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31)
31 They answered, “Believe in the Lord Jesus, and you will be saved—you and your family.”
주일이 되면 성경 챙겨 들고 교회 가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독인은 세상과는 다른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을 이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그 나라의 영생을 소망합니다.
그들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 나라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 정의와 생명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또 매사에 자신을 부정합니다.
세상 사는 일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을 노상 시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도 이런데 영생에 이르는 길에 인간의 역할은 없습니다.
십자가 외에 구원의 길이 없음을 믿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내 생명을 위해 주님께서 생명을 내놓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태껏 그런 이타적 희생 행위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고난 자체가 우리를 향하신 사랑의 내용입니다.
또 그 십자가 고난의 동기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믿음
바울은 예수님의 그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빌립보 지역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특별한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여인은 귀신 들려 있었습니다.
혹시 귀신 들린 사람을 가까이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목회하다가 그런 사람들을 처음 보았습니다.
낫자루를 손에 들고 한길을 활보하며
찢어진 옷에 속살을 드러내고
침을 질질 흘리고
실실 웃으며 벽을 보고 이야기 하며.......
만약 제 자식의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그 부모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그들은 딸에게서 귀신을 몰아내려고 집을 몇 채 팔았을 것입니다.
안 가본 병원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노력에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딸은 결국 남 점쳐주는 무당이 된 것입니다.
그 귀신의 능력은 탁월했습니다.
한 번에 바울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이 귀신이 바울을 참견했는데 바울을 이 귀신을 향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던 것입니다.
18. 그 여자가 여러 날을 두고 이렇게 하므로, 바울이 귀찮게 생각하고, 돌아서서 그 귀신에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니, 이 여자에게서 나오라" 하고 말하니, 바로 그 순간에 귀신이 나왔다.(행16:18)
그 마을 사람들은 여태껏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이방인 바울의 입에서 예수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 한 마디에 귀신은 여지없이 쫓겨갔던 것입니다.
그 한 마디를 듣더니 이 여인은 제 옷을 가다듬었고 얼굴로 흐르던 침을 닦아 냈습니다.
그 녀가 말짱해진 것입니다.
그 녀의 어머니는 제 딸을 다시 확인해 보고 다시 확인해 보았습니다.
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던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이름 앞에서 그 끈질겼던 귀신이 줄행랑을 놓는가!
소망
사람들은 눈 앞에 차려진 밥그릇은 보이지만 내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누구에게나 내일은 쉬지 않고 또다시 오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봉사가 되어서 내 앞에 계속 펼쳐지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중입니다.
그렇게 가는 오늘 저녁 길에 로또에 당첨될지 혹은 타고 가던 자동차와 함께 뒤집어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일들이 얼마나 궁금하겠습니까!
이 여인은 빌립보 지역 사람들의 그 궁금증을 후련히 씻어줄 수 있었습니다.
이 여인 안의 귀신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이 복권 살 때인지 물으려고 여인의 집 대문 앞에 줄 서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돈 냄새를 귀신같이 맡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돈귀신들이 여인을 소유했고 복비를 제대로 제대로 챙길 회사를 차린 것입니다.
16. 하루는 우리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점을 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점을 쳐서, 주인들에게 큰 돈벌이를 해주는 여자였다.(행16:16)
이 빌립보 지역에는 이 여인의 어머니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녀는 눈만 뜨면 딸 때문에 가슴을 쳤습니다.
저 귀신 좀 튀어나갔으면.......
바로 이웃집에는 이 딸로 사업을 하는 주인들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주인들의 소망은 이 땅의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돈 버는 일은 귀신같이 알았습니다.
그들은 고급 승용차 몰고 다녔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이 주인은 눈만 뜨면 제 가슴을 쳤습니다.
이것이 귀신에 충만했으면.......
그래서 내일 일만 보일 것이 아니라 모레 글피 일도 오늘 일처럼 잘 보일 수만 있다면.......
그들은 썩어질 이 땅의 소망에 몰빵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또 제 배만 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들은 나 말고 남에게도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20세가 되어 사랑에 빠지고 싶은 소망
결혼해서 사랑하는 자녀를 가지고 싶은 소망
휴일이면 김밥을 싸서 식구들을 챙겨 들놀이 가고 싶은 소망.......
어머니의 소망과 주인들의 소망!
빌립보 지역에는 그 상충 되는 소망이 옆집에 어울려 함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썩을 소망이 빌립보 지역에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거라사 지역에서도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땅을 밟자 귀신부터 쫓겨갔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이 그 군대 귀신에게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릅니다.
그를 쇠사슬로 묶어두고.......
그런데 그 독재 귀신이 튀어 나갔다고 마을 사람들이 좋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이 거라사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돼지 떼가 모조리 바다에 빠져 죽었는데 이번에는 마을 소 떼가 염려가 되었습니다.
거라사 사람들의 돼지와 소 떼에 대한 소망이 예수님을 그 지역에서 쫓아낸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당시 그 마을에 고전 한 권이나 제대로 읽은 사람이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참 무지했던 시대였다고 말할 것입니다.
문명화된 이 거창 땅은 다를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가?
뉴스를 보니 사단장은 부하들에게 빨간 해병대 운동복을 입고 급류에 들어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일로 남의 자식이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남의 아들들의 존재를 규정했습니다.
이 일은 이 사람이 제 별 두 개에다가 폼나게 별 하나 더 붙이려는 소망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말입니다.
뉴스를 보니 그것은 네 바퀴 위에 따발총을 얹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왠만한 책은 간단히 암기해 버리는 천재들이 만든 것입니다.
한 100Km/H로 쏜살같이 달려 다니면서 아군과 적군을 식별한 다음 사람을 쏴 죽이는 Ai 기계였습니다.
그것이 “쓰으윽 쓱” 기계눈깔 돌리는 소리를 내면서 여러분 앞으로 서 있다고 생각을 해봅시다.
Ai 눈깔이 나를 판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드르르륵!
갈겨버릴 대상인지 아닌지.......
그런 것을 만들어 놓고 좋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을 향해 잘못 갈기면 누가 책임질까?
인류는 종말이 가까울수록 생명 죽이는 일에 사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과학 문명은 인간의 존엄 그런 것을 주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빌립보 지역에는 주로 점쳐주고 돈 버는 주인들 점치러 가는 사람들이 살았습니다.
거기에 딴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이 등장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소망하는 바울이 등장한 것입니다.
다른 소망을 전하는 것은 목숨 거는 일임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바울은 거기에서 죽을 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아 나가라!”
그러자 정말로 일 났습니다.
그 한 마디에 귀신이 쫓겨가고 만 것입니다.
귀신이 쫓겨가자 최소한 모레 일이 보이던 여인은 내일도 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깜깜해지고 말았습니다.
주인들의 회사는 그 시로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인들의 소망이 끝장나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빌립보의 유력 회사가 망한 것입니다.
연쇄 부도가 났습니다.
그 때 그 마을 사람들과 주인들이 바울을 가만두었겠습니까?
사랑
그 때 그 지역 사람들이 이 여인의 어머니 마음을 품었더라면 이 주인들은 바울에게 찍소리 못했을 것입니다.
그 주인들이 바울의 멱살을 잡고 바울을 검찰에 끌고 갔을 경우 마을 사람들이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대형 플랭카드를 마을 여기저기에 걸어두었을 것입니다.
돈벌레들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쓰고 그 밑에 주루룩 이놈 저놈 그 주인 놈들의 이름을 써놓았을 것입니다.
피켓에 “네 딸이나 귀신들려라!”를 쓰고 시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주인 놈들이 씩씩거리며 바울을 검찰에 고발한 것입니다.
마을 사람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 검판사 놈들도 완전히 한통속이었습니다.
바울을 무조건 두들겨 패고 그를 감옥에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 어머니도 아무 소리 못했습니다.
마을의 정서와 공권력에 대들 생각을 애초에 못했습니다.
그랬다가 압색을 몇 번을 당하라고.......
거기에서 뜬금없는 바울이 그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을 대신했던 것입니다.
바울이 희생을 실천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그는 감옥에 갔습니다.
소망
바울은 매 맞고 착고에 채인 채 깊은 옥에 들어갔습니다.
등짝에서 피가 흐르고
손발은 착고에 채이고
거기는 깊은 감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모양으로 또 거기 감옥에서 무릎을 꿇고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기도도 했습니다.
기도했다고 하니 전능하신 능력으로 자신을 감옥에서 구해달라는 그런 기도가 아닙니다.
생각을 해봅시다.
그런 기도를 했더라면 바울은 옥문이 열리자마자 할렐루야를 외치면서 옥에서 튀어 나갔을 것입니다.
그 일을 두고 이 교회 저 교회 간증하고 다녔을 것입니다.
흐르는 피를 닦아 내며 찬양을 하니 지진이 났습니다.
지진이 나더니 옥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아니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역사였음에도 바울은 감옥 안에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어서 튀어나가!
하지만 바울에게는 감옥 밖이나 안이나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두들겨 맞은 것도.......
정말로 하나님 자체를 찬양한 것입니다.
제 원하는 대로 교회 땅을 반값에 사서 그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줄 우리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것이 신앙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 땅을 사기당해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소망을 이 땅에 둔 간수에게 바울의 기도와 찬양이 이해될 리 없었습니다.
바울의 소망의 주소지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믿음
간수는 깊은 감옥에서 뜬금없는 찬양을 두 귀로 들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며 간수는 몽둥이를 들고 일어선 것입니다.
아니면 칼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바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 이번에는 옥문들이 열리고 죄인들의 착고가 풀려버리는 일을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거창 교도소를 방문합니다.
죄수들을 만나기까지 한 대여섯 문들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 문들은 굵은 철근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 문들은 제 발이 문턱을 통과하는 것을 귀신같이 알았습니다.
내 발꿈치 1, 2Cm 뒤에서 철커덕 소리를 내면 굳게 잠귑니다.
섬세한 센써가 쇠문짝의 전기 모터를 돌리는 모양입니다.
바울이 찬양하자 대여섯 문들의 전기 모터가 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착고가 다 풀려버린 것입니다.
그 순간 간수는 나 죽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내 손으로 죽어버리려고 들고 가던 칼을 제 목에 들이댄 것입니다.
그 때 바울은 간수를 향해 달려간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31.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31)
예수님의 이름이 있는데 왜 죽어!
예수님의 이름은 귀신 들린 여인의 대안이었고 또 간수의 대안입니다.
간수도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다.
자신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여인을 향해 그 이름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더러운 귀신이 그 이름에 쫓겨가고 여인은 말짱해졌습니다.
그렇게 망해버린 주인들이 이 죄수를 끌고 온 것입니다.
이 간수가 이 사람 바울을 깊은 옥에 밀어 넣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도둑질을 한 것도 아닙니다.
강도짓을 한 것도 아닙니다.
성범죄를 일으킨 것도 아닙니다.
그의 죄의 내용은 이 빌립보 지역에서 들어보지도 못한 예수님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는 것입니다.
간수는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그 간수의 귀에 그 이름이 또다시 들렸습니다.
이 바울이 감옥 속에서 큰 소리로 예수님의 이름을 찬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향해 몽둥이를 들고 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이 상황을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자물쇠 착고 깊은 감옥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예수의 이름!
자신은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
옥에 갇혀 있던 사형수들도 틀림없이 탈옥했을 것입니다.
이제 자신이 사형을 당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이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으려 했는데 바울이 그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말린 것입니다.
29. 간수는 등불을 달라고 해서, 들고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서 "두 분 선생님,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행16:29,30)
간수 보기에 바울의 사는 방식이 자신이 사는 방식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 상황에서 바울에게 자신이 살아야 할 방식을 물은 것입니다.
31.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귀신 들린 여인에게 했던 바로 그 이름을 알려주었습니다.
한 마디에 여인에게서 귀신이 튀어 나가게 했던 이름!
그런데 그 예수의 이름이 칼로 자결하려던 간수를 돌변하게 했습니다.
그는 차라리 죽기를 원했던 사람이 소망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눈 앞에 상황이 변한 것을 하나도 없습니다.
스르륵 옥문이 다 닫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그가 바울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온 그 예수의 이름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외치는 예수님의 이름은 왜 이렇게 매가리가 없는가?
제가 교육 전도사였을 때입니다.
교회 학교 어린이들에게 뜨겁게 설교하고 의자에 앉았습니다.
아멘 할렐루야!
그런데 한 3학년 혹은 4학년 그런 아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올려다보며 이 말을 했습니다.
“전도사님, 거짓말이지? 맞지? 헤헤헤헤........”
저의 숨이 턱하고 막혔습니다.
40년 전 일인데도 똑똑히 기억납니다.
문제는 예수님 이름에 대한 믿음의 깊이입니다.
내 믿음의 깊이가 1Cm였다면 바울의 그 예수님 이름에 대한 믿음의 깊이는 바다와 같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내 남편 믿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설득시키려 하면 화부터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간수를 설득한 적이 없었습니다.
두 시간 전에 바울을 살벌하게 매를 때린 간수가 이제는 바울 앞에 엎어지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의 찬양을 하면 1절이 끝나면 옥터에 지진이 나고 2절이 끝나면 감옥의 문에 모조리 열려버렸던 것입니다.
간수는 일들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론으로 남편을 설득할 것이 아니라 고백의 그 깊이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31. 그들이 말하였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행16:31)
바울은 지금 간수에게 죽기는 왜 죽냐고 한 것입니다.
사랑
두 시간 전에 간수의 발길질 때문에 바울은 깊은 감옥 바닥에 피 흘리며 넘어졌습니다.
이제는 간수가 바울 앞에 넘어졌습니다.
간수는 정신이 아찔했습니다.
나에게도 그 예수님의 이름을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귀신들린 여인을 향했던 이름!
그 이름이 간수에게도 구원을 보장할 것입니다.
간수는 바울을 그의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일사천리였습니다.
간수가 집에 발을 디딘 순간 집안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먼저 식구들이 바울의 피를 물로 씻어주었습니다.
머큐롬도 발라주었습니다.
간수의 집에서 가족들에게 식사 대접을 받은 바울은 다시 감옥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제 발로 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간수는 옥문을 밖에서 걸어 잠궜습니다.
간수가 옥문을 잠그기 전 바울은 간수에게 내 손과 발에 착고를 채워달라고 내밀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보장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59. 사람들이 스데반을 돌로 칠 때에, 스데반은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60. 그리고 무릎을 꿇고서 큰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하고 외쳤다. 이 말을 하고 스데반은 잠들었다.(행7:59.60)
그 때 바울은 스데반을 돌로 치는 자 편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에 맞아 죽던 스데반이 바울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때만큼 놀란 적이 없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듣고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질 뻔했습니다.
‘저 사람은 딴 나라를 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스데반은 완전히 타인의 입장에 서서 제 죽음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그가 보았던 스데반의 그 희생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고난은 그들에게 임할 하나님 나라의 보증입니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
12.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5:10-12)
우리는 옥문 밖에서만 찬양하지 않았는가?
하나님께서 옥문을 열어두시면 무조건 튀어 나가서 간증하고 돌아다녔나?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것은 세상이 할 수 없는 다른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을 보았고 그 고난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있었던 것입니다.