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책으로 도망쳤을까>
흐름
오늘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책을 게걸스럽게 읽어댔다. 꼭 책에 며칠 굶은 사람처럼 그랬다. 그렇게 책을 마구잡이로 읽은 지 며칠 됐다. 첫날엔 내가 이렇게 갑자기 책을 많이 읽는 이유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냥 책을 읽을 때마다 책 위를 기웃거리는 봄 햇살이 좋아서, 읽고 싶은 책이 많아서,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좋아서 그런 거라고 넘겨짚었다. 평소에도 책과 가까이 지내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 이유를 딱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시집부터, 소설책, 논픽션, 얼마 전에 인터넷으로 구독신청한 글까지... 장르도 다양했다. 한 권을 진득하게 읽는 게 아니라 어떤 책을 읽다가도 다른 책이 읽고 싶으면 곧장 일어나 책장 앞에 섰다. 그리고 읽고 싶은 다른 책을 펼쳐서 읽다가 또 덮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책을 읽었다. 이 행동이 의뭉스러워졌던 건 바로 오늘이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 읽고 싶은 책이 많아진 걸까. 왜 예전에 한 번 읽었던 책까지 소환해서 다시 읽는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많은 양의 책을 갑자기 읽어내려가는 일은 내가 불안하고 힘들 때 하는 행동이었다. 작년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작년에 나는 개인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 내게 가족, 친구, 주변 어른들은 물었다.
“너는 취업은 언제 할 거야?”
내가 졸업을 하고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이 그들 눈엔 취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으로 보였나 보다. 사회에서 아르바이트는 어쩐지 ‘회사에 정식으로 취업하는 일’보다 한 단계 낮은 일로 여겨지는 듯했다. 내가 선택한 일이었고 아르바이트가 충분히 내 생계를 유지해 주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취업을 하기 싫어’ 도피하는 수단으로 보는 주위의 시선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주변 사람들이 내게 그런 시선을 보냈으니까.
작년에 전공을 살려 취업하는 대신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유는 내게 시간을 주고 싶어서였다. 적어도 회사보다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 확실히 저녁 시간이 주어질 거라 생각했다. 졸업하고 생활비가 필요했는데 때마침 자주 가던 단골 카페에서 같이 일을 해보자고 제안했던 이유도 있었다. 일을 하면서 편집자라는 직업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 고민하면서 독립출판물 만들기 수업을 들었다. 취업 준비를 하거나 취업한 친구들 틈에서 나만 혼자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편집자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직업인지 확신이 부족했던 그때도 지금처럼 책을 읽어댔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무작정 책을 샀다. 월급을 받고 서점에 가서 책을 13만원치 산적도 있으니 말 다 했지, 뭐. 그때 책을 계산하던 서점 직원은 놀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책을 참 좋아하시나 봐요.”
나는 왜 힘들고 불안할 때마다 책을 찾는가. 아니, 책으로 도망치는가? 작년의 나도 내가 힘들 때마다 책으로 도망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스로 이건 건강한 도피라며 위로하기도 했지만 그 이유를 제대로 알고 싶었다. 나에게 도대체 책이 뭐길래 그렇게 하는 건지 궁금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 답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책 속 인물의 다양한 삶이 읽을 수 있는 게 좋았다. 한 날은 소설 속에서 무용대회 예선전에서 번번이 떨어지는 현대 무용가 지망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편집자를 꿈꾸는 지망생으로서 공감을 얻기도 했다. ‘봄에 날씨가 춥다고 해서 우린 그때를 봄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라고 쓰인 문장을 보면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는 지금도 어쩌면 계절로 치면 봄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접근이 용이하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는 책은 ‘어떤 목소리’ 듣는 일이라고 했다. 그 작가의 말처럼 책은 어떤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마음이 힘들고 쓸쓸할 때 친구와 만나서 수다를 떨면 그 고민의 무게가 조금 덜어지는 것처럼, 책도 내게는 같은 맥락이었다. 출판사에 취업이나 할 수 있을까 싶어 미래가 캄캄하게 느껴지는 날에는 누군가가 써내려간 일상이 담긴 에세이집을 읽었다. 미래를 향한 두려움은 제쳐두고 가만히 글쓴이의 일상에 귀 기울이다 보면 우울은 전보다 조금 잊혔다.
그럼 책으로 나를 도망치게 만들었던 불안의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몇 달간 일을 구하면서 겪었던 실패 때문이었다. 나는 지난 12월에 책이 좋아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어서 상경했다. 수업을 들으면서 책과 관련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어서 서점과 교정교열을 필요로 하는 아르바이트에 많이 지원했다. 돈이 필요했고 출판사로 바로 취업하는 것보다 관련 아르바이트를 구하는 일이 진입장벽이 좀 더 낮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좀 더 여유롭게 편집자가 되기 위한 역량을 쌓고 싶기도 했다. 책도 더 읽고 싶었고 글쓰기 수업도 하고 싶었다. 내게 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아르바이트니까 출판사에 편집자로 취업하는 것보다 훨씬 쉬울 것이라고 얕잡아봤다. 나는 그 사실이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아르바이트’에도 자꾸만 떨어진다는 사실에 자꾸만 작아졌다. 그 지점이 중요했다. 출판사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는 것보다 지원한 아르바이트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을 때 더 자존심 상했다. 그건 작년에 주변 사람들이 내게 보냈던 시선을 내가 나에게 다시 보내는 일이었다. 시선은 ‘아르바이트’에 떨어지는 내가 아니라 지난 몇 달간 낯선 서울에 와서 이곳저곳에 지원하느라 지쳤던 나에게 둬야 했다. 어쩌면 그 시선이 내가 책으로 도망치는 일을 조금 멈춰줄 수 있을지 몰랐다.
첫댓글 책으로 게걸스럽게/도피하길 즐기는 저로서는 흐름이 무지 반가워요
한편 맘속에 찜찜함이 있는 것도 비슷하네요. 또르르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이 만나서 이야기나누면 얼마나 재미나게요!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몰라 방황하는 지금도 어쩌면 계절로 치면 봄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위로했다,,
흐름의 심장이 뛰는 봄이 전해지는 문장이네요. 곁에서 함께 봄이고 싶은 모험입니다.
저도 종종 책으로... 책 밖은 위험해! 이러면서요.
‘회사에 정식으로 취업하는 일’ 이런 일이 가능한지 모르겠어요. 정식으로 취업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저는 무엇이 계속 불안할 걸까요.
흐름글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저도 흐름과 비슷한 결의 불안을 품고 있는 요즘이라 참 공감이 많이 됐어요. 불안할 때 책으로 도피해서 쉴 수 있다는 것이 어떤날은 위안이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글 잘 읽었어요 ㅎㅎ
흐름의 글을 보면 그 시절 제 모습이 생각나요 (너무 라떼..스러운 발언인가요). 지금의 불안 조차도 예뻐보이는 이유는 뭘까요. 그리고 그럴 때 마다 책으로 도피하는 거, 너무 바람직한데요 엄지척.
저는 불안할 떄 책으로 도피하고, 불행할 땐 글로 도피해요. 그런데 그렇게 피해도 결국에 그속에서 만나는 건 저더라고요. 그러니까 도피한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는 거 같아요 흐름님. 결국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일 겁니다.
저도 힘들 때 책 속으로 파고들곤 하는데, 앞으로 제가 살다가 지친 날, 흐름이 만든 책을 읽으면서 위로받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