조상의 재산을 잃고 남으로 내려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조건 북한을 저주하고 비난만하면 그것이 반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황장엽이 북한을 탈출하여 내려와 김정일 정권을 비난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녕 북한 정권과 결별을 선언하고 전향한 것이었을까?
진정한 전략적 고수라면 그렇게 보지않는다는 말이다.
이유야 어떻든 황장엽은 남한으로 내려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갔다.
그로 인해 이분법적인 반공대립이 심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김정은이 쉽게 권력을 이양받는 단계로까지 나아갔다.
어린 김정은이 쉽게 분열되지 않고 권력을 이양받은 것은 신기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북한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숙청된 갑산파가 전부 죽지않고,
군부내에서 일정세력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반공정신이 아닌 이념을 모두 떼어내고 오로지 국가적, 경제적 실리를 위하여
전략적 판단으로만 봐라다 봐야 세상이 제대로 보이게 될 것이다.
낡은 이념은 이제 청산해야 할 때이다.
선진국에서 모두 버린 낡은 이념으로 한국사회를 지배해 나가려는 세력은 이제 사라져야만 할 것이다.
권력과 부, 경제력을 장악한 영국의 잉글랜드 정권에서
모든 정답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p/s
[장수왕 때 승려 도림은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접근하여
산서성 장치시 사탁지방(사성)에서 숭산(하남성 정주시 숭산)까지 성곽을 쌓게 하여
국고를 축내게 하고 475년(장수왕63년) 고구려로 탈출하자, 장수왕이 남침하여
한성이 점령당하고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백제에서 부패문제로 죄를 짓고 고구려로 탈출한 재증걸루, 고이만년 등이 아차산에서
침을 세번뱉고 개로왕을 참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