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규원사화>와 단군조선사
고준환(경기대 교수. 국사찾기협의회 회장)
1. 머리말
왕검단군께서 민족국가 조선을 개국한 이래 반만년 대륙의 영광사를 이어온 우리 한민족은 이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민족대통일로 가는 역사적 전환점에 서있다. ......
그런데 중국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통하여 단군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는 물론 태조 왕건이 한(漢)족이라 하여 고려사까지 중국사로 편입하는 역사전쟁을 벌여 우리민족 국가 역사 5천 년을 5십 년으로 축소하려는 중화제국주의의 마각을 드러내놓고 있다.
우리 남북해외 8000만 한민족은 이에 대응하고, 민족 대통일을 이루어 행복하게 살려면, 그 뿌리인 민족자주역사의 공동의식이 제일 중요하다고 사료된다. 국학의 확립 차원에서 사대식민사관이나 유물사관 등으로 왜곡되고 잘못 알려진「2000년 반도의 패배사를」극복하고 단군조선사를 비롯하여 단군조선을 계승한 고구려를 포함「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라는 바른 국사의 제자리를 찾아 자리매김해야 한다.
앞으로 2천년 제국 단군조선사의 광복을 위하여 바른 국사 찾기,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 단군조선 실사의 복원을 논하고, 결론을 맺기로 한다.
2. 바른 국사 찾기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대화이다. 무릇 역사는 자연 속에서 이뤄지는 인간행위의 집적으로서,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로 보고 살면서 미래를 대비하는데 가치를 부여하며, 역사는 사실과 해석으로 이루어진다. 객관적 사실파악에는 과학적․객관적 자세가 필요하며, 합리적 실증과학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역사해석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므로 자주성과 통일성이 긴요하다. 개인이나, 민족이나, 인류나 그 생명에 있어서 제일 기본이 되는 것은 주인의식(主人意識)이다. 주인의식은 자주성의 원천으로서 존재의 실상일 뿐 아니라, 생명력의 존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주인의식에 바탕을 두어 민족국가역사를 체계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민족자주 사관이라 한다.
한민족이 주인의식을 갖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우선 국사학․국어학․국토학 등 국학이 확립되어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국사학은 한국이 세계 2백여 국가들 가운데 한 민족국가이므로「하나의 평화세계」(a peaceful world)를 향하여 가면서 민족자주사관과 열린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어 체계적으로 구성돼야 한다.
그러면, <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인 한국사가 어떻게 <2천년 반도의 굴종사>로 국민과 학생들에게 크게 잘못 알려진 것일까?
첫째는 한국사의 사료 결핍인데, 이는 민족자주사학자 문정창 선생이 <조선사 연구>에서 그 원인으로 10대 수난사를 적절히 적었던 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고구려 동천왕 20(서기 246)년 위나라 장수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가 소각되었다.
2)백제 의자왕 20(660)년 사비성(부여) 함락으로 사고가 소각되었다.
3)고구려 보장왕 20(668)년 평양성 함락으로 당나라 장수 이적이 역사 전적을 모두 탈취하여 갔다.
4)신라 경순왕 1(927)년 후백제의 견훤왕이 경애왕을 치고 경순왕을 세우면서 신라의 사서들을 전주로 옮겼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게 토멸당하여 방화되고, 소각되었다.
5)고려 인종 4(1126)년 사대주의자 김부식 등이 금나라에 신하를 칭하는 표를 올린 후, 주체적인 사서들을 금나라가 거둬서 가지고 갔다.
6)고려 고종 20(1233)년 몽고의 난으로 홀필열에 의하여 삼한고기, 해동고기 등 많은 사서들이 소각 되었다.
7)조선 태종 11(1411)년 오부학당을 송나라 유교제도로 설치하면서 비 유교책은 모두 소각해 버렸다.
8)선조25(1592)년 일본의 풍신수길이 일으킨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우리 나라 책들이 방화되고, 일본에 수탈되었다.
9)인조 14(1636)년 병자호란으로 많은 사서들이 소각되었다.
10)순종 4(1910)년 일본제국주의 강점 이후 한꺼번에 민족사서 20만권을 불사르는 등 많은 사서를 소각, 수탈, 개찬하였고, 조선총독부가 조선사편수회를 통하여 단군조선 2000여년사를 빼버리고, 한국사를 일본사 2600여년보다 짧게 하려고 2000년으로 줄였고, 역사적인 실재인 단군왕검을 부정하기 위하여 단군신화론을 조작하여 널리 전파하였다.
단군 부정을 위한 첫 기록은 일본인 사학자 나가통세(那珂通世)가 AD 1897년 사학잡지 5․6집에 발표한 조선고사(朝鮮古史)라는 논문에서 “단군왕검은 불교 승도의 망설이요 날조된 신화”라고 주장했고, 한․일 합방이후 단군신화 조작을 본격화하였다.
둘째는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따른 외국의 역사조작 왜곡과 국내의 자주적이지 못한 정치지도자와 사대ㆍ식민사학자들의 발호를 들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주인정신을 잃고, 민족국가 역사주류가 <반만년 대륙의 영광사>임에도 불구하고, 실증사학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일제시대부터의 사대ㆍ식민사관을 계승하는 강단 사학자의 주류가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2천년 반도의 굴종사>라는 고정관념을 계속 갖고 유지하려는 사실이다.
국외적으로 중국, 일본과 같은 강국들이 우리 민족 자주 사서를 비롯한 옛 역사문헌들을 불살라 없앴다. 중국 동북(만주)공정이나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통한 역사왜곡은 물론 삼국지를 쓴 지나의 진수처럼 해상강국 백제를 인정치 않거나, 고사기 저작에 관여한 일본의 사인친왕처럼 일본의 왕들을 만세일계(萬世一系)로 조작한 경우가 있고, 국내적으로는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처럼 사대 식민사관에 입각한 경우 등이 있다. 현대사에 있어서는 8․15 해방 후 이승만 정권 아래서 반민족행위자 처벌특별 위원회법이 실천되지 않는 등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고, 엄청나게 잘못된 현상으로 기득권 유지 강단사학이 대체적으로 일제시대의 사대 식민사학을 계승하는 등 왜독, 중독, 양독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일본 총독의 조선사 말살 정책에 따른 ‘조선사 편수회’에 참여하여 우리역사 조작. 왜곡에 참여한 이병도(전 서울대 사학과 주임교수)와 신석호(전 고려대 사학과 교수, 초대국사관장 초대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등 식민사학자들이 과거를 참회하지 않고, 2600년의 일본역사보다 한국 민족국가 역사를 짧게 하고자 2천년으로 한 것을 계속 수용․유지하고, 한반도만이 본래 우리 영토며, 우리역사엔 주로 굴종과 패배가 있고, 영광스러운 것이 있으면 안 되는 것 같은 망발을 하기도 하였다. 이의 근원이 된 것으로 1922년 우리 민족 고유사서 20만권을 분서한 후 사이또 조선총독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떠벌인 말을 살펴보자.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이 조상의 무위, 무능, 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들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다.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인물과 사적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 때 일본의 사적문화, 위인들을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한편 한국 국사학계의 실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나 <삼국사기>(김부식저)나 <한국사대관>(이병도저) 같은 사대식민주의 사서가 판을 치고, 중국의 발해사 편입이나 일제의 한국역사 조작, 말살, 왜곡을 외면해 온 식민사학중심의 한국사학계에 단기 4313년을 전후하여 세상에 드러난 3대 한국상고사서인<환단고기>와 <규원사화><단기고사>는 민족을 사랑하고, 잘못된 우리 역사가 바로 잡히기를 바라는 민족자주사학자나 국민들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 같은 감격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한국사를 일본사보다 짧게 만들고, 영토도 반도로 좁히며,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사고오 가게노부 중위를 시켜 광개토대왕비문을 조작하며, 간 마사또모를 시켜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지금 日本 石上 神宮에 있음)명문을 고치고, 임나 일본부설을 만들며, 조선에 있던 신선도 사서등 민족사서류를 비롯한 20만권의 국사서를 불태운 일제 총독하의 조선사편수회에서 사서로 그 작업에 참여했고, 신석호 교수와 함께 해방 뒤 지난날 잘못에 대한 반성없이 서울대학교 사학과 교수로서 제자들에게 식민지사학을 전수하여 사실상 전국 사학을 지배하고 기득권을 유지해온 이병도 박사와 그 맥을 잇는 교수들이 겉으로 실증주의를 내세운 식민사학자들은, 이들을 위서로 몰아가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해서 국민들로부터 반민족적 사학자라는 비판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서희건씨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는 한국상고사들을 일제와 식민사학자들이 왜곡. 말살한 진상을 낱낱이 파헤친 바 있다.
셋째는 한국의 사대식민사학자들은 중독(中毒) 왜독(倭毒) 양독(洋毒)된 사람들로 분류되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3대 한국상고사서에 대하여 실증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좋으나, 내용을 제대로 연구하지도 않고 책전체를 위서로 모는 작태이다. 우리는 지금 잘못알려진 역사속에서 생활하면서 실증적 민족자주사관으로 민족동질성을 회복하여 바른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려면 전 민족이 합의한 <통일한국사>를 만들고, 자주적 국사편찬위원회 구성, 자주적 한국 정신문화 연구원 구성 국사교과서의 광정, 외국교과서의 한국사 오류 바로잡기등 추진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그 가운데서도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바른 한국고대사 복원에 풍성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환단고기나 규원사화의 위서 여부 판단이다. 이것이 지금 민족자주사학자와 사대식민사학자들 사이에 가장 첨예한 대립을 하고 있는 부분이다.
강단의 사대식민사학자들은 필요하고도 충분한 연구도 하지 않고, 일제 식민사학 유지 차원에서 위서로 몰거나 위서로 결론 난 것으로 간주하는 실정인 것이다.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민족자주사학자와 자주의식을 가진 청년들의 열렬한 요청으로 KBS 역사스페셜(1999.10.2)에서 ‘환단고기는 위서인가? 진서인가?’를 다루었으나, 강단식민사학자들의 압력등으로 KBS는 중간에 제목을 바꿔 애매하게도 ‘환단고기 열풍’ 이라는 제목으로 적당히 끝내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북한의 원로사학자의 한 사람인 손영종교수(사회과학원 역사학 연구소)는 2002년10월3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열린 단군조선 남북 공동학술 토론회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라는 논문을 중심으로 규원사화는 총체적으로 진서이니 계승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발표했고, 환단고기나 단기고사 등은 후세의 윤색과 가필 등 위서 부분이 있으나, 그 원저본은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손교수는 가필부분 등을 입증하지는 못했다.)
북한에서는 <규원사화>나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나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 대야발이 쓴 <단기고사>등을 인용하여 단군조선의 제1대 단군부터 47대 고열가단군까지 47대 단군과 단군세계를 국사서에 정식으로 올리었다.
(허종호의 지음. 고조선력사개관. 사회과학출판사.→남쪽 도서출판중심펴냄 2001.3.5 40쪽 참조)
그런데 1대는 단군(단군왕검이나 왕검단군이 아님)이고, 2대부터 47대까지는 임금명이라 표기하고, 단군이라 부르지 않고 있어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조선사회과학원 고고학 연구소 최춘근 박사는 기존사대주의 사관이나 대국주의사관에 의하여 단군조선에 관한 기성 견해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바로잡아야하다고 주장했다.
단군조선의 역사를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데 있어서 사대식민주의 사관의 견해를 따를 경우, 비과학성과 민족허무주의 경향을 인식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박사는 3대 한국상고 사서인 <규원사회><단기고사><환단고기>(단군세기, 태백일사, 삼성기, 북부여기)등 비사들에 대하여 “단군조선의 역사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고 하여 문헌학적인 고증이 없이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인용해도 안되지만, 근세에 윤색첨가된 내용이 있고 하여 덮어놓고 무시해버려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의 비사들은 아득한 옛날부터 구전이나 기록으로 항간에 전해오던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조대기>나 <진역유기>등 저본들에 반영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위의 비사들도 단군과 고조선의 역사연구에서 비판적으로 이용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3.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왕조 숙종원년(단기 4008년, AD 1675년)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신선도 계통의 사서이다.
규원사화의 내용은, 서문에서 북애자가 고려말 청평도사 이명(李茗)이 저술한 바 단군조선에 관한 진역유기(震域遺記=古朝鮮遺記: 그 저본은 朝代記) 3권을 입수하여 토대로 삼고, 부아악 기슭 규원초당에서 전국을 순례하며 수집한 44종의 고사서 문헌(조대기, 고조선비기 삼성밀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등 국내서 10종과 산해경, 사기, 하서, 신선전, 서경, 논어, 관자등 지나서 34종)을 고증인용하여 저술했음을 밝히고 있다.
조판기는 일대 주신(主神)인 환인이 환웅천황으로 하여금 천지를 개창케 한바 환웅이 태백산에 천부인 3개를 가지고 내려와 군장으로 추대되고 배달국(檀國)을 세우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태시기에는 신불천황(神市天皇) 환웅이 동방을 다스린 천여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본론인 단군기(檀君記)는 고조선 단군왕검(배달임금)부터 말왕인 제47대 고렬가 단군까지 단군 47세 동안의 역사를 서술했다.
끝으로 만설은 결론으로, 북애자의 민족 자주사관을 개진하고, 정신문화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그 방안으로 사리를 버리고 국민이 화합할 것(人和),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해야하며(地利), 민족고유의 본성을 보유하고 그 장점을 살리라고(保性) 하였다.
저자가 규원사화에서, 옛영토를 복구하여(多勿)조국을 부강하게 하고, 사대주의 사상을 배격하며, 단군왕검의 신선도문화가 세계 문화의 정수로서, 홍익인간 광화세계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역사의식을 나타내었다.
규원사화의 단군기는 단군조선의 실사인데 그 내용은 비교적 합리적이고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李相時.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192쪽 참조)
그것은 규원사화가 다른 단군사서보다 방대한 고사적과 문헌을 참고하거나 인용하고 있으며 규원사화 단군기의 기사는 현존하는 최고의 단군사서인 삼국유사 고조선기 단군기사보다 그 문헌고증적 근거의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삼국유사 고조선기의 단군기사는 중국측 위서(魏書 : 西晋 王沉 지음)를 인용한 것이며, 삼국유사 원본(AD 1285년)은 지금 전하지 않고, 조선 중종7년인 단기 3845년, AD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이 중간한 소위 정덕본(正德本)이 전할 뿐인데 규원사화의 원저본인 조대기는 발해멸망 AD 926년 훨씬 이전에 저술됐으므로 삼국유사보다 그 저술연대가 360년 이상 앞선다.
규원사화 단군기는 또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민족의 풍습 신앙과 언어습관과 합치되는 뿌리깊은 신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또 규원사화 단군기의 사실(史實)은 규원사화가 인용하지 않은 중국고대사적인 죽서기년, 동이열전, 후한서, 책부원귀, 설원, 회기, 통감전편, 박물지등에 의하여 수많이 뒷받침되는등 문헌고증적 근거가 뚜렷하다.
예를들면, 제3세 가륵단군때의 사실중에 “하왕(夏王)이 덕을 잃어 그 신하중에 반역하는 자가 있었는데, 단군이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국과 진번의 백성들을 이끌고 이를 치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후한서 동이열전에 보면, 가륵단군때의 하왕은 태강(太康)인바, “하왕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이 배반하기 시작했고, 태강이 예에서 쫓겨났다”라고 되어있어 서로 부합한다.
이와같이 규원사화는 그 저자와 시기내용이 뚜렷하고, 후세에 가필 흔적도 없어 합리적 객관적 타당성을 지니므로, 참된 사서라고 할 수 있다.
또 규원사화는 그 저술연대가 약 320년전인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사적인 소진되는 큰 전란이 없었고, 일제치하에서도 다행히 그 필사본의 명맥이 잘 보존돼왔고, 전승돼오는 동안 가필되는 사례가 없이 순수하게 필사된 책이 산발적으로 양주동씨 소장본과 서울대학교 소장본등 모두6종이 발견됐는데, 그 내용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단군조선의 실사를 복원하는데, 가장 중요한 상고사서인 규원사화에 대하여, 실증사학을 내세우면서 실질적으로는 이병도․신석호류의 사대식민사학의 일부 강단사학자들은 환단고기와 함께 위서로 몰아가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집요하게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몰아가는 국사학자는 조인성 경희대학교 교수인 것 같다.
조인성 교수는 AD 1988년에 논문 “규원사화와 환단고기”(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일조각. 71쪽) AD 1997년에 “국수주의사학과 현대의 한국 사학”(한국사 시민강좌 제20집 일조각 1쪽) AD 2000년에 “단군에 관한 여러성격의 기록”(한국사 시민강좌 제27집 일조각 40쪽) AD 1999년에 “환단고기에 대한 몇가지 의문”(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 단군학회 전반기 학술회의 자료집 33쪽)등을 통하여 계속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일관되게 일방적으로 위서로 몰고 갔다.
그는 확실한 근거없이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믿음은 결코 바람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들은 위서로서 한국고대사연구의 사료로 쓸수 없음은 너무도 명백하다”, “국사교과서에 단군신화에서 유래한 건국연대를 그대로 실어야한다거나 위서가 분명한 단기고사, 규원사화, 환단고기등에 나오는 고조선과 그 이전의 역사를 서술해야한다는 일부인사들의 주장은 실로 일본의 황국사관을 연상하게한다”, “환단고기의 저자는 계연수가 아니고 이유립을 지목하게 된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는 단기고사를 참고하고, 단기고사는 규원사화를 참고하여 작성되었다”라고 그의 논문에서 쓰고 있다.
그러면 조인성교수는 규원사화를 어떤 이론으로 위서로 몰고 있는 것인가?
그는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라는 글 등에서 규원사화에 대하여 총체적으로 일부용어등을 문제삼아 위서로 몰고 있으며 이에 대하여 오랜세월 규원사화에 대하여 실증적 연구해온 재야민족 자주사학자인 이상시 변호사가 완벽할 정도로 논박하여 제압하고 규원사화가 역사과학적으로 참된 사서이며 다른 단군사서보다 사료적 가치면에서 가장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이어서 단군조선사를 정립함에 규원사화가 기본사료가 돼야한다고 덧붙였다.(이상시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 247~273쪽 참조)
그를 자세히 살펴보자. 조인성은 일정한 단어는 일정한 시기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에 어떤 단어 혹은 술어는「사료의 성립연대를 알려주는 지표」가 되며 인명이나 지명․서명도 마찬가지라고 전제하고,《규원사화》에 사용된 술어 등이 근세적 용어로 기술된 점으로 보아《규원사화》가 근대에 와서 만들어진 위서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고 있다.(위《韓國史市民講座》pp.72~77 참조)
그런데, 우선《규원사화》가 그 저본으로 하였거나 인용한 문헌․사적 등은 이미 위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진역유기》를 비롯한 국내의 사적과 문헌 10종과《사기》등 중국(漢)사적․문헌 34종을 합하여 44종에 이르고 있는데, 모두《규원사화》가 저술된 AD 1675년 이전에 편찬․저술된 것이며 그 이후에 성립된 것은 한 권도 찾아볼 수 없다.
또《규원사화》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술어․인명․지명 등 용어나 그 문장을 살펴보면「서로 크게 차이가 난다」는 뜻을「逕庭」(경정)으로,「생을 기원한다」는 뜻을「蘄生」(기생)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은 모두《장자》에서,「멸명한 전 왕조」라는 뜻으로 고려조를 「勝朝」(승조)라고 표현한 것은《周禮》의 주(注)에서,「임검이 천하를 경륜한다」는 뜻을「陶鈞」(도균)으로 기술한 것은《漢書》에서,「기강을 유지한다」는 뜻을「維綱」(유강)으로 기술 한 것은《管子》에서,「하늘」을「穹蒼」(궁창)으로, 또「부지런히 힘쓴다」는 것을 「渠渠」(거거)로 표현한 것은 모두《詩經》에서,「국가안위에 관한 중대한 일」을 「休戚」(휴척)이라고 표기한 것은《晋書》에서,「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나다」는 뜻을「出藍」(출남)이라고 한 것은《荀子》에서,「사물이 점점 쇠퇴하여진다」는 뜻을「陵夷」(능이)로 표시한 것은《史記》에서 나온 것이다.
또「제 분수를 지키지 아니하고 남의 흉내를 내다가 모두 잃는다」는 비유를 전국시대 조나라의 고사를 인용하여「邯鄲學步」(한단학보)라고 기술하고 있는가 하면「버린다」는 뜻을「捨」자를 쓰지 않고《左氏春秋》에 나오는「舍」(사)자로, 「우주 안에 있는 여러 별들」을「宇宙群星」이나「星座」로 표현하지 않고「大界列宿」(대계열숙)로,「누구」라는 뜻을「誰」(수)자로 쓰지 않고「孰」(숙)자로,「시끄럽다」는 표현을 「騷」(소)자를 쓰지 않고「로」자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라든가 그밖에 우리 나라 강토를「鯷域」(제역)으로,「정사에 바빠서 끼니를 거른다」는 뜻을「肝食」(간식)으로,「승려나 불가」(佛家)식을「緇流」(치류)로,「백성」을「野氓」(야맹)으로,「사방으로 트인 번화한 거리」를「通衢」(통구)로,「바퀴가 얽어매어 있다」는 표현을「穀搏」(곡박)으로 표현하고 있는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데 이는 모두 근세 조선조 중엽 이전부터 사림층의 한학자들이 사용하던 문장이나 용어들이며《규원사화》의 어느 구절을 훑어보아도 근대에 와서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신생용어나 외래용어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또 조인성은 AD 1986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논문을 발표하였다.「《규원사화》의 저자가 백두산에 관한 言彙(어휘) 고증을 하는데《해동역사》<地理考>(朝鮮 純祖 23年, AD 1823년, 韓鎭書 撰)와 그 언어학적인 증명 방법이 동일하다. 즉《규원사화》에서 <白>은 <蓋>와 같은 뜻이라고 한 것은《해동역사》<지리고>가 蓋의 初聲이 <溪(희다)>즉 白의 뜻과 같다고 하고 있는 것이나 또<馬>와 <頭>가 같은 訓이라는 것은 頭는 곧<馬耳>, <摩尼> 즉 頭의 뜻인「머리」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과 양자가 모두 그 해석이 동일하다.
그런데《규원사화》가 정말 숙종2년(AD 1675)에 저술되었다면 그 후에 찬술된《해동역사》<지리고>에서는 그 저술자인 한진서가《규원사화》를 마땅히 참고하였어야 할 것인데도 위 <지리고>에서는 우리 나라의 각종 문헌과 중국․일본의 관계문헌까지 모두 증거로서 제시하고 있으면서《규원사화》는 참고로 인용한 흔적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규원사화》나《해동역사》<지리고>가 다같이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도록 하였다>는《高麗史》成宗 10年條의 기사를 光宗 10年條의 기사로 잘못 기록되어 나오고 있는 사실을 종합하여 본다면《규원사화》의 이 부분은《해동역사》<지리고>가 완성된 AD 1823년 이후에 위<지리고>를 참고로 하여 작성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現傳 揆園史話의 史料的 性格에 대한 一檢討> AD 1986. 12.《李丙燾 博士 七旬記念 韓國史論叢》pp. 658~661)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위의 두 사서에서 참고로 인용한 문헌․사적의 종류(書目)와 그 편찬․저술연대를 깊이 분석․검토하여 보지않고 지극히 형식적인 견해로 인한 모순된 결론에 빠진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즉 백두산의 어휘고증을 하는데《규원사화》가 참고로 인용한 여러 근거문헌․사적들을 검토하여 보면《山海經》․《後漢書》․《東沃沮傳》․《括地志》․《麗史列傳》․《魏書》․《勿吉傳》․《北史》․《唐書》․《遼志》․《金史》․《高麗傳》․《大明一統志》등 10종이고,《해동역사》<지리고〉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사적들은《山海經》․《後漢書》․〈東沈沮傳〉․《括地志》․《魏書》․〈勿吉傳〉․《療志》․《金史》․〈高麗傳〉․《行政錄》․《大淸一統志》․《大淸開國方略》․《康熙幾睱格物論》․《和漢三才圖會》등 11종으로서 전부 중국사적․문헌들이고 국내문헌․사적들은 한 권도 없다.
또한 위 사적․문헌들의 저술연대를 살펴보면《규원사화》에 인용된 것들은 모두《규원사화》가 저술된 조선 숙종원년(AD 1675) 이전에 저술된 명대 이전의 문헌 ․사적들인데 반하여《해동역사》<지리고>에 인용된 사료 가운데 6종은《규원사화》에 인용된 사료와 같으나 나머지5종(《大淸一統志》․《行政錄》․《大淸開國方略》․《康熙幾睱格物論》․《和漢三才圖會》)은 숙종원년 이후에 저술된 청대의 문헌들이다. 특히《해동역사》<지리고>에서는 조선조 말엽의 실학자인 유득공이 고증․해석하여 놓은 문장이 그 핵심을 이루고 있으나《규원사화》에서는 그 고증․해석문이 인용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유득공이《규원사화》가 저술된 74년 후에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 글이 인용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므로《규원사화》나 《해동역사》<지리고>가 위와 같이 모두 각자 중국측 자료들의 필요한 부분만을 직접 인용하고 국내사료는 전혀 인용하지 않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해동역사》<지리고>가 반드시《규원사화》를 인용하여야 할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그 인용한 문헌․사료의 종류가 반드시 일치되는 것도 아니므로 그 고증․해석의 결론은 거의 같으나 그 해석의 내용이 지엽말단에 이르기까지 일치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 밝혀진 결과를 놓고 볼 때에《규원사화》가《해동역사》<지리고>보다 그 저술연대가 앞선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으므로《규원사화》나《해동역사》<지리고>가 모두 「고려 성종 10년」의 기사를「광종 10年」이 기사로 잘못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히려 한진서가《규원사화》의 이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여《해동역사》<지리고>에다가 기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용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역력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규원사화》나《해동역사》<지리고>가 백두산에 관한 어휘를 고증․해석함에 있어서 그 언어학적인 증명방법과 결론이 비슷하다는 것과《규원사화》보다 148년 후에 저술된《해동역사》<지리고>에《규원사화》를 인용한 흔적이 없다는 점을 들어서 바로 반대로《규원사화》가《해동역사》나 그 <지리고>를 참고로 인용하여 위작되었을 것이라는 속단을 내리는 조인성의 결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후 모순된, 그야말로 경박하기 이를 데 없는 주장임이 스스로 명백하여지는 것이다.
또 조인성은 이어서「《규원사화》의 <단군기>중 박달 임검(檀君)의 뜻을 설명한 부분에서 <만약 漢字와 諺文(지금의 국문)을 병용하였더라면 이러한 폐단이 없어지고 초야에 묻힌 우부라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어 문화의 계발이 더욱 빨랐을 것이다>(今若以諺書倂用則 必無是弊而 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저자가 한글의 사용도 우리 민족의 고유성의 보존, 즉 소위 <保性>을 강조한 뜻으로 서술하였다고 보아지므로 이「文化」라고 하는 용어는 20세기 초에 일본의 영향으로 정치․경제․예술 등의 용어와 함께 우리 나라에 들어온 Kultur 혹은 Culture(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정신활동)의 의미로 씌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재래부터 사용하여 오던 <文治敎化>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규원사화》<단군기>가운데 <今若以諺書倂用則>이하의 구절은 AD 1900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작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규원사화》에 나오는 각종 문헌자료의 대부분도《해동역사》(朝鮮 正祖 24년~純祖 14년, AD 1800~1814년, 韓致淵 편찬)나 그 <지리고>에 의거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위《韓國史市民講座》와《李丙燾 博士의 七旬記念 韓國史論叢》참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동양에 있어서「文化」라는 어원은 원래「聖人之治 天下也, 先文德而 後武力, 凡武之興爲, 文化不改然後 加誅」라는《說菀》(BC 77~ BC 6, 劉向 著)의 <指武篇>의 구절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뜻은「형벌이나 위력(무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문치를 통하여 인지를 깨닫게 하여 교화시킨다」는 즉 문치교화(文治敎化) 또는 문덕교화(文德敎化)의 준말로 널리 사용하여 왔다. 그러다가 조인성의 주장처럼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양에서 이 용어가 정치․경제․예술 등 신생용어와 함께 일본을 통하여 우리 나라에 들어와 Kultur 혹은 Culture 즉「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인류의 이상을 실현해 나아가는 정신활동」의 뜻으로 전용되어 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규원사화》<단군기〉에 기록된 이「文化」라는 용어는 Kultur 혹은 Culture라는 근대적인 의미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동양에서 재래부터 사용하여 오던「문치교화」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만약 한자와 한글을 병용하였더라면 이러한 폐단이 없어지고 초야에 묻힌 우부라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어 문화의 계발이 더욱 빨랐을 것이다」라는 《규원사화》의 원문에 비추어 보거나 저술 당시의 사정을 놓고 볼 때에도《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檀君이라는 용어를 만약 한문으로만 쓰지 않고 한글도 같이 사용하였더라면 어리석은 필부들도 단군이 박달임검의 뜻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아서 세상이 더 빨리 계발되었을 것」이라는 의도로 기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원문의 뜻과 이치에도 합치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文化」의 용어를 특히 근대적인 뜻으로 기술하였다거나 또는 이 구절의 저의가 「국문을 사용 보존하지 않으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이른바보성(保性)을 강조하는 뜻으로 사용된 것이라는 주장은 너무나 비약된 해석이며, 따라서 이 구절이 AD 1900년 전후의 어느 시기에 조작된 것이라고는 생각될 수 없다.
조인성은 AD 1988년 2월에「《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그 <단군기>를 저술하는 데 저본으로 하였다는《진역유기》의 원저본은《조대기》라고 하고 있으나 위 저자가 만약 그 원저본인《조대기》를 참고로 하였다면 구태여 저본인《진역유기》에 의존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므로《조대기》는 참고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며, 또《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密記》등은《규원사화》에 단 한번씩 등장한 것으로 보아 이러한 신선도사서들은 실제 참고로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인용하였다는 사문록(四聞錄)은《규원사화》<단군기>의 내용과 일치되는 부분이 3개처가 되나 단군조선의 말기역사가《규원사화》<단군기>와 틀리며(《규원사화》<단군기>에서는 47세 1,195년이나《사문록》에는 1,048년에 임검이 아사달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三韓拾遺記》는 조선시대의 도가문집인《靑鶴集》에 그 내용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으나《규원사화》에서는 그 인용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규원사화》<단군기>가 참고로 한 주된 사료는 역시《진역유기》가 분명하다고 하여 놓고 이명(李茗)이 고려 인종 때의 승려 묘청이 설립한 팔성당에 대하여《진역유기》에서 그 팔성당(그 主神)들의 임무에 관하여 독자적인 견해를 서술한 가운데 단군조선이나 고구려 또는 발해와 관계없는 <松嶽의 雲主>니 <月城嶽(慶州)의 天仙〉이니 하는 지명이 나오는 점과 또 <맡아 다스린다>는 표현을 고려 성종의 이름(諱)자인 <治>자를 피하여 代字를 쓰지 않고 바로 <掌治>라고 기록하여 <治>자를 그대로 사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팔성당들이 각기 관장하는 임무가 고려시대의 문신인 최자(明宗 18년~元宗 1년, AD 1188~1260년)의 <三道賦> (《東文選》2)의 내용과 두 군데가 다르다(고려시대에 농업을 관장하는 主神을 李茗은 甑城嶽神人이라고 하였는데 崔滋는 木覓神人라고 하였고, 또 風雨를 관장하는 主神을 李茗은 月城嶽天神이라고 하였는데 崔滋는 平壤神人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진역유기》는 고려시대에 저술된 것이 아니고, 근세에 이르러《규원사화》를 위작할 때에 저자가 꾸며낸 것이 틀림없다. 즉 요컨대《규원사화》의 저자가《조대기》등 6종의 도가사서를 실제 참고로 한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러한 도가사서들을 참고로 인용하여《규원사화》를 위작할 목적으로 원래 없었던 《진역유기》라는 가공의 도가사서를 꾸며낸 데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린 다음, 따라서《규원사화》는《환단고기》와 마찬가지로 단군신앙과 관련된 종교사화일 뿐 우리 한국고대사 연구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전혀 아니다」(<揆園史話와 檀君神話> AD 1988.2.25.발행《韓國史市民講座》제2집[李基白 책임편집] pp.78~78)라고 총 결론을 맺고 있다.
무릇 어떤 사서를 인용한다는 것은 그 사서 가운데 필요한 어느 기사나 구절부부만을 참고로 원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용하여 새로 저작․완성된 사서의 내용과 인용된 사서의 내용이 대개 그 인용부분은 같으나 그 나머지 부분은 다르거나 혹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러나 저본이 된 사서와 그것을 저본으로 하여 새로 저술된 사서와는 그 내용의 주된 부분 즉 기본적인 핵심 부분은 같으나 여러 다른 사적․문헌의 기사․기록들을 인용하여 그 일부분을 정정․보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역시 지엽말단에 이르기까지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경우 그 저본이 된 사서나 그 원저본이 된 사서는 물론 인용할 각종 문헌․기록 등 사료들을 한꺼번에 수집하여 동시에 참고할 수도 있고 따로따로 참고로 할 수 있음은 물론이며 저본을 참고로 하였다 하여 그 원저본을 참고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리고 인용방법에 있어서도 인용될 문헌․사서의 서목을 기재하고 그 밑에「曰」또는「云」자를 붙여서 그 인용기사나 구절부분을 특정하여 표시하는 경우가 보통인데, 이러한 경우에는 그 인용된 문헌․사서의 서목과 그 인용부분을 명확히 알 수 있으나, 그렇지 않고 여러 사적․문헌의 내용을 한꺼번에 구체적으로 표시하지 않고 인용한 문장의 첫머리나 마지막에 그 인용한 문헌․기록 가운데 대표적이 한두 가지 서목만 골라 그 밑에「等」자를 붙여서 객관적으로 인용표시를 하여 놓은 경우가 허다한데 이러한 경우에는 그 인용된 문헌․사적들은 물론 인용된 부분을 구체적으로 판별할 수가 없는 것이 보통이다(《규원사화》<단군기>가운데「이 밖의 서적에서 본 것과《四聞錄》․《三韓拾遺記》등과 같은 도가문집 등 여러 서적에 흩어져 나오는 것을 가히 모두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此外散見於 載積者 及 道家文集 如四聞錄 三韓拾遺記等 諸書者 不可殫記矣]고 되어 있는 기사가 바로 그 적절한 예다).
그러므로《규원사화》의 저자가 그 저본인《진역유기》를 주로 참고하였고 그 원저본인 《조대기》의 기사는 위《진역유기》의 내용 속에 대부분 그대로 흡수 기술되어 있으므로 일일이《조대기》의 기사를 가려내어 별도로 다시 인용표시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 표시를 하지 않아 마치《조대기》는 참고로 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였을 것이나《규원사화》<단군기>에는 그 첫머리에 총괄적으로 인용한 표시가 보이고(震域遺記 三卷 引朝代記備載我國故史)또「《조대기》라는 책이름이《고조선비기》․《시공기》․《삼성밀기》등 사서와 함께 (근세 조선) 세조의 구서의 유시에도 나타나 있거늘 하물며(고려) 김부식시대에만 이 책이 없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 誌公記 三聖密記等書 現於 世祖求書諭而 金氏之世 獨無此書耶)라는 구절과 「이 밖에 여러 서적과《사문록》이나《삼한습유기》와 같은 도가문집에서 본 것을 일일이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라고 한 위의 문구를 종합하여 보면, 북애자가《규원사화》를 저술할 당시 위 《조대기》등 도가 사서도 함께 참고로 하였다고 보여지므로 「《조대기》는 참고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조인성의 결론은 잘못되었고, 또 《고조선비기》․《지공기》․《삼성밀기》․《삼한습유기》․《사문록》등《규원사화》<단군기>에 인용표시가 있는 도가사서들의 내용의 일부가 위 <단군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거나 혹은 일부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러한 도가사서들이 위 <단군기>에 인용되지 않았다고 단정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진역유기》에서 고려시대의 팔성당을 설명한 기사는 승려 묘청이 팔성신을 불가식으로 각색한 것에 대하여 이명이 신선도적인 입장에서 이를 비판하고 이와 다르게 설명한 기사이며, 그 내용이 또 유신인 최자가 읊은 <三道賦>의 詩文 가운데 나오는 팔성신들이 관장하는 임무와 약간씩 다르다 하더라도 이러한 차이는 어느 한쪽이 오기하였거나 아니면 불교․신선도․유가라는 각자 다른 사상이나 신앙적 견해에서 오는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진역유기》의 팔성신의 기사 가운데 나오는 송악(松嶽開城)이나월성(月城慶州)이라는 지명이 단군조선과 관계가 없다고 주장하나 단군조선의 강역이 국조단군 초기에는 甲比古次(江華島)로부터 冽水(漢江)를 연결하는 이북지역이었으나 시조단군 말기에는 冽水이남지역까지 편입된 사실이《진역유기》를 근거로 한《규원사화》<단군기>의 기록에 의하여 명백하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나 설사 이를 믿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위 팔성신의 기사는 이명이 고려 말기에 고려국내에 흩어져 있는 영악들의 산신에 관하여 신선도적인 입장에서 독자적으로 그 견해를 밝힌 것이므로 구태여 단군조선의 강역과 관련시켜 논할 여지가 없다.
끝으로 고려 성종의 이름「治」자를 피휘(避諱)하지 않고「맡아 다스린다」는 뜻으로 바로 掌治라는「治」를 썼다는 문제를 보면, 이 피휘의 관습은 천자나 왕 또는 제후의 이름자가 다른 왕이나 신하 도는 백성들의 이름자와 같은 경우에 그 이름자를 피하고 다른 글자를 대신하거나(代字) 또는 고치거나(改字)혹은 글자 획을 줄여서(缺劃) 사용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관습은 왕으로부터 국존․국사 등 벼슬을 받은 보각국사 일연이 저술한《삼국유사》나 사관수찬관의 벼슬에 있던 이승휴가 편저한《제왕운기》등과 같이 고려시대에 특히 임금으로부터 신임을 받던 고승이 저술한 불가사서나 관찬사서 등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져 왔다.
그러나 이 피휘의 관행은 이름자에 한하는 것이고 일상생활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술어나 동사, 부사에 이르기까지 그 글자의 사용을 피하였던 것은 아니며(《三國遺事》 卷第四 <圓光西學>의「皆委以治方」, 卷第五<金現感虎>,「可治.....但依諭而治之」등 참조) 또 왕조가 바뀌면 전 왕조의 왕의 이름은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예컨대 조선시대에 찬술된《應制詩註》․《東國通鑑》․《海東繹史》등에서는 모두「唐堯」「周武王」등으로 바로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사서류에서는 이 피휘의 관습이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진역유기》와 같은 도가사서에서「맡아 다스린다」는 술어를「掌治」로 바로 기술하였다고 하여 하등 이상할 바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물며 북애자가《규원사화》의 서문에서「그러던 중 골짜기에서 다행히도 청평이 저술한《진역유기》를 얻었다....」(....然何幸 峽中 得淸平所著 震域遺記....)는 사실을 특히 명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진역유기》까지 고려시대에 저술한 것이 아니고 후세에 가공으로 꾸며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너무 심하며 그 결론이 지나치게 경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규원사화의 저술연대에 대하여 진실과 부합된다는 확고부동한 자료가 나타나고 있다. 즉《규원사화》<서문> 가운데 저자가 의주통군정에서「다시 평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조정에서 수나라 100만 대군을 살수에서 섬멸한 고구려 대신 乙支支德의 祠宇를 건립한다는 거사가 있었다」(....後還至平壤 適自朝家有建 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隨軍百餘萬 於薩水者也)는 기사가 보이는데, 후세에 조정에서 편찬된《肅宗實錄》에 의하면「조정에서 예관을 파견하여 이 건립된 을지문덕의 祠宇에 액호를 내리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는 연대가「肅宗 3年 丁巳(AD 1677 11月 乙酉」의 일임이 분명한 바(遺禮官 賜高麗 乙支文德 祠宇 額號 爲致祭《肅宗實錄》卷六 肅宗三年 丁巳 十一月 乙酉), 이 해는 바로 북애자가 《규원사화》의 <서문>을 쓰던 숙종 원년(AD 1675)으로부터 2년 후의 일이므로 이 서문을 쓰던 때에 을지문덕의 사우를 건립한다는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 연대상으로 보아 정확하게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규원사화》<서문>의 내용과 《숙종실록》의 양 기사내용의 완전일치는 바로「우연의 일치」이며, 인위적으로 후세에 꾸며서 맞춘 것도 아니며 맞출 수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규원사화》의 이 구절의 글은 저자가 과거에 낙방한 후 허전한 심정을 달래기 위하여 조선팔도 방방곡곡에 있는 역조의 고사적지를 두루 답사하는 과정에서 몸소 체험한 사실 그대로를 비분강개한 심회로 기술하여 놓은 서문의 한 구절 속에 끼어서 나오는데 그 문자의 내용이나 앞 뒤 순서가 자연스럽게 사리에 들어맞고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문장은 통상 일기장의 내용과 같아서 허위기술의 여지가 없는 것이며 그 내용의 일부가 그 후 조정에서 관찬한 왕조실록의 내용과 바로 일치한다고 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규원사화》의 서문이 허위기술된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한영우 교수도 강단사학자로는 드물게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했으며 (재야 사서 해제, 규원사화, 민족지성 9호 1986.11월호. 213쪽) ,국제평화대학원 대학교총장 박성수 교수, 개천대학 학장인 송호수 박사님등도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를 전적으로 인정했다.
한편 북한 국사학계를 사실상 대표하는 후보원사 원로교수인 손영종박사는 AD 2002년 10월 3일 평양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개천절 남․북민족공동행사의 하나로 진행된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역사학자들의 공동 학술토론회”에서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대한 이해 -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규원사화는 위서가 아니며, 참된 사서로서 가치가 있다고 결론지은바, 이를 발췌해서 자세히 살펴본다.
단군 및 고조선관계역사자료에 관하여 우리는 가능한 모든 유관자료들을 수집하여야 한다. 따라서 비사들 가운데서 위서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위서라 할지라도 그 속에 조금이라도 단군, 고조선시기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이는 기사들이 있으면 사료로서 참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물론 사료라고 인정한다고 해서 거기에 씌여진 내용이 다 역사적 사실인 것은 아니며 모든 사료는 다 엄격한 사료비판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점은 사료비판이라는 명목하에 어떤 사료를 두고 그것을 뒷받침 할 수 있는 다른 전거가 없는 경우 믿을수 없다고 하면서 무조건 다 버리는 식으로 처리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해당시기에 능히 있었을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부정할만한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에는 참고로 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는 이유에 대하여 보기로 하자.
《규원사화》는 저자인 북애자에 의하면 고려말의 청평산인 이명이 쓴《진역유기》(3권)을 대본으로 삼고 거기에 저자가 안팎의 사서들에서 참고할만한 자료들을 뽑아서 추가하고 일정한 자기식의 설명을 가하기도 한 것이며《진역유기》는 발해사람들이 편찬한《조대기》를 참고하여 쓴 것이다.《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게 되는 중요한 이유는 그 내용에서 이 책의 저술년대인 1675년 이후에 추가기입하였다고 볼만한 서술이 거의 없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① 우선 인명에서 이 책에 보이는 사람이름들은 다 옛스러운 느낌을 주며 다른 비사들에서 보는바와 같은 중국식성씨를 가진 인물은 없다.
② 다음 지명 역시 매우 옛스러운 고장이름으로 된 지명이거나 소밀성, 길림 등과 같이 17세기 중엽에는 조선에도 잘 알려 진 지명들이다.
③ 인용서목도 다 17세기 중엽이전에 출판 또는 필사, 보급되여 있었던 책이다. 또 책이름을 밝힘이 없이 인용 또는 이용한 글도 다 그 이전시기의 책들의 내용이다.
④ 사건, 사실들의 서술과 그에 대한 보충적해설도 조선과 중국의 고전, 역사책들에 나오는 것들과 그것을 가지고 자기식으로 해설한 것으로서 17세기 사람으로서는 능히 그렇게 쓸수 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⑤ 관직명을 보아도 중앙관직명인 《단군8가》는 매우 옛스러운 명칭으로 되어 있고 수상(首相)이니, 상장(上將)이니, 호군(護軍)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쓰지 않았으며 지방관직도 여러《후》,《남해상장》(上長)등은 보이지만《태수》니《녹살》이니 하는 후세적인 명칭은 없다. 이 역사 근대이후의 가필은 없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⑥ 사상, 리론, 개념들도 17세기 사람들이 능히 쓸 수 있는 내용과 어휘들로 표현되어 있다고 본다. 예컨대《태백일사》등에 보이는《천부경》이나《삼일신고》등은 나오지 않고《서경》같은데도 보이는《대고(大誥)》가 나온다.
⑦ 과학, 기술관계 서술에서도《단기고사》등에 보이는 근대부문과학도서나 비행기, 잠수함 같은 근대기술의 산물은 나오지 않는다.
일부 학자들은 《규원사화》단군기에 보이는《문화의 계발》이라는 표현에서《문화》란 말은 서유럽근대의《Culture, Kultur》를 번역한 말이라고 보지만 그것은《문치교화》의 준말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고려사》성종 10년조에 나오는 여진관계기사의 연대를《광종 10년》이라고 했으니 같은 내용으로 된《해동역사》를 베낀것이고 따라서 1823년 이후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북애자와 한진서가 다 같이 선행한 어떤 기록을 보고 쓴 것이라고 보면 문제로 될 것이 없다. 설사《규원사화》에 19~20세기 사람들의 가필이 한두군데 있다 치더라도 그것이 대세를 좌우하는 것으로는 될 수 없다고 본다.
다른 비사들은 《규원사화》가 가지고 있는 제한성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우리는《규원사화》가 위서가 아니라고 보지만 거기에 수록된 자료들이 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비사들과 마찬가지로《규원사화》의 저자도 우리 민족이 남만못지 않게 일찍부터 발전된 문화를 창조하고 시조단군때부터 광할한 영토를 가진 대강국을 형성하였다고 보는 입장에 서 있었다. 단군조선초기부터 오늘의 흑룡강류역, 요녕성서부지역까지 차지하고 있었다고 본 것이라든가 그후 빈기, 회대(淮岱)지방(오늘의 중국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 산동성, 강소성북부등지)에 까지 진출하여 여러 제후국들을 두었다고 한 것은 그러한 실례이다.
이것은 물론 그가 처음 지어낸 것이 아니고 선행한《진역유기》의 내용을 따라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책의 서문에서《진역유기》의 내용이 우리민족의《기염을 만길이나 토하게 한다》고 한데서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다른 몇몇 학자들처럼 중국 고전에 나오는《동이》,《9이》를 조선사람의 조상으로 본 것과도 관련된다.
《동이》와《9이》를 동일시하고 그것을 조선과 결부시켜 이해한 것은 공자의《욕거9이(慾居九荑)》에서도 표현되였고 오운의《동사찬요》(1626년)이래 조선의 여러 학자들의 견해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비사들의 경우 그것을 더욱 전면적으로 확대해석한 점이 다르다.
단군조선의 왕대수, 역대통치자명, 재위년간에 대한 규원사화의 기록은 일정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된다. 통치자의 이름, 대수 등은 문자기록이 없었던 나라들에서도 구전으로 전해지는 경우가 있다.(나라의 통치자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들의 60대에 이르는 이름들이 성서들에 씌여 있는 것은 그러한 실례이다. 민족학적자료들에 의하면 유목민족의 경우 우두머리집안의 여러대의 가계를 구전으로 전승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통치자이름에 대해서는《규원사화》와《단기고사》는 서로 다른 사람이 서로 다른 시기에 쓴 책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역대 단군이 이름들은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서 두 책이 다 선행한《조대기》같은 책을 자료원천으로 하여 써놓은 것으로 볼 수 있으며《조대기》는 또 그 이전의 전승이나 기록에 근거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재위기간문제도 후조선시기에 간지기년법이 도입되였을 때 역대 단군의 통치년간을 간지로 표시한 것이 있었고 그에 기초하여《조대기》편찬자가 유년칭원법을 따라 원년간지를 써 놓았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민족고전들은 거의 모든 경우에 전국년대를 무진년으로 대다수 경우에 단군조선의 종말년대를 을미년 으로 썼는데 우리는 이 연대들이 고유한 전승이였다고 생각한다. 역대 통치자들의 원년간지들도 같은 성격을 가진다.
갑자년(B.C.1317년)으로 된 것도 본래는 을미년이였던 것을 고쳐 본 것이다.
아무 나라에서나 고대사의 첫머리는 신화, 전설로 엮어 져 있고 거기에 나오는 연대(간지포함)도 후세사람들이 옛 전승에 기초하여 적당히 정해놓은것이라고 보아서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세계 대다수 나라들에서는 그 첫고대국가의 건국자나 건국년대조차도 모르는 것이 통례로 되고 있는 것만큼 후세에 추정된 연대라고 하여도 그대로 역사년표에 싣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민족고전에 실린 내용을 검토해 보고 특별한 모순이나 반대근거가 없는 한 그대로 내용하는 것이 나쁘지 않을 것이다.
국가가 존재하는 한 중앙 및 지방통치기구들과 해당한 관직명이 있기 마련이다.《규원사화》에서는 중앙관직으로서 동물들의 이름을 붙인 호가, 마가, 우가 등 8가를 들고 있다. 고대부여에서도 마가, 우가, 저가 등 중앙관직이 있었던 사실,《가》,《가한(극한, 것한)》,《한》,《한기》등이 조선증세시기까지도 귀족 관료들의 호칭으로서 오랜동안 사용된 사실로 미루어《단군8가》의 관직명이 있었다고 보아서 무리한 점이 없으므로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단군조선에 9개 대국(大國), 12개 소국이 있었고 21개 주가 있었다고 한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넓은 영역을 가진 국가인 이상 그 안에는 직할지(고을), 후국, 속국, 속령 등이 있었을 것이며 그 통치자-관료로서《후》,《장》등이 있었다는 것도 그대로 인정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현존 사서들에 나오는 것은 기원전후시기에 해당하므로 더 검토를 요한다고 본다.
갑비고차(강화도)이남의 주민들을《남이》라고 하여 마치도 혈연이 다른 족속인 것처럼 구분한 것은 적당치 못한 표현이지만 북쪽의 많은 백성들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그 풍속을 바꾸게 하였다고 한 것 그들이 후에 진, 변(진한, 변한)등이 되었다고 한 것도 취할 수 있는 기사라고 본다.
국가가 권농정책, 진휼정책, 수공업과 상업에 대한 장려정책을 실시하였다든가 왕궁, 성곽, 관청의 건설공사를 벌리고 조세, 공물을 징수하였다든가 하는 일은 아무 나라에서나 있는 일이므로(80~90분의 1세를 받았다는 식의 과장된 표현은 그만 두고) 해당 단군(임검)통치년간에 있었던 일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상에서《규원사화》의 성격, 그 내용가운데 일부에 대한 초보적인 고찰을 하여 보았다. 우리는 북애자가 지적한 것처럼《도가》,《선가》계통인물들에 의하여 영영 파묻혀 버릴번하였던 고유전승자료가 이러저러한 경로를 통하여 남아 전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본다.《규원사화》를 비롯한 비사들의 자료들을 비판적 견지에서 분석연구하고 그에 기초하여 초보적으로라도 고대사를 체계화할 수 있게 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다른 나라와 지역의 고대사를 보면 에집트, 메소포타이마, 인다스강유역, 황하유역의 역사가 좀 알려져 있을 뿐이고 우리 나라만큼 고대초기의 역사자료가 남아 있는 실례는 중국을 제외한다면 그 어디에도 없다. 중국고대사도 하나라때(B.C.21세기)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되어 있는 것만큼 단군조선처럼 B.C.30세기 초의 사실을 전하는 역사자료는 아무데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단군 및 고조선 관계비사들에 후세의 윤색, 가필을 겪은 것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쓴 기사도 일부 들어 있는 것만큼 그것을 구태여 부인하고 반대할만한 과학적 근거도 없는 조건에서 일률적으로 위서, 위작이라고 하면서 모두 버릴것이 아니라 비판적 견지에서 계승하고 이용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 타당한 일이라고 본다.
이상에서 고찰한바와 같이 규원사화는 통일로 가는 한국사에 있어서 남․북 모두에서 위서가 아니고, 사료로서 가치가 있는 참된 사서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4.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
환단고기는 우리상고사를 바로 찾는데, 풍부한 사료를 제공하고 있으나, 실증사학을 내세운 일제식민사학자들이 집요하게 위서로 몰고가서 민족자주사학과 강단사대식민사학간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고 있는 고대 사서이다.
본인은 환단고기가 후세의 부분적 가필 가능성등 문제가 있다 하므로 그 내용 전부가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더 깊은 연구가 필요함)사료(史料)로서 가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바 이를 자세히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환단고기를 살펴보면, 『삼성기(三聖紀)』『단군세기(檀君世紀)』『북부여기(北夫餘紀)』『태백일사(太白逸史)』등 4권의 사서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기』는 『삼성기전 上』과 『삼성기전 下』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된 이유를 AD 1911년 편저자인 계연수(桂延壽)는 범례에서 밝히고 있다. 즉 삼성기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안함노(安含老)가 찬한 것으로서 자기 집안에 전해 내려왔는데 이것을 『삼성기전 上』으로 하였다.
다른 하나는 원동중(元董仲)이 찬하였는데 태천(泰川) 사람인 백관묵(白寬黙)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얻어 『삼성기전 下』로 하였다.
이 上下를 합쳐서『삼성기』라고 이름을 붙여 한단고기의 첫부분으로 삼은 것이다.
삼성기는 한민족 국가의 시원인 환국이 천제인 환인(桓因)에 의하여 건국되는 과정이 기술되고 있다. 그 뒤를 이어 환웅시대 단군왕검의 시대를 기술하고 있다. 우리 나라 상고사 환단조선 시대이다. 전체적으로는 일연(一然)이 저술한『삼국유사』고조선 조항과 구조적으로나 내용상으로 유사하다.
삼성이란 환인, 환웅, 단군왕검을 가리킨다. 그런데『삼성기』란 책명은 1412년 세조가 전국에 일대 수압령을 내릴 때 작성한 목록에 들어있다.
『단군세기』는 단군 47대 2095년간 존속되었던 단군조선의 역사가 편연체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BC 2333~BC 238까지)
47대 각 단군의 이름, 제위기간의 치적, 천체관측, 실제 생활과 관련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암(李嵒)선생이 쓴 단군세기는 우주의 생성과 인간의 성품, 국가의 도리와 역할 등을 역사의 전개과정과 관련시켜 기술하고 있다.『북부여기』는 상하 해모수 단군부터 시작되고 있는데, 이규보가 쓴 동명왕편의 해모수 기사와 매우 비슷하다. 삼국유사의 왕력 편에도 고주몽은 단군의 후손으로 되어있다. 이 책은 북부여 내부 기사뿐 아니라, 대외 관계에 관한 것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태백일사』는 이암의 현손으로 알려진 이맥(李陌)이 지었다고 한다. 삼신오제본기, 한국본기, 신기본기, 삼한관경본기, 소도경전본훈, 고구려국본기, 대진국본기, 고려국본기 등 여덟 종류가 들어가 있는 책으로 환단고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환단고기 열풍과 진위논쟁에 있어서 가장 문제점으로 등장한 것은 책의 내용보다도 책의 형식이나 내용에 관한 진위여부․가치문제등 위서의 개념도 정립하지 않고, 무조건 위서로 모는 식민사학자들이 그간의 출현(보존공개)과정과 가필 가능성에 대하여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므로 그 과정을 간략히 그러나 정확히 살피기로 한다.
환단고기는 계연수(桂延壽)가 묘향산 단굴암에서 AD 1911년 5월 광개절에 삼성기, 단군세기, 태백일사, 북부여기라는 4개의 독립사서를 한데 모으고 서문격인 법례(凡例)를 적어 펴낸 것이고, 해학(海鶴) 이기(李沂)가 교열하였다.
계연수는 자를 인경(仁卿), 호를 운초(雲樵)라 하였는데, 평북 신천 출생으로 민족자주사학자이며, 독립운동가로 AD 1898년 단군세기와 태백일사를 간행하고, AD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무령 이상룡(李相龍)막하에서 참획군정으로 공을 세웠으며, 백두산 선인이라고도 불리었던 계연수는 AD 1920년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타계하였다.
계연수는 이기선생(檀學會 AD 1909년 3․16창단 제1대 회장)의 문인으로 제2대 단학회 회장을 맡았으며 단학회 제6대 회장이 정산(精山) 이유립(李裕岦 : 초대국사찾기 협의회 부회장)선생이다.
운초는 자기가 소장했던 안함로의 삼성기, 삭주 이형식(李亨拭)의 소장 북부여기, 백관묵 소장의 삼성기(원동중 씀)와 단군세기(李嵒 선생이 짓고 杏村 文貞公이 전함), 이기 선생 소장의 태백일사등을 모아 독립사서 환단고기를 펴내면서 벗인 홍범도 장군과 3․1독립운동때 33인 민족대표의 한 분인 오동진 선생이 출자하고 책을 간행하였다.
운초는 3․1운동이후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상룡․홍범도 장군․오동진 선생등과 벗하며 독립운동을 해왔다. 운초는 또 제자인 이유립에게 환단고기를 다음 경신(庚申)년에 공개하라고 유언하였다.
단학회의 창시자이자 민족자주사학자요 애국운동가인 환단고기 감수자 이기 선생은 전북 김제출신으로 동학농민전쟁에도 관여했으며, 대종교를 창도한 흥암 나철선생과 동지로서 민족사관 정립에 뜻을 같이 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역사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나철 선생은 단군교인 대종교를 중광하였고, 이기 선생은 단학회를 창설하였다. 이기 선생은 AD 1909년 7월 13일 조선 나라가 망해가자, 서울 한 객사에서 자진 순국하였다. 이암, 이맥, 이명, 이기, 이상룡, 이유립은 모두 고성 이씨이다.
이유립 선생은 환단고기를 운초의 유촉에 따라 일반 국민대중에게 소개한 분이다. 이유립은 8․15 해방후 AD 1949년 동복(同福) 오형기(吳炯基)에게 정서를 시켰다.(환단고기 발문) 이유립은 또 단단학회(단학회의 개칭)를 설립하고 강화도 마니산 대시전등에서 상고사를 연구하고, AD 1960년초 대전에서 “커발한”이라는 발간지를 발간하고, 이어 자유(自由)지를 발간하면서, 환단고기 내용을 부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민족자주사학자이며, 국제평화대학원 대학교 총장인 박성수교수는 “환단고기는 이유립 선생이 남긴 사서로서, 선생은 환단고기에 수록된 네 사서를 모두 일연대사가 삼국유사에서 고기(古記)라고 말한 사서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나라 역사 특히 상고사에 있어서 코펠니크스적 혁명을 일으킨 분이라 할 것이다. 우리 역사의 팔과 다리를 복원할 한국의 사마천이 되는 것이다”라고 AD 2003 9․1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한국상고사의 쟁점” 발표에서 평했다.
그러다가 이유립이 운초의 유촉에 따라 AD 1919년 환단고기 수십부를 영인하고 경신년(AD 1980년)에 환단고기를 공개했으나, 처음에는 대중의 관심을 고다지 끌지 못하였다.
그런가운데 공교롭게도 일본의 괴짜 사학자로 알려진 가고지마 노부루(鹿島 昇)가 <자유(自由)>지 발간인이며 국사찾기협의회 2대회장인 박창암씨로부터 책을 빌려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AD 1982년 일본어로 임의로 번역하고, 해제와 주석을 붙여 무단으로 발간하였다.
이일로 나까소네 전수상 등 극우 일본인과의 연계문제와 함께 환단고기가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기마민족설을 뒷받침하는 사료처럼 둔갑하고 말았다.
가고지마의「환단고기」일본출판이 국내에 소개되고, 국내에서 환단고기 주석서가 줄이어 출판되자 국민대중들은 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에서 오는 환희와 함께 놀라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AD 1992년 실증적 민족자주사관에 따라 한국통사인 “하나되는 한국사”(범우사)를 출판하면서 규원사화나 환단고기를 사료로서 엄밀한 검토를 거쳐, 100여 쪽에 해당하는 실사단군조선사 복원에 최초로 반영하였다.
환단고기나 규원사화, 단기고사 같은 단군조선 관계사서가 자주적이며 실증적으로 반만년 대륙민족의 영광사인 우리 상고사를 복원하게 되자, 일제식민사학자들은 기득권 유지차원 등에서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데 온힘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대표적 일제 식민사학자 이병도 교수의 수제자인 이기백 교수는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의 “고조선의 국가형성”이라는 논문에서 “고조선 건국연대는 정확히 알 수 있는 성질의 것이 못되고, 고조선 역대 47명의 단군명이 모두 나열되고, 그 즉위연대가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기 조차하며 그러한 유의 책들은 믿을수 없는 후대의 위서들이다“ 라고 고대사서 내용에 대한 연구나 검토없이 무조건 위서로 내모는 자세를 취했다.
조인성교수는 앞에 게시한 많은 논문을 통하여 줄기차게 실증주의를 내세우면서 규원사화와 함께 환단고기를 위서로 전제하거나, 위서로 몰아갔다.
역사과학을 함에 있어서 실증적 자세를 취하는 것은 좋으나, 실증적 유물․유적은 한계가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체적으로 진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조인성 교수가 환단고기를 위서로 모는 대강 요지는
① 국가형성과 관련된 청동기 사용연대에 관하여 BC 10세기 전으로 올라가기 어려운데, 단군조선 건국은 BC 24세기로 올라가는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일제 식민사학은 한국역사를 일본역사 2600년보다 줄이기 위해 한국 청동기 문화를 BC 5세기~8세기경으로 잡았으나, 만주․몽골․중국등지에서 나오는 청동기문화는 BC 30세기정도까지 올라간다는 것이 중국사학계의 학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② 환단고기에 나오는 지명이나 용어가 근대용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寧古塔, 文化, 父權, 原始國家〉등이다. 이들 용어는 옛날에도 사용했을 수도 있고, 필사하고 정서하며 번역하는 과정에서 가필이나 손질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는 엄밀히 가필여부를 밝혀야 한다.
그러나 한 두개 지명이나 용어의 가필이 있었다는 확증이 있다면 그 부분을 고치면 되는 일이지, 내용에 대한 연구도 하지 않고 원저본이 있어 편찬한 책 전체를 사료에서 배제하려는 것은 역사학자다운 자세가 아니다.
③ 환단고기를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 편찬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더욱 연구하여 밝혀야 할 문제이며 그렇게 추정만 할 것이 아니라, 실증적으로 증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이유립선생을 만났으며 환단고기에 대하여 내용과 공개과정에 의문스러운점이 많다는 강단사학의 정영훈 교수는 환단고기가 이유립선생 혼자의 창작물은 아닌 것 같다는 심증을 갖고 있으며, 앞세대로부터 전해받은 어떤 사서(환단고기 가능성)들은 있었다는 생각이라고 AD 1999 단군학회 토론에서 밝혔다.
다만 환단고기 출현과정중 이유립 선생이나 정서한 오형기선생, 일본서 발표한 가고지마 노보루등의 행적에 관하여 실증을 위해 단단학회쪽등에서 발표할 것이 있으면 발표하는 것이 민족상고사 정립에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밖에도 이도학은 환단고기의 서지학적 검토 선행을 전제로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며, 송찬식은 환단고기를 “천하가 다아는 위서”로 몰았고,(위서변, 월간중앙, 1997, 9월호) 카돌릭대 교수인 박광용은 환단고기와 규원사화를 위서라고 하면서, 이들은 대종교 관련문헌으로 서구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박광용 대종교 관련 문헌에 위작 많다. 역사비평 10호, 1990년 가을호 219쪽)
실증주의를 그럴 듯하게 내세우고 사실은 식민지 사학을 계속 유지하려는 학자들은, 진정 사학자라면, 다음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① 과학의 실증성을 위하여 실증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좋으나, 사학이 그것만으로 필요충분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며, 중국과 사대주의 학자들이 역사를 조작․왜곡한 사실, 일제가 우리의 자주 사서 20만 권을 불지른 사실과 이에 대하여 식민사학자들이 외면한 사실, 민족반역자 이완용과 이병도의 관계(질손설), 이병도의 조선사편수관 이후의 실증적 행적은 무엇인가?
② 이기백은 단군조선의 존재는 인정하면서(이기백의 선생인 이병도는 단군조선의 역사적 사실성을 부인하다가, 전 서울법대 학장이며 재야사학자인 최태영 박사의 우정 있는 설복과 국사찾기 협의회 김세환 고문등의 강력권고 등으로 죽기 직전인 1986년 10월9일 《조선일보》에 ‘단군조선은 신화가 아닌 실제적 史實’이라는 글을 통해 지난날을 사실상 참회하고 느닷없이 한국상고사에 대한 학계의 노력이 시급함을 역설함) 그 연대나 기록이 정확하다 하여 위서로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울지라도 알려고 끝까지 노력하는 것이 학자의 자세가 아닐까?
③ 조인성의 앞의 논문을 보면, 우리 역사에는 영광스런 역사가 있으면 안되는 것 같은 논리가 있는데 왜 안되는지? 서기 7세기 安含老 신라스님이 쓴 三聖紀 등 옛부터의 민족자주서들을 계연수가 아닌 이유립이 편찬했다고 해서(조인성 교수의 주장대로라 해도) 그것이 왜 무조건 위서인가? 먼저 위서로 간주하기로 작정하고 그에 꿰어 맞춘 것은 아닌지? 식민사학자들이 사용하는 위서의 기준은 무엇인기? 사대주의 사학자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도 늙은 여우인 노구가 남자가 됐다는 등 말도 안되는 소리가 많은데, 《삼국사기》를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도 위서로 보는가, 아닌가? 단군 조선의 역사적 실재를 인정하면서도 국조 단군왕검의 참된 가르침은 수용해서는 안되는가? 《규원사화 단군기》의 “文化의 계발이......”라는 부분을 들어 그것은 영어로 ‘culture’의 의미이므로 위서라 하는데 ‘문화’가 劉向의《說苑》에서 문치교화(文治敎化)나 문덕교화(文德敎化)로 수천 년간 쓰여왔는데, 우리나라 역사는 외면하고 구미문자에서만 어원을 찾으려는 것은 또 하나의 뿌리깊은 사대식민주의사관이 표현된 것이 아닐까?
역사과학은 실증주의에 입각하여 객관적 사실을 기술하되 하나의 평화세계로 가는 자주민족국가의 역사적 맥에 따라 모든 사서에 대하여 선입견 없이 엄밀한 사료검토를 하여 취신할 것과 아닐 것을 구별하여 잘못을 바로잡고, 바로 기록하는 연구성과가 기대된다 하겠다.
북한의 손영종교수는 “단군 및 고조선관계비사들에 후세의 윤색․가필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역사적 사실을 쓴 기사도 들어있는 만큼 그것을 구태어 부인하고 반대할 과학적 근거도 없는 조건에서 일률적으로 위서․위작이라고 하면서 전부 버릴것이 아니라 비판적 견지에서 계승하고 이용하는 것은 필요하며 타당한 일로 본다”고 주장했다.
본인은 환단고기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사료적 가치를 부정하는 사대식민사학자들에게 개인 이익이나 떼거리 이익에 집착하지 말고 하나의 평화세계를 향해 마음을 열어 민족국가역사를 복원할 때라는 것을 상기하며 그들의 주장을 유지하려면 다음 23가지 실증사례에 답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는 환단고기의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겠다.(여기서 “아!고구려”의 저자 허성정씨와 “천부인과 천부경의 비밀”의 저자 구길수씨의 일부 학설을 받아들여 통합한 것임을 밝혀둔다.)
첫째는 환단고기에 단군조선 13세 흘달(屹撻) 단군 50년(서기전 1733년)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하여 5개의 별이 루성 중심으로 모이는 장관이 연출되었다 했는데, 이것이 천문학자인 서울대 박창범교수와 라대일 박사에 의하여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증명된 것이다.
박교수는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 기록된 일식 등 천문현상을 확인하기 위하여 과학적 방법으로 증명했다.
‘환단고기’는 고려시대 이암이 썼고, ‘단기고사’는 발해의 대야발이 편찬했으나, 일부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과학적 검증 없이, 삼국사기 전인 것과 후대의 조작 흔적이 있다는 것을 내세워 무조건 위서로 몰고, 외면하여 진지하게 연구조차 하려들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는 이를 딱하게 여기어 두 책에 기록된 ‘5성취루’, ‘일식’등 천문기상 현상이 실제로 당시에 존재했었는지를 천문학적으로 연구, 검증했다.
박창범 교수는 특히 두 책에 모두 기록된 ‘5성취루’현상에 주목하여 추적 조사한 결과, 실제로 서기전 1734년 7월 13일 일몰 직후 금성, 목성, 토성, 수성, 화성 그리고 추가로 초승달까지 일렬지어 하늘에 나타나는 장관이 연출됐음을 확인하였다.
박창범 교수는 “이 같은 현상을 우연히 맞출 확률은 0.007%에 불과하며, 책의 조작 여부에 관계없이 역사적인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고 확인했다.(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이것은 우리 민족 문화사 가운데, 상고사를 실증적 규명단계로 진입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단군조선이 민족국가로서 높은 수준의 문화를 창조했음과 더불어 환단고기의 실체를 입증한 것이라 사료된다.
둘째는 환단고기 등장이전에는 밝혀지지 않았던 발해 3대 문왕 대흠무의 연호가 환단고기에서 ‘대흥(大興)’ 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이것은 서기 1949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용두산에서 출토된 정효공주묘지 비문에서 문왕 대흠무가 자기 존호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歷孝感金輪聖法大王)’이라 하고 불법의 수호자로 자처한데서 드러나, 환단고기가 사료로서 가치 있음이 과학적으로 실증되었다.
셋째는 고구려 유장 이정기가 중국 중동부 15개주의 대제(大齊, 평로치청)라는 큰 나라를 세우고, 4대 58년간 다스린 기록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것도 1997년 처음으로 발간된 책 <고구려를 위하여>(김병호. 하서출판), 그리고 KBS 역사스페셜 ‘중국속에 또 다른 고구려가 있었다, 이정기 왕국(2001.5.16)’에서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넷째는 강화도 마니산에 제천단 참성단이 있어 역사적으로 각 왕조마다 해마다 천제를 지내온바, 그 첫 기록이 환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 무오 51년(BC 2282년)에 쌓았다는 것이 나온다. 마니산 참성단은 지금도 의연히 그 자태를 빛내고 있으며, 서울올림픽. 월드컵축구와 전국체전 성화채취의 기본성지가 되고 있다. 강화도에는 이 밖에도 고조선 유물로 정족산성과 고인돌 127기가 있다.
다섯째는 단군조선의 실재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양 강동현에 있는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1993년 발굴되었다. 여기에서는 왕과 왕후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었으며, 북한은 단군릉을 거대하게 개건하여 성역화하였다. 그리고 1926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모금운동을 하여 평양 강동현 단군릉을 보수하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바 있다.
여섯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장수왕이 즉위하자,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 건흥 연호는 1915년 충북 충주시 노은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고구려 불상에는 ‘건흥오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광개토대왕릉비> 에 따르면 광개토대왕은 임자년인 412년에 사망한 게 된다.
즉위년 칭원법에 따라 이 해를 장수왕 즉위 원년으로 삼아 본다. 그러면 장수와 즉위 5년은 병진년이다. 따라서 병진년 불상 광배병과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대의 연호라는 새로은 지견을 추가할 수 있게 된다.
일곱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조대기(朝代記)>를 인용하여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은 태조(太祚),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증조부는 광(廣)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할아버지와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한 어떠한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낙양의 북망산에서 출토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의 묘지에서 천남생의 증조부 이름을 ‘자유’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여덟 번째는 환단고기 태백일사에 <진역유기>를 인용하여 현재 태국에 있는 아유타국과 백제 상인이 교역한 기록이 남겨져 있다. 이는 지역적 근접성으로 보아 백제가 현재의 캄보디아인 부남국(扶南國)과 교역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뒷받침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백제 해외경영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아홉 번째는 실증사학을 내세운 사대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 박사가 과거에는 단군을 신화로 몰다가, 친구인 재야사학자 최태영 박사와 국사찾기협의회원들(김세환, 박창암씨등)의 우정 있는 충고를 받아들여 참회하고, 단군은 실존의 우리 국조이며, 역대왕조가 단군제사를 지내왔으나 일제때 끊겼고, 삼국사기 이전의 환단고기 등 고기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고 1986년 10월9일지 조선일보 1면 머리기사에 쓴 사실이다.
단군조선의 사실(史實)과 환단고기를 믿으라고 쓴 것이다. 사대식민사학자들은 그들 태두의말을 외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열 번째는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실증사학 입장에서 깊이 연구하여 6하원칙에 입각하여(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위조했는지 명백히 제시해야 하는데, 이를 제시한 사람이 현재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열한 번째는 갑골문의 귀방이다. 은나라의 갑골문에서도 환단고기 단군세기의 기록이 사실임을 입증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었다. 즉 BC 1291년 단군조선 제21대 소태 단군 재위 때 은나라 왕무정이 ‘귀방’을 쳤다는 기록이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에 남아 있는데, 과연 은나라의 갑골문에서 은나라의 귀방정복 사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서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환단고기는 이토록 확실한 역사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열두번째는 비파형청동검 이다. 단군조선의 비파형청동검은 단군조선이 지나와 구별되는 선진 청동문화를 가진 정치세력 집단이었음을 가장 단적으로 나타내는 대표적인 유적유물이다. 이 정치집단의 분포도는 환단고기가 말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와 역사적 강역이 너무도 일치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비파형청동검의 분포지는 만주, 한반도, 중국대륙의 동편으로 환단고기가 설명하고 있는 역사강역과 완전히 일치하며 그 연대도 완전히 일치한다.
열세번째는 고인돌 유적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가 설명하고 있는 고인돌에 대한 기록 또한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을 유적유물로 뒷받침하는 단군조선의 실존적 증거물이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에서는 배달국 신시시대의 장묘문화로부터 고인돌시대 장묘문화와 삼국시대의 장묘문화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환단고기는 이와 같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의 실상을 연대기와 역사기록과 역사강역을 정확히 표시하고 있는 아시아의 대표적 역사서이다.
열네번째는 하북성 중산의 천자명문이다. 하북성 중산묘에서 BC 10세기 것으로 보이는 청동도기 까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천자건방중산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단군조선의 핵심강역인 서요하 지역에서 출토된 BC 22세기의 도자기 부호와 양식이 완전히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BC 22세기부터 BC 10세기까지 북경과 하북성 일대를 다스린 것은 단군조선의 천자였음을 기록한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것이다. 지나인들이 최초로 천자(황제)를 참칭한 것은 BC 221년의 진시황이었다.
열다섯번째는 요녕성의 ‘번한’ 명문이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환단고기가 기록하고 있는 단군조선의 제후국 번한(번조선)의 명문이 나타나 환단고기의 사실성을 증명하고 있다. 요녕성 대집둔 지구에서는 番汗(번한)을 나타내는 ‘番汗’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은 도장이 발견된 것이다. 단군조선은 개국과 동시에 진한(요하지역)과 번한(황하/하북성)과 마한(한반도/만주)등의 삼한(삼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렸다는 환단고기의 기록을 그대로 뒷받침하는 유물유적이 출토된 것이다.
열여섯번째는 남녀조각상과 곰석상 이다. 서요하지역의 적봉시 나사대 지역에서는 환웅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곰녀를 상징하는 남녀조각상과 곰석상이 출토되었다. 서요하 지역의 적봉시 흥산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초기형태가 발견되어 은나라의 갑골문이 흥산문화 담당자들에 의해 전해졌음을 밝히고 있다. 이 흥산문화와 나사대 문화는 대체적으로 배달국 시대(BC 3898년과 BC 2333년 사이)와 일치하고 있다.
열일곱번째는 배달국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3898년 18분의 환웅 중 배달국을 건국한 제1세 거발환 환웅께서 신지에게 녹도문을 창안할 것을 명하고, 배달국의 역사기록을 담당시킨다. 그런데 이 녹도문이 한국의 평양에서도 발견되었고, 산동성의 창성조적비에서도 발견되었다. 평양의 녹도문과 창성조적비의 글씨는 모양과 형태가 배달국의 녹도문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환단고기의 사료가치성이 이렇게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열여덟번째는 가림토문과 일본의 신대문자 이다. 환단고기에는 BC 2181년 제3세 가륵 단군이 을보록에게 정음 38자를 창제할 것을 명한다. 그런데 이 가림토문의 흔적은 지금의 한글에 그대로 남아 있고, 일본의 신대문자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 ‘구주신사’의 가림토문비석이나 ‘이세신궁’의 가림토문청동거울은 한글비석과 한글청동거을이라 명명하면 딱 들어 맞을 정도로 완벽한 가림토문이다. 또 스리랑카 패엽경사 바위글과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역시 그 형태와 내용이 한글(가림토문)과 흡사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열아홉번째는 요하는 압록이고 난하는 요하란 것이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는 지금의 압록강은 ‘동압록’이고,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요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란 사실은 중국요사지리지와 삼국요사도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의 요하가 압록이고 지금의 난하가 요수임은 서토의 고지도 ‘지리도’ ‘연산도’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에도 나타나 있다. 환단고기가 얼마나 정확한 기록을 반영한 역사서 인지를 증명하고 있다.
스무번째는 낙랑군과 낙랑국이다.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는 낙랑군과 낙랑국에 대한 근거를 가장 명확히 설명하고 있다. 낙랑이란 지명이 나타나는 것은 BC 1767년 제13세 흘달 단군, BC 1237년 제23세 아홀 단군, BC 195년 북부여 제1세 해모수 단군, BC 169년 북부여 제3세 고해사 단군 때이다. 특히 BC 195년에는 낙락왕 최숭이 보물을 싣고 마한의 서울 왕검성으로 가는 장면이 적혀 있다. 이때부터 하북성의 낙랑군과 한반도의 낙랑국이 구분되어 나타난다. 환단고기는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다.
스물한번째는 단군조선 12세 아한단군때 가림토로 추정되는 순수관경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을 새겼다는 내용이 환단고기 단군세기와 단기고사에 나오는데, 엄청난 시차를 두고 별이의 사항을 기록함에 위작을 했을리 없는 것이다.
단기고사에는 아한단군과 유위자 선인의 먼 국가장래에 관한 대화속에 “사방국경에 제왕의 명호를 본국의 문자로 비석에 새겨 국문을 영원히 보전케 하시니라”고 기록되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에는 아한단군 52년(BC 1833) 4월 외뿔가진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났다. 추 8월 천제께서 나라안을 순시하시고 요하좌측에 이르러 관경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역대 제왕의 명호를 새겼는바 이것이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다.
스물두번째는 환단고기에 원형 한글을 같은 의미로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라는 표현이 있는데 단군세기의 가림토나 태백일사의 가림다는 각기 다르게 전해져 오는 기록들 가운데 이암은 “가림토”(행촌, 단군세기)를 이맥은 “가림다”(십일당 주인, 태백일사 소도경전 본훈)라는 표현을 참고한 것이다.
가림토는 가림(분별)하는 토대 즉 땅이라는 의미로 그뜻을 택해 토(土)를 썼고, 가림다는 가림하는다(따, 땅)라고 다를 썼으나 같은 뜻이다. 환단고기가 위서라면 한 가지로 표현했을 것이다.
스물세번째는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제4 마한세기상의 “소도(蘇塗)가 세워지는 곳마다 산상웅상(山像雄常)을 보게 되었다.”는 표현에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맥 선생이나, 안호상 박사, 환단고기를 번역한 임승국 교수도 뜻을 잘 몰랐는데, 구길수 선생이 최치원의 천부경 81자는 천부경 81자는 본 천부경 16자(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를 풀어낸 시첩이라는 비밀을 풀어내면서, “남근상이 모셔진 소도”라 풀어 산상웅상이 남근이라는 것이다.
소도는 “솟다”에서 와서 솟터→솟토→소토→소도 나 솟대가 되었고, 소도에 솟은 것은 처음에는 “박달나무로 된 환웅상”인데 그것이 여음(돌무더기로 표현)에 삽입된 남근상(힌두교의 시바 링가)이 솟아 있다는 것이다.
보통 소도에는 큰나무를 세워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신을 섬기게 되었다 한다.
이는 환단고기를 쓴 이가 전해지는 말이나 책의 내용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해 원저본을 그대로 썼던 것이므로,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라는 한 증거이다.
사실상 실증사학을 내세우면서 사대식민사학자들의 전위에 서서 글로써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몰아 붙이던 경희대학교 사학과 조인성 교수도 단군학회가 주최한 1999년 5월 7일 고려대학교에서의 전반기 학술회의 “환단고기의 사료적 검토”에서는 종전 입장에서 한발 물러난 인상을 주고 있다. 그것은 조 교수의 글 제목 자체가 종전에 주장하던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고, “환단고기에 대한 몇 가지 의문”이라고 하였으며, 그 본론의 대전제로 “여러 모로 추론과 잘못이 많을 줄 안다. 많은 가르침을 바랄 뿐이다”라고 후퇴한 듯 의미가 애매모호한 말을 하고 있다.
조교수의 뒤를 이어 교원대의 송호정 교수도 ‘KBS 역사스페셜, 고조선 논쟁(한국일보 2000.11.15, 12.5, 12.9)’에서 본인이 제시한 위와 같은 환단고기 실증 사례 논점에 대하여 반박 할 수 없게 되어서 그런지 몰라도, 재야 사학자를 여러 분류로 나누어 폄하하면서 그 논점에서는 도피해 버리기도 했다.
5. 단군조선 실사의 정립
우리는 위에서 환단고기와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는 위서가 아니며, 사료적 가치성이 명확함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에 따라 명백히 거짓으로 증명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빼고 단군조선의 실사를 적극적으로 광복하는데 이들 사료를 원용하여 복원함에 있어 단군조선관계 사서 가운데 환단고기를 기본사료로 하고, 규원사화나 단기고사, 삼국유사를 그에 준한 사료로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단군조선 47대 2095년의 환단고기 연대기를 따라서 그 전후인 배달국과 열국시대를 연결하는 역사의 흐름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 밖의 신단실기, 동사년표, 조선역사 조선사략, 해동춘추, 제왕운기, 동국통감 응제시주, 동국여지승람, 동국통감, 동사강목, 해동역사, 제왕연대력등을 사료로 하여 전면적으로 재정리하여 통일국사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를 개략적으로 살피면 다음과 같다.
- 단군조선(고조선)의 건국
왕검단군이 단기 원년(BC2334년) 무진 10월 3일(음력) 아사달에서 한민족의 구환 우두머리 800명의 추대로 홍익인간(弘益人間) 광화세계(光化世界)의 신선도를 이념으로 조선을 개국하였다. 최초의 민족개국이라 개천이라고도 부른다.(위서, 삼국유사, 제왕운기, 환단고기, 단기고사, 규원사화 등) 중국 산동성 가상현 남리 자운산아래 무씨사당 석실벽화는 환인천제 환웅천황과 함께 왕검단군의 생활상을 나타내고 있다.
- 단군조선의 영역과 수도
단군조선의 영역은 개천이후 부침이 있었으나, 직․간접지배나 영향을 미치는 등전체를 잡아보면 한반도와 만주, 몽골, 지나중동부, 연해주, 일본등지를 포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 단군기에 의하면 왕검단군때 북쪽으로는 대황(大荒 : 만주북부, 연해주의 흥안령, 흑룡강 유수리강 지역), 서쪽으로는 설유(楔諭 : 몽골지역 훈육), 남쪽으로는 해대(海垈: 중국 산둥성지역), 동쪽으로는 창해(蒼海: 동해)에 이르렀다고 하여 한반도(조선반도)를 포함했다고 했으며 왕검단군의 성교가 점점 크고 넓어짐에 따라 영토도 점차 넓어져 제4대 오사구단군때부터 천하를 9개의 대국과 12개의 소국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한다.
조선족인 한민족을 이룬 부족들은 환인족, 배달족, 맥족, 예족, 동이족, 동호족, 숙신족, 구려족, 탐라족 등인 것으로 사료된다.
지구의 지학구조상 세계의 머리인 백두산 중심의 동북아시아 자리잡은 단군조선의 영토에 대하여 이승휴는 단기 3620년 저작인《제왕운기 (帝王韻紀)》에서 “신라(尸羅), 고구려(高禮, 산서성까지 진출), 남북옥저(백두산․연해주 등 시베리아지역), 동북부여(흥안령산맥․흑룡강 유역포함), 예(穢), 맥(貊, 감숙성까지 포함)까지 포함된다”고 적고 있으며, 이종휘(李種徽)의《수산집동사(修山集東史)》와 어윤적의《동사년표(東史年表)》는 “동은 바다에 면해 있고 북은 흑룡강과 흥안령(興安嶺)이요, 서는 하북성 양평부 즉 난하(灤河, 중국어로 롼허) 하류에 이르고 연주(兗州)와 청주(淸州)즉 북경과 산동지방과 접했으며 남으로는 한수(漢水)에 이르고 진국(辰國)은 본래의 진한(辰韓)즉 단군조선을 말하는데, 단군조선이 멸망한 뒤에 남삼한(南三韓, 한반도 중남부에 있던 마한․진한․변한)도 전례에 따라 진국(辰國)이라고 부른데서 일부 국명에 혼란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의 고기록인《산해경(山海經)》해내북경(海內北經, 단기 1세기 伯益 지음)에서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 바다 북쪼 산 남쪽에 있다“고《사기》조선열전에는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창려(昌黎)에 험독현(險凟縣)이 있고, 요동(遼東)의 험독현은 조선의 옛 왕도이다“는 기록이 있다.
단군조선 남쪽에 관한 기록으로는, 조선 정조 원년(단기 4110년)이덕무(李德懋)가 지은《기년아람(紀年兒覽)》에서 “단군 강역을 고증하기는 어려우나 지금 팔도지지와 견문을 참고삼아 거슬러 추단하면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의 충주․괴산․연풍․진천․음성․직산․제천․단양․청풍 등 9읍이 모두 그 관령이다”라 하고 잇다.
《규원사화》단군기에 따르면 단군 왕검의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쳐서 그 강역이 북으로는 대황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설유를 거느리고 남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으로는 창해(蒼海, 동해)에 이르렀다는 것은 앞으로 본 바와 같다.
왕검단군이 백성을 가르치는 덕이 점점 더 커지고 넓어져서 천하의 땅을 나누어 공적에 따라 아들과 신하에게 봉토할 때에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남국이라 하니 암려홀이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의 땅을 주니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속진국 또는 숙신이라 하였으며 방언에 호장이라 하여 숙신홀을 다스렸다.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동남의 땅을 봉하였는데 산하가 아름답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이라 하여 낙랑홀을 정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에게는 개마국을 주고 여수기를 예의 임금으로 삼았다.
아들 부소, 부우, 부여는 모두 서쪽 땅을 주었는데 이것이 구려, 진번, 부여이다. 그 후에 태자 부루가 동에서 온 선라, 도라, 동무 세 사람을 각지에 봉하였는데 후에 옥저, 졸본, 비류라 한 것이 그것들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단군고기’에는 조선, 시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 맥 등이 단군이 다스리던 구이(九夷)의 구체적 이름이 거명돼 있다.
단기 67년 왕검단군이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우(虞)의 사공(司空, 금천소호씨 때 둔 관직으로 삼공의 하나, 구체적으로는 순임금 밑에서 사공을 하던 우임금 지칭)과 도산(塗山, 堂塗山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안휘성 회원현 회하의 동안, 절강성 소흥현 서북쪽, 사천성 파현의 동쪽)에서 만나게 했다. 이것이 도산회맹(塗山會盟)이다. 도산회맹에서 태자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 오행치수법(五行治水法)과 홍범구주(洪範九疇)를 가르쳐주고 순임금이 자기땅으로 설치했던 유주(幽州, 하북성 順天, 永平 및 요녕성 錦州 서북지역)와 영주(營州, 하북성 및 요녕성 동쪽, 淸州의 동북지역)를 우리에게 속하게 하고, 회대(淮垈)지방(중국의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하남성 일대)에 제후(諸侯)를 두어 나누어 다스리게 하고 순임금이 그 일을 감시하도록 했다.
단기 93년 임금 단제가 유궐(柳闕, 쑥대로 지붕을 한 버들궁전)에 있을 때 토계(土階)가 저절로 생겼으며 국태민안하여 10월에 국중대회를 열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백성들은 모두 기뻐하며 즐겼다. 이로부터 황화(皇化)가 구역에서 먼 탐랑(耽浪, 耽羅〈고을나가 단군기원전 4년에 탐라국 건국〉碧浪國이니 제주도와 일본을 가리킴, 구주지역에서도 고조선 문명 상장인 비파형 동검이 발견됨)에 까지 마쳐 덕교가 점점 크게 퍼졌다.
이때 천하의 땅을 구획하여 삼한(三韓, 辰韓, 馬韓, 番韓)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단군기원 111년 2대 부루단군 때의 국경이 동쪽이 창해(滄海), 서쪽은 요서(遼西), 남쪽은 마해(南海), 북쪽은 서비로(西非路, 지금의 시베리아)에 이르러 큰 민족이 9부, 작은 민족이 14부였다 한다. 단군실사의 고증 연구에 주력해온 재야사학자 이상시 변호사는《규원사화》를 인용하여 단군조선 초기의 남쪽 경계선은 강화도와 북한강을 연결하는 이북지역이었으나, 단기 60년 단제가 남이(南夷)의 환난을 부여황자로 평정케 한 후 환난에 대비하여 부소․부우황자 등 3인황자를 갑비고차(甲比古次, 강화도)에 보내 첨성단과 삼랑성을 축조한 후부터는 한반도가 모두 단군조선 강역으로 편입했다고 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조선 유민(遺民)들이 진한6부를 구성했다가 신라건국의 중심세력이 되었다고 하였다. 단군조선의 성터로는 평양의 3천기가 발굴된 낙랑토성을 비롯 중국의 중동부나 몽골, 만주지역의 단군조선 성터는 길림시 서단산 유적, 내몽고적봉, 이만하지역, 난하, 망도지역, 심양시 정가와자 유적, 대련, 하얼빈, 대전자 성터, 지가영자성터, 집안 석관묘 출토 성터 등 큰 곳만 60여곳이 발견됐다.
단군조선의 영토변경은 그 뒤로 두 차례의 큰 변화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후기 단군조선이 생기면서 정변을 겪고, 주(周)나라 무왕이 영토확장 정책으로 나온 단기11~12세기요, 두 번째는 단군조선이 자주정신의 쇠퇴와 새로운 철기문화의 발전 등으로 멸망하고 열국시대로 돌입하던 때이다.
윤내현 교수는 단기 12세기부터 22세기(서기전 12세기경부터 서기전 2세기)까지 단군조선의 서쪽 국경은 요수(遼水)나 패수(浿水, 강이란 뜻의 보통명사이며 이두식으로는 ‘펴라, 피라, 벌라’라고도 함)라고도 했던 난하(灤河)와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갈석산(碣石山)으로 형성되어 단군조선의 영토가 건국 초기보다 축소되었다고 하였다.
《사기》조선열전(朝鮮列傳)에도 요동지역을 둘러싼 단군조선과 중국의 쟁투에 대하여 “연(燕)이 번창하면서 진번과 조선(번조선)을 속하게 하고 관리를 앉혔으며 요새를 세웠다. 진(秦)이 번창하면서 진번과 조선(번조선)을 속하게 하고 관리를 앉혔으며 요새를 세웠다. 진(秦)이 연을 멸망시켰을 때 진의 영토는 요동 밖까지였다. 한(漢)은 번성 초기에 그 지역을 보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요동을 회복하고 패수(浿水)를 경계로 했다”고 되어 있는데 이 패수를 리지린은 난하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고 유 엠 부찐은 대능하(大凌河, 따링허)라고 결론짓고 있다.
단군조선(고조선)의 수도는 삼국유사(고조선조)와 규원사화, 환단고기 등을 볼 때 47대 단군 2095년 동안 8차례 옮겨졌다. 왕검단군때 4번 그 후 4번이다.
단군조선의 수도 이전에 관하여 일연선사는《삼국유사》에서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 왕검이 요임금과 동시에 아사달에 도읍하고 조선을 개국하였다고 하면서,《고기(古記)》를 인용하여 요임금 50년 되는 해에 단군 왕검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고 일컬었다고 했다. 그 후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 일명 弓忽山․方忽山 또는 今彌達)로, 낙랑홀(樂浪忽)로, 다음엔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서 선화했다고 한다.
단군왕검이 처음 건국할 때는 환웅천황의 배달국(檀國)이라는 이름 그대로 사용하다가 처음 천도하면서 국명을 조선으로 정한 듯하다.
단군왕검이 처음 도읍한 곳은 아사달 백두산 즉 천평산성(삼지연지역)으로 추정되며 국호는 단(檀, 배달)이라 했다가,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단군기원 10년 지금의 길림성 돈화현인 송화강변 소밀성(蘇密城, 완달산 하얼빈설 있음)으로 옮겼고, 단기 23년 경인년에 도읍을 평양(지금의 요녕성 집안현 통구평야 尉邦岩 부근 西京 鴨綠江 神州, 훗날 고구려의 수도 환도산성, 발해상 묘도군도설 있음)으로 옮겼으며 국호를 조선으로 고쳤다. 단기37년에는 흥수로 장당경으로 옮겼다. 단군기원 94년 부루단군은 수도를 다시 환도산성으로 옮겼다.
다음 후단군조선의 첫 단군이요 22세 단군 색불루가 단기 1048년 도읍한 곳은《한서》지리지에서 조선왕의 옛도읍이라고 말한 요동 험독현(險瀆縣)창려 부근이 된다. 다음으로 제34대 오루문단군이 낙랑홀(樂浪忽, 지금의 평양, 발해상 장도설 있음)에 천도하였으며 진번후로 하여금 옛 도읍을 지키게 하였다. 44세 단군 구물(丘勿)은 단기 1908년 한나라의 영향을 받아 장당경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황해도 구월산 당장경(장장평)으로 추정된다. 이곳은 단군 왕검이 단기 37년 갑진(甲辰)년부터 9년 대홍수가 있어 도읍을 당장경으로 임시로 옮겼다가 치수 후 환도한 일이 있었던 곳이다. 맨 나중의 아사달은 환인․환웅․환검(단군왕검)의 삼성사가 있는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文化縣 九月山)으로 추정된다. 왕검단군이나 고열가단군이 모두 선화한 곳이다.
- 마니산 참성단 건축
왕검단군은 단기 51년(BC2282년) 부루태자 등 세 아들과 운사인 배달신에게 강화도에 연인원 8천명을 동원, 삼랑성인 정족산성을 쌓고, 마니산 정상에 천하태평을 기원하는 제천단이자 천문대인 참성단을 쌓게하여 3년만에 완공한데 이어 천제를 올렸다. 지금까지 약 4287년을 전해오는 가장오래된 민족의 성지이자 국보라고 할 수 있는 유물유적이다. 지금 사적으로만 되어있으나, 참성단이나 삼랑성 모두 국보로 승격 지정해야 한다.
- 국제외교, 도산회맹
왕검단군은 단기 67년 태자부루를 지나의 도산(塗山 : 중국 안휘성 회원현 회하의 동안)에 보내 우사공인 우임금을 만나 동맹을 맺었다. 이를 도산회맹이라 한다. 이 도산회맹에서 순임금이 자기 땅으로 설치했던 영주와 유주를 조선에 속하게 하고 회대(淮垈)지방에 제후를 두어 다스리게 하고, 순임금이 그 일을 감시하도록 했다. 부루 태자는 또 홍수를 막을 수 있는 오행치수법, 5복, 3덕, 천상역수(天象曆數) 등 홍범구주를 우사공에게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나오는 순임금, 요임금, 치우천왕은 물론 황제헌원도 동이족이었다.
중국은 진시황이 통일하기 이전은 정체성이 확립되지 못했고, 그 상고사는 사실상 동이족의 고대사가 주류를 이루었다.(書經, 환단고기, 규원사화)
- 정음 가림토 제정
단군조선 초기에 백성들은 지방마다 풍속과 말이 다르고, 상형표의문자가 있었어도, 의사소통이 쉽지 않았다. 이에 단군조선 3세 가륵단군이 단기 152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바른소리) 38자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를 가림토(加臨土), 산수가림토, 가림다, 가림땅글, 또는 가리기 표음문자라고도 한다. 이 가림토문자는 세종대왕이 재창제하여 한글인 훈민정음 28자의 원형이 되었다. 단기 3779년 제정반포된 훈민정음이 정음인 가림토를 모방하여 지었다는 것은 조선왕조세종실록, 정인지의 훈민정음 서문, 신경중의 ‘세종대왕 훈민정음’ 기술등에 나와있는데, 조선실록 세종 24년 12월초에 “상감께서 언문 28자를 옛전자는를모방하여 지었다(字倣古篆)”고 기록되어 있다.
신지 녹도문자가 발전하여 하나는 가림토가 되고, 다른하나는 갑골문자, 금문을 거쳐 동이족인 창힐에 의하여 한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 몽골왕 처음 임명 등 국제관계
단군조선 처음으로 동서 600칸, 남북 100칸의 큰 궁궐 건청궁(乾淸宮)을 건립하고 평양성을 쌓은 4세 오사구단군은 단기 196년 그 동생 오사달을 몽고제후왕인 몽고리한(蒙古里汗)으로 임명하였다. 이분이 몽골족의 시조이다.(환단고기, 단기고사)
몽골인들은 한국인을 솔롱고(무지개처럼 아름다운 사람들)라고 부르며, 이웃 4촌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는 고대로부터 죠몽문화(무문토기, 돌널무덤, 관옥, 마제석검 등) 야요이 문화(벼농사, 고인돌, 무문토기, 청동검, 세형동검 등)가 교류했는데, 이는 단군조선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3세 가륵단군 10년인 단기 160년에 두지주 예읍(濊邑)이 반역하자, 여수기에 명하여 그 추장 소시모리(素尸毛梨)를 참했다. 그 땅을 소시모리 또는 소머리국(牛首國)이라한다. 그 소시모리의 후손인 섬야노(陝野奴)가 바다로 도망쳐 삼도(三島, 지금의 일본)에 웅거하여 천왕이라 참칭하였다. 이것이 일본국의 시작이다. 이는 일본 국조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의 동생 스사노(素盞鳴尊)가 소시모리(根國)에 간 사실과 일치한다. 일본에는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신 신사와 옥산신궁 등 단군왕검을 모신 신사도 있다. 35세 사벌단군 50년에는 언파불합 장군(日本 神武天皇의 부친 彦波不合尊)을 웅습(구마소. 日本 구주지방 곰족이 살던 지역)보내 난리를 평정하여 다스리게 했다.
36세 매륵단군 38년에는 단군이 섬야후(陝野候) 배반명(日本書紀의 니가히야히노미꼬도)으로 하여금 전선 5백척을 거느리고, 삼도를 쳐 모두 평정하여 다스렸다. 이는 한민족 조상들이 고대사에 있어 일본으로 건너가 그 조상이 되었다는 초기기록들이다.
사실 몽고족, 일본족, 선비족, 흉노족등은 단군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동이족 지류들이다. 흉노(Hun or Hung)족은 훈죽, 곤이, 북적, 융적, 산융 등으로도 불렸다.
흉노의 시조는 열양(列陽. 황하 북쪽 난하 지역)욕살 색정(索靖)이었다.
3세 가륵단군 3년에 단군이 색정을 약수(합려산근처에서 고비사막으로 흐르는 강)에 유배했다가 사면하여 그 땅에 한(汗)으로 봉하였다.
몽골리안이며 흉노족의 지류인 돌궐(突厥)족은 동이족으로서 처음 알타이 산맥근처 몽골지역에 살았는데, 23세 아흘단군 12년 사절들이 방물을 갖고 찾아와 후대를 받기도 했다(단기고사, 환단고기, 일본서기, 규원사화). 지금의 터키족이다.
36세 매륵단군 26년 몽고대부 환선(桓善)을 명하여 몽고의 제후로 삼았다. 이 돌궐족은 서쪽으로 진출하여 오스만터키제국을 건설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아타투르크 즉 무스타파케말에 의한 영도로 부국강병의 터키공화국을 이루었다.
- 구을단군릉 발굴․개건
단기 4326년(서기 1993년)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에서 단군릉이 발굴되었다. 여기서는 단군과 단군비의 것으로 보이는 사람실물크기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북한정부는 이를 크게 개건하여 민족의 성지로 성역화하였다. 환단고기와 단기고사에는 구을단군이 강동 대박산에 묻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대박산 단군릉이 왕검단군릉인지 구을단군릉인지는 아직 분명하게 밝혀지지는 않았다.
- 하늘에 새긴 고대사 5성취루
13세 흘달(屹達)단군 50년(BC1733년)에는 5성취루(五星聚婁)라고 5개의 별이 루성 주변으로 모이는 천문학상 독특하고도 장쾌한 현상이 벌어졋다.(단기고사. 환단고기) 이것이 현대에 와서 서울대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와 라대일 박사 등에 의하여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역사적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박창범교수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환단고기, 규원사화, 단기고사 등에 나오는 고대의 천문현상 일식, 월식, 지진, 두해가 뜸, 태풍, 가뭄, 홍수, 썰물 등을 컴퓨터 역추적방법 등으로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를 찾아내 확인해 줌으로서, 삼국사기 초기기록,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 사서의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게 하고 신빙성을 늘였을 뿐 아니라, 첨성대, 천문대 고인돌 등과 함께 우리나라가 세계최고(最高)의 천문왕국이라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참고.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 색불루단군의 쿠데타와 후단군조선
전단군조선의 마지막소태단군은 후단군조선의 첫 번째 단제이자 전체로서는 22세인 색불루 단군의 정변에 의해 무너졌다.(단기 1078년)
소태 49년 개사원 욕살 고등(高登)이 귀방(은나라 서북지역)을 멸하고 세력이 강성해 지자, 소태단군에게 우현왕이 되게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
소태51년 고등이 개성에 웅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소태단군이 고등을 우현왕에 봉하고 호를 두막루라 했다.
소태52년 우현왕 고등이 죽자 그 자손 색불루가 이어서 우현왕이 되었다. 소태단둔이 5가를 소집하여 단군지위를 계승문제를 의논하되, 기자(奇子) 환서여(桓西餘 또는 서우여)에 넘기려 했으나, 색불루가 중지를 권고했으며, 이를 소태단군이 받아들이지 않자 색불루가 정변을 일으켰다. 색불루는 사냥꾼 수천(쿠데타군)을 거느리고 부여의 신궁에서 단제로서 즉위하였다.
색불루단군은 19세 단군 구모소(종년)의 아우 종선(청아왕)의 종손인 환서여 즉 기자를 번조선의 비왕으로 임명한바, 기자조선(奇子朝鮮)이란 말이 생겼으나, 은나라 삼현의 하나인 기자(箕子)와는 관련이 없다. 색불루단군은 장당경에 고등왕묘를 세우고, 제사를 지냈으며, 이는 단군조선은 물론 고구려가 받아들여 제사가 계속되었다.
- 주나라와의 외교관계
부루단군 31년(단기124년)단제의 명으로 숙신의 사신이 주나라 성왕을 방문했으며, 성왕은 사신에게 책서를 내렸으며 주무왕이 상을 멸망시켰을 때에도 숙신의 축하사절이 주왕실을 방문하였다. 서경 한혁편은 BC9세기경 단군조선 통치자가 서주(西周)왕실을 방문하여 매우 환대받음을 전하고 있다. 이때 서주 선왕은 단군조선의 영토가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맥국이 있었던 난하까지를 인정하였고, 단군조선의 환심을 사기위하여 그의 종질녀를 단군조선 통치자에게 출가시켰다. 주나라 하왕은 단기 1247년 단군조선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고, 단기1390년 마휴단군때도 공울을 바쳤으며, 단기 1580년에 주나라 평왕이 막조선 비왕 사우에게 새해인사를 하였다.(竹書紀年. 周紀. 桓檀古記)중국 서주목왕 시대에 서국(徐國. 徐州中心) 언왕(偃王. BC1002~94)의 설화는 말에서 태어나고 활을 잘 쐈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고주몽 설화와 동일할 가능성이 있다. 서언왕은 주의 목왕을 쳐 포위하기도 해 36제후국을 포섭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서국은 43세 물리단군때 남후(藍候) 검달(儉達)등이 은나라를 물리치고, 청주땅에 엄(奄)국을 세우고(뒤에 노나라가 됨) 양자강 북쪽 서주(徐州)에 서국을 세웠는바, 뒤에 서언왕의 나라가 되어 200여년간 사직을 계속하였다. 후세 비류와 온조의 어머니 소서소(徐氏乃)도 서국출신으로 알려졌다.(문정창지음. 한국고대사, 박물지)
- 구물단군의 대부여
43세 물리단군때 융안의 장수 우화충이 반란을 일으켜 단제 등이 해두로 도피하자, 백민성 욕살 구물이 병을 일으키고 민과 어울려 우화충을 참하였다.
구물이 제장의 추대를 받아 장당경에서 단군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 하였다.(단기 1908년 BC425년) 3한으로 관경하던 것을 3조선으로 관경하였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삼국유사나, 동사보유등에서 단군의 수명을 1908세로, 기년아람에서는 1048 혹은 1908세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보통 한 사람의 수명이 그렇게 길수는 없는 것인바 1048년은 전단군조선의 기간(왕검단군부터 소태단군까지)이요, 1908년은 단군조선 건국부터 구물단군의 국호 채택전까지의 기간이다.(규원사화, 단군세기)그러면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4군의 실상은 어떻게 된 것일까?
- 기자․위만조선의 실상과 단군조선의 쇠망
이병도 교수 이래 실증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내면적으로 사대식민사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은 고조선이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으로 이어지고, 한사군으로 넘어갔으며, 모두 한반도에 있었던 것으로 기술하고 학교에서도 보통 그렇게 잘못 가르치고 있다. 기자(箕子)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고, 동이족인 기자의 41대 후손인 기후가 8백년 뒤 단군조선의 제후국인 번조선(지금의 요녕성)의 비왕이 된 일은 있었다. 번조선을 빼앗은 위만도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상투를 틀고, 동이옷을 입었다”는 기록등으로 보아 동이족으로 추정되고 한무제가 설치한 한4군도 번조선 지역인 요동지역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를 토멸하자, 은나라 3현중의 하나이며, 동이족인 기자(箕子)가 태행산 서북쪽에 피해있다가 솔나단군 37년(단기 1219년)에 서화(西華, 하남성 서화지방)라는 곳에 은둔하였다. 기자의 이름이 번조선의 첫비왕인 기자(奇子)서우여와 비슷하므로, 후세에 모화사대주의자들이 기자조선(箕子朝鮮)을 날조해내는 빌미가 되었다. 단군조선이 멸방하고 북부여 해모수 단군이 즉위하자, 기후의 아들이며 번조 선왕인 기비(箕丕)가 해모수와 밀약하여 북부여 건국에 협력하는 대신, 북부여 제후국으로서의 번조선왕으로 인정받았다. 번조선왕 기비가 단기2112년 죽자, 단군 해모수는 기비의 아들 기준(箕準)을 번조선왕으로 봉했다. 그때 요동지방 연(燕)나라 노관이 한나라에 반대하여 흉노로 들어가고, 그 일파인 위만이 무리 1천명을 이끌고 기준으로 한의 침략을 방어해주겠다고 속이고 운장(雲障)을 차지한 다음, “한나라가 쳐들어오니, 궁궐을 지키겠다”면서 번조선 궁궐로 쳐들어가 기준의 정권을 빼앗았다. 이때 번조선 말왕 기준은 바다로 나아가 지금의 서울지역에 한터마한을 세웠고, 이것이 뒤에 목지국인 직산마한으로 바뀌었다. 한편 번조선의 제가들은 상장 탁대(卓大)를 받들어 탁대의 고향인 익산에 건마국(乾馬國)이라고도 하는 익산마한(益山馬韓)을 세웠다.
요녕성 지역의 위만조선은 차왕에 이어 우거왕이 다스렸으나, 한무제가 침입하자 니계상 삼(參)의 무리가 우거왕을 살해하고 한에 항복함으로서 멸망되었다. 한무제는 우거조선의 삼(參)등 지배계급을 제후로 봉하면서 한4군을 설치했다. 낙랑(樂浪), 현도, 진번, 임둔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진번․임둔은 단기 2251년 폐지되었고, 요동지방에 있던 낙랑․현도는 단기 2539년 공손강(公孫康)이 낙랑군 남부를 분할하여 설치했던 대방군(帶方君)과 함께 고구려의 공격으로 단기2541년부터 2548년 사이에 모두 격파되었다. 그 뒤 고구려가 난하유역까지를 모두 차지함으로써 단군조선의 고토를 다물하였다. 이 단군조선의 쇠망과정 은 다음과 같다.
북부여의 해모수가 북부여를 세운 이듬해 게해년에 고열가단군은 어질고 부드러우나 결단성이 없고 명령이 많아도 시행되지 않으며 장수들은 용기를 믿고 자주 환란을 일으키고, 나라살림은 늘지 않고, 백성의 기운이 날로 떨어졌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3월 어천일 저녁에 단군은 5가회의를 소집하여 “옛 우리 열성조께서 나라를 여시고 대통을 이어갈 때 잘 다스려 덕화가 널리 미쳤으나 지금 왕도는 쇠미하고 짐은 덕과 능력이 없어 제한(諸汗)이 다투고 백성들이 흩어지니 5가는 현인을 추대하라”고 하고 옥문을 크게 열어 사형수 이하 죄수들을 놓아보냈다. 이튿날 고열가단군은 단군자리를 버리고 아사달산으로 옮겨 산에 들어가 신선도를 닫았다. 이로써 단군 왕검께서 나라를 여신 지 47세 2095년 만에 단군조선은 쇠망하였다(고열가단군 계해 58년, 서력기원전 238년, 전단군조선 1048년과 후단군조선 1048년을 합치면 1년이 중복되어 2095년이 됨). 막조선도 막조선 17대 비왕 맹남(孟男)으로 진조선과 함께 막을 내리니 웅백다 마한으로부터는 제35대인 셈이다.
이에 5가들이 국사를 6년 동안 다스렸으나(共和政), 북부여 해모수단군이 무리를 이끌고 고도의 5가들을 회유하여 공화정치를 철폐하게 하였다(단기 2101년). 이에 해모수는 나라사람이 추대하여 단군이 되었다. 단군조선의 단군세계는 다음과 같다. ()안 숫자는 재위기간이다.
1. 왕검(王儉, 93) 2. 부루(扶婁, 58) 3. 가륵(嘉勒, 45) 4. 오사구(烏斯丘, 38) 5. 구을(丘乙, 16) 6. 달문(達門, 36) 7. 한율(翰栗, 54)
8. 우서한(于西翰, 8) 9. 아술(阿述, 35) 10. 노을(魯乙, 59) 11. 도해(道奚, 57) 12. 아한(阿漢, 52) 13.흘달(屹達, 61)
14. 고불(古弗, 60) 15. 대음(代音, 51) 16. 위나(尉那, 58) 17. 여을(余乙, 68) 18. 동엄(冬奄, 49) 19. 구모소(緱牟蘇, 55)
20. 고홀(固忽, 43) 21. 소태(蘇台, 52) 22. 색불루(索弗婁, 48) 23. 아홀(阿忽, 76) 24. 연나(延那, 11) 26. 추로(鄒魯, 65)
27. 두밀(豆密, 26) 28. 해모(奚牟, 28) 29. 마휴(摩休, 34) 30. 내휴(柰休, 35) 31. 등흘(登屹, 25) 32. 추밀(鄒密, 30)
33. 감물(甘物, 24) 34. 오루문(奧婁門, 23) 35. 사벌(沙伐, 68) 36. 매륵(買勒, 58) 37. 마물(麻勿, 56) 38. 다물(多勿, 45)
39. 두홀(豆忽, 37) 40. 달음(達音, 18) 41. 음차(音次, 20) 42. 을우지(乙于支, 10) 43. 물리(勿理, 36) 44. 구물(丘勿, 20)
45. 여루(余婁, 55) 46. 보을(普乙, 46) 47. 고열가(古列加, 58)
- 단군조선의 청동기 등 유물유적
단군조선의 유물유적은 앞에서도 일부 살펴보았지만, 많이 남아있는 것은 옛성터 청동기, 미송리형토기, 고인돌, 암각화 등이다. 단군조선의 성터로는 거대한 평양의 낙랑토성을 비롯한 제성과 만주, 몽고, 지나, 중동부등에 산재해 있는 길림시 서단산유적, 내몽고 적봉성터, 이만하지역, 난하지역, 망도지역, 심양시 정가와자유적, 대련지역, 하얼빈 대전자성터, 지가 영자성터, 집안석관묘 출토 성터등 큰 성터만 60여곳이 발견됐다. 단군조선시대 유물로 보이는 암각화는 현재 남한에서 경상도를 비롯 전라도, 충청도 등 16개 지역에서 발견됐다.
신석기,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 이들 암각화는 사람, 짐승, 새, 물고기 등이 그려진 경우도 있고(울산 반구대 암각화),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경우도 있는데, 특히 동심원문양이나 별모양을 그려 천체를 나타낸 암각화도 있다.(고령 양전리, 함안 도항리 암각화)
단군조선의 농경지역주거는 원추형과 장방형 혈거와 반혈거가 주였으며, 생활용구는 빗살무늬질그릇, 무문토기, 채색토기, 흑색토기, 화분형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단군조선의 무덤은 움무덤,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토강묘, 고인돌 등 다양했다. 고인돌은 무덤이고 고고학적, 천문학적 암석이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BC30세기부터 2세기경까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는 세계고인돌의 절반을 소유하고 있는바, 특히 청원군 아득이 마을 고인돌은 천문별자리돌판으로 유명하고, 평양 문흥리, 웅덕리 등 10개지역, 30여기의 고인돌이 있는 강화지역, 경기파주군 옥석리, 전라도 고창, 화순지역, 대구 대봉동 지역 고인돌이 유명하다.
우리나라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귀중하여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세계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단군조선의 금속문화는 대체로 전기 청동기시대(전 단군조선), 후기 청동기시대(후 단군조선), 철기시대(국호를 대부여로 고친 44세 구물단군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시초에 관하여 단국대학교 윤내현 교수는 서기전 2천 4백년경으로 잡고 있으며, 북한의 황기덕 선생은 서기전 2천년대 초까지 소급하고 있고, 북한의 학자들은 대체로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 출현을 서기전 3천년대와 2천년대의 어간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남한에서는 그보다 늦은 시기인 서기전 8세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단군조선이 건국할 즈음인 서기전 24세기경에 청동기문화가 시작되어 차츰 발전되어 간 것 같다.
이 청동기 문화는 황하유역 청동기문화, 시베리아의 카라수크 문화, 오르도스 문화와 일본의 야요이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초기 청동기문호가 가장 많이 분포된 지역은 요동지역과 압록강 하류 평안북도 지역으로, 쌍타자(雙砣子), 평북 용천군 신암리유적,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 평양시 금탄리, 평북 침촌리, 석교리와 황해도 봉산군 신흥동 유적 7개 거주지에서 청동기 유물이 나왔다. 그 밖에 두만강 하류의 함경북도와 길림성 동부지역 50개이상 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굴됐으며 특히 함북 초도에서는 청동제 방울․바늘․통․종 등이 발견됐다. 특히 유명한 것은 황해도 봉산읍 신흥동에서 출토된 청동 반달칼과 황해도 송림시 석탄리에서 출토된 청동별도끼이다. 후기 단군조선 청동기문화 특징의 하나는 식기나 술잔 등에 비하여 청동거울, 청동검, 청동방울 등 신선도와 관련된 종교도구가 많이 발견되는 점이다.
비파형청동단검은 단기 13세기 요동지방에서 발원하여 계속 발전하였고, 단기 20세기경에는 일본 구주지방까지 전파되었는데, 청동단검이나 대표적묘제인 돌널무덤이나 돌곽무덤 등 돌무덤안에서 출토되었다. 단군조선의 대표적인 신기(神器)이며, 지배계층의 상징인 청동거울은 처음엔 뒷면에 무늬없는거울이 나오고, 이어서 잔줄무늬거울이라는 기하무늬 거울이 발달했다.
기하무늬거울은 황해도, 충청남도, 경상북도, 평안도에서도 발견되었다. 후기 청동기문화가 많이 발굴된 첫 번째 시기는 단기16~17세기로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동굴(11구의 유골, 질그릇, 항아리, 청동기도끼, 돌곡괭이, 화살촉 등 발굴)여순 토성자시 유물(비파형동검 발굴)등이다. 미송리동굴의 질그릇은 미송리형 토기라하여 단군조선을 대표하는 그릇이 되었다.
두 번째시기는 단기 17~19세기로 평안북도 개천군 북방리(고인돌 양식무덤, 솥단지, 반달모양단검, 화살, 붉은색 질그릇)와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유적, 제2층 요녕성 조공가(趙公家)유적 등이다.
세 번째시기는 단기 19~20세기로 황해도 송림시 석탄리 유적(별모양도끼, 손도끼, 곡식가는 용구 등 발굴), 평안북도 북창군 대평리 유적, 요서 하가점 유적을 비롯 요령성 이도하자 유적(비파형동검에서 좁은 놋단검으로 형태 변화), 요녕성 조양(朝陽) 십이태영자 고대 3기 무덤유적(비파형동검, 청동도끼, 청동화살촉, 청동칼, 재갈, 다뉴청동거울 등 발굴)등이 그것이다.
단군조선 후기 청동기문화에 있어 미송리형 토기(질그릇)는 요하, 압록강, 대동강, 송화강 등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고, 청동도끼나 비파형동검은 요하와 청천강 사이에서 주로 나타나며, 대동강과 한강지역은 좁은놋단검이 보급된 주요지역이라 할 수 있다. (끝)
출처: 한배달과 동방의 등불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